나보코프는 소설을 읽을 때 현실의 감정이나 사건, 인물을 대입하는 것은 어리석은 독서라고 했다. 그걸 내가 하고 있다. 매번.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싫어지거나 좋아지는 건 그 인물의 행동이나 말에 내가 공감하거나 그 처지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장류진 작가의 소설집을 매우 경쾌한 기분으로 읽었기에 이번 단편 <연수>를 읽고 나서 이런 기분이 들 줄은 몰랐다. 이렇게 쓰리고 슬프고 조금은 화나는, 억울한 기분. 주인공의 엄마나 주위 사람들이 예의 없이 결혼 혹은 결혼, 아니면 또 결혼문제를 채근하는 건 나도 싫었다. 그런데 지역 엄마들 인터넷 카페에서 정보를 얻고 연수를 받으면서, 잠시라도 '애엄마'인양 이름을 달면서 내내 '애엄마'에대한 적의와 무시를 품고있는 주인공의 행동도 예의가 없다. 연수 선생님을 비전문인으로 의심하고 비용에 대한 의무/시간을 지키지 않는다 예단하면서 자신의 계약 연장을 무슨 시혜라도 되는양 내민다. 그리고 거절 당하자 당황하지만, 여기서 반전. 선생님은 수업을 야무지게 마무리한다. 나이쓰.
주인공이 선생님에게서 갑자기 쎄한 기분을 느낀 건 멋진 건물에 전문직 여성 상사가 있다는 얘길, 그것도 많다는 얘길 한 다음이다. 쓸쓸하게 (이건 내 감정 이입) 휴대폰 화면을 만지는 선생님, 거기에 자신의 엄마를 겹쳐 보는 주인공. 중년의 여성은 주인공에게 아무 의미가, 가치가 없다. 연대도 당연히 없다. 만약 여성 상사가 진짜 많았다면, 주인공이 더 생각하고 행동하는 법을 회사에서 배웠을지도 모른다. 주인공이 25살, 이른 나이에 전문직에 들어섰을 때, 엄마가 '50평생 제일 잘한 일'이라고 매우 아줌마스럽고 매우 애엄마스러운 말을 했을 때, 엄마는 그 25살에 주인공을 낳았다는 걸 생각해 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줌마, 애엄마에 그 궁상맞고 더러운 팬티 이야기 까지 한 패키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며 이렇게 게으르고 성급하게 범벅으로 담아 놓지 않았겠지. 그리하야 어느 서늘한 사월, 아줌마 마음에 서리가 내릴 일도 없었겠지. 어리석은 감정 이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