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 표제작 <나의 피투성이 연인>과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있는 작품집이다. 2004년 봄에 나왔던 책이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시리즈로 새로 나왔다. '사각사각'이라는 네이버 오디오클립 방송 추천에 솔깃해서 읽었는데 방송도 책도 재미있었다.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4737/clips/4


다만, 이 책은 15년 이상 예전 책이고 시대는 90년대가 배경인 탓에 어정쩡하게 요즘 이야기인데도 어쩐지 촌스럽고 빻은 설정도 빠지지 않으며 펄떡대는 생생함과 작가 첫 책 다운 투박함, 이 모든것이 함께 한다. 


제일 긴 분량인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남편 사후에 발견되는 메모에서 불륜의 흔적을 발견하는 부인의 이야기다. (비슷한 설정의 편혜영 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부인은 어찌할 수 없는 분노에 고통을, 이유 없는 간지러움, 피부병으로 앓는다. '호텔 유로'는 자제력을 잃고 신용카드를 쓰다가 모르는 상대를 호텔에서 만나 성매매를 하기로 하는 주인공을 보여준다. '성스러운 봄'은 아이를 잃은 보험사 직원이 대학교수의 교통사고 보상금에 대한 상담을 하는 장면과 아이의 투병생활을 엇갈려 묘사한다. 서서히 밝혀지는 사고의 증거가 에어백에 남은 그것이라니 실망스럽기도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비소여인'은 화자인 남자가 여주인공 연과 만나는 장면부터 영 설득되지 않고 어색하기만 했다. (금자씨 연상되었고요) 제목 부터, 인물의 묘사나 전개가 너무 급하고 안타깝다. '나릿빛 사진의 추억' 역시 급하게 비약을 한다 싶었고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는 그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런데 책이 재미있다는 게 함정. 소설의 문장은 매우 공들였고 차분하다. 깡패들이 나와서 설치고 패악질을 부리는 인물이 나와도 우아한 문장이 눌러주기 까지. 


여주인공들은 경제적으로 안락한 상대를 만나 결혼을 하기 직전에 주위를 정리하거나 주변의 '인간적인' 환경 혹은 다시 겪을 일 없는 서민 동네에 시혜적인 시선을 던진다. (나릿빛 사진의 추억,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하지만 결혼 생활이 끝났을 때 여자는 더할 수 없는 상실감, 혹은 배신에 고통 받고 그 고통은 경제적으로도 이어진다. 여자는 자립할 능력이 없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 호텔 유로) 생명은 경제적 단위로 치환되고 (성스러운 봄, 비소 여인) 그저 낭만적 장치이기도 하며(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 생생하게 살아있는 몸이기도(나의 피투성이 연인, 나릿빛 사진의 추억)하지만 성장하거나 변화하지는 않는다. 인물들 끼리의 대화체가 어색해서 70년대 영화를 보는 기분도 들었다. 90년대면 그렇게 옛날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아, 20년이 넘었으니 오래된 게 맞다. 예전에 윤대녕의 소설을 읽다가 '빨간 스포츠카'를 탄 여자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뿜었었는데, 이 소설집 역시 군데군데 옛 세대의 복학생 패션 같은 정서가 남아있기도 하다. 갑작스러운 성애나 뜬금없는 폭력 장면들. (성스러운 봄, 에서 아이가 죽은지 채 한 달이 되기 전, 화자 '나'는 직장 회식 2차로 간 나이트에서 부킹으로 만난 여자와 호텔로 간다. 피임도구가 없다고, 행위가 투박하다고 여자가 '한국남자는 이래서' 라며 짜증을 거푸 내자 남자는 여자의 뺨을 때리고 욕을 한 다음 방을 나와버린다. "ㅆㄴ, 이게 말끝마다 한국남자야. [...] 이게 뒹굴어봤자 동남아 놈이지." 이런 게 극한 괴로움으로 내몰린 남자의 몸부림으로 소설에 들어있다.) 그래도 아직은 서민과 상류층 사람들이 어느정도 겹치는 시대의 이야기. 덜 각박하고 더 끈적거렸던 시대, 그래도 마음 속을 들여다 보려고 애쓰던 시대의 이야기다. 어쩌면 사회 엘리트였던 작가가 서민층에 대해서 고정된 시선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재미있다는 게 함정, 아니 매력이다. 


작가의 사후에야 그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는 게 많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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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8-11 2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분명히 읽은 책인데 기억이 안 나요. 기억이..전혀.. ㅠㅠ;;;;;;;

유부만두 2020-08-11 21:03   좋아요 0 | URL
표지가 바뀌어서 그런가봐요....
폰트랑 편집도 많이 달라졌어요... 세월이 얼만데요.
(로마사가 쎄서 그럴 수도 있고요)
 

연상작용
<쓰레기에 대한 모든 것> 표지는 2018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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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빚 대신 다섯 살에 부잣집에 팔려온 수아. 또래 아가씨 몸종으로 십년 이상을 작은 세상에서 살았다. 일제강점기에 주인댁이 군산에서 떵떵거리고 아가씨가 고운 양장을 입어도 그저 뭐 어쩌랴 싶은 마음이었다. 별 걱정 없이 바다에서 수영하고 살뜰하게 아가씨를 모시면 그만이었다. 글 모르고 나라 걱정 안하고 그냥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바닷가에 쓰러진 그, 의현을 만나면서 모든 것이 바뀐다. 


그림이 아주 아주 예쁘다. 네이버 연재 웹툰을 책으로 묶어냈고 커다란 그림은 살려서 편집했다. 인어공주 이야기를 우리나라 1920년대 말에 가져다 놓았다. 천천히 전개되는 이야기와 뻔한 감정선에 민망하지만 (반하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얼마나 쉬운지. 선남선녀 나오면 일단 사랑의 작대기를 긋고 보는것이제! 제목 안봤소?! 경성의 인어공주 이야기! 이거슨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여! 나가 소녀 감성이지만, 원 인어공주가 왕자넘 심장을 조사노치 않은 건 화가 나는구먼. 여그 이 인어 수아가 어쩔랑가는 아즉 모르것지만.) 예쁘다. 이렇게 곱고 예쁜 그림으로 비극으로 치닫는다. 나라 잃은 사람들에겐 사랑도 사치이며 비극이고 독립 투쟁에 목숨을 걸고 매일매일이 불안하다. 하지만 예쁜 그림으로 하는 투쟁은 절절하고 낭만적이다. 그들 개개인들의 사연들이란... 


얼마전 봤던 그래픽노블판 <아가미>보다는 더 마음에 들었고 인어공주의 다른 해석 <인어소녀>도 떠오른다. 글배우기 모티브는 영화에도 있었지. 그런데, 자꾸만, 군산집의 아가씨와 수아가 예쁜 컷 안에 함께 있으면 영화 <아가씨> 같이 보여서 다른 게 생각나고 그랬다니까?;;;; 


비가 와서 더 오락가락하는 내 감성. 습도가 높으니 내 아가미도 열릴 것만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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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6 22: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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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7 10: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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