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철도와 마천루 건설에 중국 노동자들이 많이 동원되었다는 것은 세계사 시간에 배웠다. (1865년 노예제 폐지의 영향도 크다) 홍콩 역사 박물관에도 '쿨리'의 역사 전시관이 따로 마련되어있다. 1800년대 후반에는 아이다호 광산촌에 중국인 남성노동자 인구가 많았다고 한다. 1882년 중국인 배제법이 제정되고 백인과의 결혼도 금지되어서 이들 남성노동자 무리는 2차대전 중 모두 사라졌다. 아직도 아이다호 광산촌에서는 중국식 설날을 축하한다고 한다. 켄 리우의 단편 <모든 맛을 한 그릇에 - 군신 관우의 아메리카 정착기>는 1860년대 아이다호시티에 등장한 중국인 광부 무리를 둘러싼 이야기다. 


떠돌이 백인 범죄자 듀오가 화재와 강도질을 하며 아이다호시티를 흔들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어서 이 백인 범죄자들은 이 지역의 잠재적 위험이다. 하지만 이질적인 외모의 중국인 남자들 무리가 더 도드라져 보인다. 그들은 좁은 공간에 빼곡히 모여살고 텃밭에 이런저런 야채를 키워 먹고 자기들 끼리 이상한 악기를 켜며 노래를 하고 향도 기이한 (하지만 침 고이게 하는) 음식을 해먹는다. 부지런한 이들이 세들어 살아줘서 고맙고 반가운 여관집 주인 잭 시버. 그는 동부에서 교사를 하다가 남북전쟁 후 혼란한 시기에 새로운 인생을 자기 손으로 이루고 싶어 동부에서 처와 딸을 데리고 이주한 사람이다. 한가한 저녁에 딸과 함께 그는 아일랜드 민요 '피네건의 경야'를 부른다. 초등학생 딸 릴리는 편견이 없는 마음으로 중국인 아저씨들을 관찰하고 조금씩 친해진다. 특히 붉은 얼굴에 긴 수염을 가진 거구의 아저씨는 무서운데 은근 친절하다. 사람들은 그 아저씨를 로건, 라오관(관씨 형님)이라고 불렀다. 중국 옛이야기의 관우라고도 했다. 농담이라는데 진담같다. 


혼란한 미국 19세기 말에 중국 삼국지 이야기가 겹친다.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 싸우고 자신의 이야기를 만드는 장생/관우는 새로운 땅으로 온 중국인 노동자들에겐 정신적 구심점이며 신이었다.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이지만 선배들이 (여관주인도 아일랜드 출신) 크리스쳔 문화와 질서를 내세우며 후배들을 착취하고 중국인들을 향한 인종차별은 끔찍하다. 로건은 릴리와 친해지면서 관우와 한나라 해우 공주가 '오랑캐' 나라로 시집가서 적응하는 이야기도 한다. 모두가 새 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는 사람들이다. 릴리와 바둑을 (과일과 채소 씨앗을 돌 삼아) 두면서 로건은 상처를 꿰매기 까지 하는데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는다 (화타가 뼈를 깎던 것 보단 안 아프다며). 릴리는 접질린 발목에 침을 놓는 경험도 한다. 릴리네 가족과 마을 사람들은 조금씩 로건과 노동자들과 가까워지고 그들의 음식을 맛본다. 제목처럼 이 소설은 중국 음식 소개와 중국 노동자들의 미국 이민사를 보정을 많이 넣어 희망적인 결말을 그린다. 작가가 11살에 미국으로 이민한 것을 생각하면 그에게도 중국은 이야기와 음식의 중국이며 미국은 기회와 성공의 땅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지난 7월부터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는 연구소 대학에서 중국과 다른 6개 위험 국가에서 유학 온 대학원생과 연구원 고용을 금지했다. 1882년 중국인 배제법과 다를바 없다.

A new state law is thwarting faculty at Florida’s public universities who want to hire Chinese graduate students and postdocs to work in their labs.

New Florida law blocks Chinese students from academic labs | Science | AAAS


얼굴이 벌건 그 중국 사내는 일하는 동안 거치적거리지 않도록 텁수룩한 수염을 길게 접은 손수건으로 묶은 다음, 손수건 공지는 셔츠 속에 넣은 모양새 였다.

로건의 왼쪽 어깨가 터져 나갔다. 손홍색 피 보라가 등 뒤로 흩날렸다. 따가운 햇살 때문에 릴리의 눈에는 로건의 등 뒤로 장미가 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 시간이 정지한 것만 같았다. 피 보라는 공중에 아로새겨진 채 흘러내리지도, 퍼지지도 않았다.

"어릴 적에 나는 세상에 오로지 다섯 가지 맛만 존재한다고 배웠다. 그래서 세상 모든 기쁨과 즐거움은 그 다섯 가지 맛을 서로 다르게 섞은 것인 줄 알았지. 나중에는 그게 사실이 아니란 걸 알았다. 모든 곳에는 그곳만의 새로운 맛이 있어. 그리고 미국의 맛은 위스키야."

"이야기라고 다 지어낸 건 아니다."

대접에 든 밥 위에는 빨간 소스로 덮인 깍둑깍둑 썬 두부와 돼지고기, 그리고 파와 얇게 썬 여주를 곁들여 구운 검은색 고기가 올려져 있었다. 뭔지 모를 매콤한 향신료에서 풍기는 냄새에 릴리는 눈과 입에 동시에 물기가 돌았다. [...] 릴리는 두부를 조금 더 씹다가 "으아악" 비명을 질렀다. 얼얼한 느낌이 갑자기 조그맣고 뜨거운 바늘 수천 개로 변해 혀를 온통 찔러댔다. 콧속에 콧물이 가득한 느낌이 들었고, 눈앞은 눈물 때문에 뿌예졌다. [...] "그건 마라 라는 맛이다. 촉 땅의 이름을 중국 전역에 알린 얼얼한 매운맛이지. 조심해라, 그 맛은 사람을 살살 꼬드겨서 먹게 해 놓고는 입안 가득 불을 질러 댄다."

섣달그믐 이틀 전, 아옌은 설날 당일에 먹을 만두 수천 개를 만드는 작업에 모든 중국인을 투입하고 지휘했다. 판잣집 거실이 만두 공장의 조립 라인으로 변신하여 몇 명은 한쪽 끄트머리에서 밀가루를 반죽했고, 몇 명은 다진 돼지고기와 새우와 잘게 썬 채소에 참기름을 살짝 쳐서 만두소를 버무렸으며, 나머지는 만두소 한 숟가락씩을 만두피로 싸서 입을 다문 조개 모양으로 조물조물 빚었다. 다 빚은 만두는 양동이에 꽉 채우고 말린 연잎으로 덮어서 추위에 꽁꽁 얼도록 바깥에 내놓았다. 펄펄 끓는 물에 넣어 익힐 설날 전야를 기다리며.

"나는 여기서 마침내 세상의 모든 맛을 찾았다. 그 모든 단맛과 쓴맛, 위스키 맛과 고량주 맛, 거칠고 아름다운 남자들과 여자들, 그들이 지닌 야성의 흥분과 불안, 아직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대지의 평화와 고독... 한마디로 말해 정신을 고양시키는 짜릿한 맛, 그게 바로 미국의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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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24-01-05 14: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저 법이 말이 되는 것인지! 진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내년 아니 올해 대통령 선거도 걱정이고 ㅜㅜ

유부만두 2024-01-05 16:26   좋아요 0 | URL
정말 저 뉴스보고 가짜 뉴스인가 싶었어요. 플로리다 정말 우리나라 대구경북이다.
근데 미국 걱정 할 때가 아님니다. 저 하도 복장 터지는 날들이 이어져서 그냥 뉴스 안보고 살려고 노력 해요.
 

또 옛이야기 찾아 본 감상문.

스티븐 킹의 페어리 테일에는 저주 받고 추방된 공주님이 나온다. 공주님의 현직업은 거위 치는 소녀, 구스걸. 이 이야기의 원전 그림 동화에선 여왕이 보물과 수행 시녀, 말하는 말 팔라다를 딸려 공주를 다른 나라로 보낸다. 아마도 시집 가는 길? 하지만 공주는 어머니 여왕이 준 소중한 물건을 잃고, 보물과 옷 그리고 신분을 시녀에게 빼앗기고, 시녀가 냉큼 왕자랑 결혼하며 말하는 말의 목을 베고 공주에게 비밀 약속을 강요한다. 그리고 공주 자신은 초라한 신분이 되어 힘없이 거위를 친다. 거위 칠 때 동료? 소년은 자꾸 찝적거리고 공주는 거절하고 피한다. 공주는 매일 말의 잘린 목을 끌어안고 (아...악) 슬퍼하지만 (말馬은 목을 베었지만 말言은 계속 한다) 그 이유를 묻는 왕에게는 약속 때문에 말을 못하지만 대나무숲 대신 솥단지에다 대고 인생역전 썰을 푼다. 그리고 그걸 다 들은 왕은 괘씸한 며느리에게 잔인한 벌(그것도 옛시녀 자신이 셀프로 고안함)을 내리고 진짜 공주를 새며느리로 들인다. 그런데 왕자는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는군.

이 책에선 이 이야기가 자율성을 획득하게 되는 성장담을 보여준다고 한다. 시녀는 공주의 것을 선점, 탈취하는 나이 많은 존재, 즉 오이디푸스적 해설을 하자면 딸에겐 엄마, 아들에겐 아빠가 된다. 하지만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강탈하는 행위를 바라는 게 바로 자신들임을 깨닫고 그런 생각을 포기하게 된다고. 딸이 제대로 크면서 아빠를 원하지 않게 되고 딸의 위치를 받아들이게 된다고. 하지만 중요한 건 딸/공주가 자기 확신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시녀에게 자신의 아이덴티티와 보물 등을 다 빼앗겨버린다. 또한 옛이야기의 특징 중 하나인 잔인한 벌은 독자, 특히 어린이에게 안정감을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주인공의 고난과 노력 후에 오는 성공은 그 자체는 이야기 저변의 불안, 악의 존재를 없애지 못하기에 극도의 보복 같은 징벌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살벌한 벌의 묘사가 강렬하게 남는다는 걱정은 안하시나봐요? 난 젓갈 담긴 팥쥐랑 그 엄마 얘기가 콩쥐가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 보다 더 진하게 생각난다.

거위 치는 소녀는 스티븐 킹의 소설에선 약속 대신 저주로 말을 못하고 마법의 말 팔라다가 (목이 잘리지 않아서) 공주의 말을 대신 한다. 그리고 여기선 시녀도 충실하게 그 곁을 지킨다. 킹의 구스걸은 왕국을 탈환하는 액션, 악의 근원과 싸우는 결단을 내리기 까지 시간이 걸린다. 자꾸 회피하는데 찰리가 옆에서 용기의 불쏘시개가 된다. 피한다고 지금의 고난이 없어지지 않는다. 결국 해야한다. 그것도 남에게 기대지 말고 내가 내 손으로. 공주도 아니면서 돌볼 거위나 말하는 말도 없으면서 이 공주에게 과몰입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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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2-13 0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약 아이들이 이 스토리를 읽게 된다면 동심은 깨질 듯하네요.ㅠㅠ

유부만두 2023-12-13 07:28   좋아요 0 | URL
네. 원전 옛이야기들은 잔인한 부분이 많더라고요. ㅜ ㅜ

호시우행 2023-12-13 09: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잔혹동화란 용어를 싫어 해요.

유부만두 2023-12-13 16:20   좋아요 0 | URL
동감입니다. 가학적인 느낌이 들어요.
 

팔스타프 님의 추천으로 읽었다. 함께 추천하신 오페라 <외투>의 영상을 보고 도밍고의 노래도 듣고 했더니 유진 오닐의 극을 이미 읽은 기분 마저 들었다. 하지만 <애나 크리스티>와 <외투>는 다른 작품이다. 배경이 되는 나라도 다르고 바지선의 의미도 다르고 무엇보다 결말이 아주 다르다. 하지만 등장 인물들은 서로 매우 닮았다.


다섯 살 이후 만나지 못한 아버지를 만나러 뉴욕의 한 술집으로 오는 애나. 스웨덴에서 이민와 미국 중서부 농촌에서 성장해 이십대 초반인 그녀는 이미 몸과 마음이 망가져 버렸다. 바다와 남자, 무엇보다 이 둘을 합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가득이다. 하지만 순진하게도 딸이 와서 기쁜 바지선 선장 오십대 크리스. 그는 문제가 생기면 맞서 해결하기 보다는 도망 가거나 숨기는 스타일. 함께 지내던 사연 많은 여인 마티는 눈치를 채고 바로 퇴장한다. 크리스는 뒤늦은 아버지 행세를 하려들고 애나는 마음을 열지 않는다. 하지만 바다가 조금씩 안개와 함께 바지선에 사는 그녀에게 스며든다. 


폭풍우가 치던 밤, 몇 명의 난파선 선원들을 구출하게 된다. 그중 웃통을 벗은 떡대 맷 버크는 애나에게 반하고 청혼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바다와 뱃사람보다는 뭍의 농장을 높이 치는 크리스는 맷을 반대하고 그 사이에서 애나는 갈등한다. 아버지와 맷 둘다 애나의 '소유권'을 주장하는데 애나는 폭발한다. "내가 내 주인이야!" 애나는 아버지와 다르다. 애나는 문제를 덮지 않고 밝힌다. 나 이런 과거가 있어, 하지만 널 향한 마음은 진심이야. 놀란 크리스와 맷. 맷은 분노하며 애나를 죽이겠다고 날뛴다. 자신의 비겁함과 이중 잣대는 뭉개면서 애나의 과거를 저주하고 윽박지른다. 크리스는 이번에도 덮고 도망가기 바쁘다. 그럴리 없다 없다 없다 술이나 마시자. 크리스나 맷이나 똑같은 뱃놈들. 결국 바다와 남자 때문에 이런 인생 이런 결말이라니. 인물들 모두 자신이 제일 불쌍하고 힘들고 소중해서 다른 사람은 돌아보지 않는다. 세 명 모두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소리지르고 울고 뒹군다. 그나마 생각을 조금 더 할 줄 아는 애나는 가방을 싼다. (알고보니 다른 두  남자들도 가방을 싸고 있었음)


그리고 <외투>와 닮은, 하지만 아주 다른 결말로 4막이 채워진다. 팔스타프님 따라 나도 안 알려드림. 


유진 오닐의 극은 소설 읽는 재미를 주는 지문이 많다. 인물 표현은 연출과 배우 몫이겠지만 독자들도 연극 공연장에 있는 기분이 든다. 크리스가 함께 지내던 여인 마티는 "남자 같은 목소리로 커다랗게 이야기하다가 끝에는 거친 웃음을 한바탕 웃으며 마무리 한다. 핏발이 선 푸른 눈에는 고단함이 꺾지 못한 삶을 향한 젊은 욕망이 있고, 조롱이 섞였지만 착한 심성에서 우러난 유머 감각도 있다." 과연 이 여인은 젊고 고단한 애나와 얼마나 겹치는가. 


백 년 전 남자들 맷과 크리스의 대사를 읽다보면 복장이 터지지만 참고 읽다보면 바지선이라는 장소가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깨닫게 된다. 안개가 자욱한 바다, 그 위의 바지선. 극을 다 읽었는데 어쩐지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수습될 사람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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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2-11 16: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우, 이 장면 함 보셔요.
https://youtu.be/46ybS7cebuU?si=ZPbdNmD-JO0iLMgf
그레타 가르보가 애나 역을 하는, 그레타 역사상 최초의 유성영화 장면이랍니다.
전 이 영상 보기 전까지 가르보의 매력을 거의 몰랐답니다. 맨인블랙에선 그레타가 외계인이라고 하잖아요. ㅋㅋㅋ

유부만두 2023-12-11 17:0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안그래도 뒤에 해설을 읽고 그 영화가 궁금했더랬어요!
 

고전동화집에 실린 이야기 중에서 낯선 이야기 하나 더.

“미녀 바실리사”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에 재혼한 아버지, 새어머니와 의붓 언니 두 명과 산다. 상인인 아버지는 자주 집을 비운다. 바실리사의 친엄마가 돌아가실 때 마법의 인형을 주며 힘든 일이 생기면 이 인형에게 ˝밥을 해 먹이고 고민을 이야기하면 된다˝고 했다.

팥쥐네처럼 새어머니와 언니들은 바실리사를 구박하고 힘든 일들을 시킨다. 그때마다 콩쥐처럼 바실리사는 비밀 인형을 잘 모셔 도움을 받는다. 밭을 갈고 청소를 하고 물을 길어오는 일은 다 이 인형이 해준다. 몰래. 어느날 새어머니는 바실리사에게 ˝불을 구해 오라˝며 마녀 바바 야가에게 보낸다. 바바 야가는 러시아 민담에 전해 내려오는 마녀의 이름이라고 한다. 사놓고 어딨는지 모르는 나의 바바야가의 밤 책이 이제야 생각난다.

숲속의 마녀는 새어머니랑 똑 같이 군다. 힘든 집안일을 시키고 구박하는 데다 잡아먹겠다고 위협까지 한다. 이때에도 콩쥐 아니 바실리사는 적은 음식이나마 인형에게 주고 도움을 받는다. 결국 마녀 바바 야가는 해골에 담긴 불을 내주고 바실리사는 집으로 돌아간다. 정의의 불로 새어머니와 새언니들은 불타 사라진다. 만세! 아버지는 죽었던가 어쨌던가 존재감이 없다. 돌아와봤자 새장가나 들고 자식들은 보살피지 못할 놈. 자유로워진 바실리사는 마을의 한 할머니와 살면서 고운 실을 잣고 고운 천을 만든다. 인형의 마법은 베틀을 마련하는 데 까지만 작동한다. 이야기에서 거의 처음으로 바실리사는 자기 손과 노력으로 실과 천을 만든다. 왕에게 진상된 이 훌륭한 천은 다시 바실리사가 손수 옷을 만들고 그녀의 뛰어난 솜씨와 더 뛰어난 미모에 반한 왕은 그녀에게 청혼한다. 그녀는 자기를 거둬준 마을의 할머니와 그 비밀의 인형을 끝까지 잘 보살폈다고 한다.

바바 야가와 나중의 할머니는 결국 동일인 아닐까. 혼자 사는 할머니, 불쌍한 여자 아이를 거둬서 원하는 복수와 중매를 해주는 사람. 낮에는 뭐가 바빠서 밖에 싸돌아 다니고 밤엔 외딴집에 돌아와 약초를 빻고 불씨로 뭘 만들고 밥먹고 식곤증으로 쓰러져 자는 사람. 요술 인형을 남겨준 친엄마도 그런 이상한 할머니의 도움으로 성장했던 이전 세대의 콩쥐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요술 인형은 딸을 낳으면 전해주는 도움의 손이지만 결국 엄마는 일찍 여의게 되는 저주가 아닐까. 인형은 일은 해주지만 먼저 밥을 차려줘야 하니까 귀신주머니 같은 느낌도 든다. 만약 밥을 주지 않는다면 인형은 대신 뭘 먹을까. 그나마 왕이 받는 소녀의 천과 옷이 인형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은 마음에 든다. 만약 그게 인형의 작품이었더라면 결혼 후 인형이 ˝내 왕비 자리 내놔˝라며 소녀에게 때늦은 정산을 요구했을지도 모른다. 뭔가 반전 혹은 뒷통수가 있을까 겁먹었는데 이 인형은 의외로 현명한 조언으로 미녀 바실리사에게 조언한다. ˝저녁을 먹고 기도를 하고 잠을 좀 자두도록 해요. 아침이 되면 밤보다 현명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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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작가의 신작. 역사 탐정물. 금성은 행성이 아니라 옛 경주. 


작가의 전작을 생각하고 표지를 보면 가볍고 행복한 이야기이리라 넘겨짚기 쉽다. 하얀 매가 야무진 눈매로 칼 자루 하나와 센터를 차지하고 있다. 불상, 승려, 말탄 (늙은) 군인 등이 소용돌이 있는 물 위에 떠있다. 저 멀리 황룡사 9층탑이 보인다. 


때는 7세기 후반, 나당전쟁 이후 통일 신라시대. 오랫동안 당나라 유학(이지만 혼란한 국제 정세에 고생고생)을 마치고 관리 선단에 끼어 신라의 수도 금성으로 돌아오는 이십대 (나약한 체격의) 설자은. 책의 뒷면에 나와있듯이 자은은 급사한 오빠 대신 남자가 되어 당으로 가 공부를 했고 여전히 오빠의 이름으로 돌아왔다. 들키면 죽는다, 심정으로 배에 올라 책 상자를 껴안고 있다. 그런 그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백제 출신 자칭 장인 목인곤. 그는 자은이 여자인 것을 알아채지만 별 내색없이 그 옆에 머문다. 통일신라 시대의 (여성) 셜록과 왓슨의 탄생. 


책은 네 편의 이야기, 즉 네 건의 사건과 자은과 인곤의 활약을 그리고 있다. 비슷한 남장 여인의 탐정 이야기(로 볼 수도 있는) "사라진 소녀들의 숲"이 생각났는데 허주은 작가가 환이의 남장을 일찍 풀고 비단 치마를 입히며 암행어사에게 의존하게 만든 것과는 달랐다. 자은은 계속 남자로 남는다. 그리고 다른 남자에게 의존하는 대신 목인곤을 수하로 부린다. 하지만 여기 실린 네 편의 사건 중 적어도 셋은 여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여성의 이야기다. 여성 인물들은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각자의 목소리를 내(려 노력하)고 있다. 


코난이나 김전일이 가는 곳마다 살인이 벌어지듯 자은 옆에도 사람이 죽어나간다. 그리고 그 죽음의 배후에는 이야기가 있다. 배에서 죽은 상인은 정말 사라진 그 여인의 아비였을까? 어떤 여인은 사랑의 시작과 끝을 자신의 손으로 결정해야 직성이 풀린다. 전설적 장군이 정말 손바닥에 저주 문자가 뜨면서 전쟁의 업을 치르는건가? 여성들의 베짜기 연례축제가 어떻게 여인들에게 탈출구가 되는가? 베틀을 부순 범인은 누군가? 문무왕의 매지기는 어떤 죄를 지었는가? ... 문무왕에게 매란? 자은에게 자유란? 유부만두에게 정세랑이란?


자은은 용감하고 예리하게 그 이야기들의 실마리를 잡아 차근차근 사건을 풀어놓는다. 결코 서둘지 않고 절대로 으스대지도 않는다. 범인들은 의외로 간단하게 드러나는데, 자은은 처벌과 공개보다는 범행 동기와 뒷수습에 더 집중해 배려한다. 셜록과도 조금 다르다. 


이 책의 마지막 이야기에선 표지의 매와 자은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한다. 그리고 이 책이 설자은 통일 신라 탐정 시리즈의 대망의 첫 권이라고 선언한다. 자자잔!!!! 1권의 많은 부분이 시리즈의 설정과 밑밥이다. 옛정인, 집안 사정, 정치적 긴장, 밉상 고관대작 다 그려진다. 작가의 섬세함과 대범함이 보인다. 길게 갑시다, 작가님. 한 스무 권? 


표지가 조금만 덜 귀여웠더라면, 책소개 방송 등에서 정세랑 작가가 조금만 더 묵직하게 힌트를 줬더라면 더 일찍 이 책을 읽었으리라. 기대이상이라 깜짝 선물 받는 기분으로 읽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거인 왕 문무왕의 시대가 멀지 않아 끝나고 더 많은 사건들이 나올 걸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뛴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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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3-12-07 1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겠어요! 정세랑!!!!!!!!!!!!!!!!!!!!!!!

유부만두 2023-12-07 12:11   좋아요 1 | URL
재밌는 탐정 소설이에요. 피도 나고 서람도 죽어요. (경고 했으니 나중에 무서웠다고 불평 마세요, 너무 겁먹지도 말고요. 스티븐 킹만큼 음산하진 않으니까요)

psyche 2024-01-05 15: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난 금성이 하늘에 있는 저 금성인 줄 알고 SF 라고 생각했지. 역사 탐정물이라니 재미있겠다!!

유부만두 2024-01-05 16:28   좋아요 0 | URL
재밌어요. 표지 보면 청소년 소설 같은데 아니고요. 꽤 공들여서 시리즈 빌드업 하는 거 같아요. 드라마로 만들어도 좋겠다 싶어요. 문장도 인물들도 좋아요.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