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가리타가 출판하려 그리 애쓰던 원고가 너무나 역사 기록처럼 보였고 예수와 본디오 빌라도를 실존 인물로 그려냈다면 그 원고는 장성주 번역가의 설명하는 '대체역사'물이다. 오늘 새벽에 읽은 켄 리우의 단편 <북두>는 선조가 의주까지 버리고 몽진을 한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 황제의 명(혹은 승인)을 받고 조선으로 진군하는 이여송과 활동대장 담원사의 이야기, 대체역사이다.


이여송은 명과 조선 국경에 머무르고 있다. 한차례 일본군에 당한터라 명의 원군이 필요하다. 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명에게 득인지 실인지 멀리 떨어진 북경에서 소년 황제는 신중하게 판단한다. 일본군과 조선의 입장을 제대로 계산하는 명석한 담원사는 잠복해서 평양까지 진격하는 작전을 편다. 한편 조선인 출신 이여송은 전라에 있는 이순신과 협공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짧은 이야기라 더 소개하기 조심스럽다. 


역사 이야기는 결말을 안다. 많은 독자는 이순신을 당연히 알고 임진왜란과 이여송도 안다. 그 역사에 얼마나 가상의 창작 요소가 매끄럽게 들어가 있는지가 이 소설을 읽는 재미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흑뢰성>에서처럼 역사 속 며칠 몇달을 작가가 종이와 펜/컴퓨터 모니터와 자판으로 살아내고 상상해서 우리에게 선사한다. 잠깐, 그 사이에 번역가가 있다. 이번 경우에는 장성주 선생. 원작 영문에서 다음 문장을 만들었다.


"적호(담원사의 애마)가 내뿜은 숨결이 달빛 속에서 섬뜩한 흰빛을 띠고 두 사람의 주위를 감쌌다." (북두, 291) 


임진왜란과 21세기 한국 독자 사이에 긴 시간, 중국에서 미국으로 어린 시절 이민 간 작가 켄 리우, 그의 영어 원고, 장성주 역자의 작업 등이 다 얇디 얇은 막으로 변해버렸다. 난 지금 적호의 숨결과 담원사의 긴장을 느낄 수 있다. 그가 현대 한국말을 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번역의 힘. 


작가 켄 리우는 이 가상 역사에서 실제 역사를 참조는 했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옛 중국 명과 지금(2010년 출간 당시 한참 쭉 쭉 뻗어나가는)의 중국을 칭송하고 있다. 그의 다른 작품 <민들레 왕조 연대기>는 초한지의 sf적 재해석인데 (한신이 여성으로 나온다니 궁금하다) 이 단편 <북두>는 아마 그 연장선으로 쓴 소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초한지 소재와 삼국지 소재가 많이 보인다. 명의 평화를 사랑하는 황제, 시기를 앞선 과학영재 담원사, 용맹한 조선 출신 명 장군이 나온다. 하지만 이여송은 조선 출신 가문일 뿐이지 그가 분한 마음에 조선어 욕설을 할 정도로 조선에 가까운 사람은 아니다. 더해서 이순신 장군이 그에게 조선어 편지를 보냈을리가. 일기도 한자로 쓰신 분이. 켄 리우에게 조선어/한글은 한자와 격차를 둔 다른 전달 체계인 것이다. (야! 너!) 다시 역사와 나 사이의 거리가 벌어진다. 켄 리우가 대국 중국 출신 대국 미국인 작가인 자기 존재를 드러내버렸다. 우리말 번역가 측에서도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이순신 장군께서 전라도 앞바다에서 왜군의 보급선과 수송선을 모조리 격침하시지 않았다면, 풍신수길은 이미 한 달 전에 압록강을 건넜을 것입니다. 나흘 전에 이순신 장군을 뵈었는데, 장군께 안부 인사를 전하시더군요." (북두, 286)


명의 군인이 자국의 장군에게 보고를 하며 타국의 장군을 이렇게 높이는 것은 바른 화법이 아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원군이랍시고 와서, 그것도 조상이 조선 사람이라는 인물이 열심히 싸우지도 않고 여러 잡음만 일으킨 인물에게 이순신을 낮추어 언급하기 싫었으리라. 독자인 내 마음도 그랬다. 그래서 영특한 담원사의 계책을 우리 번역문으로 읽으면서 자꾸만 나는 한산과 명량을 떠올렸고 장성주 역자의 문장에서 김훈을 보았다. 역시나 번역서는 번역서이고 번역가의 창작 활동 없이는 담원사의 "코드 네임 북두"도 제 빛을 발하지 못한다. 이야기는 이야기이다. 역사를 너무 의식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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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져보면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매우 투박한 소설이다. 묘사의 수위도 쎄고 폭력과 선정성은 한계를 시험하고 있다. 인물들 등장과 퇴장, 사건의 마무리는 매끄럽지 않고 급작스럽고 다 '마술'로 수습된다. 계속 언급하는 푸시킨이나 평론가, 관리들은 생전의 불가코프를 억압하던 존재들이리라. 거장의 원고를 위해 싸우는 마르가리타에는 불가코프의 부인이 겹쳐진다. 거장 커플과 악마들이 모두 사라지고 이 소설의 메인 이야기가 끝난 후에 이어지는 시인 이반과 아랫집 니콜라이 등의 에필로그는 지금의 독자가 조금이라도 이 이야기를 잘 받아들여주기를 바라는 몸짓같다. 


책을 덮고나서도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든다. 그래서 .... 

2005년 러시아에서 10부작으로 방영한 TV문학관 영상을 유툽에서 찾아서 (한글 자막) 봤다. (DVD는 품절) 그럴 시간이 ... 납니다. 러시아 문학이 이렇게나 위험합니다. 악마 보다는 그 부하들, 특히 키다리 코로비요프와 고양이 콤비의 폭력 개그 연기가 일품이며 나약한 예수아와 성미 급한 마태오도 열연을 펼친다. 글로 읽어서도 좋았지만 영상으로 만나는 1930년대 모스코바 아파트와 극장, 공원 장면도 인상적이다. 특히 환상적인 하늘의 비행신들은 악마의 파티, 불, 온갖 변신 장면들과 함께 초급 cg로 안전한 거리감을 유지한다. 그래서 살벌한 단두 장면들과 살인 장면은 별로 안 무섭다. (과격한 그 회차엔 성인인증을 필요로 함) 현대(1930년대) 러시아 장면에선 소설보다 더 비판적인 해설을 덧붙인다.(2005년은 푸틴 2차 임기 중) 


러시아 방송을 10회차나 보고나니 러시아 말 몇 마디는 알게되었다. "하라쇼"=좋다.   "다,다"=그렇다 


이 소설은 하라쇼다. 다다. 그래서 소설과 영상을 본 나의 감상문을 (여지껏 다 떠들어 놓고도) 그림으로 그려보았다. 어쩐지 내 그림은 안 하라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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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9-26 0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두님 그림도 하라쇼. 다죠.

유부만두 2023-09-26 07:33   좋아요 1 | URL
독서괭님! 스파시바(감사합니다)!!!
 

만화 출판사 이야기에서 만화 동호인 이야기로 넘어왔다.


영화 버전을 봐버려서 김이 빠진 느낌이지만 만화로는 느긋한 흐름을 즐길 수 있어서 나름대로 좋았다. 


유키 할머니와 우라라 학생은 만화 박람회에 벌써 두번째 참석한다. 이번에는 판매자로. 겁이나면서도 뿌듯함을 느끼는 우라라. 하지만 얘야, 너 고3인데. 엄마 아빠에겐 어떻게 하고... 유키 할머니도 그러시면 안되는데요. 이들의 우정을 이번에는 응원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열몇살 때 공부만 할 수는 없지.


만화를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며 동인지 활동을 하는 고등학생들이 일본 라이트 노벨이나 만화에 자주 등장한다. 그런 학생들의 에피소드와 겹쳐 엉키기도 한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빙과 시리즈에서도 만화를 그리는 학생이 습작 노트를 분실/도난 당하고 다시 찾는 과정('우리 전설의 책' 편)에서 자신의 무엇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가 고민한다. <툇마루>에선 자신의 그림이 인쇄를 거쳐 깔끔한 모습으로 나오자 낯설어하면서도 흥분하는 우라라가 인상적이다. 역시 젊음이 좋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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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다 지칠 때 나와주는 중쇄 신간. 이번 6월에 16권이다. 
이번엔 생활의 변화 등의 압력으로 서둘러 연재를 종결한 만화가가 바뀐 환경에서 디지털 작업을 익히며 새로운 스토리와 등장인물들을 연구하고 만들어/만나 가는 이야기.
더해서 특별증보판에서 반응이 좋은 여성 닌자들과 도검에서 출발한 도검백과를 특별한 사이즈와 퀄리티로 만드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리 가성비의 시대로 들어섰다지만 아름다운 것에 대해 성실함과 의리, 혹은 애정을 간직한 사람들은 아름다운 책에 지갑을 연다. (그 책이 일본도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신경은 쓰인다) 

책만드는 사람들의 책 이야기는 언제나 매력적이다. 벌써 다음 권 기다리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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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9-23 22: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읽다가 언젠가 놓아
버린 시리즈네요.

계속해서 나오고 있군요.

유부만두 2023-09-24 17:02   좋아요 1 | URL
중간에 늘어지는 권이 있어서 저도 놓아버릴 뻔 했어요. 다행히 15권엔 힘이 돌아왔어요.

은오 2023-09-24 1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일드로 봤는데 일드 원작이 이 만화인가요?! 오...

유부만두 2023-09-24 19:39   좋아요 0 | URL
네 중반 어디쯤 까지 반영됐어요. 원작과 다른 점도 꽤 있는데 배우들 캐스팅을 아주 잘 했어요. 그런데 한국판 (웹툰 시장 중심으로) 드라마는 매력이 반감되어서 아쉬웠고요.

희선 2023-09-25 0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쇄를 찍자 지금까지 나온 거 다 보셨군요 예전에 드라마만 봤어요 지난 23일이 2023년 백일 남은 날이었다니... 2023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니, 시간 참 빠르네요 다른 때는 9월만 와도 한해가 거의 갔어 하는 생각하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네요 남은 날동안 글 쓰실 거군요 유부만두 님 즐겁게 글 쓰시기 바랍니다


희선

유부만두 2023-09-25 22:50   좋아요 0 | URL
희선님은 매일 꾸준히 글을 올리시고 계시지요. 저도 단 100일이라도 이어서 책과 영화 감상을 남겨 보려고 합니다.
정말 시간이 빨라요. 다음주가 10월이네요.
 

정보라 작가의 <저주 토끼>의 영역서 번역가 안톤 허의 엣세이. 제목과 표지의 이모지가 짜증을 담고 있는데 그 상황이 책 안에 나온다. 이렇게 까칠한 표지를 만들다니 정말 좀 다른 느낌. 


저자는 (미국이나 영국 대학 나오고 한국은 쪼콤만 아는 교포 살람으로 예상했지만) 한국의 대학에서 복수 전공을 했고, 방송대도 나오고, 서울대 영문과 대학원에서 석사도 취득했다. 책읽기와 쓰기에 대한 애정은 일곱 살에 시작한 인생의 중심이라고. 스웨덴에서 태어나고 외국과 한국을 오가며 초중고를 다닌 것은 아버지 직장 때문이었다. (외고에서 제임스 조이스 읽다가 공부 안한다고 샘한테 맞았대) 게다가 한국 국적에 군대도 다녀오고 큰 부상으로 상이군인이란 이력은 전부 예상을 벗어난다. 


서울대 영문과 대학원 입학시험에서 답안지를 영어로 쓰고 있자니 감독 교수가 한글로 쓰라고 하더란다. 퉁명스레. 하지만 시험지의 가이드 라인엔 한국어로 제한하지 않았고 그걸 표지의 말로 지적했더니 교수가 불쾌해 하더라고. 그런 상황을 저자는 아주 많이 겪었다. 차별과 무시, 그리고 무례함. 그걸 저자는 짚고 넘어가려 한다. 참거나 입닥치고 번역이나 하고 있지 않다. 


외국의 책을 우리글로 번역하는 많은 번역자들과는 달리 한영 번역자는 외국의 기획사 몫까지 일을 하며 출판사에 책을 어필하며 적극적으로 출판에 참여한다. 실제 책상의 번역 작업은 그가 하는 일의 절반도 안된다고. 사람들과 부닥치며 자신의 일이 받아야 할 당연한 존중과 보답(돈!!!!!)을 위해 계속 싸우고 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 나라 공공기관과 대학교수들이 한영/한외국어 번역가들의 양성에 힘쓰기 보다는 오히려 언어적 인종적 차별주의를 답습하고 있다고. 저자가 그동안 고생하며 쌓인게 많았구나 알 수 있었다. 해외에 알릴/번역할 작품과 번역가 선정에도 불만을 토로한다. 외국서 팔리고 읽힐 만한 책을 고르는 게 맞다고! 아 당신들은 프루스트나 읽어! 라고 일갈한다. (웃음터짐) 


우리나라 작가들의 멋진 문장과 이야기에 대한 칭송과 작업 이야기(듀나의 책 번역할 땐 맞은 편에 토끼가 앉아있다고 상상 ...) 등은 읽기 즐거웠고 부커상 후보 선정을 둘러싼 우리 언론의 편견에는 함께 한숨이 나왔다. (신경숙 작가 부분이 존경을 담아 여러번 나오지만 표절 시비는 언급되지 않는다.) 마지막 3부는 그가 외국의 대학과 행사에서 한 연설문이 실려있다. 멋진 비유(그 바이링귀얼 뱀이랑 이브 이야기 짱)와 위트와 욕설(딱맞게 쓰니 좋아보이는?;;;) 로 이 책에서 정말 하고 싶었던 말. 그는 진정한 독자고, 번역자고, 작가라는 것. 그에 한치 의심도 부끄럼이나 강제된 겸손을 갖지 않는다는 것. 오우 부라보! 책 읽고 박수쳤잖아요. 


안톤 허 작가는 영어 소설(sf라고 한다 뇌과학 이야기도 나온다는데, 엄머, 나 이 책 읽으려고 뇌과학 책 읽은건가 싶고) 출판 계약도 했다고! 오우 부라보, 어겐! 


다른 번역가 책과는 톤도 색깔도 다르다. 원서를 우위에 두고 따라가기 보다 그 목소리를 다른 언어로 살려내는 창작 작업을 강조한다. 영한 번역가의 일이 더 많은 부분을 담당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강하게 한국번역문화원에 쓴소리를 할 수 있는 건 활동무대가 다르기 때문이리라. 얼마전 벌어졌던 국제적 미출간 원고 갈취 사기극 이야기와 해외 출판계 이야기 등도 재밌게 읽었다. 덕분에 추석을 잠깐 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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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9-22 2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따끔한 말을 많이 하네요. 재밌을 것 같아요!!

유부만두 2023-09-23 09:55   좋아요 2 | URL
재미있게 읽었어요. 문장도 좋고요.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