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동화집에 실린 이야기 중에서 낯선 이야기 하나 더.

“미녀 바실리사”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에 재혼한 아버지, 새어머니와 의붓 언니 두 명과 산다. 상인인 아버지는 자주 집을 비운다. 바실리사의 친엄마가 돌아가실 때 마법의 인형을 주며 힘든 일이 생기면 이 인형에게 ˝밥을 해 먹이고 고민을 이야기하면 된다˝고 했다.

팥쥐네처럼 새어머니와 언니들은 바실리사를 구박하고 힘든 일들을 시킨다. 그때마다 콩쥐처럼 바실리사는 비밀 인형을 잘 모셔 도움을 받는다. 밭을 갈고 청소를 하고 물을 길어오는 일은 다 이 인형이 해준다. 몰래. 어느날 새어머니는 바실리사에게 ˝불을 구해 오라˝며 마녀 바바 야가에게 보낸다. 바바 야가는 러시아 민담에 전해 내려오는 마녀의 이름이라고 한다. 사놓고 어딨는지 모르는 나의 바바야가의 밤 책이 이제야 생각난다.

숲속의 마녀는 새어머니랑 똑 같이 군다. 힘든 집안일을 시키고 구박하는 데다 잡아먹겠다고 위협까지 한다. 이때에도 콩쥐 아니 바실리사는 적은 음식이나마 인형에게 주고 도움을 받는다. 결국 마녀 바바 야가는 해골에 담긴 불을 내주고 바실리사는 집으로 돌아간다. 정의의 불로 새어머니와 새언니들은 불타 사라진다. 만세! 아버지는 죽었던가 어쨌던가 존재감이 없다. 돌아와봤자 새장가나 들고 자식들은 보살피지 못할 놈. 자유로워진 바실리사는 마을의 한 할머니와 살면서 고운 실을 잣고 고운 천을 만든다. 인형의 마법은 베틀을 마련하는 데 까지만 작동한다. 이야기에서 거의 처음으로 바실리사는 자기 손과 노력으로 실과 천을 만든다. 왕에게 진상된 이 훌륭한 천은 다시 바실리사가 손수 옷을 만들고 그녀의 뛰어난 솜씨와 더 뛰어난 미모에 반한 왕은 그녀에게 청혼한다. 그녀는 자기를 거둬준 마을의 할머니와 그 비밀의 인형을 끝까지 잘 보살폈다고 한다.

바바 야가와 나중의 할머니는 결국 동일인 아닐까. 혼자 사는 할머니, 불쌍한 여자 아이를 거둬서 원하는 복수와 중매를 해주는 사람. 낮에는 뭐가 바빠서 밖에 싸돌아 다니고 밤엔 외딴집에 돌아와 약초를 빻고 불씨로 뭘 만들고 밥먹고 식곤증으로 쓰러져 자는 사람. 요술 인형을 남겨준 친엄마도 그런 이상한 할머니의 도움으로 성장했던 이전 세대의 콩쥐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요술 인형은 딸을 낳으면 전해주는 도움의 손이지만 결국 엄마는 일찍 여의게 되는 저주가 아닐까. 인형은 일은 해주지만 먼저 밥을 차려줘야 하니까 귀신주머니 같은 느낌도 든다. 만약 밥을 주지 않는다면 인형은 대신 뭘 먹을까. 그나마 왕이 받는 소녀의 천과 옷이 인형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은 마음에 든다. 만약 그게 인형의 작품이었더라면 결혼 후 인형이 ˝내 왕비 자리 내놔˝라며 소녀에게 때늦은 정산을 요구했을지도 모른다. 뭔가 반전 혹은 뒷통수가 있을까 겁먹었는데 이 인형은 의외로 현명한 조언으로 미녀 바실리사에게 조언한다. ˝저녁을 먹고 기도를 하고 잠을 좀 자두도록 해요. 아침이 되면 밤보다 현명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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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작가의 신작. 역사 탐정물. 금성은 행성이 아니라 옛 경주. 


작가의 전작을 생각하고 표지를 보면 가볍고 행복한 이야기이리라 넘겨짚기 쉽다. 하얀 매가 야무진 눈매로 칼 자루 하나와 센터를 차지하고 있다. 불상, 승려, 말탄 (늙은) 군인 등이 소용돌이 있는 물 위에 떠있다. 저 멀리 황룡사 9층탑이 보인다. 


때는 7세기 후반, 나당전쟁 이후 통일 신라시대. 오랫동안 당나라 유학(이지만 혼란한 국제 정세에 고생고생)을 마치고 관리 선단에 끼어 신라의 수도 금성으로 돌아오는 이십대 (나약한 체격의) 설자은. 책의 뒷면에 나와있듯이 자은은 급사한 오빠 대신 남자가 되어 당으로 가 공부를 했고 여전히 오빠의 이름으로 돌아왔다. 들키면 죽는다, 심정으로 배에 올라 책 상자를 껴안고 있다. 그런 그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백제 출신 자칭 장인 목인곤. 그는 자은이 여자인 것을 알아채지만 별 내색없이 그 옆에 머문다. 통일신라 시대의 (여성) 셜록과 왓슨의 탄생. 


책은 네 편의 이야기, 즉 네 건의 사건과 자은과 인곤의 활약을 그리고 있다. 비슷한 남장 여인의 탐정 이야기(로 볼 수도 있는) "사라진 소녀들의 숲"이 생각났는데 허주은 작가가 환이의 남장을 일찍 풀고 비단 치마를 입히며 암행어사에게 의존하게 만든 것과는 달랐다. 자은은 계속 남자로 남는다. 그리고 다른 남자에게 의존하는 대신 목인곤을 수하로 부린다. 하지만 여기 실린 네 편의 사건 중 적어도 셋은 여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여성의 이야기다. 여성 인물들은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각자의 목소리를 내(려 노력하)고 있다. 


코난이나 김전일이 가는 곳마다 살인이 벌어지듯 자은 옆에도 사람이 죽어나간다. 그리고 그 죽음의 배후에는 이야기가 있다. 배에서 죽은 상인은 정말 사라진 그 여인의 아비였을까? 어떤 여인은 사랑의 시작과 끝을 자신의 손으로 결정해야 직성이 풀린다. 전설적 장군이 정말 손바닥에 저주 문자가 뜨면서 전쟁의 업을 치르는건가? 여성들의 베짜기 연례축제가 어떻게 여인들에게 탈출구가 되는가? 베틀을 부순 범인은 누군가? 문무왕의 매지기는 어떤 죄를 지었는가? ... 문무왕에게 매란? 자은에게 자유란? 유부만두에게 정세랑이란?


자은은 용감하고 예리하게 그 이야기들의 실마리를 잡아 차근차근 사건을 풀어놓는다. 결코 서둘지 않고 절대로 으스대지도 않는다. 범인들은 의외로 간단하게 드러나는데, 자은은 처벌과 공개보다는 범행 동기와 뒷수습에 더 집중해 배려한다. 셜록과도 조금 다르다. 


이 책의 마지막 이야기에선 표지의 매와 자은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한다. 그리고 이 책이 설자은 통일 신라 탐정 시리즈의 대망의 첫 권이라고 선언한다. 자자잔!!!! 1권의 많은 부분이 시리즈의 설정과 밑밥이다. 옛정인, 집안 사정, 정치적 긴장, 밉상 고관대작 다 그려진다. 작가의 섬세함과 대범함이 보인다. 길게 갑시다, 작가님. 한 스무 권? 


표지가 조금만 덜 귀여웠더라면, 책소개 방송 등에서 정세랑 작가가 조금만 더 묵직하게 힌트를 줬더라면 더 일찍 이 책을 읽었으리라. 기대이상이라 깜짝 선물 받는 기분으로 읽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거인 왕 문무왕의 시대가 멀지 않아 끝나고 더 많은 사건들이 나올 걸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뛴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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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3-12-07 1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겠어요! 정세랑!!!!!!!!!!!!!!!!!!!!!!!

유부만두 2023-12-07 12:11   좋아요 1 | URL
재밌는 탐정 소설이에요. 피도 나고 서람도 죽어요. (경고 했으니 나중에 무서웠다고 불평 마세요, 너무 겁먹지도 말고요. 스티븐 킹만큼 음산하진 않으니까요)

psyche 2024-01-05 15: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난 금성이 하늘에 있는 저 금성인 줄 알고 SF 라고 생각했지. 역사 탐정물이라니 재미있겠다!!

유부만두 2024-01-05 16:28   좋아요 0 | URL
재밌어요. 표지 보면 청소년 소설 같은데 아니고요. 꽤 공들여서 시리즈 빌드업 하는 거 같아요. 드라마로 만들어도 좋겠다 싶어요. 문장도 인물들도 좋아요. 추천.
 

그림 동화와 페로 동화 등 여러 옛이야기들의 모음집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 중 낯선 "롬펠슈틸츠헨"편을 찾아 읽었다. 


엉뚱한 거짓말로 딸 자랑을 한 아버지 때문에 소녀는 욕심 많은 왕 앞에 끌려간다. 아버지의 장담 대로 "짚을 황금실로 만드는 재주"를 증명해야 한다. 난감한 소녀가 엉엉 울자 그 앞에 키작은 남자가 나타나 소원을 들어줄테니 뭘 줄래? 하고 묻고 소녀는 목걸이를 약속한다. 그리고 작은 남자가 만들어낸 황금실 뭉치에 목걸이를 내준다. 욕심이 생긴 왕은 더 많은 짚으로 다음 과제를 내고 이번에도 작은 남자가 소녀에게서 반지를 약속 받고 황금실을 만든다. 모든일은 삼세번, 세번째에 고비가 온다. 세번째 더 많은 짚더미를 주며 왕은 이번 일을 성사시키면 왕비가 될 것이라고 소녀에게 말한다. 그러나 소녀에겐 작은 남자와 거래할 보석이 없다. 그러자 작은 남자는 소녀에게 나중에 네가 낳을 첫아이를 달라고 한다. 급한 마음에 소녀는 약속을 하고 황금실 더미와 함께 왕비가 된다. 하지만 약속은 잊어버린다. 



빚은 사라지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왕비 앞에 그 키작고 기분나쁜 남자가 찾아와 아이를 요구한다. 왕비는 울며 호소하지만 작은 남자는 흥정이랍시고 사흘 안에 자신의 이름을 알아내면 거래를 취소하겠노라고 한다. 왕비는 부하들을 온 나라 방방 곡곡에 풀어 그 이름을 알아낸다. 다 이긴 내기라고 생각했던 남자는 분을 못이기고 자기가 자신의 몸을 찢어(!!!!) 죽고 만다. 그리고 왕과 왕비는 잘 먹고 잘 살았다고. 


애초에 거짓말로 딸 자랑으로 자식을 곤경에 빠뜨린 아버지, 짚으로 황금을 얻을 욕심에 찬 왕, 자신을 도와준 사람과 거래에 대해 쉽게 잊어버리고 도망갈 생각만 한 소녀/왕비. 이들은 원하는 것을 얻고 후환도 없이 잘 먹고 잘 산다. 하지만 감히 아름다운 소녀에게 집적댄 키작은 (못생긴) 숲속의 외톨이 남자는 황금을 만드는 기술을 갖고도 어음 회수를 못하자 자기 성질을 다스리지 못하는 바람에 죽고 만다. 만만하고 못생긴 비호감 기술자를 왕과 그 일족이 잘 뽑아먹어도 된다는 의미인가? 매우 찜찜한 옛이야기다. 


그 작은 남자, 숲속에 혼자 살며 콩콩 튀는 이상한 춤을 추고 생명 있는 어린 아이를 가져가겠다는 끔찍한 추물. 그의 이름을 알아내야 한다는 것의 의미는 뭘까. 얼마전 본 김은희 작가의 공포물 "악귀"에서도 주인공 김태리의 몸에 깃든 악귀의 생전 이름을 알아내는 것이 필요했다. 이 악귀 역시 처음에는 원하는 것을 준다. 돈,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이를 해하는 것. 악귀의 이름이 아는 건 그 정체를 아는 것이니 그 자체가 상대를 무찌를 힘이 된다. 이름을 아는 것은 이름을 지어주는 것 만큼이나 강력한 행위이다. 


이 동화집의 작은 남자, 그 서양 도깨비의 이름이 바로 롬펠슈틸츠헨(Rumpelstilzchen)이었고 이는 딸랑이 요괴, 악령, 시끄러운 도깨비 쯤의 뜻으로 poltergeist와 비슷하다고 위키피디아에 나온다. 퇴마의식에도 악령의 이름을 부르고 그다음 물러가라고 외친다. 이런 퇴마식이 스티븐 킹의 페어리 테일 후반부에도 벌어진다. 차마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거대 악, 그것에 맞서 그 이름을 부르고 사라지라고 외치려면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하리라. 그러니까 왕비가 된 아름다운 소녀는 작은 남자가 나타나 요술을 세 번이나 부리고, 아이를 요구하며 협박할 때도 정신줄 놓지않고 맞선 것이다. 네 이름이 롬펠슈틸츠헨이렸다, 이 놈아! 이렇게 생각하면 왕비의 싸가지 없음 만큼이나 그 당당함에 감탄하게 된다. 익명의 인터넷 세상에서 필요한 용기 (더하기 뻔뻔함)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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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롬펠슈틸츠헨 그 후의 이야기 두 편
    from 책읽기의 즐거움 2023-12-09 20:46 
    제목도 살벌한 이 책은 조이스 캐럴 오츠, 셜리 잭슨, 닐 게이먼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다시 쓴 옛 이야기 후속편 모음집이다. 그리고 앤절라 카터에게 헌정되어 있다. 41편의 단편 중 두 편이 롬펠슈틸츠헨 이야기다. "로라 시티"의 작가 케빈 브록마이어가 쓴 "반쪽 룸펠슈틸츠헨의 어느 하루"는 옛 이야기의 분노의 비극적 결말에 반으로 쪼개진 한 쪽 룸펠슈틸츠헨의 그 이후 이야기다. 아침에 그는 꿈을 꾸다 깬다. 자신의 지푸라기 몸 오장 육부가 물레
 
 
건수하 2023-12-06 09: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림책과 옛이야기 공부(?)하다가 봤었던 기억이 나네요. 어떤 판본에서는 아기를 요구하지 않고 아가씨에게 아내가 되어달라고 하는데 그러면 뉘앙스가 좀 다르더라고요.. ^^;

유부만두 2023-12-06 10:45   좋아요 1 | URL
아이를 달라는 것 보다는 청혼(?)이 나아보이.... 아 이것도 무섭고 싫으네요. 대단한 마법을 부려서 널 도왔으니 니 미래(결혼이나 아이)를 내놓으란 거.

하지만 롬펠슈틸츠헨(이름도 드릅게 어렵..)이 자폭하는 결말은 (이게 스티븐 킹 소설선 두 캐릭터로 더블 출연) 너무나 희화되버리니까 오히려 측은한 맘도 좀 들고 그래요. 그러면 안되는데 말이죠. 저열하고 흉한 놈이잖아요.

그나저나 그림책과 옛이야기 공부하셨다니 그 시절 이야기 좀 나눠주세요. (안그러신다고 잡아먹으지는 않습니다만 ㅋㅋ)

건수하 2023-12-06 13:30   좋아요 1 | URL
아 그냥 지인들과 같이 발제하고 뭐 그런 거였습니다 제가 룸펠슈틸츠헨 부분을 맡았었거든요 ^^;;

레삭매냐 2023-12-06 10: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꼬맹이에게 <룸펠슈틸츠헨> 이야기를
읽어 주면서 이것이 동화인가 사회 풍
자를 빙자한 엽기 소설인가 하는 생각
이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서양 동화들 살발합니다 고저.

유부만두 2023-12-06 11:14   좋아요 2 | URL
맞아요. 엄청 살벌해요.

지푸라기를 금실로 만드는 요술로 (이거 어쩐지 코인 같기도 하고요) 사람 목숨을 흥정하고요, 약속 한 번 잘못해서 끔찍한 덫에 걸리고요. 그리고 죽여도 곱게 죽이질 않더라고요. 엽기죠.

서곡 2023-12-06 1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부만두님 안녕하세요 룸펠슈틸츠헨 반가워서 댓글 남깁니다 저 이 캐릭터 좋아해요(!) 성명마법이란 것도 재미있고요...

유부만두 2023-12-06 18:30   좋아요 1 | URL
그쵸. 성명마법이란 것이 유럽에서 매우 보편적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이 이상한 캐릭터는 비호감인데 연민도 불러일으키는 기묘한 캐릭터에요. 전 좋아하긴 어렵지만 흥미롭다 쪽으로 봤어요. ^^
 

미래의 우주. 266명을 태운 탐사선에 비극이 벌어져 단 한 명의 젊은 여성 과학자 타이라와 동반 AI만 살아남는다. 이들은 최후의 선택으로 우주 순간 이동을 해 어느 행성에 도착한다. 이 행성에는 고대의 기술로 살아가는 부족이 낯선 언어로 (AI의 도움으로 통역하게 된다) 말하며 몸이 아픈 타이라를 쓰디쓴 액체로 치유하려 한다. 이들의 이론으로는 몸은 "오행"이 조화로와야(음양오행과 비슷한 느낌) 기운을 차리고 건강을 유지한다고 했다. 그래서 단전 없이 텅 빈 배(내장)로 갑자기 우주에서 내려온 타이라를 신비의 존재로, 그녀의 AI는 마법사나 요정 쯤으로 이해한다. 그 부족 중 친절한 젊은 남자 페이젠이 그녀를 정성스레 돌보며 자기들 행성의 심신오행설과 건강론을 설명한다. 하지만 박테리아를 이미 멸절시킨 기술의 세상에서 살던 타이라에게 이 모든 것은 이상한 논리일 뿐이다. 그런데도 어쩐지 편안해진 타이라, 페이젠과 함께 이 낙후한 원시 행성에 남아도 좋을 것만 같다. AI는 그건 아니라고 경고한다. 아무래도 타이라의 뱃속에 뭔일이 벌어졌다. 타이라와 페이젠은 드디어 첫 키스를 나눈다. 


"천지가 조그맣게 오그라들어 우리 둘의 입술 사이에, 우리 숨결 속에, 우리 혀끝에 있었다. 나는 낭자의 맛과 냄새를 음미했다. 낭자의 본성처럼 뜨겁고 맹렬했다. 세상이 더 환하게 빛나는 느낌마저 들었다. 마치 별들도 우리와 함께 빛나는 것처럼." 


하지만 그 달콤한 조화의 시간은 흔들리고 과연 자신의 몸, 특히 뱃속에 무슨 일이 벌어진건지 고민하는 타이라. 장내 박테리아가 이 행성에는 남아있었고 그것들이 자신의 온 몸과 마음, 심지어 감정까지도 감염시키고 지배했었다고?!?!


"장내 박테리아가 기분과 뇌 속의 화학물질에 영향을 미친다"는 과학 논문 (2011년)에서 작가 켄 리우가 아이디어를 얻어 이 단편 SF를 썼다고 한다. 얼마전 알라딘 서재에서 장내 미생물에 관한 책을 보고 찜해두었는데, 동양 의술에서 말하는 인간의 몸이 우주를 반영한다는 이론과 닿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타이라의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말했다는 "네 뱃심 - 아마 영어로는 gut feeling - 을 믿어"라는 표현도 재미있다. AI는 타이라에게 배가 아니라 머리로 생각하라며 타박한다. 사랑이 화학chemistry 라고도 하고 전생의 인연이라고도 하는데 함께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차를 마시면서도 사랑은 싹튼다. 내 뇌를 조종하는 뱃속 박테리아 따위는 꼭 떠올리지 않아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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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책의 장면들'이라고 해서 읽었는데 편집인이 책 편집하고 만드는 영화 장면들에 대한 현직 편집인의 엣세이 모음집이다. 편집인이 본 12편의 영화 장면들에는 원고, 책, 이야기 그리고 인생과 철학을 저자와 함께 (싸우며 어르며) 다듬는 편집인들이 나온다. 90년대 부터 코로나 시기까지 긴 시간에 걸쳐 나왔던 영화에서 편집인들은 한결같이 손에 들어온 그 원고를 멋진 책으로 변신 시키기 위해서 노력한다. 아는 영화도 많은데 (2편 빼고 다 본 영화다. 책 이야기라면 일단 내 영화 목록에 들어가니까) 특히 <행복한 사전>에는 마음이 동해서 부엌일을 하면서 틀어놓고 (두번째로) 봤다. 아 이렇게 무모한 작업이었나, 사전 만들기가. 또한 찰리 채플린의 일대기를 다룬 1992년 영화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주연에 편집인으론 안소니 홉킨스라니. 찜. 무엇보다 <미저리>에서 그 무시무시한 애니를 미저리 후속작의 편집인으로 이해한 것이 흥미로웠다. 독자도 그러니까 편집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스티븐 킹 소설 오탈자 좀 있더라요.


책 만드는 이야기를 편집인에 중심을 두고 풀어내는 엣세이라 주말에 안성맞춤이었다. 편집인들에겐 일이지만 독자에겐 흥미로운 무대 뒤 이야기, 번외편 같기도 하니까요. 참 열심이시네 하면서 책과 영화 제목 몇은 따로 적어두었다. 그러는 내내 한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전설적인 맥스 퍼킨스나 거트루드가 아니라 잠자냥님. 자신이 만든 책을 꽁꽁 숨기고 안 알려주지만 그래서인지 내가 읽었을 수도 아닐 수도 있을 그 책들을 상상하면 맘이 든든해진다. 일요일이니까 원고 말고 읽고 싶은 책 읽어요, 잠자냥님. 그런데 이 책은 업무 생각이 너무 날테니까 패스해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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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2-03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감사합니다!

잠자냥 2023-12-03 1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회사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 그래야 여러분이 마음 놓고 욕도 하고 칭찬도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들 다 잘 보고 있습니다. (시장 조사) 그리고 책에 반영할 때도 있고요. ㅎㅎㅎㅎ

유부만두 2023-12-03 12:23   좋아요 0 | URL
아 다 보고 계십니까?! 책에 독자들 의견도 반영하시고요?!
훌륭한 편집자님!!! 이러니 은오가 사랑에 빠질만하죠! 인정 인정.

잠자냥 2023-12-03 1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 개봉한 영화 <싱글 인 서울>에서 임수정 직업이 출판사 편집장이던데 스틸컷 이미지 보고 좀 웃었습니다. 편집자 이미지가 저렇구나?! 했다는 ㅋㅋ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3-12-03 12:27   좋아요 0 | URL
ㅋㅋㅋ 예고 영상 보고 왔어요.
전 더 깔끔한? 편집자들을 만난 적이 있어서 임수정은 과장한 거 아닌가 싶은데요.
근데 저 영화에서 편집자(들)은 몇 명이나 고양이와 함께 살까요? 그건 궁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