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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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가슴 벅찬 책읽기였다.

약 2천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손에 잡는 일은 마음먹기만 어려웠을 뿐, 막상 책장을 펼치고 나서는 이 '엄청난' 책이 품고 있는 '대단한' 흡입력에 그대로 빨려들어가버렸다.

이런 게 바로 고전의 힘인가...? 이런 힘이 있기에 시대를 초월해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것이겠지?

고전을 읽는 기쁨과 더불어 긴긴 이야기를 읽어냈다는 뿌듯함까지 함께 안겨주며 안나 카레니나와 함께 한 여러 날이 지났다.

그리고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 있을 여운.

 

평소에 고전을 가까이 하지 못하는 것은, '고전'이라 하면 일단 어려워 쉽게 읽히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과 왠지 그 안에서 읽어내야만 하는 메시지가 있을 것 같아, 그것을 파악하지 못 하면 내 자신의 무지를 확인하게 될까봐 걱정스러운 까닭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이 '위대한' 작가의 책을 읽으며 앞선 나의 걱정들을 모두 날려버렸다.

안나 카레니나는 정말 술술 읽혔으며 이 책을 어떻게 읽는가는 나의 몫, 나는 내 몫대로 이 책을 아주 재미난 연애 이야기로 읽어냈다.

(당시 러시아 시대상이 잘 반영되어 있고 어쩌고저쩌고,를 물론 느끼기도 했지만, 본문 밑에 달린 주석이 작품에서 그런 것들을 읽어내기를 바라는 듯 했지만, 나는 주석은 과감히 지나치며 나만의 책읽기에 몰두했다. 주석은, 어쩐지 지나치게 친절한 느낌이 들었다. 어려운 말들로 가득하기도 했고 말이다.)

 

안나 카레니나와 스테판 아르카디이치, 콘스탄틴 드미트리치 레빈, 키티 쉬체르바쓰카야.

네 젊은 남녀의 사랑과 실연과 결혼과 출산과 죽음은 세 권의 책도 모자라게 느껴질 정도로 흥미롭게 전개되며, 인간사의 중대한 순간들 앞에서 이들의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한 문장들은 정말 심장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한참 책을 읽다가 문득 떠오르는 책이 있었다. 몇 해 전에 읽었던 책 중에 역시 이처럼 연애, 결혼 등과 관련하여 무척 섬세한 심리 묘사로 나를 사로잡았던 책. 그런 책을 읽었다는 기억만 있을 뿐 제목과 지은이가 언뜻 떠오르지 않아 책장에서 책을 찾아 꺼내보니, 아 맙소사, 역시 톨스토이의 책이다. 『크로이체르 소나타』!

지금까지 읽은 두 권의 톨스토이 책이 모두 내게 같은 종류의 감동과 소름을 선사했다니, 놀랍고 재미있다. 톨스토이 글의 특징인 것일까, 내가 우연히 그런 책만 두 권을 읽은 것일까.(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톨스토이의 또다른 책을 읽어봐야겠지,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난 분명 톨스토이의 다른 책들을 읽은 적이 있음이 지금 문득 떠오른다. 그 책들은, 예쁜 혹은 감동적인 동화 같은 글들이었던 듯한데... 아마, 『세 그루 사과나무』를 비롯한 단편선들이었던 듯. 헛 읽었다!! 다시 읽어야지.)

여튼, 이런 인간 심리의 세밀한 묘사가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한층 더해주었다.(주변에 이 책을 추천하며 이런 말을 했더니, 그런 섬세한 묘사 때문에 때론 지루하고 졸음이 오기도 한다는 반응이 나왔다. 하지만 장담컨대, 지독한 공감으로 팔뚝에 돋은 소름을 쓸어내릴지언정, 지루해 졸릴 일은 없을 것이다.)

 

내 안에 가득 차오른 벅찬 감동은 여러 날이 지나도록 사그러들지 않으나, 그 소감을 적어내기에는, 아, 내 손끝이 너무 부족하다.

그냥, 밑줄 그은 문장 몇 부분 옮겨야겠다.

 

 

"아아, 당신 나이 땐 정말 행복하지요." 안나는 계속했다.  "나도 마치 스위스의 산줄기에 걸려 있는 것과 같은 그 하늘빛의 안개를 기억하고 있고 또 알고 있어요. 그 안개는 바로 유년 시절이 끝나가는 그 행복한 시기에 온갖 것을 가리우고 있죠. 그러나 그 거대하고 즐거운 세계에서 나오면 앞길은 차츰차츰 좁아져요. 겉으론 밝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외길로 들어가는 것이 즐겁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우리는 누구나 다 이런 길을 지나오게 마련이죠." _ 1권, 150

 

"난 그 '사로잡히기'만을 바라고 있는걸요." 브론스키는 침착하고 선량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만약 내가 투덜거릴 일이 있다면, 사실은 말입니다, 그 사로잡힐 기회가 너무 드물기 때문이에요. 난 차츰 희망을 잃어가고 있어요." _ 1권, 255

 

"독신생활과 손을 끊는다는 건 거저 되는 일이 아니야."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말했다. "아무리 행복하다손 치더라도 역시 자유는 아까운 거야." _ 2권, 406

 

그는 행복했다. 그러나 가정생활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매순간 그는 자기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걸음마다 그는 호수 위를 미끄러져가는 작은 배의 매끄럽고 행복한 진행을 넋을 놓고 바라보던 사람이 자기가 직접 그 작은 배에 탔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기분을 경험했다. 말하자면 몸을 흔들리지 않게 하고 가만히 타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어느 쪽을 향해서 갈 것인지를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발밑에는 물이 있고 그 위를 노저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익숙하지 않은 손에는 그것이 몹시 아프다는 것, 그저 보고만 있을 때에는 손쉬운 것 같았지만 막상 자기가 해보니까 썩 즐겁기는 해도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_ 2권, 474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모두 쓸데없는 짓이죠." 레빈은 음울하게 대답했다.

"너는 툭하면 무엇이든 쓸데없다고 말하지만, 네가 한번 해보렴. 좀처럼 잘되지 않을 테니까." _ 3권, 216

 

인간이 길들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없다. _ 3권, 307

 

가정생활에서 무엇인가를 꾀하기 위해서는 부부 사이에 완전한 분열이나 혹은 사랑의 일치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부부관계가 애매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경우에는 어떠한 계획도 실행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는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싫증이 난 생활을 그대로 몇 해째 계속하고 있는 부부가 꽤 있지만, 그것은 모두 완전한 분열도 일치도 없기 때문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_ 3권, 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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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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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가슴 벅찬 책읽기였다.

약 2천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손에 잡는 일은 마음먹기만 어려웠을 뿐, 막상 책장을 펼치고 나서는 이 '엄청난' 책이 품고 있는 '대단한' 흡입력에 그대로 빨려들어가버렸다.

이런 게 바로 고전의 힘인가...? 이런 힘이 있기에 시대를 초월해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것이겠지?

고전을 읽는 기쁨과 더불어 긴긴 이야기를 읽어냈다는 뿌듯함까지 함께 안겨주며 안나 카레니나와 함께 한 여러 날이 지났다.

그리고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 있을 여운.

 

평소에 고전을 가까이 하지 못하는 것은, '고전'이라 하면 일단 어려워 쉽게 읽히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과 왠지 그 안에서 읽어내야만 하는 메시지가 있을 것 같아, 그것을 파악하지 못 하면 내 자신의 무지를 확인하게 될까봐 걱정스러운 까닭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이 '위대한' 작가의 책을 읽으며 앞선 나의 걱정들을 모두 날려버렸다.

안나 카레니나는 정말 술술 읽혔으며 이 책을 어떻게 읽는가는 나의 몫, 나는 내 몫대로 이 책을 아주 재미난 연애 이야기로 읽어냈다.

(당시 러시아 시대상이 잘 반영되어 있고 어쩌고저쩌고,를 물론 느끼기도 했지만, 본문 밑에 달린 주석이 작품에서 그런 것들을 읽어내기를 바라는 듯 했지만, 나는 주석은 과감히 지나치며 나만의 책읽기에 몰두했다. 주석은, 어쩐지 지나치게 친절한 느낌이 들었다. 어려운 말들로 가득하기도 했고 말이다.)

 

안나 카레니나와 스테판 아르카디이치, 콘스탄틴 드미트리치 레빈, 키티 쉬체르바쓰카야.

네 젊은 남녀의 사랑과 실연과 결혼과 출산과 죽음은 세 권의 책도 모자라게 느껴질 정도로 흥미롭게 전개되며, 인간사의 중대한 순간들 앞에서 이들의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한 문장들은 정말 심장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한참 책을 읽다가 문득 떠오르는 책이 있었다. 몇 해 전에 읽었던 책 중에 역시 이처럼 연애, 결혼 등과 관련하여 무척 섬세한 심리 묘사로 나를 사로잡았던 책. 그런 책을 읽었다는 기억만 있을 뿐 제목과 지은이가 언뜻 떠오르지 않아 책장에서 책을 찾아 꺼내보니, 아 맙소사, 역시 톨스토이의 책이다. 『크로이체르 소나타』!

지금까지 읽은 두 권의 톨스토이 책이 모두 내게 같은 종류의 감동과 소름을 선사했다니, 놀랍고 재미있다. 톨스토이 글의 특징인 것일까, 내가 우연히 그런 책만 두 권을 읽은 것일까.(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톨스토이의 또다른 책을 읽어봐야겠지,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난 분명 톨스토이의 다른 책들을 읽은 적이 있음이 지금 문득 떠오른다. 그 책들은, 예쁜 혹은 감동적인 동화 같은 글들이었던 듯한데... 아마, 『세 그루 사과나무』를 비롯한 단편선들이었던 듯. 헛 읽었다!! 다시 읽어야지.)

여튼, 이런 인간 심리의 세밀한 묘사가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한층 더해주었다.(주변에 이 책을 추천하며 이런 말을 했더니, 그런 섬세한 묘사 때문에 때론 지루하고 졸음이 오기도 한다는 반응이 나왔다. 하지만 장담컨대, 지독한 공감으로 팔뚝에 돋은 소름을 쓸어내릴지언정, 지루해 졸릴 일은 없을 것이다.)

 

내 안에 가득 차오른 벅찬 감동은 여러 날이 지나도록 사그러들지 않으나, 그 소감을 적어내기에는, 아, 내 손끝이 너무 부족하다.

그냥, 밑줄 그은 문장 몇 부분 옮겨야겠다.

 

 

"아아, 당신 나이 땐 정말 행복하지요." 안나는 계속했다.  "나도 마치 스위스의 산줄기에 걸려 있는 것과 같은 그 하늘빛의 안개를 기억하고 있고 또 알고 있어요. 그 안개는 바로 유년 시절이 끝나가는 그 행복한 시기에 온갖 것을 가리우고 있죠. 그러나 그 거대하고 즐거운 세계에서 나오면 앞길은 차츰차츰 좁아져요. 겉으론 밝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외길로 들어가는 것이 즐겁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우리는 누구나 다 이런 길을 지나오게 마련이죠." _ 1권, 150

 

"난 그 '사로잡히기'만을 바라고 있는걸요." 브론스키는 침착하고 선량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만약 내가 투덜거릴 일이 있다면, 사실은 말입니다, 그 사로잡힐 기회가 너무 드물기 때문이에요. 난 차츰 희망을 잃어가고 있어요." _ 1권, 255

 

"독신생활과 손을 끊는다는 건 거저 되는 일이 아니야."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말했다. "아무리 행복하다손 치더라도 역시 자유는 아까운 거야." _ 2권, 406

 

그는 행복했다. 그러나 가정생활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매순간 그는 자기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걸음마다 그는 호수 위를 미끄러져가는 작은 배의 매끄럽고 행복한 진행을 넋을 놓고 바라보던 사람이 자기가 직접 그 작은 배에 탔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기분을 경험했다. 말하자면 몸을 흔들리지 않게 하고 가만히 타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어느 쪽을 향해서 갈 것인지를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발밑에는 물이 있고 그 위를 노저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익숙하지 않은 손에는 그것이 몹시 아프다는 것, 그저 보고만 있을 때에는 손쉬운 것 같았지만 막상 자기가 해보니까 썩 즐겁기는 해도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_ 2권, 474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모두 쓸데없는 짓이죠." 레빈은 음울하게 대답했다.

"너는 툭하면 무엇이든 쓸데없다고 말하지만, 네가 한번 해보렴. 좀처럼 잘되지 않을 테니까." _ 3권, 216

 

인간이 길들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없다. _ 3권, 307

 

가정생활에서 무엇인가를 꾀하기 위해서는 부부 사이에 완전한 분열이나 혹은 사랑의 일치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부부관계가 애매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경우에는 어떠한 계획도 실행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는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싫증이 난 생활을 그대로 몇 해째 계속하고 있는 부부가 꽤 있지만, 그것은 모두 완전한 분열도 일치도 없기 때문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_ 3권, 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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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1-03-22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주님, 2권과 3권은 더욱 재미있답니다. 다 읽고 나면 정말 가슴이 벅차오르지요. 즐거운 독서가 되기를 바랍니다. 너무 감동받았던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시는 모습 보니 참 반갑네요.

원주 2011-03-23 01:59   좋아요 0 | URL
^^ 이 긴긴 이야기를 언제 다 읽나 싶어 선뜻 손내밀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오, 세 권으로 끝나는 게 아쉬울 정도로 빠져서 읽었어요!
말씀대로 '정말 가슴이 벅차오르'는 책읽기였습니다!^^*
 
15번 진짜 안 와
박상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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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을 조용히 시킬 시끄러운 한 문장,을 꿈꾸는 작가! ^^ 15번이 드디어 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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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김신데렐라 초승달문고 21
고재은 지음, 윤지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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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편의 짧은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사람의 마음을 쏙쏙 읽어주는 것 같은 돈이 등장하는 「나는 보리차가 싫어」

쓸 줄 아는 것이라고는 자기 이름밖에 없는 주희가 곁에 있는 모든 것에 제 이름을 쓰는 「2학년 3반 이주희」

신데렐라가 좋은데 왕자이기를 강요 받는 사내아이의 「내 이름은 김신데렐라」

구구단을 못 외워 나머지 공부를 하는 「희철 선인장」

 

네 편의 이야기가 때로는 재미있게, 때로는 뭉클하게, 때로는 반성을 불러 일으키며 읽혔다.

 

 

가끔, 한정된 돈을 쥐고, 이걸 살까 저걸 살까 망설일 때가 있다. 돈은 딱 요만큼밖에 없는데, 둘 중 또는 여럿 중 하나밖에 살 수 없는데, 나는 과연 뭘 사야 한단 말인가!

그럴 때 돈이, 자기 마음 가는 대로 속삭여준다면...?

책을 살까 옷을 살까, 망설이고 있을 때, "나는 옷이 싫어, 나는 옷이 싫어..." 하고 속삭이는 돈을 보고 화들짝 놀란 순간, 어느새 내 손에서는 돈이 떠나고 그 대신 책이 들어와 있는 거지. (응, 하지만, 돈이 속삭여주지 않아도 지금껏 너는 쭉 그래왔어. 이제 그만 옷이나 좀 사입지 그래?-_-; 돈이 이렇게 말하기 전에. "나는 책이 싫어.")

가족들 먹을 저녁 반찬거리 사러 나간 엄마 눈에 마음에 쏙 드는 블라우스가 들어온다면...? 대부분의 엄마들은 저녁 반찬거리를 사들고 머릿속으로는 그 블라우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며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럴 때도 돈이 말을 해야 할 때. "나는 반찬이 싫어, 나는 반찬이 싫어..." 그리고 엄마에게 블라우스를 안겨 주는 거지! (엄마, 엄마도 이제 좀 자신을 위해 소비하세요...)

이런 재미난 상상이 담긴 이야기가 「나는 보리차가 싫어」이다.

우리 꼬마 주인공은 보리차가 싫다며 달아난 돈 대신 무엇을 갖게 되었을까?

 

초등학생 때, 내 모든 물건에는 견출지가 붙어 있었지. 그 위에는 이름 석 자, 혹은 몇 학년 몇 반이 함께 적혀 있기도 하고.

이름을 쓰면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아니, 잃어버려도 돌려받을 수가 있다.

이름이 써 있지 않은 물건들은 교실 뒤에 놓인 박스에 모였다. 그러면 물건의 주인인 아이들이 와서 제 물건을 찾아가곤 했고.

주희는 제 방 안의 모든 물건에, 교실의 모든 물건에, 심지어는 방에 불어오는 바람에도 제 이름을 써주고 싶어한다. 엄마가 지우고 지우고 또 지워도 주희는 쓰고 쓰고 또 쓰고... 그러다가 필기구를 모두 빼앗기고...

주희에게도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 이미 잃어버렸지만 꼭 돌려받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바람에게 '이주희'라고 이름을 써 주었으니, 그 바람이 불고 불어, 아빠의 등 뒤에 가 닿는 날, 주희는 되찾을 수 있겠지?

 

우리 조카 아이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장난감 통에서 꼭 '사내아이다운' 물건들을 잘도 골라내어 가지고 논다.

제 부모가 사주기도 전부터 칼이며 총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 쓰기도 하고 솜털 귀여운 곰인형보다 자동차나 활동적인 장난감을 좋아한다.

"머스마는 머스마로 타고나는 갑다!" 울 엄마가 그런 손자를 지켜보며 감탄하듯 내뱉는 말.

하지만 혹 사내아이가 곰인형을 더 좋아한다고, 여자아이가 칼싸움을 더 좋아한다고 그걸 굳이 말리고 억지로 못하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게 평소의 내 생각이다.

지구상의 인간을 딱 두 종류,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 그에 따른 '성역할'을 강요할 필요가 있을까?

'인간의 행위나 태도와 관련하여 남녀별로 적절한 것으로 규정된 문화적 기대치'

남녀별로 적절한 것은 뭐고 그렇게 규정된 문화적 기대치라니.

나는 이 세상을 나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것은, 단 하나 '개인차'라고 생각한다. 그들을 단지 남자라는 이름으로, 여자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어 획일적인 기대치에 도달하게 만들 필요는 없지.

사내아이도, 신데렐라가 좋으면 "내 이름은 김신데렐라입니다"라고 공주 놀이 할 수도 있는 거다.

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는 파워레인저다. 음하하하하"하는 우리 조카 녀석은 또 그렇게 철저하게 '머스마'로 타고난 거고... 그런 조카 녀석에게 비록 너는 남자이지만 여성적인 취미도 가져보렴, 이라고 강요할 필요 또한 없는 거고.

 

나는 초등학교 때 딱 한 번 나머지 '공부'를 한 적이 있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그 한 번밖에는...)

다른 아이들은 남아서 구구단을 외웠는지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한켠에서 열심히 줄넘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단뛰기를 못 해서, 나머지 연습을 하게 된 것.

그래서 나머지 연습을 해 결국 넘었던가...? 아마 끝까지 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확실치는 않다.

희철이는 구구단을 못 외워서, 아니 외우긴 외웠는데 선생님 앞에만 서면 머리가 하얗게 비어 버려서 매일같이 나머지 공부를 한다.

외우고 또 외워도 왜 선생님 앞에만 서면 기억이 안나는지...

홀로 교실에 남아 구구단을 외우던 희철이 마음속에 선인장이 자란다. 아니, 선인장은 교실에서 자라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희철이도 선인장이 되어버린다.

마음에 온통 뾰족뾰족 가시가 돋아나더니 걷잡을 수 없는 행동들을 하기 시작한다. 구구단으로 자기를 힘들게 하는 엄마와 선생님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가시를 품고 있는 희철이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나도, 마음 속에 가시 품고 사는 날이 많아서, 희철이 마음이 낯설지 않았다. 희철이는 구구단 때문에, 나는 뭐 때문에...?

 

 

짧은 동화 네 편 읽으면서, 참 마음속에 여러 생각들이 많은 시간이었다.

어른이 되어 읽는 동화는, 어린이 때와는 무척 다른 감상을 전해주는 게 확실하다.

단순히 재미나 공감을 떠나, 자꾸 돌아보고 반성하게 만들기도 하고, 추억하게 만들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이 때는 느끼지 못 했을 어떤 애틋함 같은 게 함께 하니까.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동화속으로 여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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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잔치 소동 반달문고 27
송언 지음, 윤정주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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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벌어진 '돈잔치 소동'을 그린 동화이다.

'작가의 말'을 보니 지은이가 맡은 반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었던 듯한데, 실제로 아이들 사이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니 놀랍다.

 

반 아이들의 일기장을 검사하다가 이윤지가 친구들에게 돈을 '뿌리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선생님.

다음날 이윤지에게 돈을 받은 아이들을 하나하나 불러내 '돈 계산'을 해주고 다음날까지 갚을 것을 명령한다.

친구에게 공짜로 받은 돈을 신나게 써버린 아이들은, 뒤늦게 그 돈을 갚느라 고군분투.

아이들이 받은 돈도 적게는 천 원에서 많게는 몇 만 원까지 천차만별이지만, 그 돈을 갚기 위한 노력도 가지각색.

누구는 가지고 있는 장난감을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꼬마들에게 팔고, 누구는 이웃집 아이를 봐주고 돈을 받고, 누구는 엄마에게 달라 하고, 누구는 돈 갚는 대신 벌을 서겠다 하고...

이 과정을 통해 아이들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교훈을 얻었거나, 절대 남의 재산을 공으로 탐하지 말라는 교훈을 얻었거나 했다면 다행이지만, 분명 그 중에는 그냥 줘서 받은 것 뿐인데, 줘 놓고는 이게 무슨 짓이냐, 억울하고 짜증나는 아이도 있었겠지...(그러니까,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보니, 나는 그랬을 것 같더란 말이지...)

그 아이들은 각자 나름의 교훈을 잘 챙기길 바라고,

도대체 이윤지는 왜 친구들에게 그렇게 돈을 뿌리고 다녔는가가 무척 궁금했다.

돈이 아주아주 많은 집 아이인가? 아니,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렇게 친구들에게 마구 돈을 뿌리는 아이는 여태 듣도 보도 못 했다.

 

이윤지는, 심심해서 그랬단다. 심심해서 그랬는데 해 보니까 재미있기에 계속 그랬단다. 아이들이 돈을 그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다고...

어린 것이 벌써부터 돈으로 장난질이나 치고, 괘씸해보일 수도 있겠으나, 이어지는 윤지의 푸념이 가슴에 짠하게 맺혔다.

 

 

"엄마가 내 입장이 돼서 한번 생각해 봐. 아빠는 외국에 가 있고 엄마는 회사 일 때문에 날마다 바쁘잖아. 엄마가 언제 내 걱정을 해 준 적이 있어? 엄마가 나를 위해 시간 내주고, 놀아주고, 딸의 고민이 뭔지 알아보려고 노력한 적이 있느냐고. 일요일에도 엄마는 피곤하다고 잠만 자잖아! 재미있는 일이 생기면 거기에 푹 빠져들 수도 있는 거지. 아니야?"

엄마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시간 많은데 공부를 하면 좀 좋아!"

"학교에서 공부하고, 집에 돌아와서 또 공부하고, 날마다 공부에 빠져 살라고? 엄마라면 그렇게 할 수 있어?"

"동화책이라도 읽으면서 알차게 시간을 보내면 좀 좋아!"

"날마다 동화책만 읽으라고? 사람이 날마다 책만 읽으며 살 수 있어? 엄마는 그렇게 할 수 있어?" (나: 미안해, 나는 그렇게 살 수 있어...;;;)

"공부하다가 싫증나면 동화책 읽고, 동화책 읽다가 싫증나면 텔레비전 보고, 텔레비전 보다가 심심하면 숙제하고, 숙제하다가 외로우면 잠자고, 뭐 그러면 되잖아!"

"살다 보면 그렇게 안 돼!"

"……살다 보면? 네가 얼마나 살았다고 그래?"

"십 년 살았는데도 이렇게 힘든데,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니까!"

 

 

이 대목에서, 이 책은 아이들보다는,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을 외롭게 내버려두는 부모님들이 읽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바쁘다고 자녀를 외롭게 방치해둔 사이에, 그 아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부모님이 아셔야 할 텐데...

이윤지는 친구들에게 돈을 뿌리는 것으로 그 외로움이 가져온 마음의 장애를 표현했고, 다른 아이들은 또 각자의 나름으로 자기의 외로움을 풀기 위해 무언갈 하고 있을 테지...

이 세상에 '돈잔치 소동' 벌이는 아이들이 없도록, 모두가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예쁘게 자라길 바라는 거, 그런 걸 바란다는 것도 이상하다.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너무나 당연한 그런 것마저 쉽지 않은 이 세상의 부모님과 아이들은, 모두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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