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교과서 - 여자는 전혀 모르고 남자는 차마 말 못하는 것들
명로진 지음 / 퍼플카우콘텐츠그룹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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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이었다.
친구와 놀러나간 아들이 돌아왔다. 
친구는 잘 갔냐?라는 물음에 택시태워 보냈다고 했다. 
"태워 보내?" 
이 표현은 택시비를 이용자가가 아닌 누군가가 부담했다는 말이란 것쯤은 나도 안다. 
그래서 다시 반문.
 "계는 돈 없었데?" 
"아니, 내가 놀자고 불러냈으니, 내가 책임지고 돌려 보내야지. 

그래서 내가 택시비 줬어."
쿵!!
 난 주저없이 말했다. 
"역쉬..울 아들!! 상남자다!!"

하긴 이미 상남자였는데 눈 어두운 애비가 몰라봤을지도.
아들이 고등학교 진학하면서 이것만은 지키자고 부탁했다.
공부는 못해도 좋다,타인에게 피해는 주지 마라.
웃 어른의 말씀 중 우리가 지키며 사는 것이 몇퍼센트나 될까? 
울 아들, 한 가지는 완벽하게 지키며 만사태평에 희희낙낙이다.
역쉬~~상남자!!

명로진의 <남자의 교과서>는 상남자를 꿈꾸지만 찌질이로 살아가는, 

나를 비롯한 대다수 남자들을 위한 지침서다.
물론 그 지침이 정답이란 것은 아니지만, 이정도면 되는겨? 하며 들이댄다.
명로진이 보기에 한국 남자의 가장 큰 문제점은 기죽어 사는 것.
직장상사, 부모, 마누라(이런 문장엔 이런 단어가 적확하다!!), 자식새끼들(이 역시 적확한 단어), 잘나가는 친구들,기타 등등에 기죽어 사는 것.
그래서 제안하는 것이 마초정신을 회복하자는 것.
모델은?
우리 앞세대의 아버지들.

다시 말하지만, 명로진의 제안에 다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는 완벽 동의.
"배포있는 남자가 그립다".
작가님, 나도 그런 남자 그립소.
배포있는 남자....
나처럼 '배만 있는 남자' 말고.
(잃어버린 내 돌직구는 어디에 있는지..ㅠㅠ)

난 글렀어, 라고 생각하는 남자들에게 책에 소개되어 있는 

두보의 시 한구절을 옮겨 위로한다.
"丈夫蓋棺事始定 (장부개관사시정)
남자는 관 뚜껑이 닫힐 때 비로소 모든 일이 정해지는 법이다".

그래, 아직 나에게도 상남자의 가능성은 열려있다.

※유의사항: 이 책을 읽고 상남자의 비법이라도 전수받겠다고 생각할지 모르는 남자분들.
                 웬만한 각오없이는 아예 읽지 마라. 
                 술만 는다. 
                 내가 혹시 문제있는 사람인가 하는 분들, 읽어라.
                 마음의 공간이 좀 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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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강산 1 - 바다의 귀한 손님들이 찾아온다 박정배의 음식강산 1
박정배 지음 / 한길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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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목어(木漁)였고 좋았던 시절에는 은어(銀漁)라고 불렸다. 
그리고 지금은 말짱 도루묵이다.
 
생선의 일만 그렇겠는가.
누구나 은어를 꿈꾸지만 돌아보면 말짱 도루묵인 경우가 많다.
노력은 물거품이 된 것 같고, 정성을 들였던 이들은 떠난 것 같다.
손에 남은 것도 없고, 곁에 남은 것은 더더욱 없는 것 같은 외로움,
그런 허허로움에 속 상한 경험을 해보지 않은 않은 이가 있을까? 
 
논어를 보면 공자의 입맛 까다롭기가 보통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자가 부인을 쫓아냈다고 하지만, 요즘이면 공자가 쫓겨 나야할 판이다.
그럼에도 공자의 음식 취향 중에 옳거니 하는 것이 있으니,
불시불식(不時不食)!!
때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
 
천하 미식가 박정배의 <음식강산>을 읽으며 공자의 고집이 새삼 반갑다. 
박정배는 일년 내내 천대받고 싸구려 취급받는 도루묵을 무시하지 말라고 한다.
도루묵 알을 고무 씹는 식감으로 기억하고 있다면 그건 도루묵의 잘못이 아니다.
인간의 욕심이 빚어낸 당연한 결과다.
남획과 냉동, 때를 모르고 먹는 음식이 무슨 맛을 낼 수 있으랴.
(철모르는 것은 도룩묵이 아니라, 그것을 씹어대는 인간들이다!!)
 
생선도 때가 있으니,
주문진에서 11~12월에 먹는 도루묵의 알을 먹지 않고는 도루묵을 얕보지 마라.
도룩묵 뿐이겠는가?
전어는 가을이고, 주꾸미는 봄이며, 낙지는 찬바람이 나야 한다.
꼬막은 눈이 내려야 먹을만 하다.
때에 맞는 인간의 노력이 없으면 맛이란 찾아오지 않는다.
 
나는 은어가 되고 싶은데, 왜 여전히 도룩묵일까라는 쓸 데 없는 생각이 드는가?
아직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을 뿐이다.
그 때란 느닷없이 내일 당장 나타날지도 모른다.
우리가 부단히 자신의 내면을 갈고 닦아야 할 이유다.
 
갯것의 맛을 풍성하게 느끼고 싶은 이들이라면, 
한창훈의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와 함께 읽어 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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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너무 많은 여자 - 생각의 늪에 빠진 여자들을 위한 3단계 심리 처방
수잔 놀렌 혹스마 지음, 나선숙 옮김 / 지식너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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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남자들은 이럴 때가 가장 무섭다.
와잎이나 여친이 "우리 이야기 좀 해"할 때.
무언가 캥겨서 무서운 게 아니라, 남자들이란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결과가 좋으면 됐지, 뭘.
(이런 남자들의 심리를 잘 아는지, 같은 남자인 칸트는 정언명령이란 것을 만들어냈다. 
행위의 결과가 선하다 하더라도, 동기가 그렇지 않으면 선한 것이 아니다.
역쉬~칸트느님은 범생이? )
 
그런데 여자들은 결과로 만족하지 못한다.
여자는 관계지향적이기 때문이다.
과정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은 결과를 납득하려 하지 않는다.
(어서들 칸트느님 팬클럽에 가입하셔~)
 
수만년을 이어져온 수렵채집의 기간 동안 남자는 목표와 결과 중심으로 살아왔다.
왜냐고? 
그렇지 않으면 굶어죽기 때문에.
며칠째 주린 배를 움켜잡고 있다가 멧돼지 두 마리를 발견했다고 해서 두 마리를 쫓을 수는 없다.
두 마리를 다 놓치느니 한 마리라도 잡는 것이 사는 방법이다.
그리고!!
사냥물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떠들어서도 안된다. 
'남자는 과묵해야 한다'는, 윤리가 아닌 생존의 문제였다.
 
여자는 육체적 힘이 없(었)다.
자신의 생존 확률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 이웃들과의 관계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내는 노력이 필요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호감을 받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그 수단은 모두 대화다.
 
여성의 노동인 채집은 기본적으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가려내는 작업이다.
그 작업에도 대화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남녀의 말싸움에서 여자의 압도적 승률이 나오는 이유다.
 
이런 남녀의 차이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장소가 백화점이다.
남자는 눈에 들어 온 첫번째 물건을 집어들고 미련없이 돌아선다.
여자는 '더 둘러보고 올게요'라며 둘러대고 돌아선다.
그 순간 남자는 이 쇼핑 쉽게 끝나지 않음을 절감하며 따라 나선 것을 후회한다.
아니라고?
나만 그런가?
 
수잔놀렌-혹스마는 여자들이 관계지향적 특성으로 인해 
생각이 "너무" 많아서 스스로를 옭아매는 모순을 발견한다.
너무 많은 생각이 삶의 긍정성보다는 부정성을 키운다는 역설에서 빠져나올 것을 주문한다.
모든 사람을 돌보아야 한다는 의무감 따위는 팽개치라고 권한다.
타인에 의해 자신이 어떻게 규정될 것인지 집착하지 말고,
자신의 내면이 자신에게 하는 말에 더 귀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좀 심한 요약인지 모르겠지만, 한마디로!!
남자들의 특성 중에 제법 쓸만 한 것도 있으니 좀 갖다 쓰라는 말을 책 내내 한다.
 
예를 들면, 인사고과에 대한 남녀 반응.
남자: 좋은 평가는 제대로 된 평가(사람 보는 눈이 있군~ㅎㅎ)
        나쁜 평가는 근거없는 평가(자식, 사람보는 눈 더럽게 없네..이제부터 나는 널 개무시할거야~)
여자: 좋은 평가는 기분 굿~~
        나쁜 평가는  기분 우울(내가 뭘 잘못한 걸까? 평가자는 왜 날 싫어할까? 난 능력이 없는 걸까?등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자기 비하)
 
이 책은 남녀 모두가 실용서로 읽어도 좋겠다. 
여자가 우울해하면 덥석 '그 날'만을 떠올리는 마초들에게는 반쪽을 이해하는 참고서로,
무언가 자신없는 나날이 이어지는 여자들에게는 위로와 재충전의 기회로.
 
책을 읽고 나서도 여전히 무서운 것은 변함없다.
환청처럼 들려오는 목소리.
'우리 이야기 좀 해'
 
그래도 태도는 현대에 맞게 변할 수 있겠다.
회피가 아닌 해피한 수다로.
우리는 더 이상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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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치매 - 머리를 쓰지 않는 똑똑한 바보들
만프레드 슈피처 지음, 김세나 옮김 / 북로드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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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지금부터 자가 진단!!
내가 외워서 사용하고 있는 전화번호는 몇 개나 될까? 
열 개? 스무 개?
대답이 얼버무려진다.
내가 일상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대화하는 사람 수에 견주면 너무도 초라하지 않은가?
이유는?

그것이 거기 있기 때문이겠지.
여기서 그것은 전화번호, 거기는 스마트 폰.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목적지를 찾을 수 있는 길은 몇 곳이나 될까?
이런 질문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란 이렇지 않을까?
아니 그걸 왜?
그 또한 그것이 거기에 있는데!!
그것은 목적지고 거기는 네비게이션.

스마트(한) 기기의 사용이 늘면서 인간은 정말 스마트해지는 걸까?
뇌과학자인 저자 만프레드 슈피처는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한다. 
요점은 이것. 
인간의 뇌세포는 성장하는 게 아니란다.
다만 세포와 세포 간의 연결 기능이 얼마나 활성화되느냐의 문제란다.
(그래서 우리는 필름이 "끊겼다"라고 하지 않는가?)
뇌세포의 연결(시냅스)은 우리 몸의 근육과 같아서 사용하면 할 수록 굵어지고 강화되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가늘어지고 심지어 끊기게 된다.
이렇게 가늘어 지고 끊기는 것이 바로 치매.
<디지털 치매>는 인간이 디지털 기기를 이용하면 할수록 이러한 뇌의 연결 활성화는 감소되어 전반적인 뇌기능의 저하를 가져올 수 있음을 경고한다.
또한 연결의 가능성과 방향이 무한히 열려있는 아동기에 사용하는 디지털기기의 위험성은 성인의 그것보다 더 크다는 것을 수많은 데이터로 역설한다.
 
물론 디지털 기기의 장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많다.
알고 싶은 것은 언제든 구글에 접속하기만 하면 펼쳐져 있고,
공간을 과감히 생략한 채 소통이 가능하다.
 
그러나 단편적 지식이 정말 지식일까?
지식과 지식의 연결이 모두 끊긴 채 나열되어 있는 지식이 지식일까?
암기력과 창의력의 거리보다, 검색능력과 전문성,창의력의 거리는 훨씬 더 멀다.
상상해보라.
배가 아파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구글에 "배가 아파요"를 입력하고 검색하는 상황을. 
 
뇌기능의 퇴화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행동의 문제다.
아동기에 디지털 기기에 노출되면 될수록 빈도 높게 발생하는 통제력의 상실.
장기 목표를 위해 단기간의 욕구를 일정 정도 억제하며 사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텐데, 
충동적으로 질러놓고 보자는 청소년들.
타인과의 공감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 
쉽게 스트레스에 노출되는 사람들.
만연한 우울증, 그리고 자살의 확산.
 
저자의 충고 중 가장 내 마음을 아픈게 한 것.
"부모들은 내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뒤쳐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컴퓨터를 사주고,
 디지털 기기를 이용하게 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아이는 디지털 치매에 걸린다는 것"
"부모들은 보채고, 놀아달라 하고, 이상한 것만 묻는 아이가 귀찮아서 텔레토비를 보게 하고, 
디지털기기를 갖고 놀게하지만 그것은 더 큰 재앙으로 올 것"이라는 충고!!
 
마당에 풀을 뽑다 막걸리 서너 사발에 얼큰하게 달아오른 우리 부부는
후회섞인 반성으로 오후를 보냈다.
다음 주말 텃밭 갈이는 반드시 아들 녀석에게 시키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도 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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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왕국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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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거슬를 수 없는 트렌드이며, 유일한 보증수표가 되었나 보다.

역사를 이야기 한다는 것, 역사적 사실의 단초를 부여잡고 상상의 살을 보태 아득한 지난  날을 이야기하는 소설들이 널리 읽히고 있으며, “많이 팔리고” 있다.




역사의 종언을 고하고 그 종언을 부흥회의 간증처럼 서로 토해내며 한없이 가벼워져만 가는 시대에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발흥한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차피 역사의 운명이라는 것이 ‘현실과의 끊임없는 대화’에 의해 변주되고 뒤틀어질 고약한 것이라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역사와 대화를 하려고 마주 앉아있는 현실이라는 놈의 포즈가 어떠한지를 문제삼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 포즈라는 것이 조정래와 김훈이 다르고, 김별아와 박경리가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김경욱이라는, 나로서는 낯선 화자의, 무엇보다도 가장 최근 포즈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평소 품은 한국 소설에 대한 편견을 입증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김경욱은 소설을 통해 벨테브레, 이방인이 본 조선 후기의 사회학을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재구성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조선을 시의 나라로 읽는 벨테브레의 시선이야 말로 중상주의가 만개하고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종교개혁과 과학사상이 폭발했던 서구의 산문정신과 또렷히 구분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느리게 살고, 슬픔이 많고, 울음이 많고, 호기심이 많은 삶을 눈 파란 이방인, 그것도 무장을 앞세운 상선의 항해사가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는 미리 정해진 길처럼 간명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의 여러 갈피에서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허무는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질문을 적지 않게 만났다는 점에서 큰 위안을 받았다.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개인의 전략과 집단의 전략사이의 긴장과 갈등, 젊은 관리가 보여 준  사랑에 대한 질문들. 돌아갈 곳 없는 자의 의탁처(신)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들은 두고두고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었다.

소설이 현실의 가파름을 피하는 방법으로 과거로 숨는 방식은 온당치 못하다는 것이 내 오래된 편견이지만, 과거와 현실의 어디에도 놓여있는 보편적 질문을 놓치지 않고 있는 것에 그나마 김경욱을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끊임없는 직설과 대구, 조각조각 분해되어 이어지는 단문의 현란함. 이문열을 닮고 싶어하지만 김훈을 닮은듯한 김경욱의 질문에 나도 기꺼이 동참하고 싶어진다.

다만, 과거와의 대화에 현실이 좀 더 분명하게,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소설들이 더 기다려지는 것은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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