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식 룰렛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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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저는 사실 소위 말하는 순문학 소설을 즐기지 않는 편입니다.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책 좀 읽었다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정도로 유명하고 명망 있는 작가의 소설이라면 더욱요. 그간 읽었던 그런 작품들이 대부분 우울하고, 어둡고, 이해 못하겠고, 어려웠던지라 지레 겁을 먹어서이기도 하고, 순문학 소설은 대부분 재미없을 거야...하는 고정관념 때문이기도 하구요. 게다가 은유와 상징이 짙은 단편 소설들이라면 더욱 기피 대상이지요. 그럼에도 집어든 은희경 작가의 이번 단편집. 아주 오래전에 (대학시절이었던가;;) 그녀의 단편집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읽은 기억과 더불어 그때도 역시 어려웠던 기억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용기내어(?) 도전(?)해 보았지요. 딴엔 그간 나의 정신적, 지적 수준이 조금은 성장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도 내심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섯 편의 단편이 모인 이 작품집은 역시 어려운 구석이 많았습니다. 작가의 의도를 완벽하게 캐치하지 못하겠는 부분이 많았지요. 그리고 역시 대부분의 작품들의 분위기는 어둡습니다. 또한 차갑습니다. 따뜻하고 유쾌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저에겐 참 안맞는 소설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 한켠을 비집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20대 초반에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무언가. 그 무언가의 정체가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 보니, 작품 속 주인공들에게서 저의 모습들을 보았기 때문이더군요. 여섯 단편의 주인공들은 연령도 성별도 직업도 제각각인데, 그 제각각에서 한가지 두가지 제 모습이 보이더란 말입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자기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지 못하고 마치 누군가의 인생에 끼어든, 단편들 중 하나의 제목인 <대용품> 같은 인생을 무기력하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그 점이 바로 저는 '저'를 보는 듯 해, 씁쓸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가슴 속에 파고드는 무언가와 함께 자그마한 위로와 희망을 작품 속에 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비슷하게 살아간다는 거,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불운을 탓하지만, 알고 보면 사람의 인생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증발되는 건 단지 2%의 행운일 뿐이라는 것 등등을 말이죠. 때문에 작품 작품들 말미엔 어떤 희망의 자그마한 빛이 보입니다. 생각해보니 이 소설집 전체 구성 및 순서가 그러했던듯 싶습니다. 작품집의 첫 작품이자 표제작인 <중국식 룰렛>에선 죽음이, <장미의 왕자>에선 상실감을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뒤의 작품들일 수록 희망이 빛이 더 진해지죠. <불연속선> 같은 경우는 상실감 끝에 새로운 만남을 준비해 놓아 감동을, 마지막 작품인 <정화된 밤> 에선 결말에 이르러 미소가 지어지더군요. 마치 터널을 빠져 나오는 과정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터널은 어둡지만 이내 터널을 빠져나온 후 맛보는 눈비시겠지요? 때문에 터널을 달리는 동안은 두렵겠지만, 이는 곧 더 좋아진다는 뜻이겠지요?

 

단편집을 읽을 때마다, 책을 읽어나가는 속도는 참 빠른데, 완독 후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은 그와 반비례하다는 걸 느낍니다. 심각하고 어렵고 두려운 건 늘 쉽게 은폐버리고 마는 성격 덕에 기피하지만, 읽고 나면 늘 꽤 큰 만족감을 느끼는 순문학 단편집. 앞으로 더욱 자주 읽어줘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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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아 7호
미스테리아 편집부 엮음 / 엘릭시르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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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번 독특합니다. 일본 원어로는 대체 어떤 말이었길래, 번역이 정말임꽈?...로 되었을까요? 뭐 어쨌든, 이 ~~~임꽈?...하는 말투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하마다'라는 가출 청년(청소년 노노 청년)의 독특한 말투였습니다. 가출하는 주제에 부모님의 값비싼 세단을 타고, 부모님이 결제하는 카드를 고대로 사용하며 온갖 불가능한 범죄가 일어나는 가마쿠라시(일본에 실재하는 가마쿠라가 아닌 한자가 다른 가상의 도시)에 도착한 하마다 청년은 '슈퍼 호이호이'의 주차장 한켠에서 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는 '이나가키'를 만나 그의 조수로 취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나가키가 정신과 전문의 과정을 거친 의사거나, 심리학자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떤 전문가 보다도 고객의 상담을 진지하게 듣고, 진지하게 어드바이스하며, 진지하게 도움을 주지요. 심지어 상담 의뢰인의 고민이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요.'인 경우에도 말입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상담소에 진짜 고객들이 찾아와 상담을 하고 상담료를 내놓고 떠난다니 말도 안된다...싶지만... 우리는 누구나 고민이나 걱정거리를 떠안고 살아가고 누군가 그 고민이나 걱정거리를 들어줄 사람을 원하는게 당연하니 어쩌면 이나가키의 상담소가 실재하더래도 꽤 장사(?)가 잘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무튼, 하마다 청년은 이나가키가 부탁한대로 일주일 동안 상담소에서 이나가키가 하는 일을 배웁니다. 그리고 일주일째 되는 바로 그날. 짜잔! 등장하는 반전과 그제서야 이해되는 앞의 복선들. 그리고 이어진 결말... 저는 이 결말이 꽤나 충격(?)적이었달까요. 구구절절 떠들어대면 스포가 될 테니 그럴 수 없지만, 뭐랄까 제가 원하는 방향의 결말이 아니었달까요... 어찌보면 좀 무섭기도 해달까요...;; 아아, 그러고보니 그곳은 온갖 불가능하고 말도 안되는 범죄가 저질러지는 가마쿠라시였으니... 그래서였던걸까...싶기도 하네요.

 

작가가 누구인지 모르고 봤더라면 이사카코타로의 작품인 줄 모르고 읽었을 법하게 이사카코타로의 작품의 느낌이 나지 않으면서도, 이사카코타로의 작품인 걸 알고 읽으면 역시 이러이러한 점이 이사카코타로답고 느끼게 되는 묘한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이사카코카로의 엄청난 팬이므로 가끔씩 아주 아주 가끔씩 이런 금쪽 같은 단편이 번역되어 소개되는 것이 매우 기쁩니다.

 

이 작품은 원래 일본의 유명 작가들이 온갖 불가능한 범죄가 일어나는 도시 '가마쿠라'시를 배경으로 한 연작 소설이라고 하네요. 때문에 하마다 청년 정말임꽈...에서도 이 작품의 바로 앞 작품인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 속 소재들이 언급이 되구요. 그 작품을 읽고 하마다 청년 정말임꽈를 읽었으면 훨씬 더 재밌었을 텐데...하고 좀 아쉽습니다. 미스테리아에 이렇게 단편 하나를 소개했으니 엘릭시르에서 혹시나 그 단편집을 번역해서 정식 출간해주지나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p.251 지나치게 황당하고 수수께끼 같아 보이는 사건 앞에 서면 자신이 안고 있는 고민이나 부조리 같은 건 대단한 게 아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지 않습니까. 즉 자신의 까닭 모를 고민을 그보다 더 까닭 모를 범죄 속에 묻히게 하자는 무의식이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짐작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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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션 일레븐 스토리콜렉터 45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 한정아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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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이라는 소재나 '전염병'이라는 소재가 쓰였다는 소개를 보고 저는 솔직히 '설국 열차'나 정유정 작가의 '28'같은 작품들을 떠올렸었습니다. 설국 열차도 28도 몹시 좋아하기에 이 작품에 대한 기대치도 그만큼 컸었지요.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앞의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점은 지극히 개인적인 제 기준으론 전혀 제 취향이 아니었습니다.

 

전 세계에 독감이 돌고, 치사율이 거의 100퍼센트에 달하는 이 독감 때문에 인류가 거의 멸종 위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그동안 쌓아왔던 문명들 또한 사라지죠. 특히 전기가 말입니다. 바로 이 점부터 저는 납득이 되질 않았습니다. 전염병이 돌았는데 어째서 전기가 사라지는지 말이죠. 지구에 종말이 왔음에도 유랑 극단이 존재하듯이 인간은 생존만으로는 부족해 하는 생명체입니다. 그런 존재가 아무리 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었을지언정 그로 인해 전기 등의 문명이 싸그리 사라졌다는 점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은 결코 생존만으로는 만족해할 생명체가 아니기에 분명 살아남은 극히 일부의 사람들은 그 문명을 금세 일으키려 했을 테니까요. 게다가 빙하기가 왔다든가, 운석이 충돌했다든가 하는 것이 아닌 독감이라는 전염병이 돌아 인간만이 그 피해를 입었으므로, 인간 외의 자연이나 생명체는 온전했습니다. 때문에 일단 식량이 확보가 된 것이죠. 물론 어마무시한 전염병이 전 지구를 휩쓴 공포덕에 한동안은 그 트라우마로 세계가 공허에 빠질 수는 있습니다만 그 기간이 20년 가까이 된다는 것 또한 말이되질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인간이 이루어 놓은 건물이나 시설이나 기록들도 온전히 보존되었을 테구요.(불이 나거나 쓰나미가 휩쓴 게 아니니까요.) 그럼 분명 살아남은 인간들이 그리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아 그들이 누렸던 문명을 복원하거나 유지하려고 노력했을 거고,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니까요.

 

셰익스피어는 앞으로도 영원히 읽힐 너무나 위대한 작가이지만, 인간이란 존재가 그들이 누렸던 문명의 이기를 다시 세우는 일은 하지 않는데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즐겼다니... 이는 매슬로우의 욕구 위계설에도 어긋나는 거 아닌가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유랑 극단도 자주 하는 말이지만 인간은 결코 '생존'만으로 만족해하는 존재들이 아니니까요. 때문에 이런 말씀 드리기 정말 죄송스럽지만 작중 인물들의 그런 낭만을, 그리고 작품 속에서 묘사하고 있는 문명이 사라진 세상은 전혀 납득이 가질 않았습니다. 작품의 큰 맥락이 납득이 가질 않으니, 독서의 즐거움도 느낄 수 없었구요. 제가 '낭만'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이라서, 혹은 이런 고품격 작품을 이해하기엔 이해력이 부족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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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이 새겨진 소녀 스토리콜렉터 44
안드레아스 그루버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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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밝혀온 바지만, 저는 캐릭터가 매력적인 소설을 정말 좋아합니다. 그래서 캐릭터가 살아있으면 스토리가 조금 부족하더라도 후한 점수를 주곤 하지요. 그런데 캐릭터의 매력에 스토리까지 뛰어난 시리즈를 아주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안드레아스 그루버'라는 독일 작가가 쓴 '슈나이더&자비네' 시리즈가 바로 그것입니다. 시리즈의 첫 작품인 <새카만 머리의 금발 소년>을 며칠 전에 굉장히 재미있게 읽고 쫀쫀한 긴장감이 살아 있는 스토리와 슈나이더의 정말 독특하기 짝이 없는 개성에 매료되었었는데, 후속작인 <지옥이 새겨진 소녀>에서는 캐릭터의 매력과 스토리의 치밀함이 더욱 발전하였더군요.

 

이야기는 오스트리아와 독일 두 곳에서 동시에 진행됩니다. 오스트리아의 멜라니 검사, 독일의 자비네(이번 작품은 슈나이더 보단 자비네의 활약이 더 두드러진다고 느꼈습니다.)가 조사하는 각각의 사건이 전혀 무관하게 전개되지요. 멜라니는 클라라라는 소녀의 유괴 사건을 조사하고, 자비네는 연방수사국 아카데미에 입학해 슈나이더의 수업을 들으며 그가 낸 과제를 해결하는 와중에 여러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이렇듯 정말 전혀 상관없을 듯한 사건들이 소설 중후반부를 지나면 자연스레 하나가 됩니다. 저는 이런 플롯을 참 좋아하는데, 멜라니와 자비네가 협조 수사를 할 땐 왠지 희열감마저 느껴지더군요.

 

'아동'이 피해자인 이야기들은 언제나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그저 소설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우리의 현실속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아니까요. 때문에 이를 소재로 하는 이야기들을 대체적으로 참 무겁고, 분노를 불러 일으키기 마련인데, 이 작품에선 슈나이더의 괴팍하고 정말 말도 안되는 성격과, 이를 은근 디스하며 그누구보다도 슈나이더를 잘 다루는 자니베의 환상적인 콤비플레이가 자주 웃음을 유발하여 작품을 지하 세계로 가라앉지 않게 끌어올려줍니다. 리뷰를 쓰고 있는 지금도 어쩐지 귓가에 슈나이더가 자비네를 놀리기 위해 '다람쥐'라고 부르는 소리와, 자비네가 슈나이더를 놀리기 위해 그의 네덜란드 억양을 따라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웃음이 나는군요.

 

그리고 또 하나 이 작가가 마음에 드는 점이 있습니다. 아마 작가가 개를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리라 추측된다는 점이지요.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생명체는 '개'님이고, '개'님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악한 사람은 없다는 편견을 가진 사람이거든요.(ㅋㅋㅋㅋ;) <새카만 머리의 금발 소년>에서도 '개'는 꽤 중요한 배역을 차지하며 중요한 순가에 매우 중요한 일을 해내는데, 이 작품에서도 그렇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그런 매력적인 '개'님이 두 마리씩이나 등장해서 이런 점도 정말 좋았달까요;;;

 

게다가 작품 말미에 특별 부록의 넣은 슈나이더와의 가상 인터뷰는 또 어찌나 웃기던지요. 말이 슈나이더와의 인터뷰지 질문은 전부 작가인 안드레아스 그루버나 자비네와 관련된 질문딘데가 대부분 3문장 이상으로 이루어진 질문들이었으니 (물론 가상이지만) 그 인터뷰를 당한 슈나이더를 생각하니 또 웃음이 나고 맙니다. (분명 스릴러 소설인데 자꾸 웃음이 나지 말입니다;;; ㅋㅋㅋ;;)

 

스토리도, 캐릭터도, 심지어 개가 등장한다는 점까지 뭐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소설. 올해 읽은 스릴러 소설들 중에선 단연코 가장 재밌었다고 말할 수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시리즈를 거듭할 수록 자비네와 슈나이더의 케미는 점점 더 깊어만 가니 작품 말미에 예고된 그들의 세번째 이야기가 벌써 너무나 기대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상 슈나이더가 결코 반길 리 없는 핵심은 별로 없고 쓸데없이 길기만 한 리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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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틈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지넷 윈터슨 지음, 허진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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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작가, 남녀노소 누구나 읽는 작가, 작가들이 가장 존경하는 작가...이런 수식어들을 모조리 달고 다니는 작가가 있다면 과연 누구일까요? 저는 오로지 한 사람만이 떠오릅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그가 서거한 지 400년이 흐르고, 현 시대를 살아가는 위대한 작가들이 모여 위대한 프로젝트를 기획하였으니, 이는 '셰익스피어 다시 쓰기'입니다. 호가스 출판사에서 기획한 이 프로젝트에 참가하기로 한 작가들은 앤 타일러, 요네스뵈, 길리언 플린 등 라인업이 굉장히 화려합니다. 셰익스피어를, 그리고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굉장히 설레고 흥분되는 프로젝트지요. (저도 개인적으로 특히 요 네스뵈가 다시 쓰는 맥베스가 굉장히 기대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현재 세계적으로, 대중적으로, 평단에서도 두루 인정 받는 작가라도, 다른 누구도 아닌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다시 쓴다는 것은, 작가 인생에 있어서 크나큰 영광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한 부담감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잘 써봐야 본전이랄까요? 하물며 이 어마어마한 프로젝트의 첫 스타트를 끊는 것은 더더욱 큰 부담이었겠지요. 이 어마어마한 일을 해낸 작가는 바로 '지넷 윈터슨'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택한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우리나라에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겨울 이야기'이구요. 하지만 다행히(?) 책의 도입에 '겨울 이야기'의 줄거리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즉,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는 원작으로, 지넷 윈터슨이 쓴 '시간의 틈'은 개작이라고 표기가 되어 있지요. 패러디나 오마주가 아닌 '개작'이란 단어를 사용했다면, 원작을 아주 잘 살리겠단 뜻이지요. 저는 솔직히 이 프로젝트 자체가, 작가들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조금의 모티프만 따 올 뿐 원작과는 전혀 다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개작'이란 단어는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지 않을까 생각했지요. 그런데 정말 '개작'이라는 표현을 쓸 법 하더라고요. 소설의 무대가 400년이 지난 현대라는 점, 시칠리아라는 가상의 나라는 주인공 '레오'가 경영하는 회사 이름이라는 점 등 몇가지 요소들이 현대의 시기에 맞게 수정되었을 뿐, 원작의 캐릭터나 스토리 등은 잘 살아 있었습니다.

 

시칠리아 해지 펀드의 경영자이자 난폭하고 속물인 '리오', 세계적인 컴퓨터 게임 개발자이지만 자유로운 영혼 '지노', 유명한 미녀 샹송 가수인 '미미'. 작품의 전반부는 이 세사람의 러브 스토리입니다. 하지만 러브 스토리 앞에 '아름다운'이란 수식어를 붙일 수는 차마 없을 것 같네요. 그들의 러브 스토리를 압축할 수 있는 단어들을 나열해 보자면, 질투, 동성애, 불륜 등등이 되거든요. 흡사 사랑과 전쟁이나 아침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막장 요소들이지요. 그리고 이런 스토리의 중심엔 '리오'가 있습니다. 지노의 죽마고우이자 미미의 남편인 리오는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해서 질투에 눈이 멀어 갈 때 까지 가고 맙니다. 미미가 낳은 여자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닌 지노의 아이라고 판단 급기야 아이를 버리는 일까지 행하거든요. 결국 미미가 낳은 여자 아이는 베이비 박스에 버려져 한 흑인 남자의 손에 길러집니다.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17년이 흐르지요. 이제 숙녀로 성장한 '퍼디타', 그리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 남자 '젤'. 17년 전과는 다르게 조금은 순수하게(?), 그렇지만 애틋하게 펼쳐지는 후반부의 이야기. 그렇게 과거와 현재는 닮은듯 다르게 얽히고 설켜갑니다. (아직 책을 읽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 줄거리는 딱 여기까지만;;;)

 

작품을 읽어 가며, '리오'라는 캐릭터를 보며, '질투'라는 감정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내린 결론은 결국 질투도 사랑의 한 방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리오'가 행한 행동들이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무마되기 힘든 면도 있지만, 결국 리오의 그 지극한 '사랑'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것이니까요.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리오의 질투의 대상이 과연 '지노'인 것인지, '미미'인 것인지 헷갈린다는 점입니다. 지노의 경우는 분명 게이였지만, 리오는 그게 조금 애매하거든요. 분명 미미를 지극히 사랑하는데, 지노도 못지 않게 사랑하는 것 같더란 말입니다. 결국 이야기를 파국으로 몰고 간 리오의 '질투'는 지노와 미미가 리오를 버릴까봐 불안하여 생긴, 일종의 애정 결핍 비슷한 것은 아니었나...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 엇나간 방식의 사랑의 대가로 불행해집니다. 리오라는 인물은, 작품을 읽어 가는 내내 제 내적 갈등을 심하게 일으키게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절대 이해가 안됐다가, 한없이 안쓰러워지기를 반복하는 인물이었거든요. 그리고 '질투'가 엇나간 방식의 사랑이라면, '용서'는 지극히 위대한 방식의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때문에 '질투'로 벌어진 파국을 '용서'로 바꿀 수 있는 인물이라면, 충분히 사랑하고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거겠지요. 이 작품 속에서의 그 사람(?)처럼 말입니다. 게다가 과거의 파국 속 주인공들은 17년이라는 '시간의 틈'에서 충분히 고통 받으며 속죄했을 테니, 용서 받을 자격도 있지 않을까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참 막장적인 요소가 많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몹시 섬세한 문장들이 그런 요소를 고품격 문학으로 승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문학이니 문장이니 쥐뿔도 모르지만요;;;) 그리고 심지어 잘 읽히기까지 합니다. 무거우면서 경쾌하지요. 때문에 순문학이나 고전을 읽을 때면 몹시 힘겨워 하는 저도 매우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하늘에서 셰익스피어도 굉장히 흐뭇해하며 아빠 미소를 짓지 않을까요? '호가스 셰익스피어' 프로젝트의 다른 작품들도 몹시 기대됩니다. 다음 작품들이 나올 동안 셰익스피어 작품들 복습부터 해두어야 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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