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종가의 색목인들 셜록, 조선을 추리하다 1
표창원.손선영 지음 / 엔트리(메가스터디북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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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전 세계에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남녀노소, 독서가 취미이거나 아니거나 셜록 홈즈가 등장하는 단편 하나쯤 읽어보지 않았거나 그가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 한편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 포진해 있다는 셜로키언들, 때문에 100년 넘게 끊임없이 회자되고, 패러디 되고, 패스티시 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이 셜록 홈즈이지요. 그런데 작가가 밝혔듯, 우리나라에는 딱히 그런 작품들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시리즈의 첫 작품인 '운종가의 색목인들'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죠.

 

이야기는 셜록 홈즈가 모리어티 교수와 함께 계곡으로 추락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코난 도일은 이 이야기를 썼을 때만 해도 셜록을 회생시킬 생각이 없었다고 하죠. 하지만 수많은 독자들의 요청에 셜록 홈즈는 몇 년 후 회생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홈즈가 계곡으로 추락하였다가 회생하여 돌아올 때까지의 빈 시간을 채우는 이야기입니다. 작가(들)은 그 빈 시간 동안 셜록이 조선에 왔을 거라고 상상&설정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홈즈에겐 응당 그를 돕고, 중재하며, 그의 이야기를 기록해주는 왓슨이 있어야하지요, 하지만 왓슨은 셜록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시기이니 왓슨을 대신할(?) 인물이 등장합니다. 배경이 조선인 만큼 조선인으로 말이지요. 왓슨과 이름도 닮은 와선, 무려 여성으로 등장합니다. (약쟁이) 홈즈가 조선으로 오는 배에서 사경을 헤맬 때 그의 목숨을 살리는 간호사로 등장하는 와선은, 다름아닌 실존 인물이었던 이제마의 딸이었습니다. 서자였던 이제마는 조선의 현실적인 한계를 일찍이 깨달았기에 딸을 미국으로 입양을 보내 신문물을 터득하도록 했었습니다. 때문에 와선은 통역관 겸 주치의(?) 로 홈즈와 함께 하게 됩니다. 솔직히 저는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은 홈즈보단 와선이 아니었나 싶을 만큼 그녀의 시점으로 많은 사건들이 전개됩니다. 생각해보면 조선인으로서 홈즈라는 외국인을 맞이하는 것이니, 독자들의 공감을 더 잘 불러일으키도록 하는 장치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명탐정이 있는 곳엔 희대의 악당또한 존재하기 마련이지요. 조선 곳곳에서 색목인 길거리의 여자들이 잔인하게 살해되는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용의자는 지에커라고 불리는 영국인. 어랏! 어디서 많이 본 설정인데? 시기도 비슷하고! 싶으시죠? 저역시 머릿속에 곧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지요. 하지만 그 짐작은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답니다. 진실은 책 속에서 직접 확인하시길^^;; 아무튼 작품의 큰 줄거리는 이렇게 홈즈와 지에커의 대결을 그려나가고 있습니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점은 무엇보다 셜록 홈즈라는 소설 속 가상의 인물과 알렌, 이제마 같은 실존 인물과 오롯이 이 작품으로 탄생한 가상의 인물들이 모두 함께 한다는 점입니다. 시기와 장소를 적절히 활용하여 이들을 참으로 자연스레 어울리게 만들어놓았지요. 때문에 작품을 읽어나가다 보면 100여년 전 조선에 실제로 이런 일이 이런 인물들에 의해서 벌어졌던 것은 아닌지 생각할 정도로 몰입하고 맙니다. 저는 이런 설정들을 몹시 좋아하기에 작가(들)의 이런 센스에 박수를 보냅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셜록 홈즈 시리즈를 전부 읽진 않았습니다만 어설프게나마 원작에서의 셜록 홈즈의 성격을 알고 있기에, 이 책을 읽은 많은 분들이 지적하듯 원작의 홈즈와 이 작품 속에서의 홈즈의 성격에 괴리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그리 거북하거나 불편하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꽤 재밌었습니다. 뭐랄까... 조금은 한국 사람들 취향에 맞게 변형된 셜록 홈즈의 느낌이 났다고나 할까요? 영드 셜록도 그렇잖습니까? 19세기의 홈즈가 21세기에 재창조 되면서 현대적인 감각으로 많이 바뀌었듯이 영국의 홈즈가 조선에 오면서 조선의 구미에(?) 맞게 바뀌었다는 느낌입니다. 때문에 시리즈가 계속되며 조선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질 수록 점점 더 조선에 융화되어갈 '한국형 홈즈'가 저는 오히려 기대가 됩니다.

 

1880년대 조선은 상투적인 표현을 빌려 오자면, 그야말로 풍전등화같은 상황이었지요. 개화와 수구 사이의 갈등, 밀려드는 외부 세력들, 그리고 그들의 이권 다툼,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조선의 백성들. 이런 조선의 모습도 상당히 잘 담겨있습니다. 저는 워낙 이 시기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보니 이런 점들도 이 작품을 읽어가며 찾은 재미중에 하나였습니다. 이런 조선의 상황에 필요한 인물들, 그 인물들 중 하나가 바로 홈즈라고 판단한 이제마의 선택. 그렇게 홈즈는 조선에 머물려 많은 사건을 해결해 나갈거라고 하는군요.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서 말이죠. 홈즈가 조선에서 해결한 사건들, 그리고 홈즈와 이제마의 콤비플레이가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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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퀸 : 유리의 검 1 레드 퀸
빅토리아 애비야드 지음, 김은숙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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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층인 은혈, 피지배 계급인 적혈로 나뉘어진 세계. 은혈들은 각 가문에 따라 특별한 능력을 대물림 하는데, 이 능력을 바탕으로 적혈들을 지배하며, 또한 이웃나라와 오랫동안 전쟁중입니다. 하지만 은혈들에게만 있다고 믿어온 그 특별한 스킬이 적혈 소녀인 메어에게도 나타나게 되죠. 이때문에 궁에 살게 되며, 두 왕자와 썸도 타면서, 스승을 만나 자신의 스킬을 더욱 발전 시켰던 메어. 그러나 이런 소설이 보통 그렇듯 메어에게 찾아온 반전과 배신. 그렇게 1부 적혈의 여왕이 끝났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2부 유리의 검이 출간되었네요. 1부에서는 주로 인물 소개, 세계관의 소개가 주를 이루었다면, 2부에서는 메어의 본격적인 모험이 주를 이룹니다. 일단 그녀의 행동 반경이 방대해져서 스케일 또한 어마어마하게 커졌지요. 반란군으로 몰려 쫓기게 된 메어와 칼, 죽은 줄로만 알았던 메어의 오빠 쉐이든의 등장, 주홍의 군대의 실체, 은혈은 아니지만 은혈처럼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신혈'들. 이 모든 내용들을 담고 있기에 한편의 블럭버스터 영화를 보는 듯합니다. 실제로 영화화가 결정되었다고하니 기대해봐도 좋겠네요.

 

2부 유리의 검의 묘미는 역시 더욱 화려하고 스펙타클한 전투씬이 아닐까 싶네요. 아예 나라의 군대가 통째로 메어를 쫓고 있는데다가 거듭 등장하는 신혈들의 놀라운 능력들. 역시 레드 퀸 시리즈는 로맨스라기 보단 모험, 액션 블럭버스터입니다.

 

그리고 작품의 스케일에 비례해 메어의 고난의 스케일 또한 점점 커져만 갑니다. 영웅 소설의 주인공이나 진배없으니 당연한 과정이겠지만, 좀 안됐다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메어. 그래도 이 시리즈의 제목이 레드 '퀸'인데 시리즈 마지막 3부에선 결국 메어가 복수에 성공하고 승리하여 결국 '퀸'이 되는 거겠지요? 현재 작가가 3부를 집필중이라고 하던데...... 드디어 펼쳐질 메어의 성공담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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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레드 에디션, 양장) -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우리에게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백영옥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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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고 슬프지만 굳세게 자란 소녀가 있습니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의 앤 셜리. 어렸을 적에 참 재밌게 봤던 애니메이션입니다. 그 소녀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는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백영옥 소설가의 에세이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작가는 번번이 등단에 실패하여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졌을 때 빨강머리 앤을 보고 용기를 냈다고 합니다. 그뒤로도 힘든 일이 생길 때, 그래서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어질 때마다 이 애니메이션을 본다고 합니다. 때문에 이 에세이집을 내려고 기획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 또한 빨강머리 앤을 보며 위안을 얻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20대 중반즈음 하는 일마다 번번이 실패하던 그 시절, 불현듯 어린 시절 보았던 빨강 머리 앤이라는 애니메이션이 떠올라 1화부터 50화까지 내리 보았었더랬지요. 앤의 못말리는 수다에 킬킬 웃다가, 매튜 아저씨나 마릴라 아주머니 때문엔 펑펑 울다가, 길버트를 생각하면 설레기도 하다가. 무엇보다 앤의 정직하게 순수한 초긍정의 캐릭터 덕에 덩달아 긍정의 에너지가 솟아났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영옥 작가 또한 앤의 성장담 속에서 긍정의 에너지와 더불어 자신의 인생 이야기들을 풀어놓습니다. 책을 읽어나가며, 빨강 머리 앤에 이렇게나 주옥같은 대사가 많았었나 새삼 놀랐더랬습니다.

 

p.22 한 그루의 평범한 벚나무를 아늑한 자기만의 방으로 멋지게 바꿀 줄 아는 앤은 사랑스럽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운'앤의 그 말을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고 싶다. 기다리고 고대하는 일들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게 실제 우리의 하루다. 하지만 그럴 때 앤의 말을 꺼내보면 알게 되는 게 있다. 희망이란 말은 희망 속에 있지 않다는 걸. 희망은 절망 속에서 피는 꽃이라는 걸. 그 꽃에 이름이 있다면,, 그 이름은 아마 '그럼에도 불구하고'일 거라고.

 

그렇다고 작가가 빨강 머리 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들이 '앞으로는 다 잘 될 거야.'라는 식의 메시지는 분명 아닙니다. 오히려 성공보다는 실패가 훨씬 더 흔히 일어나는 것임을, 때문에 우리가 실패라는 녀석을 당당히 받아들여야 함을 이야기 합니다. 또한 슬픔을 억지로 이겨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슬퍼하고 울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현실적이죠. 하지만 전 오히려 그래서 더욱 좋았습니다. 달콤한 무조건적인 희망에의 기대는 비현실적인데다가 희망고문만큼 잔인한 고문도 없는 것일 테니까요.

 

p.170 꿈과 현실. 그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나는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우리의 삶이 두부를 자르듯 명확히 잘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살면서 어떤 종류의 고통을 참을 것인가. 그것을 결정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p.200 기운이 날 것 같지 않고, 나게 하고 싶지도 않다면, 슬픈 채로 있는 게 낫다. 지금은 눈물을 흘릴 때이고, 울어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슬픔의 무게는 덜어내는 게 아니다. 흘러 넘쳐야 비로소 줄기 시작한다. 그래야 친구들이 다가오고, 함께 슬퍼할 수 있다. 위로받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에야 슬픔은 끝난다.

 

거의 매 페이지에 애니메이션에서 가져 온 삽화들과, 앤의 주옥같은 대사들이 등장하는, 이 아기자기하고 예쁜 책은 아련한 과거의 추억과, 현재의 나를 다독여주는 위로를 동시에 전해줍니다. 누군가의 성공 뒤엔 누군가의 실패가 있고, 누군가의 웃음 뒤엔 다른 사람의 눈물이 있다는 말, 하지만 인생에 실패란 없다는 그 말을 되새기며 살아야겠습니다. 10대 때 즐겨 보았고, 20대 때 복습하며 위로 받았던 빨강 머리 앤. 30대인 지금 다시 본다면 또 어떨까요? 아무래도 조만간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몽실서평단을 통해 아르테에서 제공 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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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스토리콜렉터 46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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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가>에 이은 일본의 호러 킹 미쓰다 신조가 쓴 집 시리즈 두번째 작품입니다.(일본에서는 화가가 첫번째, 흉가가 두번째 작품이었다고 하네요.) 집이라는 공간,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오롯이 내가 '나'일 수 있는 공간이지요. 미쓰다 신조는 이런 이완의 공간인 '집'을 '공포'의 공간으로 세팅해 독자들에게 공포를 선사합니다. 누구에게나 '집'이란 것은 존재하기 마련이니, 누구나 쉽게 공감하고, 그리하여 누구나 쉽게 그 '공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점 때문에 미쓰다 신조는 '집 시리즈'를 내게 된 것이겠지요.

 

아무튼, 이번 <화가(재양이 내린 집)>에 살게 된 주인공은 코타로라는 예비 중학생입니다. 원래는 치바현에서 살고 있었는데, 불의의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홀로 남겨진 코타로를 할머니가 거두어 도쿄 외각의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지요. 코타로는 그 동네에 발을 들임과 동시에 묘한 '기시감'을 느낍니다. 분명 생전 처음 발을 디딘 곳인데 어쩐 일인지 자꾸만 익숙함을 느끼지요. 하지만 그 익숙한 느낌은 결코 기분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길한 일이 읽어날 것만 같은 불안감 내지는 공포심이었지요. 그리고 그런 불길한 예감은 적중합니다. 코타로는 새로운 집에서 '그것'들을 만나게(?) 되고, 점점 집에 머무는 일이 공포스럽기만 합니다. 새로운 집 뿐만이 아닙니다. (흉가에서도 그랬지만) 동네 분위기 자체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동네 뒤편의 불길한 산도 그렇고, 이 동네엔 흉흉한 소문이 떠도는 '공포의 집'이 무려 네 곳이나 됩니다. 하지만 코타로는 자신의 이런 불안함이나 공포를 할머니께 섣불리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할머니를 걱정 끼칠까봐도 그렇고, 분명 부모님을 잃은 트라우마로 치부되리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지요. 때문에 혼자 '조사'에 나서게 되지요. 그 과정에서 다행히도 이웃의 동갑내기 소녀 레나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코타로가 살게된 새로운 집은 과연 어떤 재앙이 내린 걸까요? 코타로가 느끼는 불길한 기시감은 그저 트라마우 때문인 걸까요?

 

우리는 종종 낯선 장소에서 익숙함을 느끼기곤 하지요. 혹은 분명 처음 만난 사람인데 예전에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구요. 이번 <화가>라는 작품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이 '기시감'이란 것입니다. 저는 약간 윤회론자여서 전생에 겪었던 일이나, 만났던 사람을 후생에 다시 겪거나 만났기에 기시감을 느끼는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코타로가 느낀 기시감은 윤회론도 의사들이 말하는 지각 장애도 아니었습니다. 그럼 무엇이었느냐구요? 그건 역시 책을 읽고 직접 찾으시는 게... ^^;;

<흉가> 때도 밝혔지만 저는 호러 소설에 많이 취약합니다. 그래서 <흉가>에서야 비로소 미쓰다 신조라는 작가를 처음 접하게 되었지요. 어린 아이들이 서술자인 관계로 <흉가>의 공포는 순수하게 즐길 수 있을 정도였지요. <화가> 또한 그렇습니다. 예비 중학생인 코타로라는 소년은 어린 나이에 불행한 일을 겪었음에도 나름 씩씩하고 용감합니다. 많이 어른스럽기도 하구요. 그래선지 <화가>는 많이 암울하지도, 많이 어둡지도 않습니다. 코타로와 레나를 보고 있노라면 오히려 풋풋함을 느끼기도 하지요. 그때문인지 작품을 읽어 가다 보면 자꾸 코타로를 응원을 하게 됩니다. 부디 녀석이 '그것'에 지지 않길, 꼭 이겨내 행복해지길 말이지요. 그런데 이를 방해라도 하듯 불쑥 불쑥 반전들이 터집니다. 그것도 여러번. 때문에 <화가>는 호러 보단 추리쪽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더 재밌게 읽었지만요. 그렇다고 '공포'가 전혀 없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가끔 가끔 소름이 돋고, 머리카락이 쭈뼛 쭈뼛 서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묘사들이 상당하거든요.

 

역시 여름은 소설의 계절입니다. 특히 추리, 스릴러, 공포 소설의 계절이지요. 열대야로 연일 밤잠을 설치게 되는 요즘. 이런 호러 소설 한 편 어떠신지요? 혹은 휴가지에 동행해도 좋을 겁니다. 자꾸만 자꾸만 나타나는, 그래서 자꾸만 나를 따라오는 것 같은 '그것'들 덕에 햇님도, 폭염도 멈칫할 겁니다.

 

p.47 그런데 두세 계단도 오르기 전에 등 뒤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목덜미에 싸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것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며 오싹한 기운이 퍼져나간다. 엉덩이가 안벌부절못하고, 넓적다리 안쪽에서 복사뼈까지 뭔가가 기어 내려가는 듯한 촉감이 느껴진다. 그러더니 발바닥에서 머리꼭대기까지 부르르 기분 나쁜 떨림이 단숨에 타고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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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알레르기
고은규 지음 / 작가정신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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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라는 화두>

작년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아흔이 넘은 연세였고, 사람의 일생 중 지극히 당연한 마지막 단계를 거치셨으니 참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이 슬펐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자꾸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할머니 장례를 치르면서 아버지가, 그리고 엄마가 참 많이 늙었음을 그제서야 깨달았거든요. 그리고 할머니와 이렇게 이별했듯 언젠가 부모님과도 이렇게 이별해야 하는 거겠지 생각하면 참 무서웠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자연의 이치이거늘 그래도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때문에 파스칼이 말했던 것처럼 "인간은 죽음과 불행과 무지를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해지기 위해 그것들을 생각하지 않기로"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작품집의 7편의 단편들은 이 '죽음'이라는 화두를 애써 외면하거나 은폐하지 않고 오히려 전면에 내세웁니다. 각각 단편들 속 주인공들은 모두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대학 선배의 죽음(오빠 알레르기), 가족의 죽음(엔진룸, 명화, 급류타기), 이웃의 죽음(맥스웰의 은빛 망치), 심지어 자기 자신의 죽음(차고 어두운 상자)까지. 여타 소설들이 으레 그렇듯, 그런 죽음들을 겪은 뒤엔 주인공들의 성장이 있었다....하는 못미더울 위로조차도 그려놓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인공들은 끊임 없이 아파하고, 상처받고, 평온하던 생활은 파괴되기까지 합니다. 참으로 냉정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냉정함 덕에 '죽음'이라는 화두를 좀 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게 되고,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은 자연의 순리임을 '인정'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나의 그리고 내 소중한 주변 사람들의 '죽음'은 두렵고도 무섭지만, 아무때고 불쑥 불쑥 떠올라 사람을 조바심 나게 하는 녀석을 조금은 냉정하게 대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가족이라는 굴레>

작년 어느땐가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 '가족'이 주제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스튜디오는 그리고 그 프로그램을 보던 저 또한 눈물 바다가 되었었지요. 부모님을 형제자매등 가족을 떠올리면 눈물부터 보이는 사람들은 한국인들 뿐이라더군요. 엄마 뱃속에서 10달을 보내다가 나오는 순간부터 이미 아이는 엄마에게, 엄마는 아이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해서랍니다. 유독 '우리'라는 대명사를 좋아하는 것만 봐도 한국인들의 공동체의식, 가족의식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우린 때로 '가족'을 일종의 자신을 옭아매는 '굴레'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빚쟁이기에, 그 빚을 갚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그 굴레를 벗어버릴 수도 없습니다. 이 소설집에서도 그런 가족의 굴레를 벗어버리지 못하는 주인공들이 등장합니다. 중년의 이혼녀인 언니의 팬질 비용을 위해 상여금을 탈탈 털린 나(엔진룸), 20년 전 사라진 오빠를 기다리는 치매 걸린 엄마를 둔 나(딸기), 아버지가 버린 전처에게서 난 언니와 동거중인 명화(명화)등. 이들 모두는 가족의 그들의 굴레였습니다. 그리고 때로 이 굴레를 벗어버리려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그 굴레를 벗지 못합니다. 아니, 어쩌면 벗지 않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굴레를 벗어버린다는 것은 어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일 테니까요. 서로가 서로를 '빚'이라고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굴레'인들 어떻습니까? 그래도 피를 나눈 '가족'이 있단 것만으로도 세상 사는데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데요.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저도 결국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가 봅니다.

 

<인생이라는 급류타기>

30대를 훌쩍 넘고 보니, 인생이란 참 팍팍하기 그지 없음을 느낍니다. 하루 하루 위태위태 버티듯 살아갑니다. 10대 시절 그리던 미래는 분명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생기발랄 에너지를 뿜어내던 새내기는 어느새 여자 꼰대가 되어버리고(오빠 알레르기), 어느날 갑자기 죽는다 해도 자신의 죽음을 확인해 줄 사람은 사채업자 뿐이고(차고 어두운 상자), 처자식을 둔 옛애인을 잊지 못해 스토커가 되어버리고(맥스웰의 은빛 망치),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것 외엔 즐거움을 찾지 못하고(엔진룸). 그들이 사는 하루 하루가 너무도 위태위태한 급류 같아서, 그런 급류 위에서 간신히 균형을 잡으려고 애면글면 하는 그들의 이야기가 전부 내 이야기인 것만 같아서 자꾸 한숨이 새어나왔습니다.

 

<당근 대신 채찍>

'트렁커'나 '알바 패밀리'에서 작가가 보여주던 세상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웃픈 이야기들이었습니다. 팍팍하고 서글픈 현실을 굉장히 리얼하게 그리면서도, 그 전달 방식은 개성 강하고 코믹하기까지 했지요. 알고보면 누구나 '희비극'인 우리네 인생이랑 꼭 닮은 그녀의 작품들이 정말 좋았습니다. 때문에 이번 작품집도 그런 '희비극'을 기대했었는데,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작품집은 참으로 냉정합니다. 웃음기를 쫘악 빼버리고 '리얼리즘'만 잔뜩 담았습니다. 그것도 결코 즐겁거나 행복하지 않은, 오히려 아이러니와 비극만이 넘치는 그 현실을 말이지요. 하여 이전 장편 소설들에선 웃다 울다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반면 이 소설집에선 바로 내 앞에 놓여진 인생을 '직시'하게끔 합니다. 이전 장편들이 '당근'이었다면, 이번 소설집은 '채찍'이라고나 할까요. '당근'을 기대했던 제게 급작스럽게 훅 날아든 '채찍'은 많이 당황스러웠지만, 아슬아슬 급류 위에서 정신 단디 차려야겠다고 각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준 것 같습니다.

 

 

p.170 문득, 골짜기를 지나 거센 물결 위를 뒤집힐 듯 타고 내려오는 고무보트가 보인다. 노를 저으며 간신히 균형을 잡는다. 하얀 거품이 솟구쳐 올라 보트 위를 덮친다. 영훈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인도 한가운데에서 누군가에게 떠밀린 것처럼 그는 뒤뚱거렸다. 지하철에서 쏟아져 나온 인파들이 비틀거리는 경훈을 밀치고 앞서 걸어갔다. 그의 몸이 휘청 꺾이며 바닥에 쓰러질 듯했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은 그는 몸을 곧추세웠지만 그래도 자꾸만 바닥으로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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