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 15 | 1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트로츠키 사상.

1) 트로츠키 생애: 1879년 – 유대계 평민 출신의 지주 가정에서 태어남. 유대계지만 가정에서는 Yiddish 대신에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 사용 – “러시아화된 유대인”. 여동생인 Olga – 볼셰비키당의 주요 지도자 중의 한 명인 Lev Kamenev과 결혼 – “혼맥을 통한 밀접한 관계”. 1896년 – 노동 운동에의 입문, 1900-1902년 – 시베리아 귀양과 도망, 해외 망명 (원래 이름 – Bronstein; Trotsky는 위조된 여권에서 찍힌 이름). 1902년부터 런던에서 러시아 사민당 기관지인 Iskra 편집에 참여, Plekhanov 등 “구파”와 대립 관계에 돌입. 개방적인 사생활 – 첫 부인 (Sokolovskaya)와 이혼하여 두 번째 부인 (Sedova)를 맞이한 뒤에도 첫 부인과 매우 친근한 친구 관계 유지했음. 1903년 러시아 사민당 분당 (分黨) 사태 때에 – 처음에 레닌의 비민주성에 격분하여 멘셰비키에 가담했지만 그 뒤에는 “자유주의자들과의 연대 노선”에 실망하여 1904-1917년간 “독립적인 사회주의자”로서 활동해왔음 – 억압적인 규율을 不忍하는 정치적인 성질. 1905년 – 러시아에서 인기 있는 사회주의 신문 발행인 및 논객이 됐으며 “직접 민주주의” 기관인 페테르부르그 소비예트의 지도자가 됨. 소비에트 – 제정 러시아 정부가 빌린 외국 차관 (외채)를 갚을 필요 없다는 선언을 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음. 1906년 – 체포, 공판, 귀양. 1907년 – 다시 한번 도망해서 런던으로 탈출했음. 소비에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트로츠키의 무산계급 집권론 – 총파업과 “무산자들의 연대”를 “반란”보다 훨씬 더 강조했음: “The main weapon of the Soviet was a political strike of the masses. The power of the strike lies in disorganizing the power of the government. The greater the “anarchy” created by a strike, the nearer its victory. This is true only where “anarchy” is not being created by anarchic actions. The class that puts into motion, day in and day out, the industrial apparatus and the governmental apparatus; the class that is able, by a sudden stoppage of work, to paralyze both industry and government, must be organized enough not to fall the first victim of the very “anarchy” it has created. The more effective the disorganization of government caused by a strike, the more the strike organization is compelled to assume governmental functions.
The Council of Workmen’s Delegates introduces a free press. It organizes street patrols to secure the safety of the citizens. It takes over, to a greater or less extent, the post office, the telegraph, and the railroads. It makes an effort to introduce the eight hour workday. Paralyzing the autocratic government by a strike, it brings its own democratic order into the life of the working city population” 소비에트 – 다수의 동의를 바탕으로 하는 “대안적인 非권력적인 권력”.
1907-1914 – 런던에서 빈으로 이동하여 주로 빈에서 살면서 오스트리아 사민당의 활동에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했음. 독립적인 사회주의적 신문 <프라우다> 발행 (나중에 볼셰비키당 기관지가 그 이름을 “도용”했다고 트로츠키는 매우 격분했음). 많은 문제에 있어서는 볼셰비키들과 충동했음. 1912년 - <Kievskaya Mysl’>의 종군 기자로서 발칸 전쟁을 취재하여 발칸지역의 사회, 정치적 발전, 현대 전쟁의 문제 등을 깊이 연구했음.
1914-1917 – 스위스, 프랑스, 스페인, 미국 등지에서 반전 활동을 하다가 결국 1917년2월 부르주아 혁명 이후로 러시아로 돌아감. “개량주의적 사민주의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레닌보다 훨씬 더 중도적인 soft line – 전쟁에 대한 반대를 굳게 하면서 제2차인터네서널의 완전한 파탄을 면하게 하려고 노력했음 – 레닌보다 예컨대 국제감각이 다소 예리하고 조금 더 “원대한” 구상을 지닌 듯함 – 국제 사회주의 운동의 분열을 우려해서 “주류 사민주의자”들과의 관계를 끊지 않으려고 노력했음.
1917년 – 여름에 볼셰비키들에게 합류하여 1917년10월 혁명을 사실상 주도했음. 혁명 이후에 – 멘셰비키 등 온건 사회주의자들과의 “연합 정권” 구상을 반대했음 – 레닌과 마찬가지로 보다 급진적인 혁명을 지향함.
1918년3월까지 트로츠키 – 외무부 장관 (외무 인민 위원) – 독일과의 강화의 문제에 있어서는 역시 미래 지향적인 중도적 입장을 취했음 – 독일제국과의 협정을 맺음으로서 소비에트 정권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고 일단 독일과의 협상에서 시간 끌기 하고 독일 병사 사이의 혁명적 선전에 중점을 두자 – 즉, 독일에서의 혁명에 주력하자는 입장 – “전쟁”의 문제에 있어서의 가장 “국제주의적” 접근. 그런데 독일에서의 혁명이 늦어져 결국 레닌의 제안대로 강화 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 강화 협정은 볼셰비키들의 국내 혁명적 명분을 크게 실추시키고 좌파 사회혁명당 등의 농촌의 혁명 세력들과의 유대 관계를 파괴하게 했음 – 트로츠키의 반대는 이유가 있었음. 
1918년3월-1920년간 – 赤軍 (적군 – 소비에트 공화국의 국군) 지휘자 (국방부 장관)으로서의 트로츠키 – 적군의 “정규군化” – 구 제정정권 군 장교 재임명 (배신 시 원칙상 전 가족 총살 내지 수용소로의 체포), 징병제, 사병들에 대한 군재판, 탈영 등 범죄 시 총살. 트로츠키 – “민주적인 노동자 권력”의 이상을 저버리지 않았겠지만 정규군인 백군 (白軍 – 반동군)이나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군과의 전투에서 “비대칭적 전투”로만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통감하여 “현실과의 타협”을 한 셈임. 실제 “군인”으로서의 트로츠키 – 나름대로의 “중도 노선” - 1920년의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폴란드 영토로의 진입 등 “혁명의 수출” 시도를 반대했음 (결국, 1920년8월에 바르샤바 정복의 시도가 좌절됨 – 트로츠키 의견이 맞았음). 그런데 1920-21년에 트로츠키가 “노조의 국가기관화”와 “노동의 군사화” – 노동자의 직장 이동 권리 박탈 및 국가 기관에 의한 무제한적 징발, 전직의 가능성 – 를 주장하여 특히 노동자 출신의 공산당 중간, 고급 간부로부터 많은 원망을 샀음 (“노동자 반대파”). 이 “노동 군사화” 제안은 군대, 철도 책임자로서의, 즉 고급관료로서의 트로츠키 입장을 반영했음. 트로츠키는 “노동자의 국가에서 노동자가 국가의 명령을 미워할 이유가 없으며 국가를 두려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하여 “국가”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을 보여주었음 – 근대 지상주의적인 볼셰비키들의 “국가/권력 집중의 숭배” – 볼셰비즘의 공동된 문제. 
- 1922년 – 레닌이 치명적인 병환을 앓고 있는 데에, 총서기관이 된 스탈린과 볼셰비키들의 “정통적 지도자”인 지노비예프/카메네프는 트로츠키의 집권 시도를 우려하여 “삼두 마차”로서 “반트로츠키 블록”을 만들었음. 1922년 후반부 – 소수 민족들을 다루는 스탈린의 비민주성을 목격한 레닌이 스탈린이 지휘하는 당 관료의 잠재적 반동성에 위기 의식을 느껴 트로츠키와는 급속히 가까워졌음. 1923년부터 – 스탈린/지노비예프 등이 트로츠키와 가까운 관료들을 좌천시키는 등 트로츠키와 “권력형 암투”를 노골적으로 벌임 – 이 과정에서는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허구성이 드러남 (라코브스키 주영국 대사로의 좌천 등).
- 1923년10월8일 – 트로츠키는 중앙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당내 민주주의의 실종”을 극론함 – 지역 서기관들이 중앙으로부터 임명되는 시스템을 “당의 관료화”의 원천으로 생각함 – 그 후 1927년까지 “합법적인 당 민주주의 반대파”로 기능해온 것. 1923-25 – 반대파가 그 의견을 <프라우다> 등에서 발표하여 공개적인 논쟁을 할 수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지는 게임”이었음 – 각종의 당 대회, 회의에서 대표자의 선출부터 이미 위로부터 임명된 서기의 선출에 의거했기 때문에 “당 중앙”을 반대하는 어떤 의견도 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음. 트로츠키 입장 – 보다 급속한 공업 경제 건설 (“총동원”을 주장하지 않았음), “일국 사회주의” 불가능성과 세계 혁명 지향 노선 등 – 많은 면에서 옳았다 해도 이미 국가의 관료 기구가 된 당에서는 권력이 뒷받침해주지 않는 어떤 입장도 “힘”을 얻지 못했음. 트로츠키 입장의 치명적 약점 – 그가 “당내 민주주의의 부활”을 주장했지만 “당외 민주주의” (예컨대 같은 사회주의적 계통의 멘셰비키 등의 합법적 활동 허용)에 대해 무관심했음 – “볼셰비키 국가”에 대한 맹신의 지속. 1926년 – 계속 강화돼 가는 스탈린의 권력이 눌린 지노비예프/카메네프가 트로츠키 편에 옮기지만 1927년부터 스탈린이 반대파에 대해 비밀 경찰의 탄압을 이용하기 시작했음. 1927년 – 많은 반대파들이 당적 박탈. 1928년 초기 – 트로츠키가 카자흐스탄의 알마아타로 귀양가야 함 – 사실상 스탈린의 “무제한 독재”의 시초.
- 1929-1940 – 트로츠키의 해외 망명 생활 – 터키, 프랑스, 노르웨이, 멕시코 – 처음에는 소련 주도의 코민테른과 “경쟁”하려 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코민테른이 파시즘의 독일에서의 집권을 방지하지 못하고 나서는 1938년에 “제4차 인터네서널”을 결성했다. 문제 – “리더” 중심의 중앙 집권적 구조로 인해서 그 트로츠키주의적 분파들이 계속 분당 과정을 겪어 작은 섹트 (종파)로 나누어짐 – 극단적 “수령주의”와 교조주의. 가장 큰 분열의 원인 – “입장주의” (entrism)의 문제 – “고립을 피하기 위해서” 현실적으로 대중적인 노동자 정치를 펴고 있는 사민당/공산당에 의견그룹으로서 입당할 필요가 있는가? 이외에는 스탈린주의 국가들을 “타락된 노동자 국가”로 봐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분열의 가장 큰 이론적인 기제이었음.

트로츠키 인생의 가장 큰 모순 – 한편으로는 권력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늘 권력에 반발해왔지만 또 한편으로는 “소비에트 국가”와 “당”의 권력을 물신화/절대화시킴 – 자신을 죽인 소련 국가를 끝내 “타락된 노동자 국가”라고 옹호해왔음. 근대주의적 정치인의 특징 – 특정 이데올로기/정당을 “역사의 논리를 전개시키는 주체”, 거의 헤겔의 “신의 의지의 실행자”로 보는 입장. 결국, 1923년 이후의 트로츠키의 반스탈린주의적 투쟁이 대단히 “온건”했다 – 그는 끝내 “반스탈린 혁명”을 주장하지 않았다.

2) 트로츠키 사상의 요점:
- “지속 혁명” (permanent revolution) – 1905년의 부르주아 혁명 이후에 개발해왔음 – 후진국에 있어서는 부르주아들은 민주혁명조차 이루어낼 수 없기에 미완의 민주혁명 바로 뒤에 무산계급이 주도하는 지속적인 사회주의 혁명이 이어져야 함. 왜 혁명이 후진국에서 일어나는가? 트로츠키의 대답은 “복합적이며 불균형한 발전의 법칙” (law of combined and uneven development) – 발전 수준이 고르지 않은 나라들이 같은 역사적인 세계적 과정 (예컨대 세계대전)으로 휘말리는 와중에서 “약한 고리” (국가 권력이 역하거나 부패한 후진국)가 먼저 터질 수 있다는 논리:
“The first and most general explanation is: Russia is a backward country, but only a part of world economy, only an element of the capitalist world system. In this sense Lenin solved the enigma of the Russian Revolution with the lapidary formula, “The chain broke at its weakest link.”
A crude illustration: the Great War, the result of the contradictions of world imperialism, drew into its maelstrom countries of different stages of development, but made the same claims on all the participants. It is clear that the burdens of the war would be particularly intolerable for the most backward countries. Russia was the first to be compelled to leave the field. But to tear itself away from the war, the Russian people had to overthrow the ruling classes. In this way the chain of war broke at its weakest link.
Still, war is not a catastrophe coming from outside like an earthquake, but, as old Clausewitz said, the continuation of politics by other means. In the last war, the main tendencies of the imperialistic system of “peace” time only expressed themselves more crudely. The higher the general forces of production, the tenser the competition on the world markets, the sharper the antagonisms and the madder the race for armaments, so much the more difficult it became for the weaker participants. That is precisely why the backward countries assumed the first places in the succession of collapse. The chain of world capitalism always tends to break at its weakest link.” – 국가간의 경쟁과 전쟁 등이 멈추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약한 고리”들이 계속 생겨날 것이라는 예상. 한 국가 안에서의 “불균형 발전”도 마찬가지 (재벌과 중소 기업 사이의 괴리): “While peasant agriculture often remained at the level of the seventeenth century, Russia's industry, if not in scope, at least in type, reached the level of progressive countries and in some respects rushed ahead of them. It suffices to say that gigantic enterprises, with over a thousand workers each, employed in the United States less than 18 per cent of the total number of industrial workers. In Russia it was over 41%. This fact is hard to reconcile with the conventional conception of the economic backwardness of Russia. It does not on the other hand, refute this backwardness, but dialectically complements it.
The same contradictory character was shown by the class structure of the country. The finance capital of Europe industrialised Russian economy at an accelerated tempo. The industrial bourgeoisie forthwith assumed a large scale capitalistic and anti-popular character. The foreign stock-holders moreover, lived outside of the country. The workers, on the other hand, were naturally Russians. Against a numerically weak Russian bourgeoisie, which had no national roots, there stood confronting it a relatively strong proletariat with strong roots in the depths of the people”
러시아의 “복합형 발전”이라는 과정 속에서 외연이 강해도 국내적 민중과의 연결이 약해 강력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러시아 부르주아들이 결국 전제 정권이 물러나는 대로 무산계급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는 논리 – 후진국의 국가의존 외세의존형 자본계급의 약점을 매우 정확하게 꿰뚫어봄. 그러기에 무산계급에 의한 “지속 혁명”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In accordance with its immediate tasks, the Russian Revolution is a bourgeois revolution. But the Russian bourgeoisie is anti-revolutionary. The victory of the Revolution is therefore possible only as a victory of the proletariat. But the victorious proletariat will not stop at the programme of bourgeois democracy: it will go on to the programme of socialism. The Russian Revolution will become the first stage of the Socialist world revolution” (<In Defence of October>, Denmark, 1932).

- 국가와 노동자 민주주의 문제. 문제 – 만약 후진적인 국가의 무산계급을 지도한다는 공산당 그 자체가 억압적인 국가의 골간이 된다면? 여기에서는 “민주주의”가 견제 장치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노동자의 직접적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트로츠키는 이중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원칙상 노동자의 생산 과정 통제를 요구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국가의 틀 안에서라면 노동자들의 생산 통제 참여는 “계급간의 협력” 그 이상이 못되고 어차피 부르주아에 의해서 견제 받아 잘 실행될 수 없다고 내다봤음. 즉, 트로츠키에게는 노동자의 생산 통제에서의 참여는 “부르주아 국가 파괴의 첫 단계”, 즉 “국가 권력의 문제”로서만 의미 있음. 비록 부르주아 국가라는 한계가 있어도 생산 민주주의 그 자체의 잠재력을 트로츠키는 과소평가함:
“What state regime corresponds to workers’ control of production? It is obvious that the power is not yet in the hands of the proletariat, otherwise we would have not workers’ control of production but the control of production by the workers’ state as an introduction to a regime of state production on the foundations of nationalization. What we are talking about is workers’ control under the capitalist regime, under the power of the bourgeoisie. However, a bourgeoisie that feels it is firmly in the saddle will never tolerate dual power in its enterprises. workers’ control consequently, can be carried out only under the condition of an abrupt change in the relationship of forces unfavorable to the bourgeoisie and its state. Control can be imposed only by force upon the bourgeoisie, by a proletariat on the road to the moment of taking power from them, and then also ownership of the means of production. Thus the regime of workers’ control, a provisional transitional regime by its very essence, can correspond only to the period of the convulsing of the bourgeois state, the proletarian offensive, and the failing back of the bourgeoisie, that is, to the period of the proletarian revolution in the fullest sense of the word.
If the bourgeois is already no longer the master, that is, not entirely the master, in his factory, then it follows that he is also no longer completely the master in his state. This means that to the regime of dual power in the factories corresponds the regime of dual power in the state.
This correspondence, however, should not be understood mechanically, that is, not as meaning that dual power in the enterprises and dual power in the state are born on one and the same day. An advanced regime of dual power, as one of the highly probable stages of the proletarian revolution in every country, can develop in different countries in different ways, from differing elements. Thus, for example, in certain circumstances (a deep and persevering economic crisis, a strong state of organization of the workers in the enterprises, a relatively weak revolutionary party, a relatively strong state keeping a vigorous fascism in reserve, etc.) workers’ control of production can come considerably ahead of developed political dual power in a country” (<Workers’ Control of Production>, 1931).
트로츠키는 주로 “부르주아 국가 파괴의 단계”에서의 노동자에 의한 생산 통제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평소”에 노동자들이 공장 운영 위원회에서 직접적 민주주의의 경험을 쌓는 데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경멸적이었음 (“계급간의 협조”) 그리고 “노동자의 국가”가 되면 일단 “노동자의 국가에 의한 국유화”가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것처럼 예상함 – “노동자 국가”의 물신화, “노동자 국가” 안에서의 모순 관계를 보지 못하는, 비변증법적 사고.

국가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한다는 반론에 대해서 트로츠키의 반박: “With the exception of one country, state power throughout the world is in the hands of the bourgeoisie. It is in this, and only in this, that,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proletariat, the danger of state power lies. The proletariat’s historical task is to wrest this most powerful instrument of oppression from the hands of the bourgeoisie. The Communists do not deny the difficulties, the dangers that are connected with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But can this lessen by one iota the necessity to seize power? If the whole proletariat were carried by an irresistible force to the conquest of power, or if it had already conquered it, one could, strictly speaking, understand this or that warning of the syndicalists. Lenin, as is known, warned in his testament against the abuse of revolutionary power. The struggle against the distortions of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has been conducted by the Opposition since its inception and without the need of borrowing from the arsenal of anarchism.
But in the bourgeois countries, the misfortune lies in the fact that the overwhelming majority of the proletariat does not understand as it should the dangers of the bourgeois state. By the manner in which they treat the question, the syndicalists, unwittingly of course, contribute to the passive conciliation of the workers with the capitalist state. When the syndicalists keep drumming into the workers, who are oppressed by the bourgeois state, their warnings about the dangers of a proletarian state, they play a purely reactionary role. The bourgeois will readily repeat to the workers: “Do not touch the state because it is a snare full of dangers to you.” The Communist will say to the workers: “The difficulties and dangers with which the proletariat is confronted the day after the conquest of power – we will learn to overcome them on the basis of experience. But at the present time, the most menacing dangers lie in the fact that our class enemy holds the reins of power in its hands and directs it against us.” (<The Errors in Principle of Syndicalism>, 1929)
국가 위험성에 대한 몰이해는 자본주의 국가의 개량주의자들에게 더 강하며, 소련 안에서는 국가의 관료화에 대해서는 좌파 반대파가 잘 투쟁하고 있다는 것은 이 반박의 논지. 문제 – “좌파 반대파의 투쟁”은 실제로 승산이 없었으며 트로츠키 예상과 달리 스탈린의 독재 국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고 말았다. 결국 – “국가의 위험성”을 기존의 자본주의 국가에서나 반체제 운동 (공산주의 운동) 등에서나 동질적인 것으로 봐야 하지 않나? 그런데, 트로츠키는 이와 같은 시각에 끝내 동의하지 않았음.

- 소련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 대해서: “Dissertations upon “the dictatorship of the bureaucracy over the proletariat” without a much deeper analysis, that is, without a clear explanation of the social roots and the class limits of bureaucratic domination, boil down merely to high-faluting democratic phrases so extremely popular among the Mensheviks. One need not doubt that the overwhelming majority of Soviet workers are dissatisfied with the bureaucracy and that a considerable section, by no means the worst, hates it. However, it is not simply due to repression that this dissatisfaction does not assume violent mass forms; the workers fear that they will clear the field for the class enemy if they overthrow the bureaucracy. The interrelations between the bureaucracy and the class are really much more complex than they appear to be to the frothy “democrats.” The Soviet workers would have settled accounts with the despotism of the apparatus had other perspectives opened before them, had the Western horizon flamed not with the brown color of fascism but with the red of revolution. So long as this does not happen, the proletariat with clenched teeth bears (“tolerates”) the bureaucracy and, in this sense, recognizes it as the bearer of the proletarian dictatorship. In a heart to heart conversation, no Soviet worker would be sparing of strong words addressed to the Stalinist bureaucracy. But not a single one of them would admit that the counterrevolution has already taken place. The proletariat is the spine of the Soviet state. But insofar as the function of governing is concentrated in the hands of an irresponsible bureaucracy, we have before us an obviously sick state. Can it be cured? Will not further attempts at cures mean a fruitless expenditure of precious time? The question is badly put. By cures we understand not all sorts of artificial measures separate and apart from the world revolutionary movement but a further struggle under the banner of Marxism. Merciless criticism of the Stalinist bureaucracy, training the cadres of the new International, resurrecting the fighting capacity of the world proletarian vanguard – this is the essence of the “cure.” It coincides with the fundamental direction of historical progress” (<The Class Nature of the Soviet State>, 1933)

트로츠키가 소련 관료계급이 아직도 “지배계급”이 되지 못했다고 보고 그들의 “사회적 기생성”을 폭로해도 그들을 과거의 부르주아와의 동질의 존재로 파악하지 않았음. 즉 “타락된 노동자 국가” 논리. 사실,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국가의 부활이 두려워서 관료적인 타락을 견디는” 형태는 아니었음. 새로운 국민 국가에서의 사회적 진출의 기회에 많은 노동자들이 신흥 국가에 대한 충성을 느꼈음 – 매우 빠른 사회 진출의 가능성. 1941-45년의 소독 전쟁 이후 – 새로운 국가는 막강한 국민주의적 이데올로기까지 만들어낼 수 있었음. “국가에 의한 대중의 포섭” – 트로츠키가 역시 놓친 부분.

트로츠키 사상의 장점: 자본주의적 발전 과정의 복합성을 정확하게 파악한 부분, 혁명의 이상에 충실해온 부분. 단점 – “국가/당 등 유사 국가적 조직의 내재적 위험성”에 다소 무감각하고 특히 소련의 국가/당을 끝까지 물신화했음 – 대중의 민주적 자율성의 문제를 잘 간파하지 못했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레닌의 사상:

1) 레닌의 생애:
- 가정적 배경 – 외조부 – Aleksander Dmitrievich Blank – 유대계/스웨덴계의 부유한 의사, 정교회로 개종하여 경찰의관으로서 출세, 귀족 신분까지 부여 받았음. 외조부의 부인: 부유한 독일계 상인 가정의 출신 (Groschopf 가문). Blank가는 Kokushkino 라는 농장을 보유했으며, 거기에서 1861년의 농노제 혁파 이전까지 농노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레닌 – 자신이 세습적인 귀족이라는 사실을 적어도 제정 러시아 시절에 숨기려 하지 않았음 – 각종 신청서 등에서 “세습적 귀족”이라고 사인했음. 레닌 아버지 쪽 – 비교적으로 미미한 가문 (농노 출신의 수공업자). 그러나 레닌의 아버지 Ilya Nikolaevich Ulyanov – 교육관료계에서 자수성가하여 일선 교사에서 Simbirsk도(道) 교육감까지 올랐음. 아버지의 品等 – “국가자문관” (State Councillor) – 군대에서의 장군급과 같은 수준. 1886년에 아버지가 죽은 뒤에 가정은 유가족 연금과 Kokushkino농장의 소작료로만 경제 문제 해결. 레닌의 아버지 – “개명 관료” – 아이들을 평등하게 대해주고 가정 잡지 발행해주고 각자에게 자신의 방을 주고, 집안에서 외국어 사용을 장려했음. 레닌 – 늘 학급 우수생이었으며 어릴 때부터 대단한 자신감을 과시했음 – 가정에서 “천재”로 인정됨. 레닌을 “모범생”에서 “혁명가”로 바꾼 경험 – 형 Aleksander의 사형 집행 (1887년) – 황제 암살 음모 혐의. 레닌의 형 – 비상한 정직함과 용기를 보임 (끝까지 반성문 작성을 거부하여 감형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음). 레닌 – 이 기회에 “영웅주의적 투쟁의 한계” 통감, “대중 노선”을 택했음. 형의 사형 집행 이후 – 레닌이 경찰 당국의 감시 대상이 되어 Kazan대학교로부터의 제적 등 각종의 처벌에 시달렸음. 정상적인 대학생이 될 수 없었으며 상트페테르부르그 황립대학고 법학부 “원격 학생” 신분으로 겨우 졸업했음. 주로 독습에 의존했음 – 가장 애호하는 작가 – Chernyshevsky “무엇을 할 것인가?” – 자기 희생적 “혁명적 전위”의 타입을 보여주었음. “민중 노선”이 돼도 레닌은 끝내 그의 형과 같은 “인민주의자”들의 영웅주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듯함 – “수단과 방법을 가릴 일 없는 혁명 전위” 강조 – Vladimir Voitinsky와의 대화에서 1905년에 “혁명을 하얀 장갑을 끼고 할 수 없다. 우리에게 가끔가다 몹쓸 짓을 할 수 있는 이들도 바로 몹쓸 짓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필요하다”. 일종의 “혁명 엘리트 현실주의”.
- 레닌과 Krupskaya 결혼 – “운동권 방식의 결합” – 같이 마르크스주의 노동 운동에 종사해온 부인이 남편과 운동을 함께 하게 됨 – 그런데 외형은 “동지적 결합”이었지만 실제로는 “내조”형에 가까웠음 – 남편의 원고 작업 등 도와주는 일이 주종을 이룸. 1909년 이후 레닌 – Inessa Armand – Krupskaya의 “삼각형 관계” – 세 사람 다 동의했으며 “부르주아적 가족 이상의 타파”와 “혁명적 동지애” 차원에서 문제 삼지 않았음 – 일부일처제 타파의 성공적인 사례.
- 레닌의 재정적인 상황 – 개인 재정과 당 운영비 철저하게 분리했음 – “깔끔한 재정 운영”. 개인 재정 – 어머니 재산에서 나오는 이자 소득 + “당으로부터 주이지는 활동비” (최대한 350스위스 프랑크 – 숙련공 월급보다 다소 높음). 레닌 – “철저한 근대인” – 일체 영수증 등 늘 전부 다 보관했음, 가계부 작성. 당 운영비 – 1905-1907년간 – “은행털이”로 얻어지는 소득 – 1907년7월26일 Tiflis에서의 은행 마차 “털이”가 제일 유명했음 (3명 사망). 이외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출신의 “물주”들의 도움 – Savva Morozov (1905년 자살, 그 유서에 의해 그 재산이 Gor’ky를 통해 볼셰비키당에 귀속됐음) 등. 당 운영비 관리 때문에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이의 분쟁 결과 - 1910녀부터 3명의 독일 사민당 지도자 (Zetkin, Kautsky, Mehring)가 러시아 사민주의 운동 활동비 최고 관리자로 임명됐음. 레닌 – 재정 등의 문제에 있어서는 Kausky와 V.Adler 등 독일, 오스트리아 동지로부터 많은 후원을 받아왔음 – 그 만큼 그들과의 궁극적인 단절은 마음 아픈 일이었음.
- 레닌과 1905년 혁명 – 레닌이 무장 반란 (“무산 계급과 농민계급이 주도할 민주 혁명”)을 조직할 길을 모색하고 있었음. 1905년 – 레닌 – “민주혁명에 있어서의 사민주의자들의 두 개의 전략” 집필, 무장 혁명 준비 지향. 레닌의 급진 노선 – 당에 인기를 끌었음. 1906년말 – 당원의 수는 거의 15만 명을 넘었음. 그 당시의 러시아에서는 제정 정권의 폭정보다는,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무장 투쟁이라 하더라도 차라리 “차악”으로 여겨질 만한 분위기는 팽배했음 – 레닌 급진주의의 “현실적인 근거”.  레닌의 “무장 폭동 노선” – “도시 게릴라전”을 총체적인 무장 반란의 “준비 단계” 내지 ‘보조적인 작전’으로 인식했음. <게릴라전에 대해서> (1906년9월) – 라트비아 사민주의자들의 무장 폭력 노선을 다음과 같이 “모범”으로 제시했음:
“The Lettish Social-Democratic Labour Party (a section of the Russian Social-Democratic Labour Party) regularly issues its paper in 30,000 copies. The announcement columns publish lists of spies whom it is the duty of every decent person to exterminate. People who assist the police are proclaimed “enemies of the revolution”, liable to execution and, moreover, to confiscation of property. The public is instructed to give money to the Social-Democratic Party only against signed and stamped receipt. In the Party’s latest report, showing a total income of 48,000 rubles for the year, there figures a sum of 5,600 rubles contributed by the Libau branch for arms which was obtained by expropriation” (http://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06/gw/index.htm) 민족 모순들과 계급모순이 중첩된 상황에서는 이와 같은 “탐정 박살” 등의 잔혹성은 불가피했는지도 모르지만, 과연 현재의 지배계급의 왜곡된 도덕관과 질적으로 다른 생명 존중 위주의 사회주의적인 도덕관이 있는지에 대해 한번 진지하게 물어보게끔 하기도 함.  

2) 1890-1900년대의 독일 사민주의: 현실과 사상의 괴리. 현실 – 체제에의 포섭이 돼감. 사상 – Kautsky – “중소 기업의 경쟁에서의 소멸, 전체 경제가 하나의 커다란 기업 되기” – 독점화 경향 이론을 극단적으로 설명했음. 역시 현실에의 안주의 반영 – 사회주의의 도래를 거의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설명했음 – “不可逆의 사회, 경제적 경향”. 그것보다 훨씬 더 현실 순응주의로 나아간 것은 Bernstein – 노동가치론의 전면적인 부정, 상품의 가치를 “원가 + 이윤 마진”으로만 이해하고 “잉여가치”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했음. Bernstein – 긍정적인 측면이라면 “민주주의”를 ‘무산 계급의 독재” 달성의 수단이라기보다는 노동 운동의 “목표”로 설정한 것 – 즉 사회주의를 “전면적인, 포괄적인 민주주의의 사회”로 이해한 것. 급진주의와 개량주의 사이에 있었던 이론가 – Hilferding - <금융자본론> (1910) –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유착론, 금융자본과 국가 권력의 일체화 경향 – 자국의 금융자본을 위해 무리한 식민지 획득을 마다하지 않는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무력 갈등 가능성의 제고 – “자본주의는 경제적으로 종말을 고하지 않아도 정치적으로 세계 전쟁이라는 통로를 통해 망할 수 있는 것이다”. 레닌 – Kautsky를 일종의 “스승”으로 받들면서도 혁명에 있어서의 “주관적인 요인”, 즉 전위정당의 조직력과 전투성을 훨씬 더 강조하는 등 “개량주의자”들과 노골적인 강등을 빚지 않으면서도 유럽 사민주의의 “급진파”를 이루었다. 또 한 가지 특징 – 서구 중심주의의 일정한 타파 – 비서구 민중의 혁명적 잠재력에 대한 관심 - (1908) – 중국이 “중세적 민란”의 형태를 벗어나 근대적 혁명 운동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예견했음: “In China, too, the revolutionary movement against the medieval order has made itself felt with particular force in recent months. True, nothing definite can yet be said about the present movement’—there is such scanty information about it and such a spate of reports about revolts in various parts of the country. But there can be no doubt about the vigorous growth of the “new spirit” and the “European currents” that are stirring in China, especially since the Russo-Japanese war; and consequently, the old-style Chinese revolts will inevitably develop into a conscious democratic movement.” 그리고 “아시아 혁명”이 러시아 혁명의 핵심적인 우군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했음: “The Russian revolution has a great international ally both in Europe and   in Asia, but, at the same time, and for that very reason, it has not only a national, not only a Russian, but also an international enemy” “세계 혁명”의 구도를, “유럽”의 한계를 넘어서 구체화했음.   
3) 제1차세계 대전 – 사민주의 사상의 전환점 – 레닌 - <자본주의 최후 단계로서의 제국주의> (1916) – 제국주의를 “경제결정론적” 입장에서 이해함:
“If it were necessary to give the briefest possible definition of imperialism we should have to say that imperialism is the monopoly stage of capitalism. Such a definition would include what is most important, for, on the one hand, finance capital is the bank capital of a few very big monopolist banks, merged with the capital of the monopolist associations of industrialists; and, on the other hand, the division of the world is the transition from a colonial policy which has extended without hindrance to territories unseized by any capitalist power, to a colonial policy of monopolist possession of the territory of the world, which has been completely divided up.
(…) We must give a definition of imperialism that will include the following five of its basic features:
(1) the concentration of production and capital has developed to such a high stage that it has created monopolies which play a decisive role in economic life; (2) the merging of bank capital with industrial capital, and the creation, on the basis of this “finance capital”, of a financial oligarchy; (3) the export of capital as distinguished from the export of commodities acquires exceptional importance; (4) the formation of international monopolist capitalist associations which share the world among themselves, and (5) the territorial division of the whole world among the biggest capitalist powers is completed. Imperialism is capitalism at that stage of development at which the dominance of monopolies and finance capital is established; in   which the export of capital has acquired pronounced importance; in which the division of the world among the international trusts has begun, in which the division of all territories of the globe among the biggest capitalist powers has been completed”
즉, 레닌이 제국주의를 단순히 “생산, 자본의 집중화,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결합, 자본의 수출, 국제적 독점 자본의 형성, 주요 자본주의 열강 사이의 지구 나누어먹기” 식으로 이해함. 기본적으로 맞는데, 빠진 부분은 근대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Kautsky가 레닌에게 반론을 제기했듯이, 아직 “자본주의의 최후 단계”까지 가지 못하는 후진적 열강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도 이미 침략주의적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함  - 1910년, “한일합방” 그 당시의 일본도 마찬가지, 아직도 중공업마저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했음. 여기에서 침략의 엔진 – (사회의 모든 계급들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을 보유하는 근대 국가. 근대 국가가 먼저 성립되어 자본가 계급을 탄생시키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후진 국가에서 (특히 1868년 이후의 일본), 대외 침략의 시작은 근대 국가 탄생의 시점과 같음 (일본 – 1873년 오키나와 병합, 1876년 강화 조약 강요). 근대 국가의 대외 침략 – 물론 자본가 계급을 위해주는 측면이 강하지만 그걸로만 설명되지 않음 (일본 산업 자본의 본격적인 한반도 투자 - 1920년대 후반기부터). 성공적인 침략 – 국가의 “정통성 확립”, 승리 의식을 통한 “민족 만들기” – 일본에서의 “민족/국민 만들기”에서의 청-일,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의 역할. 레닌 – 근대 관료국가의 자율적인 역할 과소 평가, 그리고 총체적으로는 민중에 대한 국가의 포획력, “민족주의적” 주술의 힘을 과소평가했음. 결국 – 본인이 1917년 이후에 만든 “혁명적인” 근대 국가가 일반적인 국가 자본주의 체제로 전락하는 과정에서는 필요한 조치를 거의 취하지 못하고 혁명의 퇴락을 막지 못했음.

4) 레닌의 반군사주의 (anti-militarism) 특징 – 군인들의 “혁명화”에 중점을 둠 – 어떻게 해서 병영에서 혁명적인 선전, 선동을 할 수 있는가 (1907: “Anti-Militarist Propaganda and Young Socialist Workers’ Leagues”).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레닌은 어느 “추상적인 평화주의자”보다도 근대적 전쟁의 사회, 경제적인 배경을 철저하게 파헤치고 있었다. 레닌 – 군수 복합체 (아직은 그 용어는 없었지만 그 뜻임)가 정치에 깊이 개입하여 사실상 “돈벌이로서의 전쟁”을 주도하고 있다고 봤다: “Armaments are considered a national matter, a matter of patriotism; it is presumed that everyone maintains strict secrecy. But the shipyards, the ordnance, dynamite and small-arms factories are international enterprises, in which the capitalists of the various countries work together in duping and fleecing the public of the various countries, and   making ships and guns alike for Britain against Italy, and for Italy against Britain.
An ingenious capitalist set-up! Civilisation, law and order, culture, peace—and hundreds of millions of rubles being plundered by capitalist businessmen and swindlers in ship building, dynamite manufacture, etc.!
Britain is a member of the Triple Entente, which is hostile to the Triple Alliance. Italy is a member of the Triple Alliance. The well-known firm of Vickers (Britain) has branches in Italy. The shareholders and directors of this firm (through the venal press and through venal parliamentary “figures”, Conservative and Liberal alike) incite Britain against Italy, and vice versa. And profit is taken both from the workers of Britain and those of Italy; the people are fleeced in both countries.
Conservative and Liberal Cabinet Ministers and Members of Parliament are almost all shareholders in these firms. They work hand in glove. The son of the “great” Liberal Minister, Gladstone, is a director of the Armstrong concern. Rear-Admiral Bacon, the celebrated naval specialist and a high official at the Admiralty, has been appointed to a post at an ordnance works in Coventry at a salary of £7,000 (over 60,000 rubles). The salary of the British Prime Minister is £5,000 (about 45,000 rubles)” (“Armaments and Capitalism”, 1913).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결정에 대해서는 레닌은 “일본과의 태평양 지역을 둘러싼 전쟁의 준비 작전”, “상비군 증강을 위한 전략”, “민주적인 구호는 오로지 기만일뿐”이라고 매우 정확하게 꿰뚫었다: “On the question of America entering the war I shall say this. People argue that America is a democracy, America   has the White House. I say: slavery was abolished there half a century ago. The anti-slave war ended in 1865. Since then multimillionaires have mushroomed. They have the whole of America in their financial grip. They are making ready to subdue Mexico and will inevitably come to war with Japan over a carve-up of the Pacific. This war has been brewing for several decades. All literature speaks about it. America’s real aim in entering the war is to prepare for this future war with Japan. The American people do enjoy considerable freedom and it is difficult to conceive them standing for compulsory military service, for the setting up of an army pursuing any aims of conquest a struggle with Japan, for instance. The Americans have the example of Europe to show them what this leads to. The American capitalists have stepped into this war in order to have an excuse, behind a smoke-screen of lofty ideals championing the rights of small nations, for building up a strong standing army” (“War and Revolution”, May 1917)
전쟁에 대한 철저한 사회, 경제적인 분석이 가해지는 한편, 혁명적이지 않는 평화 운동을 역시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와 연결시켜 분석한다. 레닌에 의하면 “주류 평화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민주적인 평화 체계”는 기만일뿐, 자본주의가 남아 있으면 전쟁들이 불가피함. 그래서 전쟁 와중에서는 그가 “평화 진영”을 세 가지로 분류함:
“In the realistic politics of the capitalist countries, three kinds of peace sympathies can be seen:
(1) The more enlightened millionaires wish an early peace because they are afraid of revolutions. They have soberly and correctly described any “democratic” peace (without annexations, but with limited armaments, etc.) as Utopian under capitalism.
This philistine Utopia is being advocated by the opportunists, the adherents of Kautsky, and the like.
(2) The unenlightened masses of the people (the petty bourgeois, semi-proletarians, part of the workers, etc.) whose desire for peace is very vague, are thereby expressing a growing protest against the war and a growing but as yet vague revolutionary sentiment.
(3) The revolutionary Social-Democrats, the enlightened advance guard of the proletariat, are attentively studying the sentiments of the masses, utilising the latter’s growing striving for peace, not in order to bolster the vulgar utopias of a “democratic” peace under capitalism, not in order to encourage hopes being placed in the philanthropists, he authorities, and the bourgeoisie., but to bring clarity into vague revolutionary sentiments, to enlighten the masses with a thousand facts of pre-war politics; basing that work on the experience of the masses and on their sentiments, they are out to prove systematically, steadfastly and unswervingly the need for mass revolutionary action against the bourgeoisie and the governments of their respective countries as the only road towards democracy and socialism” (1915, “Bourgeois Philanthropists and Revolutionary Social-Democracy”)
“주류 평화주의”의 유토피아적인 성격에 대한 레닌의 지적은 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데,  “폭력 혁명”을 지향하지 않는 반자본주의적인 평화 운동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레닌이 무관심했다. 그에게는 “영구적인 평화”로의 유일한 길은 “세계 전쟁을 계급간의 내전으로” 바꾸는 일이었음.  

레닌 – 제1차세계 대전의 참극을 목도하면서 새로운 “계급간의 내전”을 이미 이론적으로 구상한다. 그에게는 장기적인 내전이란 성공적인 혁명의 불가피한 결과다. 사회주의가 먼저 한 나라에서 승리할 경우, 이 나라는 다른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의로운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레닌으로서는 “역사의 당연한 논리” – 대량적인 군사적 폭력의 지속을 통한 “해방의 역사의 전개”를 예상한다:
“Civil war is just as much a war as any other. He who accepts the class struggle cannot fail to accept civil wars, which in every class society are the natural, and under certain conditions inevitable, continuation, development and intensification of the class struggle. That has been confirmed by every great revolution. To repudiate   civil war, or to forget about it, is to fall into extreme opportunism and renounce the socialist revolution.
(…) The victory of socialism in one country does not at one stroke eliminate all wars in general. On the contrary, it presupposes wars. The development of capitalism proceeds extremely unevenly in different countries. It cannot be otherwise under commodity production. From this it follows irrefutably that socialism cannot achieve victory simultaneously in all countries. It will achieve victory first in one or several countries, while the others will for some time remain bourgeois or pre-bourgeois. This is bound to create not only friction, but a direct attempt on the part of the bourgeoisie of other countries to crush the socialist state’s victorious proletariat. In such cases, a war on our part would be a legitimate and just war. It would be a war for socialism, for the liberation of other nations from the bourgeoisie. Engels was perfectly right when, in his letter to Kautsky of September 12, 1882, he clearly stated that it was possible for already victorious socialism to wage “defensive wars”. What he had in mind was defense of the victorious proletariat against the bourgeoisie of other countries.
Only after we have overthrown, finally vanquished and expropriated the bourgeoisie of the whole world, and not merely in one country, will wars become impossible. And from a scientific point of view it would be utterly wrong—and utterly unrevolutionary—for us to evade or gloss over the most important things: crushing the resistance of the bourgeoisie—the most difficult task, and one demanding the greatest amount of fighting, in the transition to socialism. The “social” parsons and opportunists are always ready to build dreams of future peaceful socialism. But the very thing that distinguishes them from revolutionary Social-Democrats is that they refuse to think about and reflect on the fierce class struggle and class wars needed to achieve that beautiful future”.  (1916, “The Military Programme of the Proletarian Revolution”). 즉, 러시아 내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격렬한 내전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이미 설파하는 것임.

집권 이후의 레닌 – 1917년12월20일 – 비밀경찰 (ChK) 창설, 1920년 – 중앙 및 지방 비밀경찰은 약 3만 명에 가까운 요원을 확보했음; 1918년5월에는 전국적인 징병제 부활 (그전에는 “노동자 민병대”들은 혁명의 기둥이었음) – 약 5만 명의 구 제정 러시아 군대의 장교들을 동원 내지 초빙하여 이 새로운 군대의 “기간병”으로 삼았음. 1924년까지는 공산당의 “정치 위원” (Komissar)은 장교를 감시해야 했지만 그 후에는 군대는 다시 한 번 “장교 권력 일원주의”로 귀결됐음. 졸병들의 80% - 농민 출신. 농민은 – “무산계급 독재 국가”에서 아예 법적으로까지 평등권을 누리지 못했음 – 도심지역에서 중앙 소비에트 대표 1사람을 2만5천 명이 뽑았지만 지방 (농촌 지대)에서는 12만5천 명이 뽑았음 – 법제화된 차별대우. 대신에 군복무를 마친 농민에 대해서는 국가는 각종의 혜택을 부여했음 (대학교 입학 우선권 등) – “準노동자” 신분 – 군 복무는 “입신출세의 디딤돌”로 인식되게 됐음 – 초기 소비에트 러시아 대다수 제도권 남성의 공통 경험. 사회의 군사화와 당의 군사화 - 1919년에 50만 명의 전체 공산당 당원 중에서는 약 절반은 군복무를 여러 형태로 하고 있었음. 군 복무 – 농민들을 위해 “입당 – 출세”의 첩경. 결국, 레닌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내전의 결과 – 철저하게 군사적으로 조직된 “총동원 사회”.

레닌 사상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 – 한편으로는 근대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탁월한 급진적인 분석.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 근대 자본주의의 모순의 극복 방안으로서 레닌이 제안한 것은 단순히 근대적 “총동원 전쟁”의 “혁명적” 연장에 불과했음 – 근대 자본주의적 수단으로 근대 자본주의를 극복하겠다는 입장의 모순성. 레닌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기만성”을 폭로한 것은 상당부분 타당하지만 그에게는 노동계급의 자율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없었으며 “사회주의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자각은 매우 희박했다. 결국 1917년10월 혁명 이후에 그와 그의 당이 사실상 중앙집권적인 전시 국가 자본주의적 체계를 확대, 심화시켜 부활시킨 것은 – 결코 우연이 아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기인 2007-05-11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퍼가겠습니다. 박노자 선생의 글을 요약하신 건가요? ㅎ

yoonta 2007-05-11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약아니구요. 그냥 퍼온겁니다.^^ 박노자선생 블로그에 올라온 글입니다.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
 

 

들뢰즈 맑스주의 』5장 '노동거부'에

관하여


승준(reds), 자율평론 상임만사


5장 노동거부

이 장은 ‘어떻게 사회적 공장이라는 닫힌 공간 속에서 그에 적합한[소수적] 정치를 발전시킬 것인가’라는 주제 하에서, 노동거부의 정치학을 검토하고, 오뻬라이스모의 ‘관점의 전환’과 ‘계급구성’ 개념에 대한 일련의 해석적 진단을 내린 후, 이후 아우또노미아 운동의 3가지 실천적 활동인 노동거부, 사회적 임금, 문화창조의 기법 등을 (쏘번의 용어로는) ‘사회적 탈주선들과의 현대적 교전’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한다.

오뻬라이스모의 정치학은 ‘민중의 현전’을 전제삼는 정통맑스주의나 사회민주주의 모델이 실제적 포섭에서는 자본주의적 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처럼 ‘민중이 없는 소수적 조건의 긍정’에서 출발하는 오뻬라이스모의 언어가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그것이 다수언어인 ‘정상적 담론’과 대립할 뿐만 아니라, 소수문학의 특징적 스타일인 상황적 교전 속에서 출현하기 때문이다.





노동거부

‘노동자들은 자기조직화 속에서 코뮤니즘의 본질을 실현할 것’이라는 평의회주의와, ‘자주관리’를 ‘노동에 대한 사회주의적 긍정의 다른 판본’으로 이해하는 경우는 모두 코뮤니즘을 실현할 집단이 확정된 것으로 전제하며, 또한 ‘노동’의 문제를 ‘관리’의 문제로 오해한 것이다. 이때 이들은 실제적 포섭에서 노동이 이미 언제나 자본으로 기능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했다. 이 점에서 뜨론띠는 노동의 형식이나 기능, 그리고 노동의 주체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혁명적 정치의 기초조건이며, 정치는 ‘외적’ 통제에 대항하는 노동의 갱생이 아니라 노동의 거부이자 노동자 주체의 거부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거부는 사회적 공장의 생산체제 내부에서 그것에 대항하는 창의적 실천을 향한 추진력이자, 프롤레타리아적 구성의 양식일 수 있다.


계급구성, 그리고 관점의 역전

‘계급구성’1)은 구조적이고 정치적인 요인들을 병합하는 양극적이고 역동적인 개념이다. 오뻬라이스모는 계급을 “역사적 변형가능성의 맥락 속에 틀”지우며, “동력학과 힘의 장에 연결”시키며, 이때 계급구성은 특정한 사물을 지칭하지 않는 하나의 구성과정을 지시한다. 그래서 계급구성론은 구성의 정치적 형식·변이·창조들(그리고 실천들)에 특별한 강조점을 두면서, ‘관점의 역전’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관점의 역전’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 뜨론띠(그리고 ꡔ제국ꡕ의 하트·네그리)는 노동계급이라는 독립된 주체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자본’과 ‘투쟁하는 노동계급’이라는 양극적 전쟁게임을 제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투쟁이 창조성의 원리 자체가 됨에 따라 자본으로부터의 특정한 독립을 가정하게 되며 그로 인해 투쟁은 보편적인 방식으로 제시되게 된다. ⓑ 네그리는 한 때 이러한 관점의 역전을 ‘노동자주의의 썩은 변증법’이라고 비판2)하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가 본 것처럼 ‘투쟁의 포획의 주기 자체에 대한 이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의 ‘불확정적[우연적]’ 성격에 있는 것이다. 즉 그에게 투쟁은 자율의 현장일 뿐만 아니라 운동을 자율적 생산으로 나아가도록 강제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 쏘번이 걷는 길 : 저항과 자본을 이분법 속에서 이해하거나 저항이 생산적 자율성을 향한 운동을 유발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관점이 역전이 어떻게 더욱더 소수적이며 프롤레타리아적인 조건 속에서 제기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즉 권력에 대한 다소 취약한 반응으로 상정된 푸코의 저항모델보다 욕망하는 생산의 우선성에 대한 들뢰즈·가따리의 강조를 따르는 것이 더 유효하다. 들뢰즈에게 탈주선은 어떤 아상블라주로부터의 탈주라기보다는 각각의 아상블라주가 그 위에 배치되는 발명력이다. 자본주의적 사회체는 투쟁과 저항의 결과로서만 재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많은 속성들과 그것의 다양한 탈주선들의 결과로서 재배치된다. 만약 우리가 관점의 역전을 탈주선의 맥락 속에서 생각하면, 정치적 실천은 순수한 [독립적·자율적, 혹은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찾거나 긍정할, 혹은 통일된 저항의 힘을 제안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정치적 실천은 그들의 탈주선을 따라가면서, 그리고 노동의 체제와 그것들에 내재하는 등가물을 탈영토화하면서, 사회적인 것을 통해 많은 실천·욕망·발명·필요들과 교전해야만 한다. 이러한 접근은 여전히 도주의 과정에 존재론적·인식론적 우선권을 부여한다. ‘관점역전’테제의 결정적 시험은 역사적 변화에 대한 총체화하는 설명이라는 그것의 메타차원들에 있다기보다는 그것이 계급구성과 투쟁의 형태들의 특유성 및 세부에 대한 강렬한 탐구를 자극하고 또 그것과의 적극적 교전을 자극한다는 점에 있다. 라이트는 오뻬라이스모에게서 ‘정치적 조급성’이 보인다고 말하는데, 그 원인은 관점역전테제의 ‘약한 판본’이 가진 문제점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즉 투쟁의 자율적 성격은 그것이 출현할 때마다 무비판적 긍정을 야기한다.

- 약한 개념화와 강한 개념화 : 홀로웨이는 자신의 견해가 관점역전테제의 ‘약한 판본’(‘자본은 노동계급 투쟁에 대한 반작용이다’, ‘노동계급은 자본 내부에서-그것에 대립하는 힘’)이라고 말하지만, 쏘번은 ‘강한 판본’에 더 많은 관심을 둔다. “자본이란 노동계급의 생산물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니며 따라서 매분매초마다 그 재생산을 노동계급에게 의존한다.”


자기가치화

- 차이와 독립 : 네그리는 “프롤레타리아적 자기가치화를 자본주의적 생산과 재생산과정의 총체성에 대한, 그리고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안”으로 제시하며, 그 ‘대안’적 장소를 3가지 방법론으로 기술한다. ⓐ 노동자운동에 대한 ‘타자성’, ⓑ 자본주의적 발전으로부터의 ‘탈구조화와 재구성’으로 이해되는 분리관계, ⓒ 규범적인 자본주의 문화의 형식·실천·언어들과의 분리. 이러한 규정은 그것의 장점을 별도로 하면, 네그리의 최근 작품에서 드러나는 문제점과 연결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혁신과 불연속성의 과정으로, 그리고 실제로 지속적으로 탈구조화하는 자본주의적 관계로 제시됨에도 불구하고, 그 활동의 내용은 하나의 해방된 주체성으로서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향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기가치화는 노동계급의 독립적 존재론의 긍정이 된다. 네그리는 사회적인 것 자체(포섭된 대항문화)를 자율적 창조성의 장소쯤으로 넘겨짚는다.

- 차이·필요 그리고 임금 : 필요(혹은 욕구)들은 삶의 형식이자, 자본주의적 관계들과 가치들 속에 휘말려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정치의 결정적인 장소이다. 그래서 자기가치화의 정치는 노동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넘어 사회화의 지평 전체를 덮을 정도로 확장한다. 자기가치화는 욕구들의 증식과정이자 욕구들의 공리화의 파괴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점에서 ꡔ맑스를 넘어선 맑스ꡕ의 네그리는 자기가치화를 사회적 임금의 확장에 대한 강조와 결합시킴으로써 프롤레타리아의 소수적 실천으로 새기고 있는데, 이것이 오히려 유효하다. 그것은 계급구성의 다양한 소수자들의 ‘작은 계략들’을 사회적 전체와 연결시키는 일종의 경계잇기 때문이며, 새로운 소수적 욕구들과 스타일들을 발전시키는 것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 사회적 노동자와 다중 : 후기의 네그리에게서는 과도하게 일반화된 생산의 지평과 다중의 이론을 위해 계급구성의 특유성과 복잡성을 평면화하는 경향이 있는 하나의 종합을 탐지할 수 있다. 이것이 문제일 것이다. 만일 사회적 노동자 개념이 소수적, 프롤레타리아적 방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면 허구적 종합을 필요로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특유한 환경 속에서 정치적 배치의 복잡성과의 교전을 피할 수 없게 만듦으로써, 유용한 정치적 형상으로 그려질 수 있는데 말이다. ‘노동거부’는 네그리가 말했던 대로 ‘자살적 자기파괴’가 아니며, 자본주의적 형성체에 내재하는 공리화하는 관계들에의 비판적 개입이라는 점이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노동이 존엄성이라는 네그리의 테제는 탈영토화를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승]


문제제기

- 쏘번이 개념적 강조점을 둔 ‘탈주선’과 맑스·네그리의 ‘산노동’의 차이는 무엇인가? 혹시 쏘번은 work와 labor의 의미상의 차이를 너무 가볍게 넘기는 것은 아닌가? 네그리에게서 ‘긍정’의 개념을 혹시 쏘번은 자본주의 안에서의 ‘자율적 주체성’의 긍정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나로서는 변증법을 완전히 탈각하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composition’개념과 ‘constitution’은 번역상이 아니라 개념사용의 차원에서도 구분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예컨대 ꡔ혁명의 만회ꡕ의 ‘고고학과 기획’의 구절들이나 혹은 예컨대 제국의 서술방식이 고려되거나 ‘정치(학)’에 대한(ꡔ구성권력ꡕ이나 ꡔ디오니소스의 노동ꡕ의) 네그리의 관심이 고려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 부정적 방식의 문제제기 : 투쟁의 ‘불확정성’이 문제라면, ‘교전’의 광의적 사용은 어찌해야 하는가?

- 쏘번이 홀로웨이를 빌어 말한 관점역전테제에 대한 ‘강한 판본’과 ‘약한 판본’은 양립불가능한가?


---------------------------------

1) “계급구성이라는 말로, 나는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성격들의 결합을 의미한다. ... (1) 노동-능력의 .. 역사적으로 주어진 구조. (2) 그 자신의 독립적 동일성을 향하는, 필요들과 욕망들이 굳어진 일정한 수준으로서의, 역동적 주체로서의, 적대적 힘으로서의 노동계급” (네그리, ꡔ혁명의 만회ꡕ)


2) “프롤레타리아 투쟁들이 지속적으로 자본주의적 통제형식들의 재구조화를 유발하며 그것이 다시 계급의 새로운 주체적 윤곽과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불확정적으로) 대면한다고 보는 연결관계는 결정적으로 붕괴되었다.”

▒▒The Autonomy Review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Critiques of Slavoj Žižek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Jump to: navigation, search
The neutrality of this article is disputed.
Please see the discussion on the talk page.

Slavoj Žižek's notoriety in academic circles has increased rapidly, especially since he began publishing widely in English. Many hundreds of academics have addressed aspects of Žižek's work in professional papers.[2] Inevitably, in the course of such scholarly discussion, many other thinkers differ with aspects of Žižek conceptual approach or specific arguments. While there is no indication that Žižek has received more criticism than have other continental philosophers of similar repute, this article discusses certain criticisms.

그의 영어본 출간이 시작한 이래로 학자집단에서의 슬라보예 지젝의 악명이 급속히 퍼지고 있다.
수많은 학자들은 그들의 전문적 논문들 속에 지젝의 작업이 보여준 측면들을 언급해 왔다.
불가피하게 그러한 학술적 토론의 과정에서 많은 다른 학자들은 지젝이 가진
관점들의 개념적 접근이나 특정 논쟁들로부터 의견을 달리한다. 지젝이 다른 비슷한 평판을 가진 대륙철학자들보다 더 많은 비판을 받았다는 징후는 없지만 이 글은 그에 대한 몇몇 비판들에 대해 논할 것이다.    

 

 

 

 

Contents

[hide]

[edit] Argumentative method

Žižek's style is a matter of some debate:

Critiques include Harpham (2003)[1] and O'Neill (2001).[2] Both agree that Žižek flouts standards of reasoned argumentation. Harpham calls Žižek's style "a stream of nonconsecutive units arranged in arbitrary sequences that solicit a sporadic and discontinuous attention." O'Neill concurs: "a dizzying array of wildly entertaining and often quite maddening rhetorical strategies are deployed in order to beguile, browbeat, dumbfound, dazzle, confuse, mislead, overwhelm, and generally subdue the reader into acceptance." Supporters such as R. Butler[3] argue that such critiques miss the point and instead support Žižek's own theories: "As Žižek says, it is our very desire to look for mistakes and inconsistencies in the Other that testifies to the fact that we still transfer on to them...."[4]

 

논쟁적인 방법론

지젝의 스타일은 논쟁의 대상이다.

Harpham과 O'Neill 같은 비평가들은 지젝이 심사숙고한 논쟁의 기준들을 비웃는다는데 동의한다.
Harpham은 지젝의 스타일을 " 산발적이고 불연속적인 주의를 부추기는 자의적인 씨퀀스로 배치된
비일관된 조합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O'Neill은 " 지나치게 유쾌하기도하고 때론 꽤 화나게
만드는 어지러운 배치들로 이루어진 수사적인 전략들은 (독자들을) 기만하고,위협하고,기막히게하고
눈부시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고, 오인하게 하고,  난처하게 하고, 그리고 대개는 독자들로 하여금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활용된다"고 한다.
R. Butler와 같은 옹호자들은 그러한 비판들은 논점을 놓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대신
다음처럼 지젝의  이론을 지지한다. " 지젝이 말한 것처럼,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그것들로
전이transfer된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타자 the Other 내에서 실수와 불일치를 발견하려고 하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욕망인 것이다."

[edit] Social policy

John Holbo of the 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 has criticized Žižek[5] for his alleged refusal to lay out precisely what social formation he would replace the existing order with. Holbo argues that Žižek's "irrational" approach to thought disregards the ontic benefits brought about by late capital, specifically in its liberal-democratic form. A similar criticism, from a scholar more closely akin to Žižek, is made by Ernesto Laclau in 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 In his "Response to Žižek", Laclau claims that Žižek's political thought is dogmatically Marxist, and often out of keeping with his psychoanalytic theories. Noting that "all of Žižek's Marxist concepts come from either Marx himself or from the Russian Revolution", Laclau asserts that "Žižek uses class as a sort of deus ex machina to play the role of the good guy against the multicultural devils. Laclau concludes that Žižek's political thought suffers from "'combined and uneven development'" and that "while his Lacanian tools, combined with his insight have allowed him to make considerable progress in the understanding of ideological processes in contemporary societies, his strictly political thought... remains fixed in traditional categories" [6].

 

사회 정책

싱가폴 국립대학교의 John Holbo는 지젝을 현존하는 질서를
정확히 어떤 사회 구성체 social formation로 대체할 수 있는지 기획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비판한다. Holbo는 지젝의 사상에 대한 불합리한 접근이 후기 자본주의, 특히 자유민주주의
형태로 출현하는 실재적인 혜택을 무시한다고 논한다.
비슷한 비판으로 지젝과 더욱 가까운 스타일의 학자이고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라는 책을 저술한 Ernesto Laclau는 이 책에서 지젝과 관련해 언급하면서 지젝의 정치사상은 도그마적인 맑스주의고 그의 정신분석이론으로부터도 종종 일탈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지젝의 맑스주의적 개념들은 맑스 자신 혹은 러시아혁명으로부터 나온 것이다."라고 지적하면서, Laclau는 "지젝은 계급을 다원적문화라는 악마에 대항하는 선한 자의 역할을 하는 전능한 기계 deus ex machina의 한 종류로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지젝의 정치사상은 "복합적이고 불균등한 발전"으로부터 손상을 받고 라캉주의적 도구를 사용하여 구성된 그의 통찰은 그로 하여금 현대사회에서의 이데올로기적 과정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두드러진 진보를 가능케 한 반면, 그의 경직된 정치사상은 전통적인 범주 내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라고 결론내린다.

 

[edit] Alleged Misreading of Lacan

and Hegel

Some of Žižek's critics have accused him of misreading other philosophers and theorists, particularly Jacques Lacan and G. W. F. Hegel.

Ian Parker, a Lacanian psychoanalyst, complains that Žižek "delights in the most extreme formulations of what the end of psychoanaylsis might entail" (Ian Parker, Slavoj Žižek: A Critical Introduction, Pluto Press: London and Sterling, 2004; p. 78). For Parker, this is particularly problematic when Žižek attempts to carry over concepts from Lacan's teachings into the sphere of political and social theory. Parker notes that Lacan's seminars were originally addressed to an audience of psychoanalysts for use in their clinical practice rather than for philosophers such as Žižek to produce new theories of political action. This is particularly true, claims Parker, of Žižek's appropriation of Lacan's discussion of Antigone in his 1959-1960 seminar, The Ethics of Psychoanalysis. In this seminar, Lacan uses Antigone to defend the claim that "the only thing of which one can be guilty is of having given ground relative to one's desire" (Slavoj Žižek, The Metastases of Enjoyment, Verso: London, 1994; p. 69). However, as Parker notes, Antigone's act (burying her dead brother in the knowledge that she will be buried alive) was never intended to effect a revolutionary change in the political status quo; yet, despite this, Žižek frequently cites Antigone as a paradigm of ethico-political action. Parker concludes that carrying over concepts from Lacanian psychoanalysis "into other spheres requires something a little less hasty and less dramatic than what we find in Žižek" (Parker, p.80).

Noah Horwitz's essay "Contra the Slovenians: Returning to Lacan and away from Hegel" (Philosophy Today, Spring 2005, pp. 24-32) is a critique of Žižek's reading of Hegel. Horwitz claims that Žižek mistakenly conflates Lacan's unconscious with Hegel's unconscious. Horwitz notes that "the 'it' one is meant to identify with in [Lacanian] psychoanalysis is not some inert, substance irreducible to one, but rather the radically other scene where thinking occurs" (Horwitz, p. 30). According to Horwitz, the Lacanian unconscious and the Hegelian unconscious are two totally different mechanisms. If we take speech, Lacan's unconscious reveals itself to us in the slip-of-the-tongue or parapraxis we are therefore alienated from language through the revelation of our desire (even if that desire originated with the Other, as Lacan claims, it remains peculiar to us). In Hegel's unconscious, however, we are alienated from language whenever we attempt to articulate a particular and end up articulating a universal (so if I say 'the dog is with me', although I am trying to say something about this particular dog at this particular time, I actually produce the universal category 'dog').

 

라캉과 헤겔의 오독 혐의

지젝의 몇몇 비판가들은 다른 철학자들이나 이론가들, 특히 자크 라캉과 헤겔을 오독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자인 Ian Parker는 지젝이 "정신분석의 종말이 초래할지도 모르는 것들의 가장 극단적인 공식화formulation를 즐긴다"고 불평한다. (Ian Parker, Slavoj Žižek: A Critical Introduction, Pluto Press: London and Sterling, 2004; p. 78).
Parker에게 이것은 지젝이 라캉의 가르침이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이론의 국면에 이를때 특히 문제가 된다. Parker는 라캉의 세미나들은 원래 지젝처럼 새로운 정치행위이론을 만드려고 하는 철학자들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임상적인 치료행위practice를 필요로 하는 정신분석가들을 청중으로하는 강의에서 언급된 것들이라고 지적한다. Parker는 < 정신분석의 윤리>라는 라캉의 1959-1960년 세미나에서 안티고네antigone에 대한 라캉의 토론을 다루는 지젝의 도용appropriation을 이야기하면서 이 부분에서 특히 사실이라고 말한다. 이 세미나에서 라캉은  다음 주장을 방어하기 위해 안티고네를 사용한다. 그는 말하길, " 우리는 유일하게 다른 사람의 욕망과 관련한 근거를 가지는 것에 관련하여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Slavoj Žižek, The Metastases of Enjoyment, Verso: London, 1994; p. 69).
그러나 Parker는 안티고네의 행동(그녀 자신이 생매장 될줄 알면서도 그녀의 죽은 오빠를 매장한 행위)은
정치적인 현상유지를 혁명적으로 변화하는 효과를 의도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지젝은 안티고네를 윤리-정치적 행위의 패러다임으로서 자주 인용한다.
Parker는 라캉주의 정신분석에서 차용한 개념들을 이용하여 "다른 국면에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지젝에게서 발견하는 것 보다 덜 성급하고 덜 드라마틱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짓는다.
Noah Horwitz의 논문 <슬로베니아인들에 반대하면서: 헤겔로부터 멀리하고 라캉으로 복귀하기>은 지젝의 헤겔독해에 대한 비판이다. Horwitz는 지젝이 라캉의 무의식과 헤겔의 무의식을 잘못 결합시킨다고 주장한다. Horwitz는 " 그것it은 라캉주의 정신분석에 있어서 일자one로 환원될 수없는 타율적인 실체와 동일한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사고thinking를 불러일으키는 다른 장면을 뜻한다."고 지적한다.
Horwitz에 따르면 라캉주의적 무의식과 헤겔주의적 무의식은 완전히 다른 두개의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고 한다. 우리가 말을 할 때, 라캉의 무의식은 말실수나 착오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욕망의 폭로를 통해 언어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라캉이 주장한 것처럼 타자the Other로부터 욕망이 기원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기묘한 것으로 남아 있다. ) 그러나 헤겔의 무의식에서는 우리가 개별적인 것a particular 을 발음articulate하려고 시도할 때 마다  보편적인 것a universal을 말하는 것으로 끝나게 되는 경우를 두고 언어로부터 소외된다고 한다. (만일 내가 '개가 나와 같이 있다.'라고 말하면 비록 내가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개에 대해 말하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나는 보편적 범주의 '개'를 생산하고있는 것이다.)
 

 

[edit] References

  1. ^ Harpham "Doing the Impossible: Slavoj Zizek and the End of Knowledge"
  2. ^ O'Neill "The Last Analysis of Slavoj Zizek"
  3. ^ Butler "Slavoj Zizek: Live Theory"
  4. ^ [1]
  5. ^ Holbo "Critical Discussion ON ZIZEK AND TRILLING"
  6. ^ Butler, Judith, Ernesto Laclau and Slavoj Žižek "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 Contemporary Dialogues on the Left". Verso. London, New York City 2000. pp. 202-2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정성진씨는 맑스주의는 그의 책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1장에서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마르크스 사상 자체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잘못된 독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특히 자본론에 대한 이해의 오류를 이야기하면서 크게 논리역사주의신리카도주의의 형태로 나타나는 오류를 지적한다.

먼저 논리역사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을 살펴 보겠다.

논리역사주의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전통과 함께 오래된 그리고 '정통'으로 간주되어 온 마르크스의 방법에 대한 해석"이라고 그는 말한다. 논리역사주의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고 보는데, 1) 자본론 제 1권 제 1편 모두 상품은 단순상품생산의 상품이다. 2) 상품가치의 실체인 추상노동은 초역사적, 생리학적 범주이다. 3)가치법칙은 단순상품생산의 법칙이며 자본주의의 잉여가치법칙과 구별된다. 4)'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논리는 단순상품생산의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으로의 역사적 이행에 대응한다. 5) 일반적으로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향의 논리적 전개는 현실의 역사발전에 대응한다. 로 요약될수있다고 본다. 이런 논리역사주의는 엥겔스의 자본론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됬는? 뒤이어 레닌이나 스탈린 그리고 심지어 만델이나 로스돌스키등의 트로츠키계열의 학자들 마저도 취하는 오류라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논리역사주의의 오류 중 하나는 맑스의 1편의 단순상품생산 편을 전 자본주의적이고 초 역사적인 논리적 추상으로서 간주하고 자본론의 서술이 이러한 추상에서부터 시작하여 구체에로 상승하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논리적 전개는 현실에 있어서 역사발전에 즉 사적 유물론에 대응하는 것으로 볼수있다는 관점이다. 그런데 정성진씨는 정작 맑스자신은 이러한 논리역사주의를 주장한 적이 없다고 한다. 특히 그의 <정치경제학비판 요강>을 보면

"경제학적 범주들은 그것들이 역사적으로 규정적이었던 순서에 따라서 차례로 배열하는 것은 실행이 불가능하며 또 오류다. 오리려 그 순서는 그것들이 근대 부르주아 사회에서 상호 간의 관계에 의하여 결정되며 이 관계는 자연그대로의 순서에 따라 나타나는 것 또는 역사적 발전의 계열에 상응하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이다"

와 같은 구절들에서 발견할수 있다는 것이다. 아서Arthur와 같은 학자들은 엥겔스가 <요강>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와같은 논리역사주의적 오류를 범했다고 이야기한다고 한다. 또한 <자본론>의   단순상품생산편도 논리적이고 추상적인 상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적' 상품이라는 것인데 정성진은 그 근거로 <자본론>의 다음 구절을 인용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는 상품의 방대한 집적으로서 나타나며, 개개의 상품은 이러한 부의 기본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구는 상품의 분석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구절 그대로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내의 '상품'이지 논리적이고 추상적이며 초역사적인 '상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성진은 <자본론>의 이 '상품'이 자본주의의 특수한 상품이고 역사적인 상품분석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면서도 상품으로 시작하는 <자본론>의 서술방식 자체가 논리적이지 않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분업, 노동, 재화가 아니라, 즉 형태 규정을 무시한 초역사적 범주가 아니라 특수역사적 형태인 상품에서부터 논리적으로 상향 전개하는 방법으로 서술했다." (25쪽)

즉 그는 맑스의 <자본론>의 서술방식자체가 논리적인 체계로 추상에서 구체로 향하는 상향식 전개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만큼은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가 논리역사주의와 다른 점은 바로 1편의 상품이 초역사적이지 않고 바로 자본주의적 상품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데 있다. 또 그는 자본주의의 가치법칙과 단순상품생산이 온전히 작동하려면 자본주의라고 하는 현실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인용한다.

"가치가 교환에 선행하여 주어진 실체가 아니라 교환형태 속에서만 또 교환형태를 통해서만 발전하는 것이라면, 가치가 형태와 내용에서 하나의 현실이 되고, 가치의 논리가 양적으로 규정적인 상품생산법칙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경제의 운동에 강제하게 되었음이 입증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할 때에만 가치는 완전히 발전할 수 있다." (아서Arthur  "Engels as Interpreter of Marx's Capital" Rethinking Marxism)

"가치법칙은 그 완전한 발전을 위해 대공업생산과 자유경쟁 사회, 즉 근대 부르주아 사회를 전제한다." (맑스,정치경제학비판을 위하여)

논리역사주의가 이처럼 초역사적 단순상품생산을 이야기하였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1권과 3권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점 ,즉 "가치론과 생산가격론의 모순 이른바 전형문제"등과 같은 모순들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가치법칙이 통용된 시대를 자본주의가 아닌 단순상품생산 단계에 한정하고, 경쟁자본주의 단계에는 생산가격론 및 잉여가치법칙, 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는 독점가격론 및 최대한 이윤의 법칙 또는 독점이윤의 법칙이 지배하게 된다는 스탈린주의 경제학 체계가 성립할 수 있게 된다."고 그는 본다. 특히 가치법칙이 사회주의에서도 작동한다고 보는 스탈린주의적 시각은 "논리역사주의의 정점"이라는 것이다.

그는 논리역사주의에서처럼 가치법칙이 보편이고 초역사적인 경제법칙이 아니라 "가치법칙 자체가 잉여가치법칙"이다라고 말한다. 맑스의 다른 여러 개념들 예컨대 화폐, 가격, 이윤, 임금, 지대 및 이자 등과 같은 범주들도 이와같은 가치법칙에서 도출되는 범주라는 것이다.

또 논리역사주의는 1장에서 가치의 실체라고 규정한 추상노동도 초역사적 범주로 규정한다고 한다. 초상노동을 초역사적 범주로 생리학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사실 고전 정치경제학의 특징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추상노동이 특수한 것임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정성진은 이야기한다.

"리카도는 상품의 상대가치(혹은 교환가치)가 노동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이 노동의 특징은 더 이상 검토되지 않는다. ...리카도는 형태, 다시 말해서 교환가치를 창조하는 혹은 자신을 교환가치로 드러내는 노동의 특징, 즉 노도의 성격검토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이 노동의 화폐와의 관련성 혹은 그것이 화폐의 형태를 취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다. ....처음부터 그는 가치량에만 관심을 가진다. 즉, 상품의 가치의 양이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의 양에 비례한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가진다. (MEW,  vol31 강조는 맑스)

이처럼 추상노동도 초역사적 범주가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적 추상노동'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것은 "소외된 노동, 강제된 노동, 끝없는 노동"인 것이다.

 한편 그는 "마르크스의 가치형태 전개는 상품에 내재한 가치와 사용가치의 모순의 '내재적 자기초월'과정으로서의 변증법적 전개"라고 말하면서 논리역사주의가 <자본론> 1권 2편에 있는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가 단순상품생산에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역사적 전화라고 보는 점을 비판한다. 그는 이 부분 즉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는 "C-M-C 와 M-C-M의 형태적 및 내용적 구별"에 의해서 이론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라는 마술, M-C-M' 의 모순은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가 전제되는 것으로부터 이미 여건으로 되어있던 노동력 상품을 연구대상에 도입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말해 그것은 "우리들의 눈앞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이지, 역사적 전화같은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행'은 "표면으로부터 심층으로의 이행"과같은 이론적 서술방식에 기인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마르크스는 단순유통을 부르주아적 총생산과정의 추상적 표면이며 이는 심층에 존재하는 과정인 산업자본의 단순한 현상형태"라고 설명한다. 즉 단순상품생산과 자본이전의 화폐와 같은 설정은 심층으로 이행하기 위한 표면으로 <자본론>의 1장에 서술되어졌다는 것이고 그것은 실제 자본주의의 역사적 이행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여기에서는 유통의 자본으로의 역사적 이행을 문제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순유통은 오히려 부르주아적 총생산과정의 추상적 부면이다. 그것은 그 자신의 규정에 의해 그 배후에 놓인, 즉 그것으로부터 결과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낳는 더 심층적인 과정-산업자본-의 계기, 단순한 현상형태라는 사실을 스스로 실증하는 것이다. (MECW , vol 29)"

그밖에도 그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에서 나오는 '부정의 부정'도 역사적 발전과는 무관한 이론적 서술일 뿐이라고 한다. 이처럼 그는 <자본론>이라는 저작을 "특수역사적 사회인 자본주의를 논리적으로 해명한 것이며, 그 논리 전체에 따라 자본주의의 역사성을 논증한 과학이라는 성격을 가진다"라고 본다. 또한 "자본주의의 순수한 모습을 논리적 방법으로 해명하는 것과 자본주의의 발생,발전, 소멸 과정을 연구하는 것은 서로 완전히 다른 연구방법이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자본론>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사고 속에서 재구성하는 사회경제 범주들의 체계적 전개"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계속해서 그는 신리카도주의를 비판한다. 신리카도주의는 보르트키에비치(L. Bortkiewicz)나 스라파 등과같은 인물들에 의한 맑스주의 해석이다. 신라카도주의는 맑스의 경제학을 리카도의 노동가치론의 계승으로 파악하고 맑스의 가치법칙은 "본질적으로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동일하다"고 본다고 말한다. 다만 맑스주의 경제학은 잉여가치법칙의 발견 그리고 이에따른 자본주의의 비판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다. 돕(Dobb)은  "맑스와 고전 정치경제학의 본질적 차이는...잉여가치론이다'"라는 해석이 그래서 도출된다.

이에 대해 정성진씨는 가치론에서 고전 경제학과 맑스주의 경제학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신리카도주의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리카도는 교환가치가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는 가치의 본질에만 관심을 가졌으나 맑스는 리카도가 제가하지 않은 문제, 즉 왜 가치가 필연적으로 화폐형태로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고전 경제학의 한계는 "가치를 교환가치로 나타나게 하는 가치형태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맑스는 그의 가치형태론과 물신성 비판을 통해서 가치의 수량분석에만 그치는 고전경제학을 뛰어넘어서 "가치의 질적 분석"을 했다고 본다.

"나의 책에서 가장 요긴한 것은 ... ① 바로 제 1장에서 강조된, 노동이 사용가치에서 표현되느냐 가치에서 표현되느냐에 따른 노동의 이중성, ② 잉여가치를 그 특수한 형태들인 이윤, 이자, 지대 등과 독립해서 취급한 점이네 "(<자본론에 관한 서한집> 중원문화사. 160p. 강조는 맑스) 

 그런데 신리카도주의는 맑스의 가치론에서는 자본주의의 비판의 성격을 찾아볼수 없고 "노동과 노동력개념의 구별 이후에 , 즉 잉여가치 범주의 도입과 함께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은 논리역사주의와 마찬가지로 초역사적인 추상노동 규정이라는 성격을 신리카도주의도 가지고 있다고 정성진씨는 지적한다. 이처럼 신리카도주의는 노동을 초역사적 범주로 보기 때문에 "가치를 시장 범주, 분배 범주로만 간주하며, 가치를 부의 형태 자체로 파악하지 못"하게 되어 부를 창조하는 노동의 자본주의적 특수성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추상노동을 자본주의에 간접적인 것으로 신리카도주의는 보는데 이는 "맑스의 노동개념을 오해"한 것이라는 것이다.  맑스는 "자본주의에서 노동의 즉각적으로 사회적인 성격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라고 보았고 지적한다.  드 브로이(M, De Vroey)로 대표되는 이른바 추상노동학파는 "추상노동의 간접적으로 사회적인 성격만 강조하고 추상노동에 고유한 사회적 관계의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드 안젤리스(De Angelis)같은 학자는 비판한다고 한다.

한편 보르트키에비치가 발견한 소위 '전형문제'도 이와 동일한 문제점을 자기고 있다고 한다. '전형문제' 즉 맑스가 가치를 생산가격으로 전형하는 과정에서 산출만 전형하고 투입을 전형하지 않아 "가치가 생산가격으로 전형된 후에도 가치의 총합과 가격의 총합이 같고 잉여가치의 총합과 이윤의 총합이 같아야 한다는 명제중 하나는 성립하지 않게 된다" 는 문제점을 맑스주의 경제학은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전형문제로 인해 최근 '불균형론' 이나 '시점 간 단일체계(Temporal Single System, TSS)'론이 대두되기 까지는  맑스의 가치론은 폐기되어 왔다는 것이다. 스티드만(Steedman)같은 신리카도주의학파 학자는 "생산기술조건과 실질임금이 주어지면 가치개념을 우회할 필요없이 가격과 이윤율을 직접 도출할 수 있으므로 가치에서 생산가격으로의 전형은 불가능할 뿐더러 불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프리맨(A, Freeman), 카르체디(G, Carchedi), 맥글론과 클리먼(McGlone & Klimann)등과 같은 '불균형론자'들이나 '시점간 단일체계론'자들이 나오면서 "맑스에게 '전형문제'가 존재한다는 신리카도학파의 전제 자체를 부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투입'시점의 가격과 '산출'시점의 가격이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신리카도학파는 양자를 동일시하여 '생산이 시간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현실에서는 "자본가들이 먼저 투입을 구매하고 재화를 생산한 뒤 그것을 투입과는 다른 새로운 가격으로 판매한다는 사실이며 맑스의 전형은 이러한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 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보르트키에비치는 "하나의 경제에서 상이한 두 시점간의 가치와 가격 간의 문제"를 "동일한 시점에서 상이한 두 경제간의 가격들의 관계문제"롸 바꿔치기함으로써 존재하지도 않은 '전형문제'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투입 가치를 가격으로 전형하지 않은" 것에서 생기는 전형문제는 맑스의 방법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면서 모슬리(Moseley)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맑스의 자본 일반과 경쟁 개념의 주된 목적은 경제 전체의 잉여가치 총량의 생산과 이 잉여가치 총량의 개별 자본가들로의 분배를 구별하는 것이다....잉여가치 총량은 이 잉여가치 총량의 개별 자본가들로의 분배에 선행하여 그와 독립적으로 자본 일반의 총량 분석 수준에서 결정된다." 때문에 "가치의 생산가격으로의 '전형'은 총가격에서 개별가격으로의 이행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투입은 생산가격의 결정에서 가격단위로 주어여 있으므로 가치량에서 가격량으로 전형될 필요가 없다." 고 모슬리(Moseley , Marx's Method in Capital. Humanities Press)는 이야기한다.  

그런데 신리카도학파가 이와같은 오류에 빠지게 된 원인은 "바로 이 본질과 현상에의 추상수준 구별 및 이드의 변증법적 매개관계를 인식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가치와 가격, 잉여가치와 이윤의 '전형'관계는 자본일반과 다수자본의 차별적 추상수준의 관계임과 동시에 본질과 현상형태의 매개의 변증법적 관계"라는 것이 정성진씨의 결론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본질과 현상형태의 구별이 맑스의 것이 아니라 헤겔의 잔재이므로 기각해야 한다는 알튀세르(Althusser)의 주장"도 문제가 있게 된다. 모슬리등의 비판에 의거해 정성진씨는 알튀세르의 '인식론적 단절'과 관련된 주장, 예컨대 <자본론> 제 1권 제 1편은 "헤겔주의적 난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다시 써야한다."와 같은 주장은 맑스의 가치형태 분석의 의의를 부정하는 이론이라고 본다. 그는 알튀세르가 비록 논리역사주의에 대한 비판은 될 수 있지만 "스탈린주의적 문제설정에서 벋아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다음으로 사회주의론에 대한 정성진씨의 견해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구 사회주의의 몰락과 맑스주의 경제학과는 본질적인 관련이 없다고 본다. 맑스주의 경제학에서는 추상노동과 가치범주가 존재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적 범주이므로 "그러한 범주들의 현존을 자타가 공인한 사회를 사회주의라고 규정함으로써 패러다임의 위기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맑스가 말한 자본주의의 기초는 '사적소유'가 아니라 '소외된 노동'에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사적소유는 소외된 노동의 표현이며 결과이지, 그 원인이 아니"라고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맑스는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또한 '위로부터의 계획'도 자본주의에 고유한 것이며 이와는 달리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체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계획'이야말로 반자본주의적 방식의 계획이라는 것이다. 총자본가(집단적 자본가)의 생산과정상의 지휘는 "이중적 성격"을 가지는데 이는 생산과정이 "한편으로는 생산물의 생산을 위한 사회적 노동과정"이면서 동시에 "자본의 가치증식과정"이라는 특징을 자본주의사회는 가진다. 따라서 "소유관계의 변혁(국유제)"나 "분배관계의 변혁(계획)"만으로는 그것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극복이라고 볼수없으며 "시장과 형태만 다른 추상노동의 강제기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구 소련의 계획경제도 자본주의적 성격을 가진 것이 된다.

"1935~1937년의 반혁명은 계획의 도입과 함께 시작된 과정의 절정이었다. 계획은 노동자와 경영자를 직접 충돌시켰다. 노동조합이 국가기구 속으로 해소된 것은 계획당국과 노동자 사이의 이어질 수 없는 엄청난 간격을 상징했다....1936년 이래 러시아의 경험은 유산계급이 아닌 다른 계급에 의한 계획이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법칙을 역전시킬 수 있다는 환상을 산산조각 내버렸다"(Dunayevskaya, Marxism and Freedom. 228p.  Columbia University Press)

또한 맑스는 기존의 통속적 견해처럼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즉 사회화된 생산과 사적 소유간의 모순으로 이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맑스는 "자본주의 생산영역 자체의 내부모순",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과 새로운 생산양식의 가능성간의 모순"으로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을 설정하였다는 것이다.

"현실적 부의 창조는 노동시간과 고용노동량에 의해 좌우되기보다는 오히려 노동시간 중에 작동되는 요인들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 ... 이와 같은 변화 속에서 생산과 부의 거대한 기초로 나타나는 것은 인간 자신이 수행하는 직접적 노동도 아니며 또 그가 노동하는 시간도 아니라, 그 자신의 일반적 생산력의 취득, 자연에 대한 그의 이해 및 사회유기체로서 그의 존재에 의한 자연의 지배 -- 한마디로 말하면 사회적 개인의 발전 -- 이다. ....대중의 잉여노동은 이미 일반적 부의 발전을 위한 조건이 아니게 되며 소수자의 비노동도 인간 두뇌의 일반적인 힘의 발전을 위한 조건이 아니게 된다. (MECW , Vol.29: 90~91p)

이러한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은 사적소유와 시장의 폐지와 같은 분배관계의 변혁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기본 범주들의 폐지, 즉 추상노동과 가치범주의 폐지, 소외된 노동범주의 폐지를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말해 이것은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노동자체가 이론적으로 비판되고 실천적으로 전복되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성진씨는 자율주의를 평하길 "사회주의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폐지가 아니라 자기 실현으로 간주한다."고 말하면서 "자율주의에서 노동은 절대적 주체로 우상화될 뿐이며 그 자체로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네그리의 경우...맑스의 잉여가치론을 특권화하고 가치 형태론을 무시하는 대목에서 기존의 맑스 경제학으로 회귀한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그의 비판은 자율주의의 소위 '노동 거부'개념과 전략과는 다소 배치되는 듯한 설명이다. 자율주의에서는 자본주의적인 노동자의 자율성이 기반이 되지 못한 소외된 노동은 거부되며 그것은 그들의 '노동거부'개념과 전술로 표현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부분은 보다 상세한 논의가 필요한 듯 하다. )

한편 맑스에게서 주체는 구체적 인간이 아니라 "대상화된 관계들"로 구성되며 특히 "추상노동 즉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매개활동을 하는 노동의 특수성"으로 표현된다고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역사적 부정은 추상노동에 의해 매개된 자본관계의 총체성의 폐기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총체성의 존재를 주장"하는 루카치의 입장과 "총체성의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동전의 양면일 뿐이라고 본다. 맑스는 총체성 자체를 부정하지도 혹은 "초역사적 총체성의 존재를 존재론적으로 승인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또한 "고전 정치경제학이 노동의 입장에서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라면 맑스의 경제학 비판은 자본주의의 노동자체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는 것"이므로 사회주의는 전자의 입장에서는 가치의 탈신비화를 통해 노동의 원리를 입증하는 것에 그치는 반면, 후자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가치의 탈신비화 예를들면 시장의 계획으로의 대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의한 인간관계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것은 "가치체계의 파괴, 추상적 지배의 폐지, 생산의 내재적 요인으로서의 직접적 인간노동의 폐지"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맑스를 인용해 보자.

"이전의 모든 혁명에서는 활동양식은 언제나 변하지 않았으며 단지 노동을 새롭게 분배하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공산주의 혁명은 기존 활동양식의 변혁을 지향하며 노동을 폐지한다." (MECW, Vol. 5 : 52p)

이에 의하면 구사회주의 국가는 "자본주의의 한 형태인 국가주도적 자본축적양식, 즉 국가자본주의로 규정"된다고 한다. 구사회주의 국가는 상품, 화폐, 자본의 유통이 일시적으로 중지되었을 뿐 노동의 국가에 의한 통제가 여전히 이루어졌고 추상노동의 가치형태의 폐지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소련 동유럽 블록의 붕괴를 자본주의 지양 시도의 실패로 보고 이를 근거로 맑스의 패러다임 자체를 기각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맺음말"로 그는 쿤을 인용한다. 그는 하나의 패러다임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그 패러다임의 내부에서 행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때문에 현재 맑스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대체할 만한 패러다임이 존재하지 않는 한 우리는 맑스로 돌아가 그 내적인 입장이 무엇인지 다시금 재평가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 요약해 본 이 책 1장에서의 그의 결론이다.  

 (진행중)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쟈 2007-04-26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아니라 '페이퍼'인가요?..

yoonta 2007-04-26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아직 다 읽지도 못했는데요. 걍 페이퍼죠. ^^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 15 | 1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