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가면무도회‘를 통해 'myself'는 이제 ‘myselves'가 된다. 미디어 철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자신을 한 가지 가능성에만 묶어놓는 정체성(identity)에서 해방되어 자아를 복수화(multiply)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인터넷의 능력이다. 가상적 아이디의 정체를 까는 것, 그것을 법률로 강제하는 인터넷 실명제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사이버 공간의 특수성을 법적으로 무시하겠다는 얘기인데, 과연 그것이 디지털의 시대정신에 얼마나 적합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인터넷은 가면무도회다. 그런데 가면무도회를 하는데 꼭 가면을 벗겨야만 하는가?


이번 프레시안에 올라온 미네르바관련 진중권씨의 글의 일부입니다.
(전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112153717&section=02 )
여기에서 그는 주체성subjectivity 혹은 정체성identity의 복수화multiply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것을 '자아를 복수화 하는 가능성'으로서 미네르바라는 온라인 정체성이 가진 '복수적 정체성'의 의미를 짚고 있네요.

여기서 그가 제기하는 정체성/주체성의 복수화 가능성은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중 하나입니다. 지금부터 소위 "인터넷 가면무도회"를 가능케 하는 배경의 의미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온라인 정체성의 복수성. 그것은 단지 미네르바라고 불리우는 한 개인이 온라인에서만 활동했던 사람이어서 '가능'했던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원래부터 한 개체의 주체성 혹은 정체성이라는 것 자체가 단수가 아닌 원래부터 복수의 정체성을 가진 (잠재적) 현실태였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원래부터 "미네르바" 혹은 "박모씨"는 복수였다는 것이지요. 비록 그것이 개체로서는 단수로 판명된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현실태로서의 개체는 복수의 정체성을 가진 '잠재적 실재'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혹은 플라톤)는 dynamis이라는 개념을 그의 철학에서 중요하게 다룹니다. dynamis는 기존에 잠재태나  잠세태 혹은 가능태등등으로 번역되어 온 개념이라고 합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현실태와 쌍을 이루면서 "가능태-현실태"라는 개념으로 플라톤의 초월적 이데아론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형상(이데아)이 현실태(actus)로서 등장함으로써, 질료는 가능태(potentia)라는 뜻을 갖게 된다. 이런 것들은 형이상학의 새로운 싹들이다. <형이상학> 7권과 8권에서 질료-형상문제를 광범위하게 다룬 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9권에서 가능태-현실태문제를 다룬다. 현실태가 규정을 하는 능동적인 원리인데 비해서 가능태는 작용을 미치고 실현을 할 수 있는 것. 간단히 말하자면 가능적인 것이다."(서양철학사 1권. 힐쉬베르거 254쪽)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 철학이 가지는 형상(이데아)의 편재성 혹은 보편성을 비판하기 위해 이를  사용하고 있는데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는 질료-형상 이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중 가능태는 질료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모든 현실태가 왜 이데아가 아니며 단지 현실태가 되기 위한 한 가능성으로서 즉, 가능태로서 존재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나무라는 재료(질료)가 있다고 해서 모든 나무가 책상(형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가능태는 현실태의 사후에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가능태라는 질료로부터 우리는 현실의 책상을 유추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책상이 먼저 존재하고 그 결과를 역으로 추론한 뒤에 그 질료를 확인받게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가능태는 표면적인 선차성은 무의미해지고 현실태의 부수적인 결과로서만 존재하게 되죠. 이는 플라톤 철학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으려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고유하면서도 중요한 특성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현실태 도식을 베르그손은 <시론>이나 <물질과 기억>등을 통해서 비판합니다. 여기에서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를 대체하는 것으로 내세우는 것이 바로 잠재성潛在性 혹은 잠재태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현실태의 인과론을 거부하고 대신 잠재태-현실태로서의 '실재'를 이야기했던 것이죠.

" '잠재성'의 본성은 무엇인가? 이미 <시론>에서 나아가 <물질과 기억>에서 베르그송의 철학이 가능성의 범주를 거부하는 바로 그때에 잠재성이라는 생각에 그만큼의 중요성을 부여햇었다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것은 "잠재성"이 적어도 두 가지 관점에서 "가능성"과 구별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떤 관점으로 보면 가능성은 실재의 반대이며, 실재에 대립된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보면 잠재성은 현실성에 대립된다. 우리는 이 용어법을 신중하게 취해야만 한다. 가능성은 (비록 현실성을 가질 수는 있지만) 실재성을 갖고 있지 않다. 역으로 잠재성은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그러한 것(잠재성)으로서 실재성을 소유하고 있다....
왜 베르그송은 잠재성의 개념을 선호하면서 가능성의 개념을 거부하는가? 정확히 다음의 이유 때문이다. 앞서 말한 성격들 때문에 가능성은 거짓된 개념이며 거짓 문제의 원천이다. 실재는 가능성을 닮았다고 상정된다. 이 말은 이미 만들어져 있고, 미리 형성되어 있고, 그 자신보다 앞서 존재하고 그리고 연이은 제한들의 질서에 따라 실존하게 되는 실재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겐 모든 것이 주어져 있으며, 실재의 전부는 이미지 속에 가능성이라는 사이비-현실성 속에 주어져 있다. 이렇게 해서 요술이 분명해 진다. 만약 실재가 가능성을 닮았다고 얘기된다면, 실은 실재가 --- 그것의 허구적 이미지를 "역투사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것은 언제나 가능성이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 그 고유한 수단을 가지고 생겨나기를 우리가 기다렸기 때문 아닐까? 사실 가능성을 닮은 것은 실재가 아니며, 실재를 닮은 것이 바로 가능성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단 만들어진 실재로부터 가능성을 추상해냈기 때문에, 이 가능성은 실재로부터 자의적으로 추출해낸 쓸데없는 부본 같은 것인 셈이다."(베르그송주의. 질 들뢰즈. 134~137쪽. 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가능태는 현실태를 설명하기 위한 추상에 지나지 않는것이다라는게 베르그손과 들뢰즈의 지적입니다. 이를 대신해 잠재성(태)를 도입합니다. 잠재태는 가능태와는 달리 현실태의 추상이 아니라 실재實在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무엇입니다.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실재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재태를 현실태와 동일한 지위로 끌어올리고 있는 셈이지요. 잠재태는 가능태처럼 현실태를 '실현'시키기 위한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태는 여기서 보다 다층적이고 유동적인 복수multiple적인 것으로서의 실재(혹은 잠재태적 실재)의 한 측면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베르그송 그리고 들뢰즈가 이러한 잠재태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은 세계의 변화가 가지는 불확정성 혹은 유동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현실태는 잠재적인 복수로서의 실재의 가능성을 인간의 현실적 경험적 감각 속으로만 축소시킨 것으로 비판받게 되는 것이죠. 들뢰즈는 특히 이런 베르그송의 잠재태와 관련된 특히 그의 이미지론과 관련된 논의를 재현representation과 관련된 미학의 비판으로 연결시킵니다. 예술의 본성은 대상을 모사 재현하는 것이 아닌 대상 자체가 이미 시뮬라크르이므로 예술은 이러한 현실속에서 또다른 시뮬라크르를 제작/창조하는 행위와 관련된다고 본 것이지요.

여기서 저는 이러한 가능태-현실태 혹은 잠재태-현실태 개념이 양자역학에서 관찰되는 '파동함수의 붕괴'와 관련된 양자의 실체와 관련된 논란과 관련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양자의 세계에서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의 지배를 받습니다.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면 양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동시에 '관측'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양자의 운동(예컨대 스핀spin)을 관측 하려고 하면 그것의 위치를 알수 없게 되고 반대로 위치를 알게 되면 운동량을 알수없게 되는 역설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점이 발생하는 원인을 몇몇 물리학자들은 슈뢰딩거에 의해 고안된 파동함수wave function를 이용해 "파동함수의 붕괴"라는 방법으로 설명을 시도합니다. '불확정성'이 생기게 되는 것이 우리가 특정한 양자를 관측할 때 관측하기 전에 그 양자에게 고유한 것으로 '예상'되는 파동함수가 관측 이후에는 항상 특정한 형태로 '붕괴'되어서 나타나게 되고 우리가 얻게 되는 정보는 오직 이러한 파동함수의 붕괴 이후의 양자이기 때문에 파동함수가 붕괴되기 이전의 상태는 예측불가능하게 되고 관측전 이전의 원래의 양자의 상태 즉, 여러 다양한 가능성( 아니 잠재성)으로서 존재하는 양자의 상태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수 없게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베르그송/들뢰즈가 제시하는 잠재태/현실태의 논리가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파동함수붕괴 이전의 즉 고정된 측정값(혹은 현실태)로서 존재하기 이전의 양자의 상태는 바로 '잠재태'를 지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현실태로서 존재하는 측정값이라는 것이 단지 다양한 양자적 운동 혹은 세계의 가능한 형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나아가서 이러한 불확정적인 양자적 운동의 가능성은 "다중우주 해석many worlds interpretation"이라는 우주해석의 한 가설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관측하여 어떤 특정한 값을 얻었다면 그것은 무한히 많은 우주 중 하나의 우주에서 일어난 사건이고 다른 값이 얻어지는 사건은 지금도 다른 우주에서 진행되고 있다. 물론 다른 우주에도 당신과 나를 비롯한 모든 살마들이 똑같이 살고 있다....시공간은 단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사건들이 나름대로 진행되고 있는 무수히 많은 시공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은 그저 가능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우주에선가 반드시 일어나고 있으며 따라서 관측을 하더라도 파동함수는 붕괴되지 않는다"(우주의 구조. 298~299쪽. 강조는 인용자)

다시말해 이 우주론에 의하면 (양자적) 가능성은 우주 어디에선가는 현실화되었으며 그러한 우주는 우리가 살고있는 우주와 나란히 다중적으로 존해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의 "가능성"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가능태-현실태로서의 가능성이 아니라 베르그송이나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잠재태-현실태로서의 잠재성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진중권의 미네르바관련글을 인용하다가 다소 엉뚱한 길을 돌아온 셈입니다만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와 봅시다. 진중권은 온라인 상에서의 정체성은 다수일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특정 주체혹은 개체의 정체성이 가지는 복수성은 온라인 상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 원래부터 그것(그것들)이 다양한 잠재태의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따라서 미네르바(들) 혹은 우리가 온라인에서 행한 "인터넷 가면무도회"는 온라인만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 자체가 바로 원래부터 "가면 무도회"라는 것이지요. 

" 미네르바"라는 가면은 우리가 현실화시킬수있는 우리안의 잠재성의 일부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이명박과 한나라당은 이러한 잠재성을 자신들의 권력에 강화하는 과정에서의 걸림돌로 간주하였고 제거 대상으로 호명한 결과가 지금의 미네르바 구속사건인 셈이지요. 작년 들불처럼 번졌던 '촛불'이 가진 '잠재적'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 그 텃밭 역할을 하는 인터넷의 "가면무도회"를 통제하기 위함이 이번 미네르바구속을 통해 저들이 노리는 효과겠지요.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미네르바라는 정체성은 복수적인 잠재적 정체성입니다. 특히 그것은 온라인이라는 가상공간속에서 무한히 복제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도 다음 아고라에는 글쓴이가 미네르바일 것으로 추정되는 글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더군요.(예를들어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505982&hisBbsId=best&pageIndex=1&sortKey=agreeCount&limitDate=-30&lastLimitDate ) 이쯤되면 문제는 지금 구속된 미네르바가 정말로 "그 미네르바"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때문에 지금 공권력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 미네르바 혹은 그에 동조하는 우리로 대변되는 잠재성(들)은 탄압에 의해 일시적으로  검열당 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러한 통제는 단지 일시적인 효과만 있을 뿐이지요. 우리가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또다른 잠재적 우주는 지금도 어디선가 현실태로 존재할지도 모릅니다.  단지 그것은 지금 우리의 현실태의 시간과 아직 결합하지 않았을 따름이지요. 그러나 세계는 항상 변화합니다.  잠재태는 언제든 현실태로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정치적 주체의 관념으로는 억압하거나 통제 될 수 없는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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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인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오늘날의 현실은 시뮬라시옹과 같다라고 말합니다. 플라톤의 철학 개념인 시뮬라크르로부터 나온 보드리야르의 이 시뮬라시옹 개념에 의하면 오늘날의 현실은 진짜와 가까의 구분이 불가능하고 양자의 경계가 허물어진 일종의 이미지 혹은 가상만 존재할 뿐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판별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시뮬라시옹(이는 시뮬라크르의 운동을 뜻한다.) 이라는 개념에 의하면 세상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들에 대해서 원본적인 진실을 판별하는 것은 어렵고 우리가 대하는 것들은 “실재의 폐허”밖에는 없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자본주의처럼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다시 말해 돈을 주고 매매할 수있는 대상으로 만드는 곳에서는 실체가 없는 이미지마저 상품화됩니다. 과거에 대한 추억도 상품화되며 상품이 아닌 상품의 이미지 또한 상품화됩니다. 베블렌이 일찍이 간파한 과시적 소비현상도 이러한 허상으로서의 이미지를 상품화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소비의 사회”라는 책에서 그는 이러한 시뮬라시옹으로 가득 찬 자본주의 상품시장의 백태를 고발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보드리야르의 이러한 시뮬라시옹은 일종의 환원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현실의 모든 것을 시뮬라시옹으로 환원시킵니다. 이로서 사실로서의 세계는 사라지거나 무의미해지고 오직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이미지만이 남게 되지요. 이 지점에서 시뮬라크르를 이야기하는 들뢰즈와 보드리야르는 차이점을 보입니다. 들뢰즈의 시뮬라크르 개념은 이정우씨에 의하면 “세계에서 발생하는 차이”이지만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은 단지 인간의 상상에 의해서 가공되고 만들어진 “인공적 차이”일 뿐입니다. 들뢰즈의 시뮬라크르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차이라는 점에서 시뮬라시옹과 유사성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계의 실재성에 기반한 개념이지요. 반면 보드리야르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에 환원된 이미지일 뿐입니다. 여기에서 실재는 존재하지 않고 말그대로 “폐허”가 되어버리지요.

 

이번 청와대와 노무현간의 자료유출논란을 보고 이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의 차이가 적용될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오늘날처럼 문서나 자료라는 것이 컴퓨터 파일처럼 무한히 복제가 가능해서 무엇이 원본인지 무의미해 지는 세상은 바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으로서의 세상을 연상케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이번 사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원본이 모호해진 현실을 이용하는 것은 노무현전 대통령 측이 아니라 오히려 이명박 측이더군요. 만약 원본이 무엇인지 분명하고 그것과 사본과의 차이가 분명하다면 이런 논란은 불필요합니다. 원본의 행방이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논란거리 자체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청와대측이 목표로하는 것은 원본의 행방 그 자체라기 보다는 지금처럼 원본과 사본의 구분이 불확실한 현실을 이용해서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환기시키려는 일종의 여론조작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임의적으로 조작가능한 시뮬라시옹적 현실을 더욱 극대화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유리함을 조장하려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들이 노리는 것은 진실 혹은 사실이 아니라 궁극적 사실이 무엇인가라는 것을 찾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논란의 효과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원본없는 사본이나 복제품만이 아니면 그 효과를 이용한 앤디 워홀의 실크 스크린 작품같은 유사복제품의 시뮬라크르/시뮬라시옹만이 넘쳐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들뢰즈가 이야기한 것과 같이 현실은 이러한 표면적인 임의성 너머에 존재하는 실재 그리고 그것의 잠재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들뢰즈가 강조하려는 시뮬라크르도 이처럼 실재성에 기반한 잠재성으로서의 개념이지 보드리야르처럼 실재가 사망한 바탕위에 끊임없는 인공적 차이만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노무현과 청와대의 이번 논란도 이처럼 원본과 사본을 구분하기 힘든 시뮬라시옹적 배경의 뒤에 누군가는 분명 진실을 이야기하는 측이 있을 것입니다. 그게 누구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더라도 말이지요.

 

때문에 우리는 아직 이러한 가능한 진실 혹은 진리에 대한 믿음을 저버릴 수는 없게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뮬라시옹적인 이미지의 재생산이라기보다는 어쩌면 보다 고전적이면서도 형이상학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실재성에 기반한 사건들과 진리를 밝혀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오는 갖가지 상품들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또 그것들의 조작이 만연한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표면적으로 보이는 현상과 사건의 배후에 있는 진실이 무엇인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해서 우리에게 더욱 필요로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시뮬라시옹의 재생산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차이가 생겨나는 과정과 원인을 추적해 내고 그럼으로써 차이의 순환과 반복이 어떠한 구조와 시스템 속에서 이루어지는지 밝혀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이나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 그리고 들뢰즈의 초월적 경험론도 모두 이러한 작업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이 난무하는 오늘날의 현실은 고전적인 플라톤적 이데아론이나 데카르트적 이원론만으로는 극복하기 힘듭니다. 과학의 영역에서 조차도 뉴튼의 고전역학이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에 자신의 패러다임적 위치를 양보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이처럼 오늘날이 현실은 과거보다 한층 복잡해지고 진실이 무엇인지 더욱 모호해 졌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더욱 정교하고 섬세한 작업들입니다. 복잡하고 모호한 현실은 그에 걸맞는 연구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 단순히 그것에 투항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 점에서 이러한 복잡한 현실에 대한 분별력을 키우기 위한 노력들이 어느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됩니다. 더욱이 오늘날처럼 수구보수세력이 정계와 재계를 장악하고 자신의 허구적 이데올로기를 관철하려는 모습이 더욱 뚜렷해지는 시점에서는 말이지요. 이데올로기의 배후에는 실재로는 아무것도 없다고 지젝은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 배경에는 우리가 찾아내야만 할 어떠한 진실 혹은 실재가 있다고 봅니다. 비록 그것이 단지 잠재성으로만 머물고 가시적인 현실성으로 전화되지 못하더라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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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게 나이먹고 결혼하고 애 낳고 살다보면 젊었을 때 이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들 합니다. 그것이 어쩔수 없는 세상의 이치라고 말이지요. 사실 이 말. 그렇게 쉽게 흘려들을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이 아무리 '생각함'을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특징으로 한다고 해도(호모싸피엔스 Homo Sapiens라는 분류학상의 명칭도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뜻이죠.) 어쩔수 없이 의식주의 해결이 없이는 생존할 수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본성이 기실은 삶의 근본적인 보수성을 형성하게 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삶의 조건들이 한 때는 열정적으로 꿈과 이상을 뒤쫒던 사람들조차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보수화되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하는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누가 탓할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 "너는 왜 그렇게 너만 잘먹고 잘살라고 하냐?"라고 탓 한다면 예수가 간음한 죄로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한 한 여인을 위해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복음 8,7)"라고 말했을 때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했던 것처럼 어느 누가 자신있게 나서서 먼저  생존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위해 보수를 선택한 사람들에게 돌을 던질수 있을까요?

얼마전 한국의 대표적 지성인인 김우창씨도 한 기고문이서 이러한 삶의 보수성과 관련한 한 글을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좋은 정치는 삶의 근본적 보수성을 존중하는 정치이다. 삶의 근본은 생명의 보존이다. 물론 생명의 보존은 적절한 현실적 조건을 확보함으로써 가능해진다."(로쟈님 서재글 참조 http://blog.aladin.co.kr/mramor/2061123 )

그런데 이러한 삶의 보수성이 사회의 발전과 안정을 가능하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친 생존경쟁으로 서로서로를  내몰게 됩니다. 의식주의 해결은 이기적 욕망을 부채질하게 되고 타인과의 협동을 통해 같이 잘 살려고하기 보다는 경쟁을 통해 상대방을 도태시키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종종 생각하기도 하죠. 그리고 이런 풍토는 사회구조적으로 시스템화되어서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이라는 책에서 묘사한 것처럼 "만인이 만인에 대해 투쟁" 하게 되는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 이르게 되면 삶의 안위와 생존을 위해 동기화된 보수성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삶의 안정을 뒤흔드는 역설적인 상태에 빠지게 되고 말죠. 그 때 우리에게 필요로 한 것이 바로 협동과 이타주의입니다. 흔히들 이기주의에 반대되는 이타주의나 협동심은 자신을 희생하고 공동체의 목표를 우선시하는 자기희생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협동과 이타주의도 이기적인 삶의 보수과 마찬가지로  그 생존의 필요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협동과 이타주의가 없이는  인간도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하물며 인간뿐만이 아니라 생존의 본성으로만 살아가는 동물에게서 조차도 이러한 협동의 원리가 작용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원숭이의 생태를 연구하던 동물학자들이 공동체의 협력에 방해가 되거나 도움이 되지않는 개체를 집단적으로 따돌림하거나 배제하는 현상을 연구하다가 원숭이들의 그러한 집단 행동이 결국은 그 집단전체의 생존을 위한 행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인간의 행동과 심리를 진화론적 입장에서 설명하는 진화심리학에 의해서 이러한 협동 혹은 협력의 원리는 비교적 잘 설명이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진화 심리학에 의하면 소위 '무임승차자'는 집단에서 배제되게 되는데 그 원리를 이런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기나긴 진화의 과정을 거쳐서 서서히 집단의 크기를 키운 인간들은 포식동물이나 다른 집단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중요시하게 생각했던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배신의 위험"이라는 것입니다. 동맹이나 협력은 "네가 나를 도우면 나도 너를 돕겠다."라는 약속 혹은 믿음에 기반합니다. 이런 믿음이 공동체 내에서의 상호이타주의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런데 집단내의 모든 구성원들이 이런 상호이타주의를 실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의 사람들은 집단의 이타주의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만을 충족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우리는 무임승차자라고 부르죠. 그래서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된 그 개인은 자손을 번성시키게 되고 그러면 "유전자 풀"내에 이러한 무임승차의 유전자가 많아지게 됩니다. 이는 대부분의 집단구성원이 무임승차자가 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결국 이러한 무임승차자가 다수인 집단은 집단에 대해 외부적 위협을 가하는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수 없게 됩니다. 이 집단은 결국 더이상 생존을 지속할 수가 없게 되고 해체되고 말죠. 이러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인간은 사회생활을 통해서 무임승차자들을  배제하는 장치를 개발하게 됩니다. 미국의 정치학자인 로버트 악셀로드(Robert Axelrod)는  이에 대처하는 하나의 전략에 대해 설명한 바 있습니다. 팃포탯(tit - for- tat)이라고 부르는 이 전략에 의하면(자세한 내용은 이곳을 참조  http://en.wikipedia.org/wiki/The_Evolution_of_Cooperation)   무임승차자문제를 해결하려면 보상과 처벌이 도입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무임승차자는 처벌받고 협력자는 보상받는 원리. 한 집단에에서 이러한 팃포탯원리가 작동하게 되면 무임승차자들도 자신들이 더이상 유리할수 없음을 깨닫게 되고 그럼으로써 무임승자자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다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3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1. 어떤 종의 생물들이 똑같은 종의 생물들을 반복적으로 만난다. 2. 그 생물들은 상대방을 이전에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며, 다른 동물 종과 구별할 수 있다. 3. 이전에 만났던 상대방이 자신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기억할 수 있다. (<진화심리학>. 김영사 71쪽) 이러한 조건들은 물론 오랜 시간동안 집단과 공동체를 발전시켜온 인간에게는 당연히 적용되게 됩니다.

이처럼 진화심리학자 혹은 생물학자들은 상호이타주의와 협력의 원리를 생물학biology의 차원으로까지 끌어 올림으로써 반박하기 힘든 과학적 사실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유명한 아나키스트 운동가인 크로포트킨도 <상호부조론>이라는 책을 써서 공동체가 생존하려면 경쟁의 원리뿐만이 아니라 상호부조 즉 협동이 필연적으로 도입되어야  함을 이미 이야기한적 있긴 하지만 말이죠.

이는 결국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삶의 보수성 그리고 정치적 보수성도 공동체 내에서 한 개인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자칫 이러한 삶의 조건과 무관한 유토피아적인 이상으로만 보이는 상호이타주의와 협동도 그에 못지 않게 삶의 조건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수와 진보는 어느정도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어떻게 보면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상호이타적인 이상을 추구하는 진보없이 보수도 존재할수 없고 삶의 기본적 조건을 충족함이 없이 꿈과 이상만을 추구하는 진보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노무현 정권을 통해서 진보적 정치를 실현할 것이라는 가느다란 희망을 품고 지지했던 한 정치세력이 믿음을 저버리고 보수화됨으로써 이러한 신뢰을  저버리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사회의 양극화는  심화되고 계급간 계층간의  불신은 더욱 팽배해지고 말았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등을 돌리고  정치적 무관심에 빠지거나 아니면 "나만 잘 살면 그만 아닌가"하는 각자의 삶의 보수성에 충실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이명박정권을 탄생시킨 셈이지요. 그러나 그러한 보수성이 결국은 이번 미국소수입파동처럼  자신의 생존에 위협을 줄 수도 있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되고 말았습니다.  뭐든 지나치면 일을 그르친다고 일순간의 안위를 추구하는  지나친 보수도 문제고  또 삶의 조건을 망각하고 이상만을 추구하는 지나친 진보도 우리에겐 이롭지 못합니다. 이 양자를 슬기롭게 통합해 낼 수있는 지혜가 그 어느때 보다도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다시한번 생각해 보네요.

그럼 청계천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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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05-28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계셨나요? ^^ 이제 집에 돌아왔습니다. 끝까지 그곳에 남아있지 못했습니다. 딱 밀리오레서 경찰과 대치중이었는데.

qualia 2008-05-28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적인 글이네요.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 보수와 진보, 현실과 이상, 나 개인과 나를 둘러싼 시대 환경, 사색과 실천 따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좋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

yoonta 2008-05-28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네 다녀왔습니다. 일때문에 오래는 못있었구요. 롯데백화점 앞까지만 따라갔다가 들어왔네요. 2mb가 정신차릴때까지(그런 때가 올런지는 모르겠지만) 자주 출동해야 할듯하네요..^^

qualia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읽어보니 급하게 쓰느라고 글이 엉망이네요. 비문도 많고..-_-

진화 커뮤니티 2009-04-30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래서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된 그 개인은 자손을 번성시키게 되고 그러면 "유전자 풀"내에 이러한 무임승차의 유전자가 많아지게 됩니다. 이는 대부분의 집단구성원이 무임승차자가 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결국 이러한 무임승차자가 다수인 집단은 집단에 대해 외부적 위협을 가하는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수 없게 됩니다. 이 집단은 결국 더이상 생존을 지속할 수가 없게 되고 해체되고 말죠. >

여기서 '배신자 낙인을 기억할 수 있는 집단'에서 왜 어떻게 해당 무임승차자가 자손을 번성할 수 있게 되는지.. 대응할수 없을정도로 세력이 커지거나 집단이 와해되고 종이 소멸할때까지 유전자를 길이길이 남길수 있게되는 환경이 이해가 잘 안가요. 집단 정신이 진화한다는것을 전제로 하고있는것입니ㅣ까?

공동체를 이루는 무리 집단에서 무임승차자를 기억하고 찾아내어 그자를 배척하기 위한 일환의 '행동들이 가해진다' 즉, 배신자는 기억했다가 그의 다음 위기 상황에서 그를 도와주지 않음으로해서 그의 번식의 기회를 감소시키는 보복을 낳고,(또는 반대로 돕기도 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종의 보전의 안정성을 높인다라고 알고있습니다. 유전자 선택이 아닌 집단선택 옹호입장이신지.. 개체의 적응도에서 사회적 요인을 생각하신 때문인지..?

보수성: 삶의 조건과 본능적 욕망충족을 위한 이기적 경쟁상태
진보성: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이상적 상호 협동관계
두 세력의 적절한 상호 보완관계가 집단의 안정성을 유지하며 오래도록 지속한다.
라고 요약되는데, 두 입장의 대립적 삶의 태도가 아니라 삶 (진화) 자체가 보수와 진보를 동시에 갖으며 발전해 나가는게 아닐지. 협력해야 유전자를 보전하기위한 나의 이기심이 채워지니까요. 이런걸 아니면 사회적인 진화라고 해야하나요?

yoonta 2009-05-04 02:12   좋아요 0 | URL
진화심리학에 대해서는 저도 입문서 약간 읽은 것 밖에 없어서 만족할만한 답변을 드리기는 힘드네요. 제가 위에서 논거로 든 팃포탯TFT 전략을 만든 해밀턴과 악셀로드는 기본적으로 유전자선택이론과 게임이론을 통해 이를 설명합니다. 그것이 도킨스와같은 유전자 선택인지 아니면 집단선택인지 혹은 다수준선택이론인지는 아직도 논쟁중이라고 봐야겠지요.때문에 문외한인 저로서는 뭐라 말씀드리기 곤란하네요. 링크시킨 위키백과를 참조하시거나 아니면 <다윈의 식탁>이라는 책을 참조하시면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이미 읽어보신것 같긴 하지만^^

마지막 님말씀대로 두 대립적 입장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주체 내부에서 갈등하는 간극이라고 생각하는게 더 적절할듯 하네요..^^

펠릭스 2009-09-20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생적(書生的)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yoonta 2009-09-21 15:33   좋아요 0 | URL
이 양자사이의 간극이 현실에서의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헤겔의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는 말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물질과 기억:반복과 차이의 운동』(김재희, 살림)을 읽다가 제논의 역설과 관련한 베르그손의 언급이 있어서 이와 관련하여 떠오른 생각들을 한 번 정리해 본다.

제논의 역설에 의하면 활 시위를 떠난 화살은 과녁에 도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과녁을 향하는 화살은 과녁까지의 거리의 절반을 지나야 하고 또 그 위치의 반이 되는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그것의 반에 도달해야 하고 이런 식으로 무한히 반복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이 무한히 반복되는 결과 화살은 결코 목표물에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제논의 역설이다.




한편, 베르그손은 이러한 제논의 역설에 대해 평가하면서 그것이 “과학적 시간의 본질을 논증”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이러한 역설이 가능한 이유는 과학이 “운동 그 자체를 운동체가 지나간 공간으로 환원”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당시의 과학이 대상이 되는 운동과정 전체를 완전히 주어진 것으로 가정하였고 또 그것을 다시 공간적으로 분할함에 의해 ‘시간’을 유도해 내었다는 점을 베르그손은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간으로 환원된” 시간은 실재의 시간이 가진 ‘예측불가능성’을 보지 못한다고 베르그손은 비판한다. 이 때의 시간은 모든 과정을 한꺼번에 펼쳐 놓고 부분으로 무한히 분할 가능한 공간으로 시간을 대체하는 공간화된 시간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운동의 과정이 분할가능한 만큼 예측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런 결정론적 구조의 운동에서는 화살은 활시위를 떠나면 반드시 목표물에 도달하게 된다. 아니 목표물에 도달하는 것을 전제로 운동이라는 것이 성립한다. 그럼으로써 운동의 결과는 항상 예측가능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베르그손은 이러한 운동 그리고 공간으로 환원된 시간은 실재의 시간과는 무관한 것으로 간주한다. 시간의 가장 중요한 본성은 ‘예측불가능성’과 ‘연속성’이다. 때문에 그는 “시간은 발명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베르그손의 철학개념으로 표현하자면, ‘지속’은 “한마디로 과학적 시간과 달리 불가분한 질적 변화의 연속으로서 예측 불가능한 미래로 열려 있는 창조적이고 발명적인 실재 시간”인 것이다.

이처럼 제논의 역설은 기존 과학에서의 공간화된 시간이 가진 모순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과학적 시간의 본성을 논증”하는 것으로 베르그손은 평가하였다. 나아가 그는 엘레아 학파가 제논의 역설을 통해 보여준 것처럼 과학의 한계를 철학 혹은 형이상학으로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보게 된다. ‘창조적인 예측불가능성’을 가진 실재적 ‘지속’에 대한 인식은 과학만으로는 파악 할 수 없고 오직 형이상학이라는 우회로를 통해야만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베르그손의 과학에 대한 비판은 고전역학의 결정론적인 공간과 시간 개념에 대한 비판으로서는 유효하지만 20세기 이후에 등장한 양자역학이나 최신의 물리학의 경향에까지 유효하다고 볼 수는 없다. 특히 양자역학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가 이론화한 것처럼 “불확정성”을 자신의 가장 주요한 특징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사실 시간은 공간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는 하지만 공간 그 자체는 아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에서 보여준 4차원개념도 비록 공간이 가진 3차원에 시간차원을 결합하여 탄생한 것이긴 하지만 시간을 공간화한 것이라기보다는 공간의 3차원 +시간차원인 것이지 공간 자체가 4차원으로 확장된 것은 아니다. (최근 ‘여분의 공간차원’과 관련된 물리학 예컨대 초끈이론등과 같은 물리학은 이와는 달리 공간 자체를 여분의 차원이 숨어있는 3차원 이상의 공간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을 기존의 공간차원과 결합시켜 생각하면서 베르그손이 파악한 시간차원의 예측불가능성을 간과하게 된다는 점이다. 사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뉴턴의 고전역학적 시공간 개념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성이론은 고전역학을 보다 일반적인 차원으로 확장시킨 것이지 그것에 대한 폐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베르그손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비판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    http://www.ottobw.dds.nl/filosofie/consciousness.htm  )

그런데 이러한 과학에 대한 그의 비판은 양자역학에 이르게 되면 양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양자역학은 고전역학의 이러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운동의 결정론적 시각을 문제삼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 이유는 양자역학이 본질적으로 기존의 물리학과는 달리 예측불가능성을 전제로 한 확률론에 기반하는 물리학이기 때문이다. 통계 혹은 확률론이 물리학에 본격적으로 도입될 수 있었던 계기는 루드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에 의해서였다. 그는 기체의 열역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가 발견한 열역학 제 2법칙 즉, 엔트로피법칙(열은 항상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흐르고 고립된 계의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고 열평형상태에서 최대에 이른다는 법칙.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 http://en.wikipedia.org/wiki/Entropy  )을 새롭게 해석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역학에서 통계학과 확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에 의하면 엔트로피 법칙은 다음 식으로 표현된다.

S = k log W

여기에서 S는 엔트로피, k는 볼츠만 상수(k = (1.380622±0.000043)×10-23 J·K-1)이고 W(Wahrscheinlichkeit)는 원자들의 특정 배열이 나타나는 빈도 혹은 확률이다. 이 공식에 의해 그는 통계역학(statistical mechanics)의 창시자가 되었으나 이러한 그의 통계역학은 생전에 철저히 무시당하였고 결국 이로 인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볼츠만의 통계역학의 중요성은 막스 플랑크(Max Planck)가 전자기복사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뒤늦게 다시 조명받게 되었는데 결국 그는 물질이 양자(quantum)라고 불리우는 에너지단위로만 전자기복사를 흡수할수 있고 그 양자는 복사의 진동수에 비례함을 발견하여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물리학의 탄생을 알리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열역학과 양자역학에 의해 정교화된 엔트로피법칙에 의하면 시간의 비가역적 성격과 관련한 하나의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 쏜 화살이 과녁에 도달하는 이유는 시간이 원래부터 한 방향(과녁에 도착하는 방향)으로만 진행하도록 처음부터 규정되어 있어서라기보다는 과녁에 도착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확률적으로 가장 근사치에 가깝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시간이 거꾸로 흘러서 과녁을 향해 날아가던 화살이 다시 활시위로 돌아오는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살이 과녁을 향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는 이유는 단지 그렇게 진행하는 것이 확률적으로 더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서이지 원래부터 그렇게 진행되게끔 미리 결정되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거시세계에서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과 같은 사건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양자와 같은 미시세계에서는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과 같은 일은 기이한 현상이 실제로 관측된다. 대표적인 예가 “양자적 얽힘”현상이다. 아인슈타인이 포돌스키(Podolsky) 와 로젠(Rosen)과 함께 통해 양자역학의 허구성을 밝히기 위해 고안한 사고실험인 소위 EPR실험(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 http://en.wikipedia.org/wiki/EPR_paradox )에 의해 예견된 이 양자적 얽힘(Quantum entanglement) 현상에 의하면 서로 연관된(correlated) 한 쌍의 양자를 서로 멀리 떨어뜨려 놓은 뒤(이론적으로는 무한히 먼 거리도 가능하다) 두 양자 중 한 쪽의 스핀을 ‘관측’하게 되면 관측된 양자의 파동함수가 붕괴되면서 우리에게 특정한 스핀(예컨대 업스핀 혹은 다운스핀)으로 관측된다. 그런데 이러한 한 쪽 양자의 운동에 대한 관측(정확히 이 “관측”이 양자적 얽힘 현상의 원인인지 아닌지는 아직 논란 중이라고 봐야 한다)이 반대편 양자에 (빛보다 빠른 속도로) 거의 동시에 전달되면서 관측된 양자의 스핀과 동일한 스핀이 반대쪽 양자에도 관측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순간적인 정보의 전달이 가능하려면 빛의 속도를 능가해야 하는데 특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이러한 속도의 정보의 전달은 불가능하므로 양자역학은 잘못된 이론이라고 아인슈타인은 EPR실험을 통해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믿기 힘든 현상이 실제로 양자세계에서는 가능함을 벨(John Stewart Bell)이 그의 유명한 벨부등식(Bell's inequality) 그리고 아스펙Aspect의 실험을 통해 보여주었던 것이다. 물론 벨부등식이 양자역학의 최종적 승리를 보증하고 상대성이론의 오류를 보여준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빛의 속도는 “모든 속도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관측자의 운동상태에 상관없이 모든 관측자들의 눈에 ‘동일한 속도로 보이는’ 기준의 역할”(브라이언 그린. 우주의 구조. 승산. 186쪽)을 한다는 것. 이로서 상대성이론과 아스펙의 실험은 공존가능하다는 것이 물리학자들의 해석이다.(EPR실험과 벨부등식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우주의 구조』(브라이언 그린. 승산) 4장 혹은 http://en.wikipedia.org/wiki/Bell_inequality 를 참조)





이러한 “양자적 얽힘 현상”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양자적 세계에서의 공간은 거시세계에서는 찾아볼 수없는 비국소성(nonlocality)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비국소성은 즉, 서로 멀리 떨어진 한 쌍의 두 양자가 빛의 속도를 초월하여 서로 즉각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은 두 양자 사이에 놓인 공간이 유클리드기하학이나 고전물리학에서 당연한 전제로 생각하는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공간의 국소적인 독립적 분할가능성에 위배되는 공간이 가능함을, 공간이 양자적으로 서로 긴밀히 결합되어(얽혀)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비국소성 현상은 앞에서 살펴본 베르그손의 제논의 역설과 관련된 과학 비판과 관련이 있다. 그가 제논의 역설을 통해 비판했던 공간으로 환원된 기존 과학의 시간개념 그리고 분할가능한 독립적 공간만으로는 이 비국소적 공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오히려 시간과 공간은 베르그손이 이야기한 바와 같이 분할 될 수 없는 (질적) 연속체 혹은 전체로서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이러한 비국소적 공간에서의 시간은 그것이 환원되어질 수 있는 기초로서의 공간을 마련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가령, 뉴턴의 고전역학에서 시간은 다음 공식으로 유도될 수 있다.

t = s / v

(t는 시간, s는 이동거리, v는 속도)

이 공식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여기에서 시간(t)은 분할가능한 거리(s)와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 수 있는)속도(v)가 주어짐으로써 유도해 낼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서의 운동량(v)은 양자역학에서는 하이젠크의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에 따르게 되므로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 수 없게 되어 더 이상 결정론적으로 유도되지 않는다. 결국 양자역학에서의 시간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유도되어야만 한다. 앞에서 언급한 엔트로피가 양자역학에서의 시간에 대한 대안적 설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시간도 이제는 더 이상 절대적 조건으로 주어지는 변수가 아니라 엔트로피에 의하면 확률론적으로 접근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 된다. 이러한 시간개념은 결국 베르그손이 이야기한 예측불가능성 그리고 이러한 예측불가능성에 의해 창조적이며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성격을 부여받은 시간 혹은 지속(duration)개념과 공명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베르그손의 철학은 양자역학이 태동하기 이전에 이미 그것을 예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행히도? 과학은 고전역학에서 양자역학으로 발전함으로해서 베르그손이 주장했던 것처럼 철학(형이상학)의 도움없이도 베르그손의 철학을 수용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현재적 사건으로부터 과거와 미래의 운동을 한꺼번에 펼쳐놓고 예측가능한 것으로 보는 고전역학의 결정론적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음으로써 양자역학은 결정론적이며 공간환원적인 시간을 베르그손적인 예측불가능성의 시간으로 뒤바꿔 놓았던 것이다.

물론 아직 논란은 남아있다. 양자역학이 결정적으로 상대성이론을 극복했다고 볼 수는 없다. 아직까지 이 두 물리학은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에 각각 독립적으로 유효한 이론으로 존재한다.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두 이론의 불충분함을 양자를 통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통일장이론을 발견하려고 시도함으로써 해소하려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는데 최근의 초끈이론이랄지 양자중력이론 등은 이러한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의 통일을 시도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아직까지 무엇이 시간과 공간을 설명하는 ‘진리’인지 이야기할 수 없다. 두 이론을 통일하는 통일장이론조차도 그것이 완결된 이론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철학으로서도 베르그손이 이야기하는 예측불가능성으로서의 시간만으로는 플라톤적 세계로 대표되는 실재론을 결정적으로 반박했다고 볼 수는 없다.(이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인데 다른 기회에 자세히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베르그손의 칸트와 플라톤에 대한 비판(예컨대 『사유와 운동』(이광래. 문예출판사) 234~235쪽을 볼 것)은 재론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뛰어난 선견지명으로 양자역학을 예견하였지만 수학에 대해서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예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그손의 철학은 여러 측면에서 오늘날의 세계를 해명하는데 유효해 보인다. 양자역학과 같은 물리학이 펼쳐 보이는 불확실성으로서의 세계를 논증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들뢰즈가 밝힌 것과 같이 그의 다수성 개념은 오늘날의 사회정치적 현실을 설명하는 훌륭한 개념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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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대 2008-05-01 0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박홍규 전집 중 창조적 진화 강독을 읽고 있는 중입니다. 다 읽고 나면 본격적으로 베르그송 저작들을 읽어보고 싶은데 거기에 인용된 원전의 문장들만 봐선 읽기가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다행히 형이상학 강의부터 읽어서 희랍철학에 대해서는 약간의 워밍업이 되어 강독은 어떻게 따라가고 있지만 형이상학이란 게 잠깐만 발을 헛디디면 곧장 나락으로 빠져들어가서 참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도 막 책을 덮고 난감하던 와중에 반가운 페이퍼가 올라왔길래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플라톤과 관련해서도 페이퍼를 쓰실 예정이라니 기대가 됩니다. yoonta님 글은 늘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혹시 수학 전공하시나요?

yoonta 2008-05-02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삼각대님^^
박홍규씨의 창조적 진화 강독을 읽고 계시는군요. 그 책은 먼저 베르그손의 원전을 읽고나서 읽어보시는게 순서일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창조적 진화강독은 박홍규씨의 다른 전집중에서도 어려운 편에 속하는 책인것 같았습니다. 베르그손의 원전역시 쉽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긴 하지만요. 저로서도 그의 사상 전체를 조망해본다는 것은 아직까지는 난망한 일이고 단지 그의 사상의 단편만을 들여다보고 있는 실정이랍니다.
위 페이퍼를 쓰다가 플라톤과 관련한 베르그손의 견해가 흥미롭게 느껴져서 생각이 정리되면 관련글을 올려볼까 생각중입니다.
내용도 별로 없는 졸문을 재미있게 봐주신다니 저로서는 황송할 따름입니다.. 전공은 수학은 아니고요 수학을 많이 쓰는 과를 전공하긴 했었네요.^^

Ritournelle 2008-09-27 0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논의 역설'은 베르그손의 텍스트에서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대한 시론>에서 처음 나와요. 베르그손 텍스트에서 유일하게 읽은건데...yoonta님 잘 지내시죠?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어요. 건강 조심하세요.

yoonta 2008-09-28 15:09   좋아요 0 | URL
잘지내시죠? 무화과나무님?^^
베르그손은 말씀하신대로 초기부터 제논의 역설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죠. 파르메니데스로 대표되는 엘레아학파(에 대한 비판)를 그의 철학을 기초세우기 위한 발판으로 삼은것 같더군요. 헤라클레이토스철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유라고 볼수있을텐데 그런점에서는 니체와 화이트헤드의 사유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플라톤은 그 중간에 위치한 좀 독특한 철학을 한 것 같더군요. 플라톤의 철학을 파르메니데스적인 일의성 철학이 아닌 오히려 순수다수성의 철학으로 보는 바디우를 그런 점에서 관심있게 보고 있답니다. 생각이 정리되는데로 페이퍼를 한번 써보려고 하는 중이랍니다..^^

[해이] 2009-02-05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재밌게 읽었어요ㅋ 물질과 기억은 살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사보는게 좋을거 같네요. 베르그송은 전혀 안느게 없으니... ㅠ

yoonta 2009-02-05 23:5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Hey]님^^ 재미있게 봐주셔서 다행이네요. 좀 억지스러운 대목이 있지 않았나 모르겠네요. 저도 페이퍼로 다루고 있긴 합니다만 베르그송(손)에 대해서 안다고 말 할 처지는 못되는군요.^^;;

펠릭스 2009-09-20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르그송'으로 알고 있었는데,'베르그손'이군요.
'물질은 단지 반복할 뿐이지만 정신은 반복하면서 차이를 산출한다',
물질과 정신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에 기분이 좋습니다.
'왜,기분이 좋을까' 를 생각해 봅니다.

yoonta 2009-09-21 15:2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펠렉스님.
저는 펠렉스와의 우연한 '만남'이 기분을 좋게 하는 것 같군요^^

베르그송보다는 베르그손이 현지발음에 가까운 발음이라더군요. 베르그송/손이 원래 폴란드출신이라 그렇답니다.고유명사표기를 자주바꾸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은 듭니다만 필요에 따라서는 바꿀 필요도 있겠지요.


 

Day is Done

http://www.youtube.com/watch?v=Y2jxjv0HkwM&feature=related

 

Way To Blue

http://www.youtube.com/watch?v=G6yyRxEOLjM

 

Pink Moon

http://www.youtube.com/watch?v=hE0ODrmaiFE&feature=related

 



Nicholas Rodney Drake  1948~1974

프로필 이미지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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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08-04-18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2008년 04월 18일. 금요일. 밤 9시 38분.
yoonta 님 서재 오늘 방문객 18명,

총 7777명 방문 !!!

윤타 님, 축하드립니다.
제가 미신을 (안) 믿는 것은 아니지만, 7777이라는 “특별하게 우연한” 숫자가 왠지 특별하게 느껴지네요. 7777. 어쨌든 윤타 님께 행운이 찾아오길 바랍니다.

그리고 소개해 주신 닉 드레이크(Nick Drake)의 음악 잘 들었습니다. 매우 인상적입니다. 윤타 님께서 닉 드레이크의 분위기를 좋아하신다니, 저도 일종의 동질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군요. 고맙습니다.

yoonta 2008-04-23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볼일 없는 이 블로그를 방문하신 분들이 벌써 저렇게 많았군요. 7777이라는 행운의 숫자는 결국 qualia님에게 돌아갔네요.. 님께도 앞으로 행운이 가득하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