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가지 칼럼을 읽었습니다.

하나는 장정일씨의 <장정일의 책 속의 이슈: 주체의 해석학>
이란 칼럼입니다. 미셸 푸코의 후기 저작인 <주체의 해석학>을 다룬 칼럼이지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26336.html


이 컬럼에서 그는 푸코가 고대 그리스에서는 근대적 주체인 데카르트적 주체,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의해서 성립되는 '자기인식'의 주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배려'로서의 주체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서 '자기배려'란  말그대로 자신에게 몰두하는 행위들 예컨대 "연애,우정, 가정경제,건강법에서부터 용기있게 말하기, 스승의 말 경청하기, 분노와 슬픔 다스리기,타인의 시선과 사소한 호기심에서 벗어나야 할 이유 등등"과 같은 구체적 삶의 기술이나 지혜를 통해서 점진적으로 자기 자신을 수련하고 변화시켜 나가는 "자기수양과정"을 의미합니다.

이를 실천과 인식간의 이분법으로 생각해 보자면 자기배려는 전자에 자기인식은 후자에 해당할 수 있겠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자기인식(인식)이 자기배려(실천)에 종속되는 덕목으로 존재했었는데 기독교신학이 득세하면서 육체보다는 정신을 중요시하는 풍토에 의해 이러한 "자기배려"와 같은 덕(의 중요성)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거나 망각되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그리스 문화를 신학적으로 전유하면서 육체보다는 정신을 우선하고, 주체의 자기배려를 신에 대한 헌신에 맞서는 일로 죄악시"하게 되었다는 관점이지요. 이러한 푸코의 기독교해석은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결과적으로 푸코나 니체에게서 기독교적인 신(종교)의 죽음이나  그것의 극복이야말로 진정한 "자기배려"의 과정이었던
셈이지요.

그런데 또 하나의 해석이 있습니다. 로쟈님의 블로그에서 읽은 중대대학원신문에 실린 지젝관련 칼럼입니다.
 

http://blog.aladin.co.kr/mramor/3836735


이 컬럼은 지젝의 기독교해석을 다룹니다. 그는 지젝을 현대의 냉소적인 자유주의적 세계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기독교와 같은 보편종교가 가진 전복적 힘을 도입할 것을 주장합니다.

오늘날 후기자본주의세계는 지젝에 의하면 하나의 도착perversion의 일종입니다. 가령 현대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타자 즉, 자신에게 법적 위계적 질서를 강요하는 타자의 명령을 거부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냉소도 여기에 해당하지요. 사람들은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문제가 많은 질서임을 알고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에 일정한 거리두기를 합니다. 그것이 "냉소"입니다. 더이상 자본주의는 오늘날 현대인에게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을 하고"있지요.

"냉소적 이성은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 그것은 계몽된 허의의식의 역설이다. 우리는 그것이 거짓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적인 보편성 뒤에 숨겨져 있는 어떤 특정 이익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포기하진 않는다."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62쪽)



지젝이 보기엔 서구식 자유주의나 "사민주의"도 이러한 냉소주의의 함정에 빠진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본주의라는 보편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지만(자기인식) 그것과 실천적으로 단절하려는 삶의 기술(자기배려)를 연마하려는 노력은 부재합니다. 근대적인 계몽과 이성에 의해서 도달한 냉소적 현실 인식은 단지  자기인식이나 앎에만 머물고 있을 따름이고 그것을 실천적으로 공구하려는 삶의 노력은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냉소주의가 만들어낸 일종의 "쾌락"은  결과적으로 "향락Jouissence이었기에 가능한 이데올로기입니다. 향락 즉, "즐겨라"라는 초자아의 명령은 역설적으로 스스로부터의 금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들이 예컨대 "웰빙강박, 카페인없는 커피, 다이어트와 채식"과 같은 것들이지요. 보다 잘 즐기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지켜야 할 금기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모든 것을 즐기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라도 "쾌락의 과잉"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므로 말이지요. 

이처럼  냉소주의에 의해 균열된 인식과 실천의 간극이 불러오는 효과는 "인위적으로 법을 세우려는 시도"가 되고 사도-마조히즘적 "도착"이 될수밖에 없습니다.  기성의 제도 기독교도 일종의 도착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미국의 공화당으로 대표되는 기독교근본주의자들이 민주주의의 사도임을 자처하면서 별인 일이 이라크전쟁이라는 사실은 이러한 도착이 얼마나 폭력적 일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역사적으로보면 중동과 유럽지역에서의 종교갈등의 역사자체도 이러한 도착의 역사라고 할만 합니다. 도착은 스스로가(혹은 신이) 세운 원칙(혹은 쾌락)만이 맞고 다른 신(혹은 타인의 쾌락)은 틀렸다라는 배타성 혹은 이기주의에 다름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변형된 사도-마조히즘이라고 할까요? 

이러한 도착에 대한 해법으로 지젝은 "죽은 신"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지젝에 의하면 제도기독교가 은폐해 온 기독교내부의 숨은 전통이라고 할수있습니다.  욥에서 그리스도로, 다시말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계시"가 기독교 내부에는 존재하는데 바로 여기에 현대인의 도착적 곤궁을 벋어날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구약의 백미라고 할만한 욥기의 주인공인 욥은 평생동안 계속된 고초를 겪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고난과 비극을 그자체로 긍정하고 무화시킴으로써 삶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그 값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 찾을 수 없구나
 깊은 물이 이르기를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가 이르기를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
 정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치 못하리니
 오빌의 금이나 귀한 수마노나 남보석으로도 그 값을 당치 못하겠고
 황금이나 유리라도 비교할 수없고 정금 장식으로도 바꿀 수 없으며 
 산호나 수정으로도 말할 수 없나니 지혜의 값은 홍보석보다 귀하구나
 구스의 황옥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순금으로도 그 값을 측량하지 못하리니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리워졌으며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
 하나님이 그 길을 깨달으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이는 그가 땅 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두루 보시며
 바람의 경중을 정하시며 물을 되어 그 분량을 정하시며
 비를 위하여 명령하시고 우레의 번개를 위하여 길을 정하셨음이라
 그때에 지혜를 보시고 선포하시며 굳게 세우시며 궁구하셨고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욥기 28장 12절~28절)

 고난과 고통은 (신의) 지혜를 깨닫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는 긍정을 통해서 욥은 결과적으로 "신의 자기분열"을 야기하게 됩니다. 신의 무능(현실의 고통과 고난)을 신의 전능(삶의 지혜와 깨달음)함으로 전유하기. 유대교의 역사는 사실 이러한 신의 무능함과 전능함의 "시차적 간극"사이에서 지속되어진 역사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대교의 신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서 그 신이 "죽은 신"이었음을 당당히 선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아버지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마가복음 15장 34절)라고. 그 자신이 인간이면서 신이었던 예수에 의해서 전능한 신의 무력함이 드러난 순간이지요. 이로서 기독교적 신은 그리스도에 의해 자기분열을 완성합니다. 그 결과 전능함으로써 존재하는 초월적 신은 "죽은 신"이 되고 남은 것은 이러한 고난과 고초를 무의미으로 환원함으로써 삶의 지혜를 완성하는 "자기배려"의 기술이 남게 됩니다. 

"다 이루었다"(마태복음 19장 28절)

이 순간이야말로 고난과 고통으로의 그리스도적 희생의 삶이 스스로의 의지와 계획에 의해서 비롯된  자기승리의 과정이었음을 선언하는 순간입니다. 유대교의 욥과 기독교의 그리스도는 이처럼 "죽은 신"을 통해서 다시 부활하는 "부정의 부정"으로서의 자기긍정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지젝은 이러한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이야 말로 현대의 도착적 현실과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있는 계기라고 말합니다. "큰 타자의 상징적 허구에 매달리"거나 이데올로기적 도착에 빠지기보다는 현실의 고통과 고난(실재)와 직접 대면하는 용기, 주체의 냉소와 자기분열(자기배려와 인식간의 분열)을 극복 하는 전복적 실천을 강조하였던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기독교가 말하려던 (전복적) 핵심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실천이야말로  대타자의 상징적 질서를 극복하기 위한 진정한 자기분열의 완성이라는 점을 지젝은 "죽은 신"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P.S.   그런데 지젝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라는 책에서는 푸코와 라캉의 유사성보다는 하버마스와의 유사성에 더 주목합니다. 

"이러한 푸코의 주체개념이 얼마나 엘리트적,휴머니즘적 전통에 부합하고 있는지를 간파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것을 가장 그럴싸하게 실현한 것은 내적인 열정들을 통제하고 자신의 삶 자체를 일종의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르네상스의 '전인주의적' 이상이 될 것이다. 푸코의 주체개념은 오히려 고전적인 것이다. 적대적인 힘을 조화시키는 자기-매개의 힘으로서의 주체, 자기 이미지를 복구함으로써 '쾌락의 사용'을 통제하는 방편으로서의 주체, 결국 하버마스와 푸코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20~21쪽) 

그는 푸코의 "자기배려"를 단지 "적대적인 힘을 조화시키는 주체"로, 욕망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하버마스적인 합리적이고 계몽적인 이성으로서의 주체로 바라봅니다. 이것은 다분히 푸코의 "자기배려"라는 개념이 가지는 실천과 인식간의 자기분열적 간극을 배제하는 관점인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배려"라는 개념이 내적으로 가지는 모순과 갈등들을 단지 계몽적 이성 혹은 냉소적 이성으로서의 '인식'주체로만 보려고 한 혐의가 있어 보이는 대목인것 같습니다.  

 그러나 위에서처럼 "자기배려"라는 개념을 실천과 인식간의 분열과 간극을 내포하는 (헤겔적)자기분열의 과정으로 본다면  이것은 완전히 푸코에 대한 오독으로 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푸코의 "자기배려"개념은 하버마스적인 합리적 이성으로서의주체보다는 라캉의 정신분석이 야기하는 본질주의에 더 가까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재와 대면함으로써만 얻어지는 라캉적인 실재의 윤리라는 것이 기실은 푸코의 "자기배려"와 같은 것이 아닐까라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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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크리스트 2010-08-20 0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Is-ought problem(http://en.wikipedia.org/wiki/Is%E2%80%93ought_problem)이 떠오르네요. 인식과 실천의 간극이 바로 이 문제일 것입니다.
최근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었는데, 덕 또는 탁월함이나 훌륭함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그게 위에 푸코가 고대 그리스에서 봤다는 '자기배려'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거기서 느낀 건 그러한 자기배려라 일컫어지는 것은 흔히 말해지는 좋은 것들을 추구하는 것인데, 사실 그건 자기에게 좋다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혹은 그리스 도시국가인 폴리스에게) 좋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배려'는 육체에 대한 배려라고 보기는 힘들 것입니다. 오히려 니체가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등에서 말한 약자의 도덕에 가깝다고 봐야겠지요. 니체는 주로 고귀함, 강함 등의 강자의 도덕에 더 신경을 썼으니까요.
지젝의 냉소적 이성에 대한 비판은 정당해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이것
"그들은 자본주의라는 보편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지만(자기인식) 그것과 실천적으로 단절하려는 삶의 기술(자기배려)를 연마하려는 노력은 부재합니다"
은 자본주의가 거짓이면 무엇인가(자기배려)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제 생각엔 냉소적 이성이 자본주의를 거짓으로 판단할 것 같지도 않을 뿐더러, 그것의 참,거짓 여부가 어떤 것을 해야함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무엇을 해야 함은 "어떠어떠하게 해야 하는 것이 옳은 (또는 좋은) 일이다"라는 생각이 미리 있을 경우에 도출될 것이고, 그것은 각자가 가진 도덕가치에 따라 달라질 것이고, 냉소적 이성은 "자기배려"라던지 어떤 특정한 도덕가치를 서로 공유하지 않을 것이고 (아니 오히려 그런 가치가 없다는 표현이 더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냉소적 이성이 노력하지 않고 태만하다는 지젝의 지적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또 무슨 냉소적 이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서의 욥 처럼 현실을 고통과 고난속에서 인식한다고 생각되지도 않네요.
한마디로 냉소적 이성은 자기분열을 인식하지도 고민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건 아직 덜 식은 탓이겠지요? ^^;
끝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푸코가 말한 '자기배려'로 생각되는 탁월함 또는 훌륭함에 대해서 얘기를 하지만 마지막에 그중 가장 탁월한 것은 철학함이다라고 말하면서, 굳이 말하자면 '자기인식'이 으뜸가는 탁월함이다라고 끝을 마치지요.

yoonta 2010-08-20 15:03   좋아요 0 | URL
'냉소적' 이성이라는 말 자체가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은 안다"에서 시작하는 것이니 "자본주의는 거짓"이거나 무언가 나쁜 점이 있다라는 것은 아는 인식상태라고 해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냉소적"일수가 없으니까요. 뭔가 알아야 냉소적이라도 할수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그냥 무지의 상태일 뿐이겠지요.

이처럼 알고도 행하지 않는 상태를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라는 책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비판해 옵니다. 이러한 냉소적 이성은 결국 이데올로기의 환상성을 통해 대리만족을 구하게 되므로 말아지요. 지젝의 문제점은 냉소적 이성이라는 개념자체에 있다기보다는 본문에서 제가 지적한 것처럼 푸코의 자기배려 개념을 하버마스의 아류쯤으로 보았다는데 있는거 같다는 이야기였어요.

님 댓글을 보니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다시 읽고 픈 충동이 생기는군요. 허접한 블로그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티크리스트 2010-08-23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본주의가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거를 아는 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냉소를 유발했다는 얘기인데, 제 얘기는 그런 인식으로부터는 아무런 "해야 한다"라는 실천이 나올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려면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대안도 가지고 있어야 하겠지만, 설령 그런 대안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해야 하는 지는 의문입니다. 어떤 인식도 실천을 도출해 내지는 않으며, 오히려 인식과 실천의 간극이라고 할 게 아니라, 인식으로부터 실천을 도출하는 오류라고 부르는게 적절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저는 지젝이 현대의 냉철한 이성을 냉소적 이성으로 오해했다고 생각됩니다. 냉철한 이성은 인식에서 실천을 도출할 만큼 어리석지도, 이로 인해 고민하지도 않으며, 이걸로 도착해 빠지거나, 죽은 신의 도움으로 자기긍정을 이뤄낼 필요도 없습니다.

지젝의 푸코에 대한 평가는 라캉의 실재와의 대면이란 개념도 낯설고 "자기배려"에 대한 제 생각이 부정적이라서 별로 할 말은 없네요.

yoonta님은 지젝과 푸코 등의 생각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신지가 더 궁금하네요. 어차피 우리는 지젝도 푸코도 아니니까요. ^^;

답변 반갑습니다.

yoonta 2010-08-24 18:06   좋아요 0 | URL
(과학적)지식과 가치판단의 분리는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데카르트이후의 근대과학의 성립과도 긴밀한 연관이 있습니다. 이전에는 지식과 가치판단 혹은 신념이나 신비적 요소등이 변별되지 않고 결합되어있었다면 근대과학이 발전한 이후에는 이러한 지식에 베버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일종의 탈주술화 혹은 탈신비화가 이루어지지요. 예를들어 연금술과 같은 비의적 지식에서 근대화학이나 약학으로 변화한 것처럼 말이지요.

위에서 제가 이야기한 자기배려나 실천과의 연관이라고 하는 부분은 따라서 이러한 형태의 지식과 (신념에 따른) 행위/실천간의 근대적 분리이전의 상태를 말하려는 것이겠지요. 푸코가 복원하려고 한 '주체성'도 바로 이러한 자기배려의 정신이 아닐까라는 이야기가 그래서 가능한 것이라고 봅니다.

지젝은 최근 그의 책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라는 책에서 "어떤 행위의 확실성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의 문제다. 참된 행위는 그에 관해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어떤 투명한 상황 속의 전략적 개입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참된 행위가 지식의 틈새를 메우는 것이다"(298쪽)라고 말한 바있습니다. 소위 "냉철한 이성" 혹은 "냉소적 이성"만으로는 투명하고 완전한 지식을 획득할 수 없고 따라서 이러한 지식내부의 간극과 틈을 메울 방법으로의 "신념"과 실천을 강조하는 대목이라고 할수있겠습니다. 저는 이런 입장에 전반적으로 동의하는데요. 왜냐하면 지식의 확실성이란 투명한 객관성으로 주어진다라기보다는 신념과 실천이라고 하는 일종의 도약이 결합되었을때에만 가능한 개연성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지젝이나 푸코에 대해서는 저도 아직 공부하는 입장이라 뭐라 분명하게 말씀드릴수는 없겠네요. 이들에 대한 저의 이해 혹은 거리두기는 앞으로 올리게 될 게시글을 통해서 조금씩 보여드릴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안티크리스트 2010-08-25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념과 실천이라고 하는 일종의 도약이 결합되었을때에만 가능한 개연성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네. 저걸 뒤집어 말해보면 지식 그 자체로는 어떤 것도 도출되지 않는다는 거죠.
그리고 오히려 신념이 있다면 실천을 하는 데 있어서 지식은 문제되지 않죠. 광신도들이 그 예라고 볼 수 있죠. 그리고 심하게 말하자면 지젝이 언급한 '참된 행위'란 것도 광신도의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식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도출되지 않으니, 결국 그들도 신념에 따라 그걸 '참된 행위'라고 생각할 뿐이니까요.

무엇이 그것을 '참된 행위'라 생각하게 했는지, 그러한 신념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살펴볼 문제입니다. 무엇을 '선' 또는 '좋은 것'으로 여기는지는 윤리적 문제겠지요. 그리고 대개는 거기에는 어떤 목적(예: 공공의 이익)이나 가치판단(예: 이타적 행위는 좋은 것이다)이 들어가겠고, 이는 어떤 것도 지식은 아닙니다. 뭐 예외적으로 칸트 같은 경우는 실천이성비판에서 도덕법칙이 순수이성의 요청이라고 했지만요.

앞으로의 게시물도 기대하겠습니다. ^^;

yoonta 2010-08-26 02:21   좋아요 0 | URL
지젝이 이야기하는 "참된 행위"는 맹목에 기반된다라기보다는 합리적 이성에 기반한다라고 봐야합니다. 라캉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그의 실재계는 상징계의 외부에 존재한다기보다는 상징계의 내부(의 틈새)에 있는 것이므로 말이지요.

수학의 예를 들자면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수학의 무모순성을 증명하려는 형식주의를 극단으로 밀어붙인 끝에 도출된 수학의 한계지점이었던 사실을 들수있겠네요.


참된 행위는 이처럼 합리적 이성의 지속적 추구의 한계지점에서 획득되는 헤겔의 절대정신 혹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라캉의 (상징계 내부의)실재계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님이 예로드신 칸트의 경우(도덕법칙은 순수이성의 요청)도 마찬가지라고 할수있겠네요.

안티크리스트 2010-08-29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합리적 이성에 기반한 행위란 엄밀히 말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행위도 이성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죠. 행위는 항상 어떤 믿음에 기반합니다. 합리적 이성의 한계지점에서도 어떠한 행위도 도출되지 않습니다. 행위는 항상 선택에 문제고, 어떤 행위도 합리적 이성의 비호를 받을 자격을 갖추지 않습니다.

칸트는 인간이 감정에 의해서만 의지가 따라가는게 아니라, 이성의 의해서도 의지가 정해질 수 있어야 하므로, 감정에 기반하지 않은 이성에 기반한 도덕법칙을 제안했지만, 이성으로부터 특정한 도덕법칙 혹은 어떠한 참된행위가 나와야 될 어떤 제한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성은 자신이 설정한 어떤 행위도 참된 행위라 말할 수 있으며, 자신의 행위를 긍정하고 정당화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참된 행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yoonta님이 합리적 이성에 기반해서 어떠한 행위가 "참된 행위"가 되는지 한번 도출하는 예시를 보고싶네요. 지젝이 했던 예라도 상관없구요.
다만 여기서 합리적 이성이 대중의 윤리감정이나 상식에 기반하면 곤란하겠네요.

yoonta 2010-08-29 02:21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내용과 관련해서는 저의 이 페이퍼
http://blog.aladin.co.kr/yoonta/category/16878918?CommunityType=MyPaper&page=4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글 내용에서 원주율에서 9가 100번 연속으로 나오는 부분이 존재하는가하는 부분을 승인하는가아닌가 하는문제가 바로 참된 행위가 칸트적 의미에서의 "선험적 종합판단'인가와 연관된다라고 보는데요. 이는 실재론적 입장에 섰을때의 포지션의 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라캉이 이야기하는 고유명사의 의미나 (공백으로서의)주체의 의미도 결국 이와 같다라고 봅니다. "생각할수 없는 것을 생각"하기. 이게 바로 지젝이 이야기 하고픈 "참된 행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안티크리스트 2010-08-29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원주율에서 9의 연속을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 왜 참된 행위가 칸트적의미의 '선험적 종합판단'인가 아닌가와 연관되는지 이해가 안되네요. 원주율은 계산된 값이고, 십진법은 임의적이기 때문에 9는 100번이 아니라 무한대에 가깝게도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그냥 반대로 원주율을 2진법으로 바꾸면 1이 연속으로 나오는 정도를 쉽게 관찰할 수 있겠죠. 진법을 늘리면 관찰 빈도가 줄어들 뿐이겠죠. 그리고 칸트가 참된 행위가 '선험적 종합판단'으로 도출된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을 순수이성비판의 밑에서 논했을 텐데, 칸트는 도덕법칙이 순수이성의 요청이라면서 이를 선험적 종합판단의 결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생각할 수 없는 것 생각"하기가 참된 행위인가요? 생각을 행위의 일종으로 보는 거라면, 지금까지 얘기했던 인식과 실천의 간극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인식(생각)이 곧 실천인데 무슨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인지요?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것 생각"을 한 결과 어떤 "참된 행위"를 해야 겠다는 것이 도출된다는 것인지? 그렇다면 그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생각이란게 어떻게 도출되는지 하며, 또 그걸 왜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게 도출되는지 궁금하네요.

라캉의 고유명사의 의미와 주체의 의미도 그게 하나의 해석이 아닌 합리적 이성의 필연적인 인식인지와, 또 그러부터 어떠한 실천이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지요?

yoonta 2010-08-29 19:40   좋아요 0 | URL
원주율은 계산된 값이 아니라 계산된 것으로 추정된 값이죠. 무리수처럼 원주율은 소수점이하가 무한히 계속되기 때문에 정확히 그 수를 알수없는 값입니다. 그런데 이 '알수없는 것'을 '아는 것'으로 가정하기로 '약속'한 것이 원주율이라는 점입니다. 십진법이냐 2진법이냐는 이야기는 제가 하고픈 이야기와는 상관없는 내용이고요. 핵심은 원주율의 '실재성'을 어떻게 보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순수이성비판을 기초로 한 칸트 윤리학을 정초하기의 핵심에는 저는 이 칸트의 선험적종합판단에 기초한 <순수이성비판>이 있다고 보는 것인데요. 이러한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간의 연관성은 가라타니고진의 <트랜스크리틱>에서 잘 설명하고 있는것으로 봅니다. 자세한 설명는 고진의 책을 참조하시는게 낫겠네요. 한가지 예를 들면 고진에 의하면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은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초월"이라는 관점과 같습니다. 선험적 종합판단이 가능한 배경에도 초월이 있었던 것처럼 도덕이나 윤리가 가능한 것도 초월이라는 (형이상학적)괄호넣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는 방식이지요. (트랜스크리틱 199~200쪽을 참조하세요)

제가 '실천'이나 '행위'를 이야기했을 때 이것을 '이론'이나 '법칙' 혹은 '이성'과는 다른 무엇이라고 본다면 그 다른 것으로 '신념'이나 혹은 '윤리'를 전제로한 행위라고 생각한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순수하게 이론에만 기반한 "이론적 실천"이라는 것도 '이론상' 가능하겠지만 행위나 실천의 특성이라는 것에는 어쩔수없이 '우연성'이 개입하기 마련이지요. 때문에 말하자면 "참된 행위"란 이러한 우연성을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우연성의 (사후적)필연성을 행위의 근거로 삼는 방식이라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라캉의 고유명사나 기표의 의미를 생각해 볼수있다는 것인데요. 새로운 고유명사나 기표는 기존의 상징계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기표입니다. 즉 기존의 상징계 내부에서는 "생각해 낼수 없는" 무엇인 셈이지요. 그러나 새로운 고유명사 혹은 기표를 만들어내는 언표"행위"를 함에 의해 이러한 기존의 질서나 논리의 회로로서 생각해 낼수 없는 공백이 있음을 드러냅니다. 기표는 때문에 "생각할 수없는 것을 생각"하기입니다. 고유명의 언표작용은 따라서 상징계(기존의 질서)내부의 공백을 드러내는 '실천'이 됩니다.








안티크리스트 2010-08-29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원주율을 10진법으로 현재 표기하는데 0에서부터 9까지의 숫자는 당연히 나옵니다. 이를 20진법으로 표현해도 100진법으로 표현해도 그 진법 내부의 숫자는 다 나올겁니다. 그러므로 9가 100번 연속된 숫자를 진법으로 하는 그 진법으로 원주율을 표기했을 때, 그 진법의 모든 숫자가 나오지 않으리란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원주율을 계산이야 끝나지 않았지만, 9가 100번 연속된 숫자가 나오느냐 안나오느냐의 문제는 나온다가 맞지 않냐는 거죠.
그리고 저는 원주율의 실재성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그것과 이론과 실천의 간극과의 연관도 모르겠습니다.

가라타니고진의 책을 참조하는 건 무리인거 같고, 키워드를 주시면 네이버에서 본문검색은 되더군요. (199쪽에 나오는 단어를 알려주시면 될듯)
순수이성비판은 시간과 공간이 우리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져있고, 공간으로부터 기하학의 명제들이 선험적으로 도출되므로 이런 걸 선험적 판단이라고 말한 것인데, 선험적 종합판단에는 어떠한 '초월'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시간과 공간으로부터도 일련의 기하학 명제들을 도출할 수 있을 뿐이지요. 경험에 상관없이요. 초월을 선험과 같은 의미로 쓰시는 거라면 선험적 관점이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네요.

"제가 '실천'이나 '행위'를 이야기했을 때 이것을 '이론'이나 '법칙' 혹은 '이성'과는 다른 무엇이라고 본다면 그 다른 것으로 '신념'이나 혹은 '윤리'를 전제로한 행위라고 생각한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네. 신념이나 윤리없이는 당연히 행위는 도출될 수 없죠. 그런데 그 신념과 윤리는 어떠한 이성에서도 필연적으로 도출되지 않는 거죠. 그러므로 판단과정이 길든 짧든 이성이 많이 개입되는 적게 개입되든, 그 기저의 신념 또는 윤리가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참된행위와 광신도의 행위는 차이점이 없는 것이며, 어떠한 것을 참된행위라 규정할 근거또한 없는 것입니다.
신념이나 윤리가 '우연성'이라 하시면서 그걸 다시 사후적 필연성이라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르겠네요. 또 그 사후적 필연성이라는 게 이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된다는 의미라면 신념이나 윤리를 '전제'할 필요는 없겠죠.

새로운 고유명사나 기표를 만들어내는 게 기존의 언어로는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을 생각한 거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어떤 상황이나 내용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 상황이나 내용이 기존 언어로 과연 그러한 새로운 고유명사나 기표 없이는 표현이 될 수 없었던 것인지가 설명되어야 겠지요. 단순히 새로운 걸 만든다고 생각할 수 없는 걸 생각한 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존 언어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걸 말하는 '실천'을 현대의 냉소적 이성이 인식만 할 뿐 말하지(실천하지) 못해서 간극이 생겼던 건가요?
또 기존의 질서나 논리회로의 공백을 찾아내 이를 언표하는 일이 '참된 행위'라는 건 별다른 이성적 근거를 가진다고 보기 힘드네요.

yoonta 2010-08-29 23:57   좋아요 0 | URL
음.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는감이 있는데요.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님의 진법이야기는 제가 이야기하려는 "원주율의 실재성"과는 큰 관련이 없습니다. 이진법이건 십진법이건간에 "9가 100번 혹은 1000번 연속으로 나온다"라는 사건은 원리적으로 동일한 사건이니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건자체를 '실재로 존재하는것'으로 승인하는가의여부입니다. 님은 당연히 나오겠지라고 생각하십니다만 그렇게만 보면 그것은 일종의 '소박실재론'이지요. 문제는 9가 100번 연속으로 나오는지 안나오는지의 여부를 알수 없으므로 그러한 수는 실재하지(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관점이 있다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바로 메이야수가 비판하고자하는 '상관주의'이고 괴델이 비판하는 직관주의수학자들이 되겠지요. 이것이 왜 이론과 실천간의 문제와 연관되냐하면 여기에 일종의 '도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분석적 추론만으로는 자동적으로 유도되지 않는 믿음이 개입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두번째 문단과 세번째 문단에 대한 답변은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한두페이지 보는것은 큰 의미가 없고요. 칸트를 다루는 1부전체를 읽어보실것을 권해드립니다. 님이 의문을 갖는 부분에 대한 대부분의 답변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댓글로 하나하나 답변드리는것보다는 아무래도 그게 좋을것 같아요. 제가 지금처럼 계속 답변드리게 되는 원인이 바로 제 답변의 불충분때문인거 같아서요.

님은 (제가보기에)이성과 행위간에 뛰어넘을수 없는 간극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행위이든지 간에 행위는 이성과 필연적 연관은 없다라는 관점을 고수하시는것 같습니다. 제가보기에 이런 믿음은 라캉은 물론 칸트철학과도 좀 거리가 있어보이는데요. 저는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칸트철학 내부에 이러한 간극을 뛰어넘을수있는 방식을 마련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소위 합리와 경험을 "종합"했다라고하는 그 방식으로 말이지요. 기회가 되면 님이 의문을 품는 부분에 대해서 한번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지금은 가물가물한 <트랜스크리틱>을 한번 더 훑어 보야야 되겠네요.^^;

안티크리스트 2010-08-30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원주율의 9가 100번 존재하는 문제에 대해 저는 존재한다는 입장을 취했지만, 그걸 이성으로부터의 필연적인 도출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개입될 필요도 '도약'이 있지도 않습니다.

별 뜻 없이 쓰신 것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성과 행위간에 필연적 연관이 없다는 처음에도 언급한 "Is - Ought Problem" 을 인지할 뿐이지, 어떤 "믿음"을 가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저 간극을 필연적 연관으로 매우는 일은, 아직 어느 누구도 했다고 평가되지 않습니다.

고진의 책은 큰 흥미가 가질 않네요. 훑어보실 기회 되시면 새로운 답변 기대하겠습니다.

yoonta 2010-08-30 16:47   좋아요 0 | URL
뭔가 자꾸 서로 빗나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인데요.

원주율에 9가 100번 연속으로 나온다는 사실이 필연적 도출이라고 저는 이야기한 바 없습니다. '필연적이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도입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지요. 그게 메이야수가 이야기하는 우연성의 필연성이라면 그러한 의미에서의 필연성은 논리나 추론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신념이나 믿음에 의해서 가능한 관점이 아닌가하는 정도만 이야기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님은 필연적이지 않기 때문에 추론적으로 계산가능하다라고 말씀하시는건가요?(필연적이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나 도약이 개입될 필요가 없다라는 말은 좀 모순적인 표현으로 보이는군요. 필연적이지 않다는 말은 우연적이라는 이야기고 그렇다면 논리보다는 무작위적 행위에 더 가까운 것이니까요) 믿음이나 신념이 필요없으려면 이성으로부터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분석판단으로부터 추론가능한 무엇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9가 100번 혹은 1000번 연속으로 나오는가 아닌가와 같은 문제를 생각하려면 수학에서는 '무한'개념이 도입되어야 합니다. 소수점이하가 무한히 펼쳐진다라는 가정이 있어야 하기때문이지요. 그런데 무한은 계산불가능합니다. 이처럼 계산불가능한 요소를 수학에 도입해야 되느냐 마느냐를 놓고 수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어왔죠. 그러다 결국 수학내적인 필요에 의해서 이것이 도입되었던 것인데 그것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미분이지요. 원주율과 같은 초월수도 마찬가지고요. 때문에 수학은 따지고보면 역설적인 체계입니다. 계산불가능성을 기초로 계산가능성을 탐색해야하는 학문이니까요.


안티크리스트 2010-08-31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믿음이나 도약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는 저는 그것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제 답이 맞다고 어떤 믿음이나 도약을 발판삼아 주장하지 않죠.
마찬가지로 어떤 행위가 '참된 행위'라고 어떤 믿음이나 도약을 발판삼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러한 참된 행위는 광신도의 행위와 다름없이 이성으로부터는 도출되지 않는 것이라고 할 뿐이죠.

yoonta님과 제 논의가 빗나가는 이유는 제가 볼때에는 역설적인 단어의 사용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연성의 필연성'같은 단어 말이죠. 이걸 풀면 우연성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건데, 그러면 그건 우연적일 수 밖에 없다는 뜻이겠죠. 그런데 yoonta님은 "필연"이란 단어를 쓰면서 마치 그러한 연결이 필연적이라는 듯한 뉘앙스를 남겨놓습니다.

정리해보면 참된 행위 = 이성적 추론 + 우연적 요소(신념 또는 믿음)
그런데 저 우연적 요소는 임의의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참된행위와 광신도의 행위는 구별불가능하다. 우연적 요소는 말 그대로 우연이기 때문에 합리적 이성은 저러한 요소 때문에 참된 행위를 하기 위해 도약을 할 필요도 고민할 필요도 없다. 참된 행위란 임의적이기 때문에.

yoonta 2010-08-31 02:35   좋아요 0 | URL
글로만 이야기하려니 이런 일이 생기는듯 합니다.^^;;
제가 표현이 서툴다는 일차적 문제점도 있지만요.

"믿음이나 도약이 필요하지 않는다 고로 불확실성을 받아들인다.."
"답이 맞다고하더라도 믿음이나 도약을 주장하지 않는다(반드시 그렇게 연결될 필연성도 없다)"
"참된 행위는 광신도의 행위와 다름없이 이성과는 무관하다"

님의 포지션은 결국 이렇게 요약될수 있는 것이로군요.

님이 말씀하시는 제 글의 "뉘앙스"는 필연성 속의 우연성 혹은 그 반대간의 역설적 관계를 제가 계속 이야기하기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걸 "역설적 단어의 사용"이라고 보셨다면 정확히 보신 겁니다. 다만 님은 제가 그 표현을 사용하는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안하시는 것같아요.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라캉이론의 상징계내부의 실재계나 지젝의 (무작위로서가 아닌) "참된 행위" 혹은 메이야수의 "우연성의 필연성" 그리고 수학적 체계 내부의 무한의 패러독스 혹은 칸트의 선험적 종합판단등같은 사례들도 결국 다 이것을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인데 납득이 안되셨다면 결과적으로 제 설명이 부실했다거나 아니면 확고한 입장의 차이가 있다거나 해야겠네요.

여튼 님과의 논의는 이정도에서 마무리하는것이 좋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관련된 글을 포스팅해보도록 하죠.

근데 안티크리스트님은 알라딘에 블로그가 없으신가봐요? 로그인하지 않은 아이디시네요..^^






안티크리스트 2010-08-31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로그 관리를 안해서 로그인을 안했었어요. ^^;

저도 이후에 관련 글을 포스팅해보겠습니다. 하긴 맥락이 쉽게 이해되는 거라면 저자들이 책을 힘들게 쓸 필요도 없겠죠 ^^;

토론 즐거웠습니다~
 

알라딘불매운동 관련 포스팅은 더이상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다른 알라디너분들의 관련글들을 좀 읽어보다가 나름대로 좀더 생각해 보고 싶은  지점들이 있어서 몇자 더 끄적여 봅니다. 

현재 알라딘 블로거 내부에서 불매운동을 보는 시선을 크게 두가지로 나눠 본다면 

1. 먼저 바람구두님처럼 불매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시거나 물매운동을 지지하면서 동참하시는 분들의 입장입니다. 이 분들이 불매운동을 주도적으로 추진하거나 혹은 참여하시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비정규직 노동문제에 대한 비판과 환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문제가 된 알라딘 노동자 한 분의 구명을 위한 운동이라기보다는 이와 같은 전반적인 노동환경에 대한 문제제기요 비판의 차원에서 자신들이 활동하는 알라딘이라는 장소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볼수있겠지요. 하지만 이분들이 전술적 목표로 고려하는 것은 물론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다양하다고 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알라딘 내부에서의 문제해결 수준에 국한된다고 봐야겠습니다. 알라딘이라고하는 테두리나 외연을 넘어선 운동의 확장까지를 염두에 둔다고 보긴 힘들겠죠. 때문에 얼마전 알라딘 대표가 게재했던 재발방지를 약속한다라고하는 사과문발표라는 선에서 불매운동을 종료하시는 분들도 계신걸로 압니다. 아직까지 불매운동을 계속 추진하시는 분들은 이보다 좀더 확실한 대책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어디까지나 그 실제적/현실적 목표는 알라딘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긴 힙듭니다. 아마도 그 최대치는 알라딘 전 직원의 정규직화 정도에서 그치겠지요. 실현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수렴한다고 보여지긴 하지만.  

 2. 한편 이러한 불매운동에 대해서 미온적 혹은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는 입장입니다. 대표적인 블로거가 로쟈님이라고 할수있겠네요. 로쟈님 같은 경우는 불매운동이 지향하는 목표자체가 불확실하다. 그리고 (알라딘)불매운동이라고 하는 소비자운동이 보다 근본적 수준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데에는 미흡한게 아닌가하는 입장이신 것으로 대략 보입니다. (틀릴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유보적 자세는 아마도 로쟈님이 지젝에 대한 레닌적인 전략적 보조를 같이 하는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는 바라님의 글도 보이는군요.  로쟈님은 사실 직접적으로는 지젝보다는 피터 싱어를 언급하긴 했지만. 

거칠지만 현재 알라딘 내부의 입장을 이렇게 크게 두가지로 일별했을 때 저의 입장이 무엇이냐고 묻는 다면 먼저번 페이퍼에서도 적었지만 1번도 아니요 2번도 아닙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그 중간 쯤? 위치한다고 할까요? 불매운동은 지지하지만 동참한다고 하진 않겠다는 입장이므로 말이지요. 제가 왜 어떻게 보면 이런 어중간한 일종의 박쥐같은? 포지션을 취할 수밖에 없는지 몇자 적어보는게 이 페이퍼의 목적입니다. 

바라님의 글(http://blog.aladin.co.kr/vara/3318911)에도 나옵니다만 사실 지젝식의 전복적이면서 근본적인 혁명 혹은 개혁이라은 것이 현실적 실천목표로서 가능한 것인가하는 문제의식. 전 이러한 비판에 일단 공감합니다. 오늘날처럼 부르주아가 19세기나 20세기초처럼 노골적으로 계급착취를 하지 않고 얼마간의 떡고물을 던져주면서 그들의 체제를 연명해 나가는 소위 후기자본주의시대에는 1917년식의 러시아혁명과 같은 급진적 목표는 사실상 불가능한 목표가 아닌가하는 비판이지요. 지젝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른바 "상식의 한계" 내부에 머무르는 관점입니다. 소위 말하는 개량인 것이지요. 카우츠키나 베른슈타인에 의해서 창안된 독일사민당의 개량주의 노선이 역사적으로는 좌파내부에서 그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고  오늘날 유럽식 복지국가나 유럽사민당들의 노선도 여전히 이러한 노선을 따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에서는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의 노선이라고 해도 틀리다고 할순 없겠지요. 이런 노선이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일단은 자본주의체재 내의 다수 대중들이 급격한 사회변화를 원하기보다는 자본주의라고하는 체제 내에서 다소간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하는 경향이 그 첫 번째 이유겠고(특히 유럽이나 일본, 미국같은 선진자본주의국가들에서 더 두드러지는 경향)  두 번째로는 이런 환경 때문에 정치를 수행하는 단체나 조직들이 현실적 목표로서 점진적 개량에 머무르려고 한다는 사실이 거든다고 봐야 할 겁니다. 이로서 자본주의는 그 주도자들의 용의주도함과 그 비판자들의 무능함이 결합되어 아직까지도 건재하고 있고 또 당분간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사실상 이러한 개량이나 복지국가노선은 어디까지나 자본주의라고 하는 틀 내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정치적 전략이다라고 과거 레닌은 비판하였고 또 오늘날 지젝의 비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소위 "상식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자본주의도 근본적으로 극복가능해 진다는 이러한 비판도 또 마찬가지로 엄연히 사실이라고 봅니다. 개량이 바라보는 현실과 급진이 바라보는 현실이 이렇게 서로 다를 수있다는 것. 현실이라는 것이 단일하지 않고 복수의 현실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저는 전자도 상황에 따라서는 옳을수 있고 후자도 상황에 따라서는 옳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할 수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얼핏 불가능해 보이는 "근본적 변혁" 혹은 "혁명"을 유예하고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목표에 집중하여 동물적이고 야만적인 자본주의를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로 만드는 것이 급선무다? 아니면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역시 결국 자본주의에 불과하며 자본주의에 대한 개량에 머무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따라서 현실적이고 실현가능한 목표라는 상식의 한계를 돌파하여 자본주의를 근본에서 바꾸어야 한다? 

   이런 일종의 선택의 갈림길 혹은 간극 같은 것들이 이번 알라딘불매운동과 관련된 여러 알라디너분들의 입장 내부에 상존한다고 하면 좀 지나친 억측일까요?  저로서는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없는 입장이 되어 버렸네요. (물론 현재의 알라딘불매운동에 대한 찬반을 이에 대입시키는 것 자체를 문제삼을수 있는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2번처럼 불매운동을 근본적 층위에서 비판하면서 불매운동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관점은 결국 아무것도 실천적으로는 하지 않겠다는 방기가 될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소위 근본적 입장이 "운동하지 않음 위한 알리바이"가 된다는 비판을 모면하기 힘들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이 입장은 불매운동자체가 옮음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하는 포지션입니다. 만약 불매운동자체가 잘못된 운동의 방식이라면, 불매운동을 비판하고 또 불매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선언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실천이라고 한다면 다시말해 2번의 입장에서 1번을 비판한다면 이를 두고 "운동하지 않음의 알리바이"라고 하는 것은 (불매)운동에 동의하고 참여하는 자의 시각에서만 바라보는 비판이라고 할수도 있는 것이지요. 불매운동자체가 오류이다라고 하는 입장에서는 그것이 잘못되었다라고 적극 표현하는 행위가 스스로의 노선을 실천하는 또하나의 운동이 될 수있으므로 말이지요.  하지만 저로서는 이런 분명한 비판의 입장에 서 있다고 볼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알라딘불매운동이 비록 몇가지 분명한 한계들을 노정하고 있을 지언정 우리사회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점진적으로나마 해결해 보고자한다라는 목표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보긴 힘들고 또 그를 위해 실현가능한 실천들을 하자라고하는 문제의식에도 기본적으로는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라고하는 외연을 뛰어 넘었을 때에만 가능한 사안이 아닌가라는 비판의 입장 역시 동의하며 다만 그 구체적 실천방법에 대해서는 현 시점에서는 이론이나 원론수준에서 접근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고 결국 다시금 구체적 실현/실천방법으로서의 점진적 방식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반복되는 자기모순적 위치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군요.  

글을 쓰다보니 정리라기보다는 오히려 혼동만 가중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다만 저의 어정쩡한 포지션도 결국은 불매운동을 계기로 우리사회에서 실천가능한 목표나 운동이란 어떤 것일까하는 고민이나 문제의식에서 비롯된다라는 점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굳이 이렇게 정리도 되지 못한 단상들을 끄적여 보는 나름의 이유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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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7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8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요즘 알라딘불매운동때문에 알라디너들 사이에서 말들이 많은가 봅니다. 저는 불매운동과 그 운동에 참여하시는 분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조적인 입장이라고 할수있겠네요. 로쟈님과 비슷한 포지션이라고 할까요?  지지는 하지만 동참하지는 않겠다라는 입장입니다. 바람구두님처럼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지만 책 몇 권을 이 곳에서 사지 않는다고 그것을 불매운동한다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고(왜냐하면 여기서 사지 않으면 어차피 다른 곳에서 사야하고  비정규직이 문제라면 단지 알라딘만 문제인 것은 아니요. 도서 출판계 전반이 문제이고 한국사회 전반이 문제가 될 수있지요.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시스템 자체가 문제인 것이고) 그래서 그분들의 활동에는 지지는 보내지만 내가 나서서 시간과 정열을 소비해 가면서 할 일은 아닌것 같다정도가 나의 생각이고 입장입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이 일이 다른 비정규직관련 사건들보다 상대적으로 지엽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혹자는 그 기준이 뭐냐고 말하실듯 하지만요) 비교우위라고 하긴 뭐하지만 예를들어 같은 불매운동인 뉴코아,이랜드불매운동의 사례의 경우는 훨씬 더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량해고를 당하고 고통을 받은 케이스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곳 알라딘에서는 이랜드불매운동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불매운동에 동참하자"라는 바람구두님 같은 분들이 안계시더군요. "이곳 알라딘블로거들에게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기업이니까?" 나름 생각해본 원인으로는 결국 이것 밖에는 없더군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라딘에서는 책을 안사기로 했지만 이랜드에 가서 옷을 사입고 뉴코아에 가서 쇼핑을 한다? 어떻게 보면 이는 비정규직 한 명을 위한 투쟁에는 동참하면서 비정규직 수십,수백명을 위한 운동은 외면하는 결과가 되는 것 아닐까요? 윤리적 소비라는 것이 가능한 선을 엄격히 따르자면 사실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한 모든 재화의 소비를 금해야 합니다. 단순히 식탁에 고등어를 올리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단 것이지요. 가장 좋은 방법은 스님들처럼 산속으로 들어가 속세와 연을 끊고 살거나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 도처에는 사실 비윤리적으로 생산된 자본주의의 생산품들이 도처에 널려있으므로 말이지요. 난 고등어를 먹지 않으니까 윤리적 소비를 하는 사람이야. 혹은 희말라야의 선물같은 공정무역을 통해서 공급된 커피를 먹으니까, 난 알라딘에서 책을 사지 않으니까 윤리적 소비를 하는 소비자요 독자야라고 생각해서는 좀 곤란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문제는 뭘까요? 사실 제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관련해서  수많은 사건과 사례들이 속출하고 있을 겁니다. 알라딘의 해고사건 같은 것은 이슈화되어서 그렇지 그렇지 않은 수십, 수백건의 사례가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그러나 이 각각의 케이스에 우리가 모두 힘을 보탤수는 없는 일입니다. 산속에 들어가서 자급자족하면서 살 수 없거나 불우이웃돕기 성금에 일억원을 내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그러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모두가 각자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자신이 할수있는 역량만큼 참여하고 실천하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어떤 일이 내가 참여하고 참여하지 말아야 하는 일인가를 판단해야 하는 일이 남습니다. 그 판단에서 저는 이번 알라딘 해고노동자건 관련 불매운동에 대해서는 심정적인 지지는 보내지만 책 몇권 안사는걸로 혹은 지지한다라는 의사표명 하는걸로 불매운동에 동참한다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울러 블로그활동을 접거나 옮길 의사도 없습니다. 애초에 이곳은 알라디너들과의 교류를 위해 만든 곳이지 알라딘의 돈벌이를 위해 만든 공간이 아니므로.

자본주의사회에서 소비자들의 불매운동이 기업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한국사회에서는 이 소비자불매운동이라는 운동의 방식이 효과적이지는 않은 것 같더군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불매운동에 참여하시는 알라디너분들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이번 운동으로 뭔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시길 새해를 맞이하여 기원해 봅니다. 그러나 제가 힘을 보탤수 있는 부분/참여할 수 있는 선은 여기까지라고 해둬야 할 것 같습니다.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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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불매관련 yoonta님의 의견에 대한 저의 생각.
    from 푸하의 서재 2010-01-01 23:07 
    의견 잘 들었습니다. 저도 불매운동에 참여하진 못해왔어요. 그래도 한 가지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저는 yoonta님의 "비정규직이 문제라면 단지 알라딘만 문제인 것은 아니요. 도서 출판계 전반이 문제이고 한국사회 전반이 문제가 될 수있지요.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시스템 자체가 문제인 것이고)"이 말씀에 깊이 동의하고 있어요. 여기에서 나아가 "이 일이 다른 비정규직관련 사건들보다 상대적으로 지엽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라고도 언급하시고 다시 "알
 
 
펠릭스 2010-01-02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비판(평)의식이 부족하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못하죠. 우리 사회가 안티의식(나와 다른 것들)의 표현에 많은 제약을 두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모델에 대한 제안이나 합의가 부족합니다. 다양함은 사회나 개인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저 자신도 좀 더 새로운 눈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새해도 건승하시고 좋은 글 부탁합니다.

yoonta 2010-01-02 13:36   좋아요 0 | URL
제 글이 불매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시는 분들에 대한 건설적 비판/비평이 될수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닥 읽어볼만한 내용이 있는 글은 아니네요. 제 관심의 정도가 비례된 수준의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팰렉스님도 새해에 좋은일들만 생기시길 기원합니다.
 




 최근에 도서관에서 김상일씨의 <역과 탈현대의 논리>라는 책을 읽고 있다가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해서 몇자 적어 봅니다. 이 책의 저자인 김상일씨는 동양철학을 서양철학과 수학과의 관련 속에서 해명하는 작업을 오랬동안 천착해 왔습니다. 특히 러셀의 역설이나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들 속에 존재하는 논리적으로 해소불가능한 역설paradox의 문제를 易과 같은 동양의 사유속에서 해명하려고 시도하여왔고 그 결과물들을 <화이트헤드와 동양철학>, <원효의 판비량론 비교 연구>,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풀어본 원효의 판비량론>, <한의학과 러셀 역설 해의>, <초공간과 한국문화>, <알랭 바디우와 철학의 새로운 시작> 등의 저술들로 소개해온 분입니다.

 김상일씨에 의하면 성서Bible 특히 창세기는 지금까지 윤리적 혹은 도덕적으로만 이해되어져 왔을 뿐이고 '논리적'으로 이해되어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만약 창세기가 논리적으로 이해되어져 왔다면 "기독교의 역사와 신학은 지금과 많이 다를 것"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창세기의 한 구절을 옮겨와 봅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이 동산 모든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밤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 (창세기 3장 1~5절)
 
   

기독교에서 보는 인류의 역사는 뱀과 여자와의 이 대화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창세기에서 이 구절은 결정적인 대목이 아니라 할수 없을 겁니다. 통상적으로 이 구절은 악으로 대변되는 뱀이 여자에게 선을 상징하는 "하나님Lord"의 명령을 거스를 것을 유혹하는 선과 악의 윤리적 대립구도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김상일씨는 이 대목을 윤리적, 가치론적 구도로만 볼 것이 아니라 논리적Logical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합니다.
 
위 대목에서 주의해서 보아야 하는 부분은 뱀이 여자에게 "이 동산 모든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는 구절입니다. 굵은 글씨로 강조했듯이 중요한 것은 이 "모든"이라는 부분입니다. 뱀과 여자가 이해하는 이 "모든"에는 당연히 동산의 한 가운데에 있는 나무와 그  열매 즉, 선악과도 포함됩니다. 뱀의 논리 그리고 그 논리에 포섭된 여자의 논리로 보았을 때 동산 중앙의 나무 역시 "모든 나무every tree"에 해당하므로 그것을 먹는 일은 비록 신의 명령을 거스르는 행위이긴 하나 비논리적인 행위라 할 수 없습니다.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수 있다고 했지만 동산 중앙의 나무 열매만 먹지 말라고하는 하나님의 명령에는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되었다고 볼 수있는 것이지요. 뱀은 이런 논리적 허점을 노리고 여자를 유혹했던 것이지요. 이 논리를 E형 논리라고 합니다. E형 논리에서는 전체도 부분에 '포함'됩니다. 수학의 집합론에서 어떤 집합의 모든 부분집합에 전체집합이 포함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수학에서는 이와같은 어떤 집합의 모든 부분집합을 '멱집합'이라고 정의하기도 하죠.  

반면 하나님이 상징하는 논리는 A형 논리입니다. A형 논리는 부분은 전체에 속하지만 전체가 부분에 속하지는 않는 논리입니다. 즉, 수학에서의 멱집합이 통용되지 않는 논리이죠. 동산 중앙의 나무는 "모든 나무"에 속하지 않은 일자one입니다. 동산 중앙의 나무는 그자체로서 하나의 완전한 전체성을 이루는 그러면서 모든 것의 지식knowledge of everything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이러한 일자적 전체성으로서의 나무는 모든 (다른 부분집합으로서의) 나무들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신의 피조물은 신에 포함되나 피조물은 신에 포함되지 않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이러한 A형 논리의 사례를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유대교나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같은 (물론 수행을 통한 깨닮음을 통해 신과의 합일을 이룰수 있다고 본 그노시스적 기독교 전통을 제외하고) 유일신적 전통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신과 인간은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관계이고 위계적으로 동등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 뱀과 여자가 따르는 E형 논리를 따르게 되면 신이 인간이 되고 인간도 신이 될 수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것은 신이 곧 인간이 되고 인간이 곧 신이되는 이단heresy이 되므로 유일신으로서의 유대교나 기독교전통에서는 배척될 수밖에 없는 논리가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동양의 종교 그리고 사상은 E형 논리를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교의 경우 대표적으로 E형 논리를 따르는 종교인데 사람도 수행을 통하여 깨닮음을 얻으면 모두 부처가 될 수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신과 인간의 동일성 혹은 인간이라는 소우주와 외부의 대우주 간의 동일성. 서양에서도 일부의 비교적esoteric 전통에서는 이런 신과 인간의 동일성 테제가 존재하긴 합니다만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일 뿐 주류라보 볼수는 없지요.

그런데 이런 A형 논리는 기독교와같은 종교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학과같은 서양철학에서도 발견 됩니다. "A형 논리학의 출발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범주론>에 의하면 첫번째 "선행 범주"와 두번째인 <범주론>의 범주는  세번째의 후속 범주와 관련이 없습니다 이러한 범주들 간의 분리와 상호관계를 규정한 이유는 결국 "하나와 여럿의 관계에서 생기는 역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소위 "러셀의 역설"로 잘 알려진 역설을 해결하기 위한 러셀의 "유형이론"도 이러한 A형 논리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러셀은 1901년 소위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통해서 일반에게 알려진 러셀의 역설을 집합론set theory에서 발견합니다. 러셀의 역설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발견됩니다.


   
  "지금 자기 자신을 요소로서 포함하지 않는 집합의 전체를 X로 한다. 그런데 X자신은 X에 포함되는 것일까, 포함되지 않는 것일까? 가령 X가 X에 포함된다고 하면 자기 자신을 요소로서 포함하는 것으로 되기 때문에 X의 정의로부터 X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되어 모순이다. 또 가령 X가 X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면 X의 정의로부터 X는 X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다시 모순이 생긴다. 이와 같이 어느 쪽으로 해도 모순이 생기게 된다." (<괴델 불완전성 정리>, 요시나가 요시마사, 75쪽)   
   


이처럼 어느 쪽으로 해명하려고 해도 해소되지 않은 역설적인 상황을 러셀은 소박한 집합론 (naive set theory)에서 발견했던 것입니다. 일화에 의하면 러셀이 이러한 역설을 집합론 내부에서 발견하고 프레게에게 알려주었는데 프레게는 크게 낙담하여 수년간 연구해서 막 발표하려던 자신의 논문을 폐기처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러셀은 이러한 역설을 해소하기 위해 앞에서 이야기한 A형 논리를 다시금 도입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유형이론"입니다.

러셀의 해법을 설명하기 전에 이해를 돕기 위해 소위 거짓말쟁이 역설을 다시한번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옛날 한 크레타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이다"  그렇다면 이말은 과연 거짓말일까요? 진실일까요? 이 문장이 참이라면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이므로 이 말을 한 크레타인의 말도 거짓이 됩니다. 반대로 이 말이 거짓이라면 크레타인이 이 말을 한 것이므로 그것 역시 참이라고 할수있는 것이지요. 러셀의 역설도 이와같은 역설을 수학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러셀은 이 역설내에 감춰진 비밀을 "자기언급적"인데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만약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이다"라는 말을 크레타인이 하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모든'에 들어가는 크레타인이 이 말을 해서 역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언급적 순환고리를 깨는 일. 그것이 러셀의 해법이었던 셈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자기언급적 고리의 순환을 끊는 방식으로 역설을 해소하게 되면 계속해서 또다른 상위의 "계" 혹은 "급"을 도입하지 않을수 없게 되고 결국에 가서는 또다시 역설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러셀의 해법은 완전한 해법이 될 수 없는 임시방책에 지나지 않았죠. 그런데 이러한 러셀의 역설이 몰고온 수학의 난제를 결정적으로 해소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괴델입니다. 수학사와 괴델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번 주제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만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죠.

다시 창세기로 돌아와 봅시다. 결국 창조주인 하나님이 제시한 논리, 즉 에덴동산 가운데의 나무는 다른 모든 나무와는 다른 상위의 나무로 취급하는 A형논리는 러셀과 같은 위계적 해법에 비유할 수있습니다. 반면 뱀과 여자처럼 동산가운데의 나무도 다른 모든 나무와 같은 나무이므로 먹어도 된다고 보는 E형 논리는 A형 논리에서 보았을 때에는 '자기언급적' 역설을 야기하는 비논리가 되는 것이지요.그래서 창세기에서 그리고 나아가 서양의 지적 전통 내에서는 이러한 뱀과 여자의 E형 논리는 논리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역설만을 야기하는 악으로서 규정되고 이단으로 배척받아왔다고 볼수있는 것이죠. 결국 이처럼 서양의 종교(기독교)와 사유의 배경에는 A형 논리의 흔적이 짙게 깔려있다고  저자인 김상일씨는 봅니다. 그런데 이처럼 역설을 해소할 수 없는  A형 논리의 한계를 감지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던 시도들이 서양에서도 존재했죠. 플라톤 철학에서도 그 맹아가 존재하였고 근대철학에서는 라이프니츠에서부터 비롯하여 오늘날의 데리다와 들뢰즈 그리고 바디우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A형 논리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계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수학계에서는 칸토어가 대각선논법을 이용해 실수의 무한집합이 유리수의 무한집합보다 더 크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A형논리의 내부의 균열을 감지하였고 결정적으로는 수학의 무모순성이 불가능한 목표임을 보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통해 A형 논리를 통한 역설의 해소가 불가능임을 '증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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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싫어 2010-02-01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난 이런 성서들을 보면 이해가 안 돼 도대체 한 마디도 말이 말 같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해설하는 사람은 또 자기 식대로 횡설수설,,, 심지어 왼갖 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여
자기 자신도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말들로 신자들을 햇갈리게하는 재주는 기가 막혀 ㅎㅎ
하기야 신을 내 세우는 종교는 어쩔 수 없이 '무조건 따지지 말고 믿기만 하란 말이
이래서 나온건가 봐요

yoonta 2010-02-02 15:36   좋아요 0 | URL
"신자"신가요?

윤지 2010-02-02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자라고 거짓말을 할까요?
지금은 21세기예요 성서도 시대에 마춰 다시 써야합니다
어차피 그 성서가 만들어진 것이 밝혀진 이상
이상한 말장난으로 횡설수설하지 말고
불교와같이 과학과 철학적인 마인드로
신자들에게 접근해야만 기독교가 살아 남습니다
미국과 유럽이 왜 기독교 인구가 줄고있는지 아십니까?
지금 서양의 젊은 사람은 아무도 성서를 신뢰하고있지 않아요
가슴아픕니다

I.M.Curious 2015-01-09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성서는 이제 명언을 제공하는 어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만 서양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키워드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는요.
 

루소는 <인간불평등의 기원론>이라는 저작을 통해서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을 '허영'에 있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공동체를 형성하기 이전의 고립된 개인들은 모두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로 존재하지만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인간은 타자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 혹은 욕망을 가지게 되는데 그 결과 허영vanity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허영이 동기가 되어서 물질적 부를 추구하게 되거나 타자보다 우월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게 되면서 결국은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을 야기하게 된다는 논리지요.



이러한 의미로 루저녀의 사례를 생각해 본다면 "저는 180이하의 남자는 루저라고 생각한다"라는 발언 역시 자신의 연애의 대상인 남성을 180이상과 이하로 분류함을 통해 스스로가 180이상의 멋진 남성에게만 어울리는 우월한 여성임을 은연중 과시하고 싶어하는 "허영"이라고 볼수도 있는 것 은 아닐까요? 물론 이러한 이도경씨의 발언이 대다수 여성의 욕망을 대변한다고 볼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신체적 혹은 외모적 차별이나 구별을 통해서 자신도 결국 그러한 신체적 혹은 경제적으로 우월한 남성에 어울리는 우월한 여성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과시하고 싶어 하는 여성들은 우리들 주변에 상당수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180이하남성은 루저다와 유사한 표현을 과감하면서도 솔직하게 할수있었던 당시의 미수다의 패널들의 발언들을 보면 루저녀의그런 발언이나 생각이 단순히 이도경씨의 개인적 생각에만 국한된 우연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단순한 해프닝이나 방송사고정도로 그칠수있었던(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되는 것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그 문제의 발언은 사회적 파장이 생각보다 컸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의 발언이 나온 경로가 어디인지 진실게임이 벌어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미수다제작진이 일부 교체되고 법적 소송으로까지 번지는 사태로 확대되고 말았습니다. 한국남성들은 그 발언이 드러내는 차별과 비하의 의미를 생각보다 예민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지요. 제가보기에는 루저녀의 그 표현은 물론 문제가 많은 발언이었고 표현이긴 합니다만 과거의 다른 사례에서도 보듯이 이러한 특정 개인의 표현을 두고 집단적으로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루저녀의 표현이 어떠한 것이었던지 간에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표현과 사상의 자유의 영역에 든다고 말할 수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사실 지금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바로 이 '자유'라는 화두입니다. 루저녀의 사례에서 본 것처럼 과연 그녀의 발언을 '표현과 사상의 자유'라는 근대적 자유의 의미로 긍정할 수있다면 이때 자유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과 민주주의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점도요.



앞서서 루소가 생각한 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루소는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의 해소는 무엇으로 가능하다고 보았을까요? 바로 그것이 그 유명한 '일반의지'라는 개념입니다. 일반의지는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의지의 단순한 총합이라기 보다는 공동체 전체가 추구하는 공적이면서도 일반적인 공공선을 추구하는 의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공공선을 위한 일반의지는 개개인의 자유보다 우위에 있으면서 그것을 통제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결국 공동체의 구성원은 개개인의 다양한 욕망을 추구하는 자유를 내세우기 전에 먼저 이 공공선의 추구로서의 일반의지가 무엇인가를 항상 점검하고 확인해야할 의무를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한에서만 개개인의 자유는 공동체 내에서 보장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은 마키아벨리의 ‘공화적 자유’라는 개념과 연결되는데 즉, 시민으로서의 자유는 각각의 시민들이 공동체 혹은 공화국의 법과 질서를 준수했을 때에만 가능하게 된다는 것과 연관되게 됩니다. 이러한 일반의지 혹은 공화적 자유 개념은 법과 도덕의 강제나 간섭이 없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보는 홉스적인 ‘소극적 자유’개념과 대조를 이룹니다. 홉스의 경우에서 자유는 개개인이 타인의 간섭이 없는 상태에 있는 일종의 원자적 고립상태를 가정한다고 볼수있기 때문이지요. 결국 홉스는 루소나 마키아벨리와는 다르게 공동체 이전의 개인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의 ‘만인 대 만인의 투쟁’개념이나 ‘절대국가주권론’도 결국은 개개인의 사적 자유가 무한함을 가정함으로써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개개인의 사적 자유를 공동체적인 집합적 자유보다 강조했던 예컨대 홉스나 제레미 벤담같은 자유주의자들은 결국 이러한 개개인의 무절제한 욕망과 자유를 개념적으로 수용하다보니 거꾸로 그것을 통제하기 위한 주권적 통치 혹은 통제를 강조하기에 이릅니다. 벤담의 소위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과 같은 공리주의적 시각도 외견상 개개인의 "쾌락의 추구"가 결국은 공공의 행복으로 이어질 것이다라는 낙관론이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홉스의 절대주권론에서처럼 판옵티콘과 같은 보이지않는 교도관을 통해 수인을 통제하는 감옥을 설계했던 사례를 비춰보았을 때 그 역시 결국 자유의 무한한 추구를 허용하는 원자적 개인을 통제하기 위한 인위적이며 강압적인 제도나 도구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개개인의 사적 자유와 공동체의 공공선이나 공화적 자유를 조화시킬 수있을까요? 루소는 앞서 본것처럼 개개인의 사적자유를 일반의지에 복속시킴으로서 해소하고 마키아벨리는 공화국의 법과 질서를 통해 그것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다원화되고 공화제적인 법과 의회적 민주주의가 이미 제도화된 상황에서는 루소나 마키아벨 리가 살았던 시대처럼 공화정과 군주정이 경합하던 시기에 공화적 질서와 제도를 강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제시된 일반의지나 공화적 자유개념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다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게 사실입니다.



다시 루저녀 사례로 돌아와 봅시다. 앞에서 저는 루저녀의 발언은 그자체로 표현의 자유로서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발언은 사회의 불평등을 용인하고 조장한다는 면에서 평등이나 공공선에 반하는 측면이 있다는 사실도 지적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설을 이해하는 것, 저는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샹탈 무페의 경합적 다원주의agnostic pluralism 혹은 급진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론에 근거합니다.



무페에 의하면 오늘날 민주주의가 가능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파와 좌파간의 대립이 특정 정파의 이해관계로 일방적으로 치환되거나 혹은 ‘제3의 길’과 같이 양자간의 중립과 화해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하는 입장을 거부합니다. 대신 그녀는 소위 자유민주주의가 가능하고 또 발전하기 위해서는 (루저녀의 주장과같은)우파적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보편적 인민주권을 주장하는 민주주의간의 갈등과 긴장관계를 해소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샹탈 무페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다음 기사를 참조하세요.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87575.html )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긴장이 상호 간에 전적으로 타자적으로 존재하는 두 원칙 사이의 것으로서 양자 간에 타협될 수 잇는 단순한 관계라고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만약 긴장이 그런 식으로 이해된다면 아주 단순한 이원주의가 제도화될 수잇다. 대신에 양자 간의 긴장은 비록 우연적인 계기를 통해서라도 두 원칙의 표출이 일단 나타나면 하나의 원칙의 표출이 다른 원칙의 정체성을 변화시킨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타협“의 관계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감염”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표출과정으로부터 결과되는 집합적 정체성의 체제는 그것의 지형이 항상 각각의 내부적 구성요소에 외적인 것이 단순히 덧붙여진 것 이상으로 만들어진 복합체이다. 사회적 삶에서는 언제나 집단적 주체들의 인식과 행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게슈탈트적”인 차원이 있다.” (<민주주의의 역설>, 샹탈 무페, 26쪽)



이처럼 그녀는 소위 중도적으로 이해된 자유민주주의나 ‘제3의 길’이 빠질 수 있는 함정 즉, 자유와 불평등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우파적 입장과 공동체적 평등을 주장하는 좌파 간의 (나이브한) 조화가 가능하다고 보는 중도론을 경계합니다. 이러한 중도론은 결국 민주주의의 퇴행을 야기하고 우파에게 민주주의의 성과물을 헌납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지요. 소위 신자유주의라고 불리우는 냉전 시대 이후의 극우적 경향에 대해서 제3의 길이라는 중도노선을 표방했던 영국의 블레어정부가 어떠한 행태를 보였는지를 조금만 돌이켜 보면 그 중도적 노선이 가진 무력함이나 불모성을 알수있다는 입장입니다. 한국의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샹탈 무페는 이러한 그의 경합적 다원주의를 논증하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이나 데리다와 같은 해체적 철학을 도입합니다. 특히 데리다의 ‘구성적 타자’개념이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개념에 의하면 타자는 “우리”와 통약불가능incommensurable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러한 통약불가능성이 가진 간극과 긴장이 결국 우리와 동시에 타자를 ‘구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긴장과 역설을 야기하는 “ “그들”은 구체적 “우리”의 구성적 반대가 아니라 여하한 “우리”라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징”이라는 것이 데리다의 구성적 타자의 개념이지요. 무페는 정치의 장에서도 이러한 화해불가능한 역설이 존재함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우리는 180이하의 남성은 루저다라는 루저녀의 표현을 표현의 자유로서 승인해야할 이유가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불평등적인 우파적 표현의 자유도 다원적 민주주의라는 공간 내부에서 가능하다는 승인을 통해 우리가 이야기하고픈 180이하의 남성도 여성과 교제할 권리가 있다라는 평등주의적 민주주의을 역설적으로 대립시킬 수 있게 되고 또 그러한 이러한 발언들과 그에 대한 비판사이에 형성되는 '구성적 긴장관계'를 분명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가지 주의해야 할것은 루저녀에 대한 반발로 "160이하의 여성도 루저다" 혹은“C컵이하의 여성은 루저다”라는 식으로 이항대립적 주장을 하면 곤란하겠지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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