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오후 한 시쯤에 밀크티 한 잔을 사먹었다. 요즘 얼그레이 밀크티에 빠져 있는데 아이스/로우 슈가/라지 사이즈로 주문하면 딱 좋다. 문제는 카페인이다. 희한하게 나한테는 커피보다 밀크티가 더 카페인 각성 효과가 크다. 오후 한 시면 커피 한 잔을 마셔도 문제 없는 시간대인데 밀크티는 문제가 있다. 그날 자정이 넘어서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예 말똥말똥한 것도 아니고 분명히 피곤하고 잠이 오는데 잠에 빠져들지 못하는 묘한 각성 상태였다. 다음날, 그러니까 어제 아침, 일어나니까 너무 피곤했다. 잔 것도 아니고 안 잔 것도 아닌 기분이었다. 하루 종일 좀비처럼 지냈다. 책만 펴면 잠이 쏟아지는데 낮잠 잤다가는 또 생활 패턴이 엉망이 될 것 같아서 억지로 버티다가 저녁 8시에 쓰러져서 잠들었다.
어제 잠 안 자고 버티면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봤다. 얼마 전 <리틀 드러머 걸>을 너무 재미있게 봐서 또다른 존 르 카레 원작을 바탕으로 하는 이 영화를 골랐다. 사실 <팅.테.솔.스>를 몇 년 전에 보다가 인물들이 너무 헷갈려서 중간에 끈 기억이 있다. 이번에는 아예 노트와 펜을 들고 새로운 사람들 나올 때마다 메모하면서 봤다. 유명한 영국 배우가 총출동한 영화라는데 나는 영화도 드라마도 거의 보지 않기 때문에 아는 얼굴이라고는 콜린 퍼스와 베네딕트 컴버배치 정도였다. 콘트롤 역의 배우와 조지 스마일리 역의 배우도 낯은 익은데 완전히 얼굴을 익힌 상태는 아니라 처음에 둘이 헷갈렸다.
그렇게 보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몰입해버렸다. 어느새 노트도 내려놓고 모니터에 빨려들어갈 것처럼 봤다. 하...너무 재밌다. 원래 로맨스 작품보다는 심장 쫄깃한 추리 스릴러물을 좋아하기는 하는데 <팅.테.솔.스>는 잔잔하고 차가운 스파이물이라고 해서 내 취향 아닐까봐 오래 미뤄뒀다. 그런데 완전히 취향저격 당했다. 몇 년 전에 극장에서 재개봉 했던데 그때 못 본 게 한이다.
영화 다 보고 나서 바로 존 르 카레 소설들을 찾아봤다. 책이 엄청 많은데 어쨌든 그 중에서 조지 스마일리가 나오는 시리즈 위주로 검색했다. 그런데 뭔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한 출판사에서 시리즈 번호 매겨서 쭉 나온 게 아니라서 그야말로 중구난방 제각각이다. 아마존 사이트를 검색했더니 존 르 카레의 조지 스마일리 시리즈 순서가 나와있다.
1. Call for the Dead
2. A Murder of Quality
3. 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
4. The Looking Glass War
5. Tinker, Tailor, Soldier, Spy
6. The Honourable Schoolboy
7. Smiley's People
8. The Secret Pilgrim
9. A Legacy of Spies
이 정보를 바탕으로 국내 번역본들을 찾아보는데 1번인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죽.자.전)>가 절판이다. 두두둥. 시리즈 맨 첫 번째 책이 절판이면 어떻게 읽어야 하냐는 말이다. 심지어 전자책도 없다. 아니 전자책이 존재하는데 팔지를 않는다. 알라딘과 교보에서는 전자책이 검색되지 않고, 예사에는 전자책이 있다고 나오는데 절판이라면서 주문 버튼을 없애 버렸다. 이게 무슨 일이야ㅠㅠ 시리즈 2번인 <A Murder of Quality>는 국내 번역본이 없고 3번인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추.나.스)>부터 정상 유통되고 있다. 앞의 두 권을 건너뛰고 시리즈 3번부터 읽으려니까 왠지 손이 안 간다...



지금은 품절 상태인 <죽.자.전>과 <추.나.스> 합본판이 있는데 희한하게도 시리즈 3번인 <추.나.스>가 <죽.자.전>보다 더 앞에 와있다ㅋㅋㅋ그러니까 독자들은 시리즈 3번을 먼저 읽고 1번을 읽게 된다는 소리다. 왜 이렇게 혼란스럽게 책을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 현재는 품절이니까 다행이다.
다른 책들도 더 찾아보았다. 시리즈 4번인 <The Looking Glass War>는 '거울 나라의 전쟁'이라는 영화만 검색되고 책은 보이지 않는다. 이 책에서는 조지 스마일리가 주인공이 아니어서 안 읽어도 된다는 평도 있다. 오케이, 이 책은 넘어가겠어.
그 다음이 시리즈 5번인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인데 스마일리 시리즈 중에서 5, 6, 7번을 따로 묶어서 '카를라 3부작'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니까 <팅.테.솔.스>는 조지 스마일리 시리즈 5번이면서 카를라 3부작의 첫 번째를 장식하는 중요한 책인 것이다. 그래, 카를라 3부작을 읽어야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보자마자 또 구매 욕구가 사라진다. 왜냐하면, 몇 십권도 아니고 고작 3부작인데 그 안에서 출판사가 갈리고 표지 디자인도 전부 다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다. 통일성 있는 표지를 원했단 말이다.



심지어 <팅.테.솔.스>와 <오너러블 스쿨 보이>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건데도 어떻게 이렇게 표지 통일성이 떨어지는지 모르겠다.(<스마일리의 사람들>은 알에이치코리아에서 나왔다.)
문제는 또 있다. 영화 배우 얼굴과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4월 전격 개봉'이라고 쓰인 저 표지 말이다. 지금이 2024년인데 2012년 개봉한 영화의 배우 얼굴이 박힌 표지를 갖고 싶지도 않고, '4월 개봉'이라는 말도 너무 거슬린다. 저걸 표지에 박아버리면 나는 영원히 2012년에 갇혀버리는 셈이다. 아마도 띠지로 만든 것 같은데 종이책 사용자들과 달리 전자책 사용자들은 띠지를 벗길 수 없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전자책 표지를 따로 올려주지 않는 한 저 책을 구매할 수는 없을 것 같다...ㅠ
슬픈 마음을 안고 다른 책들을 더 찾아봤다. 시리즈 8번인 <The Secret Pilgrim>은 국내 번역되지 않은 듯 하고 마지막 9번이 <스파이의 유산>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존 르 카레 소설을 열린책들에서 한참 내다가 그 후에는 알에이치코리아에서 내는 듯 싶더니 또 열린책들에서도 나온다. 독자 입장에서는 이렇게 출판사가 갈라지면 아쉬울 수밖에 없다. 미국 아마존을 살펴보니 한 출판사에서 조지 스마일리 시리즈 아홉 권을 전부 출간했고 표지 디자인도 통일성 있게 만들었다. 심지어 박스 셋도 팔고 있다. 좋겠다...부럽다...이렇게 또 영어 공부를 다짐해본다. 아무래도 존 르 카레 소설은 내가 영어 실력을 키워서 원서로 읽는 게 나을 것 같다.
한국어 번역본이 싫은 건 절대 아니다. 한국어를 사랑하고 번역가라는 직업을 너무 사랑하고 번역가도 아니면서 번역 관련 책도 읽어봤다. 다만 출판사 두 곳에서 내는 바람에 표지 디자인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 심지어 한 출판사 내에서도 표지 디자인 통일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 시리즈 맨 첫 번째 책은 전자책도 없이 절판되었다는 점, 표지에 배우 얼굴이 박혀있다는 점 등등 구매 욕구를 떨어뜨리는 요소가 한두 개가 아니다. 어느 출판사에서 판권을 전부 사들여서 통일성 있는 시리즈로 출간해주면(전자책도 함께 내준다면) 구매할 의사가 생길텐데 그 전까지는 모르겠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 이렇게 또 2024년 목표인 영어 공부 의지를 불태워본다.
아무튼 존 르 카레의 조지 스마일리 시리즈 순서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죽은 자에게 걸려온 전화(절판)
2. A Murder of Quality(미번역)
3.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4. The Looking Glass War(미번역)
5.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6. 오너러블 스쿨보이
7. 스마일리의 사람들
8. The Secret Pilgrim(미번역)
9. 스파이의 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