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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이라니, 작가 이름만 보고도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 '나를 보내지 마'로 처음 접했던,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정교하게 구성된 세계관과 담백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문체,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묵직한 메시지로 발표하는 작품마다 호평을 받아온 영국 현대문학의 거장이다. 그가 고대 영국의 대평원을 배경으로 그리는 서사적 이야기라니, 그 자체만으로도 기대가 되었다. 비록 기사가 나오는 고전적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아 아서왕 이야기도 제대로 읽어본 적 없지만 이 작가가 재구성한 세계라면 어쩐지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파묻힌 거인'이 발매되었을 때 바로 손이 가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번역본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작가의 영어 문체를 좋아했고, 이왕이면 그 문체를 오롯이 느끼며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과연 번역본이 원작의 느낌을 온전히 담아냈을지 걱정도 되고 의심도 들었다. 막상 읽어보니 전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은 훌륭했고 작가 특유의 담담한 문체도 잘 살려냈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치밀하게 계획했을 인물들이 그 모습 그대로 살아 숨쉬는 느낌이었다.

   제대로 된 지도조차 없는, 골목의 갈림길로 기억을 더듬어 이웃마을을 찾아가야 하는 고대 영국의 대평원에 한 부부가 있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브리튼족이 굴을 파고 사는 마을에서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지속적인 놀림감이 되고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만은 지극하다. 액슬은 여전히 비어트리스를 공주라 부르고, 이른 새벽 일어나 불을 피울 수 없는 방안에 스며드는 햇살 한 줄기가 아내의 얼굴을 비출 때 행복감에 젖는다. 두 부부를 고민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 망각이다. 망각은 비단 부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온 마을을 망각의 안개가 덮고 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온 평원을 덮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과거의 일을 잊은 채 현재를, 자욱한 안개 속 고립된 섬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런 생활에 두 사람도 안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끊임없이 고민한다. 이전에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라고, 때로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들이 언젠가는 진실이었을 거라고. 짧게 스쳐가는 과거의 순간들 속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다 자란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그 아들을 찾아 먼 여정을 떠난다.

   다분히 클리셰적인 표현이지만, 두 사람의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목적이 아닌 과정이다. 아들을 찾아 떠난 여행이지만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사건들과 맞닥뜨린다. 그리고 그를 통해 그들은 한 조각씩, 잃어버린 과거를 모아나간다. 그렇게 비로소 손에 넣은 과거의 정체와 상관없이, 그 끝에서도 서로에 대한 사랑을 놓치 않는 부부의 모습은 이 책에서 가장 큰 여운을 남긴다.

   책의 초반에 등장하는 장면인데도, 여행을 떠나 첫 마을에 닿기도 전 비를 피하기 위해 폐가에 몸을 피한 비어트리스와 액슬의 모습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았다. 부부는 그 곳에서 뱃사공을 만나고, 강을 건너 섬으로 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사랑하는 연인들, 혹은 부부들은 함께 그 곳에 다다르지만 섬으로 건너가는 배에는 오직 한 명만이 탈 수 있다. 부부 혹은 연인이 함께 갈 수 있는 건 오로지 두 사람의 사랑이 진실할 때 뿐이다. 그리고 그 진실을 확인하는 방법은 두 사람이 각자 가지고 있는 기억이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그리는 두 사람의 기억이 일치할 때, 두 사람에망게는 함께 섬으로 가는 자격이 주어진다. 뱃사공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서 나오는 길, 비어트리스는 액슬에게 묻는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우리는 계속 사랑해왔는데,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우리는, 함께 섬에 갈 수 있냐고.

   망각은 생존에 필수적이다. 모든 걸 기억하는 인간은 결코 살아갈 용기를 내지 못할 것이다. 삶에서 도무지 견뎌낼 수 없는 고통에, 슬픔에, 분노에 맞닥뜨릴 때 우리는 망각의 이불을 덮고 깊은 잠을 청한다. 그리고 그 힘으로 또 일어나 살아간다. 그러나 그 망각이 삶의 소중한 이들을, 행복했던 기억들을 함께 덮지는 않는다. 전부 파묻었다 생각하는 순간에도, 그 마음은 거인처럼 남아 거기에 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을 떠올리며 책을 덮었다.


written by. 가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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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스트레인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리틀 스트레인저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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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대전 이후 점차 몰락해가는 영국 귀족 대저택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들. 그 설명만으로도 '리틀 스트레인저'는 이미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나는 귀신이나 초자연적 현상에는 담담했지만 현실적인 공포에는 취약한 사람이었다. 수없이 많은 방이 있어 한 집에 있으면서도 누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는 대저택은 기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꺼려지는 소재였다. 그럼에도 최종적으로 선정되어 배송된 이 책을 받아들고 읽기 시작했던 건, 이야기의 흐름이 궁금해서였다. 전후 시대의 몰락하는 귀족과 함께 쇠락하는 대저택이라면 사실 배경은 뻔하게 느껴졌다. 책 뒷면의 추천사만 읽어도 소설의 화자인 닥터 패러데이가 의심스러운 상황이니 이미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범인도 알고 시작하는 셈이었다. 그런데도 어떤 놀라움과 공포가 있을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그렇게 700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읽을 여유가 별로 없던 생활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잠을 줄여가며 며칠만에 책을 끝냈다. 세라 워터스는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한 챕터만 더 읽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책을 펼치면 그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덮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일어나는 사건들이 그야말로 기이해서,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닥터 패러데이는 분명 이상했다. 그의 눈을 통해 사건을 보고 그의 목소리를 통해 설명을 들으면서도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마침 정신과 실습을 돌던 참이어서 홀로 열심히 그의 성격을 분석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아무리 헌드레즈홀에 집착하고 열등감이 심하며 가족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의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에어즈가 식구들을 조작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해도, 그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가 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정말 집이 악령에 씌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들. 그 사건들의 배후가 궁금해서 소설을 탐독했다.

  결말은 깔끔하지 못했다. 명쾌한 설명도 없었고 딱 떨어지는 마무리도 없었다. 어쩐지 찜찜하고 덜 끝난 느낌이 드는데다,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잔뜩 남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했던 건, 무서웠다. 그것도 많이 무서웠다. 하필 룸메이트가 집에 간 날 밤 기숙사에서 책을 다 읽고 잠을 못 잘 정도였다. 몇 개월만에 처음으로 창문과 문을 모두 걸어잠그고 커튼을 꼼꼼하게 친 뒤 옷장까지 열어봤다. 그럼에도 불을 끄고 침대로 올라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정말 피곤해서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버티다 새벽 3시 반, 방의 불을 전부 켜놓은 채 잠이 들었다. '리틀 스트레인저'는 그런 책이었다.


'애크로이드 살인'을 추억하며

 

  화자가 범인인 스릴러의 대표작으로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이 있다. 반전의 여왕 크리스티 여사의 책 중에서도 독보적인 반전을 자랑하는 소설로,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일한 정보원이 범인인 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냐는 원망과 성토도 많았던 작품이다. 이제는 스포일러도 아닐 정도로 유명해진 설정이기도 하다.

  이 책의 뒷표지에는 닥터 패러데이의 심리를 한 문장으로 갈무리하는 대사가 적혀 있다. "그때도 이 집을 좋아했던 거네요?" "망가뜨려서라도 갖고 싶을 만큼요." 쇠락하는 헌드레즈홀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일들, 이라는 설정과 함께 두고 생각했을 때 합리적인 독자라면 누구나 책을 읽기 전부터 닥터 패러데이가 범인일거라고 심증을 가질 만한 부분이다. 더구나 '퍼블리셔스 위클리'는 닥터 패러데이를 '문학사상 가장 믿을 수 없는 화자 중 하나로 기록될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이쯤되면 반전이라 할 것도 없이 뻔해진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로저 애크로이드를 살해한 닥터 셰퍼드는 이야기의 말미에 친절하게 모든 걸 설명해준다. 작품해설을 달아주는 범인이라니, 싶을 정도로. 닥터 패러데이에게는 그런 친절함이 없다. 사실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다, 고 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일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고백을 듣고 책을 덮었는데 닥터 패러데이의 멱살이라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은 짜증이 밀려왔다. 로더릭의 방은 어떻게 된건지, 지프는 왜 여자아이를 물었는지, 처음부터 캐럴라인과의 결혼을 통해 집을 차지하는 게 목표였는지, 공범이 있었는지. 그러다 마지막에는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 일들, 닥터 패러데이가 담담히 얘기한 그 모든 일들이 정말 일어나기는 한걸까?


그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무서웠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차라리 헌드레즈홀에 집착한 닥터 패러데이가 이 모든 일을 치밀하게 계획하여 실행했고, 그래서 대저택에 일어난 초자연적인 일들이 어떤 플롯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면 다행일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면, 모든 게 미궁이었다. 700 페이지에 걸쳐 읽어온 모든 이야기에 대한 신뢰성이 무너지는 순간, 남는 건 어떤 과정을 거쳐 한 집안의 세 사람이 차례로 극도의 공포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객관적인 진술, 베티는 캐럴라인이 빈방 뿐인 3층에서 놀라 "당신"이라 말하고 극도로 무서워하는 모습으로 계단을 뛰어내려오다 추락하였다고 말한다. 캐럴라인이 그 곳에서 본 것이 무엇일지, 혹은 닥터 패러데이의 어떤 모습일지 가늠이 되지 않아 소름이 끼쳤다. 그 곳에서 그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지.

  닥터 패러데이에게는 병적인 요소가 넘쳐난다. 그의 어머니는 헌드레즈홀의 유모였다. 그래서 열 살 무렵의 그는 에어즈 가 사람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 집을 동경했다. 벽의 장식을 뜯어 가져올 만큼 좋아했다. 그 이후 그는 의사가 되는 데에 성공했지만, 그의 출신성분은 끊임없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집안의 후원 없이는 의사로서 성공하는 데에도 제한이 있었다. 그는 결혼도 하지 못했고, 부모님을 일찍 여읜 뒤 진료실에 딸린 집에서 외로운 생활을 했다. 몇 십 년이 지나 헌드레즈홀에 의사로서 출입하게 되었지만 거기에서 그는 (한 때 그의 어머니도 포함되었던) 하인들을 아무렇지 않게 웃음거리로 여기는 에어즈 가 사람들을 맞닥뜨린다. 더불어 여전히 스스로를 귀족으로, 다른 계급으로 여기며 그에게도 친구가 아닌 아랫사람으로 곁을 주려는 에어즈 부인의 오만함도 느낀다. 그는 남자로서도 캐럴라인에게 거절당하고 만다. 그런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쇠락하는 헌드레즈홀처럼 그의 모습 역시 일그러지고 있지는 않았을까.

  답은 없다. 정말 모든 게 닥터 패러데이의 망상일지도 모른다. 혹은 실제로 그 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으나, 거기에 초자연적인 요소를 붙인 것은 닥터 패러데이의 작품인지도. 아니면 그 모든 생생한 일들이 집안의 주치의 노릇을 하던 닥터 패러데이가 무언가 손을 쓴 결과일지도 모른다. 결국 로더릭은 정신과 클리닉에 입원하게 되었으므로. 그것도 아니면, 정말 그가 어떤 트릭을 써서 그런 소동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 벽에 그을린 자국을 남기고, 거울을 움직이게 하고, 에어즈 부인에게 죽은 딸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명확한 사실(이것조차 거짓일지도 모르지만)은 에어즈 가에서는 누구도 남지 않았고, 그 뒤에 홀로 남겨진 건 잔뜩 망가진 헌드레즈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헌드레즈홀을 '망가뜨려서라도 갖고 싶었던' 닥터 패러데이가 있다. 빈집을 유령처럼 배회하는, 자라지 못한 열살 소년이.


written by. 가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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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더스 블랙 로맨스 클럽
리사 프라이스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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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타터스'의 후속작인 '엔더스'. 전작을 읽지 않은 나에게는 초반 줄거리와 인물들, 그리고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에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했다. 아마 '스타터스'부터 읽어온 독자라면 보다 쉽고 빠르게 책에 빠져들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엔더스'부터 읽은 것의 장점은, 작은 설정 하나하나가 새롭고 신선하게 다가왔다는 점이었다. 나이대에 따른 스타터, 미들, 엔더의 계층 구분, 포자로 대표되는 새로운 생화학 무기에 의한 이른 바 전쟁 후의 몰락한 사회, 그 디스토피아에서 태동하는 신기술들. 권력을 쥔 엔더들이 칩을 이용하여 젊은 스타터의  몸을 대여한다는 건 정말로 새로운 발상이었다. 노인이 젊은 육체를 꿈꾼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박범신의 '은교'에서 화제가 된 후 다소 익숙해졌지만, 그 욕망을 실제로 실현하는 건 새로운 차원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용당하고 계속해서 사회 하위계층으로 밀려난 스타터들이 개혁을 꿈꾼다는 건, 다소 뻔하지만 설득력 있는 전개였다.

   주인공 캘리는 동생의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신체 대여에 참여한다. 그러나 엔더에게 몸을 대여한 동안 자신의 의식이 온전히 사라지는 다른 스타터들과 달리, 캘리는 엔더에게 몸을 내준 상태에서도 자신의 의식이 유지되며 한 몸 안에서 공존한다. 동시에 그녀의 칩은 유일하게 살인이 가능한 칩이기도 하다. 즉, 엔더에게 신체를 대여하면 어떤 행동이든 가능하지만 살인만큼은 제한되는 다른 스타터들과 달리, 캘리를 대여한 엔더는 그녀의 몸으로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칩은 유일한 것이 되고, 그녀는 악의 중심인 '올드맨'에게 쫓기는 몸이 된다. 그리고 보통의 일상을 되찾기 위해 캘리 역시 그에 맞선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친구들, 새로 밝혀지는 진실들, 그리고 조금씩 찾아오는 변화가 소설의 골자를 이룬다.

   '엔더스'는 탄탄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내가 경험하는 사회와 전혀 다른 모습의 세계를 알아가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동시에 '엔더스'의 디스토피아는 우리 사회의 갈등을 반영하고 있어 현실을 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고령화 사회로 치닫는 현재, 우리에게도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게 된 '엔더'들이 사회의 모든 권력을 쥐는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부모보다는 조부모를 보호자로 둔 것이 더 우월한 조건으로 생각되는 날이 올지도. 그 날에, 아마 '엔더스'가 생각나지 않을까.


우리는 늘 누군가를 이기고 생존한다

 

   '엔더스'에서 가장 참신한 설정은 기존 소설에서 늘 약자로 분류되었던 노인층을 기득권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끔찍한 포자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우선적으로 백신을 투여받을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약자 계층이었고, 그렇기에 오히려 가장 강했던 중장년층, 즉 미들보다 많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상상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인지. 그렇게 살아남은 엔더들은 신체를 단련하고, 권력을 탐하고, 재산을 축적하고, 스스로를 가꾸며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견고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간다. 그러나 그들은 젊고 강한 스타터들이, 그리고 살아남은 일부 미들이 두렵다. 그렇기에 권력으로 그들을 압도한다. 보호자가 없는 스타터들은 감옥에 가까원 보호소에 보내지고, 그 곳에서 기본적인 생활 여건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비참하게 살아가고 또 죽임을 당한다. 그 상황에서 일부 스타터들은 자신의 몸을 대여해주기 위해 내놓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엔더스'의 세계는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사회적 틀을 뒤집어 엎었음에도 결코 유토피아가 되지 못한다. 결국 누군가는 또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서 행복을 취한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은 없다.


그래도 희망을 본다

 

   작가 리스 프라이스는 책의 첫 장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엔더, 진에게 바칩니다'라고 쓴다. 주인공 캘리는 수많은 엔더들과 싸우고 그들에게 핍박당하며 괴로운 시간을 보내지만, 이후 그녀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그녀의 가족을 지켜주는 사람 역시 엔더인 로렌이다. 그녀가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만난 하이든의 충직한 보디가드인 어니는 미들이고, 하이든의 연구실에서 함께 올드맨을 막기 위해 연구에 몰두하는 레드먼드는 엔더이다. 비록 나이로 구분되는 계층간의 갈등을 다룬 작품이지만, 이 작품에서 캘리의 친구들은 결코 스타터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녀가 만난 좋은 사람 중에는 엔더도 있고 미들도 있다. 또한 그녀를 이용하고 착취하는 사람 중에는 역시 스타터 역시 몇 명 포함되어 있다. 도슨은 캘리와 하이든, 마이클을 가두고 끔찍하게 다루지만 결국 브로크만을 무찌른 이후에는 그녀의 동료가 된다. '엔더스'에는 절대선과 절대악의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은 모두 복잡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그 관계 속에서 누군가 나에게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결정하는 데에는 수없이 많은 요소들이 관여한다. 그 사람이 엔더인지 스타터인지는 그 중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이 이야기의 끝에서 친구와 적을 나누는 기준은 나이도, 사회적 지위도 아닌 관계에 있다. 그리고 관계는 변한다.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그게 이 이야기의 희망이다.


written by. 가비

 * 황금가지의 '엔더스'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책을 제공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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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스트레인저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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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더스
리사 프라이스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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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8
이상보다 높은 향기
김재형 지음 / 지식과감성#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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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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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수영하는 사람 (추차 방크)

 헝가리계 독일인 작가 추차 방크의 데뷔작. 헝가리 혁명과 베를린 

 장벽의 설치 등 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혼란스럽고 격변하는 상

 황을 배경으로 한다. 엄마가 떠난 후 시간을 '견딜 만한 것'과 '견

 딜 수 없는 것'으로만 나누어 생각하게 된 카타가 전후 유럽에서 저

 마다 상처를 딛고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만

 나며 아픈 마음을 추스리고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독일 ZDF 공

 영방송은 이 책에 대해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가진 여백을 통해 그 

 쓸쓸한 마음을, 애잔함을 놀랍도록 잘 잡아내었다'고 평가했고, 쥐트

 도이체 차이퉁은 '거장의 향취가 느껴진다'고 극찬했다. 실제로 데뷔

 작으로 7개 상을 수상한 추차 방크는 독일문학의 젊은 거장이 되었 

 다. 기대가 될 수 밖에 없는 작품. 


 2. 영혼파괴자 (제바스티안 피체크)

 독일의 대표 스릴러 작가인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정신의학적 지

 식을 바탕으로 한 정통 사이코스릴러. 이 작품에서 연쇄살인범 '영

 혼파괴자'에게 희생된 여자들은 끔찍하게 살해된 상태로 발견되지

 않는다. 그들은 생명이 유지되고 있으나 동공반응을 포함한 모든

 반응이 없어진 '각성 혼수' 상태, 즉 죽지 못했으나 살아 있지도 못

 한 상태로 발견된 뒤 사망한다. 연쇄살인범에 관한 소식이 베를린

 외곽의 고립된 고급 정신병원인 '토이펠스클리닉'(악마의 클리닉)

 에 전해지면서 이야기는 점차 실마리가 풀려간다. AP 통신은 '피체

 크는 몇 번이고 잘못된 길로 독자를 유인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추리하는 재미에 흠뻑 빠지고 싶은 날, 나처럼 피 튀기는 고어물을

 싫어하는 독자가 즐기며 읽을 수 있는 책.



3.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에쿠니 가오리)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일본 작가 에쿠니 가오리의 섬세하고도 담담한

 감정표현이 돋보이는 장편소설. 각각의 장마다 '1982년 가을'처럼  특정 시기가 붙여진 이 작품은 10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3대에 걸

 쳐 한 가족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그려낸다. 러시아인 할머니, 한 집

 에 함께 사는 이모와 외삼촌, 그리고 아이 넷 중 둘은 아버지나 어머

 니가 다른 이 가족은 다른 가족과는 어딘지 모르게 좀 다르다. 겉으

 로 보기에는 한없이 화목하고 행복한 모습이지만 가족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겪은 삶은 결코 그렇게 평범하지 못하다. 도대체 이 가족

 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그리고 무엇이 지금의 그들을 있

 게 했는지, 에쿠니 가오리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천천히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4. 양철북 (이산하)

 작가 자신의 성장소설. 문학소년 양철북과 그가 머물던 운문사의 젊

 은 스님 법운이 각자 자기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았다. 함께 떠 

 난 여행의 끝자락에서 두 사람은 각자 고민하던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다. 이 여행을 떠나 만난 사람들, 겪은 일들, 나눈 이야기들 모두

 가 그 자체로는 사소하고 가볍게 여겨졌을지라도 제각각 진리의 한 

 단면을 비추고 있었음을. 안도현 시인은 '귀여운 악동의 시절을 통과

 하지 못한 불행한 어른들의 손에 이 책을 쥐어주고 싶다'고 이야기

 했다. 그 말처럼,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구수한 부산 사투리를 쓰

 는 철북이를 따라 고민하고, 또 사고를 치고,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

 으며 함께 성장하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답을 찾아 헤매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큰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책.



 5. 사랑, 판타지아 (아시아 제바르)

 아시아 제바르에게는 화려한 수식어가 뒤따른다. 알제리 대학 최초

 의 여교수, 파리고등사범학교 최초의 이슬람 여성 입학자, 북아프리

 카 출신으로는 최초로 아카데미프랑세즈 종신회원으로 선출된 작

 가. 그러나 이토록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그녀는 우리나라에서는 이

 름조차 생소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녀의 대표작 '사랑, 판타지아'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알제리의 슬픈 현대사를 그리는 동시

 에 알제리 사회에서 억압받고 차별의 대상이 되었던 여성의 삶을 고

 발한다. 또한 자전적 서술과 역사적 서술을 교차하는 독특한 기법

 을 차용하고 있기도 하다. 깊어가는 가을, 낯선 나라의 역사를, 그리

 고 그 낯선 나라가 가장 자랑하는 작가를 차근차근 알아가 보는 것

 만큼 좋은 선택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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