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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낙원
헤닝 만켈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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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록 속 스웨덴 여자


   모잠비크의 수도 마푸토에 보관되어 있던 식민시대의 여러 문서에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스웨덴 여성이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매음굴을 운영했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헨닝 망켈은 이 단순한 사실에 살을 붙이고 생명을 불어넣어 한나라는 인물을, 그리고 그녀가 아프리카에서 보냈던 짧지만 강렬한 몇 년을 창조해낸다. 그렇게 완성된 소설이 '불안한 낙원'이다.

   한나는 스웨덴의 산골짜기에서 매일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집의 첫째로 자란다. 가난이 익숙하고 추위가 일상적인 그 곳에서, 어느 날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도시로 보내겠다고 결정한다. 아주 자연스럽게, 처음부터 모든 일이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었다는 듯. 이따금 산골짜기를 지나던 부호 포르스만의 썰매에 올라 순드스발로 향한다. 그 곳에서 그녀는 어머니의 계획대로 친척을 만나는 데에는 실패하지만, 포르스만의 저택에서 하녀로 일하며 새로운 인생을 얻는 듯했다. 친구가 있고, 익숙한 업무가 있고, 가끔씩 좋은 옷을 입고 시내에 나가 젊은 남자들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웃어버릴 수 있는 일상을. 그러나 그녀의 인생은 1904년 포르스만의 소개로 선상 요리사가 되어 로비사 호에 오르며 다시 한번 파도를 탄다. 한나를 어디로 떨어뜨릴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파도를.

   한나는 로비사 호에서 룬드마르크를 만나고, 한나 룬드마르크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망인이 된다. 1935m의 깊이에 남편을 묻고 한나는 어딘지 알 수 없는 아프리카 어딘가의 부두에서 배를 내린다. 그리고 파라다이스 호텔에 숙박한다. 그녀의 인생을 다시금 되돌릴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갈 곳, 겉으로만 호텔로 치장한 아프리카 최고의 매음굴에서.

   그렇게 한나는 아프리카에 오고, 세뇨르 바즈와 그가 고용한 흑인 매춘부들을 알게 되고, 두번째 결혼을 하고, 로우렌소 마르케스에서도 손꼽히는 부자가 된다. 저녁에 먹을 게 있을지 걱정했던 때에서 채 2년이 지나지 않아서, 그녀는 남아프리카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재산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동시에 남편의 죽음과 함께 그녀는 매음굴의 여주인이 된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한나는, 아니 이름을 바꾼 아나는 아프리카에서 흑인 여자를 위해 싸우는 첫 백인이 된다. 백인들의 비난과 흑인들의 침묵 속에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양쪽에 한 발씩을 걸친 채 살아야 하는 삶. 그 삶에서 자유롭기 위해 떠나는 마지막 여정을 끝으로 한나의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자유를 향한 여정


   그녀의 이야기는 그토록 단순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지만도 않다. 1904년에서 1905년까지 한나의 일기장을 통해 남아있는 기록은 한나가 살아간 하루하루에 대한 기억인 동시에 그녀의 내면에 일어났던 변화, 그녀가 느꼈던 감정, 그녀가 아프게 깨달았던 진실, 그리고 그녀가 관찰했던 사람들에 대한 진술이다.

   처음 로우렌소 마르케스에 도착한 한나는 혼자다. 남편은 죽었고 배는 떠났으며 아프리카에는 아는 사람은 물론 제대로 말이 통하는 동향조차 없다. 그런 그녀에게 아픈 그녀를 정성스레 돌보아주는 라우린다와 펠리시아는 고마운 은인이고 서투른 포르투갈어로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된다. 그러나 곧 매음굴의 주인인 세뇨르 바즈와 한나를 돌보도록 파견된 백인 간호사 아나 돌로레스는 한나에게 백인과 흑인의 차이를, 그 차이를 결정짓는 질서를, 그리고 그 질서에서 파생되는 일련의 행동지침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벤치에서 잠든 흑인 노인을 바닥에 패대기치고 아무렇지 않은 듯 그 자리에 앉는, 서슴없이 매음굴의 여자들을 때리는, 흑인들을 멸시하고 천대하며 증오와 냉소를 숨기지 않는 아나 돌로레스에게 한나는 처음에는 환멸을 느낀다. 흑인에 대한 비뚤린 시각과 이유 없는 증오를 이해하지 못해 당황한다. 그러다 곧 아프리카의 백인들을 점차 닮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 끔찍함에 몸서리친다. 어느새 자신 역시 흑인들에게, 그것도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바로 그 사람들에게 잔인해지고 있음을 깨달으며 한나는 아프리카에 존재하는 질서가 부조리하고도 강력함을 몸소 체험한다.

   그러나 한나는 다른 백인들처럼 그 질서에 몸을 맡기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흑인과 백인 모두를 바꾸기 위해 분투한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함에도, 그래서 뼛속까지 외로움에도 한나는 그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그리고 자유로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한나는 베이라의 빈민들의 모습에서 가난했던 자신의 어린시절을 본다. 매음굴의 흑인 매춘부들이 유산하거나 낙태한 아기들을 묻은 나무 아래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게 허락되지 않았던 자신과 룬드마르크의 아이를 떠올린다. 백인 남편을 죽인 죄로 감옥에 갇힌 이사벨을 보며 자신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기에 그녀의 편에 설 수 밖에 없음을 직감한다. 그렇게 한나는 누구와도 다른 사람이 되고,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불안한 낙원'은 아프리카에 관한 이야기이다. 백년 전 그 곳에서 일어났던 끔찍했던 사건들에 대한 기록이자, 지금도 현존하는 폭력에 대한 고발이다. 동시에 이 소설은 하나의 사회질서로 굳어진 증오와 공포 앞에서 개인에게 주어진 삶을, 그리고 그 삶을 바꾸는 힘을 향한 간절한 응원이기도 하다. 아프리카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그래서 글을 통해 아프리카의 고통을 고스란히 비춰내고자 했던 헨닝 망켈. 그가 전하고자 했던 건 광기 어린 피의 역사가 아닌, 마룻바닥 속 일기장처럼 고요히 묻혀 있던 희망이 아니었을까.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로우렌소 마르케스의 백인과 흑인은 서로 다르다. 백인들에게 흑인들은 주술적 사고에 사로잡힌 미개한 민족에 불과하고, 흑인들은 실존하는지도 모르는 땅속 다이아몬드를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는 백인들이 허황된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한나에게는 흑인들에 대해 이유 없는 미움과 분노를 내보이며 끔찍한 짓도 서슴지 않는 아나 돌로레스도 치가 떨릴 만큼 싫은 존재지만, 아무리 대화를 오래 지속해도 끝끝내 평행선을 유지하고야 마는 펠리시아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한나는 매음굴을 정리하며 매춘부들에게 5년 수입에 해당하는 넉넉한 금액을 보상하면 그들이 가족에게 돌아가 다른 삶을 꾸릴 것이라고 믿는다. 반면 매춘부들은 그 돈을 받지 않겠으며 어디든 따라가 한나가 새로 여는 매음굴에서 몸을 팔겠다고 주장한다. 오랜 기간 서로 다른 생활방식을 영위했던, 판이한 삶을 살아온 두 집단의 만남은 결코 쉽게 좁힐 수 없는 간극을 남긴다. 그리고 그 간극을 채우는 것은 침묵이다. 때때로 침묵을 깨고 울리는 음성은, 온통 거짓을 말할 뿐이다.

   한나는 그 침묵이 두려움임을 알아차린다. 백인들도, 흑인들도, 온통 서로를 두려워한다. 낯선 존재를, 그 존재가 휘두르는, 혹은 휘두를지 모르는 낯선 종류의 폭력을. 유럽인들이 스스로 발견했다 의심치 않는 대륙, 그러나 그 이전에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이 오랜 시간 살아오며 삶을 일궈왔던 대륙에 자리잡은 공포를 한나는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삶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삶을, 그렇게라도 살아남고 싶었던 삶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애쓴다. 로우렌소 마르케스를 떠나는 날까지 한나에게는 제대로 된 친구가 없다. 누구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누구도 그녀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속에서 한나는 자신과 그들의 간극이 영원히 매워질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와는 조금 멀리 있는 너를, 그대로 알아주겠다 말한다. 그런 마음으로, 그녀는 그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조화와 화합은 중요한 가치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이 끝끝내 불가능한 순간도 있다.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은 때로는 죽을 때까지 서로 다른 삶을 살기도 한다. 백 년 전 아프리카의 백인과 흑인은 그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럴 수 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그것을 잘못이라 낙인 찍고 그 간극을 좁히지 못하는 서로를 미워하고 또 두려워했다. 처음에는 마찬가지로 그 빈틈에 빠져 괴로워하던 한나는 떠나는 순간에는 다르다는 것 자체를 인정한다. 그것은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다르지만,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서로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에 남는 문장들

 

   그녀는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세뇨르 바즈의 눈빛에서 발견한 두려움에 관해 생각했다. 어머니, 아버지에게서는 그런 두려움을 보지 못했었다. 스웨덴에도 물론 상류층이 있었지만 그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여기는 모두가 두려워했다. 다만 백인들은 침착과 자기절제, 또는 사전 계획된 분노의 폭발 같은 가면 뒤에 두려움을 감출 뿐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왜 두렵지가 않지? 두려워할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일까? 완전히 혼자여서?

- pp. 160-161


   처음에는 한나도 흑인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는 세뇨르 바즈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차츰 그 주장은 백인들에게도 인도인들에게도 아랍인들에게도 모두 적용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식은 다를지 몰라도 어쨌든 모두가 거짓말을 했다. 그녀는 거짓말과 위선 위에 세워진 나라에 살고 있었다.

- p. 208


   "그런 건 걱정거리도 못돼요. 흑인들이 뭘 할 수 있어서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들에게는 우리에게 없는 것이 있어요."

   처음으로 그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뭔데요?"

   "그들의 숫자요."

   그는 그녀의 대답에 실망한 눈치였다. 그녀가 뭔가 엄청난, 자신은 생각하지 못했던 기발한 대답을 할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단순히 숫자가 많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신경이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상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아요." 그가 성급하게 말했다. "결코 현실이 되지 않을 악몽인 거죠. 숫자가 많아질수록 그들은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될 거예요."

   "저는 신경이 예민한 유형은 아니에요. 보이는 것을 보고 들리는 것을 들을 뿐이죠."

   "들리는게 뭔가요?"

   "침묵이에요. 부자연스러워요."

- p. 228


   열여섯쯤 되었을 소년은 문간에 멈춰 섰다. 숨을 죽인 모습이었다. 나랑 비슷하구나, 한나는 생각했다. 저 아이,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문간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저 아이 속에서 내 모습이 보여.

- pp. 293-294


   나는 백인들이 스스로와 흑인들을 기만하느라 모든 기력을 소진하는 흑인 세계에서 살고 있어, 그녀는 생각했다. 그들은 이곳 사람들은 백인 없이는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흑인들은 돌과 나무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열등한 인종이라고 생각해. 반면에 흑인들은 어떻게 신의 아들을 모질게 학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지. 그리고 백인들이 심장이 곧 멎어버릴 만큼 늘 바쁘게 움직이며 부와 권력을 향한 끝도 없는 추구에 휘둘리는 걸 보고 놀라기도 해. 백인들은 삶을 사랑하지 않아. 대신 시간을, 언제나 부족하기만 한 시간을 사랑해.

- p. 403


   그 순간 아나는 주변의 모든 것이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목가적 풍경처럼 느껴졌다.

   그건 불안한 낙원이었다.

- p. 407


   하지만 며칠 후 흑인 동네들을 되풀이하여 방문했을 때 그녀의 눈에 새로운 것이 들어왔다. 이 극빈자들에게서 삶에 대한 뜻밖의 갈망이 엿보인 것이었다. 그들은 아주 사소한 즐거움조차 하찮아하지 않고 두 팔을 벌려 움켜쥐었다. 나눌 것이 전무한 상태에서도 서로 돕고자 했다.

   어느 날 저녁 그녀는 이 모든 빈곤과 불결의 표면을 파고 들어가면 발견할 수 있었던 것들을 일기에 적어보려 했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이 불가해한 가난의 한가운데서 나는 풍요의 섬들을 볼 수 있다. 존재할 수 없었을 행복, 살아남을 수 없었을 온기. 이것을 통해 온갖 부와 안락에 파묻혀 사는 백인들의 또 다른 종류의 가난을 나는 볼 수가 있다."

- p. 454


written by. 가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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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인 (주제 사라마구)

카인과 아벨의 비극은 굳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익히 알고 있을 법한 이야기이자 가장 오래된 막장드라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생을 시기하여 죽이고 도망친 카인. 그리고 그에게 평생 어느 곳에도 오래 발을 붙일 수 없는 운명을 내려 벌하는 신. 사라마구는 또 하나의 문제작인 이 소설에서 아벨을 죽이고 도망친 카인의 삶에 주목한다. 떠도는 카인이 목도한 구약성서의 여러 사건들, 그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들의 삐뚤어진 욕망, 그리고 어딘가 그 인간의 비틀린 모습을 닮아 있는 신까지. 이야기의 끝에서 그가 물으려 했던 것은 아마 선악의 경계와 그것을 정하는 자의 자격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가 감히 카인을 죄인이라 하는가. 카인을 벌하는 신은, 우리가 믿고자 하는 만큼 선한가.


2. 화재감시원 (코니 윌리스)

SF계의 거장 코니 윌리스의 가장 뛰어난 작품만을 추려낸 걸작선 중 1권. 기발한 소재와 흥미로운 스토리, 주제를 막론하고 펼쳐지는 수다와 유머의 향연, 이라고 책 소개는 말하고 있다. 코니 윌리스는 타고난 이야기꾼이고, 그의 펜끝에서 모든 이야기는 새로운 색채를 입고 다시 태어난다. 그가 좋아하지 않는 주제라 말하는 외계인과의 전쟁을 제외하고 다양한 SF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유쾌한 단편들은 2016년 새해를 반짝반짝 빛나는 즐거운 세계로 이끌어주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너무도 무겁고, 우중충하고, 심각하니까 때로는 코니 윌리스가 보여주는 비현실적이고도 생생한 이야기의 강물에 오롯이 몸을 맡기는 것도 나쁜 생각이 아닐 것 같다. 오늘 하루 소리내어 크게 웃을 수 있도록.



3. 세상의 피 (카트린 클레망)

'테오의 여행'의 후속작으로, 12년 후 환경운동가 의사가 되어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병든 사람들을, 그리고 병든 지구를 만나는 테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수없이 많은 이해관계가 얽히고 섥힌 지구, 그 곳곳에서 다양한 의견과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 치열하게 소통하며 환경 보고서를 완성해가는 테오. 그 곳에서 그가 맞닥뜨리는 진실은 결국 세상에는 온전히 희생적인 인간도, 온전히 이기적인 인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는 자연을 필요로 하고, 때로는 자연을 이용하며, 때로는 자연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테오의 이야기가 알려주려는 것은 그렇게 때로는 뜨겁게 끓고, 때로는 조용히 흐르며, 때로는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세상의 피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 아닐까. 우리 모두 같은 피를 나누어 뜨겁게 공명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4. 골든애플 (마리 유키코)

한 사람의 정신이상 증세가 주변 사람에게도 전염된다는 '감응정신병'. '골든애플'은 기이하게마저 여겨지는 이 소재를 중심으로 언제 어디로 광기가 흐를지 모르는 위태로운 사회를 창조한다. 독자를 더 두렵게 하는 것은 마리 유키코의 소설 속 세상이 결코 낯설지 않다는 사실이다. 온갖 미친 일들이 넘쳐나고, 그 미친 일들에 점차 둔감해지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그들이 살아가다 어느 날 더 미친 짓을 감행할지도 모르는 게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아닌가. 폭력이 폭력을 부르고, 광기가 광기로 이어지는 그런 사회 말이다. 정신병에 전염성이 있다, 는 기본 명제 자체에 대해서는 마구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소설이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설득력은 어마어마해서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5. 바느질하는 여자 (김숨)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어서 1월 신간평가단 소설 추천 기간을 기다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작가 김숨의 반가운 일곱번째 장편소설. 늘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잔잔하게 뽀얀 빛을 내는, 곱고도 맑은 문장으로 글을 쓰는 작가가 바느질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어쩐지 책에 수라도 놓여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숨의 소설에서 늘 중요한 축을 차지하는 '엄마'가 이번에는 자식들을 먹이고 기르기 위해 끊임없이 어그러진 손으로 바늘을 잡고 한땀 한땀 수를 놓아나가는 바느질 하는 여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의 등에서 딸들은 인생을 배운다. 그 인생 속에서 어느날 어머니의 삶을 이해한다. 그리고 비로소 그 사랑의 의미에 가 닿는다. 김숨의 책을 읽으면 늘 엄마보다도 할머니가 보고싶어진다.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늘 그랬고 이번에도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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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질 무렵 (황석영)

개인의 서사와 한 사회가 공유하는 역사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개인이 삶에서 엎어지고 자빠지는 순간들을 시대적 맥락을 제외하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매 이야기마다 강조해 온 작가 황석영. 그는 3년만의 장편소설에 성공한 인생을 살아왔지만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돌아보니 걸어온 자리마다 폐허'인 박민우와 꿈을 꿀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은 아픈 청춘 정우희를 등장시킨다. 폐허는 회한으로 남은 내 젊은 시절의 기억들일 수도, 혹은 오늘 내가 외면하고 못 본 체하며 빠른 걸음으로 지나친 내 이웃의 외로운 일상일 수도 있다. 세대와 세대가, 개인과 개인이, 시대와 시대가 엇갈리는 지점에서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그랬듯 소중한 것에 대해, 그리고 소중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주는 작품이 아닐까.



2. 악마도 때론 인간일 뿐이다 (한스 라트)

전작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에서 심리치료사 야콥에게 스스로를 '신'이라 일컫는 사내가 찾아와 심리 상담을 의뢰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유쾌하게 그려낸 독일 작가 한스 라트의 후속작이다. 이번에는 '악마'가 찾아와 특별한 제안을 하면서 안 그래도 바람 잘 날 없는 야콥의 삶은 더욱 꼬이게 된다. 작가는 특유의 문체와 입담으로 야콥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도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한번쯤 꼬집어 주는 것 역시 잊지 않는다. 처음 책의 정보를 실제 철학과 문학, 심리학을 전공한 작가가 이 범상치 않은 인물과 야콥의 상담을 어떻게 풀언갈지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다. 더불어 원래 영화 시나리오 작업이 전문이었다는 작가가 쓰는 대사들에도 어느 때보다 관심을 갖게 된다.



3. 불안한 낙원 (헨닝 망켈)

헨닝 망켈은 어린시절 화물선의 선원생활과 보헤미안 같은 삶을 살았던 자유로운 영혼이었지만, 작가로 성공한 이후로는 아프리카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아프리카의 비극을 알리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했다. 실제로 그는 모잠비크에 극단을 세워 운영하기도 했고, 작품을 통해서도 끊임없이 아름다운 낙원인 아프리카의 비참한 현실을 이야기했다. '불안한 낙원'은 1900년대 초 스웨덴에서 아프리카로 건너간 젊은 처녀 한나의 시선을 통해 당시 아프리카의 인종차별과 대립, 증오와 분노, 약자에 대한 핍박을 그린다. 시대적 배경은 현재보다 100년이나 앞서지만 작가가 한나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건 아프리카의 지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작품. 헨닝 망켈이 세상을 떠난 올해에 꼭 읽으면 좋을 책이다.



4. 스윗 프랑세즈 (이렌 네미로브스키)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뒷이야기가 있는 작품. 이렌 네미로브스키는 유대인 소설가로, 1942년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되었다. 부모님이 끌려간 이후, 언제 자신과 동생을 잡으러 올 지 모르는 나치를 피해 황급히 짐을 꾸리면서 이렌의 어린 딸은 엄마가 남긴 공책 한 권을 챙겼다. 도망치고, 숨고, 두려워해야 했던 시간을 지나 전쟁이 끝나고 오랜 세월이 지나기까지, 아이는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며 어느새 헤어질 당시의 엄마보다 한참 나이를 먹은 할머니가 되었다. 그렇게 할머니가 된 이렌 네미로브스키의 딸이 62년만에 세상에 공개한 유작이 '스윗 프랑세즈'. 슬프고 그리운, 부끄럽지만 잊어서는 안 될 기억의 서사를 담은 이 작품은, 생존 작가에게만 수여한다는 규칙을 깨고 르노도상이 수여된 첫 사례이며 12월 영화로도 개봉된다.



5. 밧줄 (스테판 아우스 뎀 지펜)

별다른 재미있는 일이 생기지 않는 외진 시골 마을. 마을 사람들은 마을을 에워싼 깊은 숲속에 들어가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숲의 입구에 밧줄이 놓인다. 보이지 않는 숲속으로 이어지는 밧줄이. 마을의 남자들은 그 밧줄이 왜 거기에 생겼는지, 밧줄의 다른 끝은 어디에 있는지가 궁금하다. 단지 궁금할 뿐인데, 그들은 마을의 중요한 추수철을 앞두고 그 답을 찾아 떠난다. 남겨진 여자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추수에 실패하고, 결국 마을을 버리고 떠난다. 그 사실을 알고도 남자들은 밧줄을 따라가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밧줄에, 마치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고작 밧줄일 뿐인데 말이다. 나비효과를 연상케 하는 이 소설에서 작가는 아주 사소한 동기가 불러오는 일련의 되돌릴 수 없는 사건들을 이야기한다. 여러모로 기대가 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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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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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이라니, 작가 이름만 보고도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 '나를 보내지 마'로 처음 접했던,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정교하게 구성된 세계관과 담백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문체,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묵직한 메시지로 발표하는 작품마다 호평을 받아온 영국 현대문학의 거장이다. 그가 고대 영국의 대평원을 배경으로 그리는 서사적 이야기라니, 그 자체만으로도 기대가 되었다. 비록 기사가 나오는 고전적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아 아서왕 이야기도 제대로 읽어본 적 없지만 이 작가가 재구성한 세계라면 어쩐지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파묻힌 거인'이 발매되었을 때 바로 손이 가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번역본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작가의 영어 문체를 좋아했고, 이왕이면 그 문체를 오롯이 느끼며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과연 번역본이 원작의 느낌을 온전히 담아냈을지 걱정도 되고 의심도 들었다. 막상 읽어보니 전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은 훌륭했고 작가 특유의 담담한 문체도 잘 살려냈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치밀하게 계획했을 인물들이 그 모습 그대로 살아 숨쉬는 느낌이었다.

   제대로 된 지도조차 없는, 골목의 갈림길로 기억을 더듬어 이웃마을을 찾아가야 하는 고대 영국의 대평원에 한 부부가 있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브리튼족이 굴을 파고 사는 마을에서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지속적인 놀림감이 되고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만은 지극하다. 액슬은 여전히 비어트리스를 공주라 부르고, 이른 새벽 일어나 불을 피울 수 없는 방안에 스며드는 햇살 한 줄기가 아내의 얼굴을 비출 때 행복감에 젖는다. 두 부부를 고민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 망각이다. 망각은 비단 부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온 마을을 망각의 안개가 덮고 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온 평원을 덮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과거의 일을 잊은 채 현재를, 자욱한 안개 속 고립된 섬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런 생활에 두 사람도 안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끊임없이 고민한다. 이전에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라고, 때로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들이 언젠가는 진실이었을 거라고. 짧게 스쳐가는 과거의 순간들 속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다 자란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그 아들을 찾아 먼 여정을 떠난다.

   다분히 클리셰적인 표현이지만, 두 사람의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목적이 아닌 과정이다. 아들을 찾아 떠난 여행이지만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사건들과 맞닥뜨린다. 그리고 그를 통해 그들은 한 조각씩, 잃어버린 과거를 모아나간다. 그렇게 비로소 손에 넣은 과거의 정체와 상관없이, 그 끝에서도 서로에 대한 사랑을 놓치 않는 부부의 모습은 이 책에서 가장 큰 여운을 남긴다.

   책의 초반에 등장하는 장면인데도, 여행을 떠나 첫 마을에 닿기도 전 비를 피하기 위해 폐가에 몸을 피한 비어트리스와 액슬의 모습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았다. 부부는 그 곳에서 뱃사공을 만나고, 강을 건너 섬으로 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사랑하는 연인들, 혹은 부부들은 함께 그 곳에 다다르지만 섬으로 건너가는 배에는 오직 한 명만이 탈 수 있다. 부부 혹은 연인이 함께 갈 수 있는 건 오로지 두 사람의 사랑이 진실할 때 뿐이다. 그리고 그 진실을 확인하는 방법은 두 사람이 각자 가지고 있는 기억이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그리는 두 사람의 기억이 일치할 때, 두 사람에망게는 함께 섬으로 가는 자격이 주어진다. 뱃사공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서 나오는 길, 비어트리스는 액슬에게 묻는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우리는 계속 사랑해왔는데,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우리는, 함께 섬에 갈 수 있냐고.

   망각은 생존에 필수적이다. 모든 걸 기억하는 인간은 결코 살아갈 용기를 내지 못할 것이다. 삶에서 도무지 견뎌낼 수 없는 고통에, 슬픔에, 분노에 맞닥뜨릴 때 우리는 망각의 이불을 덮고 깊은 잠을 청한다. 그리고 그 힘으로 또 일어나 살아간다. 그러나 그 망각이 삶의 소중한 이들을, 행복했던 기억들을 함께 덮지는 않는다. 전부 파묻었다 생각하는 순간에도, 그 마음은 거인처럼 남아 거기에 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을 떠올리며 책을 덮었다.


written by. 가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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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스트레인저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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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대전 이후 점차 몰락해가는 영국 귀족 대저택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들. 그 설명만으로도 '리틀 스트레인저'는 이미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나는 귀신이나 초자연적 현상에는 담담했지만 현실적인 공포에는 취약한 사람이었다. 수없이 많은 방이 있어 한 집에 있으면서도 누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는 대저택은 기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꺼려지는 소재였다. 그럼에도 최종적으로 선정되어 배송된 이 책을 받아들고 읽기 시작했던 건, 이야기의 흐름이 궁금해서였다. 전후 시대의 몰락하는 귀족과 함께 쇠락하는 대저택이라면 사실 배경은 뻔하게 느껴졌다. 책 뒷면의 추천사만 읽어도 소설의 화자인 닥터 패러데이가 의심스러운 상황이니 이미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범인도 알고 시작하는 셈이었다. 그런데도 어떤 놀라움과 공포가 있을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그렇게 700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읽을 여유가 별로 없던 생활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잠을 줄여가며 며칠만에 책을 끝냈다. 세라 워터스는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한 챕터만 더 읽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책을 펼치면 그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덮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일어나는 사건들이 그야말로 기이해서,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닥터 패러데이는 분명 이상했다. 그의 눈을 통해 사건을 보고 그의 목소리를 통해 설명을 들으면서도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마침 정신과 실습을 돌던 참이어서 홀로 열심히 그의 성격을 분석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아무리 헌드레즈홀에 집착하고 열등감이 심하며 가족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의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에어즈가 식구들을 조작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해도, 그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가 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정말 집이 악령에 씌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들. 그 사건들의 배후가 궁금해서 소설을 탐독했다.

  결말은 깔끔하지 못했다. 명쾌한 설명도 없었고 딱 떨어지는 마무리도 없었다. 어쩐지 찜찜하고 덜 끝난 느낌이 드는데다,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잔뜩 남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했던 건, 무서웠다. 그것도 많이 무서웠다. 하필 룸메이트가 집에 간 날 밤 기숙사에서 책을 다 읽고 잠을 못 잘 정도였다. 몇 개월만에 처음으로 창문과 문을 모두 걸어잠그고 커튼을 꼼꼼하게 친 뒤 옷장까지 열어봤다. 그럼에도 불을 끄고 침대로 올라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정말 피곤해서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버티다 새벽 3시 반, 방의 불을 전부 켜놓은 채 잠이 들었다. '리틀 스트레인저'는 그런 책이었다.


'애크로이드 살인'을 추억하며

 

  화자가 범인인 스릴러의 대표작으로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이 있다. 반전의 여왕 크리스티 여사의 책 중에서도 독보적인 반전을 자랑하는 소설로,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일한 정보원이 범인인 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냐는 원망과 성토도 많았던 작품이다. 이제는 스포일러도 아닐 정도로 유명해진 설정이기도 하다.

  이 책의 뒷표지에는 닥터 패러데이의 심리를 한 문장으로 갈무리하는 대사가 적혀 있다. "그때도 이 집을 좋아했던 거네요?" "망가뜨려서라도 갖고 싶을 만큼요." 쇠락하는 헌드레즈홀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일들, 이라는 설정과 함께 두고 생각했을 때 합리적인 독자라면 누구나 책을 읽기 전부터 닥터 패러데이가 범인일거라고 심증을 가질 만한 부분이다. 더구나 '퍼블리셔스 위클리'는 닥터 패러데이를 '문학사상 가장 믿을 수 없는 화자 중 하나로 기록될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이쯤되면 반전이라 할 것도 없이 뻔해진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로저 애크로이드를 살해한 닥터 셰퍼드는 이야기의 말미에 친절하게 모든 걸 설명해준다. 작품해설을 달아주는 범인이라니, 싶을 정도로. 닥터 패러데이에게는 그런 친절함이 없다. 사실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다, 고 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일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고백을 듣고 책을 덮었는데 닥터 패러데이의 멱살이라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은 짜증이 밀려왔다. 로더릭의 방은 어떻게 된건지, 지프는 왜 여자아이를 물었는지, 처음부터 캐럴라인과의 결혼을 통해 집을 차지하는 게 목표였는지, 공범이 있었는지. 그러다 마지막에는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 일들, 닥터 패러데이가 담담히 얘기한 그 모든 일들이 정말 일어나기는 한걸까?


그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무서웠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차라리 헌드레즈홀에 집착한 닥터 패러데이가 이 모든 일을 치밀하게 계획하여 실행했고, 그래서 대저택에 일어난 초자연적인 일들이 어떤 플롯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면 다행일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면, 모든 게 미궁이었다. 700 페이지에 걸쳐 읽어온 모든 이야기에 대한 신뢰성이 무너지는 순간, 남는 건 어떤 과정을 거쳐 한 집안의 세 사람이 차례로 극도의 공포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객관적인 진술, 베티는 캐럴라인이 빈방 뿐인 3층에서 놀라 "당신"이라 말하고 극도로 무서워하는 모습으로 계단을 뛰어내려오다 추락하였다고 말한다. 캐럴라인이 그 곳에서 본 것이 무엇일지, 혹은 닥터 패러데이의 어떤 모습일지 가늠이 되지 않아 소름이 끼쳤다. 그 곳에서 그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지.

  닥터 패러데이에게는 병적인 요소가 넘쳐난다. 그의 어머니는 헌드레즈홀의 유모였다. 그래서 열 살 무렵의 그는 에어즈 가 사람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 집을 동경했다. 벽의 장식을 뜯어 가져올 만큼 좋아했다. 그 이후 그는 의사가 되는 데에 성공했지만, 그의 출신성분은 끊임없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집안의 후원 없이는 의사로서 성공하는 데에도 제한이 있었다. 그는 결혼도 하지 못했고, 부모님을 일찍 여읜 뒤 진료실에 딸린 집에서 외로운 생활을 했다. 몇 십 년이 지나 헌드레즈홀에 의사로서 출입하게 되었지만 거기에서 그는 (한 때 그의 어머니도 포함되었던) 하인들을 아무렇지 않게 웃음거리로 여기는 에어즈 가 사람들을 맞닥뜨린다. 더불어 여전히 스스로를 귀족으로, 다른 계급으로 여기며 그에게도 친구가 아닌 아랫사람으로 곁을 주려는 에어즈 부인의 오만함도 느낀다. 그는 남자로서도 캐럴라인에게 거절당하고 만다. 그런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쇠락하는 헌드레즈홀처럼 그의 모습 역시 일그러지고 있지는 않았을까.

  답은 없다. 정말 모든 게 닥터 패러데이의 망상일지도 모른다. 혹은 실제로 그 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으나, 거기에 초자연적인 요소를 붙인 것은 닥터 패러데이의 작품인지도. 아니면 그 모든 생생한 일들이 집안의 주치의 노릇을 하던 닥터 패러데이가 무언가 손을 쓴 결과일지도 모른다. 결국 로더릭은 정신과 클리닉에 입원하게 되었으므로. 그것도 아니면, 정말 그가 어떤 트릭을 써서 그런 소동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 벽에 그을린 자국을 남기고, 거울을 움직이게 하고, 에어즈 부인에게 죽은 딸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명확한 사실(이것조차 거짓일지도 모르지만)은 에어즈 가에서는 누구도 남지 않았고, 그 뒤에 홀로 남겨진 건 잔뜩 망가진 헌드레즈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헌드레즈홀을 '망가뜨려서라도 갖고 싶었던' 닥터 패러데이가 있다. 빈집을 유령처럼 배회하는, 자라지 못한 열살 소년이.


written by. 가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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