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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캐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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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카고의 애칭은 윈디 시티, 바람의 도시다. 그래서일까. 희망적인 미래에 대한 막연하고도 확신에 찬 꿈을 안고 시카고로 온 캐리를 맞이하는 것은 바람이다.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차갑게, 때로는 허황된 꿈의 한 자락을 놓치 않도록 따스하게 불어오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다 줄 지 알 수 없는 바람. 그 속에서 캐리는 정처없이 흔들리다, 자신이 결코 상상하지 못했던 방향의 미래를 맞닥뜨린다.

 책을 읽는 현대의 독자라면 캐리를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허영에 질릴지도 모르고, 그저 멍청하고 예쁜 트로피 와이프처럼 비춰지는 그녀의 모습이 안타까울 수도 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소설의 배경이 1889년의 미국이고, 캐리가 그 중에서도 가난한 집에 태어나 농촌에서 자란 처녀라는 사실이다. 그녀에게는 집안의 든든한 지원도, 인생의 방향에 대해 조언할 수 있을 만큼 사회 경험이 많은 부모도, 교육의 기회도 없다. 심지어 근무 경험도 없어 대도시 시카고에서 얻을 수 있는 일자리가 신발공장에서 신발끈 구멍을 뚫는 여공으로 일하는 것밖에 없을 정도이다. 더구나 대도시에서 들뜬 그녀에게 그녀를 맡아준 언니와 형부가 보내는 시선은 냉대에 가깝다. 극장에 가자는 그녀의 제안은 철없는 생각으로 치부되고, 형부는 돈을 벌어보기도 전에 놀 생각부터 하는 처제가 미래에 짐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그 모든 상황 속에서 드루에가 캐리에게 손을 내민다. 소녀 시절부터 꿈꾸던 좋은 옷을 사서 입히고 언니네 집에서 한번도 먹어볼 수 없었던 맛있는 음식을 대접한다.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상심한 그녀에게 살 곳을 구해주겠다고 따뜻한 말을 건넨다. 그 순간 캐리가 갈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 오직 드루에만의 그녀의 길일 뿐이다.

 물론 캐리는 그런 드루에를 금방 꿰뚫어본다. 그녀에게 새로 접근하는 허스트우드가 더 나은 남자라는 사실도 바로 알아챈다. 그것이 캐리가 타고난 가장 뛰어난 능력이다. 깊은 감성과 거기에 기반한 타인에 대한 예리한 통찰. 많이 배우지도, 많이 경험하지도 못한 어린 그녀는 그 감에 의지해 삶을 헤쳐간다. 물론 그녀가 고른 길이 늘 옳지는 않다. 그래서 가족들이 애정을 듬뿍 담아 '시스터 캐리'라 부르던 젊은 처녀의 미래는 결코 순수하고 아름답게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그렇다 해도, 그것이 캐리의 인생이다. 19세기의 시카고에서, 그녀에게 주어진 것이 그런 것밖에 없을 뿐이다.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이 소설은 출간 당시 인간의 욕망을 너무 적나라하게 묘사했다는 이유로 보수적이던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기고 또한 많은 비난에 직면했다고 한다. 그가 소설 속에 구축한 욕망의 세계는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여전히 우리는 돈과 명예와 여자가 있는 세계, 탐욕이 모든 결정을 내리는 세계에 조금씩은 발을 딛고 살아간다. 우리 사회에도 '시스터 캐리'는 여전히 존재한다. 비록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었다 해도, 사회적 지지기반이 마련되었다 해도, 법적 보호장치가 존재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여전히 살기 위해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고, 욕망에 몸을 맡기고, 또 그 선택에 의지하여 정점에 오른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삶의 이면에는 여전히 고뇌와 갈등이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고 때때로 삶은 그 어떤 죽음보다도 추악하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간다. 과거의 그들이 그랬듯.

인간은 바람 속의 나뭇잎처럼 한때는 자기 의지에 따라, 한때는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식으로 열정의 숨길에 따라 그때그때 움직인다. 자유의지에 따라 실수를 저질렀다가 본능으로 회복하기도 하고 본능으로 인해 쓰러졌다가 자유의지로 일어나기도 하는, 예츨할 수 없을 만큼 변동이 심한 존재이다. 어쨌든 진화는 계속되며 이상은 결코 꺼지지 않는 불빛이라는 사실로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 인간은 이처럼 영원히 선과 악 사이에서 헤매지는 않을 것이다. 자유의지와 본능 간의 다툼이 조정되고, 완전한 깨달음이 자유의지에 본능을 온전히 대체할 힘을 부여하게 되면 비로소 인간은 더이상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이성의 지침이 진실이라는 머나먼 극점을 확실하고 변함없이 가리킬 것이다.

- p.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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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1. 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내성적인 모든 사람을 끌어들이는 제목. 그에 비해 실제 표지의 모티브가 된 단편의 제목은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로 모든 내향적 성격의 소유자들에게 공감을 얻을 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면에 대한 작가의 치밀한 묘사만큼은 모두에게 만족감을 선사하지 않을까 싶다. 그 외에도 매력적인 단편들로 구성된 이 작품은 아마 긴 단편의 향연에 지친 독자에게 신선한 재미가 되어줄 것 같다. 그러면서 어느 하나 평범하지 않은 단편 속에서 내 마음에 꼭 드는 작품을 발견하는, 그런 즐거움이 더해질지도 모르고. 정이현의 말처럼 '온전해 보이는 세계를 냉정한 시선으로 관찰하여 위태로운 불안의 기미를 예민하게 포착'하는 작품집이라면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2. 가타기리 주류점의 부업일지 (도쿠나가 케이)

시골이라 불러도 좋을 지방 소도시의 작은 주류점의 문에는 '무엇이든 배달합니다' 라고 쓰여진 쪽지가 붙어있다. 무엇이든이라니, 취급하는 주종이 다양하다는 의미인가 싶지만 무뚝뚝한 사장이 배달하는 건 정말로 무엇이든, 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엇이든 진심이라면 배달해준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렇게 배달된 참마음은 보내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그리고 그 배달을 도맡아 하는 사장도 행복하게 만드는 즐거운 부업이 된다. 이 책을 읽는 독자의 마음에도 따뜻하고 어딘가 시큰한 감동이 한가득 배달될지도 모른다. 그것 역시 가타기리 주류점에서 기꺼이 맡는 부업일 것이다.



3. 음의 방정식 (미야베 미유키)

반가운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작품의 중심이 되는 사건은 미야베 미유키가 지금껏 그려온 것들에 비해서는 평범하게만 느껴진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연쇄 살인마에, 묻지마 독살 같은 게 등장해야만 미미여사에 걸맞는 스릴러라는 인식이 있어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교내에서 교사와 학생의 갈등으로 시작된 이 사건을 통해, 작가는 때로는 사소하게 어긋난 관계가 피냄새를 물씬 풍기는 사건보다 더 섬뜩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후지노 료코와 스기무로 사부로가 다시 등장해 마주하게 된 이 작품은 그러나 미스테리 그 자체보다도 미야베 미유키의 책을 빠짐없이 읽어온 애독자들을 위한 선물로 마련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4. 타인들 속에서 (조 월튼)

출판사의 소개만 읽어도 참 독특한 소설이네,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던 조 월튼의 작품. 그에게 휴고상과 네뷸러상, 영국판타지문학상까지 한번에 안겨준 작품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제일 사악한 마녀인 어머니를 저지하려다 쌍둥이 자매를 잃고 아버지를 찾으러 나선 소녀가 아버지의 세쌍둥이 누이인 고모들에게 호시탐탐 노림을 당하고, 끝끝내 자신의 카라스를 만나 어머니와 맞서는 이야기는 어찌 보면 밑도 끝도 없는 판타지처럼 보인다. 하지만 옛 민담과 현실 속 갈등을 교묘히 짜넣는 작가의 구성력은 이 작품을 가볍게 볼 수 없게 만든다. 온통 가족들과 부대끼면서도 타인들 속에서 있는 것보다 더 괴로운 주인공을 응원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은 덤이다.



5. 별을 타는 아이 (얀도)

제목부터 어린왕자를 떠올리게 하는 이 책 역시 어른을 위한 동화다. 이 책은 일에 지친 어른들에게 잠시 서류를 내려놓고, 노트북을 덮고,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과 맑게 갠 하늘과 야근 후 돌아오는 길의 고즈넉함을 주목하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너무 바쁘다. 때로는 아주 중요한 일들을 잊고 살 만큼 말이다. 정말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성인 남자가 우연한 계기로 한 소년을 만나 삶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이야기는 조금은 뻔할지도 모르지만, 때로는 뻔하지만 진실된 이야기가 간절히 필요한 법이다. 생활에서 잠깐 숨을 돌릴 좋은 핑계가 되어주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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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그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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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 여성의 인권은 백년 전에 비해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중동 어느 나라에서 여전히 여자들이 이혼을 했다는 이유로 친형제에게 맞아 죽는 일이 벌어질 때, 동유럽을 여행하는 여학생들이 납치되어 인신매매를 당할 때, 대한민국에 소라넷이라는 사이트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될 때. 페미니즘은 여전히 유효하며, 우리는 여전히 암흑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 역사를 들춰본다. 그리고 거기에서 암흑보다 더 짙은 어둠을 발견한다.

   '그들'은 1937년부터 시작한다. 모린의 어머니 로레타가 열여섯이던 시절. 디트로이트 외곽의 빈민가에서 가난과 폭력으로 얼룩진 삶 속에서도 낙관적인 미래를 꿈꾸는 한 소녀에게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채 50페이지도 지나지 않아, 그녀의 미래는 부서져 내린다. 로레타는 교육을 받지도 못했고, 돈을 가지지도 않았다. 기분이 상하면 옆에 끼고 걷던 여자의 얼굴을 칼로 아무렇지 않게 그어버리는 남자들이 활보하는 동네에서 그 사실은 그녀를 더없이 약하게 한다. 그녀가 자신의 삶을 위해 거래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남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로레타는 몸을 주고 결혼을 한다. 살아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이야기는 세대를 건너 그녀의 아이들에게로 이어진다. 모린과 줄스. 그들의 삶이라고 더 나을 이유가 없다. 하나 달라진 게 있다. 모린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이를 악물고 발버둥친다. 좀 더 사람다운 삶을 위해, 깨끗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더 이상 남자들의 손에 모든 걸 잃는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 그녀의 부단한 노력은 종종 벽에 부딪히고, 가족조차 위로가 되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지만 그래도 모린은 벗어나는 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작가를 통해 세상에 이 이야기를 전한다. 너무 멀지 않은 과거에 실재했던 어느 끔찍한 이야기를. 실제 이 세상에 살았던, 혹은 아직도 살아있을 개인들이 살아낸 역사를. 그 이야기는 무섭도록 생생해서 어떤 악의에 찬 범죄소설보다도 진득하게 기억에 달라붙는다. 이건 모두 실제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린, 너도 '그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니야?"

   끝끝내 모린을 찾아낸 줄스가 현관에 서서 묻는다. '그들'을 떨쳐내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모린의 악착같은 노력을 비웃듯이. 결국 너도 그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너의 인생도 다를 게 하나도 없다고 비웃는다. 그 질문에 대해 모린은 입을 다문다. 여동생의 아픈 과거를 들쑤시며 마지막 상처를 남긴 오빠 줄스는 영원히 떠나 그녀를 자유롭게 하지만, 아마 모린에게 지울 수 있는 기억은 없었을 것이다. 먼 훗날 야간학교에서 만난 오츠에게 털어놓게 될 만큼, 그 이야기들은 그녀 안에 똬리를 틀고 지키며 언제나 머물렀을 것이다.

   그녀는 줄스의 말처럼 '그들' 중 하나였을까? 그런데 '그들'이 대체 누구일까? 모린의 어머니, 외삼촌, 베티, 줄스. 그들을 '그들'로 만드는 게 무엇이기에? 1967년의 폭동, 디트로이트. 그 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는 중요한 무언가를 공유한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언제나 '우리'가 아닌 '그들'이 될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서로 닮은 사람들이었다는걸.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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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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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신간목록에서 발견했을 때부터 신간평가단과는 상관없이 꼭 읽겠다고 다짐했던 책이었다. 주제 사라마구는 그런 작가다. 그 이름만으로 새로 쓴 소설이 어떤 주제의식을 담고 있고 어떤 소재를 다루고 있으며 분량은 어느 정도고 번역상태는 어떤지 고민할 필요 없이 책을 선택하게 만드는 작가. 200페이지 정도의 얄팍한 두께였던 이 책은 얼핏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작가의 성향을 생각했을 때, 그리고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을 통해 구약을 새롭게 조명한다는 소재를 고려했을 때 결코 쉽게 읽힐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갔던 것은 구약성서에 기초한 이야기 자체가 흥미로워서였고, 그를 풍자하는 사라마구의 신랄한 어조가 시선을 붙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덮는 게 아쉬워지는 종류의 책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전국 방방곡곡의 절에 기와를 얹고, 숙모 혼자 꿋꿋이 성당에 예배를 다니며 나머지 가족 모두가 종교적인 성향과는 거리가 멀었던 집에서 엄마는 혼자 기독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가족끼리 예배에 가는 게 소원이었다는 엄마는 성경을 좋아했다. 틈만 나면 창가에 앉아 돋보기를 콧등에 얹고 낡아서 책장이 반들반들해진 대학 시절의 성경책을 넘겨보곤 했다. 비슷하게 성경 읽기를 좋아하면서도 난해한 디테일과 흐름을 끊는 고어체에 자주 좌절하던 나는 언젠가 엄마에게 뭐가 그리 재밌어서 끈덕지게 읽는거냐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엄마가 한 대답은 성경은 역사야, 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특정한 방법으로 쓰여진 한 민족의 역사이고, 그 민족이 자랑스러워하는 조상들의 일화이고, 어떤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기록이라고. 그래서 (돌이켜보면 늘 역사에 매료됐던) 엄마는 성경을 좋아했다. 나는 성경에 나오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꿰고 있을 딱 그만큼은 읽었어도 격동의 사춘기를 거치며 간혹 언급되는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문장들에 거부감을 느껴 성경을 멀리하게 되었지만, 엄마는 늘 꿋꿋했다.

   사라마구의 '카인'을 읽으며 엄마의 말을 다시 되새겼다. 이 책은 구약의 서사적 측면에서 줄거리를 따온다. 아우 아벨을 살해한 죄로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게 되었다는 아담과 하와의 장남 카인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방랑하며 성경 속 사건들을 목격하고, 경험하고, 성찰하는 이야기. 분명 비현실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지만 성경 자체가 신과 천사가 등장하는 판타지 장르라는 걸 생각했을 때에는 더없이 어울리는 설정이다. 카인은 노아를, 아브라함을, 여호수아를, 그리고 욥을 만나고 소돔과 고모라의 몰락, 바벨탑의 혼돈, 노아의 방주와 40일간의 비를 경험한다. 그 만남에서 카인은 자신들을 창조한 신이 결코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카인의 시선을 통해 사라마구는 구약 속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면모를 꼬집는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 것이 얼마나 경악스러운 명령인지, 충직한 욥을 두고 사탄과 내기를 한 것은 결국 악마와 다를 바 없는 일이 아니었는지, 소돔과 고모라의 죄없는 어린아이들까지 죽일 이유가 대체 무엇이었는지 묻는 카인을 통해, 성경 속 하나님은 지금껏 없었던 논리적인 비판에 직면한다.

   이렇게만 보면 사라마구의 '카인'은 신성모독이다. 실제 그럴지도 모른다. 실제 많은 기독교 단체들은 이 책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그저 자신의 변덕으로 사람의 목숨을 흔들고 못하는 일이 있어 인간에게 거래를 제안하며 때로는 유치한 고집을 부린다니,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라마구가 겨냥하는 신이 '구약성서 속의 하나님'이라는 점이다. 이 책 어디에도 실제 어딘가에서 인류를 지켜보고 있을 하나님에 대한 비판은 등장하지 않는다. '카인'은 철저하게 구약에 산재한 증거들을 토대로 하여 구약이 묘사하는 하나님의 문제점들을 공격한다. 그리고 몇 천 년 전 쓰여졌다는 책 속 하나님의 모습은, 결국은 인간의 손에서 탄생한 것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성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기득권층의 신념을 투영한 모습인 것이다. 여자를 하찮게 여기는, 동성애를 죽음으로 벌해야 하는 죄악으로 여기는, 전쟁에 열광하고 학살에 환희하는 모습들은, 아마 하나님보다는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과 더 닮아있을 것이다.

   굳이 지금 이 책이 쓰여진 이유는 뭘까? 구약성서에 때로는 읽어내기 어려울 만큼 끔찍한 기록을 남긴 인물들은 지금은 죽고 없는데 말이다. 글쎄, 적어도 21세기 대한민국을 기준으로 생각하자면, 그건 하나님을 자기 입맛에 맞게 형상화하고 자기가 원하는 모습대로 믿으며 그로 인해 권력을 취하려 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했을 때 결국 욕되는 것은 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늘 그 자리에 있었던, 어쩌면 단 한번도 악하지 않았을 신을 추악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늘 인간이다. 오직 인간의 탐욕만이, 인간의 이기심만이 그런 힘을 가진다. 사라마구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책에서 남긴 강렬한 비판은, 그런 인간을 향한 것이 아닐까.


신을 위하여

 

   주제 사라마구가 '카인'에 녹여내는 의심은 사실 성경을 열심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품어봤을 법한 것들이다. 욥은 죄를 짓지 않았는데 왜 재산도, 자식도, 건강도 잃어야 헀던 걸까? 소돔과 고모라에 살던 사람 중 아무 잘못도 없는 어린아이들은 왜 구원받지 못했을까? 신약의 예수님은 늘 용서와 사랑을 말하는데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죄 지은 자들은 왜 늘 잔인하게 죽임당하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영원히 죽지 못하는 운명을 얻음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된 카인은 당당하게 이 모든 일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하나님에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따져 묻는다. 당신이 정말 우리를 사랑한다면 이럴 수 있는 거냐고. 전지전능한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는데 이 세상에는 왜 전쟁이, 가난이, 미움과 악의가 존재하는 거냐고. 왜 당신은 그토록 추악한 것들을 창조하여 당신이 사랑한 피조물들을 괴롭히는 거냐고.

   이 책의 신은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는다. 때로 신도 완벽하지 않다 인정하고, 자신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큰소리치고, 어떨 때에는 슬그머니 논쟁을 피하기도 한다. 그래서 카인이 만난 신이 정말 어떤 존재였는지, 선했는지 악했는지, 누구도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어쩌면 신은 그냥, 관망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어느 편에도 서지 않은 채 조용히, 모두를 굽어보는 존재. 그 신이 자신에게 계시를 내렸다고, 혹은 자신을 버렸다고, 혹은 자신들만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다. 그 인간이 파를 나누고 나와 다른 이를 미워하며 차별을 조장하고 때로는 피를 보고야 만다. 어쩌면 가장 선한 신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두에게 공평한 신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때로는 기쁨을 누리고 때로는 어려움을 헤쳐나가도록 가만히 두는 신. 그 어떤 이도 신의 권력에 부당히 기대어 다른 이들을 착취하지 않도록 때로는 가차없이 쳐내는 신. '카인' 속 하나님은 그러지 못했지만 내가 믿는 신은 부디 그러기를 바라며 책을 덮었다.


'카인' 들여다보기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 모든 사람이 노아의 자식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처음에는 정당한 의심과 수군거림, 또 그 이상의 것들이 넘쳐나겠지만, 모든 것을 평평하게 다듬는 위대한 존재인 시간이 곧 그것들을 다 쓸어버릴 것이고, 미래의 역사가들은 공을 들여 이 도시의 연대기에서 아벨, 또는 카인, 또는 이름이 뭐든 어떤 진흙 밟는 자에 대한 언급을 지워버릴 터였다. 의심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를 망각으로, 영원한 격리 상태로, 왕조들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 이야기되지 않는 것이 좋을 그 사건들의 림보로 보내버리기에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역사적이지는 않을지 모르나, 그 역사가들이 얼마나 그릇되었는지, 또 어쩌면 얼마나 악의가 있었는지 보여준다. 카인은 실제로 존재했고, 노아의 부인에게서 자식을 낳았기 때문이다.

- pp. 84-85


   아예 안 오는 것보다는 늦게라도 오는 게 낫다, 천사는 대단한 진리라도 말하는 것처럼 으스대는 표정이었다. 바로 그 점이 틀린 거요, 아예 안 오는 것은 늦게 오는 것의 반대말이 아니오, 늦게 오는 것의 반대말은 너무 늦게 오는 거요, 카인이 반박했다. 천사가 중얼거렸다, 어이구 이런, 합리주의자로군.

- p. 96


   오랜 세월 뒤 사람들은 거기에 운석이 떨어졌다고 말하게 된다. 천체, 우주의 허공을 떠도는 수많은 천체 가운데 하나가 떨어졌다는 것이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바벨의 탑이었으며, 여호와가 자존심 때문에 완성을 허락하지 않은 탑이었다. 인류의 역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오해의 역사이니,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pp. 105-106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우연히 아브라함이 여호와와 이야기를 했던 곳에서 잠깐 발을 멈추었고, 그때 카인이 말했다,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게 뭐요, 아브라함이 물었다. 불에 타버린 소돔과 다른 도시들에도 틀림없이 죄 없는 사람이 있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여호와가 그들의 목숨을 구해주겠다고 내게 하신 약속을 지켰겠지요.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카인이 물었다, 아이들은 틀림없이 죄가 없었을 텐데요. 맙소사, 아브라함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신음 같았다. 그래요, 노인장의 하나님일지는 모르나 그 사람들의 하나님은 아닌 거지요.

- p. 117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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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맹인탐정 맥스 캐러도스 (어니스트 브래머)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가 대단한 성공을 거두던 무렵, 즉 추리소설의 황금기라 불리던 시절에 여러 탐정이 화려한 데뷔를 한다. 각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시리즈를 하나씩 보유한 그 탐정들 중 당시에도 유난히 돋보였던 게 바로 맥스 캐러도스라고. 그 이유는 그가 눈이 보이지 않는 맹인이었기 때문이다. 눈으로 사건을 볼 수도, 증거를 관찰할 수도 없는 그가 해박한 지식에 의존하여 친구 하인과 함께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은 아마 다른 탐정소설과는 또다른 색다른 매력을 선사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시각적인 박탈은 미스터리에 늘 오싹한 요소를 선사하곤 하니, 이번에도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깔끔한 영국탐정소설은 이렇게 추운 겨울에도 늘 반가운 법이다.



2. 응달 너구리 (이시백)

'보기엔 영 춥구 딱혀두 그 나름으루 의뭉스럽게 살아가는 인생'을 응달 너구리라 한다고 이시백은 소설의 말을 빌어 이야기한다. 그래서일까, 이 소설에 담긴 단편들은 하나같이 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늘에 묻힌 사건들을 다룬다. 그렇다고 아주 본격적으로, 격렬하게 사회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건 아니다. 연평도와 4대강, 이데올로기 투쟁, 구제역 같은 보통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에서 다룰 사안들을 자연스럽게 소설 속 인물들의 삶에 녹여낸다. 그리고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회의 그늘 속에서 춥고 딱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응달 너구리'라는 다정한 이름을 붙인다. 분명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따뜻한 볕으로 나오게 될거라고 위로하듯. 지나치게 가볍지도, 또 무겁지도 않은 소설집이다.



3. 뉴욕 미스터리 (메리 히긴스 클라크 외)

미국추리소설협회 소속의 작가들이 각자 뉴욕의 주요 랜드마크를 하나씩 골라 그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방식의 이 책은, 뉴욕에 살았던 적 있는 사람에게는 향수를, 뉴욕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여행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각자 하나의 랜드마크에 집중해서일까. 각 단편 속에서 유니언 스퀘어는, 그리니치 빌리지는, 또 할렘은 생생하게 살아난다. 무엇보다 각 장소에 생기를 불어넣는 각 작가의 이야기가 그 수만큼 천차만별로 다양해서 읽는 재미를 더한다. 짧은 단편인데도 어떤 이야기는 뒷목에 소름이 돋을 만큼 반전의 매력을 뽐내고 어떤 이야기는 가슴이 시큰하게 아파올 만큼 서글프다. 무엇보다 이야기마다 시대적 배경도, 등장인물의 문화적 배경도 달라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멜팅팟'으로서의 뉴욕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미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비행기에 챙겨가기에 가장 좋을 책.


4. 라플라스의 마녀 (히가시노 게이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데뷔 30주년 기념작이다. 일본  평단에서는 히가시노 문학을 집대성한 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일본 작가 중 한 명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세계는 다채롭다. 대체로 미스터리 문학으로 알려져 있지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등 사람이 죽고 피가 튀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있고 마음을 잔잔하게 데워주는 이야기를 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라플라스의 마녀'는 그동안 '탐정 갈릴레오'나 '용의자 X의 헌신'에서 간혹 고개를 내밀었던 각종 물리학적 이론 및 공식들과 오즈의 마법사를 연상케 하는 판타지적 요소, 그리고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스릴러가 결합된 작품이다. 올해 놓쳐서는 안 될 소설 중 하나이다.



5. 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 (카타리나 잉엘만 순드버그)

책 표지만 보아도 바로 떠오르는 책이 있으니,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너머 도망친 100세 노인'이다. 당시 독자들을 들었다 놨다 했던 슈퍼 할아버지에 이어 이번에는 할머니라는 열린책들의 광고 카피가 마음을 동하게 한다. 똑같은 스웨덴 출신 작가인 카타리나 잉엘만 순드버그는 이 책으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랐다. 이 책의 주인공은 79세의 메르타 할머니와 그녀의 노인 친구 4명이다. 오롯이 노인의, 노인에 의한, 노인을 위한 범죄를 꾸미는 그들의 이야기가 이토록 즐겁고도 진지한 이야기로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반가운 소설이다. 언젠가 우리나라에서도 노인을 '늙음'의 측면에서만 그리지 않고, 노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활기 넘치는 작품이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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