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통찰 - 위대한 석학 21인이 말하는 우주의 기원과 미래, 그리고 남겨진 난제들 베스트 오브 엣지 시리즈 4
앨런 구스 외 지음, 존 브록만 엮음, 이명현 감수, 김성훈 옮김 / 와이즈베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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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스트 오브 엣지' 시리즈는 엣지 재단 소속의 지식인들이 특정 대주제에 대해 제각기 지니고 있는 지식의 파편을 모아 하나로 엮어내는, 말하자면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이다. 지금껏 다뤄진 주제로는 Mind, Culture, Thinking, Life가 있고 이번 책, Universe는 시리즈의 5번째 주자이다.

   나는 우주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정말로 그렇다. 한국 교육과정에서 가르치는 딱 그 정도, 과장을 조금 보태 지구가 자전하며 태양 주변을 공전하고 있다는 그 정도를 알고 있을 뿐이다. 반 세기가 지나 아인슈타인이 옳았다는 게 증명되었다는 뉴스를 봐도 우와, 대단하다, 그렇게 솔직하게 감탄할 뿐 어떤 깊은 공감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인터스텔라'를 보러 가기 전에는 영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나 겁이 났고 다행히 영화의 큰 줄기를 이해하며 영화관을 나섰을 때에는 역시 순수과학은 나랑은 아니야,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야 했다. 이 책에 기꺼이 손을 번쩍 들어본 건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우주의 통찰이라니, 나한테 이보다 더 필요한 게 대체 뭐가 있나 싶었다.

   내 선택이 어떤 의미에서는 완벽히 옳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완벽히 틀렸다는 걸 깨달은 건 책을 받아들고 저자 목록을 훑었을 때였다. 익숙한 이름이 단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엣지 재단에서 글을 집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특정 분야에서 베스트셀러를 한두개쯤 출판하거나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이론을 펼치거나 유명 대학 강단을 지키는 인물들이다. 즉, 그 분야에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그 중 적어도 한둘은 아는 게 당연한 수순이다. 실제 같은 시리즈의 '마음의 과학'을 살펴보면 저자 16인 중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주요 이론을 곧바로 떠올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스티븐 핑커, 필립 짐바르도,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 마틴 셀리그먼. 심리학 전공서적에서 얼마나 자주 봤던 이름들이던지 반가울 지경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굳이 '마음의 과학'을 통독하며 그들이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짤막하게 이어나가는 릴레이 같은 글을 다시 읽을 필요는 굳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다. 그런데 '우주의 통찰'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 중 어디서 흘러가듯 들어본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는 건, 내가 정말로 무지한 분야에 대한 훌륭한 입문서를 골랐다는 기쁜 소식인 동시에 이 책을 읽는 게 세상 어떤 일보다 어려울 수도 있다는 암울한 암시이기도 했다.

   다행히 책은 어렵지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주에 대한 책 치고는 어렵지 않다고 해야겠다. 사실 읽으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고민하다 그냥 에라, 하는 심정으로 넘긴 페이지들도 적지 않았다. 수학에 대한 기본기조차 없는, 이 책에 실린 작가들이 고교 시절 사랑했다는 미적분을 20대 중반이 된 지금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나에게는 애초에 응용수학과 우주과학을 넘나드는 이 책이 무리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제각기 우주와 연관된 자신만의 주특기를 풀어내는 이 책의 공동저자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눈높이를 맞춰주기 노력하고, 그래서 고행일 줄만 알았던 이 독서는 예상 외로 즐거웠다.

   책을 덮으며 우주에 대해 더 알게 된 게 있나 생각해 보니, 우주란 역시 내가 다 알기엔 엄청나게 넓고 지나치게 복잡하다는 결론 뿐이었다. 그러나 그러면 좀 어때서? 코넬에서 응용수학을 가르치고 있는 스티븐 스트로가츠 역시 말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여전히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반딧불이부터 미사일 공격까지

 

   목차를 훑으며 가장 흥미있어 보이는 제목을 고른 게 스티븐 스트로가츠의 '반딧물이가 뭐 중요하다고'였다. 이 장은 스티븐 스트로가츠가 자신의 어린시절과 학창시절을 익살스럽게 소개하며 자신이 현재 연구하는 분야에 왜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아가 그가 그렇게 발견한 '동기화'라는 현상이 어떻게 자연계 곳곳에 적용되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무수한 존재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발적 질서를 찾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의대전단계 과정을 들으며 힘들었다는 언급을 보고 순간 나와 정반대의 길에 서있는 사람이 아닌가 잠시 뜨끔했지만, 오히려 어떤 학문에 순수한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에게 다른 학문은 무척이나 어렵고 지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온 마음으로 이해하는 그를 보니 이 두꺼운 책 속에서 이해받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생물학을 공부해서인지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예시를 통해 동기화를 설명하는 그의 눈높이 설명에 나 역시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이라크의 위성유도무기부터 난자를 향해 헤엄쳐 가는 정자, 뇌의 간질발작까지 모든 현상에 통용되는 한가지 설명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게 놀랍고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책을 덮을 때쯤에는 그가 케임브리지의 서점에서 발견했다는 아서 윈프리의 '생물학적 시간의 기하학'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몇년간 관찰한 자기 어머니의 월경주기를 기하학적으로 분석하는 사람이라니, 그런 사람의 책을 그냥 넘기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다.


작은 우주를 만나보자


   질문을 쪼개서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는 데 도움을 줄 또 다른 힌트는 관찰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창밖으로 눈을 돌리면 무엇이 보이는가? 여기서 우리가 정말 놀라워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가 본다는 사실 그 자체다. 이것은 밤하늘이 밝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만큼이나 놀랍다. 밤하늘이 밝지 않은 이유라니,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어디 있나 싶겠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이것은 정말 심오한 질문이다. "왜 우리의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 별이 존재하지 않을까?" 이와 비슷한 질문으로 이런 것이 있다. "우주는 왜 그렇게 클까?" 기초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우주가 그토록 크다는 것은 정말 너무나 놀라운 사실이다. 우주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작아지지 않기 위해서는 수많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우주가 커지기 위해 일어나야 할 일 중 하나는 바로 텅 빈 공간의 에너지가 작아도 아주 작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저 창문을 열고 몇 킬로미터 밖을 내다보는 행동 자체가 텅 빈 공간의 에너지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작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험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정도로 작은가 하니 0.000 다음에 0이 수십 개나 더 붙은 다음에 1이 나와야 한다. 그냥 창밖을 내다보는 것만으로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 p. 393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수백 년 동안, 우리는 그다지 많은 것을 알지 못한 채 지냈다. 그러다 케플러, 코페르니쿠스, 뉴턴이 자신이 본 것을 수학을 통해 설명하고 나서야 위대한 '이해의 시대'가 열렸다. 특정 부류의 수학을 통해 이런 문제들을 풀 수 있었던 것이다. 맥스웰 방정식, 열역학, 양자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리법칙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준 모든 수학에는 완벽하고 철저한 풀이법이 알려진 특정 부류의 수학 문제가 동원된다. 바로 선형적인 문제(linear problem)들이다. 우리가 비선형적인 문제(nonlinear problem)에 부딪히기 시작한 것은 불과 지난 몇십 년 전부터다. 물론 우리는 이런 문제 중에서 겨우 서너 개의 변수를 사용하는 가장 작은 범주의 문제들만 이해하고 있다. 이것이 혼돈이론(chaos theory)이다. 뇌처럼 변수가 수백 개, 수백만 개, 수십억 개로 늘어나면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런 문제들이 바로 복잡계가 다루어야 할 것들인데, 우리가 이런 문제들을 이해하게 되기까지는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까마득하게 많이 남아 있다. 이것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할 수는 있지만, 사실 이것은 그냥 구경만 하는 것과는 별 차이가 없다. 우리는 여전히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 pp. 473-474


북폴리오 2016 서포터즈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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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아주 가볍게 - 과체중 인생, 끝내기로 결심했다
제니퍼 그레이엄 지음, 김세진 옮김 / 더난출판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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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에세이를 읽으며 작가와 사랑에 빠지는 경험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마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모두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제니퍼 그레이엄의 이야기는 너무도 매력적이고,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녀의 글솜씨는 더더욱 그렇다. 번역을 한번 거쳤다 해도 한때는 무척 아팠을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털어놓는 그녀의 문장들은 반짝반짝 빛이 난다. 아마 이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1분도 채 되지 않아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될거라고 확신하며 책을 읽었다.

   아이 넷을 키우는 이혼녀, 자유기고가, 당나귀 두 마리와 고양이 두 마리와 보더콜리 한 마리, 그리고 70kg의 몸무게. 그것이 제니퍼가 스스로를 소개하는 방식이다. 그런 그녀의 이야기는 열두살 때부터 시작된 끊임없는 다이어트의 연속에 관한 것이다. 더불어 달리기에 진심으로 중독된, 내 다리로 땅을 딛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 순간을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것은 자신을 정확히 들여다보고 가장 아픈 순간에도 스스로를 다독일 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가볍게 아주 가볍게'는 간단하게 말해서 뚱뚱한 사람이 달리기를 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물론 이 간단한 설명조차도 여러 문제에 봉착한다. 그녀가 에필로그에서 밝히듯 어떤 사람들은 167cm에 글을 연재할 당시 67kg였던 그녀의 몸무게를 뚱뚱하다고 부를 수 없다는 지적부터 시작한다. 늘 뚱뚱한 몸 때문에 고민하며 살아온 그녀는 이제 '충분히 뚱뚱하지 못한' 것까지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뚱뚱함은 제니퍼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상대적인 것이고, 사춘기가 오기 훨씬 전부터 몸매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었던 사람에게 '충분히 뚱뚱하지 않다'고 비난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뚱뚱한 사람이 달리기를 하는 이야기. 대개의 사람들은 거기에서 다이어트 성공이나 콤플렉스 극복 같은 행복한 결말을 떠올린다. 이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이 맞다. 하지만 제니퍼가 날씬해져서 3호 사이즈의 원피스를 입을 수 있게 되어서도, 혹은 살이 빠지지는 않았다 해도 몸매에 대한 콤플렉스를 완전히 떨칠 수 있게 되어서도 아니다. 책을 쓰는 시점에도 여전히 그녀는 자신의 그림자에 깜짝 놀라고, 전신거울 앞에 서는 게 불쾌하고, 스스로를 뚱뚱하다 여긴다. 때로는 그것이 그녀를 위축시키기도 한다. 하프 마라톤을 뛴 다음날에도 몸무게가 3키로나 늘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 그녀는 충격 없이 받아들인다. 그녀가 행복한 이유는 달리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달릴 수 있는 한 제니퍼는 행복한 사람일 것이고, 그렇기에 그녀는 계속 달린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아주 완벽한 해피엔딩이다.

   그 사실이 힘을 준다. 제니퍼의 몸무게가 '가볍게 아주 가볍게' 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은 그녀의 인생에 아무 타격을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그녀는 스스로에 대해 뚱뚱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다. 그 말은 여전히 어떤 저주보다도 살벌하게 그녀의 마음을 괴롭힌다. 우리는 다 그렇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혹은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에만 존재한다). 어릴 적 우리를 아프게 했던 말들은 다 자란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로 듣기 괴롭고, 세상에는 죽어도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그렇다 해도, 그 모든 걸 끌어안고도 제니퍼처럼 사랑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다. 그것은 '가볍게 아주 가볍게'가 주는 가장 행복한 메시지다.


러너스 하이

 

   러너스 하이는 달리기를 할 때 기분이 좋아지는 걸 일컫는 용어다. 주기적으로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러너스 하이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이의 과학적 근거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실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달릴 때 체내에서 엔돌핀이 팡팡 솟구친다는 이야기도 사실은 검증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과학적으로 어떨지는 몰라도, 아무튼 대다수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러너스 하이는 실재한다. 달리기 초반의 괴롭고 힘든 순간들이 지나고 나면 어느 순간 숨이 차고 다리가 터질 듯 아파도 자꾸 더 뛰고만 싶은 그런 기분이 드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우리를 계속 달릴 수 있게 한다. 불가능한 거리일지라도, 도전할 수 있게 한다. 준비도 없이 하프 마라톤을 뛰었던 제니퍼 그레이엄처럼.

   어쩌면 산다는 것도 그렇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살아가는데에도 러너스 하이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계속 달려야만 하는 삶은 아마 변함없이 고단하고 힘들겠지만, 어느 고비를 넘어서면 머릿속을 치고 들어오는 어떤 기분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인지도. 제니퍼에게는 달리기가 그 역할을 했다. 그녀처럼 각자 자기 인생이라는 레이스의 러너스 하이를 발견하는 것은 어쩌면 무척 중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제니퍼의 멋진 문장들

 

   달리기에는 출발점과 결승점이 있다. 그러나 주자들 사이에는 그것 말고도 다른 선이 있다. 경기에 참가하지 않아도 예외는 아니다. 바로 '절대 옛날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라는 선이다. 그 선을 넘은 이상 감옥에 가거나, 식물인간이 되거나, 죽기 전까지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게 된다. 나는 달리기를 시작하고 1년쯤 지났을 무렵 그 선을 넘었다. 신기하고도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 p. 65


   임신을 할 때마다 특정 시간에 먹어야 하는 몇 가지 음식이 있었다. 갤런이 뱃속에 있을 때는 오전 9시부터 10시 사이에 맥도널드에서 파는 소시지 에그 플래터를 먹었다. 캐서린을 임신했을 때는 이른 오후마다 버섯을 곁들인 중화풍 닭요리를 먹었다. 나는 자궁이 내리는 명령에 복종했다. 그래야만 무고한 나무덤불에 토하지 않을 것이었다. 여기를 빌어 말하건대, 당시 설리번 아일랜드 타운 공원에서 풍경을 즐기던 죄 없는 이들에게 오래전부터 미뤄왔던 용서를 빌고 싶다.

- p. 75


   입덧 때문에 몸무게가 좀 줄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다. 그게 아니더라도, 적어도 임신할 때마다 30킬로그램씩 늘어나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하겠지. 천만의 말씀. 나는 살찌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

- pp. 75-76


   나는 전문가들의 조언에 따라 준비 계획을 짰다. 열심히 연습한다. 천천히 몸을 만든다. 매주 달리는 거리를 10퍼센트 이하씩 늘려나간다. 하하하! 이런 충고를 하는 전문가들은 아마 애가 없겠지!

- p. 95


   달릴 때의 내가 진정한 자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걷기에도 장점은 있지만, 달리기가 더 좋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달릴 수 있으며, 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은 비록 말은 못하지만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무신론은 치유할 수 있지만, 무지외반증은 평생 안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시간 동안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은 정신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셀러리보다 아이스크림이 몸에 좋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 둘을 가장 친한 친구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가 꽉 찬 상태에서는 황홀감을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칠 때까지 움직이면 불면증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애들이 행복하게 잘 자라는 가정에서 이혼은 예외 없이 잘못된 선택이며, 결혼에는 중독이나 남용 따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바깥에서 들이마시는 공기가 더 좋다고 생각한다. 달리기는 효과적이라 생각한다. 프리는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 pp. 343 - 344


   '양은 뚱뚱하지 않아. 푹신푹신한 거야.'

   뭐, 양은 뚱뚱하긴 하지. 하지만 호수를 달릴 수는 있어. 물에도 둥둥 뜰 수 있고. 이 세상에 좀비의 재앙이 닥쳐 지구상에 먹을 것이 없어지면 동족을 찾아 나서리라. 우리는 최후의 순간까지 저장지방의 힘을 빌려 살아남으리라. 우쭐거리며 폐허 사이를 걷고, 쓰레기를 치우고, 좀비를 없애고, 지구를 되찾으리라. 우리 뚱보들이 이 모든 것을 해내리라.

   그나저나, 푹신푹신하다는 것은 좀 과장된 표현이다.

- p. 357


   오늘은 70킬로그램으로 복귀했다.

   그래도 위스키 피칸 아이스크림이라면 1킬로그램과 바꿀 가치가 있다.

- p. 370


written by. 가비

* 더난프렌즈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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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미스터리 스토리콜렉터 39
리 차일드 외 지음, 메리 히긴스 클라크 엮음, 박미영 외 옮김 / 북로드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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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추리소설가협회의 창립 70주년을 기념하여 발간된 이 추리소설 앤솔러지는 그야말로 뉴욕을 통째로 씹어삼킨 느낌이다. 제각각 뉴욕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협회 소속 작가들이 뉴욕의 특징적인 장소 하나씩을 골라 거기에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낸 작품 17편이 실려있다. 더불어 각 단편마다 해당 장소의 간략한 지도와 소개, 그리고 그 장소를 강렬하게 표현하는 흑백사진이 더해진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정말 뉴욕 한복판을 거닐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나는 2012년의 첫날을 뉴욕에서 맞았다. 낯설었던 필라델피아에서 반년을 보낸 후 가족이나 다름없던 룸메이트가 막 텔아비브로 돌아간 후였다. 나는 외로움이 싫었고, 미국도 싫었고, 그저 하루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뉴욕에서 2주나 지내도록 스케줄을 짠 과거의 내가 정말이지 미웠고, 여행 즐겁게 하라며 먼저 돌아가는 친구들이 너무도 부러웠다. 그렇게 기대나 설렘 없이 뉴욕에 와서일까, 나는 별다른 계획없이 14일간 매일 뉴욕의 거리를 쏘다녔다. 2주간 신세를 진 친구의 집을 나서 방향을 정하면 그저 한없이 걸어가곤 했다. 그러다 뉴욕의 랜드마크를 마주하면 사진을 찍기도 하고, 미술관을 발견하면 들어가서 구경하고, 어느 한국 블로그에서 스치듯 봤던 맛집 간판이 눈에 들어하면 사람들이 제일 많이 시키는 메뉴를 시켜 먹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지내면서 뉴욕이 점점 좋아졌다. 매일 걸으며 익숙해진 거리가 정겨웠다. 이 길을 따라 가면 모퉁이에 플랫아이언이 버티고 있고 저 사거리를 넘어가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보일 거라는 걸 몸이 기억할 즈음,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며 나는 내가 뉴욕을 평생 좋아하게 될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일까, 이 책을 읽는 내내 오래된 앨범을 뒤적이는 기분으로 즐겁고 들떴다. 뉴욕의 특징적인 장소 열일곱 군데라 해서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 뻔한 곳들만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의 지명들이 튀어나와 나를 더욱 신나게 했다. 친구의 집이 있던 바로 그 동네, 알파벳 시티의 이름을 목차에서 확인했을 때에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리고 책을 읽을수록 어째서 이토록 많은 기억이 생생히 살아나는지, 어째서 뉴욕이 과거에 주었던 행복감에 흠뻑 심취할 수 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분명 이 이야기들을 쓴 작가들도 나만큼 뉴욕을 사랑하는 게 분명했다. 자신이 고른 장소를 가장 특별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그 곳의 아주 작은 비밀도 놓치지 않으려는 치밀한 다정함이 느껴졌다. 이 뉴욕 앤솔러지에서는 그렇게 70년 어치의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뉴욕을 즐겁게 방문했던 사람이라면 나처럼 추억에 빠져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반대로 뉴욕을 방문할 예정인 사람이라면 어떤 여행서보다도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더불어 이야기 자체도 미스터리로서 훌륭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17개의 이야기가 있다 보니 제각각 작품색이 달라서 골라 읽는 재미도 있다. 장소만큼 각 단편의 시대적 배경도 달라 2차 세계대전 중 배급제가 실시되던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아름답고 세련된 현재의 어퍼 웨스트 사이드까지 이야기를 타고 넘나들다 보면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마저 든다. 여러모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책이다.


뉴욕이라는 도시 

 

   미국인이 자랑하는 빅애플, 공연문화가 태동한 브로드웨이와 전세계 증시를 쥐락펴락하는 월스트리트가 있는 곳, 여신이 굽어보는 대도시. 뉴욕은 특별한 곳이고, 그러다 보니 때로는 뉴욕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포장되고 만다. 유명 백화점이 들어선 5번가와 매년 마지막날 엄청난 인파가 몰려 카운트다운을 지켜보는 화려한 타임스퀘어, 녹음이 우거진 센트럴 파크. 그러나 관광지 안내도에는 등장하지 않는 뉴욕의 수많은 거리에서는 그렇게 늘 아름답지만은 않은 이야기를 간직한 사람들이 제각각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중 누군가는 비밀을 감추고, 누군가는 폭력을 휘두르며, 누군가는 가난과 싸운다. 그것도 뉴욕이다. 아름답기 위해 그조차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뉴욕 미스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 이야기들을 통해 리틀 이탈리아는 뉴욕 3대 피자 맛집 중 한 곳이 있는 동네이기도 하지만 언젠가 마피아들이 활개를 치던 구역이라는 것을, 관광객들의 사진 명소가 된 월 스트리트의 황소 동상 앞에는 구걸로 하루하루 연명하는 노숙자들도 모여든다는 사실을, 헬스 키친은 예술의 거리로 변모하기 전 비극적인 사연이 교차하는 장소이기도 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렇기에 책을 덮고 나면 뉴욕의 그림자를 들여다본 듯한 기분이 든다. 카메라를 목에 걸고 한 손에 지도를 든 채 매그놀리아 베이커리 앞에 줄을 설 때에는 절대 보지 못하는 것을. 그렇게 책을 덮고 나면 어쩐지 뉴욕에 한 걸음 더 다가간 것만 같다. 조금 더 가까이, 전에 알지 못했던 방향으로.


아주 소소한 기억 하나

 

   센트럴 스테이션에 도착하여 택시를 잡아타고 목적지로 알파벳 시티의 애비뉴 D를 이야기했을 때, 택시기사는 진지한 얼굴로 나에게 애비뉴 D의 D가 어디서 온 건지 아느냐고 물었다. 처음 가보는 곳이라고, 잘 모른다고 대답하자 "D for drugs (마약의 D)"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택시에서 내려 친구의 집 문을 찾기까지 한참이 걸렸는데, 문을 포함한 그 건물 외벽 전체가 그래피티로 덮여 있어서였다. 그 집에서 묵은 나와 아이들은 곧 정을 붙인 뉴욕을 밤늦은 시간에도 거리낌없이 쏘다녔지만 정작 집 근처인 알파벳 시티에서는 늘 바짝 긴장하곤 했다. 저녁 9시만 되어도 집에 오는 길에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면 집까지 사정없이 달렸다. 알파벳 시티는 관광객들이 절대 발을 들이지 않는 동네였다. 우리 사이에는 할렘도 여기보다는 나을 거라는 말이 농담처럼 오갔다. 그래도 우리는 거기에서 2주를 아주 잘 지냈다. 어떤 범죄에도 휘말리지 않고.

   '뉴욕 미스터리'에 실린 단편들이 그려낸 각 장소에 대한 기억은 대개의 사람들이 가진 기억과는 사뭇 다르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백발 할아버지가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고 있어야 할 것만 같은 센트럴 파크에서는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화려한 중심가로 큰 백화점이 있는 유니언 스퀘어에서는 젊은 여자의 시신이 발견된다. 타임 스퀘어에서는 전직 FBI 요원이 비겁한 사기꾼을 총으로 쏴 죽이고, 부유한 동네인 어퍼 웨스트 사이드와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서도 가족간의 비틀린 애증이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런데 유일하게 알파벳 시티만은 소설 속에서도, 내 기억 속에서도 참으로 일관된 모습을 보였다. 골목골목 크고 작은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곳. 그럼에도 그 거리에서 아이들은 뛰어놀고 연인들은 데이트를 즐긴다. 어느 모퉁이에는 (우리가 처음 봤을 때 놀랐을 만큼) 아기자기하게 예쁜 카페도 있고, 애비뉴 B 쯤에는 작은 공원도 있다. 알파벳 시티는 이름만큼 동화 같은 곳은 아니어도 제 나름의 이야기와 매력을 갖춘, 무엇보다 참으로 뉴욕다운 곳이었다.

   이 소설을 쓴 작가들은 제각각 이런 이야기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 동네에 대한 남다른 애착, 잠시 들렀다 지나쳐 가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어떤 것. 그걸 풀어내기 위해 그 장소를 고르고 이야기를 적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작가라는 직업이 새삼 부러워졌다. 어떤 곳에 대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간직할 수 있다는 건, 무척 멋진 일이니까.


written by. 가비

* 북로드 2016 스토리콜렉터스 활동으로 책을 제공받아 쓴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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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경의 아이 놀이 백과 : 5~6세 편 - 아동발달심리학자가 전하는 융복합 놀이 100 장유경의 아이 놀이 백과
장유경 지음 / 북폴리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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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아과 실습을 돌며 처음 발달단계를 외웠던 기억이 난다. 4개월에 아이는 목을 가눌 수 있고 12개월에는 혼자 일어설 수 있다는, 그래서 100일 사진을 찍고 1살 때 돌잔치에서 돌잡이를 한다는 설명이 생생하다. 그때는 그게 신기했는데 실제 자라는 조카를 보며 그 단계가 들어맞는다는 걸 확인하고는 더 놀랐었다. 하긴, 수많은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관찰하고 기록한 뒤 분석하여 만든 게 그 발달표였을 것이다.

   가장 신기했던 건 하도 내용이 많아 시험 전날까지도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던 그 발달표를 소아과에 오는 아기 엄마들은 줄줄 외운다는 것이었다. 배정받은 환아 면담을 갔다가 발달 단계를 틀려 보호자에게 그것도 제대로 모르냐고 면박을 당했다는 친구도 있었다. 아이가 좀 늦는 것 같다며 걱정이 되어 외래에 오는 보호자들은 정말로 9개월인데 아직 이걸 안해요, 15개월인데 아직 저걸 못해요, 하는 구체적인 고민을 안고 오곤 했다. 집에 돌아와 이야기하니 엄마는 웃으며 당연한거라고 설명했다. 내 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게 눈에 자꾸 밟히는데, 어떻게 그걸 못 외우겠냐고.

   5-6세는 발달표 상으로 줄넘기를 하고, 삼각형을 그리고, 숫자를 열까지 셀 줄 알고, 혼자 옷을 입고 벗는 나이다. 초등학교에 가기 직전의 나이, 유치원에 다닐 나이기도 하다. 한창 활동 범위가 넓어지고 하고 싶은 게 많아지며 스스로 해내는 일도 늘어나지만 동시에 사고를 치는 게 일상다반사여서 요즘은 미운 일곱살이 미운 다섯살로 당겨졌다는 말도 흔히 한다. 이 책은 그런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아이와 즐겁게 함께할 수 있는 놀이를 가르쳐준다. 그냥 재미있기만 한 놀이가 아니다. 유치원 교육과정인 누리과정에 맞춰 각 연령에 해당하는 발달과제를 익힐 수 있도록 고안된 체계적인 프로그램이다. 대근육 및 소근육 운동, 언어, 추론과 탐구, 사회성 및 감성, 창의 등 다양한 영역에 걸친 100개의 놀이는 아이의 발달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가 막막한 부모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아이를 가진 어머니는 전문가가 된다. 수없이 많은 육아서적을 읽고, 인터넷에서 정보를 교환하고, 관련 강좌를 수강하기도 하고, 어머니의 어머니에게서 오랜 지혜를 물려받기도 한다. 때로는 소아과 전문의보다 아이의 발달에 대해 더 세세하게 알고 있는 어머니를 맞닥뜨리게 되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발달 이론이란 건 어렵다. 5세는 줄넘기를 하고, 삼각형을 그리고, 숫자를 열까지 셀 줄 알고, 혼자 옷을 입고 벗는 나이지만 동시에 수많은 다른 일들을 하는 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지켜보고 책임지는 건 궁극적으로 아이 곁을 지키는 양육자다. 아이의 24시간을 감당하기도 벅찬 사람에게 대근육 운동, 사회성 발달, 언어추론능력 같은 용어는 와닿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거기서 이 책은 장점을 발휘한다. 매 놀이마다 쉽게 풀어쓴 관련 이론에 한 귀퉁이를 할애한다. 때로는 조기교육의 장단점을, 때로는 어릴 적 운동 참여와 성인이 된 후 신체능력의 연관성을, 또 때로는 부모-자녀 관계의 중요성을 깔끔하게 설명해준다. 이론으로 일관하는 아동발달 입문서는 지루할 수 있어도 귀여운 삽화가 가득한 놀이책에 한 문단씩 짤막하게 소개된 내용은 읽기에 무리가 없다. 아마 이 책을 통해 아이와 함께 시작할 만한 재미난 놀이를 찾고 있는 어머니의 눈에도 이런 설명들은 쏙쏙 들어올 것이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놀이라는 건 모름지기 누가 직접 하는 걸 보는 게 배우기에 가장 이상적이다.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말이나 글로는 설명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함께 곁들여진 삽화가 이해에 큰 도움이 되기는 해도, 몇 번을 반복해 읽으면서도 어떻게 하는 건지 와닿지 않는 놀이도 몇 개 있었다. 제작비용이 대폭 상승하겠지만 놀이 시연 동영상 같은 게 함께 제공된다면 아이와 놀이를 하려는 부모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사실 육아책을 읽기에 내 나이는 너무 젊었다. 아니, 나이의 문제보다는 내가 애를 키우는 입장이 아니라는 게 더 크게 작용했다. 그래도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조카 삼남매 생각이 새록새록 났다. 셋이 모여 이 책에 소개된 놀이를 하는 녀석들을 생각하니 즐거워졌다. 이 책은 내 서가에 남겨두기보다는 막 다섯살이 된 둘째와의 전쟁에 돌입한 언니에게 선물할 예정이다. '미운 다섯살'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언니에게 이 책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아이를 키우는 건 힘든 일이다

 

   이미 소아과를 겪은 후여서 다섯살 아이가 치뤄야 하는 온갖 발달과제들은 그렇게 놀랍지 않았다. 놀라웠던 건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한, 요즘 아이들이 그 발달과제를 이루기 위해 해내는 일들이었다. '도와줘요. 장 박사님!' 코너에 소개된 한 사연에서 어머니는 다섯살 아이가 책을 좋아하는데 자꾸 혼자만 책을 읽어서 걱정이라고, 독서토론논술에 보내야 하는 게 아닌지 고민된다고 쓰고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기 전에는 논술이 뭔지도 몰랐던 나에게는 가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둘째 조카 또래의 아이들이 모여 책을 읽고 토론을 한다니, 일찍 태어나기를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도 잠깐 했다. 다섯살의 나는 아마 비 오는 날 노란 장화를 신고 외출하여 달팽이를 잡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였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한국의 다섯살은 피겨 스케이팅을 배우고, 영어 1:1 튜터링을 받고, 독서토론논술에 참가하고, 인적성검사를 받는 것 같다. 아이들이 전부 슈퍼베이비가 되어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 보면 그건 부모가 아이에게 해주어야 하는 게 그만큼 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의 부모님은 자타공인 양육의 달인이었지만 그렇다고 나의 20년 후 미래를 고민하며 영어유치원을 보낼지, 1:1 튜터링을 받을지, 그룹과외를 할지 정할 필요는 없었다(당시에는, 특히 독일에는 이 중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의 젊은 어머니들은 아이의 행복한 삶을 위해 어느 때보다 많은 생각을 하고,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 같다. 아이를 키우는 건 늘 힘든 일이었지만, 어느 때보다 힘든 시대가 된 것 같다고 문득 생각했다. 


이 책을 추천합니다!

 

- 아이가 특정 영역의 발달이 느린데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고민될 때

- 아이와 함께 놀고 싶은데 어떤 놀이를 해야 할지 잘 모르겠을 때

- 스마트폰과 컴퓨터가 이미 익숙해져버린 아이에게 아날로그 세계의 재미를 보여주고 싶을 때

- 발달이론이 궁금한데 개론서가 너무나도 지루할 때

- 아이 교육에 고민이 많은데 다들 나처럼 힘든 건지 확신이 없을 때

- 육아에 지친 지인에게 센스 있는 선물이 하고 싶을 때



written by. 가비

북폴리오 2016 서포터즈 활동으로 직접 구입하여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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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바 1 - 제152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4
니시 카나코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아쿠쓰 아유무는 이란에서 '세상에 왼발부터 등장했다'. 어머니를 빼다 박은 귀여운 외모에 어려서부터 본의 아니게 깨우친 기척을 지우고 조용히 살아가는 기술로 그의 어린시절은 평탄하다. 늘 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아이의 가장 친한 친구 자리를 손에 넣고, 여자아이들은 아유무가 지나갈 때 뒤를 돌아보며, 주변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그런 아유무에게 유일한 걸림돌은 아쿠쓰가의 여자들이다. 한번 정한 의견은 절대 굽히지 않고, 고집이 세며, 어머니로서의 자신보다는 여자로서의 자신이 우선시되는 사교계의 꽃 같은 어머니. 어머니를 전혀 닮지 않은 외모로 어릴 때부터 크게 사랑받지 못한, 그래서 온몸으로 '나 좀 봐줘!'라고 소리를 지르는 듯 기행을 일삼는 누나. 두 사람은 아유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집안 전체를 흔들 만한 갈등을 반복하고, 그 사이에서 아유무는 점점 없는 듯한 아이가 되어간다. 누구의 마음도 상하게 하지 않도록, 어떤 갈등에도 불을 지피지 않도록, 자기 의견을 죽이고 자기 색깔을 지운 채 조용히 주변에 녹아드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어린시절의 아쿠쓰 남매를 보면 그들의 운명은 예견된 것처럼 보인다. 비록 부모님의 이혼이라는 공통의 상처를 겪고 가장 행복했던 카이로 생활을 뒤로 한 채 일본으로 돌아왔지만, 아유무는 여전히 학교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반면 누나 다카코는 돌아와서도 따돌림을 당하고, 결국 학교에 가지 않게 되며, 종국에는 고등학교 진학을 거부한다. 그리고 사토라코몬사마 등 여러가지를 믿다가 배신당해 상처받는 일을 반복하며 점차 자신의 안으로 틀어박힌다. 그런데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다시 오사카의 집에 모인 남매의 모습은 예상 밖이다. 유일한 안식처였던 야다 아줌마의 죽음 후 유언대로 아줌마의 유해를 뿌리기 위해 전세계를 여행하며 스스로 믿을 것을 찾았던 누나는 결혼하여 돌아온다. 그것도 무척 건강하고 안정적인 모습으로. 한때 자유기고가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던 아유무는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 어느 시점부터 사회생활을 완전히 포기한다.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혐오에 빠져 어째서 자기 인생이 이렇게 되었는지, 같은 생각을 반복할 뿐이다. 머리숱이 적고 배가 나왔으며 안정적인 수입이 없어 애인에게 기대 살아야 하는 삼십대 중반의 남자. 샌프란시스코에서 남편과 함께 생활하며 아침마다 요가를 하는 날씬하고 당당하며 사랑받고 있음을 온몸으로 내보이는 삼십대 후반의 여자. 아유무에게는 누나와 자신의 이 간극이 무엇보다 견디기 어렵다.

   '사라바'는 아주 어린아이였던 아유무가 사십을 눈앞에 둔 아저씨가 되기까지를 그린다. 그에게 세상이 '유독 상냥했'던 시절부터 그가 완전히 혼자가 되어 도서관에 고립되는 때까지, 그리고 카이로에 돌아가 다시 일어설 결심을 하기까지 조용히 그의 뒤를 밟는다. 아유무의 인생에는 풍파가 많다. 어릴 때부터 기 센 여자들이 불꽃 튀기며 싸우는 한가운데 놓여 있었던 데다 아버지는 그런 그를 남자의 세계로 끌어들여 보호하기에는 지나치게 다정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주재원 생활로 어릴 때부터 이란, 일본, 이집트 같은 나라들을 떠돌며 생활한 데다 결국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 없는 생활을 하게 된다. 아이들을 맡은 어머니는 아이를 잘 양육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자신의 행복에 집착하고, 누나는 별다른 의지가 되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아유무는 집을 벗어나겠다는 일념만으로 공부해서 사립고등학교에 가고, 도쿄의 대학에 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새 인생을 찾은 것처럼 보인다.

    아유무는 피해자처럼 보인다. 실제 야다 아줌마는 아유무에게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야 했다'고 말하기도 하고, 내내 독자의 눈앞에 그려지는 것은 안정감이라고는 찾기 힘든 가정환경에서 애써 자신의 자리를 만들려고 고군분투하는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그저 어린시절만이 아니라, 일찍 겪은 가족의 상황은 아유무의 성격 자체를 형성한다. 누나처럼 지나치게 튀어서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면서도, 누나처럼 따돌림당하지 않기 위해 늘 가장 인기있는 곳을 파고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아유무는 살면서 한번도 강하게 자기 의견을 주장한 적이 없다.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은 속으로 삭이기에 바쁘다. 어리광도 계산을 해서 피운다. 철이 들기 전부터 어머니의 관자놀이를 보고 어머니가 화난 정도를 가늠하는 법부터 배운 아이인 것이다.

   그런데 다 큰 어린이 되어 오사카의 집에서 만난 아유무에게, 함께 산책을 가자고 권한 누나 다카코는 오히려 '믿을 것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마치 지금껏 아유무의 인생이 꼬인 것이 아유무 본인의 탓이라는 듯. 너는 늘 너를 남과 비교하기 바빴다고, 이제는 스스로 믿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누나의 말에 당연히 아유무는 분노한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삶을 살게 된건지 알기는 하냐고, 미안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퍼붓고 도망치듯 도쿄로 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오면서도 그 말을 했던 순간 누나가 자신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는 느낌에 혼란스럽다. 그리고 드디어 아유무도 스스로 뭔가를 찾아낼 결심을 한다. 세상에 주장할 스스로의 무언가를.

    이 소설은 세상의 아유무들에게 건네는 응원과도 같다. 아유무가 분노하기는 했어도 다카코의 뜻은 아유무를 책망하려는 게 아니었다. 소설 전반에 걸쳐 아유무를 가장 감동시키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 '힘들었겠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네가 뭔가 더 해볼 수 있었던 것 아니냐고 탓하지 않고, 가족들도 사정이 있었을거라고 두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의 괴로움을 인정하는 말. '사라바'는 그런 말들로 가득하다. 네 잘못이 아니야, 많이 힘들었겠다. 소설 내내 누군가 그런 말을 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마지막, 다카코의 강하지만 다정한 목소리를 빌려 '하지만 스스로 믿는 것을 찾아야 한다'고 가만히 이야기한다. 이대로 멈춰서는 안된다고, 자꾸 걸어나가야 한다고. 거기에는 오늘보다 빛나는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살아 숨쉬는 시간 속에서

 

   '사라바'의 가장 큰 장점은 생생함에 있다. 그토록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도 누구 하나 작위적이지 않고 실제 어딘가에서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다. 이란의 하녀 바츨, 운전기사 에브라힘부터 시작해서 카이로에서 만났던 제이납과 야곱, 아유무의 동급생들, 대학에서 들어간 영화 동아리의 구성원들, 스구와 고가미, 아키라와 사치코, 스미에. 거기다 빼놓을 수 없는 아버지 아쿠쓰 겐타로와 어머니 이마바시 나오코, 아유무와 다카코 남매까지. 각 인물이 너무도 정교해서 어느덧 내 자신이 자말렉 지구를 걷고 있는듯, 사토라코몬사마 제단을 앞에 두고 있는듯한 생각이 들곤 했다. '사라바' 속 세계는 실존하고 있었다. 아유무와 스구가 소설을 만났던 세계들이 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때로는 마음이 아팠다. 다카코의 부서진 마음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고 아유무의 표현하지 못한 감정들이 스며왔다. 꼭 아는 누군가의 이야기 같아서 두 사람이 붕괴할까봐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더불어 어머니의 삶도, 아버지의 결심도 나중에 모든 이야기를 들은 후에는 이해할 수 있었다. 때로는 어른도 미숙하다. 아이들의 마음까지 헤아리기엔 내 자신의 일만으로도 벅찬 순간이 있다. 그것이 아이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라고 해도, 십수년이 지나서야 사과할 수 있을 때도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일본 작가가 이란과 이집트에서의 삶을 이토록 생생하게 그려낸 걸까 궁금했는데 작가의 약력을 보고서야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1977년 이란 테헤란에서 태어나 이집트 카이로와 일본 오사카에서 자랐다는 니시 가나코. 어쩌면 그녀에가 아쿠쓰 아유무는 스스로의 분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유무의 주변 사람들도 언젠가 한번쯤 그녀 곁에 있었던 인물들일 수도 있다. 두번째로 카이로에 다녀와 아유무는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지금껏 읽어온 이야기가 바로 그 소설이라고 말한다. 거기에 아유무는 여기에 있는 것 중 일부는, 혹은 전체가 거짓일지도 모른다며 '내게는 누나 따윈 없고 내 부모님은 이혼하지 않았으며 애초에 나는 남자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쓴다. 잠깐 작가 자신의 얼굴을 엿본 듯한 기분이 드는 대목이었다.

   작품을 생생하게 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바로 실제 있었던 사건들을 이야기에 섞어 풀어내는 작가의 능력이다. 이 작품에는 고베 대지진, 사린 살포 사건, 도쿄의 쓰나미, 아랍의 봄 등이 등장한다. 그리고 각 사건은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고베 대지진으로 아유무의 가장 큰 친구이자 살아가는 힘이었던 스구는 깊은 우울의 바다로 빠져들고, 사린 살포 사건 이후 사토로코몬사마교가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되면서 누나 다카코는 다시 한번 산산이 부서진다. 도쿄에 지진과 쓰나미가 덮치며 아유무는 무언가를 할 결심을 한다. 그리고 아랍의 봄은 그에게 다시 이집트를 떠올리는 계기가 된다. 

   책을 덮고 나니 다정하고 외로움 많은 이집트 사람들을 만나러 카이로에 가고 싶어졌다.


사라바!

 

   벚나무 가로수 길을 어머니와 걷는 이 시간은 무척 평온했을 텐데도 나는 멋대로 어머니의 기색에 눌려 긴장하고 있었다. 다양하게 온화한 모습인 다른 가족들을 보고 처음으로 우리가 좀 이상한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보다는 마음속 좀 더 깊은 곳에서 나는,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어떻게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태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내게는 이 가능성 외에 없었다.

- 1권 p. 77


   도라에몽은 비틀비틀 걸으면서 우리를 엘리베이터로 데려갔다. 버튼을 누르고는 후우, 후우 하고 거친 숨소리를 내며 우리를 돌아보고 무슨 말을 했다.

   "뭐라고 한 거야?"

   아버지에게 묻자 "신의 가호가 있기를" 하고 대답해주었다.

   난생처음 듣는 말이었다. 의미는 몰랐지만 아마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서 가장 예쁜 말이었을 것이다.

   - 1권 p. 152


   지금도 기억하는 헤어질 때 하는 말이 있다.

   "사라바(안녕)."

   우리가 헤어지는 것은 늘 우리 플랫 앞이었다. 우리는 손을 들어 "사라바!" 하고 외쳤다. 처음에는 '안녕'이라는 뜻의 아라비아어인 '맛살라마'를 썼다. 그런데 내가 장난스럽게 "맛사라바!"라고 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아라비아어인 '맛사라마'와 일본어인 '사라바'를 조합한 '맛사라바'를 나는 무척 마음에 들어 했지만 야곱은 단순히 '사라바'라고 하는 걸 마음에 들어 했다.

   "무척 예쁜 말이야."

   내가 아무리 '맛사라바'라고 해도 야곱은 완강하게 '사라바'를 고집했다.

   실제로 야곱이 말하는 '사라바'는 아름다웠다.

   마치 '안녕'이라는 의미가 아닌 말처럼 들렸다. 빛나는 가능성을 내포한 반짝이는 세 글자로 여겨졌다.

   어느덧 나도 야곱을 흉내 내어 '사라바'라고 말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사라바'는 '안녕'이라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말이 되었다. '내일도 만나자' '잘 있어' '약속이야' '굿 럭' '갓 블레스 유', 그리고 '우리는 하나야'.

   '사라바'는 우리를 이어주는 마법 같은 말이었다.

   나는 어느덧 야곱이 없을 때도 '사라바'라고 말하게 되었다. 위기에 처했을 때나 뭔가 좋은 일이 있었을 때, 즉 생각이 떠오를 때는 늘 그랬다. 그 세 글자를 중얼거리면 옆에 야곱이 있는 것 같았다. 야곱의 체취를, 야곱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평온하게 해주었다. 그러므로 나는 집 안에서 가장 많이 '사라바'를 입에 담았다.

   '사라바'는 우리만의 말이었다.

- 1권 pp. 256-257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내 특기를 발휘했다.

   내 특기? 그렇다, 단념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껏 초연함에 달라붙음으로써 살아올 수 있었다.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편 어머니는 '아이는 부모가 하는 말을 따르는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은 성격이 잘 맞았던 것이다.

- 1권 p. 291


   "일본으로 돌아가."

   내가 이렇게 말하자 야곱은 걸음을 멈췄다.

   나와 야곱은 보도 한복판에서 잠시 서 있었다. 보도의 포석은 깨져 나가고 잡초가 자라나 있었다. 어디서 흘러온 건지 카이로 거리 특유의 냄새가 우리를 감쌌다.

   야곱은 말을 잃고 있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신이 그렇게 바란다면."

   - 1권 pp. 304-305

   

   아줌마는 다양한 말을 생략했다. 그건 아줌마가 늘 하는 방식이었는데, 나는 그게 기뻤다. 아줌마가 나를 인정해주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 머리로 생각했다.

   뭐든 상관없었다는 아줌마의 그 말 뒤에 있는 의미를.

   믿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상관없었다.

   온갖 사람들의 수많은 괴로움.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것도 있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잔혹한 사건도 있었다. 아마 그런 사람들을 위해 신앙이 존재할 것이다. 우리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 우리들 탓으로 해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일.

   신앙 그리고 종교는 그걸 한 몸에 짊어지는 존재일 것이다.

- 2권 pp. 142-143


   그때 나는 참지 못하고 살짝 떨고 있었다. 그 결과 수백 명을 끌어들여 일대 종교(아줌마는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로서 이 동네를, 그리고 이 지역을 열광시킨 것의 정체가 실은 자토라 고양이의 항문이었던 것이다.

   "뭐든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거야말로 중요했다. 훌륭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이쪽을 두렵게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을 '뭐든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

- 2권 p. 145


   "스스로 자신이 믿을 것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돼."

- 2권 p. 147


   자말렉은 지난 몇 달 사이에 나에게 일어난 일로부터, 그리고 이집트와 일본에 일어난 일로부터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사건 뒤에도 일상이 있는 거라고, 언젠가 어디서 읽은 말을 떠올렸다. 자말렉의 일상은 바로 시간을 이기고 있었다.

- 2권 p. 370


   이집트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냥 모여 있을 뿐이다. 이집트 사람은 외로움을 잘 탄다. 잘못 건 척하며 매일 집으로 전화를 해온 남자를, 공항에서 울며 아들의 여행을 전송하는 가족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히 급진적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혁명에서는 사망자도 나왔다. 하지만 이집트 사람의 기본적인 성격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붙임성 있고 외로움을 잘 타며 금방 흥분하고 곧 잊어버리는 사랑스러운 이집트 사람들.

   나는 나일 강을 바라보았다. 이집트 사람의 성격이 그런 것은 가까이에 세계 제일의 강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나일 강은 역시 고요하고 탁했다.

- 2권 p. 382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믿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계속 살아간다는 것을 내가 믿고 있다는 것이다.

   "사라바."

   이름을 정했다.

   많은 말을 품은 사라바. 많은 시간과 생각을 품은 괴물은 사라바다.

   나의 신은 사라바다.

   - 2권 p. 405


   나는 혼자다. 하지만 나는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다시 만나는 우리는 각자 또 거대한 괴물을 짊어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만난 시간, 만난 사람, 만난 모든 것을.

   거대하고 거대한 괴물을 짊어지고 우리는 다시 강가에 설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거다.

   "사라바!"

   우리는 '사라바'와 함께 살아간다.

   - 2권 p. 406



written by. 가비

* 은행나무 출판사의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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