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가 사라졌다
엠마 힐리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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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세의 모드 할머니는 치매다. 가게에 가는 길에 뭘 사러 가는지 잊어버리기 일쑤에, 딸과 손녀의 얼굴을 못 알아볼 때도 있고, 한번은 집안일을 돌보러 와준 간병인을 강도로 경찰에 신고한 적도 있다. 새로운 기억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흩어지고, 부족한 기억을 메우기 위해 적기 시작한 메모들은 때로는 더 큰 혼란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 와중에 모드 할머니의 기억이 끝없이 붙드는 단어가 있다. 실종. 누군가가 사라졌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 사람을 찾아야만 한다.


치매가 그 어떤 병보다 흔해진 요즘 같은 시대에 어떤 현상으로서의 치매나 특정 대상으로서의 치매 노인을 그린 소설들은 많지만, 엠마 힐리의 '엘리자베스가 사라졌다'는 치매를 앓는 노인의 시점으로 독자를 끌여들여 그들이 보는 세상을 경험하게끔 한다. 밥 먹고 돌아서면 방금 먹었던 걸 잊어버려 자식들이 자기를 굶어 죽인다고 비난한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지만, 같은 사건을 노인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모드 할머니는 정말 배가 고프다. 빵이 든 바구니 위에는 '토스트는 그만'이라는 쪽지가 붙어 있는데, 누가 왜 그걸 적어두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꾸만 화를 내고 잔소리를 하는 딸이나 간병인들은 할머니를 속상하게 할 뿐이다. 그래서 모드 할머니는 은근슬쩍 토스트 한 장을 집어든다. 요리는 안된다고 아무리 들어도 계란 삶는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냄비에 불을 얹는다. 혼자 꿋꿋이 외출을 감행하고 친구의 집을 찾아간다. 똑같은 질문을 수십번 반복하고, 이해할 수 없는 위험한 행동을 시도하고, 때로는 주변 사람들을 골탕 먹이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그 모든 일들이 모드 할머니 자신이 되고 보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생생한 공포다. 기억이 없다는 것, 기억하고 싶어도 잊게 된다는 것, 어느 순간 모든 게 낯설어지고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이 소설은 담백한 문체로 치매 노인이 겪는 일상 속 공포를 고백한다.

보통 치매 환자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건 가장 오래된 기억이라고 한다. 모드 할머니의 기억 역시 끝없이 뒤를 돌아본다. 딸과 손녀의 얼굴이 낯설어질수록 십대 소녀 시절의 일들은 생생히 살아나 모드 할머니를 2차 세계대전 직후의 영국으로 이끈다. 옛 추억 속에서 할머니를 현실 세계로 끄집어내어 행동하게 만드는 건 늘 그녀의 정겨운 친구 엘리자베스다. 엘리자베스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전화도 받지 않고 집에 찾아가도 아무도 없는데다 밥도 잘 안 준다는 엘리자베스의 아들 피터는 뭔가를 숨기는 것만 같다. 모드 할머니의 주머니 속 쪽지들에는 한결같이 '엘리자베스가 실종됐다'고 적혀 있다. 엘리자베스가 사라졌다. 그녀를 찾아 구해낼 수 없는 건 모드 뿐이다. 그런데 사라진 사람이 엘리자베스만이 아니다. 아주 오랜 옛 기억, 그 속에는 어느날 사라져버린 수키 언니가 있다.

그렇게 모드 할머니는 불완전한 기억을 붙들고 두 사람의 행적을 쫓는다. 여행가방 하나만을 남기고 사라진 채 끝끝내 돌아오지 않은 수키 언니,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는 엘리자베스. 자신을 돌보러 와주는 딸 헬런에게 모드 할머니는 끝없이 두가지 말만 반복한다. "엘리자베스가 실종됐어"와 "호박은 어디에 심는 게 좋을까?"는 이제 헬런을 미치기 일보 직전으로 만드는 신호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럼에도 모드 할머니는 고집스레 물고 늘어진다. 경찰서를 찾고 신문에 실종신고를 내고 끝없는 위험을 감수하며 엘리자베스의 집을 찾는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닮은 기억 속에서 수키 언니의 자취를 더듬는다.

치매는 고통스러운 병이다. 병을 앓는 당사자에게도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모드 할머니의 입장이 되어 할머니의 행동을 이해하게 된다 해도 딸 헬런이 할머니를 위해 얼마나 큰 수고를 감수하는지를 부정할 수는 없다. 끝없이 사고를 치는 할머니 때문에 헬런이 화를 내게 되는 것도, 그렇게 화를 내면서도 끝끝내 할머니를 챙기는 것도 어느 순간에는 먹먹하게 다가온다. 모드 할머니는 헬런이 자기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비난하지만, 자기 기억에 자신이 없기는 할머니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이야기의 큰 줄기를 이루는, 실종사건을 쫓는 스릴러적 요소 외에도 작가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치매 노인과 그 가족의 삶에 동반되는 고충을 어루만진다. 모드 할머니와 헬런, 그리고 손녀 케이티의 일상 속 갈등과 화해를 통해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담담히 감싸준다.

병원에 가서 입원한 엘리자베스를 만나고 돌아오던 날, 마침내 헬런은 모드 할머니의 횡설수설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진실을 발견한다.


   "그 얘기는 아까 다 했잖아요. 그런데 엘리자베스가 아니죠?"

   "엘리자베스는 실종됐어."

   이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틀렸다는 건 알겠는데 원래 이름이 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헬런이 차를 세운다.

   "엘리자베스 아줌마네 정원에 누가 묻혀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수키 이모요?"

   수키. 바로 그 이름이다. 수키. 수키. 가슴 근육이 조금 편해진다.

   "엄마?"

   헬런이 심하게 더듬거리며 핸드브레이크를 위로 비틀어 올린다.


마침내 모드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비밀의 파편을 찾아낸 헬런이 정원을 파헤쳐 백골을 발견했을 때 어쩐지 소름이 끼쳤다. 생각해 보면 답은 그것 뿐이었는데 400여 페이지에 걸친 이야기를 따라가며 어느새 나도 함께 모드 할머니의 엉킨 기억 속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담벼락에 조약돌을 붙인 집, 호박, 프랭크 형부, 수키 언니, 더글러스, 엘리자베스, 실종, 실종, 실종... 모든 단서는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그 길을 찾는 게 왜 그리도 어려웠는지. 무엇보다도 혼란스러운 기억 속에서 필사적으로 단서들을 붙든 할머니의 마음이, 미리 알았다면 '나도 그 나무 상자에 웅크리고 들어가 70년 동안 언니 곁에 있어줬을'거라고 이야기하는 할머니의 짙은 그리움이 아프도록 생생했다. 70년이 지나도 바래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70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이제 와서 수키 언니를 찾는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 언니는 이미 죽었고, 범인 역시 세상을 떠났을지 모를 일이다. 결국 모드와 수키의 부모님은 어떤 진실도 알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리고 모드 할머니의 치매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엘리자베스의 장례식에서도 여전히 모드 할머니는 엘리자베스가 실종되었다고 걱정한다. 그러나 그러면 좀 어떤가. 희미해지는 기억 속에서도 모드 할머니는 진실을 붙들고 살아갈 것이다. 헬런과 케이티와 때로는 투닥대고 때로는 서로를 부둥켜 안고 울고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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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시볼
브래들리 소머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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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금붕어의 기억력은 3초라고 말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금붕어 '이언'은 자신에게 주어진 단 3초의 시간동안 일생일대의 결정을 한다. '생각은 줄이고 행동하라'는 금붕어 철학에 따라, 있는 힘껏 어항 밖으로 뛰어오른 것이다. 떠오른 시간은 잠시뿐, 이언의 몸은 어느새 27층 아파트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작은 몸뚱이가 바닥에 닿기까지의 시간은 단 4초. 그러나 '세빌 온 록시' 같은 커다란 아파트에서는 4초 사이에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그렇게 이언이 중력에 철저히 제 몸을 맡긴 채 추락하던 바로 그 시각, 누군가는 바람 피운 게 들통나는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누군가는 기나긴 은둔형 외톨이 생활 끝에 비자발적으로 사람을 대면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며, 또 누군가는 생명 탄생의 순간을 뜻밖의 위기로 시작한다. '세빌 온 록시'에서는 매 초 다양한 감정이 교차하고, 제멋대로의 이야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다. 때로는 그 이야기 중 어느 하나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내달려 다른 이야기의 발을 걸기도 한다. 혼자인 걸로 충분했는데, 사실 혼자여서 좋았는데, 필연적으로 함께여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총 55장에 걸친 이야기가 단 4초만에 진행된다는 건 결코 흔치 않은 설정이다. 2장 '우리의 주인공 이언이 무시무시한 추락을 시작하다'부터 55장 '우리의 여정이 끝나고 세빌 온 록시의 좋은 거주민들에게 작별을 고하다'까지, 그 찰나의 순간에 '세빌 온 록시' 입주민들의 운명은 시시각각 변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운명이 다른 이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한다. 혼자 집에서 자연분만을 준비하던 피튜니아의 전화기가 하필이면 진통이 오는 순간에 방전되고, 도움을 청하러 나온 길에 운 나쁘게 문이 잠기고, 그렇게 어쩔 수 없이 계단을 내려가 어느 집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게 된 바로 그 순간 클레어는 견고하던 자기만의 세계 밖으로 발을 내디뎌야 하는 위기를 맞닥뜨린다. 음란전화 서비스로 생계를 꾸리며 조그마한 자기 아파트가 삶의 전부였던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며 문을 두드리는 만삭의 임산부는 예상치 못했던 난관이다. 언제나와 같았던 어느 금요일, 가장 방심하고 있던 순간에 벌어진 일이다.

'세빌 온 록시'의 주민들이 별나 보이긴 해도, 그들은 제각각 이 세계를 구성하는 인간 군상을 대표한다. 악질적인 바람둥이도,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은둔형 외톨이도, 트라우마로 인한 장애를 겪으며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도 생생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특정 인물을 틀에 맞춰 규정하지 않아도, 평범한 모습을 한 채 오가는 사람들 속에도 어딘가 이 책의 인물들과 닮은 구석이 한 부분씩은 녹아 있는 법이다. 서로를 무심히 스쳐가며 자기 삶에 몰두하기 바쁜 우리에게도, 어느 순간 필연적으로 누군가와 맞부딪혀야 하는 상황은 발생하곤 한다. 생판 모르던 남과 엮일 수밖에 없는 날, 살면서도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일에 나도 모르게 발을 들이는 날. 그런 날, 어쩌면 이 세계의 어디에선가 금붕어가 일생일대의 추락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순간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빌 온 록시'의 층계참에서 서로의 존재를 조금도 예견하지 못한 채 맞닥뜨린 사람들처럼, 우리의 삶에도 어느 순간 낯선 누군가가 뛰어들지 모를 일이다. 중요한 건 그토록 갑작스러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어떤 방향을 선택하느냐일 것이다. 지금껏 마음의 문을 걸어 닫고 꿋꿋하게 틀어박혀 있었어도 괜찮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며 조금쯤 나쁜 인생을 살았을 수도 있다. 사람들의 시선에 묻어나는 무시와 천대에 상처받는 하루하루를 보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중요한 건 바로 지금, 이 순간, 눈 앞의 상황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다. 그 선택이 나를 결정하고 동시에 내가 속한 이 곳을 정의한다. 고층 아파트 '세빌 온 록시'가 눈 먼 욕심의 결정체인 바벨이 되지 않고 '좋은 거주민'들의 공간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순간 순간 그 곳 사람들이 했던 선택의 결과였다. 오늘 내가 가는 길에 갑작스레 뛰어든 이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 될지, 그게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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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 1 스토리콜렉터 47
마리사 마이어 지음, 김지현 옮김 / 북로드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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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리즈가 끝났다. 루나크로니클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었던 '윈터'. 루나 최고의 미녀라 불리지만 자의적으로 마법을 쓰지 않으며 환각에 시달리는 윈터 공주의 이야기가 처음 제대로 다루어지는 권이자, 레바나 여왕의 독재를 멈추고 루나와 지구 모두를 구해내려는 신더의 여정의 끝이기도 하다. 모든 게 끝나는 마무리인만큼, 분량 역시 압도적으로 많다. 결국 번역본에서는 분권이 결정되었을 정도로.

조금이나마 지루해졌냐고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인물들에게 정이 들어서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이들이 어떤 끝을 맞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라도 책을 놓을 수 없게 된다. 신더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시작한 혁명을 잘 이끌 수 있을까. 스칼렛과 울프는 함께 행복해질까. 너무나 부당하게 모든 것을 잃어온 크레스에게 핑크빛 미래가 주어질까. 그리고 본격적으로 새롭게 다루어지는 두 사람, 윈터와 제이신은 어떻게 될까.

이 시리즈의 인물 중 '평범한' 사람은 없다. 단순히 비현실적인 출생 신분을 타고 났거나 능력이 좋거나 외모가 빼어나서만은 아니다. 성격적인 면에서, 그들 모두는 평균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때로는 좋은 쪽으로 그렇지만, 때로는 나쁜 쪽으로 그렇기도 하다. 카스웰은 어찌됐든 사기꾼에 도둑에 남을 등쳐먹는 재주가 뛰어나게 발달한 가벼운 남자다. 스칼렛은 강단 있고 자존심 세고 입도 거칠고 성질도 머리카락 색처럼 불같다. 크레스는 내내 인공위성에 갇혀 지내느라 그랬다는 정당한 변명이 있기는 해도 아무튼 공상의 수준이 평범한 사람을 뛰어넘는다. 그러나 그들 모두를 합쳐놓아도 윈터를 이길 수는 없다. 윈터는 진짜 미쳤다. 위안이 되는 점이 있다면, 곱게 미쳤다. 자신 외에는 누구도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어떻게 보면, 조금은 사랑스럽기까지 할 정도로.

"안녕, 친구."
"안녕, 미치광이."

스칼렛과 윈터가 늘 주고받는 인사가 모든 설명을 대신한다. 윈터의 눈에는 궁전의 벽들이 피를 흘린다. 그녀의 손발은 종종 얼어붙고, 안전벨트가 그녀를 죽이려고 하기도 한다. 때때로 윈터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환각에 사로잡혀 헛소리를 늘어놓음으로써 주변 사람들을 미치기 일보 직전으로 몰고 간다. 그래도 윈터는 사랑스럽다. 다정하고 따뜻한 그 마음은 어떤 미친 짓으로도 가려질 수가 없다. 흉터가 있음에도 전혀 바래지 않는 그녀의 미모처럼 말이다.

그녀의 곁에 제이신이 있다. 사실 책을 덮는 순간까지 가장 정이 덜 간 인물은 제이신이었다. 윈터의 소꿉친구로, 또 하나뿐인 첫사랑으로 단둘이 붙어 지내며 엄청난 사랑을 키워온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늘 양어머니에게 학대받고 정신병에 시달리며 지내는 윈터가 안쓰럽고 가엽고 무슨 짓을 해서도 지켜주고 싶은 것도 그럴 만 하다. 그래도 온 세상이 윈터를 중심으로 돌고 있고 그 외의 무엇에도 관심이 없다는 듯한 제이신의 태도는 한번씩 지켜보는 사람을 짜증나게 한다. 윈터는 사랑스럽기라도 한데, 제이신에게서는 그런 면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또 하나의 사랑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연한 이야기일지 몰라도 신더의 혁명은 성공한다. 신더는 새로운 여왕이 되고, 지구와 공정한 평화 조약을 맺고, 루나의 기틀을 다시 잡으려 노력한다. 나아가 언젠가는 군주정을 폐하고 루나를 공화국으로 만들 계획을 세운다. 카이토와의 로맨스도 순조롭다. 이코는 고문관으로 신더의 곁에 머문다. 스칼렛과 울프는 함께 프랑스로 돌아가고 카스웰과 크레스는 함께 램피언을 몰며 치료제를 배달하는 임무를 맡는다. 윈터는 루나의 제1대사가 되어 지구로 순방을 가고, 제이신은 언제까지 그녀를 경호할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는 아름다운 결말을 맺는다.

루나 크로니클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은 그 과정이 결코 동화같지만은 않다는 데에 있다. 전쟁은 피를 동반하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주인공들은 모두 누군가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 그리고 그 상처를 안은 채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여전히 불완전하지만 서로를 받쳐주며 비틀비틀 걸어나갈 것이다. 미래는 지금보다 나을 것이라고 애써 위안하며. 서로의 위안을 믿을 수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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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 생활문화사 세트 - 전4권 - 1950 ~ 1980년대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김종엽 외 지음, 김종엽 외 / 창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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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를 한 지 까마득히 오래되었다. 아마도 고등학교 시절이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따로 자격증 시험을 보지 않았으니, 그 이후 제대로 마음먹고 한국사를 파고들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상 앞에 앉아 역사라는 걸 공부했던 때를 떠올려본다. 역사가 공부할 수 있는 대상인가, 하고 떠오르는 의문은 잠깐 한 쪽으로 밀어놓는다.


온갖 인물의 이름을, 사건들과 그것들이 일어난 날짜를 외워야 했던 게 생각난다. 그래서 다들 국사를, 세계사를 암기과목이라 생각했었다. 이해하고 말고 할 것 없이 그저 되는대로 언제 무슨 일이 있었고 누가 무슨 일을 했다더라, 하는 걸 열심히 구겨넣곤 했다. 그 단편적인 정보들은 시험을 치르는 순간까지 단기기억의 영역에 머무르다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갔다.

배웠던 모든 과목 중에 역사가 제일 재밌었다는 엄마는 정규교육을 마친 지 마흔 해가 되도록 여전히 삼국시대 왕족의 계보를 깔끔하게 외우곤 했다. 그런 걸 어떻게 다 기억하고 있느냐는 물음에 엄마는 늘 대답했었다. 역사는 이야기잖아. 그런 이야기를 한번 듣고 어떻게 잊어? 그렇구나, 역사는 하나의 이야기구나, 굵직굵직한 사건의 나열이 아닌 쉴 틈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이구나, 하는 걸 그때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다.

이 책은, 그러니까 우리 엄마 같은 책이다. '정치적 격변과 세계사적 혼란 속에서도 꿋꿋하게 삶을 이어온 우리들의 부모님, 삼촌·이모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책은 유명한 인물들이 앞장서서 역사를 바꿀 때 그 역사를 구성하는 매일매일을 살아냈던 이들의 삶에 주목한다. 그들은 독재자를 암살하지도, 새로운 법안을 상정하지도, 외교의 물꼬를 트지도 않았다. 자기 이름 붙인 발명품을 남기지도 않았고 지금껏 읽히는 유명한 문학 작품을 쓰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간 하루하루가 모여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오늘을 있게 했다. 피엑스에서 흘러나와 도깨비시장에서 팔리던 미제 물건들을 사던 그들이, 계모임을 조직하고 때로는 곗돈 때문에 속앓이를 하던 그들이, 전기구이 통닭을 먹다 처음 양념치킨을 사기로 결심했던 그들이 만든 역사가 분명 존재한다. 비록 그 가치만큼의 대접을 받고 있지 못한다 할지라도.

생각해본다. 미래의 아이들은 지금의 우리를 어떻게 바라볼까. 그때의 역사책에 대한민국의 21세기 초는 어떤 시기로 기록될까. 미래세대가 바라보는 지금의 대통령은 어떤 지도자일까. 4대강은 어떤 결론을 맞이할까. 어느 방향으로든 지금과는 달라졌을 그때의 세대는 지금의 남북관계를 어떻게 이해할까. 그러다 또 생각한다. 그들은 아마,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글을 끄적이는 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알았으면 좋겠다. 굳이 나를 알아줄 필요는 없다. 내가 20대였던 이 시대에 사람들은 길거리에 나와 목청껏 외치는 대신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목소리를 내곤 했다고, 때로는 그게 서로를 헐뜯고 편협하게 편을 가르며 실제 세상보다 더 끔찍하게 변하는 난장판의 개싸움이 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거기에서 정말 가치있는 담론이 이루어지기도 했다고. 그 시대에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있을 때마다 인기 연예인의 사생활과 관련된 스캔들이 터지곤 했다고, 우리는 그 수작을 비웃으면서도 파파라치들이 잡아내는 누군가의 열애설에 어쩔 수 없이 관심을 가지곤 했다고. 벚꽃축제가, 음악페스티벌이, 대형 스포츠 브랜드를 끼고 하는 마라톤 행사가 있었다고. 기계가 끊임없이 발전해서 때로는 어지러울 지경이었다고. 인공지능 로봇이 등장하여 지금의 인간을 대체하지 않을까, 제각기 자기 자리에서 막연한 불안감을 한번씩 억지로 삼키곤 했다고. 가족이 작아지고 또 작아져서 많은 사람들이 외로워졌다고, 그 외로움 속에서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했다고. 그렇게 우리는 살아가고 있었다고.

언젠가 한국현대생활문화사 1990 ~ 2010 같은 시리즈도 나올런지. 그런 막연한 기대를 해보며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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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잔의 칼럼 - 남무성, 볼륨 줄이고 세상과 소통하기
남무성 글.그림 / 북폴리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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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걸 놔두고 하기 싫은 걸 열심히 하는 거야말로 정말 지리멸렬한 인생살이지."


책을 덮고 보니 작가가 내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이거였구나, 싶었다. 제각기 다른 시기에 쓰여진 서로 다른 주제의 짤막한 글들은 얼핏 보면 아무런 방향성도 없어 보인다. 그저 같은 사람이 썼다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그닥 없어 보이는 칼럼과 만화들. 어떤 글은 아는 사람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고, 어떤 글은 재즈에 대해 이야기하며, 어떤 글은 제법 사회비판적 성격을 갖추기도 한다. 그렇게 읽어가다 보면 쉽게 읽히는 글에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뭐가 남는 게 있으려나, 싶었다. 그러다 마지막 만화에 이르러 저 문장을 발견하고는 그렇구나, 했다. 이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거구나.


재주 많은 사람


바로 그 마지막 만화에서 작가는 '재주 많은 조영남이 부럽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남무성 역시 그 못지 않게 가진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재즈평론가라는 직함을 달고 있지만 그는 글도 쓰고, 책도 내고, 잡지도 만들고,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는가 하면 영화도 만들고 강연도 다닌다. 그냥 이것저것 건들기만 하는 건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각 분야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뭐하나 빠짐없이 잘 해내고 있다. 에세이집을 읽어 보니 겪은 일을 풀어내는 글솜씨도 재밌다. 그게 다 하고 싶은 일을 그때마다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재주가 많다고 했지만, 곰곰히 들여다 보면 그가 하는 모든 일에는 음악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그가 아주 어린시절부터 들어왔던 바로 그 음악 말이다. 수능 준비를 하면서도 몰래 LP판을 사모았던 소년은 그렇게 성장하고 나이를 먹도록 음악에 대한 애정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아낌없이 퍼부었던 애정이 그에게로 돌아와 그의 직업이, '먹고 살 수 있는 일'이 되어주었다. 그러니 어찌 보면 그는 타고나길 재주가 많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여심히 노력한 사람이기도 하다.


쉽게 읽는 음악 이야기


비틀즈 정도는 알지만 나는 음악에 거의 문외한이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으며 새로 알아가는 내용들이 많아 즐거웠다. 노래도 모르는 밴드의 뒷이야기가 뭐가 재밌을까 싶지만 음악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듬뿍 담겨 있어서인지 나까지 애정어린 시선으로 글을 훑게 되었다. 그러다 하루키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반가운 아는 사람 이야기에 또 눈을 반짝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용이 어려워지지 않도록 군데군데 작가 자신이 직접 겪었던 일들, 함께 음악을 듣는 주변 사람들의 재미있는 에피소드, 그리고 음악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의 소소한 단면을 보여준 덕분에 지루해질 틈이 없었다. LP판 세대도 아니고, 재즈를 즐겨 듣지도 않는 나에게 이 정도인데 음악을 좋아하는 마니아들에게 남무성이라는 평론가가 어떤 존재일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물론 모든 부분들이 쉽게 읽혔던 건 아니다. 어떤 칼럼들은 읽기에 다소 불편하기도 했고, 민감한 주제를 너무 단순하게 풀어썼다고 여겨지는 순간도 있었다. '오타쿠와 마니아'가 그랬고, 비틀즈 마니아들이 정확한 팩트에 대한 검증을 요구하는 것을 잘못된 일처럼 다룬 부분이 그랬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 책은 그저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 삶의 편린들을 담은 것일 뿐이다. 그 중 나와 맞아 공명하는 글이 있는가 하면 파장이 어긋나는 글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 모두 그렇듯이.


심야식당


'글에서 전하려는 생각의 크기도 딱 소주잔만 한 정도'라며 에세이집의 이름을 '한잔의 칼럼'으로 정했다던 작가는, 지금 이 시각에도 양평의 심야식당에서 소주 한 잔을 기울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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