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오어 데스 스토리콜렉터 50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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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옥하기에 가장 좋은 때는 언제인가. 우습게도 출소 전날인지도 모른다. 누구도 탈옥을 예상하지 못하는 때, 가장 기민한 간수들마저 긴장의 끊을 놓는 때, 내일이면 이 곳을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될 죄수에게 드문드문 축하의 말이 건네지는 때. 그 밤이야말로 등잔 밑이 어두워 무엇이든 가능해지는 유일한 기회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밤, 오디 파머는 탈옥한다.

감옥을 벗어나 호수를 가로지르고, 히치하이킹을 하는 등 생판 모르는 남에게 의지하며 어디론가 나아가는 오디를 뒤쫓는 독자는 이내 의아해진다. 그는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딱 하루만 기다렸으면 이 모든 여정이 더없이 편해졌을 텐데,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할 게 뭐란 말인가. 그런 오디의 모습이 미련하게 느껴질 무렵, 오디를 뒤쫓는 사람들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다. 세간을 뒤흔든 악명 높은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범죄자가 탈옥했으니 FBI가 나서서 뒤쫓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 키가 작은 것 외에는 어느 면모로 보나 FBI 탑급인 데지레 형사의 수사는 더없이 이성적이고 냉철하다. 그런데 수백 마일 떨어진 지역의 보안관이 오디의 출소날 감옥 앞에서 기다려야 할 이유는 무엇이며, 어째서 오디의 탈옥에 별 관련도 없을 것 같은 법조인 출신 정치인이 날선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걸까.

'라이프 오어 데스'의 시간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오디의 기억을 따라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요동친다. 형 칼과 어울리던 어린시절이, 처음 사랑에 빠지던 어느 여름날이, 종내 모든 것을 잃어야 했던 날이 스쳐간다. 벨리타, 미겔. 고통스러운 기억을 훑다 보면 어느새 오디의 이야기가 하나로 맞춰진다. 그리고 오디만이 아는 진실과 지금껏 독자를 이끌던 서사의 간극이 선뜩하게 와닿는다. 누가 거짓말을 했는지, 누가 악한 건지, 누가 누구에게 어떤 해를 끼쳤는지 따지고 들기가 두려워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지독하게 얽힌 이 사건 속에서 오직 오디만이 깨끗하게 서 있다.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으로 필사적으로 아이를 끌어안고 있다.

마이클 로보텀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따라붙는 수식어는 '범죄소설가'다. '라이프 오어 데스'를 범죄소설이라 말할 수 있을까. 오디는 탈옥수고, 그를 둘러싼 사건은 사실상 로보텀의 전작 무엇과 비교해도 규모 자체가 다른 엄청난 범죄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디의 여정을 사건의 해결을 위해 증거를 찾으며 나아가는 범죄소설이라 명명하자니 어쩐지 아쉬움이 남는다.

오디는 지독히도 운이 없다. 범죄의 피해자 치고 운이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그래도 오디는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다. 명문대학의 장학생에서 단숨에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된 것도,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하고 그림자 세계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며 지내게 된 것도, 거기서 사랑하게 된 여자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도주를 감행해야 했던 것도, 그리고 그 길에서 결국 모든 걸 잃게 된 것도, 그것도 모자라 그 크나큰 상실을 초래한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어 온갖 죄를 덮어써야 했던 것까지 수없이 많은 우연의 산물이다. 그 어느 하나 오디가 스스로 의도했던 일은 없다. 만약 오디의 형 칼이 좀 더 제대로 된 인간이었다면, 오디가 칼을 완전히 떨쳐낼 수 있을 정도로 냉정했다면, 하필이면 칼이 그 날 오디의 차를 가져가지 않았더라면... 수없이 많은 '만약'을 따져가다 보면 오디의 기구한 운명이 처절하게마저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디는 좌절하지 않는다. 자신을 사지로 내모는 운명 앞에서 삐딱선을 타지도 않는다. 오디는 순응하는 인간이다. 주어진 바를 겸허히 수용하고 그 속에서 최선을 도모한다. 성실하게, 선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유형의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 순간 불합리한 쪽의 운명을 떠안아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라이프 오어 데스'는 그런 사람에게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이 생겼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벨리타는 오디의 모든 것이었고, 그런 그녀가 마지막 순간 미겔을 부탁했다. 지금 이 순간, 오디는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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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언트 - 영어 유창성의 비밀
조승연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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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돌아온 해에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할 무렵에는 한국어가 서툴러 놀림을 받기 일쑤였다. 말이 어설프다 보니 다른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자연' 시간 시험을 보며 곤충의 몸 구조에 대해 명칭을 적어야 했는데 각각의 부위에 대해 명확히 알면서도 그걸 뭐라 부르는지 몰라 빈칸으로 써냈던 기억이 난다. '머리', '가슴', '배'는 너무도 쉬운 단어였는데도. 아무튼 당시의 내 국어 실력은 딱 그 정도였다.

중요한 건 그럼에도 영어를 배웠다는 거였다. 독일에서 내가 배웠던 제2외국어는 이탈리아어였다. 영어라고는 컴퓨터 테트리스 게임에 나오는 'Ok'와 'Cancel', 'Game', 'Over' 정도를 알았다. 그러니 영어도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건 엄연히 교육과정의 일부였고, 나는 만 여덟살에 미처 다 익히지 못한 언어 두 개를 한꺼번에 배워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 당시의 나에게는 총체적 난국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배부른 고민이었다. 지금은 갓 만 서너살이 된 아이들이 똑같은 상황을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제 막 한글을 떼는 아이들이 영어 유치원에 가서 원어민 아이들처럼 영어를 익히도록 강요되는 세상이다. 그만큼 한국인의 삶에 영어가 일종의 강박으로 자리잡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왜 그토록 영어가 중요해진 걸까. 글로벌 시대를 강조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영어를 직접 사용하지 않고도 업무를 수행하거나 학업을 이어가는 데에 아무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토록 영어를 강조하는 교육을 받고도 실제로 영어가 필요한 업무환경에서 능숙하게 대처할 만큼의 언어능력을 갖춘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알 수 없는 누군가는 계속해서 영어의 중요성을 강요하는데 정작 영어능력을 기르는 교육정책은 현실과 너무도 동떨어져 있어 그 괴리가 고스란히 의미 없는 영어공부를 반복하는 사람들의 괴로움으로 남는 것이 지금의 현실인 셈이다.

그 이유로 저자는 우리나라의 영어공부가 언어 자체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발전할 수 없으며, 이제는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언어는 문화를 소통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며, 문화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지 않는 언어공부는 아무 소득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언어는 단순한 단어의 나열에 문법으로 체계를 잡은 것을 넘어서서 한 문화권에서 성장한 개인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담아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릇에 담긴 내용물을 보려 하지 않고 그릇의 생김새에만 열중하는 공부는 자연히 핵심을 비껴갈 수밖에 없다.

얼핏 5개 국어를 통달한 '언어 천재'가 들려주는 '영어 잘하는 비법'처럼 들리지만 이 책이 그 한계를 넘어서서 언어학과 인문학을 어우르는 교양서가 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저자는 단순히 '영어를 잘하기 위한 꼼수'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습득에 있어 문화가 지니는 중요성을 폭넓게 탐구한다. 사이사이에 스며 있는 영어에 대한 언어학적 분석은 덤이다. 그러다 보니 책을 읽다 보면 저절로 영어가 늘지는 않아도 영어를 잘하려면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한 감은 잡을 수 있게 된다.

나는 결국 영어와 한국어를 모두 익히는 데에 성공했다. 더불어 원래 모국어였던 독일어와 고등학교에서 제3외국어로 배웠던 스페인어, 틈틈이 독학했던 일본어까지 나름 5개 국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저자처럼 내 자신을 '언어 천재'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냥 말을 좋아했다. 언어라는 수단을 익힘으로써 얻게 되는, 타인과의 깊이 있는 소통이 좋았다. 우리말로 번역될 수 없는 그 나라에만 존재하는 단어를 아는 것, 그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는 것, 그런 게 즐거웠다. 어느 나라 말을 잘하게 됨으로써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국가가 많아지고, 새로운 친구가 생기고, 읽을 수 있는 책이 늘어난다는 것이 기뻤다. 나는 정말로 필요에 의해 말을 익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의 언어 공부도 어떤 면에서는 이 책의 저자와 맞닿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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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양치기의 편지 - 대자연이 가르쳐준 것들
제임스 리뱅크스 지음, 이수경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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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들은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사람의 손길이 길게 머물지 않은 산과 들판도, 그 곳으로 양을 몰고 가 풀을 먹이고 바람을 쐬이는 양치기의 낡은 지팡이도, 그 지팡이를 꾹 쥔 거친 손마디도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과 사람을 똑같이 품는 자연에 감사할 줄 아는 양치기의 마음은 몇백년 전 조상들과 다를 바가 없다.

이 책은 여전히 영국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양을 치며 살아가는 한 남자가, 세계 어느 한 자락에서는 여전히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잊어버린 다른 이들에게 띄우는 편지다. 저자는 단순하고도 진솔한 문장들로 아름다운 대자연에 대해,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집스럽고도 숭고한 삶에 대해, 그리고 하루하루 배워가는 삶의 지혜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이야기한 글들은 모두 그 곳을 예술가들이 영감을 받는 곳, 방랑자들이 여행을 떠나는 곳으로만 묘사하고 있어서 언젠가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바라본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대해 글을 쓰고 싶었다던 말답게 그의 글에는 고향에 대한 진득한 애정이 묻어난다.

저자는 어린시절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해서 발생했던 몇몇 에피소드들을 회고한다. 물론 그 당시에 저자와 그의 친구들은 선생님들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심한 말썽쟁이들이었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선생님들은 고등교육을 받아 더 '좋은 직업'을 선택하기보다 고향에 남아 양을 치고 경작을 하며 살아가길 원하는 아이들을 인생의 실패자로 간주했다. 선생님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사랑했지만, 저자를 비롯한 아이들의 눈에 그 사랑은 잘못된 것으로 비춰졌다. 그들이 사랑하는 자연에 그 곳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얼핏 저자의 눈을 빌린 독자의 눈에도 선생님들이 너무하다 생각될 수 있는 대목이지만, 사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우리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다. 당장 우리나라에서도 아이들에게 더 많이 배워서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당연하게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아이들 역시 농부, 목수, 어부 등의 직업을 가지기보다는 큰 도시로 나가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전문직이 되기를 원하는 어른들에 둘러싸여 자란다. 시골에 남는 건 노인 뿐이고, 언젠가부터 '시골에 내려간다'는 건 도시 생활에서 실패한 이들을 에둘러 표현하는 말로 자리잡았다. 어쩌면 가장 놀라운 전문직은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을 만지며 살아가는 사람들일지도 모르는데, 현대사회는 그들을 존중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귀농이 또다른 유행으로 자리잡는다. '한달간 제주에서 살기' 같은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그러다 정착하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내달리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청개구리처럼 자연으로 눈을 돌린다. 쉴 새 없이 변해야만 살아남는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변함없이 제자리에 있는 것을 찾는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온 이들을 산과 들, 바다는 아무 말 없이 품어준다.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언젠가 돌아올 줄 알았다는 듯.

모든 사람들이 양치기로 살 필요는 없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대학에 갈 필요는 없듯, 같은 이유로 말이다. 누구에게나 자기 자리라는 게 있고, 모두가 그 자리를 오롯이 채울 때 세상은 올바른 방식으로 굴러간다. 그러니 '영국 양치기의 편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모두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느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변치 않는 자연의 순리를 상기할 것, 인간임에 자만하지 말 것, 모든 굴레를 내려놓고 편해질 것. 자신이 사랑하는 곳에서 사랑하는 일을 할 것. 오늘도 지팡이를 짚고 허드윅 양을 몰며 초지를 가로지를 저자가 전하는 메시지는, 그를 품은 자연이 물려준 그대로 포근하고 다정하다.

그 얼마나 따분하고 단조로운 삶일까 하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나한테는 아무 상관 없다. 나는 이곳을 사랑하니까. 내게는 이곳이 모든 것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이고, 그 밖의 다른 곳은 전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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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스토리콜렉터 49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황소연 옮김 / 북로드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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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사고, 두 번의 죽음. 그 이후 에이머스 데커는 무엇도 잊지 못하는 남자가 된다. 후천성 서번트 증후군, 과잉기억증후군, 공감각장애. 의학적 진단은 명확하지만 그의 인생은 여태껏 겪어본 적 없는 혼란에 맞부딪힌다. 사고 이전의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에게는 그 사실 자체가 고통이자 절망이다. 그의 머릿속 블랙박스는 잠든 순간에조차 멈출 줄 모르고, 그가 보는 세상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색으로 물들어 그를 압도한다. 낯설고 두려운 세계, 그보다 더 낯선 자기 자신. 그 곳에서 그를 끄집어낸 여자가 있다. 훗날 그의 아내가 되고, 그의 딸을 낳고, 그가 비밀을 공유하는 유일한 동반자가 되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을 잃은 날, 에이머스의 세계는 재건할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부서진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라니, 그보다 더 완벽한 경찰이 있을 수 있을까. 실제로 아내 캐시를 만나 경찰학교에 입학하고, 더없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형사 생활을 하던 당시의 에이머스는 특출났다. 한번 본 증거는 모두 기억 속에 저장해 두고 잠깐이라도 얼굴을 스친 사람의 이미지는 언제든 불러낼 수 있는 그의 두뇌는 경찰로서 더없이 훌륭한 무기가 되어주었다. 파트너인 메리와 현장을 누비며 사건을 해결하던 그 시간만큼은 에이머스의 재앙에 가까웠던 변화도 긍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런데 아내, 딸, 처남이 모두 죽어있던 집에 들어섰던 그 날 이후로 멈출 줄 모르는 기억은 에이머스에게 새로운 고통을 줄 뿐이다. 처음 사고가 났을 때보다도 더 심하게, 푸른빛으로 물든 아픈 기억은 그의 삶을 망가뜨린다.

그렇게 끝날 수도 있었다. 에이머스 데커는 노숙자에 가까운 차림으로 여관 방을 빌려 살며 사설탐정으로 근근히 연명했다. 살아갈 이유는 딱히 없었지만 죽음을 결심할 때마다 딸과 아내의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는데, 운명은 또다시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어느날 스스로를 세바스찬 레오폴드라고 소개한 남자가 벌링턴 경찰서로 걸어들어왔다. 자신이 세 사람을 죽였다고 자백했다. 그리고 스스로 사형을 청했다. 같은 시각, 벌링턴에 위치한 맨스필드 고등학교에서 유례 없는 총기난사사건이 벌어진다. 그렇게 에이머스 데커는 다시 엉망진창의 시궁창으로 끌려들어간다. 혼란의 연속인 그 곳에서 그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흔들림 없이 완벽한 그의 기억력 뿐이다.

150kg에 달하는 거구가 된 데다 옷차림은 후줄근하고 아무리 단장해도 꾀죄죄한 모습을 벗지 못하게 된 에이머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력적이다. 특히 현장에 발을 들인 순간의 그는 더더욱 그렇다. 현장에서 에이머스는 누구도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결론을 도출해낸다. 그의 두뇌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 저장해두고 끊임없이 돌려본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범인이 남긴 작은 실마리가 그의 의식에 걸려든다. 그렇게 에이머스는 혼자서 거대한 수수께끼를 차근차근 해결해간다.

물론 그의 두뇌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들도 있는 법이다. 그 때에는 주변의 든든한 조력자들이 나서준다. 에이머스의 독특한 성격도 끝끝내 참아주며 한결같이 그의 파트너 자리를 지키는 메리 랭커스터, 그에게 끝없는 신뢰를 보내며 울타리가 되어주는 맥 서장, 초반에는 갈등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물심양면으로 돕는 연방수사국의 보거트, 한 때 그를 두고 악질적인 기사를 쓴 후 후회하며 어떻게든 수사에 보탬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기자 알렉스 재미슨. 그들 중 누구도 에이머스만큼 뛰어난 두뇌를 지니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토록 완벽한 두뇌를 가지는 대신 에이머스가 잃은 것들, 그가 지니게 된 허점들을 채워주는 건 수사 중에 혼자 뛰쳐나가기 일쑤인 에이머스를 묵묵히 기다려주는 그들이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중간에 덮을 수 없는 소설이다. 아무리 속도감 있게 쓰인 범죄소설이라도 느슨해지는 타이밍이 있기 마련인데, 에이머스의 두뇌가 쉼없이 가동되는 만큼 이 소설에서 쏟아지는 새로운 정보도 끝이 없다. 매 챕터에서 이전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퍼즐 조각이 새로 맞춰지고 진실은 성큼 다가선다. 그러면 에이머스를 '형제'라 일컫는 범인은 또다른 범죄로 한 걸음 멀찍이 물러난다. 누가 누구를 쫓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들의 술래잡기는 그렇게 계속된다. 정신없는 그 레이스에서 독자가 손을 놓을 수 있을 리 없다.

책을 덮고 나면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보다 더 궁금해지는 남자가 있다. 바로 작가 데이비드 발다치다. 북로드에서 '지금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범죄소설가'라고 표현하고 있는 그는 실제 법을 전공하고 9년동안 변호사로 일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범죄 묘사에는 어딘가 아마추어 같지 않은 느낌이 있다. 정말 이런 일들을 보고 듣고 겪어왔던 사람이 풍기는 어떤 기운이 감돈다. 그의 다음 작품이 더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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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가 사라졌다
엠마 힐리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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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82세의 모드 할머니는 치매다. 가게에 가는 길에 뭘 사러 가는지 잊어버리기 일쑤에, 딸과 손녀의 얼굴을 못 알아볼 때도 있고, 한번은 집안일을 돌보러 와준 간병인을 강도로 경찰에 신고한 적도 있다. 새로운 기억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흩어지고, 부족한 기억을 메우기 위해 적기 시작한 메모들은 때로는 더 큰 혼란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 와중에 모드 할머니의 기억이 끝없이 붙드는 단어가 있다. 실종. 누군가가 사라졌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 사람을 찾아야만 한다.


치매가 그 어떤 병보다 흔해진 요즘 같은 시대에 어떤 현상으로서의 치매나 특정 대상으로서의 치매 노인을 그린 소설들은 많지만, 엠마 힐리의 '엘리자베스가 사라졌다'는 치매를 앓는 노인의 시점으로 독자를 끌여들여 그들이 보는 세상을 경험하게끔 한다. 밥 먹고 돌아서면 방금 먹었던 걸 잊어버려 자식들이 자기를 굶어 죽인다고 비난한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지만, 같은 사건을 노인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모드 할머니는 정말 배가 고프다. 빵이 든 바구니 위에는 '토스트는 그만'이라는 쪽지가 붙어 있는데, 누가 왜 그걸 적어두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꾸만 화를 내고 잔소리를 하는 딸이나 간병인들은 할머니를 속상하게 할 뿐이다. 그래서 모드 할머니는 은근슬쩍 토스트 한 장을 집어든다. 요리는 안된다고 아무리 들어도 계란 삶는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냄비에 불을 얹는다. 혼자 꿋꿋이 외출을 감행하고 친구의 집을 찾아간다. 똑같은 질문을 수십번 반복하고, 이해할 수 없는 위험한 행동을 시도하고, 때로는 주변 사람들을 골탕 먹이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그 모든 일들이 모드 할머니 자신이 되고 보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생생한 공포다. 기억이 없다는 것, 기억하고 싶어도 잊게 된다는 것, 어느 순간 모든 게 낯설어지고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이 소설은 담백한 문체로 치매 노인이 겪는 일상 속 공포를 고백한다.

보통 치매 환자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건 가장 오래된 기억이라고 한다. 모드 할머니의 기억 역시 끝없이 뒤를 돌아본다. 딸과 손녀의 얼굴이 낯설어질수록 십대 소녀 시절의 일들은 생생히 살아나 모드 할머니를 2차 세계대전 직후의 영국으로 이끈다. 옛 추억 속에서 할머니를 현실 세계로 끄집어내어 행동하게 만드는 건 늘 그녀의 정겨운 친구 엘리자베스다. 엘리자베스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전화도 받지 않고 집에 찾아가도 아무도 없는데다 밥도 잘 안 준다는 엘리자베스의 아들 피터는 뭔가를 숨기는 것만 같다. 모드 할머니의 주머니 속 쪽지들에는 한결같이 '엘리자베스가 실종됐다'고 적혀 있다. 엘리자베스가 사라졌다. 그녀를 찾아 구해낼 수 없는 건 모드 뿐이다. 그런데 사라진 사람이 엘리자베스만이 아니다. 아주 오랜 옛 기억, 그 속에는 어느날 사라져버린 수키 언니가 있다.

그렇게 모드 할머니는 불완전한 기억을 붙들고 두 사람의 행적을 쫓는다. 여행가방 하나만을 남기고 사라진 채 끝끝내 돌아오지 않은 수키 언니,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는 엘리자베스. 자신을 돌보러 와주는 딸 헬런에게 모드 할머니는 끝없이 두가지 말만 반복한다. "엘리자베스가 실종됐어"와 "호박은 어디에 심는 게 좋을까?"는 이제 헬런을 미치기 일보 직전으로 만드는 신호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럼에도 모드 할머니는 고집스레 물고 늘어진다. 경찰서를 찾고 신문에 실종신고를 내고 끝없는 위험을 감수하며 엘리자베스의 집을 찾는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닮은 기억 속에서 수키 언니의 자취를 더듬는다.

치매는 고통스러운 병이다. 병을 앓는 당사자에게도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모드 할머니의 입장이 되어 할머니의 행동을 이해하게 된다 해도 딸 헬런이 할머니를 위해 얼마나 큰 수고를 감수하는지를 부정할 수는 없다. 끝없이 사고를 치는 할머니 때문에 헬런이 화를 내게 되는 것도, 그렇게 화를 내면서도 끝끝내 할머니를 챙기는 것도 어느 순간에는 먹먹하게 다가온다. 모드 할머니는 헬런이 자기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비난하지만, 자기 기억에 자신이 없기는 할머니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이야기의 큰 줄기를 이루는, 실종사건을 쫓는 스릴러적 요소 외에도 작가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치매 노인과 그 가족의 삶에 동반되는 고충을 어루만진다. 모드 할머니와 헬런, 그리고 손녀 케이티의 일상 속 갈등과 화해를 통해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담담히 감싸준다.

병원에 가서 입원한 엘리자베스를 만나고 돌아오던 날, 마침내 헬런은 모드 할머니의 횡설수설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진실을 발견한다.


   "그 얘기는 아까 다 했잖아요. 그런데 엘리자베스가 아니죠?"

   "엘리자베스는 실종됐어."

   이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틀렸다는 건 알겠는데 원래 이름이 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헬런이 차를 세운다.

   "엘리자베스 아줌마네 정원에 누가 묻혀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수키 이모요?"

   수키. 바로 그 이름이다. 수키. 수키. 가슴 근육이 조금 편해진다.

   "엄마?"

   헬런이 심하게 더듬거리며 핸드브레이크를 위로 비틀어 올린다.


마침내 모드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비밀의 파편을 찾아낸 헬런이 정원을 파헤쳐 백골을 발견했을 때 어쩐지 소름이 끼쳤다. 생각해 보면 답은 그것 뿐이었는데 400여 페이지에 걸친 이야기를 따라가며 어느새 나도 함께 모드 할머니의 엉킨 기억 속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담벼락에 조약돌을 붙인 집, 호박, 프랭크 형부, 수키 언니, 더글러스, 엘리자베스, 실종, 실종, 실종... 모든 단서는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그 길을 찾는 게 왜 그리도 어려웠는지. 무엇보다도 혼란스러운 기억 속에서 필사적으로 단서들을 붙든 할머니의 마음이, 미리 알았다면 '나도 그 나무 상자에 웅크리고 들어가 70년 동안 언니 곁에 있어줬을'거라고 이야기하는 할머니의 짙은 그리움이 아프도록 생생했다. 70년이 지나도 바래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70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이제 와서 수키 언니를 찾는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 언니는 이미 죽었고, 범인 역시 세상을 떠났을지 모를 일이다. 결국 모드와 수키의 부모님은 어떤 진실도 알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리고 모드 할머니의 치매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엘리자베스의 장례식에서도 여전히 모드 할머니는 엘리자베스가 실종되었다고 걱정한다. 그러나 그러면 좀 어떤가. 희미해지는 기억 속에서도 모드 할머니는 진실을 붙들고 살아갈 것이다. 헬런과 케이티와 때로는 투닥대고 때로는 서로를 부둥켜 안고 울고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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