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녁 찬 바람이 거슬린다. 할인매장에 알바하시는 분이 또 바뀌다. 특대사이즈 고무장갑과 비닐봉투를 고른다. 단골집에 저녁하러 가기에 앞서 막걸리 한병도 챙긴다. 


티브이에서는 여전히 격앙되고 새된 목소리로 방송중이다. 어디를 틀어도 같은 뉴스다. 저기 저 화면 안의 사람들은 자신이 정해진 궤변을 생산해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먹고 살기위해 어쩔 수 없다고 할까. 살려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한다고 변명할까. 여러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채널을 이리 저리 돌리다가 한 곳에 멈춘다. 패널 가운데 보지 않던 인물이 앉아 있다. 강한 어조에 다른 패널과 진행자도 놀란 모양이다. 


논리란 일관성이 있고 선후가 맞아야 할텐데 그들은 여전히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라고 한다. 하루 먹고 하루 살기 어려운 친구들은 그렇게 들은 대로 내뱉는다. 정치에 관심없지만 그래도 관심있는 것으로 보이려면 무의식중에 들은 것들이라도 옮겨야 한다. 다 나쁜 놈들이예요.



한밤중에 일어나 목감기약을 챙겨 먹다. 자제했어야 한다. 술은


봄꽃이 몽울져 있다. 그래도 꽃들은 제 할 일을 한다는 설사장님의 말이 맴돈다. 우리들에게 제 할 일들은 다 다르지만 그 말이 틀리다곤 할 수 없다.


우리 이런 세상에 살아지고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좀더 운을 좋게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오타니처럼

해석가능한 아이러니를 만날 수 있도록









2


<반디TV> 영상을 본다. 색채편을 보다나니 흔히 지나쳐 간과하기 쉬운 분야다. 무의식을 의식으로 바꾸는 연습을 해야한다는 말이 나온다. 색채 연습을 하기 위해 주색-보조색-포인트색을 갈라내는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색을 쓰기가 수월해진다. 이렇게 하면 음이든 색이든 무지의 분야, 취향의 분야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연습하고 덧 쌓아가면 나아지게 되는 것이다. 무의식이란 말은 어쩌면 그 분야는 모른다는 핑계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반추상이든 추상이든 의식을 많이 드러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자꾸 자신이 잘모르거나 서툰 것을 폐기하고 싶은 욕망이 강한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나이든 티를 내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앞으로 주어진 시간이란 것은 이렇게 뭍힌 무의식들을 인식의 틀로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마음 속의 경직된 울타리를 걷어내고 좀더 색다른 목표를 잡아볼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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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3-19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나쁜놈들이란 말이 현 정치인의 도덕성을 지적하는 촌철살인같은 말이네요.ㅠㅠ
내가 제일 잘한일은 여러 제안을 받았지만 정치판에 발을 들이밀지 않은일이라고 생각해요. 대학 학생회장 출신들에게 이런 제안들이 먹혀서 똥팔육들이 등장한 거니까요.ㅠㅠ

여울 2024-03-19 10:10   좋아요 0 | URL

말씀 감사해요. 늘 그러했지만 종교, 정치 역시 불문율처럼 조심조심 할 부분이 되어버렸죠. 옳다 그르다의 나누기로는 접근 불가능한 영역이기도 해서일까요. 무신론자인 저는 신에 대한 관심이 무척 많습니다. 그러니 유신론자가 아니기는 할까. 정치도 그러하지 않을까 싶어요. 신심이 부족하거나 정치에 관심없다고 하대할 수는 없는 일이죠. 거기까지 포함하는 것이 정치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연습하는 것은 관찰입니다. 니편내편이 유난히 강한 이 섬나라는 욕의 저편으로 너머서는 정치를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간절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설을 늘어놓으련 건 아니었는데. 암튼 반갑고 감사해요^^
 

-5


잠자는 방을 옮기다.  빈방에 보일러를 틀고, 청소를 하고 분위기를 바꾼다. 


-4


끓어오르는 성격을 갖는 이들, 아니 많은 분들이 욱하고 치미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조편성으로 불쑥 작업장을 떠난 친구를 불러 이야기를 나눈다. 혼자가 아닌 몸임이기도 하고 감정이 가라앉은 상태로 결정을 내려도 늦지 않은지? 여러 방법들이 있을텐데 아쉽기도 하다. 며칠이 지난 뒤 다른 친구가 그만둔다 한다. 크고 작은 일들이 겹쳐 이 생각 저 생각 안에 잠겨 끙끙댄다. 


-3


나이를 불문하고 사람사이의 일들을 조율하는 걸 불편해한다.  애초에 상황을 만들려하지 않는 것 같다. 스트레스에 취약하고 몸마저 그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마음을 접는다.


-2


그러다 공고를 내는데 우연의 반경은 생각보다 좁다. 낮과 밤새 수십 번의 흔들리는 마음을 뒤집기를 반복한다. 일년이 넘도록 투병중인 대장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손수 운전에 걸을 수 있다니 말이다. 가는 길 활짝 핀 목련 한 그루. 눈여겨 본다. 만난 자리에서 직접 그 반경에 걸린 분들에게 전화를 돌려 진의를 확인하고, 현 상황을 파악한다. 혈액암에서 이겨낸 친구. 앞으로 나갈 틀과 방향에 대한 토론들. 


-1


떠날 사람과 돌아올 사람들의 파일들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들이 모아둔 일상들이 빛난다. 얼마나 대단한가. 


0


 패턴을 찾는 사람. 패턴을 먼저 살피려는 사람들. 주문한 지 조금 지나서 손에 잡힌 책은 그동안 읽던 관련 서적의 완결판처럼 보인다.  부록에 실린 공감과 패턴의 설문을 풀어본다. 예전의 나. 지금의 나는 무척 다르다. 우리는 다르게 본다고 하지만 마음까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에디슨이 자폐스펙트럼을 가졌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원래 그런 것이다.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채워야 한다거나 이해하지 못할 일이라는 것은 내 중심인 것이다. 나는 해설자에 설 필요도 이유도 없다. 다른 것이다. 그 상태로 인지하는 연습. 그것만이 달라지는 또 다른 바탕이 될 수 있다.


 0.1


 이 책도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단어와 유추, 그리고 범주를 만들어가는지 살핀다.  어린아이는 위대한 발명가와 유사하다. 위대한 발견자이기도 하다. 그런면에서 사람들은 그 디테일을 거꾸로 살릴 수 있다. 가능성의 책이기도 하다.







1


 푸코의 강연자료를 모은 것이다. 그래서 이해하기가 무척 쉽다. 핵심들이 짧은 글들에 응축되어 있다. 집요하게 묻는 랑시에르에 대한 서신 인터뷰 내용도 놀랄만 하고 정교하다. 


'하게끔'하는 사회에 살아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법과 권력에 대한 상식들은 이삼 백년 전에 고정되어 있다. 발달지체는 이런 것은 아닐까.  숱한 교과서형 반복과 그것의 스피커가 되어 재생산하는 사회는 좀더 낫게 사유하기가 어렵다.


읽으면서 시대가 푸코를 가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시대를 차고 넘쳐 흐르고 있다. 시대의 질문들은 협소하고 편견에 사로잡혀 그 대답을 주워담을 능력이 없어보인다. 






2.


공장 도면. 유투브 영상, 자료들을 끊임없이 보고 있다. 전공서적도 주문해둔다. 오늘도 하루가 만만치 않다. 물러가던 목감기가 다시 올라온다. 어제 오후의 찬공기가 얇게 입고 움직인 옷안을 기웃거렸나 보다.  그래도 뭔가 틈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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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목이 칼칼하고 기침이 가끔 나오길 한다. 감기기운이 입질이다. 휴식을 고려하지만 몸도 말을 들어주어야 할텐데. 며칠 일찍 출근하고 저녁식사 자리, 라이딩이 몸에 부담을 준 모양이다. 어제는 짜먹는 감기약을 들고, 김치황태국밥을 만들어 들고 내내 잔다. 


-3


어제 일터 설비를 보다가 영상 검색부터, 공유압라인, 밸브류에 대한 무한 검색을 한다. 한번쯤 들어본 용어, 하지만 비껴가거나 전문가의 일이라고 팽겨쳐진 것들이다. 전기도면 보는 법부터 설비보전 기능사등등 참으로 많은 정보들이 차고 넘친다. 가려내는 것이 기술이자 방법인 듯싶다. <공대언니>를 구독하고 보기를 이어나간다. 그래도 어렴풋하게 그려진다. 도면이라, 솔레노이드밸브부터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끝을 보자싶다. 


-2


 푸코 관련해서 좀더 진도를 나가본다. 최근 라이오 강연 번역본이나 자크비데의 새로운 관점에서 연구들이 그것이다. 


메타구조, 칼합치, 재귀성 모두 스스로를 돌아보며 나아가는 형상이다. 그렇게 사물을 보는 깊이와 방향을 갖지 않고 수평적인 조합은 한편 무능해보인다. 그렇게 뚫고 나아가려는 노력에서야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느낄 수 있다싶다. 


-1


 유한계급이 아니라 야망계급이라니? 과시적 소비보다는 비과시적 소비를 한다. 앎과 소비, 양육형태가 일련의 경향을 보이는데, 거꾸로 이는 시간에 따른 빈부 차이를 심화시키는 경향도 있다 한다. 좀더 깊이 보고 있다.











0


 몽테크리스토 백작. 해설이 아니라 직접 볼 것.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직접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다는 것. 프랑스 혁명과 파시즘. 이런 역사적 사건들은 단락되어 섬처럼 보게한다. 하지만 그런 것이 역사가 아니다. 선악으로 구별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 어떻게 그런 일들이 생겼는가는 한 두가지 원인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다시 읽어내거나 새로운 시선이 생겨나거나 새로운 흐름들을 확인해내야한다. 



1


그림작업도 책읽기도 어디로 튈 지 모르겠다. 좀더 가분히 라이딩하듯 봄결을 실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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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목표는 있으나,

길은 없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이다.



69


신앙을 가진 자는,

기적을 체험할 수 없다.

대낮에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



70


나는 내용을 알지 못한다.

나는 열쇠를 갖고 있지 않다.

나는 풍문을 믿지 않는다.

모든 것이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92


진실의 길은

공중 높이 매달려 있는 밧줄이 아니라,

땅바닥 바로 위에

낮게 매달린

밧줄 위에 있다.

그것은 걸어가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116


"주인 나리, 어디로 가시나요?"



"모른다." 나는 말했다,

"단지 여기에서 떠나는 거야, 단지 여기에서 떠나는 거야.

끊임없이 여기에서 떠나는 거야,

그래야 내 목표에 도착할 수 있어."



"그러시다면 나리께서는 목표를 아신단 말씀인가요?"그가

   물었다.

"그렇다네" 내가 대답했다.

"내가 이미 말했잖아:

'여기-에서-떠나는 것', 그것이 내 목표야."



볕뉘


 

1. 


터미널 옆까페, 다이소 옆에 들른지가 오래다. 도록을 챙겨 자전거 짐받이에 싣고 달린다. 주말은 그래도 자유스럽다. 작업실의 히터를 틀고 돌아오는 사이, 책 한줄 읽을 여유공간을 생각해낸다. 토스트 하나, 커피 한잔. 프란츠 카프카의 아포리즘 겸 시. 무척 잘 읽힌다. 


2.


 옆의 책에서 카프카의 단편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가 뼛속 깊이 니체주의자라는 사실도 확인한다. 단식광대나 빨간피터. 최후인간의 단편들이 무엇인지를 상세히 서술한다. 곡예사나 기예가의 삶이 무엇인지, 왜 그래야 하는지 새삼느낄 수 있다. 루쉰도 겹치고, 그가 살아낸 삶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렇게 해묵은 노트와 드로잉 사이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빠른 것인가 늦은 것인가. 애초에 그런 것은 없지. 아침 또 훤히 동이 터오른다. 이렇게 속을 다 비워내야만 그 짜릿이 선물처럼 온다. 


3.


 단 친구, 단 이야기 갈증이 깊다. 주중 달콤한 휴식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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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는 몇 주가 이어지고 있다. 주변을 채근해서 삶의 동선 사이에 채워둔다는 일. 버겁기도 하고 걸음은 중력을 비껴가는 듯하여 갈피를 쉽게 잡지 못한다. 새로운 환경은 마음과 몸의 중심점을 잡기가 쉽지 않다. 일터의 일은 그렇게 충돌하면서 일들을 만들어내고, 전시의 일은 이렇게 책들이 부딪히면서 일들은 만들어내다. 


다행스럽게 부유하면서 두 권의 책을 잡아내어 그 위에서 좀 쉴 수 있었다. 둘로만 나누면 무엇이 문제인가?란 물음에 그것은 언어와 그 구조에까지 물들어있음을 확인하고, 명확하고도 논리정연한 답을 해주고 있단 느낌이 들었다.


 그리곤 여러 차례 잡담회와 술자리 모임들을 의도적으로 갖기도 하였는데, 지금을 살면서 그 틀에 대한 인식이 부재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가까운 지인들이라 어느 정도 그 윤곽을 잡고 있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오산이었다.


절망과 우울을 덕지덕지 바르거나 마음 속에 시시때때로 불쑥불쑥 솟아나지 않고서는 '좋은 삶들'에 대한 인식이나 철학이란 그저 안일한 소리로 들리는 듯하다.  짓누르는 일상들은 납이란 추를 양쪽 어깨에 매다는 일은 아닐까? 그(녀)들은 차라리 쇼펜하우어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듯싶다.  그들의 마음 속에 안정감이란 드문드문 섬처럼 뜬구름처럼 왔다가는 것은 아닐까? 싶다.



어느 날 책방 매대에 있는 책들을 한 독서가이자 애서가가 쓸고 갔다.  조금 다른 속도로 아직 그 상태로 남아있는 매대의 중요한 책들을 담는다.  


혁명. 혁명. 혁명이라?


어쩌면 책들을 너무 쉽게 쓰는 건 아닐까? 지엽적인 안목들만 부유하는 건 아닐까? 문제를 측정하는 것들이 가늘고 얇은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새벽짬들에 뒷장들을 덮으며 보낸다. 젊은 청춘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안녕할까? 무자본 창업이라? 그들이 낳은 새끼들이 정말 복덩이로 굴러들어올까? 가지많은 나무들처럼 바람만 불면 웅웅거리지나 않을까? 부디 안녕하길 바라지만, 왜 하필이면 움직이는 모래 위에 기둥을 세우는 것일까? 거꾸로 물구나무선 책들이다. 안타깝다. 정작 몇 기둥을 제대로 발라내었으나 그 토대가 무엇인지 읽으려는 사람, 보려는 사람의 욕망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몇 년전 보았던 책들이랑 겹친다. 부디 삶의 희망을 변주하길 바라본다. 전시의 삶 가운데 겹쳐 쌓아올린 사상가을 읽어낸다. 무슨 말인줄, 무엇을 얘기하려는지가 뚜렷하게 잡히는 몇 달이었다. 


다시 몇 달 후에 함께 책을 나눈 이들에게 안부를 물어볼 일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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