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름이 끝날 무렵, 책방에 오랜만에 들러 세 권을 헤아려 에코백에 넣고 다닌지 오래다. 읽으려고 해도 읽히지 않는다. 아니 겁이 난다는 말이 맞다싶다. 그 아픔이나 생채기에 걸려, 작은 앎들이 마음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 조차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 권의 책을 골랐지만 어는 것 하나 마음 놓고 펼칠 수가 없다. 대체 왜 일까?


지난 폭염과 전시와 지인들과 만남들. 그 무게가  청년을 깨웠고, 친구들이 보는 모습들과 함께 천둥벌거숭이의 민낯들이 함께 솟아오르고 있다는 사실. 같이 생생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함께 지금의 지축을 조금 흔들고 밀어내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 변하는 존재이자 변하지 않는 존재이다. 긴 여름의 끝. 나는 하루하루 뭔가를 꼼지락하고 있지만, 하루하루를 의도한 적은 없다. 그리고 그 작업들이 경계를 지우고 있다는 사실도 뒤늦게 깨닫는다. 비정형을 의도하고 싶다는 비의식을 어렴풋이 알게된 것이다.



그러다가 지인의 책 얘기와 삶이야기를 듣다가 아래 책을 빌려읽다. 책이야기를 듣다가 고타마 싯다르타가 아니라 별 개의 인물로 말하는 것이 의아했는데 읽고나니 헤세의 의도는 명확했다.


 내가 얻은 생각 중의 하나는 바로,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네. 지혜란 아무리 현인이 전달하더라도 일단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같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야.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 할 수가 없는 법이야. 우리는 지혜를 찾아낼 수 있으며, 지혜를 체험할 수 있으며, 지혜를 지니고 다닐 수도 있으며, 지혜로써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말하고 가르칠 수는 없네. 204

 

모든 진리는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진리이다! 진리란 오직 일면적일 때에만 말로 나타낼 수 있으며, 말이라는 겉껍질로 덮어씌울 수가 있다. 생각으로써 생각될 수 있고 말로써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런 것은 모두 다 일면적이지. 모두 다 일면적이며, 모두 다 반쪽에 불과하며, 모두 다 전체성이나 완전성, 단일성이 결여되어 있지 204

 

이 세상을 설법하실 때에, 이 세상을 윤회와 열반, 미혹과 진리, 번뇌와 해탈로 나누지 않을 수 없었던 거야. 달리 어떤 방법이 없지.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 방법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205




볕뉘


1. 성서를 선과 악의 깊이로 읽을 것을 요구하는 <팡세>도 생각났고, 데이비드 봄과 보어도 겹친다. 그리고 평생을 거친 작품에 기조를 유지했다는 점 또한 걸려 유리알 유희를 주문한다. 싯다르타를 너머서는 안목에 아찔하기도 하다.


2. 친구의 책도 기다리고 있다.





























내가 얻은 생각 중의 하나는 바로,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네. 지혜란 아무리 현인이 전달하더라도 일단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같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야.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 할 수가 없는 법이야. 우리는 지혜를 찾아낼 수 있으며, 지혜를 체험할 수 있으며, 지혜를 지니고 다닐 수도 있으며, 지혜로써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말하고 가르칠 수는 없네.모든 진리는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진리이다! 진리란 오직 일면적일 때에만 말로 나타낼 수 있으며, 말이라는 겉껍질로 덮어씌울 수가 있다. 생각으로써 생각될 수 있고 말로써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런 것은 모두 다 일면적이지. 모두 다 일면적이며, 모두 다 반쪽에 불과하며, 모두 다 전체성이나 완전성, 단일성이 결여되어 있지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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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1 왜라는 질문은 대상의 구체적 역사적 정치적 측면을 이해하게 하며, 법 세계의 두 요소인 당위와 존재를 매개해 준다고 지적했다. 당위와 존재를 매개한다는 말은 쉽게 말해, 현실이 어떻기에 그와 같은 법규범이 만들어졌는가, 또는 거꾸로 이런 법규범으로 혹은 법 해석으로 현실을 '통제'할 수 있는가를 묻고 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2 당장에 거래가능하거나 합의가능한 공통이익은 부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낙관할 수 없는 미래를 전제로 가치의 충돌을 유예하거나 완화시키는 '과정의 법학'으로 전환/변환할 태세도 갖추어야 한다. 이게 가능하려면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고 다르게 감각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을 다르게 보고 느낄 수 있어야 당장의 현실적이고 주류적인 결론에 쉽게 동조하지 않을 수 있다.


13 어린 아이는 "더 아는 데에만, 자신이 아직 모르는 것을 다는 데에만 전념"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위에 있는 것을 보고, 듣고, 관찰하고, 반복하고, 실수하고, 자신의 오류를 교정하면서 스스로 배우"는 자이기 때문이다. 창의적 행정에게도 이것이 필요하고, 행정법과 행정법학은 그 근거와 한계가 되어주어야 한다.


17 법 언어의 세 가지 특징은 난해성, 모호성, 이데올로기성이다.  19 추상성의 원칙이라는 게 우리 민법상 물권행위의 무인성 無因性 이론에 해당한다. 법에서 추상 혹은 추상적이라는 말은 이런 것이다. '어떤 구체적이고 특정한 사안과 분리되어 있다.' 이런 의미로 추상적 규율, 추상적 위험, 추상적 규범통제 같은 개념을 이해하면 된다. 그냥 쉽게 말해 추상적이란 특정한 사안이 아니라는 뜻이다/일반적이라는 말도 불특정 다수의 사람 모두를 의미하는 용어로 이해하면 된다.


47 자본주의 행정법은 자기의 권리와 이익 외에 타인과 공동체의 권익에 관심을 갖는 이타주의적 개인(혹은 법인)을 이단자로 취급한다. 또한 비인간 동물이나 사물도 자본주의 행정법의 세계에 들어오지 못한다. 글로벌 차원의 기후변화와 이로 인한 기후위기를 눈앞에 두고도 계속 이런 인간중심적-이기주의적 법률학을 유지해도 될 것인지는 성찰해야겠지만, 현실은 그러하다.


49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법-권리 주체'로서의 이기주의적 개인이다. (주관적-개인적 공권)




2.


이 책의 기획 중 하나는 이 분산된 인지 시스템이 작동하는 비의식적 인지 집합체를 분석 탐구하는 것이다. 프롤로그 9

 

과학에서조차 생물학적인 비의식적 인지와 기술적인 비의식적 인지 간의 간격은 여전히 햇살이 내리쬐는 아침의 그랜드캐니언만큼이나 넓다. 10

 

나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가장 긴급한 문제들 중 하나가 지금 진행 중인 이러한 변화라고 본다. 이는 기술적 자율성 시스템의 발전, 인간의 의사 결정이 이 시스템의 작동에서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역할, 인간이 인지 능력이 있으니 지구상의 지배종이라는 깊은 믿음에서 비롯된 환경 파괴, 그 결과로 다른 생명체들의 인지 능력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성에 관한 문제로 확장된다. 11

 

행성적 인지 생태계. 행성적 인지 생태계는 인간 행위자와 기술적 행위자를 모두 포함하며 윤리적 탐구의 초점이 되기에 적합하다. 10

 

1부 인지적 비의식과 의식의 대가

 

01 비의식적 인지: 인간과 타자들

 

의식은 우리의 사고에서 중심 지위를 차지하는데, 의식이 인지의 전부여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세상의 일관성에 대한 기본적 가정들을 뒷받침하는 내러티브를 창조해 내기 때문이다. 반면 인지는 읫ㄱ을 훨씬 뛰어넘어 다른 신경학적 뇌 프로세스까지 확장되는 훨씬 더 광의의 능력이다. 또한 인지는 다른 생명체와 복잡한 기술 시스템에도 퍼져 있다. 의식 너머에 존재하는 인지 능력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나는 이를 비의식적 인지라 부르겠다. 3


갑자기 전방에서 앞차가 브레이크를 밟으면 도로로 다시 주의가 쏠린다. 이처럼 의식과 새로운무의식 사이에서 쉽게, 지속적으로 소통이 이루어진다. 5

 

소마틱 마커. 특정 상황이나 경험에 대한 감정적 신체적 반응은 표지 marker’ 처럼 작용해 미래에 비슷한 상황에서 의사결정을 내릴 때 영향을 미치는 신호 역할을 한다. 5

 

비의식적 인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반응이 느리고 처리 능력이 제한된 의식이 1000분의 1초마다 뇌로 흘러드는 내부와 외부의 정보 홍수에 압도되지 않도록 해 주는 기능일 것이다. 6

 

기술적 인지의 출현은 한때는 생물학적 유기체에만 있던 인지 능력이 세계 속으로 외재화되었음을 나타낸다. 7

 

환경에 근거한 인지. 환경에 근거한 인지는 근육의 움직임, 시각 자극, 청각 인식을 포함한는 모달 인식 modal의 정신적 시뮬레이션에 지원을 받으며 이것과 얽혀 있는 인지다. 겨울뉴런 회로. 9


사고하기와 인지 (인지생물학 라디슬라프 코바치)

 

코바치는 단세포 유기체조차 환경과 관련된 특징들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을 지니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서, 이런 특징들과 유기체를 구성하는 분자들 사이에 아무리 조잡하고 추상적이라 할지라도소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대체로 핵산 분자 수준만이 아니라 모든 수준의 생명에서 특정 기능을 제공하는 복잡성은 시스템의 구성물로 바뀌는 체현된 지식과 상응한다. 환경은 풍요로운 잠재성을 지닌 장소다. 각 장소는 해결해야 할 문제이며, 거기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문제를 해결했다는 의미이고, 해결책이 바로 체현된 지식 즉 생존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한 알고리즘이다. 14

 

코바치는 생명체가 환경과 관계하는 것을 존재성onticity 즉 변화하는 환경에서 생존하고 견대는 능력이라고 부른다. 코바치는 생명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 모든 가능성을 모든 수준에서 끊임없이 시험하고 있다. 15

 

식물의 신호와 식물 지능에 대한 주장

 

우리는 식물에 뉴런이나 시냅스 혹은 뇌 같은 구조가 있다는 주장에 어떤 증거도 없음을 밝히면서 시작한다. 19

 

문제는 식물이 지능적인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다. dfl 모두가 그 용어(지능)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동의하려면 수백 년이 걸릴 것이다. 문제는 식물이 자각하는가가 되어야 한다. 사실상 식물을 자각한다. 20

 

나무가 법적 지위를 가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포함된다. 21

 

연구자들이 전기 신호와 화학신호, 유전자 구조, 식물 행동 간의 상호작용을 조사하면 할수록, 지능이라는 대단히 인간중심적인 단어에 어떤 입장을 취하든, 식물이 환경에 대한 광범한 정보를 해석하며 놀랍도록 섬세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도전에 대응한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23

 

기술적 인지

 

자기-재생산 자동자

단 이는 컴퓨터가 오작동하거나 전기가 끊어지는 일이 없어야만 가능하다....이들 연구는 논쟁과 질문을 만들어 내는 데에는 유용하고 생산적이었지만, 기술적 시스템이 결코 완전히 살아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결국은 실패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기술적 시스템은 완전히 인지적일 수는 있다...인지는 정보와 의미를 연결하는 맥락 안에서 정보를 해석하는 프로세스다. 27

 

정보의 의미는 그것을 해석하는 프로세스에 의해 주어진다. ....프로세스는 맥락 안에서 발생하며, 맥락은 상황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식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인간들 사이의 자연어 발화에 적용되지만, 식물이 흡수하는 화학물질 속의 정보에 반응하는 정보적 프로세스, 문어가 근처에서 잠재적인 짝을 감지할 때의 행동, 계산 매체에서 코드의 레이어 사이의 커뮤니케이션도 마찬가지로 잘 설명해 준다. 29

 

시몽동. 안정적인 평형 상태에 이르지 않고 오직 과도기적인 준안정 상태에 머무는 포텐셜 에너지 개념이다. 시몽동은 이 흐름을 정보라 불렀고, 정보가 본질적으로 의미와 연관된다고 생각했다. 30

 

피드 포워드. 정보가 미리 앞서 전달되어, 무언가를 예상하거나 준비하도록 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용어. 31

 

인지 분석하기


인지의 세 갈래 틀

그림1 피라미드로서 (인간) 인지의 세 갈래 틀

자각의 양태 비의식적 인지 물질적 프로세스 37 삼중 틀: 역동적인 이질적 위계 조직으로 묘사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40

 

비의식적 인지는 의식보다 훨씬 더 빨리 작동하며, 의식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조밀하고 미묘하며 잡음이 많은 정보를 처리한다. 비의식적 인지는 의식이 잡아낼 수 없는 패턴을 식별하고 거기에서 추론을 끌어내며, 이에 기반해 미래의 사건을 예측하고, 그 추론과 일치하도록 행동에 영향을 준다. 38

 

살아 있는 유기체는 선택과 결정, 해석이 가능하다. 39

인지는 유연성, 적응성, 진화가능성이 포함된다. 41

 

행위자와 매개자

 

인간/비인간을 대체할 또 다른 구분으로 인지자 대 비인지자를 제안하겠다. 한편에는 인간과 다른 모든 생물학적 생명 형태는 물론이고 모든 기술적 시스템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물질적 프로세스와 생명 없는 객체들이 있다. 43

 

비인지자들. 눈사태, 쓰나미, 토네이도, 눈보라, 모래폭풍, 허리케인 44

이것들은 선택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함의를 띠는 인지 집합체에 뿌리박힌 행위자가 아니라 매개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인지자는 행위자로, 물질적 힘과 객체는 매개자로 쓰는 것이다. 45

 

더 나은 공식은 이분법이 아니라 상호 침투다. 상호 침투는 인간, 비인간, 인지자, 비인지자 그리고 우리의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적 과정을 통해서, 그 안에서, 그 너머로 흐르는 연속적이고 어디에나 퍼져 있는 상호작용이다. 46

 

왜 계산 매체는 단순히 또 하나의 기술이 아닌가

기술의 편재성, 다양성,강도로 이루어지는 궤적, 켈 리가 인간중심주의적으로 욕망과 동일시하는 궤적을 따라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47

 

계산 매체는 다른 어느 기술보다도 더 강한 진화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48 계산 매체는 본질적으로 인지 기술이며, 그 이유 때문에 본질적으로 인지적인 종인 호모 사피엔스와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우리는 결정이라는 것을 단 하나의 힘 혹은 힘들의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프로세스로 생각해야 한다. 49

 

기술적 인지와 윤리

 

부르노 라투르 물리학자들이 우주의 팽창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손실 질량/에너지에서 유추해 윤리적 행위자의 손실 질량이 기술적 인공물이라고 말하면서 이 질문을 건드린다. 여기에서 손실 질량은 우리의 도덕성을 구성하지만 숨겨지고 무시당한 사회적 질량들이다: 기술적 인공물이 도덕적 행동을 유도하고(안전벨트, 과속방지턱) 인간이 습관에 영향을 준다. 50 fitbit 팔찌(스마트 워치) 등의 장비는 인간의 사회적 행동과 무의식적 행동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누적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51

 

인간행위자와 기술적 행위자가 뒤얽힌 그물망에서 버빅은 인간과 기술 양자가 도덕적 행위성을 공유하며, 암묵적으로는 도덕적 책임까지도 공유한다고 주장한다. ”도덕적 행위성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분배된다. 도덕적 행동과 결정은 인간-기술 연합의 산물이다.(타자기, 인터넷) 52

 

행동의 일반적 경향은 그 결과의 총합에 따라 더 유해할 수도, 덜 유해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좋은 결과의 총합과 나쁜 결과의 총합 사이의 차이에 따라 결정된다. 54

 

기술적 인지 시스템이 우리 주변에 온통 깔려 있고 일반 대중이 모르게 작동하고 있다. 그것들의 효과를 분석하고 평가하려면 기술적 인지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인지를(인간) 의식하고잠 동일시하는 수백 년 묵은 전통에서 빠져나오게 해 줄 견고한 틀이 필요하다. 2. 인간의 인지 생태계가 기술적 인지와 어떤 점에서 다르고 어떤 점에서 비슷한지를 포함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더 정확한 그림도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3. 물질적 프로세스와 인지자들이 어떻게 다른지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57

 

02 비의식적 인지와 의식 간의 상호 작용

 

비의식적 프로세스가 직관을 의식적 자각에 피드 포워드라 수 있게 해 주는 메커니즘, 이 메커니즘에서 시간성이 하는 중요한 역할을 논한다. 59

 

의식의 대가

 

자아는 우리의 유기적으로 연결된 정신적 삶을 특정한 식으로 상상한 산물, 구성물, 모델이다./ 자아를 본질적 특질이나 소유물이라기보다는 아이가 자라면서 갖게 되는 경험, 감정, 삼성을 통해 창조되는 구성물로 본다/의식과 자아 감각이 지닌 기능에는 과거의 경험을 기억으로 회상하고, 미래의 기대를 만들어 내고 기억과 비교해 예상과 결론에 도달하는 정보 처리 기관으로서 역할이 포함된다. 61

 

자아-모델과 자아가 지향성을 가진 대상으로 구성하는 모델. 타자를 의식하고 타자와 관련을 맺지 않는 한 자아 따위는 없다. 62 언어 시스템은 뇌의 인지 프로세싱 네트워크에서 출력된 결과를 고도로 편집된 스냅숏으로 요약한 다음 퍼뜨린다. 63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의식은 사건들을 편집해 관습적 기대에 따르게 만든다. 2. 의식이 지각보다 몇백 밀리 초 늦다. 0.53. 자기 스스로를 주요 인물로 만드는 자아를 소유하는 것이다. 65 우리를 스스로 자아로 인식케 하는 바로 그 기능이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뿌리박힌 생물학적 사회적 기술적 시스템의 복잡성을 보지 못하게 하고, 우리가 가장 중요한 행위자이며 우리와 다른 매개자들의 행동의 결과를 통제할 수 있다고 쉽게 착각하게 한다. 66

 

의식과 인지적 비의식에 대한 신경 상관물

 

원형자아는 내가 인지적 비의식이라고 부른 것에 해당한다. 67

 

의식은 오로지 대상, 유기체, 그들의 관계가 재표상될 수 있을 때만 일어난다. 의식이 재표상되려면 당연히 먼저 표상되었을 것이다. 이런 매핑은 원형자아를 발생시키며, 그 안에서 일어난다. 그때 소마틱 마커들이 이 원형자아 수준에서 신체 지도 안으로 조합되고, 이로써 신경신호와 화학적 신호의 기저를 이루는 물질적 프로세스와 의식 사이를 매개하게 된다. 68

 

뉴런 집단들은 재귀적인 재입력되는 연결들을 통해 자기들끼리 연결된다. 69

 

의식에서 시뮬레이션과 재표상

 

시뮬레이션은 세계, 신체, 마음과 더불어 경험이 일어나는 동안 습득되는 지각, 운동, 내향적 상태의 재발제이다. re-enactment 71

 

누군가의 행동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당신의 뇌에서 그와 같은 움직임을 가상현실로 시뮬레이션해야만 하는 것과 같다. 겨울뉴런 72

 

환경에 근거한 인지 관점에서 뇌는 감정에 감정적 정서적 태그를 붙여서 기억에 저장한 다음, 비슷한 경험이 일어날 때 시뮬레이션으로 이를 재활성화하기 위해 신체 상태를 이용한다./시뮬레이션은 고도로 추상적인 사고에조차 신체 상태를 그 기반으로 부여하면서 원형자아와 의식 사이 소통 프로세스의 본질적 부분으로 작용한다. 73



볕뉘.


0. 


두 책을 읽으면서, 아니 정리해내면서, 덧보태며 읽으면서 많은 감회와 느낌이 든다.  행정과 법은 왜 이리 고루한가라는 생각이 내내 골치아픈 존재로 가라앉아 있다. 무의식이 아니라 비의식이라고 명명하고도, 분열생성이라는 말을 붙이고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질문과 명명의 장벽 속에 갇혀 있다는 느낌들.  두 책은 그런 면에서 벽을 허물면서도 통합해주는 느낌의 봇물같다.  전태일을 법학과 대학생을 만나고 싶어한 것처럼, 버전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법에 대해 이런 의문들에 새로운 바람과 이름, 깃발을 흔들어주길 바란 것 같다. 


1.


 이교수는 서슴없이 갈파한다. 시와 문학을 법학에 접붙이기를 애용하는 저자답게, 책의 각주는 도움책들로 즐비하다. 그의 서재에 꽂혀있을 책들이 보인다 싶다. 처분하지도 못할 책들을 이 책을 안식년에 오로지 전념하면서 골라내었을 책들의 운명도 느껴진다. 그래 이런 친구를 만나고 싶었다. 이런 친구만 있다면 시대와 역사에 역행하는 법의 무례함에 똥침도 놓을 수 있으리라는 호기도 전달된다. 그가 있어 고맙다.


2. 


 비의식적 인지. 아메바와 집신벌레도 이 세상과 교감하고 소통하고 스스로 바꿔낼 수 있다. 놀라울 만한 확장에 더해서 우리는 놀라우리 만큼 생명과 비생명의 인지에 모르고 있다. 


3. 


 행성적 인지 생태계라는 단어와 명명을 공글리고 있다. 가슴과 몸에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품을 수 있는 기쁨이 느껴지는 말이기도 하다. 틈틈이 옮겨적고 있긴 하지만, 가을날이 기후우울을 벗어나게 해 머물 수 없다. 그래도 조금 흔적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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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온 책을 펼치니 


9월 1일


휘익 휙휙 휘이익 휙휙

파란 호두도 날려버리고

시디신 모과도 날려버리고

휘익 휙휙 휘이익 휙휙


<바람의 마타사부로> 첫 줄이 시작된다.


무더위의 긴꼬리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이렇게 바람이 휙휙 불어오는 날이면 희망의 끈을 다시 부여 잡는다. 작은 손아귀의 안간힘들이 느껴지는 날, 그래 우리는 가을을 맞고 있는 것이다.라고 마음을 다시 잡아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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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과 교육 등 공공 부문은 앞선 인용문에 쓰여 있는 윤리, 의무감, 자부심, 직업의식, 용기처럼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내적 동기에 기초해서 겨우 성립되고 있습니다. 내적 동기들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책임입니다. 그것도 외부에서 떠넘긴 책임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은 자기 속에 내재한 책임이죠. 좀더 강하게 표현하면, ‘사명입니다. 67

 

우리가 시간을 들여 함께 야구를 하면서 경기 전체를 관찰하고 파울의 의미를 조금씩 배우듯이,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해온 언어놀이를 조금씩 배우고 함께 언어놀이를 만들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 창문이라는 낱말을 언어놀리에 섞어가며 배웠듯이.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언어놀이를 함께 만드는 것입니다. 152

 

미국의 SF 작가 로버트 블록의 단편 중 <부서진 새벽>: 핵전쟁 후 죽음의 재가 흩날리면서 건물 안의 군사령관은 우리나라가 이겼다.”라고 크게 웃는 장면을 되보면서, 이 작품은 100만 명의 핵규탄보다 뛰어나고 큰 울림이 있다고 여긴다. 197

 

<부활의 날> 스미르노프 교수: 들어줄 사람이 없는 세계를 향해 죽어가면서도 계속 얘기합니다. 3개월 전 까지 세속적 생활, 보잘것없은 일상에 빠진 상황에 대해 그는 인류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에 지나치게 얽매였다고 표현합니다. 또한 그와같은 우리의 인간적인 일상생활에 대해 도리어 애처로울 정도입니다.”라고 말했죠....이 세계가 위태로운 공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저 잊어버린 척했을 뿐이죠. 226-227


볕뉘


1. 


셜록홈즈-마르크스-스피노자. 그들의 시선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이들은 건너뛰지 않는다. 세심한 눈길은 계단의 숫자까지 꿴다. 사소한 하나하나가 어떻게 전체를 움직거리게 만들 수 있는지 결국은 알게된다. 그러니 그들은 사물을 관통하면서 꿰뚫는 법을 반복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는 그들의 손끝만 보고 있단 말이다.  능동태와 수동태의 언어화법에 걸려든 당대인은 이분의 구도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도와 모만 보고 원할 뿐, 어디에서 개-걸-윷에 느낌을 머물게 할 수 없다. 지독한 불감. 


2. 


과거-미래를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 선물이자 증여다. 간략하면서도 쉬운 글과 쉬운 호흡, 그리 많지도 않은 저자들을 지나다보면, 묵직한 것이 걸린다. 나만의 삶만이 아니라 세계성이란 그물. 그 곳에 찌릿 감전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 의도에서 아마 글틀과 글의 음악을 대유했을 것이다. 


3.


지금은 어디쯤일까? 산과 산사이 바위가 내려오고 있는 것일까? 위태롭게 산 정상 위에 바위가 서있는 것일까? 위태로움은 배가되고 있지만, 정작 우리들은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어떻게 될지 실감을 두려워하고 있는 상태는 아닐까? 공포에 가까워 아무 것도 상상하려 하지 않는 상태는 아닐까? 


4.


누군가 외치거나? 누군가 지금 위태로운 상황을 인지하게 만들거나? 나만은 그 바위 아래 돌멩이 하나를 궤거나 하는 시도가 필요한 건 아닌가?라는 질문들을 하고 있다. 지금 밖을 보려는 노력은 스스로 안스러워해야 할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닐까?


5.


산불과 수마, 끊임없는 재해에 점점 무감각해지는 1인 가족, 관계의 허약함은 쓰나미처럼 몰려올지 모르는 재해와 만일에 대해 대비하지 못한다. 그 아이러니를 다루고 있다. 대체 왜 우리는 상상하지 못한단 말인가? 가벼운 상상조차 일상에 접목시키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그 절박함을 외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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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의 상황은 지식과 정보와 같은 정확한 수치, 시뮬레이션, 평가, 진단, 수식, 그래프를 통해서 해결될 수 없다. 대신 지혜와 정동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시스템과 제도를 바꾸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행하여야 한다. 지식과 정보는 ?라는 질문을 던지며 하나의 대답이 선형적으로 연결된다. 반면 지혜와 정동은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며 다채로운 대답으로 향하게 하는 힘이 있다. ”어떻게?“라는 질문에 착목할 때 우리의 행동 변화는 어떠할까? 우리 생각은 설사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그것이 문명의 종말, 즉 화석문명, 자동차문명, 육식문명, 탄소문명 등의 종말이 되리라는 점으로 향할 것이다. 이를 통해, 어떻게 탄소 감축을 위한 생활양식과 시스템과 제도의 변화를 이루어 문명의 전환으로 향할 것인가 끊임없이 탐색하며 다양한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79

 

다양한 출구의 열림, 그것이 정동이다. 그런 점에서 정동은 원인과 결과, 근거와 정의, 입구와 출구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인과론적인 열쇠개념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곳에 있지 않다. 근거 있는 주장이 모두 유효한 것이 아니다. 입구와 출구의 분열은 오히려 활력정동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정동은 왠지 비합리적이라고 여겨진다. 정동이 왠지 촌스럽고 전근대적인 것이라고 여겨진다. 정동이 미신이나 주술과 모종의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정동은 고도로 조직되어 있으면서도 고도로 자유로운 것이다. 그래서 더욱 우리가 삶을 통해서 습득하고자 했던 열린 지혜의 지평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지금 우리는 정동을 지도제작으로서의 도표로 바라보면서 영구혁명을 통한 삶의 양식의 심원한 변형을 타진해 보게 된다. 85

 

이제 자기생산은 활동이고, 타자생산은 노동이라는 기준점은 무의미해진 상황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176

 

정동의 역설은, 정동이 발생하는 배경은 욕망과 사랑과 같은 분자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구체화되는 방식이 지극히 몰적인 것이라는 점에 있다. 재미와 놀이로 시작한 것이 의미가 생기면 또다시 일이 되는 구도 역시 생긴다. 이에 따라 욕망, 정동 등이 발생하는 하나의 틈새가 열리면 무의식의 행렬과 같은 그것을 지속하고자 하는 반복된 틀이 발생한다. 재미와 놀이, 흥미, , 흥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큰 동기부여가 되었던 것도 결국 의미와 모델에 복무하기 위한 절차적이고 과정적인 설정의 일부가 된 것 아니냐는 의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정동자본주의는 활동과 노동 둘 다를 이음새로 연결하는 미시적인 전자 그물망을 장착하고 있다. 183

 

자본은 몰적인 것에서 이득을 취하던 후행적인 태도를 벗어나 이제는 선행적으로 활력과 생명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주목한다. 자본은 정동의 촉발과 발생, 흐름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험하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 이를테면 스타트업 기업 등은 활력과 생명력이 발생하지 않으면 금방 사업을 접어버리는 새로운 양상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 역시 플랫폼에서의 정동의 평판체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양상을 의미한다. 185 이제 이미지-영상의 흐름은 정동을 고무하고 생산하는 주된 원천이 되었다. 이미지-영상의 흐름은 감응과 감흥, 정동을 유발하고 삶을 지속하도록 만드는 기반이 되었다. 기존의 미디어가 개인의 감정생활이 그 기반이었다면, 정동자본주의에서의 플랫폼은 유튜브나 넷플릭스처럼 이미지의 흐름의 시너지에 따라 정동이 유발되도록 설정되어 있다. 이에 따라 정동의 새로운 국면은 자연발생적인 정동과는 완히 다른 차원으로 이동해 있다. 기호의 반복이 에너지와 활력의 원천이 될 것이라는 예언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인지편향적인 콘텐츠를 취사선택해서 보게 되었고, 플랫폼에서의 정동의 유발과 촉발의 상황은 결국 노동과 활동의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다. 186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론은 발견주의에 머물러 있는 방법론이다. 반면 가타리의 주체성 생산전략은 구성주의로 나아간다. 187

 

활력의 가속화, 살림의 가속화는 변변한 소득의 보상이 없음에도 현실을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원천이 되지만 소독 보장을 요구하는 아래로부터의 압박과 압력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제 노동의 여러 모습이 살림의 유형으로 재편된다. 동시에 금융, 기업, 국가, 환경 등에서의 작동 원리는 대부분 살림꾼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노동과 관련된 소득은 최소화되고 다른 소득원을 찾기 위하여 다중들은 부심한다. ”북반부 현대 사회와 같은 경제적 다양성, 노년층 증가와 교육기간 증가로 인한 비싼 부양비, 서비스 분야 비율이 높은 사회 경제 체계가 요구하는 바를 충족하고자 할 때, 화석 연료가 줄어들면 신진대사 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동 시간이 길어지고 더 많은 노동자가 투입돼야 할 것이다. 이는 노동 시간 감소를 주장하는 탈성장 제안과 상반된다. 미래에 에너지가 희귀해질수록 우리는 더 많이 일해야 할 것이다.“ 192-193

 

판 짜는 자는 기획자나 설계자, 엔지니어 등의 형상이 아니라, 그 판의 배열을 바꿈으로써 사물, 생명, 인간, 기계 등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삶의 토대라 할 수 있다. 196

 

그 판 위에서 벌어지는 활동과 정동이 만들어낸 이익은 플랫폼 기업이 다 가져가 버린다. 사실 여기에 동원된 활력과 정동은 이전에는 공동체가 자기 자신을 생산하기 위한 에너지로 쓰던 것이다. 197 플랫폼이 형식적으로 전자적 직조망을 띠고 있을 뿐, 공동체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묘한 착시효과가 여기서 발생한다. 게다가 익명성을 보장받으면서 편리한 플랫폼의 시스템에 익숙해지다 보면 살림을 통해서 경제를 통합하려던 기존 공동체 운동의 방향성이 낡고 촌스러운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플랫폼이 살림의 판 짜는 영역을 침투해 들어오는 이유는 바로 정동과 활력을 빨아들이고 포섭하기 위함이었다. 198

 

섹슈얼리티 역시 활력정동의 다가치적이고 다기능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여기서 퀴어라는 특이점은 정동해방과 활력해방을 달성할 민주주의의 척도이다. 섹슈얼리티라는 다양한 맥락과 탈맥락 속에서 활력정동은 히행하고 횡단하고 변이하면서 탄력성을 갖춘다. 어쩌면 젠더불평등에 대한 사회학적인 해법은 정동해방, 욕망해방, 활력해방의 측면과 접속한 민주주의 가속화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200 자기를 유지하고 보존하고 살리고 부추기고 양육하는 일련의 과정 없는 자기보존의 욕구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생명 에너지와 활력으로서 욕망과 탐욕과 갈애의 성격을 띤 자본주의적 욕망은 구분될 수 있다. 살림은 전근대와 탈근대를 모두 관통한다. 살림은 단순하다. 그러나 다가치적이다. 다기능적이며, 다양하다. 이러한 속성들이 호혜적으로 증여적인 공동체의 자기생산을 가능케하는 살림의 여러 측면들이다. 결국 살림의 문제는 세상과 생활세계, 둘레환경과 관계를 맺는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측면의 거대한 문제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202

 

권리 담론은 태생적으로 소유권과 재산권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근대의 책임주체가 누려야 할 개인의 권력과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민권이나 인권의 맥락은 결국 근대의 이분법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시민의 눈으로 본 정동은 너와 나 사이를 흐릿하게 만드는 흐름으로부터 벗어나 너와 나의 분명한 구분이 가능할 때라야 시민의 영역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정동의 순환과 흐름에서 장애로 작동하는 시민성은 결국 그 일을 해낼 사람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도외시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다시 말해서 규제적인 것과 구성적인 것은 함께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다. 205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의 입장에서 뉴턴을 바라볼 때 주어진 물리적인 시공간에 늘 이행중인 사물을 위치시킨 단순 정위의 오류가 시민성에도 존재한다. 즉 과정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는 지속, 과정, 사건성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완결형이자 결과형으로 물리적 시공간에 배치하는 것이 단순 정위의 오류를 보이는 시민성의 모습이다. 206 복수적 소유권. 권리 다발 중 가장 본질적인 권리는 타인을 배제할 권리이다. 권리다발의 개념은 소유권의 정치적, 경제적 강제력과 그것이 창출하고 유지하는 사회적 위계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키는 데 이용한다. 다시 말해 권리주의 담론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타자를 배제하는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 207

 

자율주의는 욕망과 정동의 공동체를 요청한다. 새롭게 재창안된 공동체 개념은 1) 공유자산, 생태적 지혜, 집단 지성, 오픈 소스와 관련된 공통성의 논의 2) 사랑, 욕망, 정도(=모심, 살림, 보살핌, 섬김), 돌봄의 흐름 3) 관계성좌, 위상기하학, 자리, 위치로서의 배치 3) 활동의 결과가 바로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생산 4) 중언부언하면서도 일관된 흐름이 있는 일관성의 구도 5) 효율성, 속도, 계산의 논리가 아닌 탄력성으로서 자율 6) 냄새, 색깔, 눈빛, 몸짓, 맛 이미지와 관련된 비기표적 기호계 7) 의미와 일 모델이 아닌 재미와 놀이 모델로서 분자적인 것 등의 논의를 촉발할 것이다. 211

 

정동은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뱀이다. 권리주의 통해서 무권리 상황, 열정 노동, 감정 노동의 돌파구를 형성할 수 있고, 자율주의를 통해서 관계의 성립, 활동의 확대, 정동노동의 탈주로를 마련할 수도 있다. 217

 

1인 가구는 감정과 정서의 공회전이나 독백적인 감정생활에 머물기 쉽다. 결과적으로 자기돌봄과 서로돌봄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222 되기는 이기 being과 달리 완결형이 아니라 과정형으로서 자신 안에 타자보다 더 타자다운 소수성이 내재해 있음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에 소수자 되기라고 할 수 있다. 223

 

정동노동은 사랑노동, 돌봄노동, 연대노동의 세 차원의 관계 구분으로 나타난다. 225

 

여성의 돌봄노동은 이중구속 상태로 수행되고 있다. 여성들이 사회로 진출하여 자신이 바로 돌봄, 서비스, 정동노동에 동원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자녀나 부모들은 사회가 제공하는 또 다른 돌봄노동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결국 사회가 돌봄을 책임져야 하는 영역이 있고, 커뮤니티케어가 담당해야 할 영역이 있고, 이를 또한 배치하는 가족이 담당하는 영역이 있다. 현대 사회는 구조적으로 이러한 여러 영역의 돌봄이 동시적으로 요구된다. 돌봄의 사회화는 정동의 발전적인 현상이라기 보다는, 사실상 자본주의가 직면한 현실적인 요구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인 정동의 재생산의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28

 

돌봄대화의 특기할 만한 메시지 가운데 하나는 돌봄 합리성이 경제적 합리성과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와 대화를 나눈 거의 모든 사람이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는 일을 하기 위해 상당한, 몇몇은 커다란 경제적 희생과 개인적 희생을 치렀다. 대부분의 일차적 돌봄 수행자가 여성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희생을 여성이 치렀다. 231

 

정동 자본주의는 정동을 포획하려고만 할 뿐, 자신의 논리적 일관성에 따라 정동동을 가치화해야 한다는 점에 침묵하는 위선에 빠진다. 232

 

위생적이기만 한 관계의 친구는 어디에도 없다. 친구와 나누는 우정의 공식은 이기적이면서도 이타적이고, 착하면서도 악동 같고, 협력하면서도 견제한다. 이러한 입체적인 관계 속에서의 친구라는 존재조차도 사실상 적잖이 부담되는 개인의 상황은 결국 위생적인 가공의 친구, 스테레오 타입화된 인공의 친구와 대면하는 데 만족한다. 정동을 촉발하고 촉매 역할을 하는 친구가 없는 현대인들은, 정동의 소외로 인해 침잠하고 절규하고 외롭고 고독하다. 237

 

가깝게 사는 것, 함께 행동하는 것, 함께 일하는 것, 서로 가까이서 휴식을 취하는 것, 그것은 총체이지만, 총체적 시설이 아닌 총체적 공동체이다. 마을에서의 친구, 이웃의 관계는 정동을 순환시킬 뿐만 아니라, 정동을 미학화하고 정동의 우아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이미지-영상을 통한 감정생활이나 플랫폼을 통한 정동 유통이 아닌 실질적인 관계를 통한 정동의 순환이 줄 수 있는 혜택은 풍부하다. 239

 

관계망에서 제도로 향하는 것은 무의식의 의식화라고 할 수 있으며 아래로부터 협치의 기본 방향이다. 반면 제도에서 관계망으로 향하는 것은 의식의 무의식화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기본적인 관치의 방향이기도 하다. 가타리의 거버넌스의 적용 영역인 제도(=관계망)의 구도는 두 가지 방향성이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제도와 관계망이 교직되어 있는 상태를 뜻한다. 240

 

가정에서의 정동순환 과정에서는 자신이 설 자리가 거의 없고 그저 감정생활을 위한 공간으로만 간주하고 있던 남성들은 감정화 단계를 통해서 자신의 감정대로 할 수 있는 위력과 힘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이러한 자유로운 감정 분출은 주로 학대, 폭력 등이 개입되는 과정이다. 감정은 정동의 순환 과정에 돌연 개입하여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서 감자기 집기를 부수거나, 정동순환의 핵심에 있는 여성에게 학대적인 행동을 일삼는다. 그마저도 비겁하게 감정의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술이나 약물의 도움을 받아서 그런 행위를 정당화한다. 이에 따라 마지막으로 정도 파괴 단계에 도달하게 되어 정동순환의 돌봄과 책임 영역을 파괴하고 만다. 242 동물학대.

 

플랫폼자본주의(=정동자본주의)의 외부란 없다. 정동을 발휘하는 일련의 과정들, 다시 말해 시청노동, 주목노동, 향유노동, 정동노동 등은 플랫폼을 살찌우고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253

 

이 판을 주도하는 플랫폼은 욕망가치를 독점적으로 이용할 권한을 갖고 있으며, 무수한 사람들의 정동이 동원되면서도 거기에서 발생하는 이득을 그중 판을 주도하는 플랫폼의 것으로만 독점하려는 책략이 작동한다. 욕망경제의 작동양상의 기반은 단연코 욕망가치, 정동의 가치라고 할 수 있지만, 끊임없이 채굴하고 추출하고 식별하고 분리차별하여 자본화라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셈이다. 257

 

마치 집 앞에 지하철이 생겨 부동산 가치가 높아지는 것을 공익적 가치로 회수하여야 하는가? ‘기본소득의 재원을 어디에서 충당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MMT modern monetary theory를 제시하는 그룹도 있다. 의미화=가치화=자본화의 인지자본주의 형태를 넘어서 지도화=욕망가치화=화폐화로 넘어가는 정동자본주의 형태의 초입에 있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MMT논의의 진정한 의도가 사실상 욕망가치론을 지상에 드러내면서 기본소득을 성립시키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욕망화폐, 생태화폐, 기후화폐 논의를 격발하는 것이 MMT이다. 기후화폐의 경우에는 발권자가 자신이고 탄소 감축분에 따라 발권한다는 점에서 욕망가치론을 전진배치하며 다음 단계의 논의로 이행시킨다. 258-259 기후화폐를 사용하는 사람은 탄소를 감축한 만큼 스스로 발권할 수 있는 화폐 생산자가 된다. 그리고 정동을 발휘하고, 촉발시키고, 생산하는 모든 예술적이고 미학적인 행위 양식이나 돌봄과 살림의 양식은 발권의 가능성으로 제기된다. 260

 

외부의 소멸은 외부효과의 소멸과 동의어이다. 외부효과는 제3세계에 폐기물을 떠넘기면서 외부라고 간주된 영역에게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 양식을 의미했다. 외부효과는 성장주의의 기본 작동 방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사실상 근대 시기 자본이 노동을 대할 때조차도 그 기본 태도는 변증법적인 착취관계가 아니라, 외부효과로서의 식민주의였다는 점도 확인된다. 271

 

정동이 하나의 자원이 된 정동자본주의 하에서는 두 가지 전략이 작동한다. 하나는 내부에서 차별과 배제를 통해서 혐오라는 정동을 촉발하는 방법이다. 이 경우는 외부 자체의 소멸을 내부의 차별과 배제, 혐오의 정동을 통해서 충당하고 이를 상쇄시키려는 파시즘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정동자본주의 하에서 정동을 채굴하여 플랫폼 유형으로 이를 머물게 하려는 시동이다. 좀 더 역동적인 정동으로서 인기, 재미, 모방, 쏠림, 평판 등으 체계를 가동시키려는 방식을 취한다. 이 후자의 방법이 파시즘의 해독제와 같이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정도자본주의로 내부의 외부로서 정동을 이용하는 또 다른 방법일 뿐이다. 정동자본주의의 외부는 없다. 272

 

청년세대의 전략은 정동의 흐름이 머물 수 있는 공간에 프라이버시라는 여백을 설정함으로써 숨쉴 여유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관계 자체가 정동을 자연스럽게 흐르고 순환하게 만드는 것이 기존 공동체의 구도였다면, 이제는 관계를 통해 정동하고 정동되는 과정에서의 혜택을 선취하는 쪽과 이용당하는 쪽이 있다는 구도가 등장한다. 동시에 정동자본주의 자체으 외부성의 소멸은 관계를 맺는 데 아주 신중하게 여백, 여유, 여가를 설정하지 않고서는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간다는 위기감도 상존하게 된다. 278 개별자 문화청년들의 새로운 지향과 그들이 선튀한 공동체의 미래가 가시화되기도 전에 청년들은 자유로운 개별자가 아니라 자기-계발해야 하는 고립된 주체로 파편화되고 있다. 279

 

아이들이 놀이를 한다. 그는 놀이 플랫폼 운영자다. 그는 이내 놀이콘텐츠제작자, 놀이공원관계자, 장난감회사관계자와 놀이진행자, 놀이연구자, 놀이전문가 모두가 놀이플랫폼에 머물도록 만든다. 플랫폼 자체가 꽃피는 성운이 되기를 염원하는 것이 이 놀이 플랫폼 운영자이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놀이는 소비 상품일 뿐 아이들이 진짜 놀이 생산자임을 무시한다. 왜냐하면 정동이 플랫폼에서 잘 유통되고 소비되는 것을 바랄 뿐, 현장에서 꽃피는 성운을 이루고 생산되는 바는 이 놀이 플랫폼의 의도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283

 

코드의 잉여가치는 젠트리피케이션, 대기업 골목상권 진출 제3세계 분리차별, 국가의 반생산 도입 등을 내용으로 한다. 이는 정동의 흐름에 코드를 주입하여 그 속에서 자본을 추출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대표적인 인지자본주의의 공동체 약탈 방식이다. ’의미화=표상화=모델화=상품화=자본화라는 방식의 코드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 ”이 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만의 모델이다“ ” 책상은 책상이다라는 방식을 통해서 정동의 흐름을 멈추게 하는 코드화가 이루어진다. 284 코끼리에 협착되어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해도 코끼리를 생각하게 된다. 결국 하나의 모델로서 프레임이 우리를 협착시키는 것이다. 발상, 표상, 모델, 의미 등은 정동의 흐름을 붙잡아 매고 이에 협착되어 이중구속되게 만든다. 이중구속은 두 개의 잘못된 발신음이 동시에 수신되어 이에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없게 해서 쩔쩔매맨서 이것에 머무르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285

 

흐름의 잉여가치는 정동의 흐름에서 활력과 생명력 즉 삶의 잉여가치를 생성시키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활력과 힘이라는 삶의 잉여가치는 정동자본주의 하에서는 권력, 자본, 돈 등이 된다. 287

 

권력의 잉여가치: 갑질 이는 직접적인 노동계약을 통한 갑을으 관계를 회피하면서도, 고용 없는 긱 경제를 작동시킨다. 여기서 긱 경제는 코미디, 연극, 영화에서 단기계약적인 노동을 의미한다. 긱 경제는 노동을 사라지게 하고 정동으로 이행하도록 만든다.(배달노동, 택배노동, 물류노동) 다시 말해 정동과 노동의 구분을 흐릿하게 만드는 것과 동시에 기계류를 통해서 일자리를 사라지게 만듦으로써 노동의 권리가 보장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으로 향한다. 사람들은 평판체계를 의식하며 자신의 권력의 배치를 조정한다. 그런데도 가장 최악의 갑질을 하고 있는 플랫폼 판 자체에 문제제기하거나 평판체계를 작동시킬 수 없는 기괴한 배치가 등장한다. 289 플랫폼은 보이지 않는 판으로 그 자리를 만들어서 배후에 숨어 있다. 동시에 플랫폼 노동자는 그림자 노동의 형태로 비가시화된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소비와 유통, 향유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배후에서는 수많은 정동의 일들이 벌어지는 중이다.(폭설) 290 정동자본주의에서는 갑질을 추방하는 평판체계를 마치 간첩작전처럼 비밀스럽게 작동시키면서도, 미시권력의 그물망인 플랫폼 자체가 갑인 것을 감추거나 무의식적으로 용인하도록 만든다...어떤 사람이 정동의 활력과 생명력을 가진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그에게는 그만큼의 미시권력이 주어진다....정동자본주의 하에서이 권력의 잉여가치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양극화되고, 더 독점되고, 더 보이지 않는 형태로 공고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291

 

흐름의 잉여가치는 삶의 잉여가치이며, 정동의 핵심적인 작동 양상이다. 타르드가 양자적 흐름으로 얘기했듯이 모방과 같은 따라하기가 거대한 무의식의 행렬을 만들고 정동의 흐름의 동력이 되는 양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동자본주의에서는 플랫폼이 이러한 양자적 흐름에 따라 설계된다. 동시에 인공지능이나 네트워크 효과도 모두 정동의 흐름을 모방하기 시작한다. ‘지도화=메타모델화=비표상적 흐름을 통해서 판 자체를 깐 상황에서 정동의 흐름에 따라가면서 자본화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 293

 

지도는 영토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지도는 공간의 생산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지도는 세계를 재현한다고 하지만, 비판적 지도 제작자들은 지도는 어떤 단순한 의미에서도 재현물이 아니라고 거듭 이야기해 왔다. 그보다 지도와 지도화는 그것이 재현하는 영토에 선행한다. 지도가 작동할 때 그것은 우리의 산 경험 속 구체적인 것에 대응하지만 특정한 방식으로 그 경험이 이루어지게 하거나 그 틀을 형성한다. 지도는 권력의 산물이며 지도는 권력을 생산한다. 지도는 참도 거짓도 아니다. 지도는 명제. 이렇듯 흐름의 잉여가치는 의미화가 아닌 지도화의 시대의 총아이다. 295

 

플랫폼 접속이 일상이 되면서 변화한 것은 플랫폼 없이 살았던 기존의 삶의 방식이다. 이제 대부분의 정동생활, 감정생활, 내면생활 등은 플랫폼이 전달해주는 이미지-영상의 콘텐츠 등이 담당한다. 플랫폼 내부에서의 삶은 매무 부드럽고 달콤해서 그 외부를 소멸시키는 경향이 있다. 세상 소식이며 바깥소식이 잘 정련된 이미지-영상으로 정돈되어 다가오니 정동은 야성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순응적이고 달콤한 일상의 그것으로 바뀌어 있다. 298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자본은 그야말로 자본가의, 아니 차라리 자본주의적 존재의 기관 없는 몸이다. 하지만 이런 것이기에 자본은 단지 돈의 흐로고 멈추는 실체는 아니며, 자본은 돈의 볼모성에 돈이 돈을 생산하는 형식을 부여하게 된다. 기관 없는 몸이 자신을 재생산하듯, 자본은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싹을 터서, 우주 끝까지 뻗어나간다. 자본은 기계에게 상대적 잉여가치를 제조하는 임무를 맡기고 그 자신은 기계 안에 고정자본으로 체현된다. 그리고 기계들과 담당자들은 자본에 매달려서, 그것들이 작동하는 것 자체가 자본에 의해 기적적으로 일어난 일이 되는 지점까지 간다.”라고 말한다. 이는 자본 자체는 욕망하는 기계의 가속화를 통해서 드러나는 산물임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서 기술기계의 발전으로 나타나는 첨단기술기계, 즉 플랫폼 등은 대부분 정동과 욕망의 기계작동이 만들어낸 생산물이다. 305-306

 

브라이언 마수미는 <<가상계>>에서 비물형적인 정동양상의 가능성을 타진하지만 정동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내장감각과 같은 것처럼 상당히 왜소한 양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마수미의 진단과 달리 욕망과 정동의 잠재성은 돌발적으로 생산되는 특이성 생산의 차원에서 규명될 필요가 있다. 310

 

하지만 그 특이점이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인과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정동의 식민화를 극복하는 경로는 마수미의 내장감각과 같이 왜소한 설명방식이 아니라, 특이성 생산, 정동의 판 자체의 생산 영역을 통해 드러난다. 정동은 미리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생산하고 생성하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정동 생산은 미리 주어진 잠재성의 한계테제를 넘어서 그 자체가 잠재성을 생산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311

 

정동은 무심결로 인도하는 재미, , 인기 등에 대한 거대한 집단적인 무의식의 행렬을 만든다.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면 될수록 그것으로 족하다. 312 정동은 정동하고 정동되는 일련의 과정 모두에게서 발생되지만, 정동하는 영역에서 자본화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수많은 관심종자를 만들어낸다. 관심, 인기, 쏠림, 모방, 인지부조화, 인지편향, 평판체계, 유행, 트렌드 등 그간 전면에 내세울 수 없었던 모든 현상이 동시적으로 플랫폼 내에서 작동한다. 315

 

이제 자본주의는 환전히 다른 양상으로 작동한다. 탈성장과 기후위기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한 시점에서 대안세력이 말하고 행동하고 실천할 것을 자본과 권력이 말하고 행위하는 이상야릇한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동시에 플랫폼이 끼리끼리 문화를 더욱 유발하여 외부를 소실시키고 자신들만의 잔치와 향연을 벌이는 측면은 결국 제3세계의 기후불평등 문제나 기후난민의 문제 등에 판단 정지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정동자본주의는 정동에 대한 축복과 희망이 아니라, 살아 꿈틀대는 생명과 자연의 정동을 억압하는 성장주의의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 그 과정에서 대안세력의 움직임은 포위되고, 고립되고, 허공에 외치는 메아리가 되고 있다. 317

 

네트워크가 새로운 전자민주주의의 원천이 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네트워크는 수평적이지도 공정하지도 민주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이 정동자본주의하에서 드러난다. 320 정동의 다양한 발휘의 최종 결론은 사실은 단조로운 배달 플랫폼의 이용으로 귀결되는 측면이 있다. 다시 말해 비물질적인 것은 다채롭지만, 물질적인 것은 단조롭다. 321 동시에 소비와 유통의 영역에서의 배달 플랫폼이나 택배 플랫폼 등은 더욱더 정동의 빠른 흐름과 순환에 맞추어져서 작동한다. 속도와 효율성과 더불어 정동의 민감성을 장착한 플랫폼 하에서의 노동은 주목노동, 호출노동, 시청각노동, 욕망노동 등의 양상을 통해서 더욱 정동화되는 과정에 놓여 있다. 322

 

정동의 흐름과 자본의 흐름이 동조화된 현재의 국면에서는 정동이 촉발되는 곳에 자본이 형성된다는 점에서 정동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정동자본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 연극, 영화, 드라마, 미디어 등에서의 연예인들의 정동이 바로 자본인 상황이다. 최근에는 이 정동자본이 정치 및 경제, 교육, 개인적인 관계망을 비롯해 전체 생활 영역에까지 파고들었다. 물론 이것이 긱경제 형태로 노동의 측면에서는 지극히 불안정한 고용이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으나, 사실은 자본과 노동의 영역은 정동의 영역에서는 동전의 양면이다. 323

 

협동조합의 위기는 처참하고 심각하다. 이것은 의미와 가치라는 의제를 던지면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모이고 기능과 노동으로 구성된 사업이 저절로 되던 시기, 다시 말해 성장주의 시대가 끝났기 때문이다. 정동자본주의 하에서 협동조합의 결사체와 사업체 모두가 기능 정지에 빠지기 쉽다. 오히려 정동을 통해서 모임을 촉진하고 도모하는 스튜어드십으로서의 사회적 경제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특히 현재 국면은 저성장 양상으로 진입하고 있는 과도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절로 모인다는 신화, 즉 자연주의 신화를 의심해 봐야 한다. 324

 

결국 사회적 경제가 취해야 할 전략적인 선택지는 정동해방, 돌봄해방, 욕망해방을 통해서 혁신성을 담보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사회적 경제는 증여와 호혜로 이루어진 정동, 돌봄, 욕망의 영역을 절대적 탈주선 위에 놓고 해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돌봄노동의 가치화와 화폐화 국면을 유지하는 것을 한쪽 편의 전술로 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쪽 편으로 돌봄해방의 야성적 힘을 통해 돌봄의 가치화를 훨씬 초과하는 활력의 현실로 재창안할 필요도 있다. 활력의 증대가 자원을 따라오게 하도록 만드는 활력해방의 국면과 욕망이 해방되어 격발되고 폭발하는 욕망해방의 탈성장 국면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동해방의 국면은 분열적이고 야성적인 힘에 따라 관계가 풍부해지고 다양해지는 국면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사회적 경제는 내부의 외부로서의 욕망과 정동을 촉진하고 폭발시킬 훨씬 야성적인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주체성 생산 전략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325

 

정동자본주의는 정동자본과 사회적 경제의 경쟁 양상이라기보다는 정동자본의 동조화된 정동과 자본의 양상을 뛰어넘는 사회적 경제의 정동의 크나큰 폭발적인 흐름과 사회자본이 한 쌍을 이룬 탈동조화의 양상의 대비점으로 나아가야 한다. 탈성장과 정동해발의 국면이라는 탈동조화가 그것이다. 정동해방의 국면은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일 것이다. 펠릭스 가타리는 일찍이 분열생성론이라는 시각에서 정동해방을 조명했다. 326

 

욕망, 정동, 돌봄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것이 오히려 소외로 느껴지지 않고 개인의 사생활이라는 것으로 견고하고 화려하게 포장된다. 328 이제 사람들에게는 깔끔하고 심플하게 정리된 정보 자체가 선호될 뿐, 군더더기, 잔여 이미지, 잉여에 따라 구성된 정동은 촌스러운 구닥다리로 간주된다. 정보량의 증가가 정동의 양의 감소로 향한다는 일반 법칙은 어디에나 상존한다. 특히 입체적이고 다면적인 정동이 일차원적인 정보로 환원되는 것은 그리자유 grisaille의 현실, 즉 회색평면 위로 삶을 올려놓고 편평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과 같다. 329 정동자본주의에서의 정보 과잉은 플랫폼이 정동에 접근하는 수단을 제공한다. 정보의 과잉에 노출된 사람들은 피로도를 느낀다. 이러한 피로도를 낮추기 위해서 AI가 선택해주는 경우의 수는 더욱 선호된다.331 정동의 생명력 전반을 포획하고자 하는 정동자본주의에서는 어색하고 인위적인 것이 천연덕스럽게 우리 삶에 자리 잡은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기후위기에 직면한 사람들의 반응 역시 정보와 정동의 차이를 느낀다. 정동과 지혜가 부재해 결국 기후위기의 실상에 대한 정보가 많아질수록 기후행동으로 나설 가능성은 줄어들게 된다는 역설이 자리잡고 있다. 오히려 비극적 파토스로 인해서 더욱 될대로 되라식의 삶을 살거나 우리는 안 될 것이다라는 체념과 전망 상실로 향하게 된다. 332

 

관계를 통해서, 생명의 힘과 에너지를 통해서 거대한 위기의 상황에 대처하고 대응할 수 있는 주체성 생산을 하는 일이 정동의 과제인 셈이다. 정동자본주의는 외부를 소멸시켜 정동의 해법을 통해서 생명과 자연을 향한 탈주로를 찾는 길이 봉쇄된 현실에 직면하게 만든다. 333

 

관계는 냄새, 색채, 음향, 몸짓, 표정, 맛 등의 다양한 비기표적 기호계의 향연이다.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의 곁과 가장자리에 붙어 있는 다양한 기호작용과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다. 333 사람들은 탁월한 직관자이자 통찰자이다. 그 사람의 정보나 지식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몸이나 마음의 곁과 가장자리, 주변에 있는 전반적인 것까지 통째로 직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직관은 본질직관이 아니라, 표면에 자리 잡은 모든 잉여, 잔여물, 군더더기를 포함한 느낌적인 느낌의 직관이다./정동은 아날로그 방식으로 전달되고 유통될 때조차도 그 자체가 하나의 빅데이터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광대역의 무의식을 여러 측면에서 통째로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감응알 수 있는 초대형 슈퍼컴퓨터를 능가하는 정동의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다. 334

 

개인이라는 설정 자체가 굉장히 세련되고 위생적으로 느껴지지만, 사실은 자기돌봄으로서의 자기통치, 자기관리, 자기계발 등의 일련의 과정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자기돌봄에서의 자기와 자기 자신의 관계가 삶 속에서의 자아와 타자보다 더 타자스러운 자기 자신 간의 관계라는 점에서 정동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그 정동이 내밀한 위반이나 묘한 선의 넘어섬으로서으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돌봄이라는 점에서 쾌락, 향유, 향락의 영역으로 수렴되는 지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독신적 쾌락기계. 335

 

정동이라는 활력과 생명력이 돌봄으로 향할 때, 그것은 너와 나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할 뿐만 아니라 더더욱 의존적이 되거나 동일시 또는 전이의 관계로 향한다는 것은 매우 전통적인 정동의 흐름이다. 그러나 1인 가구로서의 개인들은 이러한 풀뿌리 정동의 구현 양식을 촌스럽고 귀찮고 낡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너와 나의 경계가 명확한 형태로서의 시민성에로 방향을 정하게 되는 것이다.336/정동이 흐르는 다양한 관계의 묘미를 사실상 제대로 감응하지 못하는 도시에서의 개인들의 삶의 양식이 일반화되는 것이다. 이제 시민성과 공동체성은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간주되었다가 이제는 두 영역이 병행되어야 하는 투 트랙 상황이 왔다. 이것이 따로 또 같이의 공동체나 혼자서 살고 싶지만 혼자이고 싶지 않는 시민 개인이라는 역설적인 상황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337

 

현대의 개인이 사용하는 에너지량은 봉건제 시기로 치자면 말 20, 하인 20명을 거느린 수준이다. 더불어 도시인의 삶은 세종대왕이 누리던 생활 수준과 비슷하다. 337

 

펠릭스 가타리는 <<미시정치>>에서 독신적 쾌락기계의 비참함이 자가면역력의 약화인 판짜기와 관계의 실짜기의 불가능성으로부터 유래된다고 본다. “그러나 이 속에서 새로운 비참함 또한 존재한다. 즉 너무 많은 실들로 너무 빨리 대체된 채 짜는 이러한 격노 속에서, 독신자 기계들은 더 이상 멈출 수 없게 되는 경향이 있다. 짜이자마자 씨실들은 닳기 시작한다. 결코 영토들 속에 구체화되지 않는다. 실은 탈구되어서 쇠락한다. 팽창 잠재성은 흩어진다. 어떤 것도 짤 시간도 공간도 없이, 이러한 잘못되어 있는 몸-영혼들은 점차 짤 능력을 잃는다. 그들의 면역방어는 무력화된다. 즉 그들은 너무 약해져서 아주 가벼운 접촉에도 붕괴된다. 그리고 죽음의 새로운 모습이, 즉 에이즈가 들어선다. 독신자의 비참함.” 338

 

개인이나 1인 가구의 비참함과 비탄은 정동의 순환이 이루어질 내부 관계망이 전혀 없다는 점에 기인한다. 정동의 소외는 결국 돌봄의 소외이자 사랑의 소외이며, 욕망의 소외이다. 결국 1인 가구 유형의 삶은 관계 자체에 익숙지 않은 개인의 등장으로도 나타난다. 왠지 정동의 흐름이나 순환이 강렬한 힘과 에너지가 개인을 관통하여 그들의 몸을 움직이게 하고 다리를 흔들게 하고 팔을 들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과는 거리가 먼 것이 1인 가구의 현실이다. 대신 정동은 개인의 감정생활의 소재가 되어 무수한 콘텐트와 영상-이미지의 소비 생활의 원천이 된다. 1인 가구의 삶은 관계를 간절히 희구하지만, 관계로부터 가장 소외되어 있다는 역설에 직면한다. 339


협동조합의 작동원리 중 가장 중요한 맥락인 정동의 국면에서 밀리는 상황은 치명적인 약점이 노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협동조합은 정동과 활력의 끅한, 즉 자본주의의 외부로서의 정동을 순환시킬 때 비로소 혁신성과 선도성을 갖게 되는 것이 예상된다. 그중 하나가 탈성장 전환사회이 전망을 구체화하고 현실에서 그러한 전환 사회의 정동을 적극적으로 유통시키고 순환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장사회에서는 자원이 있어야 활력이 있었지만, 탈성장사회에서는 활력이 있어야 자원이 뒤따르는 형태로 요약해 볼 수 있다./협동조합은 수익구조나 자원에 매달려서 위축되고 쪼그라들었던 그간의 모습이 아니라, 활력으로서 정동의 야성성과 혁신성을 발산하는 예술가 집단과 같은 형태로 변신해야 할 것이다./협동조합은 정동의 강렬도를 높이는 방법과 지혜, 암묵지 등을 끊임없이 실험하고 연구하여 다양한 제도와 프로그램을 창안하고 보유해야 할 것이다. 352-353

 

탈성장 라이프스타일에선 비물질적인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물질재에서 비물질재로의 이행을 통해서 협동과 살림, 정동의 가치가 전혀 색다른 형태로 유통될 수 있는 계기도 모색해야 한다./협동조합은 내부의 외부를 생산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강렬한 정동을 외부와 틈새, 사이를 넓히는 소재로 삼아 활동의 여백과 여지를 만들어야 한다. 355

 

주인없는 점포. 애자일은 업무주기가 짧고, 고객에 대한 피드백이 강렬하고, 프로그램 개발자 중심의 업무 편성을 하는 팀조직 단위다. 이는 가타리의 <역할분담표>를 떠올리게 한다. 정규업무 대신 순번업무, 임시업무, 순환업무를 통해서 업무주기를 빠르고 민첩하게 만드는 데 역점을 두었다. 업무주기를 짧게 하면서 늘 새롭게 편성하려고 했다. 사태의 정상적인 질성의 교란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체계를, 역할분담이라고 하는 체계를 설립하려 있다. 각 사람은 업무 기능에 따라 정규업무, 임시업무, 교대업무 즉 누구도 직원의 특수한 범주로 전문화하려 하지 않는 집합적 업무./ 어떤 상품이나 결과물을 완성형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이 아니라, 늘 과정형이자 진행형인 일로서 설계하는 것이 공동체기업의 작동원리일 수밖에 없다. 360-361

 

공동체기업의 활력과 정동의 순환과 흐름을 끊는 것은 다름 아닌 자원의 원천이 되는 공공프로젝트나 사업이다. 이러한 의외의 결과는 공공에서의 프로젝트가 대부분 과업지시서에 따라 정해진 기한 내에 성과를 내서 결과보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성과담론과 회계담론에 얽매인 프로젝트는 공동체기업을 좀먹는다./비상식적인 보고서 중심의 사업들은 현장에서의 활력과 정동을 인위적이고 성과 중심인 씨알 빼먹기 형태로 만들어 버린다./ 사회적 자본이라고 불리는 관계 속에서의 정동의 흐름을 온전히 살피지 않는다면, 사회적 자본의 힘과 활력이 더 이상 사회에 파급력을 주기 어렵게 되는 상황에 직면한다. 362

 

정동자본주의 단계에서 사회적 자본은 인기, 흥미, 재미, 운 등을 통해서 모방과 변형, 따라하기, 비틀기 등으로 전개되는 정동의 흐름에 기반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정동자본주의에서는 자본도 지도제작의 방법론에 따라 움직인다. 정동과 자본, 권력은 동시 발생적으로 생산되고, 정동의 흐름에 따라 자본과 권력도 지도를 그리며 함께 온다. 흐름의 잉여가치는 정동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활력과 생명력이라는 잉여가치이며, 공동체기업의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공동체기업의 핵심 모델을 자본이 빼앗아가자 공동체기업의 활력이 떨어지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365

 

완성형으로서 사회적 자본과 과정형으로서 사회적 자본을 나누는 것이다. 단기적인 성과를 내어야 하는 완성형으로서 사회적 자본은 관계 자체가 사실상 수단과 방법에 불과하다. 반면 과정형으로서 사회적 자본을 이끄는 공동체기업은 관계 자체가 목표이면서 동기이며, 자신과 가장 거리가 먼 관계인 연대와, 시간상 장기적인, 아직 태어나지 않는 미래세대까지 염두에 둔다. 366 1. 지도제작으로서 도표 2. 고도로 자유로우면서 고도로 조직하는 도표 3. 비기표적 기호작용으로서 도표(냄새,색체,음향, 몸짓,,이미지 표정 등은 정동의 재료들이다. 4. 돌발 흔적으로서 도표 368-369 전혀 예상치 못하는 공동체기업 370


볕뉘


1. 전시팀들의 내방과 환담, 뒤풀이로 1차 마무리, 가족들이 내려와 2차마무리로 공식적인 일정을 갈무리한다.


2. 위 밑줄긋기는 전시마감 전부터 조금씩 타이핑해둔 것이다. 관람객들 가운데 중년은 원픽은 <동행>이라는 작품이다. 동행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자세히 되묻는다. 공간예술가이자 언어예술가...등등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장년들의 시선은 새롭고 신기로운 아이의 표정이 설핏 보이기도 한다. 


3. 고독이란 신발을 신을 줄 알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라는 시인의 말은 정답이기도 하지만 현실감이 부족하다. 그래서 묻는다. 발리바르는 포이에르바흐의 테제를 언급하면서 인간은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라는데 밑줄을 긋는다. 우리는 별 것이 없는 존재들이다. 관계들로 표현되면서 되먹임당하는 존재다.


4. 서울살이와 수도권의 일상이란 깊은 관계들이 부족하다. 점선으로 이어진 관계도 점멸한다. 거기에는 삶을 바라보는 긴장감이나 강열함이 부족하다. 표면적인 삶의 형태에 매몰되어 다른 것들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저자의 밑줄을 한번 천천히 따라가보기를 희망한다. 어느 단락이 불 쑥 수혈하듯 들어올지도 모르니, 내 삶에 다른 언어들이 섞일 수 있다면 좀더 다른 일상으로도 걸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해 보기.


5. 뒷부분에는 협동조합과 공동체기업에 대한 밑그림들이 있다. 참고해보셔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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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8-19 0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전 정동의 재발견이라는 제목만 보고 덕수궁 돌담길의 아취를 재발견한 책인가하고 착각했습니다^^;;;

여울 2025-08-19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제목은 고즈넉한데, 내용은 격정적이라는. 대전 정동도 있답니다. 카스피님

카스피 2025-08-20 00:59   좋아요 1 | URL
예전에 헌책방 탐사하러 대전의 무슨 시장안의 헌책방들을 둘러본 기억이 나네요.그때 대전 지하상가와 은행동도 돌아다녔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왜 성심당을 안갔나 후회가 됩니다ㅜ.ㅜ

여울 2025-08-20 09:30   좋아요 0 | URL
중앙시장, 인동 돌아다니셨나봐요. 은행동엔 성심당이 있는데 지나치신듯요. 어떡하나요. 한번 짬내서 투어 하셔야겠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