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산에 오르는 이들은 지도앱(지도)를 들고 수시로 확인하며 오르내린다. 자칫 길을 놓치거나 할 수 있으나 이정표가 되는 큰바위나 폭포들은 어김없이 작은 실수들을 보완해준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산을 오르내린다. 거기에는 주체도 객체도 없다. 레퍼런스(지시)와 리프러덕션(재생산)만 있다. 아무도 등산을 문제삼지 않는다.
-1
묵힌 책을 여기저기 오가면서 기차 안에서 읽다. 발췌읽기를 할까 싶었는데 줄줄 읽힌다. 굵은 줄들이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다. 과학은 이제 산꼭대기에 머무를 수 없다. 이제 내려와야 한다. 내려와 저자거리의 종교와 법, 신화와 사귀어야 한다. 적과의 동침도 부끄럽지 않게 여겨야 한다. 그래서 그는 일관되게 외교관의 자세를 말한다. 그리고 이십년전에 출간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를 바탕으로 삼는다. 면밀하게 살펴보고 돌아보고 규정짓는 일이 바닥을 확인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그것을 밑절미로 삼아 다른 가능성과 양식들을 살핀다.
0.1
발췌읽기를 했던 아래 책의 기억은 불완전하다. 뒷부분과 앞부분을 다시 읽다보니 요점에만 선명한 밑줄과 날개접힘만 남고, 배경기억은 흔들려 사라진 듯싶다. 부제로 달고 있지만 <의지, 책임, 행위, 선택의 고고학>이란 스케일이 큰 작품이다. 어설픈 소개보다는 그대로 남기는 것이 좋을 듯하며 읽기쉽게 밑줄을 수정하여 정리해둔다. 많은 이야기거리를 남길 수 있겠다싶다. 라투르 책도.
사람들은 인간관계의 적당히 안전한 거리라는 것을 잘 모른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인간관계의 정도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래도 된다. 하지만 조금만 친해지면 전부 알고싶다는 '둘이면서 하나'인 관계를 요구하거나, 가볍게 물어도 집주소부터 이메일까지 다 가르쳐주는 사람도 제법 있다. 거기에 덧붙여보면, 조금 친해지면 나 이외에는 보지 않고, 말도 섞지 말았으며 싶은 부류들 말이다. 10p
1.
어쩌면 이 프롤로그의 이 요약밑줄은 정작 본 줄거리와 큰 상관이 없다. 서두에 모아두는 것은 우리들의 관계 역시, 모 아니면 도 아닐까 싶은 노파심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다.
효과로서 의지는 남는다; 태양의 빛과 인간 신체가 만났을 때 태양을 가까이 있는 것으로 표상한다. (물론 가까이 있지 않은데도) 의지도 마찬가지 효과를 낸다. 우리의 정신은 사건이나 사물의 결과만을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 그래서 결과인 의지를 원인으로 착각하고 만다. 이런 메커지즘을 알아도 "우리가 의지의 나타남을 느끼기 이전에 뇌는 활동을 개시하는 거다." 39p
2.
- "중동태는 주어가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동사의 행위에 연루되거나 혹은 그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태를 나타낸다."(길더슬리브, 1900년)
- "동사가 주어의 영역 내에 자신의 현장을 갖고 있고 주어 전체가 이 동사에 관여된 것으로 나타난다."(부르크만, 1900년)
- "능동의 경우 동사는 주어에서 출발하여 주어의 밖에서 완수하는 과정을 지시한다. 이에 대립하는 태인 중동의 경우 동사는 ㅈ어가 그 장소가 되는 그런 과정을 표현한다. 즉, 주어는 과정의 내부에 있다."(벤베니스트, 1966년)
- "인도-이란어나 그리스어에서 중동의 굴절 어미는 주어가 개인적인 방식으로 과정에 관심(이해관계)를 갖고 있음을 나타낸다." (메이에, 1937년)
- "중동이(능동과 대립되었을 때) 함의하는 바는, '행위' 또는 '상태'가 동사의 주어 또는 그 주어의 이해 관심에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리용, 1969년) 97-98p
3 '하느냐 당하느냐'가 아니라 '안이냐 밖이냐"
이상의 대조를 통해 충분히 명백하게 본래의 의미에서 언어적인 하나의 구별, 주어와 과정의 관계에 관한 하나의 구별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능동에서 동사가, 주어에서 출발하여 주어 바깥에서 완수되는 과정을 지시한다. 이에 대립하는 태인 중동태에서 동사는 주어가 그 장소가 되는 그러한 과정을 나타낸다. 요컨대 주어는 과정의 내부에 있다. 105p
주어(주체)는 주어 안에서 성취되는 어떤 일(태어나다, 자다, 자고 있다, 상상하다, 성장하다 등)을 성취한다. 그리고 그 주어는 바로 자신이 그 동작주 agent인 과정의 내부에 있다. 107p
'있다(존재하다)'는 인도-유럽어에서 '가다'나 '흐르다'와 마찬가지로 주체의 관여가 필요하다고는 여겨지지 않는 과정인 것이다. 108p
4.
능동태와 수동태의 대립은 '하다'와 '당하다'의 대립으로서, 의지 개념을 강하게 상기시킨다. 중동태 개념을 들임으로써 이를 상대화할 수 있는데, 능동태와 중동태의 대립은 의지가 전경화되지 않는 다른 위상을 갖는다. 다음은 한나 아렌트의 말이다.
가능태를 전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암암리에 미래를 진정한 시제로 삼기를 부정하고 있다. 즉, 미래는 과거의 귀결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기억이 과거를 위한 기관인 형국이어서 미래를 위한 기관으로 삼는 사고, 즉 의지는 전혀 불필요한 것이었다. 그는 의지의 실재를 인식할 필요가 없었다. 현재 우리가 '행동의 원동력'으로 간주하는 의지에 대한 '단어조차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115p
5.
장피에르 베르낭: "그리스어나 고대 인도-유럽어로 표현되는 사상에는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의 원천리라고 하는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다." 베르낭 자신의 강조점은 '그리스에는 의지라는 범주가 없다'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 후의 서양 세계에서 '의지'나 '책임', '인간 주체' 같은 개념이 창조되어왔다는 사실 쪽에 있다. 122p
언어가 사고를 규정하는 게 아니다. 언어는 사고의 가능성을 규정한다. 즉,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언어의 영향을 받는다는 얘기이다. 이를 철학적으로 정식화해보면 언어는 사고의 가능성의 조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32p 이 점은 언어가 사고에 다양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장의 설정을 요청한다. 현실의 사회와 역사야말로 바로 그러한 장이다. 145p
프로아이레시스(선택)는 시작을 담당할 능력이 아니다. 시작이기는커녕 이성과 욕망의 상호작용하에서 출현하는 것이다. 프로아이레시스 혹은 일반적으로 선택이란 그러한 것일 터이다. 선택은 과거로부터의 귀결로 존재한다. 이래는 과거에 존재하고 있던 것의 귀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154p
이러한 선택과 구별되어야 할 의지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로부터 귀결로 존재하는 '선택' 곁에 돌연 출현하여 억지로 그것을 과거로부터 분리해버리고자 하는 개념이다. 게다가 이 개념은 자연스레 거기에 출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호출된다. 157p
5.1
실제로 권력 관계를 정의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관계가 타자에게 직접적-무매개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행위에 작용하는 행위 양태라고 하는 점이다. 즉, 권력 관계란 행위에 대한 행위이고, 이루어질 수 있거나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미래의 혹은 현재의 행위에 대한 작용인 것이다. 그에 반해 폭력 관계는 신체나 물체에 작용한다. 그것은 강제하고 굴복시키며, 박살내고 파괴하고 온갖 가능성을 죄다 닫아버린다. 그런 까닭에 폭력 관계의 바탕에는 수동성의 극밖에 남겨지지 않는다. 172-173p 권력이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행위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모든 일이 다 능동과 수동의 대립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권력의 양태가 특수하게 보인다. 능동-수동의 대립이 아니라 위상이 다른 능동-중동으로 살펴보기 바란다. 권력을 행사하는 자는 권력에 의해 상대에게 행위를 하게 하므로 행위 절차의 바깥에 있다. 이는 중동성에 대립하는 의미에서 능동성에 해당한다. 권력에 의해 행위당하는 자는 행위의 절차 안에 있으므로 중동적이다. 어쩔 수 없이 화장실 청소를 당하는 자는 자신이 그것을 함과 동시에 억지로 당하고 있기도 하다. 이때 그는 단지 행위의 절차 속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간단하다. 타율과 자율의 구분하면서 분분했던 논의가 정리된다. 178-179p
폭력은 권력이 위태로워지면 출현하는데 폭력을 행사되도록 그대로 두면 마지막에는 권력을 소거해버린다. 대립하는 것이 비폭력이 아니다. 비폭력적 권력이라는 것은 언어의 중복이다. 폭력은 권력을 파괴할 수 있어도 권력을 창조하는 일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182p
"점심으로 라면을 먹고싶지만, 친구가 국수로 하자해서 어쩔 수 없이 든다."
"아이가 떼를 쓰고 졸라 어쩔 수 없이 장난감을 사준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근무한다."
"총을 들고 협박해서 어쩔 수 없이 금고를 연다." 185p
6.
일만 년 이상의 역사 중 한 측면을 '사건을 묘사하는 언어'에서 '행위자를 확정하는 언어'로 이행해온 역사로 그려낼 수 있다. 명사적 구문의 시대에 동작은 단순한 사건으로 그려진다. 거기에서 생겨난 동사도 당초에는 비인칭 형태여서 동작의 행위자가 아니라 사건 자체를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훗날 동사는 인칭을 획득하였고 동사가 표현하는 행위나 상태를 주어에 결부시키는 발상의 기초가 탄생했다. 208-209p
행위자를 확정한다 함은 어떠한 일일까? 능동과 수동을 대립시키는 언어는, 행위에 관한 복수의 요소들의 공유 재산이라 할 수 있는 이 과정을 오로지 나의 행위로, 즉 나에 귀속하는 것으로 기술한다. 조금 과장스레 말하자면 사건을 사유화한다. '하느냐', '당하느냐'로 사고하는 언어, 능동태와 수동태를 대립시키는 언어는 단지 '이 행위는 누구의 것이냐?'라고 묻는다. 209p
그리고 그 귀속처로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의지이다. 의지란 행위의 귀속처이다. 아감벤은 의지란 행동이나 기술을 어떤 주체에게 소속시킬 수 있게 해주는 장치라고 말한다. 선택(프로아이레시스 또는 리베룸 아르비트리움)과 구별되는 한에서 존재하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이 의지라는 능력이, 행위를 기술하는 것이 문제가 되면 돌연 근거로 내세워지는 것이다. 210p
능동태는 동작이 갑에서 나와 을로 향하여 그 을을 처분하는 것을 나타낸다. 주어(갑)으로부터 발원한 동작이 주어와 다른 객체(을)에 작용하여 주어 밖에서 그 영향력이 완결된다는 것이다.
중동태는 동작이 행위자를 떠나지 않고 그 영향이 모종의 형식에 있어서 행위자 자신에게 되비치는 성질의 것을 나타낸다. 주어로부터 발원한 동작의 영향력이 그 어떤 방식에 의해 행위자게 머무른다는 것이다. 214p
능동-수동의 대립은 본래 큰 차이가 없는 표현인데, 행위자에 귀속시키는 순간 대립하기를 강요받는다. 동일한 사태가 자발적으로 모습을 들어냈는지 아니면 무언가에 의해 드러남을 강제당했는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모습을 나타낸다. 나는 나타나고 내 모습이 나타내어진다. 이 상황에서 언어는 '너의 의지는?'이라고 심문해 오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심문하는 언어이다. 216p
주어를 무대로 진행되는 과정을 표시하는 중동태는, 아마도 그 과정을 실현하는 힘의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특징지어지는 스펙트럼을 가질 것이다. 담백하다면 단순한 자동사 표현이 담당할 수 있다. 대단히 강하지만 천천히 발휘되는 경우는 자발의 의미로 이해된다. 과정에 있어 힘과 주체 사이에 명확한 구별이 발견되면 수동태로 표현할 수 있다. 222p
<일리아스>는 중동태의 소산이고 <사쿤탈라>는 중동태의 하사품이다. <고사기>, <일본서기>, <만엽집>의 노래 또한 동일한 의미에서 중동태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22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