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든 싫든 하나의 성적 정체성 또는 사회적 인종적 정체성을 사회가 수용하도록 촉구하고 문제의 정체성 범주에 대한 존엄성과 권리를 부여하도록 사회에 압력을 가하는 운동에 기초하기 마련이다. 이 과정 속에서 그러한 정체성 정치에 기초한 사회운동은 개인을 고정된 추상적 규정성, 예컨대 여성, 동성애자, 노동자, 부르주아지, 기업가 등등의 범주 속에 가두는 위험을 치르게 된다. 161 기질 개념은 섬세한 차이와 존재들의 특수성을 고려하도록 또한 갈등적 관계들을 인정의 용어보다는 인식의 용어로 사유하도록 이끈다. 161


개인적 자아의 해체: 사랑은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내게 잠시 주어진 특성들을 향하고 있을 뿐이다. 그 특성이 신체적인 것인지 정신적인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떠한 특성이든 그것은 모두 빌려 온 것에 불과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몇가지 특성을 사랑할 뿐이다. 165 자아의 유령적 성격 166


사회적 자아의 해체: 이행으로서 기질: 패싱: 패싱이라는 말을 프랑스어로는 이행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어가 지닌 의미론적 다양성 탓에 이해의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바로 그 다양성 덕분에 선을 넘는다는 의미와 두 세계의 경계를 넘는 밀행자가 된다는 의미를 표현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179

 

아니 에르노는 <<남자의 자리>>에서 나는 내가 지금까지 교양 있는 부르주아 세계로 들어갈 때마다 그 문턱 앞에서 내보여야만 했던 나의 유산을 드러내는 것을 그만두었다. 적응은 내려 두는 과정을, 심지어는 새로운 자리를 잡기 위해 기존의 것을 내팽개쳐버리는 과정을 포함한다. 적응은 예전의 가치와 방식을 버리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적응은 자신의 허물로부터 벗어나는 일종의 탈피 과정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변신은 결코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급횡단자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아가게 된다. 183

 

상류층 사람들은 상당한 호감을 준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그들이 인간 조건의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불평과 불만의 토로를 아예 제거해 버리고 누구에게나 유익한 이타주의의 일환에 따라 실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에 계급횡단자가 변신하게 에는 필연적으로 일정한 시간과 긴 숙성의 과정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일단 자신의 화법에서 사람들이 거슬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변신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189

 

수많은 유리잔들과 식사 용품들은 그 사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세련미와 화려함을 보여주는 증표라기보다는 오히려 식사 중 결례를 범할지도 모르는 횟수의 증가를 의미할 뿐이다. 그래서 계급횡단자들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만이 아니라 물건들까지도 두려워하게 된다. 그는 언어의 법정 앞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사물들의 법정 앞에 서 있다. 193

 

계급횡단자에게 사건은 자신의 여유로움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라기보다 그의 불만족스러움을 이겨 내야 하는 시험이다. 스피노자적 용어를 빌려 온다면 자족감보다는 만족을 낳는다. 자족감이 자기 자신과 스스로의 행위 역량을 관조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기쁨이라면, 만족은 바랐던 것보다 상황이 더 낫게 이루어진 일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그러므로 만족은 예상되었던 슬픔을 이겨 낸 기쁨의 형식이다. 계급횡단자의 기질은 무모함과 소심함 그리고 호전성과 유순함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195

 

계급횡단자는 언제나 경계 주변에서만 맴돌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적 코드에 알맞게 행동하고 상황에 어긋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그에게는 잠시 물러나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고, 다라서 그의 생각과 실천에는 항상 거리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209

 

결국 문제는 세상의 모든 차별을 만들어 내는 존재에서 가치로의 이 은밀한 미끄러짐이 어디에서 연원하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240

 

어떻게 하면 이행의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찢기고 파열된 기질의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모든 어려움은 소외되지 않으면서도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이 되는 것에 있다. 타자성이냐 소외냐. 이것이 계급의 변화를 거치면서 일어나는 자기-변형에 걸린 판돈이다. 256

 

강인한 영혼은 올라가는 일이든 내려가는 일이든 상관없이 수행할 수 있다. 260

 

민중 계층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연대와 상부상조는 그 밖의 다른 자원이 전혀 없는 결핍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전된 행동 양식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을 자연적 선함과 온정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연대는 빈자의 유일한 자산이다. 따라서 연대가 알아서 잘 지내는 유복한 계급에는 널리 퍼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울 일도 아니다. 자기 자신으로 남는다는 것. 그것은 민중으로 남는 것을 말하는가? 그러나 우선 실체적 자아라는 것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 내용이 민중적인지 부르주아적인지 논하는 것은 무용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를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가장 어려운 것은 계급 사다리를 오르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 혹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엄격히 말해 민중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아비투스 도야를 통해 민중이 된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하다.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민중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생겨나고 변천하는 여러 민중만이 있다. 265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과 화해는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에 대한 명예 회복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어빙 고프만이 낙인의 전도라고 부른 것, 다시 말해서 모욕의 기호를 도리어 당당히 드러내고 자신의 상징으로서 주장하는 것을 통해 일어난다. 268

 

미슐레가 보기에 개인적 수준의 계급의 변화는 집단적 진보의 운동과 연장선상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올라간 자들이 자신의 색을 잃고 싶지 않다면 그들은 야만인이 되어야 한다. 즉 계몽하는 자가 되어 되찾은 자긍심의 기호들을 널리 퍼뜨리는 기수가 되어야 한다. 이는 계급횡단자들이 단순히 사는 곳의 경계를 바꾼 이행자로 존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과 부정의한 속박의 굴레를 계급과 함께 파괴하고 승리의 역사를 향해 전진하는 개척자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274

 

나는 아버지의 말과 제스처, 취향, 아버지의 삶에 흔적을 남긴 사건들, 나 역시 공유하고 있는 한 존재의 객관적인 기호들을 모아보려 한다. 추억의 시도, 환희에 찬 조롱도 없을 것이다. 평평한 글이 자연스럽게 쓰여졌다. 내가 부모님께 중요한 소식을 말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식 그대로 쓰인 글이. 286

 

대립물들을 합치시킨다는 것은 그것들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는 일이라기보다 타자와 자기 자신 사이의 화해를 이루는 일이다. 이러한 화해는 타자를 그리고 계급 장벅 뒤편에서 부정하고 억압했던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자신 안으로 재통합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재회를 주선해 준 것은 지배자들의 세계 중심에서 획득한 민족지적 문화이다./<<슬픈 열대>>를 반대로 뒤집은 것이 부르디외의 민족지적 프로젝트다. 292




볕뉘


1. 


정체성을 가진 개인, 변하지 않는 자아라는 개념이 기존 철학의 근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죽음을 염두에 둔 가상의 세계-안-존재라거나 딱딱한 고체 형태의 개념을 가진 실존주의자란 서술이 주장하는  즉자, 대자 개념은 여기서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칼폴라니가 자본이 토지와 노동의 뿌리를 끊고 마치 스스로 증식하는 모습을 띤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늘 조직이나 사회에서 발라낸 형태로 개인을 가정하여 사유를 출발시킨 것이다.  발라낸 개인으로 사유하면 환경과 조건들이 세심하게 읽힐 수 없고,  자수성가나 능력자, 천재라는 개념으로 별난 인간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런 무책임한 개념의 개인은 사회와 개인의 층분리를 만들거나 산술적인 합의 계급이라거나 변화를 만들어내는 액체로서 화학적 결합을 갖는 경로를 볼 수 없다. 그 변화가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어떻게 분위기란 색이 바뀌게 되는지 발화나 변동을 쉽게 잡아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2.


결론 부분에서 언급하는  비유인 실타래라는 컨셉은  무척 좋아하기도 하는데, 지나간 과거라는 것이 한 올 한 올 풀어내면서 새롭게 직조할 가능성까지 보여주는 것은 순간순간이 앞으로 열려있는 모습을 드러낸다. 사물이란 것을 엉킨실타래의 형상으로 보게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하나 하나 풀어내기 위해 얽힌 힘들을 구분해내는 것과 끊어지지 않게 조절하는 정교함은 사물 그 자체를 춤추게 하는, 물활의 심경과 시인의 감수성을 동시에 갖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계급횡단자란 개념을 풀어가는 묘사에서 어떻게 그 많은 것들이 연결되어 있는지 손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작가의 능력때문이기도 하다.


3.


부르디외를 선택한 것이 도드라져보이는데, 문화자본이나 상징자본이나 구별짓기 계급의 재생산을 기본틀로 해서 구조적인 부분을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렇게 묘사하거나 기술하고 있는 배경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이 책을 올바로 읽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마르크스로부터 시작하는 자본론읽기가 덧붙여져야지만 이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계급횡단자란 개념엔 계급의 재생산이란 큰 흐름이 있는 것이니 놓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계급횡단자만 쏙 빼내서 읽게 되면 사회적 우울이라든가 구조적 모순 저자가 읽어내고 싶어하는 다음을 가늠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4.


또 하나는  스피노자를 잘 읽어내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감정,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감정에 붙어있는 현실들을 불러내어 감정이란 것이 사회와 역사와 연루된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성과 객관화가 갖는 편협함을 잘 느껴보시길 바란다. 역으로 감정이 갖는 구체성과 주변에 뿌리내린, 뿌리내릴 모습들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면 거꾸로 많은 놀라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독서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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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인식론의 용어를 빌린다면, 2종 인식이 보편적 법칙과 관계하는 것이라면 3종 인식은 점차 구체적인 대상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자케는 2종 인식의 지평에 있던 부르디외의 작업을 3종 인식의 지평에서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0

 

저자는 계급횡단의 사례를 발생시킬 수 있는 원인으로 야심, 가족 혹은 학교 내의 대안적 모델의 현전, 제도적 지원, 우정이나 사랑 같은 감정의 힘 등을 제시한다. 계급 이동은 한 사람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며 계급횡단자는 언제나 그를 둘러싼 환경 속에서 사유되어야 한다. 21

 

계급횡단자들의 역사를 고려하면 각각의 횡단자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이 공통적으로 이곳에도 저곳에도 완전히 동화될 수 없다는 점에서 틈새에 위치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물질적 자산이나 문화적 교양의 격차가 아니라 서로 갈등하는 사회적 힘들 사이의 충돌로 나타난다. 22

 

계급전향자: 자신을 부르는 명칭이 가치 평가적인 용어 외에는 없다는 이 현상은 계급을 바꾼 이들에게 국한되어 일어나지 않는다. 이 현상은 지배적 모델을 재생산하지 않는 모든 사람 그리고 모욕 아니면 야유의 딱지 아래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되는 모든 사람과 관련한다. 명명될 수 없기에 이름이 없는 자들이 있다. ; 동성애자들-호모, 바텀, 마짜, 갈보. 레즈비언, 게이 41

 

사유에는 접근 금지 구역도 없으며 자신의 것이라고 선험적으로 보장된 영역도 없다. 가령 신체는 역사, 철학 혹은 사회학의 대상이기도 한 동시에 물리학의 대상이기도 하고 생물학, 의학의 대상이기도 하다. 45

 

아니 에르노의 세 저작, <<남자의 자리>>, <<한 여자>>, <<부끄러움>>이 자서전이락보다는 사회적 전기형 자서전에 가깝다. 사회적 자서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아의 재발견이 아니라 더 넓은 현실과 공통의 조건 혹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사회적 고통 속에 자아를 해소하는 형식을 취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외의 독특성과 개념의 보편성 사이의 외견상의 단절은 점차 희미해지는데 왜냐하면 한 개인을 통해서 모든 인간 조건이 표현되며 상황 속의 인간학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49

 

모든 야심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야심이다. 야심은 달성하고 싶은 모델, 이상, 목표에 대한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재생산의 경우 야심은 출신 환경에서 지배적 모델과는 다른 모델에 대한 표상과 그 모델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의 존재를 함축한다. 야심이 최초의 원인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이 감정이 어떤 모델에 대한 관념과 그 모델처럼 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합쳐진 결과, 즉 인식적 규정성과 감정적 규정성 사이의 혼란스러운 합성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64

 

모델과 모방: 1. 가족모델 - 노동자의 자녀들이 빈번하게 되뇌곤 하는 그건 우리를 위한 것은 아니지라는 그 유명한 말에는 자신들 앞에 펼쳐진 사회적 운명에 대한 그들의 혼란한 의식이 드러나 있다.(자기-제명) 72

 

아니 에르노의 세계는 폐쇄되어 있는 느낌을 주는 규칙과 코드들의 성층 구조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러한 법칙과 관례들은 마치 십계명처럼 작동했다. 더 자세히 말한다면 그녀의 세계는 지역의 일반적 풍습과, 소상인에게 배어 있는 행동 강령들 그리고 사립 가톨릭 학교의 명령 체계가 서로 뒤얽혀 있는 삼중의 법을 따르고 있었다. 74

 

상인들은 타인의 시선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단정한 품행을 보여야 하고, 분노나 슬픔과 같은 감정들을 절제해야 하며, 부유함을 과시함으로써 시기심을 불러일이키는 일도 자제해야 한다. 75 아니 에르노의 세계는 예외적 삶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아비투스들고 구성되어 있었다. 76 <<부끄러움>>

 

2. 학업모델 - 부르디외는 위대한 스승의 영향이 스며들지 않은 학생의 삶이란 없다. ” 82

3. -재생산의 사회경제적 조건들

4. 감정과 마주침 - 한 명의 개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가 외부 원인과의 마주침을 통해 느끼게 되는 감정을 통해서 그 개인의 현행적 존재를 구성하는 역학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101 우리는 스피노자를 따라서 감정을 행위 역량을 상승시키거나 감소시키면서 각자의 욕망에 영향을 미치는 신체적-정신적인 변양의 총체로 이해하고자 한다. 감정은 우리를 건드려 우리가 움직이게 만들고 또한 우리를 뒤흔들어 놓은 것을 일컫는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감정은 한 개인의 인과적 역량과 외부 세계의 인과적 역량 사이에 일어난 마주침의 표현이다. 102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의 방향 전환은 대체로 어떠한 마주침과 그 마주침의 결과인 어떠한 감정을 통해서 실행되기 마련이다. 디디에 에리봉의 마주침은 대학교수의 아들이었던 같은 반 친구와 유대감이었다. 이 친구를 향한 애착의 감정은 디디에 에리봉이 그 이전까지는 자신은 한 명의 불청객에 불과하다고 느끼게 만들었던 세계의 문턱을 넘어서 민중 계급이 조롱하던 낯선 문화를 전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03 욕망의 역량과 우정의 힘은 타자성을 향한 열림을 통한 정체성의 재주조를 동반한다. 이러한 타자성을 향한 모험은 동요와 저항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친구란, 서로 다른 사회적 역사를 체현하고 있는 두 인물이 서로 공존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105

 

위반을 시도하는 자는 그 즉시 계급 보수주의와 순응주의로 비롯되는 삼중의 비난, 즉 너는 한낱 몽상에 빠져 있을 뿐이라거나, 우리 계급을 배반하는 배신자라거나, 제 분수를 모르고 다른 물에 끼어든 위장한 자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비난의 세계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114 위장 침입이나 사칭 나를 믿어,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우리는 결코 그들과 같이 될 수 없어혹은 그들은 우리와 같지 않아등등의 말들. 배신자라는 비난, “너는 우리를 배반했어” “너는 우리를 무시해” “너는 우리가 부끄럽니?” 등등 위장한 자라는 비판으로는 자신의 분수를 알아야 한다” “남들보다 위에 서 있다고 믿어서는안 된다. “제 엉덩이보다 더 높은 데서 방귀를 뀌려 한다등등의 말 115-116

 

이러한 조건에서 동일시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검열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대안적 모델을 욕망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주변 환경이 상당히 강압적이고, 숨 막힐 정도로 목을 조르는, 그야말로 파괴적인 것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116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더 나은 삶을 욕망하고 있다는 뜻이다. 117

 

5. 자리 그리고 환경의 역할: -재생산은 재생산의 간계로서 나타난다. -재생산은 재생산과 상충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재생산의 원환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모든 것을 멀찍이 축출시킴으로써 재생산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120 성적 수치심이 게이 프라이드로 전환될 경우 이 감정은 사회적 신분 상승의 증기기관으로 작동할 수 있다. 125 어쩌면 한 개인이 가족과 사회를 떠나야만 하는 고통을 겪을 때 그 가족과 사회 역시 온몸이 병들어 있으며 그곳을 떠나는 개인을 통해서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126

 

-재생산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한 개인만의 고독한 여정으로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비-재생산을 일련의 방식으로 추동하고 또한 허용하는 가족적-사회적 환경의 연대를 사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홀로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늘 환경에 의해 그리고 환경을 통해 옮겨진다. 131

 

<<형제와 보호자>> 두 형제 사이의 차이는 말하자면 존재론적 차이라기보다는 위상학적 차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137 이처럼 두 형제가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 것은 선천적 차이의 결과가 아니라 주변 환경 및 가족 배경과 상호작용 속에서 역사적으로 작동하는 차이화의 결과였다. 138 로비의 이력은 이중적 구별 짓기의 운동에 따라 나름의 비-재생산의 절정에 이른 결과다. 139

 

6. 인게니움 혹은 기질: 계급횡단자는 고독한 영웅이라기보다는 가족, 마을, 거주지, 인종 혹은 계급, 성별 또는 젠더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소망을 떠안고 있는 선구자이다. 그러므로 비-재생산은 개인적인 현상이 아니라 관개체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141

 

뒤엉킨 실타래를 풀어헤쳐 다른 방식으로 땋음으로써 새로운 직조의 형태를 만들어 낼 수는 있고, 이로써 다른 존재들과 관계가 전적으로 단절되는 것이 아니더라도 혹은 다른 존재들로부터 뜯겨져 나오지는 않더라도 우리 자신의 존재를 이루는 배경을 새로이 직조할 수는 있을 것이다. 149


볕뉘


부르디외, 아니 에르노, 스피노자라?! 이런 의아한 만남이라니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그것도 한참 철지난 듯한 부르디외라니? 거기에 더해서 '계급횡단자', '비-재생산'이란 제목은 희귀하기도 하거니와 도대체 이해가 되먹지 않은 언어의 유희로 느껴진다 싶다.


감정, 감정, 감정.  민생. 민생. 민생처럼 알맹이 없는 빈 빵같은 읊조림은 아닐까? 시대적 징후처럼 많이 말해지지만 실속은 없는 구름같다는 인상의 문턱에 있지 않았던가? 그래 명문을 만나지 않았던 이유일 수도 있다.


계급과 개인과 사회, 그리고 감정, 자아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주위를 맴돌지만 어느 하나 완결되도록 잡아낼 수 없었다. 잡다보면 어김없이 한 둘은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어떻게 사회학 인문학의 난제를 이리 쉽게 풀 수 있는지 지금도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두 번째 글에서 상세히 가늠해보기로 하고, 먼저 놀라움을 전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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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우르르 몰려왔다. 정신차릴 틈도 없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들은 제법 날카롭고 무게감도 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일들은 각자 제 질량을 갖고 있던 것이고 시스템이란 그물에 버티고 있는데, 헐거워진 부분들로 흘러내려왔을 뿐이다. 그 틈은 일년도 더 된 일이다. 삐걱삐걱 버티어 온 것이고 잘 막아낸 것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주인이란 망으로 갈아끼우는데 돌무더기 우루루 몇 무더기가 쏟아져내린 것이다.


작은 문화충돌 같은 것이라고 할까. 아니면 단조로운 공간에서 벌어진 사람 스트레스라고 할까. 대부분이 못견뎌한다. 내성이 생기는 사람도 있고, 부딪침은 그대로 날 것으로 드러나고, 응급처방을 하고 약을 바르고 상처를 보듬는다. 건강해져 가는 것일 것이다. 아마라는 말을 덧대면서 바라본다.


일터 밖의 인연도 일렁인다. 가끔 가던 횟집 간판이 어느 날 바뀐다. 어 저 사장 며칠 전 횟감이 떨어져 손님을 받지 못한 줄 알았는데 정리를 하다니 한번 봐야지 하는데 전화다. 들어주다나니 쉽지 않다. 식당이든 제조업이든 함께 일해나가기가 만만치 않은가보다. 고용노동부 신고는 약과이고 마인드를 공유한다는 것은 지나친 갑질일뿐이다. 버거운 일을 참아낸다는 것 자체가 지금에 맞지 않은 일이다. 일을 잘게 쪼개거나 루틴으로 만들어내지 않으면 그 만큼 후과가 따르는 것이다. 예민해져야 하는 것이다.


며칠간 손님을 치루고 또 다시 주말을 격담으로 채우니 결혼식장에 다녀오고 작업실을 들러오는 길, 저녁이 되자 온몸이 납덩어리가 된 듯 싶다. 나란 이가 10%정도 부풀다가 바람이 빠져 제자리로 돌아오는 듯 가쁘다는 느낌이 든다.


몰아서 두상만드는 법을 본다. 눈을 작업하기 위해서 눈만 그리면 되지 않는다. 안와라는 공간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그저 평면감만 나타낼 뿐이다. 바탕 작업이 3/4이상인 것이다. 흙마법사라고 말하는 입시생대상 조소강사는 눈코입귀가 다 다르다라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한다. 평균 이미지를 말하기 위해 쉼없이 이런저런 경우도 있지만 이렇게 한다라고 한다.


작업실에도 우루루 손님들이 다녀갔다.  두 번의 전시를 약소하게 소개도 하고, 지금 작업이야기도 나누게 된다.


일터도 일도 몸도 마음도 십분의 일쯤 부풀거나 뒤틀어지거나 찌그러지거나 돌려져 있는 느낌의 나날들이다. 그렇게 다른 나를 겪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찬란한 봄꽃이 비껴가고 있다는 느낌은 십여년만 처음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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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9년 <<영남일보문학상>> 신인상 시상식에 다녀온 적이 있다. 서정이 빛바랜 시대에 서정을 담은 그 시를 골라내어 <이름>을 불러준 비평가와 심사위원의 시선이 놀라웠다. 당선작인 <이름>이란 시를 낭독하는 행사장의 분위기는 남달랐다. 구상시인의 손주가 야구선수 구자욱이라는 것도 안 것이 그 날이다. 뒤풀이에서 대구 문인들과 분위기를 익힌 것도, 그 뒤 대구 도보여행을 번갈아 해본 것도 그 시작점인 그날이다.



2. 


삼월 마지막 봄날. 통영행 버스에 시집을 챙기고 읽다. 독서등을 켜고 흐릿한 흔적들을 남김없이 훑어 본다. 시를 나누는 사이라 나에게로 보관해둔 이력도 만만치 않다. 굵직한 몇 편들만 여기에 실렸을 뿐, 대부분 새로운 작업들이자 작품이다.


3. 


해설 작업을 한 이경수 비평가는 시상식때 심사위원 가운데 한 분이다. 우연이라는 것이 이렇게 단단해질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출판사에서 먼저 나온 제안이라고 들었다. 날카롭고 가감없는 해설에 만족하는 이유도 몇 번을 읽고 낚아챈 마음들을 우려내고 있는데, 어쩜 그렇게 짧은 기간 잘 볼 수 있는지 놀랍기도 해서이다. 아니 정작 너무 가까워 보이지 않던, 볼 수 없던 부분까지 짚어내서 이기도 하다.


4.

 

시인의 삶의 과정들이 순탄하지만 않다. 하지만 나라면 드러내지 않을 일도 그는 시의 중심부에 그 아픔을 그대로 드러내고 다른 아픔들을 이어붙인다. 그래서 그 시선들은 변방을 향하고  생생하게 날 것인 아픔을 건들면서 지금을 그 곁에 배치한다. 그는 약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강하고 단단하다.


5. 


제목은 포항 한 귀퉁이 작은 책방 전시회에 그가 써준 방명글이기도 하다. 물론 시의 집, 시집의 대문이 될지는 몰랐던 일이다.



0. 


몇 번을 읽고, 선물 삼아 권하고, 어느 한 편을 낭독할 예정이지만, 나침판처럼 흔들리는 그의 시감은 중첩되고 기분에 따라 날씨에 따라 요동치면 읽힌다. 부디 멋진 시의집을 당신의 손 안에 마음 안에 넣길 바란다.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시다. 서정과 서사가 녹아있는 흔치않은 시인을 얻었다 싶다. 2024년 봄날은 찬란한 슬픔이다. 이 시집으로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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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인 <이름>이란 시도 마지막 편으로 실려있다. 음미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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앳된 청년이 들어왔다. 진**씨. 아니란다. 문자를 잘못보내 면접 30분전에 도착한 친구는 생기가 넘친다. 배경설명하자 궁금한 질문들을 한다. 휴가는 어떻게 되는지 년차 정산은 되는 것인지 등등 안정적인 부분은 어떤 것인지 되묻는다. 작업복 사이즈를 묻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40이라니, 그리고 110이라니 겉보기와 무척 다르다. 어 아니데,  .....그러고 보니 직업(지게차)과 관련있는 듯하기도 모를 일이다.


하루만에 그만두었다는


이해


나의 관점으로 보는 것은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는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나의 관점을 지우는 일이 우선인지도 모르겠다. 사업주마다 다르겠지만 예방을 우선에 두려면 많은 것들이 걸리고 연관선상에서 염려를 해두어야 하는 것들이 많다. 아니 있다. 성격이 다르듯 집행의 과정이나 결과에 대해 이견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시선들이 온전한 것이 아니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하는 부분들이 있다. 


오해


마르크스는 계급 차별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 인종차별주의자 원조격인 고비노의 영향으로 오히려 확대된 것이라고 푸코는 말하고 있다. 원한이 볼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보지 못하는 것도 많다. 그대로 놓아두고 본다는 것은 과정을 이해하는 일이다. 벌어지는 사이사이를 깊숙히 들여다보면서 마음에 넣는 일이기도 하다. 단발의 적대하는 해석은 사태를 이해하는데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기업 사업주들에게 막연히 주입받는 적대감을 안고 있던 24살의 기억이 떠오른다. 검색하다보니 내일(21일)이 인종차별 철폐의 날이기도 하다.


검찰


현행체계에 반대하는 심경은 십분 백분 이해하는 바이다. 하지만 어제 본 한 편린의 글에 마음이 걸린다. 다 때려부수고 정상화하면 살만해지는 세상인가. 글쓴이도 우리의 분노와 심경이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가 되묻는다. 프리터의 삶, 뭔가 하고싶은 것을 하면서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경제적 파이에 대한 논의가 미뤄지는게 아닌가 우려하는 듯싶다. 과연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좀더 맘 편히 길게 안심하며 살 수 없는가. 많이 벌지 않더라도 그 시스템은 정작 그 부분을 두드려주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며 느낌을 삼키고 있는 것 같다.


궤변


언론좀비들은 어디 뜯어먹을 것이 없나하며 종횡무진이다. 그렇게 민주주의에 관심이 많은 듯 상대편 상처를 부풀리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언제나 무지한, 아니 열심히 살아가는 생활인들이 다수 이므로 흑색문구를 천지에 뿌린다. 유권자 한명이라도 맞으라하며 뿌린다. 쓰러트리기 위해 모든 것은 사용하는, 죽음도 불사하는 기괴함이란 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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