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 인식론의 용어를 빌린다면, 2종 인식이 보편적 법칙과 관계하는 것이라면 3종 인식은 점차 구체적인 대상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자케는 2종 인식의 지평에 있던 부르디외의 작업을 3종 인식의 지평에서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0
저자는 계급횡단의 사례를 발생시킬 수 있는 원인으로 야심, 가족 혹은 학교 내의 대안적 모델의 현전, 제도적 지원, 우정이나 사랑 같은 감정의 힘 등을 제시한다. 계급 이동은 한 사람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며 계급횡단자는 언제나 그를 둘러싼 환경 속에서 사유되어야 한다. 21
계급횡단자들의 역사를 고려하면 각각의 횡단자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이 공통적으로 이곳에도 저곳에도 완전히 동화될 수 없다는 점에서 ‘틈새’에 위치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물질적 자산이나 문화적 교양의 격차가 아니라 서로 갈등하는 사회적 힘들 사이의 충돌로 나타난다. 22
계급전향자: 자신을 부르는 명칭이 가치 평가적인 용어 외에는 없다는 이 현상은 계급을 바꾼 이들에게 국한되어 일어나지 않는다. 이 현상은 지배적 모델을 재생산하지 않는 모든 사람 그리고 모욕 아니면 야유의 딱지 아래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되는 모든 사람과 관련한다. 명명될 수 없기에 이름이 없는 자들이 있다. ; 동성애자들-호모, 바텀, 마짜, 갈보. 레즈비언, 게이 41
사유에는 접근 금지 구역도 없으며 자신의 것이라고 선험적으로 보장된 영역도 없다. 가령 신체는 역사, 철학 혹은 사회학의 대상이기도 한 동시에 물리학의 대상이기도 하고 생물학, 의학의 대상이기도 하다. 45
아니 에르노의 세 저작, <<남자의 자리>>, <<한 여자>>, <<부끄러움>>이 자서전이락보다는 사회적 전기형 자서전에 가깝다. 사회적 자서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아의 재발견이 아니라 더 넓은 현실과 공통의 조건 혹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사회적 고통 속에 자아를 해소하는 형식을 취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외의 독특성과 개념의 보편성 사이의 외견상의 단절은 점차 희미해지는데 왜냐하면 한 개인을 통해서 모든 인간 조건이 표현되며 상황 속의 인간학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49
모든 야심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야심이다. 야심은 달성하고 싶은 모델, 이상, 목표에 대한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비-재생산의 경우 야심은 출신 환경에서 지배적 모델과는 다른 모델에 대한 표상과 그 모델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의 존재를 함축한다. 야심이 최초의 원인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이 감정이 어떤 모델에 대한 관념과 그 모델처럼 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합쳐진 결과, 즉 인식적 규정성과 감정적 규정성 사이의 혼란스러운 합성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64
모델과 모방: 1. 가족모델 - 노동자의 자녀들이 빈번하게 되뇌곤 하는 “그건 우리를 위한 것은 아니지”라는 그 유명한 말에는 자신들 앞에 펼쳐진 사회적 운명에 대한 그들의 혼란한 의식이 드러나 있다.(자기-제명) 72
아니 에르노의 세계는 “폐쇄되어 있는 느낌”을 주는 규칙과 코드들의 성층 구조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러한 법칙과 관례들은 마치 “십계명”처럼 작동했다. 더 자세히 말한다면 그녀의 세계는 지역의 일반적 풍습과, 소상인에게 배어 있는 행동 강령들 그리고 사립 가톨릭 학교의 명령 체계가 서로 뒤얽혀 있는 삼중의 법을 따르고 있었다. 74
상인들은 타인의 시선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단정한 품행을 보여야 하고, 분노나 슬픔과 같은 감정들을 절제해야 하며, 부유함을 과시함으로써 시기심을 불러일이키는 일도 자제해야 한다. 75 아니 에르노의 세계는 예외적 삶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아비투스들고 구성되어 있었다. 76 <<부끄러움>>
2. 학업모델 - 부르디외는 “위대한 스승의 영향이 스며들지 않은 학생의 삶이란 없다. ” 82
3. 비-재생산의 사회경제적 조건들
4. 감정과 마주침 - 한 명의 개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가 외부 원인과의 마주침을 통해 느끼게 되는 감정을 통해서 그 개인의 현행적 존재를 구성하는 역학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101 우리는 스피노자를 따라서 감정을 행위 역량을 상승시키거나 감소시키면서 각자의 욕망에 영향을 미치는 신체적-정신적인 변양의 총체로 이해하고자 한다. 감정은 우리를 건드려 우리가 움직이게 만들고 또한 우리를 뒤흔들어 놓은 것을 일컫는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감정은 한 개인의 인과적 역량과 외부 세계의 인과적 역량 사이에 일어난 마주침의 표현이다. 102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의 방향 전환은 대체로 어떠한 마주침과 그 마주침의 결과인 어떠한 감정을 통해서 실행되기 마련이다. 디디에 에리봉의 마주침은 대학교수의 아들이었던 같은 반 친구와 유대감이었다. 이 친구를 향한 애착의 감정은 디디에 에리봉이 그 이전까지는 자신은 한 명의 불청객에 불과하다고 느끼게 만들었던 세계의 문턱을 넘어서 민중 계급이 조롱하던 낯선 문화를 전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03 욕망의 역량과 우정의 힘은 타자성을 향한 열림을 통한 정체성의 재주조를 동반한다. 이러한 타자성을 향한 모험은 동요와 저항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친구란, 서로 다른 사회적 역사를 체현하고 있는 두 인물이 서로 공존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105
위반을 시도하는 자는 그 즉시 계급 보수주의와 순응주의로 비롯되는 삼중의 비난, 즉 너는 한낱 몽상에 빠져 있을 뿐이라거나, 우리 계급을 배반하는 배신자라거나, 제 분수를 모르고 다른 물에 끼어든 위장한 자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비난의 세계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114 위장 침입이나 사칭 “나를 믿어,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우리는 결코 그들과 같이 될 수 없어” 혹은 “그들은 우리와 같지 않아” 등등의 말들. 배신자라는 비난, “너는 우리를 배반했어” “너는 우리를 무시해” “너는 우리가 부끄럽니?” 등등 위장한 자라는 비판으로는 “자신의 분수를 알아야 한다” “남들보다 위에 서 있다고 믿어서는”안 된다. “제 엉덩이보다 더 높은 데서 방귀를 뀌려 한다” 등등의 말 115-116
이러한 조건에서 동일시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검열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대안적 모델을 욕망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주변 환경이 상당히 강압적이고, 숨 막힐 정도로 목을 조르는, 그야말로 파괴적인 것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116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더 나은 삶을 욕망하고 있다는 뜻이다. 117
5. 자리 그리고 환경의 역할: 비-재생산은 재생산의 간계로서 나타난다. 비-재생산은 재생산과 상충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재생산의 원환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모든 것을 멀찍이 축출시킴으로써 재생산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120 성적 수치심이 게이 프라이드로 전환될 경우 이 감정은 사회적 신분 상승의 증기기관으로 작동할 수 있다. 125 어쩌면 한 개인이 가족과 사회를 떠나야만 하는 고통을 겪을 때 그 가족과 사회 역시 온몸이 병들어 있으며 그곳을 떠나는 개인을 통해서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126
비-재생산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한 개인만의 고독한 여정으로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비-재생산을 일련의 방식으로 추동하고 또한 허용하는 가족적-사회적 환경의 연대를 사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홀로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늘 환경에 의해 그리고 환경을 통해 옮겨진다. 131
<<형제와 보호자>> 두 형제 사이의 차이는 말하자면 존재론적 차이라기보다는 위상학적 차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137 이처럼 두 형제가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 것은 선천적 차이의 결과가 아니라 주변 환경 및 가족 배경과 상호작용 속에서 역사적으로 작동하는 차이화의 결과였다. 138 로비의 이력은 이중적 구별 짓기의 운동에 따라 나름의 비-재생산의 절정에 이른 결과다. 139
6. 인게니움 혹은 기질: 계급횡단자는 고독한 영웅이라기보다는 가족, 마을, 거주지, 인종 혹은 계급, 성별 또는 젠더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소망을 떠안고 있는 선구자이다. 그러므로 비-재생산은 개인적인 현상이 아니라 관개체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141
뒤엉킨 실타래를 풀어헤쳐 다른 방식으로 땋음으로써 새로운 직조의 형태를 만들어 낼 수는 있고, 이로써 다른 존재들과 관계가 전적으로 단절되는 것이 아니더라도 혹은 다른 존재들로부터 뜯겨져 나오지는 않더라도 우리 자신의 존재를 이루는 배경을 새로이 직조할 수는 있을 것이다. 149
볕뉘
부르디외, 아니 에르노, 스피노자라?! 이런 의아한 만남이라니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그것도 한참 철지난 듯한 부르디외라니? 거기에 더해서 '계급횡단자', '비-재생산'이란 제목은 희귀하기도 하거니와 도대체 이해가 되먹지 않은 언어의 유희로 느껴진다 싶다.
감정, 감정, 감정. 민생. 민생. 민생처럼 알맹이 없는 빈 빵같은 읊조림은 아닐까? 시대적 징후처럼 많이 말해지지만 실속은 없는 구름같다는 인상의 문턱에 있지 않았던가? 그래 명문을 만나지 않았던 이유일 수도 있다.
계급과 개인과 사회, 그리고 감정, 자아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주위를 맴돌지만 어느 하나 완결되도록 잡아낼 수 없었다. 잡다보면 어김없이 한 둘은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어떻게 사회학 인문학의 난제를 이리 쉽게 풀 수 있는지 지금도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두 번째 글에서 상세히 가늠해보기로 하고, 먼저 놀라움을 전하는 것으로 만족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