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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속 속에서 다시 위상을 갖는 자는 꿈꾸는 자인가? 우선 사람들은 사회의 구속들을, 이성의 훈육을, 서로 간의 기호들인 언어를 거부해야 할 것 같다. 심지어 행동과 개념의 구조를 부셔야 할 것 같고, 이리하여 우리 스스로 자유로워야 할 것 같다. 41

[ ] 환희의 철학 한 가운데서 드라마틱하게 울려퍼지는 ‘이거나...또는 이거나‘라는 용어이다. 언어의 침범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감정이다. 만일 그 감정을 담론으로 번역하기를 원한다면, 감정의 지속을 공간 속에 펼쳐야 할 것이고, 그것을 따로 떨어진 순간들로 분석해야 하고, 감정에게 속하는 그 생기와 그 색깔을 상실시켜야 한다. 감정은 ˝살아있는 한 존재˝이다./말해진 것이 전부는 아니다. 언어의 주술을 퇴치하는 것과 그 언어를 이용하기 위해 실행하지 않았던 것에 이용하려는 것, 이것은 시인에게, 예술가에게, ˝과감한 소설가˝에게, 심지어 철학자에 속하기 때문이다. 44

[ ] 언어의 종착지를 바꾸어 놓으면서, 한 순간 우리는 지속에 닿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지속에 거의 닿을 것이다. 그 순간이란 주제, 거의 라는 주제가 장켈레비치에게는 행운이었다. 이 주제들은 지속은 연속이며 우리는 절대자 속에 살고 있다고 말하게 될 철학자의 비밀스런 드라마였다. 지속은 순간을 배제하지 않으며, 충만은 ‘거의‘을 배제하지 않으며, 현전은 부제를 배제하지 않으며, 방해언어는 내장언어를 배제하지 않는다. 46

[ ] 설탕이 녹도록, 슬픔이 감당될 수 있도록, 감동이 가라앉도록, 생각이 진화하도록, 기다려야만 한다. 실재적 시간은 예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 속에서 생겨나는 것은 그 리듬에 맞게 성숙해야 한다. 55 이상 사상: 지속의 철학에서



[ ] 베르그송은 존재가 그 자체에게 출현이라는 것을, 즉 내적 삶의 의미를, 자아 각각의 값을 따질 수 없는 가치를 철학에 되돌려 놓았다. 우리에게 되돌려진 이 자아가 인격성이다. 이 자아는 철학 속에 베르그송의 분석적 신중함이 그것에 대해 정식화했던 것보다 더 많은 사물들[사건들]을 도입했다. 79 내적 삶 편에서



[ ] 정신은 물질에서 지각을 빌려오는데, 지각들로부터 정신은 자신의 영향을 이끌어내고, 그 지각들을 물질에게 자신이 자신의 자유를 각인시켰던 운동의 형식으로 되돌려준다. 82
[ ] 지각하다는 움직이지 못하게 하다를 의미한다 : 지각의 본질이 자기 주관성이 아니라는 것과 그 본질이 기원적으로 대상 안에 있다는 것을 확립한다면, 덜 어렵게 수수께기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론을 위한 상식을 포기하자. 이 이론에서 순수지각이 인간의 통상적 지각인 것은 아니다. 순수지각은 지각의 모든 추억을 제거하면서 축소해서 얻어진 제한된 지각이다. 87
[ ] 어떻게 불변하는 법칙에 속하는 이마쥬들 일체로부터 나에게 관계하는 이마쥬들로, 즉 ‘있음‘으로부터 ‘지각됨‘으로 이행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 나머지는 하나의 사물처럼 주변 속에 끼워 넣어진 채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그림처럼 주변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방식으로 있다. 88
[ ] 지각된 것은 존재하는 것이며 최소한의 정도에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각작용은 사변적 덕목이 아니다. 극장의 어떤 한 장면도 두뇌가 표상을 솟아나게 할 것과 같은 수준에서 생산되지 못한다....˝나의 신체는 지각들의 중심에서 그려지는 것이고, 나의 인격은 이 행위들과 연관되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스피노자는 영혼은 신체의 관념이라고 말했다. 89
[ ] 기억은 운동들에 의해서 지각들에 응답하는 필연성에 근거하고 있다. 그 운동들은 지각들이 미래를 향해 장악했던 정도에서 과거를 요구한다./ 기억과 지각은 본성상 다른데, 정도의 차이가 아니다. 전자는 한계상으로 총체적 주관성이며, 후자는 총체적 객관화이다./˝지각의 현실성은 지각의 활동성 안에서, 즉 지각을 이어가는 운동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지각의 더 큰 강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과거는 단지 관념에 불과하고, 현재는 관념-운동이다. 90,91

[ ] 데카르트의 계승자들은 데카르트의 불가사의를 해명하지 못하는 명석이라는 개념화 작업을 수용하지 않는다. 이들은 두 개의 평행 계열, 즉 신체계열과 영혼계열의 가설을 채택하기를 선호했다. 94

[ ] ‘재인식하다‘에도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운동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마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전자는 방심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주의하는 방식이다. 전자는 대상으로부터 진행하는 데 비해, 후자는 주체에서 유출하는 것이다. 100

[ ] 나의 현재가 감각들과 운동들이 결합된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나의 현재는 본질적으로 감각-운동기관적이다. 이것은 나의 현재는 내가 신체에 대해 갖는 의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112
[ ] 모든 유기체는 ˝주어진 상황으로부터 유용한 것을 추출하는 기능과 가능한 반응을 동일한 종류의 상황들에 이용되게끔 운동적 습관의 형태로 축적하려는 기능을 갖는다.˝/지적 전망[전개]을 생각하는 것, 그것은 한편으로 꿈과 추억의 풍부함을 수집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논리적 구조들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 구조에 의해 관념은 실재적인 것과 만나고, 삶에 주의한다. 115
[ ] 행동하다, 투쟁하다, 원하는 것은 꿈속에서 자아를 현실의 점 형태의 차원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각성한다는 것과 원한다는 것은 하나의 동일한 유일 사태이기 때문이다.˝ 각성한다는 것과 원한다는 것, 그것은 집중하는 것이고 사건에 의해 제기된 문제를 정확하게 조절하는 것이다. 사유한다는 것과 행동한다는 것은 베르그송에게는 동일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사유한다는 것, 행동한다는 것, 상기한다는 것, 재인식한다는 것은 계속적인 의식의 평면을 관통하며 조금식 운동의 형식으로 추억을 호출하는 것이다.....이렇게 완수된 지적 노력은 역동적 도식에 의해, 사유라기보다 살아왔던 일체의 구조에 의해 생명성을 띠게 된다.....사유한다는 것은 의미를 구현하는 것이고, 그것은 이마쥬로부터 의미로 올라가기보다 오히려 의미를 찾으려 의미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의미와 더불어 이쥬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하나의 문제를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문제를 다시 만드는 것이다. 118, 119
[ ] 꿈꾼다는 것은 사유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과 반대 운동이다. 인격성의 두 축은 즉 총체적으로 주관적인 추억들과 총체적으로 개관적인 운동들이다. 이 두 축에서 꿈은 전자에 관계하고, 사유와 행위는 후자에 관계한다. 그러나 모든 사유가 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직관 또한 하나의 사유인데, 직관은 꿈의 방향으로 간다.....그럼에도 꿈은 더 멀리 찾으러 가지 않고서 자기의 환상적인 놀이들을 자기에게 상연하다. 창조적인 직관은 불가능한 것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120 이상 재발견된 형이상학 편에서


[ ] 풍자화가의 예술은 지각할 수 없는 운동을 파악하는 것이고, 그 운동을 크게 보이게 하면서 모든 사람들의 분에 보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127
[ ] 성격의 웃음거리는 삶을 극장으로 만들고, 우리와 닮은 자들을 작중 인물들로 만든다. 여기서 사회가 깨어난다....우리는 그 인간 전체를 볼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풍자적 특징만을 본다. 131
[ ] 베르그송주의는 비극에 낯설고, 가장 깊은 심층적 희극에도, 우주적인 거대한 웃음에도 낯설다. 133 이상 무엇에 대해 웃고, 왜 웃는가 편에서



[ ] ‘지속은 과거가 미래를 잠식하고, 전진하면서 부풀어가는 연속적 과정이다.˝ 진화가 혁명은 아니다. 진화는 연속하면서 보존한다. 우리의 성격도 역사를 보존한다. 136
[ ] 분석적 분해 작업에서 창조를 해결했다고 믿는 것은 공간과 지속을 뒤섞는 것과 유사하다. 생물학은 무지에 빠져있는 물리-화학이 아니다. 생명은 설명되지 않았던 잉여분을 제시한다. 인식론적으로 말하자면 생명은 특수한 수준이다. 139
[ ] 다양한 종들에서 시각적 기능 또는 기관-운동적 기능의 다양한 해결책을 밝히는 것이 되겠는가? 그렇다면 기능이 기관을 자극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단순한 손짓이 복잡한 배치를 창조했다고 인정해야 한다. 생명은 내적 역동성 덕분에 환경으로부터 수단을 끌어내면서 적응했다. 141
[ ] 생명도약˝ ˝우리는 조각들로 파열되는 탄알에게 볼 일이 있다. 이 탄알의 파편들 중에서 조각들 그 자체가 탄알이 되어서 이번에도 조각들로 파열되고, 그 조각들이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연속으로 터져나갔다. 우리는 산산조각 난 파편들로 흩어진 운동들만을 지각한다. 우리는 이 운동들에서 출발하여, 근원적 운동에까지 점진적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생명 도약의 명석함은 본질적으로 능동적 밝힘이다. 144
[ ] 직관이 지속을 앞서가지 않는다. 그러나 지속의 한 가운데서 직관이 다시 태어나고, 생명의 핵심에서 생명의 인식이 자기 동기를 발견한다. 생명을 파악하기 위하여, 생명 총체로서 그 자체를 스스로 파악해야 한다. 이것은 진실한 정체성 찾기이다. 이것은 인식 이론과 생명 이론이 따로 분리될 수 없다. 147

[ ]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전승되어 온 중대한 오류 즉 대부분의 자연철학자들에 악영향을 준 중대한 오류는 식물적 삶, 동물적 삶, 이성적 삶 속에서 하나의 동일한 경향이 발전시킨 계속적인 세 단계들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활동성의 분화된 세 방향이며, 이 활동성은 성장하면서 갈라지는 것이다. 151

[ ] 본능의 본성을 꿰뚫기 위하여 본능은 운동으로써 취급해야만 하지, 그것을 고정시키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본능은 완전히 분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본능은 체험된 직관이지 사유가 아니다....지성이 본능이 발견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면, 직관은 지성이 생성했을지도 모를 어떤 것이다. 만일 본능이 이성이 제기한 문제를 제시할 수 있다면, 직관은 본능이 생성했을 지도 모를 어떤 것이다. 직관은 이 양자를 넘어선 대안이다. 154
[ ] 인간 지성은 행할 것이 있다. 행위하고 행위하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는 것, 실재성과 접촉에 들어가서 그것과 사는 것, 이것이 인간 지성의 기능이다. 155/고독한 성찰 속에서 성숙해지는 사유는 집단적이며 진보적이다. ˝우리는 과학과 철학을 결합하여 점진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심층에 있는 존재 자체에 도달한다.˝ 156

[ ] ˝동물의 발명은 습관적 행위의 주제에서 일어나는 변주 이상이 아니다. 인간과 더불어 그 사슬은 깨진다. 인간에서 그리고 인간에서만이 의식은 자유롭다.˝ 의식은 자신이 스스로 가져야만 했던 메카니즘들 속에 죄수로 남아 있다. 인간의 측면에서 자유는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160

[ ] 인식 이론과 생명 이론이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전자는 후자에 의거한다....산 위에서 신은 말하고, 인간은 듣는다. 창조는 사랑이라고 신이 말하고 인간은 듣는다...자연은 말하지 않지만 지속하며 진행 또는 전개한다. 인간은 자연을 그 내면(심층)에서 느낀다. 이 자연 즉 본성은 소크라테스의 욕망, 즉 사랑이다. 플로티노스와 스피노자의 권능이며, 브루노의 영혼이며, 루소의 연민이며, 베르그송의 기억 즉 생명이다. 163 이상 생명의 큰 숨결 편에서

[ ] 소설가는 한 인물을 그의 절대 속에서 그 인물이 되어야 했다. 직관은 이 절대와 일치한다....형이상학은 운동성 그 자체인 자기 목적으로 간다...˝직관으로부터 분석으로 갈 수 있다. 그러나 분석으로부터 직관으로 갈 수 없다.˝ 직관은 핵심에 꽂히는 날카로운 침인 동시에 지칠 줄 모르는 핵심적 운동이다.˝ ˝이 운동은 형이상학 자체이다.˝ 인식은 실재적인 것으로부터 추방되어 있지 않다. 그 인식은 상대적이지 않다. 직관은 가능하다. 이것이 베르그송이 알린 새소식이다......철학한다는 것은 사유 작업의 습관적 방향과 거꾸로 간다.(유심론적 방향이 아니라 심층에서 표면 방향이다.) 168
[ ] 본능의 너울을 덮어쓴 지성은 기원들에서 지성-본능의 총체성을 재발견한다. 이 총체성 속에는 모든 것이, 즉 의식과 생명이 혼재되어 있는데 모든 것이 촉발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169 생명만이 운동이며 운동은 생명이다. 직관은 생명의 수준에서 새로운 어떤 것과 더불어 개별적인 지속의 팽창과 확정을 발견한다.....직관의 연습이 철학이라면 이 철학은 생명, 생명의 인식과 하나를 이룰 것이다. 이것이 [창조적 진화]의 권위를 이루는 중심이다. 이 권위는 앞서 나온 저작들과 지속과 개별적 자유, 지속과 도덕과 종교의 해방을 밝혀줄 것이다. 따라서 인식은 반대되는 두 운동을 허용한다. 하나는 과학적이고 기하학적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이다. 하나는 물질적 작용을 향해 앞으로 나가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기원들을 향해 뒤로 간다. 나중에 창조적 감동으로써 직관의 한 형식이 미래에서 행위를 생겨나게 할 것이다. 170

[ ] 철학자는 일단 직관의 도약을 받아들인 다음에는 직관을 버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제 개념들을 차례로 추진시키면서 운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는 곧바로 발판을 잃었음을 느낀다. 새로운 접촉이 필수적이게 된다. 사람들이 이루었던 가장 커다란 부분을 무너뜨려야 할 것이다. 요컨대 변증법은 우리 사유에게 사유 자체와 일치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변증법- 단지 직관의 이완일 뿐인-에 의하면 많은 다양한 일치들이 가능하고 그럼에도 하나의 진리만이 있다. 171

[ ] 직관이 굴절됨이 없이 이어나갈 수 있었다면, 모든 사상가들은 일치되었을 것이다. ˝사라지기 쉽고 불완전하지만 직관이 현존하는 것처럼, 그 직관은 각 체계 속에서 체계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무엇이고, 체계보다 더 잔존하는 무엇이다.˝ 172

[ ] 이미지들은 메시지와 맞지 않는 것에는 ‘아니요‘라고 말한다. 그것이 소크라테스의 다이모니아인데 이미지들이 불가능이라고 말한다. 173

[ ] 한편으로 무엇인가 미묘하고 극히 가벼워서 거의 공기와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다가가면 도망쳐버리지만, 멀리서 그것을 볼 수 있다면 나머지 것들이 무엇이든 간에, 실체와 속성의 구별이라든가 사유와 연장의 이원성 같은 중요한 것이라고 간주되는 것들에 집착할 수 없게 된다...스피노자의 직관은 ˝정신이 진리를 완전하게 인식하는 작동과 신이 진리를 발생하게 하는 작용 사이에 일치의 감정이 있다. 버클리는 직관을 ˝물질에 대해 마치 인간과 신 사이에 놓여 있는 엷고 투명한 막˝처럼 생각한다....베르그송은 직관적 방법에 의해, 철학에서 가장 부족한 ˝정확성을 철학에 기여하고자 했다. 철학은 일반 관념이라는 기성복 대신에 실재적인 것의 척도를 정확하게 재단하는 파악이 필요하다. 실재적인 것은 지속이다. 직관은 베르그송의 방법인 동시에 베르그송주의 철학적 직관이다. 175, 176
[ ] 진보하는 의식은 일치와 공감에 의해 다른 의식들로 향하여, 전체 생명들을 향하여, 결국에는 지속하는 우주의 총체성을 향하여 나아간다...직관을 지칠 줄 모르고 탐구하는 것은 지속의 영혼이다. 직관은 불안하지만 청명하다. 직관은 절대자의 심층들과 더불어 그것을 결코 끝내지 못하지만, 직관은 절대자 안에서 즐거이 움직인다...직관은 언어에 도전을 받지만 언어를 활성화한다....직관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곧 지속 안에서 사유한다는 것이다. 직관은 사랑처럼 빛을 발산하는 모호한 명확성이며 그 사랑은 직관이 건드린 것에 열기와 생명을 부여한다....˝진실한 지성은 우리가 연구하는 것의 내부에 침투하게 하여, 그것의 밑바닥까지 닿아서, 우리에게 그것의 밑바닥까지 닿아서, 우리에게 그것의 정신을 열망하게 하고, 그것의 영혼이 뛰는 것을 느끼게 하는 무엇(지성)이다...지성은 직관에 의해 활성화된 예지적 노력이다. 178, 179

[ ] 우리의 내부로 내려가 보자. 우리가 닿은 점이 깊으면 깊을수록 우리를 표면으로 되돌려보내려는 추진력은 더욱 강할 것이다...이원성 그 너머에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본질적 연관이 있다. ˝모든 사물들 속에서 작업하는 힘들을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느끼고 있다. 있는 것과 이루어지고 있는 것의 내밀한 본질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그렇게 (힘들의 작업으로) 있다. 181

[ ] 철학적 인식은 과학적 인식과 반대 방향으로 간다. 후자가 땅 위의 인간에게 제공된 자연적인 방향에서 쉽게 행사되는 데 비해, 전자는 자연에 저항해야 하고 정신을 육체와 분리해야 한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방법상의 차이를 원하며, 우리는 형이상학과 과학 사이에 가치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183
[ ] 언어의 원초적 기능은 무엇인가? 그것은 협동을 목적으로 소통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진실은 이러하다. 단어 그 위에 그리고 그 문장 그 위에, 문장보다도 심지어는 단어보다도 훨신 더 단순한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의미이다. 그 의미는 사유된 어떤 사물 이라기보다는 사유의 운동이며, 운동이라기보다는 방향이다....베르그송의 변증법이라 할 상징에서 실재적인 것으로, 담론에서 의미로 중다 없는 왕래를 요구한다. 187 이상 직관이론 편에서

[ ] 문화는 말하지 않고 행동해야 했던 것에 말을 빌려준다. 194

[ ] 창조적 감동은 표면의 동요가 아니라 심층들의 봉기이며, 이것을 감당한 어떤 생각과 어떤 행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관념들과 행위들의 발생자이다. 산맥 앞에서 루소의 감동은 감동을 창조했고, 말하자면 풍경 그 자체를 재창조했다....창조적 감동의 도덕은 감정의 도덕이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사랑으로 철학의 누룩을 만들었을 때, 그가 철학을 욕망으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베르그송은 아가페적 사랑, 즉 복음서에서 요한의 자비를 도덕의 원리로 만들었을 때 감정의 도덕을 만들지 않았다. 창조적 감성은 수동적 감성과 대척점에 있기 때문이다. 199

[ ] 자유작동은 단지 자아의 개화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심층자아˝가 다른 영혼들과 자연과 공감하는 한 영혼을 발견한다. 자아의 고유한 한계들을 부수면서 영혼이 사회적 환경의 한계들을 깨뜨렸다는 것을 발견한다. 인간 종에게 부여한 창조적 작동은 ˝하나의 정지였다. 앞으로 행진함으로써 사람들은 사람들은 이 정지를 파괴하려는 결단마저도 파괴해버린다.˝ 누군가 모든 인간들을 이끌지 않았다면, 그는 말하면서가 아니라 앞으로 행진에 참여함으로써 이들 중 몇몇을 이끌어간다. 장애물이 운동에 의해 부정되는 것이지 단어들에 의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201 이상 폐쇄에서 개방으로: 도덕의 두 원천에서



[ ] 삶은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 사는 것이 먼저고 다음 철학한다. 220

[ ] 신비주의는 생명 도약과 절대적 새로움을 동시에 다시 파악한다. 신비주의자들의 소명은 도약을 저 너머까지 인도하기 위하여 그 도약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 속에 총체성을, 즉 지성과 직관의 통일성을 다신 발견할 영혼만이 이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 그러나 신비주의자는 살아있는 에너지를 창조하는 것이지, 고정된 작품들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220 신은 우리의 활동성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을 위한 대상들이 더 이상 아니다. 그의 사랑은 자기 피조물들의 관조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의 사랑은 영혼들을 관통하며, 관통하는 영혼은 신의 참여자가 된다...그러한 것이 순수 사랑의 창조에 대한 신비적 변신론을 소개한 것이다. 229 이상 내가 도달한 변신론에서


[ ] 마르크스가 표면에서 상층을 전복한다면, 베르그송은 상층의 아래로 지배 방향은 허구라고 비판하고, 실재적 삶은 심층에서 표면으로 방향이라 한다...베르그송이 역사에 치명성이 없다고, 소위 말해서 법칙이 없다고 선언했을 때,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과 진보의 어떤 형식에 반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뿐만 아니라, 정체, 반동, 회귀에 반대하여 이의제기를 했다. 그는 창조와 예견불가능성의 이름으로, 지속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두 경향성에 대해 등을 돌렸다. 235 역사의 진보와 신의 왕국 편에서


볕뉘

0. 창조적 감성이나 감동은 표면의 봉기가 아니라 심층의 봉기다. 두뇌는 될 수 있으면 망각하려고 한다. 잊혀져 무의식에 습자지처럼 남겨둔다. 이는 하지않음 무용의 쓸모로부터 나온다. 아무 생각없이 멍때리다보면 그런 휴지기에 부지불식간 꿰뚫는 것들이 생기기도 한다. 기다리고 여무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설탕이 녹는 시간, 슬픔이 감당되는 시간들, 감동이 식는 시간, 생각이 공진화하는 시간....그 리듬을 찾는 시간들이 필요하다.

1. 삶이 먼저이고 다음 철학한다. 살아지는 삶 속에서는 그저 채울 뿐, 개성의 코나투스가 짓이겨져 버린다. 사랑의 담지자로 고독을 잃어버린 우리는 방황한다. 나를 알지 못한다. 나를 믿지 못한다. 나에게 휴지기를 달라...나만의 시간을 달라. 여섯시간만 일해지게 해다오. 네시간을 바라는 것도 아니잖아....그래 나들이란 영혼이 그 자리에 겨우 설 수 있는 살아있는 시간을 다오. 삶을 추스릴 수 있는 ‘겨우시간‘말이다. 제발.

2. 악셀 호네트는 사회주의 재발명이란 책에서 말한다. 진보라는 것이 있다면 사회의 법칙은 없다고 말해야 한다고 말이다. X라는 것이 있다면, 몸과 뫔에 맞는 철학이 있다면 무엇일까 단순하고 명쾌해야 할 것이다. 기성복이 아니라 맞춤복 같은......

3. 1, 2 , 3, 4, 5 그럴까...아니다 생길 수밖에 없는 빈공간.......변증법과 베르그송이 전체성과 총체성을 이야기한다. 달의 이면을 보거나 사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삶과 생명을 걸고, 죽음을 전제하는 존재론이 아니라 삶 속에서 더 명확하고 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발랄하고 명쾌한 앎도 필요하다. 감정과 감동, 정서....신체를 한 묶음으로 움직이는 사유....그래서 그 살아지는 삶들과 일상의 장애물을 명확히 느낄 수 있도록.......

4. 그렇게 조금 다가설 수 있을까? 그에게서 조금 멈춘다. 또 다른 평지....또 다른 봉우리.....어서 오게나....저기 골짜기가 보이질 않나? 자네가 올라온 길들 말이야...어디가 길인지 숲인지 분간조차 안되는.......

5. 그래 또 숲이 나타날거야. 그런데 그게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닐세. 그게 무슨 대순가? 좀더 알맞은 봉우리가 나타날 걸세....같이 걸으면 좋고, 혼자 걸어도 좋고.....다 내 편인 걸. 내가 다 네 편인것처럼.....아 참 짧아....산다는게...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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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동이야말로 부동성에 선행하는 것이며, 위치와 변위와의 사이에는 부분과 전체 사이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 사이의 관계는 가능한 여러 가지의 관점과 사물의 실재적인 불가분성의 관계인 것이다.
[ ] 절대는 직관 안에서만 주어지며, 다른 나머지는 모두 분석과 관련이 있다. 직관이란 분석을 통해서 대상의 내부로 옮겨가 그 대상 안에 있는 유일하고, 표현될 수 없는 것과 합치하는 공감이다.
[ ] 직관이란 말하자면 실재의 더욱 내부적인 것과의 공감인 것이다....형이상학적 직관은 그런 종합과는 판연히 구별된다. 이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은 경험의 일반화와는 하등의 공통점도 없지만 총괄적 경험이라고 정의될 수 있으리라.

[ ] 회색을 본 경험이 없으면 나는 흰색과 흑색이 어떻게 혼합되는가를 상상할 수 없겠지만, 일단 회색을 보고 난 후면 회색을 흰색의 관점과 흑색의 관점에서 어떻게 고찰할 수 있는가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것이다.

[ ] 문학상의 작품 구성에 성공해본 사람이라면 다음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즉 주제를 오랫동안 연구한 후 모든 재료를 수집하고 모든 주석을 취했어도, 그 구성 자체의 작업에 착수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무엇인가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시에 주제의 핵심에 자리 잡으려는 노력, 그리하여 그런 다음에는 스스로 도달하기만 하면 되는 충동을 가능한 한 깊숙이 추구하려는, 때로는 어렵기조차 한 노력이다. 일단 이 충동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의 정신은 자신이 수집했던 정보들이나 그밖의 세목을 재발견하게 되는 궤도에 오르게 된다. 이 충동은 스스로 전개하며, 열거하게 되면 한없이 늘어설 용어들을 통하여 스스로를 분석한다.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이 용어들은 더 많이 발견된다.어느 누구도 모든 것을 말할 수 없게 된다....이 무언의 것은 사물이 아니라 운동에의 격려이며, 그것은 무한히 확장될 수는 있지만 단순성 그 자체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직관이란 이런 종류의 것인듯 생각된다.

[ ] 음악의 멜로디: 우리는 움직이는 것에 부착되지 않은 운동, 그리고 변화하는 것을 지니지 않은 변화를 명확히 지각하지 않는가? 이 변화는 그 자체로 충분한다. 그것은 사물 자체이다. 설령 그것이 시간을 요하더라도 여전히 분할될 수는 없다.
[ ] 내적 삶의 연속적인 멜로디: 이 멜로디는 우리의 의식적 존재의 처음부터 끝까지 분할됨이 없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개성이다. 이렇게 불가분적인 변화의 연속성이 바로 참된 지속을 구성하는 것이다.....이 지속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명확한 것이라고 말하는 데 그치겠다. 실재적 지속은우리가 언제나 시간이라 부르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간은 분할될 수 없는 것으로서 지각되는 시간이다.

[ ] 우리는 철학하기 전에 우선 삶을 살아야 한다.

[ ] 변화의 문제: 이 문제는 근본적인 것으로 생각되었고, 만일 사람들이 변화의 실재성을 확신하고서 그것을 파악하려고 노력한다면 모든 것이 단순화되어, 극복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철학적 난점들마저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만일 감각과 의식의 범위가 한정되어 있지 않고 지각 기능이 물질과 정신이라는 두 방향으로 무한히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추리할 필요도 개념화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 ] 모든 사물을 지속의 상하로 보는 데 익숙해지도록 하자. 그 즉시 우리의 지각은 전기오르듯 활기를 띄며, 이 지각 속에서는 정돈되어 있던 것이 이완되고, 졸고 있던 것이 잠을 깨며, 죽어있던 것이 생명을 찾게 된다. 만일 이렇게 이해된다면 철학은, 에술이 천성과 행운을 타고난 사람에게만 그것도 아주 드물게 부여하는 만족감을 우리 모두에게 부여해 줄 것이다./ 과학의 응용은 단지 존재의 편의만을 목표로 삼으므로, 이런 과학이 우리에게 약속해주는 것은 복지 또는 기껏해야 쾌락이다. 그러나 철학은 이미 우리에게 기쁨을 줄 수 있었다.

[ ] 데카르트 철학 및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같은 장중한 형체 뒤에 있는 것이 바로 스피노자의 직관이다. 아무리 단순한 공식일지라도 이 직관을 표현하는 데 충분할 만큼 단순하지 못하다. 비교적 근사한 표현으로 만족한다면, 그것은 우리 정신이 진리를 완전히 인식하는 행위와 신이 진리를 발생케 하는 작용 사이의 합치감정이다.

[ ] 인간정신의 구조는 새것을 낡은 것에 관련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취하기 이전에는, 그 새로운 것을 전혀 이해조차 하지 못하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다.
[ ] 이 상의 우선적인 특징은 이 상이 지니고 있는 부정의 힘이다.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이 어떻게 활동하는가를 기억해보자....직관은 제지한다. 널리 인정되어온 관념들, 명백하다고 생각되어온 명제들, 이때까지 과학적이라고 지나쳐온 주장들에 직면해서 직관은 철학자의 귀에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속삭인다.
[ ] 지금까지 잘못 제기되어온 형이상학적 문제들은 실제로 우리가 습관적으로 창조를 제작으로 전치하는 데서 발생한다. 실재는 전체적이어서 불가분적인 성장이며, 점진적인 발명, 요컨대 지속이다. 실재는 매 순간 기대되지 않던 형태를 띠면서 점차로 부풀어 오르는 고무풍선과도 같다./구체적 공간은 사물들에서 추출된다. 사물들이 공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공간이 사물들 안에 있다.

[ ] 작가의 영감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작가와 보조를 맞춰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작품을 거기에 합당한 억양과 음성으로 크게 읽는 법을 배워하는 것이다...뉘앙스와 색조는 언제나 지성보다 미리 형성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정확히 말해서 지성 이전에 먼저 구조 및 운동에 대한 지각이 존재한다....구조와 리듬을 지시해주는 것, 또한 구절의 여러 문장들간에 있는 박자관게와 각 문장의 여러 단어들 간에 있는 박자관계를 고려하며, 사유와 정감의 상승을 끊임없이 따라가서 그 절정에 있는 음악적인 음표에 이르는 것 - 바로 여기에 화법의 본질이 있다.

[ ] 사회란 생성의 바다 여기저기에 응어리져 있는 수많은 섬들이다.

[ ] 정교한 정신 없이는 사유도 없는데, 정교한 정신은 곧 지성 안에 비친 직관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직관의 이러한 하찮은 부분이 점차 확대되어 시를 낳고 산문을 낳았으며, 처음에는 기호에 불과했던 단어들을 예술의 도구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 ] 정확하든 모호하든 간에 지성은 정신이 물질에 쏟는 관심이다. 따라서 정신이 자기 자신을 향해 몸을 돌렸을 때, 어떻게 정신이 아직도 지성일 수 있단 말인가?/정신은 정신 자신을 사유할 때 반드시 물질과의 접촉에 빠져들었던 습관들의 비탈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습관들을 일반적으로 지적 경향성이라 부른다./ 직관이란 정신이 자기 자신에 대해 쏟는, 그것도 대상인 물질에 집중하면서 쏟는 관심을 가리킨다.

[ ] 두뇌의 기능은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로 하여금 꿈속에서 사라지지 않게 해주는 일이다. 두뇌란 생활에 대한 관심의 기관인 것이다.

[ ] 우리가 진리를 직관적으로 지각하는 순간, 우리의 지성은 자신을 회복하여 자신을 수정하고 자기의 오류를 지성적으로 형성한다. 지성은 제의를 받아들이고 검증을 제공한다.

[ ] 생이 우선한다: 기억, 상상, 이해 및 지각 등, 요컨대 일반화는 그저 쾌락을 위하여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기능들이 현재의 그것들인 이유는 그것들이 유용하며 삶에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 기능들의 존재를 설명하고 필요할 때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서 그런 기능들로의 일상적 분류가 인위적인가 아니면 자연적인가, 다라서 그것을 유지할 것인가 수정할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삶의 기본적인 사정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한다.
[ ] 문제 제기는 단순한 포장 제거가 아니다. 그것은 발명이다. 발견, 즉 포장 제거는 실제로 혹은 잠재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것과 관계 있다.

[ ] ‘물자체‘에 어떤 명칭을 부여하더라도, 또 그것을 스피노자의 ‘실체‘로 만들건, 피히테의 ‘자아‘로 만들건, 아니면 셸링의 ‘절대‘로 만들건, 헤겔의 ‘이념‘으로 만들건, 또 쇼펜하우어의 ‘의지‘로 만들건 간에, 그 단어가 명확히 정의된 표의를 지니는 일은 별 소용없는 일이다./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고, 세계는 의지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해서 도달된, 미결정 내용을 지닌 개념, 더 정확히 말해서 내용이 결여된 개념, 더는 아무것도 아닌 개념이 모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한 존재는 오직 경험 안에서만 주어질 수 있다. 이 경험은 투시 혹은 접촉이라 불리며, 물적 작용과 관련되었을 때는 직관이라는 명칭을 부여 받는다./ 직관은 밧줄을 타고 올라간다. 그 밧줄이 천상에까지 이르는가, 아니면 지구에서 어느 정도 거리에서 끝날 것인가를 알아내는 일은 직관이 할 일이다....직관을 어떻게 보든 간에, 철학은 우리를 인간적 상태 이상으로 올려놓을 것이다.

[ ] 우리는 두 종류의 관념을 구별해야 한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계속 조명하면서 그 빛을 자신의 조그만 구석구석까지 직접적으로 꿰뚫고 지나가게 하는 관념이며, 다른 하나는 사유의 전 영역을 밝히면서 밝히면서 뻗쳐가는 관념이다... 그것들은 그들이 다루고 있는 것들을 조명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조명하는 이중의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 ] 직관이 갖는 다양한 기능과 측면은 스피노자에 있어서 ‘본질‘과 ‘존재‘라는 말이 갖는 의미의 다원성이다/직관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곧 지속 안에서 사유한다는 것이다...반면 직관은 운동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고는 그것을 실재 자체로 가정한다...직관에 있어서 본질은 변화다...직관은 지속, 곧 성장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새로운 것 안에서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의 단절되지 않은 연속을 지각한다. 정신이 자기자신이 지닌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자신에서부터 끌어낸다는 사실, 정신성이란 바로 이런 점에 있다는 사실, 또 정신 안에 수태된 실재가 곧 창조라는 사실을 직관은 보고 알고 있다.

[ ] 한 컵의 설탕물을 마련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설탕이 녹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기다려야 할 필요성은 중요하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준다. 즉 시간을 단지 자신의 추상물이나 관게 혹은 수로서만 지니고 있는 여러 체계를 우리가 우주에서 떼어낼 수 있을 때, 그 우주 자체는 전혀 다는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 ] 자유행위를 지각하기 위해서는 순수지속 안으로 돌아가 자리 잡아야만 한다...내일 우리의 영혼의 상태는 그때까지 살아 지내온 삶의 전부와 아울러, 바로 그 특정 순간이 그 삶에 덧붙여줄 그 어떤 것도 포함할 것이기 때문이다...심리적 삶을 한 순간으로 수축시킬 때든 항상 그 내용에 변경이 가해지기 때문이다...내적 삶이란 곧 이러한 멜로디인 것이다....실재적인 진화는 조금이라도 가속되거나 감속되기만 하면 내적으로 완전히 수정된다. 진화의 가속이나 감속이 바로 이 내적 수정이다.

[ ] 형이상학이 하는 일은, 하늘하늘 날아다니면서 변화하고 살아 움직이는 나비가 자기의 존재 이유와 완성을 그 껍데기의 불가역성에서 찾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이와는 반대로, 이제 고치를 풀어 번데기를 잠에서 깨워보자. 번데기의 운동성을 운동에, 번데기의 유동성을 변화에, 번데기의 지속을 시간에 되돌려 보내자. 그 때 풀 길 없는 ‘위대한 문제들‘이 껍질에 붙은 채로 떨어져 나간다./지속에 있어서 전개는 바로 이미 완결 자체가 되며, 또한 否定적인 양의 첨가가 된다...숱한 철학자들은 어느 누구도 시간의 긍정적 속성을 추구하지 않았다.

볕뉘

0. 소개서와 요약서를 몇 권째 보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서 원문으로 돌아왔다. 뱅뱅도는 기시감에서 벗어나 아 제자리를 찾았구나 싶은 느낌이다. 가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무엇. 맛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맛. 저자로 깊이 들어가 그 맥락을 온전히 느낄 때 얻는 작은 통찰.

1. 베르그송이 말하는 직관은 이런 것에 가깝다. 좀더 명료해지는 무엇이다. 그는 뒤돌아서자 마자 기존의 통념과 헛갈리는 직관을 구해내기 위해 여러 묘사를 하느라 끙끙댄다. 시란 밑줄긋고 설명 백날해봐야 소용없다고 말이다. 시는 그 맛이 그 정신이 들어있다고 그 맛을 봐야한다고 말이다. 그게 직관이라고 거듭 설명한다.

2. 시간이나 지속을 설명해내기 위해서도 안절부절이다. 멜로디라는 것이 분석하고 하나하나 뜯어서 보려고 한다고 알 수 없는 것이다. 그 자체로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또 뒤돌아서면 다른 개념과 섞여 오리무중이므로 설탕물을 비유한다. 기다려야 하느리라. 기다려야 그게 설탕물이니리라. 너네들은 나비를 아느냐. 번데기는? 고치는? 너희들은 나비를 온전히 보려하지 않고, 늘 고치는 어떻고, 번데기는 어떻고 지랄을 떨지 않았느냐? 그러는 것이 너희들이다. 제대로 보기는 했느냐? 자유를 맛보려면, 온전한 영혼을 맛보려고 해야지, 언제나 늘 그 자리로구나.....이리 가까이 온.....귀를 데어보련....내가 비밀을 한가지 말해주련? 알아듣겠느냐!!

3. 그는 소크라테스의 정령, 다이몬을 이야기한다. 끊임없이 아니오라고 자신에게 이야기해주는 다이몬. 이것이 직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시의 참맛을 알게 해주고, 모든 사물의 풍요로움에 다가서게 만드는 것 말이다. 존 듀이의 ‘하나의 경험‘으로도 읽힐 수 있겠다 싶다. 우리는 그런 맛도 그런 통찰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며 살아지고 있다.

4. 그래, 이원론으로 쪄들어 있는 우리의 일상과 삶은 일천하기 짝이 없다. 그래 뒤돌아서면 헛갈리고 몽롱하다.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으므로, 쉽기 그지없는 표현들인데도 외롭고 힘들다. 간간히 안개 속에 산줄기를 보여줘서 다행이다 싶다. 철학과 과학은 나눠지지 않았어. 예술도 삶도, 죽음과 삶......등등

5. 그렇다. 그는 간절하게 다르게 사유하기를 강권하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듯 같은 강물은 한번도 있은 적이 없다. 변화와 운동이 전부다. 어쩌면 미분 적분, 파동이자 입자, 양자라는 성과도 전부 운동과 변화라는데 까지 성과를 들이밀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알맞는 대유로 생각을 지속시켜보는 것이 또 다른 혜안이자, 자신의 관심사에 다른 발명을 이끌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보자. 제논의 역설에 갇혀 있는 당신의 시간 관념부터 우리에서 탈출시켜보자. 그러면 아마 당신은 당신이라는 생명을 우선 발견하게 될는지도 모르겠지. 아마. 오늘 새벽 난 가을맛을 보았다. 꿀꺽 회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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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를 그리고 싶다. 연두에서부터 깊은 푸르름까지 그려내고 싶다. 파도를 골라서 어떤 것이 마음에 들까 염두에 둔다. 거칠게 치는 파도는 자꾸 보니 왜인지 도식적인 느낌이 들어 제외한다. 무엇을 그릴까? 움직임이 조금 거세면 좋을 듯한데, 역동성과 파랑의 경계를 확장해놓은 사진들은 없을까 싶다. 자다가 깨다가 핀에 알람을 연신 챙겨본다. 그래 이게 조금은 낫겠지 싶다. 샘은 그림보다 사진을 추천했다. 그림은 추상적이기에 의도를 나타내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말이다. 그러다가 불쑥 시작을 한다. 전 작품의 블루의 경험을 살리면, 전 보다는 빨리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여기면서 거친 파랑을 칠한다. 바탕은 여러 블루를 섞으면서 생각보다 수월한 듯 싶다. 흰 여백은 남겨둔 채 거칠게 칠하는데 색감이 그런대로 살아난다. 주제를 잡고 색감과 디테일을 살려 그리려는데, 예기치 못한 정교함이 앞을 막는다. 색감도 동선도 예민해지지 않으면 주제를 제대로 묘사할 수 없다. 물결 안의 색을 상정하고 칠하고 물줄기를 올린다. 쉬워보이던 주제는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물줄기도, 흰 물결들도 나이프를 써서 두껍게 올려도 느낌이 살아나질 않는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움직임들 사이의 변화를 눈치채기가 힘들다. 이어진 듯 끊어지는 물줄기는 꽃과 같은 묘사와 다르다는 것을 모르고 무턱대고 덤빈 셈이다. 화폭을 대할 때마다 몇 가지 수를 생각해두지만 의도를 벗어난다. 물기가 섞이면 마르자 마자 의도한 색을 벗어나 있다. 위쪽의 물보라도 구름의 결을 그리듯 따라올리지만 주제와 명도가 겹쳐 부드럽게 숨을 죽여야 했다. 가운데 부분의 물결과 색을 칠하려는데 붓의 종류와 물기에 실패한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면으로도 그리지 못한 셈이다. 희미한 물결들과 거스르는 물결들을 표현하는 방법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움직임 전체로 파악하려는 연습이 부족함이 그대로 드러났고, 수작업을 해서 조금 살아나지만, 앞 뒤의 입체감이 부족함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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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기가 맑다. 곧 찬기운이라도 섞일 듯하다. 언제부턴가 자판, 아마 마음에 드는 자판이 맞겠다. 그것이 없으면 글을 쓸 수 없다. 잘 맞지 않는 어색한 키보드라면 생각도 엇박자에 잘려 진도를 나갈 수 없다.

이러게 키보드에 마음을 의탁하고 있다니 말이다. 그럴 수 있겟느냐고, 마음을 바르게 먹고 우주의 기운을 생각하면 할 수 있는지 알았다. 의지박약.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장기가 서로 각자의 중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의 순서만 바꾸어보아도 손은 예사롭지 않다.

문득 지난 노트북을 꺼내 이것저것 끄적여보니, 키보드의 날렵한 감각이 되살아난다. 역으로 얼마나 나쁜 글쓰기 환경에서 어좁이가 되어 자라목을 길게 빼며 손가락과 눈을 혹사시킨 것일까 하는 자각이 드는 것이다.

손에 맞는 자판을 제대로 길들여야겠다. 찬바람이 불면 좀 시원한 손맛을 봐야할 것 같다.

볕뉘. 어제부로 항생제와 부대약을 끊고, 이담제만 먹고 한 달에 한 번 진료만 받으면 된다. 걱정했던 조직검사도 양호하니 걱정말라고 한다. 짧은 병상기간이었지만, 소도시의 병원맛, 의사맛, 병동맛을 제대로 느꼈다. 굳이 냉대가 공존하는 중대형도시의 병원을 선호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환자의 한호흡을 품고 대화할 줄 아는 관계자들의 맛이 깊다. 높지만 시끄럽지 않은 소도시의 말맵시에 빠져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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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작품은 제로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실험이다. 제로에서 시작하지 않고 예술을 안전한 것, 주어진 것으로 여기는 것은 예술작품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이 시작하는 제로 상태가 미학적 상태, 미학적 자유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작품은 예술의 가능성을 시험하기 때문에 실험이다. 그것은 미학적 자유의 상태로부터 작품 창조의 가능성을 시험한다. 이 가능성은 미학적 상태가 해방된 힘의 도취 상태(니체), 무작품성의 상태, 형식 부재의 상태, 작품부재의 상태(푸코)이기 때문에 불가능성이다. 96


볕뉘.

0. 예술의 힘 1부 마지막에 나오는 대목이다. 미학적 힘을 다시 요약한 듯한 인상를 받는다. 읽기가 어렵다. 반면에 경험으로 예술은 읽기 쉽지만, 이해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1. 멋이란 무엇일까? 맛이란 무엇일까? 빚에 점하나 찍으면 빛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멋이란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그러면 예술은 무엇인가? 맛은 일상에서 떨어진 것일까? 멋은 일상에서 떨어져야 하나? 예술은 저 멀리 범접할 수 없는 것인가? 소수만이 즐길 수 있는 것인가? 맛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데 왜 예술은 그렇게 일상의 번외로 떨어뜨려 놓은 것일까? 다 한 통속은 아닐까? 잘못된 것은 우리의 사고방식은 아니었을까? 못된 것은 우리 삶의 패턴은 아닐까?

2. 일은 무엇일까? 점하나 찍어보자. 얼. 얼은 차리고 있는가? 얼과 일이 만나기나 한 것일까? 한 번이라도 좋으니 짜릿함을 느껴본 적이라도 있는가?

3. 점하나 찍는 일. 상상력이란 저 멀리 하늘에서 떨어지고, 창의력이라는 것이 별똥 부대처럼 여겨지는 것은 왜 일까? 여기저기, 누구나 혈안이 되어 아니면 돈에 매여, 아니면 돈을 향해 올인을 해버리는 것일까?

4. 시인을 좋아해보자. 왜냐고 묻지 마라. 좋아해보자. 왜 시인이 당신과 다르다고 여기는가? 그래 맞다. 반성적 사고 일게다. 끊임없이 자신과 자신의 족적을 돌아본다는 일일 것이다. 그럴 때 뭔가 다른 것은 바로 잡을 수 없다. 끙끙대고 한 발 거리를 두기도 하고, 더 가까이 다가서기도 해야만, 벙어리같은 자신의 느낌을 살릴 수 있는 표현을 얻게된다. 아주 조금....다듬고 다듬고.....

5. 다듬고 다듬는 과정이 상상력이라고 한다. 일의 다른 기획에 대한 감에서 시작할 수도, 먹고싶은 맛을 향하는 돌진, 원하는 색깔을 입히고자 하는 노력이 다 상상력이자 창의력인게다. 통째로 온전한 경험을 해본 자만이 일에 치이지 않고, 그 맛을 또 보려고 한다. 일상은 예술이 될 수밖에 없다. 무언가 다른 것을 향하는 직관과 멋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가 없다.

6. 자신을 영도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모임도 영도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굳이 단체라는 것을 봐준다면 그도 그러하도록 사유와 행동의 맛을 느낄 줄 아는 자가 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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