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잠자는 방을 옮기다.  빈방에 보일러를 틀고, 청소를 하고 분위기를 바꾼다. 


-4


끓어오르는 성격을 갖는 이들, 아니 많은 분들이 욱하고 치미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조편성으로 불쑥 작업장을 떠난 친구를 불러 이야기를 나눈다. 혼자가 아닌 몸임이기도 하고 감정이 가라앉은 상태로 결정을 내려도 늦지 않은지? 여러 방법들이 있을텐데 아쉽기도 하다. 며칠이 지난 뒤 다른 친구가 그만둔다 한다. 크고 작은 일들이 겹쳐 이 생각 저 생각 안에 잠겨 끙끙댄다. 


-3


나이를 불문하고 사람사이의 일들을 조율하는 걸 불편해한다.  애초에 상황을 만들려하지 않는 것 같다. 스트레스에 취약하고 몸마저 그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마음을 접는다.


-2


그러다 공고를 내는데 우연의 반경은 생각보다 좁다. 낮과 밤새 수십 번의 흔들리는 마음을 뒤집기를 반복한다. 일년이 넘도록 투병중인 대장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손수 운전에 걸을 수 있다니 말이다. 가는 길 활짝 핀 목련 한 그루. 눈여겨 본다. 만난 자리에서 직접 그 반경에 걸린 분들에게 전화를 돌려 진의를 확인하고, 현 상황을 파악한다. 혈액암에서 이겨낸 친구. 앞으로 나갈 틀과 방향에 대한 토론들. 


-1


떠날 사람과 돌아올 사람들의 파일들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들이 모아둔 일상들이 빛난다. 얼마나 대단한가. 


0


 패턴을 찾는 사람. 패턴을 먼저 살피려는 사람들. 주문한 지 조금 지나서 손에 잡힌 책은 그동안 읽던 관련 서적의 완결판처럼 보인다.  부록에 실린 공감과 패턴의 설문을 풀어본다. 예전의 나. 지금의 나는 무척 다르다. 우리는 다르게 본다고 하지만 마음까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에디슨이 자폐스펙트럼을 가졌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원래 그런 것이다.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채워야 한다거나 이해하지 못할 일이라는 것은 내 중심인 것이다. 나는 해설자에 설 필요도 이유도 없다. 다른 것이다. 그 상태로 인지하는 연습. 그것만이 달라지는 또 다른 바탕이 될 수 있다.


 0.1


 이 책도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단어와 유추, 그리고 범주를 만들어가는지 살핀다.  어린아이는 위대한 발명가와 유사하다. 위대한 발견자이기도 하다. 그런면에서 사람들은 그 디테일을 거꾸로 살릴 수 있다. 가능성의 책이기도 하다.







1


 푸코의 강연자료를 모은 것이다. 그래서 이해하기가 무척 쉽다. 핵심들이 짧은 글들에 응축되어 있다. 집요하게 묻는 랑시에르에 대한 서신 인터뷰 내용도 놀랄만 하고 정교하다. 


'하게끔'하는 사회에 살아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법과 권력에 대한 상식들은 이삼 백년 전에 고정되어 있다. 발달지체는 이런 것은 아닐까.  숱한 교과서형 반복과 그것의 스피커가 되어 재생산하는 사회는 좀더 낫게 사유하기가 어렵다.


읽으면서 시대가 푸코를 가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시대를 차고 넘쳐 흐르고 있다. 시대의 질문들은 협소하고 편견에 사로잡혀 그 대답을 주워담을 능력이 없어보인다. 






2.


공장 도면. 유투브 영상, 자료들을 끊임없이 보고 있다. 전공서적도 주문해둔다. 오늘도 하루가 만만치 않다. 물러가던 목감기가 다시 올라온다. 어제 오후의 찬공기가 얇게 입고 움직인 옷안을 기웃거렸나 보다.  그래도 뭔가 틈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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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목이 칼칼하고 기침이 가끔 나오길 한다. 감기기운이 입질이다. 휴식을 고려하지만 몸도 말을 들어주어야 할텐데. 며칠 일찍 출근하고 저녁식사 자리, 라이딩이 몸에 부담을 준 모양이다. 어제는 짜먹는 감기약을 들고, 김치황태국밥을 만들어 들고 내내 잔다. 


-3


어제 일터 설비를 보다가 영상 검색부터, 공유압라인, 밸브류에 대한 무한 검색을 한다. 한번쯤 들어본 용어, 하지만 비껴가거나 전문가의 일이라고 팽겨쳐진 것들이다. 전기도면 보는 법부터 설비보전 기능사등등 참으로 많은 정보들이 차고 넘친다. 가려내는 것이 기술이자 방법인 듯싶다. <공대언니>를 구독하고 보기를 이어나간다. 그래도 어렴풋하게 그려진다. 도면이라, 솔레노이드밸브부터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끝을 보자싶다. 


-2


 푸코 관련해서 좀더 진도를 나가본다. 최근 라이오 강연 번역본이나 자크비데의 새로운 관점에서 연구들이 그것이다. 


메타구조, 칼합치, 재귀성 모두 스스로를 돌아보며 나아가는 형상이다. 그렇게 사물을 보는 깊이와 방향을 갖지 않고 수평적인 조합은 한편 무능해보인다. 그렇게 뚫고 나아가려는 노력에서야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느낄 수 있다싶다. 


-1


 유한계급이 아니라 야망계급이라니? 과시적 소비보다는 비과시적 소비를 한다. 앎과 소비, 양육형태가 일련의 경향을 보이는데, 거꾸로 이는 시간에 따른 빈부 차이를 심화시키는 경향도 있다 한다. 좀더 깊이 보고 있다.











0


 몽테크리스토 백작. 해설이 아니라 직접 볼 것.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직접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다는 것. 프랑스 혁명과 파시즘. 이런 역사적 사건들은 단락되어 섬처럼 보게한다. 하지만 그런 것이 역사가 아니다. 선악으로 구별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 어떻게 그런 일들이 생겼는가는 한 두가지 원인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다시 읽어내거나 새로운 시선이 생겨나거나 새로운 흐름들을 확인해내야한다. 



1


그림작업도 책읽기도 어디로 튈 지 모르겠다. 좀더 가분히 라이딩하듯 봄결을 실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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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목표는 있으나,

길은 없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이다.



69


신앙을 가진 자는,

기적을 체험할 수 없다.

대낮에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



70


나는 내용을 알지 못한다.

나는 열쇠를 갖고 있지 않다.

나는 풍문을 믿지 않는다.

모든 것이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92


진실의 길은

공중 높이 매달려 있는 밧줄이 아니라,

땅바닥 바로 위에

낮게 매달린

밧줄 위에 있다.

그것은 걸어가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116


"주인 나리, 어디로 가시나요?"



"모른다." 나는 말했다,

"단지 여기에서 떠나는 거야, 단지 여기에서 떠나는 거야.

끊임없이 여기에서 떠나는 거야,

그래야 내 목표에 도착할 수 있어."



"그러시다면 나리께서는 목표를 아신단 말씀인가요?"그가

   물었다.

"그렇다네" 내가 대답했다.

"내가 이미 말했잖아:

'여기-에서-떠나는 것', 그것이 내 목표야."



볕뉘


 

1. 


터미널 옆까페, 다이소 옆에 들른지가 오래다. 도록을 챙겨 자전거 짐받이에 싣고 달린다. 주말은 그래도 자유스럽다. 작업실의 히터를 틀고 돌아오는 사이, 책 한줄 읽을 여유공간을 생각해낸다. 토스트 하나, 커피 한잔. 프란츠 카프카의 아포리즘 겸 시. 무척 잘 읽힌다. 


2.


 옆의 책에서 카프카의 단편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가 뼛속 깊이 니체주의자라는 사실도 확인한다. 단식광대나 빨간피터. 최후인간의 단편들이 무엇인지를 상세히 서술한다. 곡예사나 기예가의 삶이 무엇인지, 왜 그래야 하는지 새삼느낄 수 있다. 루쉰도 겹치고, 그가 살아낸 삶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렇게 해묵은 노트와 드로잉 사이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빠른 것인가 늦은 것인가. 애초에 그런 것은 없지. 아침 또 훤히 동이 터오른다. 이렇게 속을 다 비워내야만 그 짜릿이 선물처럼 온다. 


3.


 단 친구, 단 이야기 갈증이 깊다. 주중 달콤한 휴식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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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는 몇 주가 이어지고 있다. 주변을 채근해서 삶의 동선 사이에 채워둔다는 일. 버겁기도 하고 걸음은 중력을 비껴가는 듯하여 갈피를 쉽게 잡지 못한다. 새로운 환경은 마음과 몸의 중심점을 잡기가 쉽지 않다. 일터의 일은 그렇게 충돌하면서 일들을 만들어내고, 전시의 일은 이렇게 책들이 부딪히면서 일들은 만들어내다. 


다행스럽게 부유하면서 두 권의 책을 잡아내어 그 위에서 좀 쉴 수 있었다. 둘로만 나누면 무엇이 문제인가?란 물음에 그것은 언어와 그 구조에까지 물들어있음을 확인하고, 명확하고도 논리정연한 답을 해주고 있단 느낌이 들었다.


 그리곤 여러 차례 잡담회와 술자리 모임들을 의도적으로 갖기도 하였는데, 지금을 살면서 그 틀에 대한 인식이 부재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가까운 지인들이라 어느 정도 그 윤곽을 잡고 있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오산이었다.


절망과 우울을 덕지덕지 바르거나 마음 속에 시시때때로 불쑥불쑥 솟아나지 않고서는 '좋은 삶들'에 대한 인식이나 철학이란 그저 안일한 소리로 들리는 듯하다.  짓누르는 일상들은 납이란 추를 양쪽 어깨에 매다는 일은 아닐까? 그(녀)들은 차라리 쇼펜하우어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듯싶다.  그들의 마음 속에 안정감이란 드문드문 섬처럼 뜬구름처럼 왔다가는 것은 아닐까? 싶다.



어느 날 책방 매대에 있는 책들을 한 독서가이자 애서가가 쓸고 갔다.  조금 다른 속도로 아직 그 상태로 남아있는 매대의 중요한 책들을 담는다.  


혁명. 혁명. 혁명이라?


어쩌면 책들을 너무 쉽게 쓰는 건 아닐까? 지엽적인 안목들만 부유하는 건 아닐까? 문제를 측정하는 것들이 가늘고 얇은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새벽짬들에 뒷장들을 덮으며 보낸다. 젊은 청춘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안녕할까? 무자본 창업이라? 그들이 낳은 새끼들이 정말 복덩이로 굴러들어올까? 가지많은 나무들처럼 바람만 불면 웅웅거리지나 않을까? 부디 안녕하길 바라지만, 왜 하필이면 움직이는 모래 위에 기둥을 세우는 것일까? 거꾸로 물구나무선 책들이다. 안타깝다. 정작 몇 기둥을 제대로 발라내었으나 그 토대가 무엇인지 읽으려는 사람, 보려는 사람의 욕망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몇 년전 보았던 책들이랑 겹친다. 부디 삶의 희망을 변주하길 바라본다. 전시의 삶 가운데 겹쳐 쌓아올린 사상가을 읽어낸다. 무슨 말인줄, 무엇을 얘기하려는지가 뚜렷하게 잡히는 몇 달이었다. 


다시 몇 달 후에 함께 책을 나눈 이들에게 안부를 물어볼 일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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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은 과정을 사유하지 못하는 장애가 있다.

 

 

19p 그리스와 중국: 자연은 원하고, 겨냥하고, 착수하며, 능란하고, 목표를 세운다. 그런데 중국의 현자나 전략가는 자연처럼 변화시키려는바람을 나타낼 뿐이다. 20p 사람들은 당신을 찬양하지 않을 것이다. 영웅담도 서사시도 없다. 24p 연인 - 그들이 이제 더 이상 영향을 줄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의 차원은 점차 개인의 차원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더 단순하고 실효성 있는 사실 아닌가?

1장 주체/행동과 다른 관점: 변화

 

27-28 이행과정의 존재 자체, 즉 그것의 핵심이 바로 이행과정인 그 존재 자체를 사유하는 데 있다. 그런데 유럽인의 사유에는 이행과정이 존재에 속하지 않으므로 벗어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사유를 멈추고, 아무 할 말이 없어 침묵에 빠진다. 이 때문에 필연적으로 변화는 고요한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회색: 잘라 내어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분명한색깔이다. ‘둘 사이사이그 자체로서 사유하지 못하는 것은 둘 사이에서는 존재를 규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스 방식의 전제를 따르자면, 흐릿한 존재는 없고, 구분되고 규정된 존재만이 있기 때문이다. 30p

 

이미 문장에 포함된 바대로 논리의 관점에서 보면, 양보절과 결과절이 어떻게 나란히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하고, 분리 위주인 우리 유럽 통사론을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이다. . 실제로 이행과정의 사유는 이 둘을 떼어 놓지 않고 동시에 생각할 것을 내포한다. 본질과 정체 규정의 관점이 아닌 사물들의 운행에 투입된 에너지의 관점이다. 33p

 

2장 변화 아래에서: 이행과정

 

차이가 아니라 간극: 다른 조망을 부각하고, 시도해 볼 새로운 기회나 모험할 것이 떠오르거나 떼어져 나오게 한다. 간극은 간극이 갈라놓은 것을 긴장 상태에 놓고, 그것을 갈라진 것들 각각에 의해 발견하며, 각각에게서 비춰 본다. 간극은 문화나 사유의 다양성을 얼마든지 사용가능한 자원으로서 생각하게 한다. 이 자원은 모든 지성이 스스로 확장되고 다시 모색하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방기하는 대신 오히려 개발해야 하는 것이다. 36-37p

 

각각의 사유를 분류함으로써 밋밋하게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수맥 탐사가처럼 서로 간의 생산성을 탐색하면서 각각의 사유에서 끌어온 정합성을, 우리의 사유되지 않은 것을 사유하기 위해 시험해 보는 것이다. 39p

 

이행과정만으로도 철학의 오랜 유럽식 도구들이 해체되거나 탈구축된다. 이행과정은 다름 아닌 보편 형상, 가지계의 형상으로 이데아를 해체한다. 40p 존재가 구별되는 정의는 항상 격리하는 힘에서 비롯한다. 플라톤은 녹는 중의 눈을 사유할 수 없다. 41p 반면 도의 이미지는 특징화하는 대신에 모든 특징화 가능한 것을 제거한다. 현상과 감각 한가운데 우리를 머물게 하면서도 그것들을 지우는 쪽으로 우리를 이끈다. 여기서 무미 가 음미된다. 43p

 

중국 사유는 변화의 기체-주체로서 제3의 항을 전제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중국 사유에서는 어떤 것의 펼쳐짐에 반드시 다른 것의 응축이 답하지만, 동시에 어떤 것이 다른 것으로 전환되고 이 다른 것을 통해서만 쇄신될 수 있다. 따라서 실체의 필연성은 지워지고 변화 아래 유지되는 어떤 것의 관념은 엉뚱한 것이다. 여기서 자기동일성의 관념 자체는 해체된다. 45-46p

 

3장 눈은 녹는다(또는 존재를 위한 입장은 이행과정의 사유를 가로막는다)

 

변화에 대한 생생한 지각을 되찾으려면 우선 모든 변화와 모든 운동을 분할 불가능한 것으로 표상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운동과 마찬가지로 변화를 서로 잇따르는 위치들로 분할하여 파악함으로써, 간격이 통과되는 이행을 놓친다. 49p

 

플라톤이 되어가는, 하는, 사라지는, 변하는등으로 성질에 따라분절하면서 말해 본다. 하지만 곧바로 끝난다. 왜냐하면 그리스어는 존재자들의 분절만이 아니라 격변화, 빈위규정, , 수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심지어 등위사로 연결되었을지라도 현상을 나타내는 이 수식어들은 존재에 기대어 있고 그들 사이에 공백을 계속 온전히 남겨 두기 때문이다. 51-52p

 

철학의 질문이 아무리 철저하더라도 모든 철학은 관용어법에 묶인 채 나중에서야 나타난다. 철학은 관용어법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철학자의 사유는 언어가 접어 놓은것으로 나타나고, 결정론이 자신의 사유를 짓누르게 두지 않는다고 해도, 그의 성향을 미리 준비시키는 것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55p

 

담론을 위해 기능한 기체로서 사물, 남쪽의 존재를 이루는 주체는 없다. 여기서도 변화는 술어 양상에서 열거를 통해 포착되기에는 너무도 전면에 걸친 분위기의 변화이며 이행과정은 지도위에 표시되기에는 너무도 끊임없는 것이다. 56p

 

시는 지루하다. 특질이 정해지는 사물들을 항상 전제하기 때문이다. 바다는 잿빛이고 하늘은 어둡다는 등으로 말하고 만다. 57p

 

4장 변용에 시작이 있는가?

 

자연을 음양이라는 상관 요소들로 본 중국인들과 달리, 그리스인들은 자연을 운동하는 물체로 보고 논의함으로써 변화를 운동을 본떠서 생각했다. 59p 늙음이 이행과정 대신에 목적성과 늘어남의 두 논리 사이에 취해지면서 해독불가능하게 된다. ‘이라 불리는 것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목표로 한 것의 목적과 끝의 관점 아래 정리되는 것도 아니고 (도약이나 회전의 경우처럼) 변화-운동의 시작과 끝 사이에서 이해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61p 그리스의 오해는 목적의 차원에 속하는 것과 결과의 차원에 속하는 것을 서로 혼합된 채로 유지했다. 모든 결말을 도착지로 생각했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늙음은 아무 데도 향하지않으며, 반복해서 말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는 늙음의 결과를 차츰차츰 헤아리기 때문이다. 63p 유럽철학은 늙음을 침묵에 빠트렸고 끝만을, 즉 죽음만을 염두에 두었다. 하이데거도 그렇다. ‘향함과 도착점의 사유, 무엇을 위해서와 앞으로 다가옴의 사유이다. 64p 욕망을 죽느냐 사느냐와 같이 현기증 나게 매혹하는 그야말로 존재론 차원의 양자택일이 첨예화하고 드라마틱해지며 절대화되는 논점이, 다른 한편으로는 서스펜스와 그 해소, 실추와 구원, 신비와 부조리가 동시에 극화되는 논점이 그것이다. 65p 모든 것의 의미라는 관점에서 죽음에 대해 묻지 않고서 죽음에 접근했을 것이다. 죽음은 신비로 이끌지 않듯이 더 이상 부조리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죽음은 의미 바깥일 것이다. 65p 삶은 나를 힘들게 하고늙음은 나를 편안하게 하며죽음은 나를 쉬게 한다늙음은 삶과 죽음 사이의 이행과정이나 완충으로서 정당한 자리를 부여받는다. 죽음이 문제로서 초점화되도록 두면 이 문제는 끝이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죽음에 대해 논의하지 않으면 죽음은 사물들의 운행에 서서히 흡수되고 고요하게 이해된다. 원체 죽음은 고요하다. 67p

 

5장 이행과정 또는 횡단 - 늙음은 항상 이미 시작되었다.

 

주체의 변화가 아니라, 상황에 내재한 전개과정으로서 그 상황 속에서 진행되는 경향에 따라 이행되는 것을 그리스의 아이티아구도에 따라 인과성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대립하며 보완하는 음양의 효로 조합되고, 이 효들 사이의 관계만으로도 도래할 진화 과정을 양극성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81p 의 개념은 그 자체로 의 개념과 쌍을 이룬다. ‘은 우선 음악에서 반음의 변화이고 주역의 운영에서 음효에서 양효로, 또 양효에서 음효로의 대체로서 사물들의 -의 거대한 운행, 더 넓은 수준에서 하늘과 땅의 양극성에서 비롯하고 실재 전체의 틀을 잡는모습 그대로의 운행을 뜻한다. 83p

 

6장 반전의 모습

 

변화는 언어에 대한 우리의 사용법 자체와 관계가 있는바, 훨씬 더 은밀하고 숨겨진 방식으로 고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립하는 규정들을 각각의 정의에 가둬 두고 각각의 본질에 굳어지게 하면서 서로 격리시키기 때문이다. ‘젊음늙음’, 또는 약함’, 또는 죽음을 떼어 놓고 보며, 고정된 규정들에 불과한 것 아래에서 한 규정이 다른 규정으로 이행하는 것은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하게 된다. 103p

 

7장 삶의 유동성(또는 어떤 것이 이미 다른 것이 되어 있는가?)

 

그리스인들 이래로 우리는 개념상의 분류 및 분리를 통해 정당화하지 못하는 모든 것을 시간의 용어로 포장했고, 시간을 우리 삶에 대해 지배권을 가진 수수께끼 같은 원인으로 세웠다. 시간은 사유되지 않은 것을 이름 붙여 구별하기 위해 우리가 발명해 낸 허구의 드라마 배역이 아닐까? 105p

 

(1)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은 자연을 운동하는 물체의 관점에서 논의 함으로써 동체 A의 동체 B로 이동, (2) 그리스 형이상학은 시간을 영원성과 대립시키는데, 여기서 시간은 이제 분할 가능하고 연속된 크기가 아니고 끝없는 계기와 변질이 결합된 측면의 시간이다.(3) 유럽언어들은 동사 변형이 있다.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로 형태론을 분리하며, 따라서 우선 시간을 어떤 시간에서 다른 시간으로의 이행으로 생각한다. 107-108p

 

8장 시간들을 발명해야만 했는가?

 

사건은 동화 불가능한 것을 내포하거나 외부를 가리킨다. 여기서 동화 불가능한 것과 외부는 단지 인과에 의한 모든 설명을 초월하고 해석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사건이라는 말 자체의 의미대로 사건은 숙성보다는 급격한 돌출의 사태인가? 또는 어떤 점에서 사건은 귀결보다 마주침으로 생각되어야 하는가? 즉 이 마주침이 가정하는 바깥, 나아가 통합 불가능과 더불어 마주침으로 생각되어야 하는가? 121-122p 사건은 유럽에게 그토록 소중한 단절의 이데올로기를 가장 잘 뒷받침함으로써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철학을 풍부하게 하고 있다. 126p 중국 사유는 매 순간 작동하는 이행과정의 현상에 천착함으로써 사건의 마력을 해소하는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고대 중국은 서사시도 또 극화로서 구성된 극작품도 짓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하자. 고대 중국은 한결같이 때에 맞는 적응을 위해 사건의 예외성을 희생시켰다. 131p

 

미디어가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사건이 된다. 왜냐하면 사건은 고유의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건은 고전 존재론을 벗어난다. 사건은 선별되고 처리되며 자기 주위에 말과 구경거리를 엉겨붙게 하는 방식에 따라 견고함과 성과를 갖는다. 뉴스는 일상의 기도가 아니라 조직된 구경거리를 의례화하는 것을 볼 때 그것은 명백하다. 사건-오락이라고 말해야 할까? 사건-오락의 신뢰성은 우선 그 분량에 기인하고 순환주기에 따라, 놀라게하고-열중하게 하고-분노하게 하고-기분을 전환시키고-다시 잠잠해진다. 사건은 사건 놀이를 한다. 왜냐하면 사건은 소비되기 때문이다. 133-136p

 

9장 사건의 신화

 

10장 부족한 개념: 역사, 전략, 정치

 

프랑수아 줄리앙, 고요한 변화그린비



볕뉘.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하지만  고요한 변화가 십여년 먼저 출간되었다. 탈봉인, 재귀성의 관점에서 잘 된 책이다. 한병철처럼 다작하는 듯싶다. 아포리즘과 책의 중간. 괜찮은 컨셉이라고 여긴다. 번역이 많이 되면 좋겠단 희망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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