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취호공원 


여행이나 관광을 예찬하지 않는 나는 상상력의 공간을 압축시켜 없애는 걸 빌미 삼는다. 하지만  다녀온 관광의 흔적이 아니라 여행의 기억을 건네주면, 불쑥 그것이 빌미가 된다.


아를이란 마을에 가고싶단 마음이 파도처럼 인 것이 몇 주 전이다. 미술관들이나 예술가, 작가의 삶이 묻어있는 곳이라면... ... 언젠가.


취호공원은 저자인 시인에게 마음의 평온과 시를 만들게 해 준 배경같다는 느낌을 준다. 낯선 곳의 낯선 날들이 가져다주는 안온함과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마음의 여백같은 공간이 되어주는 곳 말이다. 



2.부


1988년, 반지하의 제본소에서 일한 적이 있다. 달력을 만들 때는 야근이 허다하고,  또래의 모습은 핏기도 없고 일상은 쳇바퀴처럼 돌아갔다. '1997년, 어느 지하실의 기억' 저자는 미싱공 시다 생활을 한다. 반지하에서....몇달 간의 생활을 마치고 군대로 가는 나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벗어난다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그 기억이 예전으로는 돌아가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삶을 이어주는 모스신호같은 것은 아닐까 한다. 


2부에서 시인은 그런 마음들을 모아 표현한 듯 싶다. 새롭게 자라고 싶다는 '삭발', 모든 빗줄기가 울음이고 싶다는 '장마',  스스로 반추하는 '불량품'과 온몸으로 기다림의 축적물이라는 '개화'는 서로 겹쳐 같이 있다. 바다에 귀 기울이는 '소라', '개미떼를 죽이다'는 이런 면에서 살얼음처럼 이어지는 마음들이다. 먼 뫔의 기억으로부터 자라나는 새싹들인 것이다.



3.부


사회학자인 시인은 이 곳에서 사회학이 담아내지 못하는 논문 이상을 담아내고, 사회를 읽어내게 만든다.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경계인들 '지금 우리는' '어느 노동자의 항변' '백수白手'에 대한 담백한 기술에 너머 개인이 스스로의 꿈까지 잡아먹고 있음을 여실히 밝힌다. '방1' '방2' '꿈'이란 시에서 그 '지구' 란 집합 안의 하나의 기호로서 여실히 골라내고 있음에 섬뜩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소셜 네트워크' '허영덩어리' '부부들에게'는 그 증상들을 적확하게 묘사한다. 이런 세상에서 삶은 온전하지 못함을 '고백'한다. 


시라도 쓰는 삶이 아니었으면 작게 흔들리는 것들을 부여잡는 시인의 마음마저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4.부


'산책' '삐삐 롱스타킹'  아픔과 구조의 그물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 그렇지만 그 '자본주의' '프레카리아트' '오월' 이란 삶 안에 풍요로운 섬하나는 가꾸어야 한다. '소매물도' '긍정주의자'란 시가 그렇다면  그 속에 흔들리는 나도 나일 수밖에 없다. '어째서 자꾸 나는 슬퍼지는가' 


우리는 아름다움 한점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햐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비'


연약한 날개 짓

바람에 홀려 춤을 춘다.


창공을 가르는

현란한 빛깔은 서글프게 고와


내 마음을 삼키고


아무것도 아닌 이곳에

아름다움,

그 하나의 의미를 남긴다.



5.부


어쩌면 아름다움을 발견한 이들에게 삶은 그래도 살아지게 만들지 않을까. 각박과 척박이란 세상의 비를 피하거나 막는 작은 우산, 우산 살이 망가졌지만 그래도 아주 잠시 빗자락은 피할 수 있는 묘수 말이다.  '정거장' 그냥 대충 사세요. '이상주의자' '유서'를 쓴다는 건 '희망'에 대한 강한 확신이기도 하다. 갈 때까지 가 보자 '인생'은 결기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시인의 외침은 부드럽지만 강하다.


'바람'


아무리 둘러 봐도

아무리 쥐려 해도

바람 속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나 바람 부는 날에

그 속에 서면 나는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아야.


때로는 따사로운 햇볕

때로는 시원한 비

때로는 하얀 눈송이와 함께

슬며시 내 주위를 감싸는 

바람


아, 나는 아무것도 없는 바람 속에서

하늘을 세상을 뛰어 넘고 싶어요.


볕뉘.


'영혼의 노래, 詩'


시 모임을 한다. 누구는 시도 공부하느냐고 웃어젖혔다는데, 

그래도 우리는 모였다. 회원은 셋 서진배 시인, 노현승

대표 그리고 나, 이상한 조합이다. 전에 살갑게 대화

한번 나눈 적 없던 사이인데 시가 좋다고 이렇게 함께하니

시란 도대체 뭐람? 안도현, 박준, 이시형의 시를 읽었다.

시어를 허공에 풀어 휘휘저저 낚아 올린다. 가끔은 꿈

틀거리나 잽싸게 패대기도 쳐본다. 이리 저리 부유하며

떠도는 언어. 표정도 향기도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 시란 도대체 뭐람? 고통의 모퉁이에서 홀로

노래하는 시인아, 서러워말기를. 당신의 영혼은 무지개를

타고 밤하늘을 수놓으리. 그러니 찬란하게, 찬란하게 生을

살아내어라. 이다음에 새싹처럼 쑥쑥 자라 시인이 되겠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시도 공부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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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팝꽃이 바람에 눈처럼 날린다. 무척이나 이른 아카시향은 바닷바람에 드세다. 곳곳에 폭우 소식과 이어이어 보이는 지구는 두바이에도 브라질, 중국, 미국에도 인정사정 없다. 매일 마무리가 엉크러진듯 반듯하지 못해 싱숭한 마음자리가 쉽지 않다. 올 여름은 어쩐다. 냉천 공사는 한정없이 늘어지는 듯싶다. 오고가는 길 쓸데없는 생각들이 뿌려진다싶다.


-5. 


연일우체국 주차장에 미니벨로 뒷바퀴와 짐받이를 둥그렇게 이어서 잠근 뒤, 준등기 볼 일을 마치고 돌아선다. 티딕, 자전거가 나아가질 않는다. 에구 무슨 일이람. 뒷 체인기어 사이에 파고 들어간 자물쇠의 꼬다리가 파쇄되어 날라가고 없다. 천천히 반대방향으로 돌리고 더 복잡해지지 않게 풀어내면서 마무리한다.  


-4.


많은 일들이 셈해진다. 막내녀석도 짧은 3주 군사훈련을 받고 오고, 벗의 북콘서트, 딸아이 결혼 사이사이 잔 일들이 평균보다 높은 간극과 강도로 이어진 셈이다. 저 멀리 부친의 이별만이 아니라 반대 극의 전시도 몇 번 하고, 일터의 일들도 간간히 아니 촘촘히 이어진 것이다. 


-3.


년휴 기간 동안 작업실에서 온전히 작업을 한 것 역시 드문 일이다. 내리 3-4일 작업을 했으니 이리 밀도높게 작업만 한 시간도 근래 가뭄에 콩나듯 한 일이다. 작업실내 공간이 분리가 되지 않아 어젠 오전 내내  버리고 쓸고 닦고 한다.  마음이 조금 추스려진 것이다.


-2


작업실 자전거 퇴근 겸 청림동 바닷가까지 에돌아 간다. 도구 앞 바다로 가는 길은 이어지지 않아 섭섭했지만, 일월 바다를 잠깐 구경한 것도, 저번에 넘어진 주유소를 지나친 것도 국밥에 막걸리 한 사발 걸치고 돌아오는 길, 이런 '상실'이 어디에서 온 연유인가 더듬어지기 시작한다.


-1


작업공간 겸 글 작업을 하던 카페하며, 드문드문 손님을 치루던 활어 초밥집 사장님이며, 화실이며 그리고 가끔 들른 조선통닭 호프집 하며 벌써 지워진 시공간이 한 두곳이 아니다. 시대의 우울이 아니라, 마을의 우울을, 동네의 상실감이 저변에 깔려있음을 문득 깨닫는다.  지키고 싶던 것이다. 나이가 들고 그러하리라 여기던 것이 하나 둘, 곁을 떠나고 그 아쉬움들이 차곡차곡 쌓인 것은 아닐까.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알아채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고 할까.


0


이미 복잡해진 작업공간 역시 하나하나 아쉬움처럼 쌓였던 것이다. 답답함은 키만치 자라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하나 제자리에 돌려놓고서야 마음도 이제서야 빈 여백이 생긴다는 걸 눈치챈다. 


1


어느 사람에 대한 상실감과 아쉬움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밀도 높은 일상들은 여기저기서 아우성이었던 것이다. 미련하게 그 짐을 모른채하고 버티고 서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2


<뒷것 김민기> 를 조금씩 보다 <봉우리>란 가사가 다시 들어온다. 10년 전. 고갯마루 지금여기가 봉우리일지도 모른다는 가사 말에 꽂혔는데, 이제는 '바다'가 들려온다. 오라고 손짓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외치고 있던 것인지도 몰라. 부끄러워졌다.  한 10년 뒤에는 다른 부분이 다른 말이 들릴 것이라고 하며 노래를 보내본다.


























3


<앞것>들은 잘 되고 나서도 먹고 살기 힘들어.  먹고살기 힘드니 앞뒤전후좌우를 어찌 살피겠어. 더 올라가기에 급급하지.  학전 33년. 문을 닫아도 되는 건가.  뒷것 부모들은 그리 뼈 빠지게 대학을 보내도 그 놈의 자식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잖아. 자기가 다 잘나서 된 줄 알아.  앞것들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세상이니. 참. 미련이 남아서 하는 소리는 아니야. 그렇다는 게지. 이렇다는 게지.


4


앞가림하는 순간, 끝나는 게임이지. 그저 휩쓸려갈 뿐. 많은 것들은..작은 것들에게 마음길 손길 한번 주지 않으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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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머니가 말씀하신다. 네가 복이 많다. 아녜요. 어머니가 많으신거예요. 그러니 이 복을 받는거죠. n포시대에 결혼이라니. 부친을 여윈 어머니는 그야말로 잉꼬부부를 너머서는 원앙부부셨다. 자식손주모두 무고하고 회혼례까지 맞으신 부부라 오히려 그 빈 자리가 걱정되는 편이다. 사진 속에 보이지 않는 웃음기가 무척 걱정이더니 그래도 한두달전부터 미소가 보이기 시작해 다행이다 싶다. 부친 묘소에 각시붓꽃 몇 송이가 좋은 소식을 보내는 듯.


2.


딸아이가 전한다. 집들이에서 오빠가 예비매부에게 술이 얼콰해서 부탁하나 있습니다라고 해서 순간 주변이 긴장아닌 긴장을 했단다. 곧 웃음을 참느라 고생했다는데, 매부보고 어머님 아버님께 잘해드리라고 했다나(평소에 잘 못한 사죄를 이렇게 하다니) 그러니 장가간 것이 맞다 아들은...


3.


요즘은 신랑신부 둘이서 결혼행사 일정을 온전히 치뤄서 그러려니 하는데, 아빠는 신부 입장할 때 손만 잡고 들어가면 된다 한다. 축사 이런 거 모두 하지 않고 축가만 있다한다. 


4.


몇 달 동안, 딸아이와 경험들을 반추할 기회들이 생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이 있을텐데, 아들을 보낸 경험이 있는 딸 엄마가 힘들어한다. 거 참. 내가 보기엔 엄마가 딸을 키운 것이 아니라 딸이 엄마나 아빠를 키웠다는 표현이 더 적확하다.  아니 어쩌면 그리 힘들지 않을 수도 있다. 지인들과 이십여년이 넘은 모임이 있는데 매년 일박이일 가족행사를 그친 적이 없으니, 이십여 가족은 유사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 왕래도 그러하며 살아가는 모습들도 지켜보고 알고 있으니 한결 수월한 형태라고도 할 수 있다.


5.


한 달 전 별이빛나는 밤에 소식을 보내고 식사자리를 마련했는데, 지인삼촌들을 초청아닌 초청을 하여 저녁을 같이 한다. 다음날 바래다주면서 묻는다. 아빠는 삼촌들이 중요해 우리가 중요해라고 말이다. 당연히 주인공인 너희들이지. 당신들이 주이고 삼촌들은 올지 안올지 몰랐던 게스트였지. 하지만 친척이상이라고 여겨, 마음과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친척인 셈이지.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희들에게 관심도 많고 해 주고 싶은 말도 많은... ...


6.


결혼식 전전날, 아니 전날 아침 짐을 챙기면서 혹시나 해서 책을 가벼운 걸로 두 권을 넣는다. 


 들뢰즈가 이런 질문을 한다. 사람들은 왜 자진해서 종속되기 위해 싸우는가? 왜 자유롭지 못한가?하는 질문 말이다. 사실은 이 질문은 스피노자가 한 물음이기도 하다. 사람은 왜 예속되기 위해 싸우는가? 그러면서 노예와 폭군, 신(성부)은 셋이서 한 통속이라고 한다. 폭군을 섬기고 신에 의탁하고 밖의 것에 기대고 그 삼위일체의 고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삶의 고리에 자신은 없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덧셈, 기쁨의 탈출 열쇠를 준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저 멀리가면 루크

레티우스가 말한 것이기도 하다. 사람은 왜 자유스럽지 못한가? 온전히 자신을 들여다보고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신화와 미신, 온갖 외부 것에 시달려 삶의 한쪽도 온전히 쓰지 못한다고 말한다.


7.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다행히 가족에 집착하지 않는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유사가족이나 책친척, 늘 손님으로 다가온 우리 식구들 역시 모시는 존재들이다. 그로부터 많은 것을 얻고 있기도 하고, 끊임없이 친척들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래서 고맙다. 우리의 삶들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나란 바다의 경계는 없다. 그 모든 것이 나의 것이고 친척들과 나눠야할 꺼리들이다. 


볕뉘


물론 이러한 얘기들을 건넸다는 것이 아니다. 우연히 술이나 마음이 깊어지면 나눌 확율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아들이 왔다. 장가간 아들도 돌아오고 있다. 기대되는 오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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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석으로부터

 

 하루 전부터 지인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당일은 행사 한 시간 전쯤 도착해보니 벌써 세팅이 다 되어있다. 제법 프로그램 시간이 긴 것으로 알고 있는데, 비가 알맞게 내려 운치있다. 


 출판사 주간도 내려와서 인사말을 하는데, 무척 놀란 듯싶다.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행사가 아니라 참관할수록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는 것인 신기한 듯싶다.


시와 음악, 예술과 문학에 조예가 깊은 푸른치과 원장님의 축사는 무척 길다. 하지만 등단작가가 아니라 시인의 걸음이 왜 중요한가라는 물음은 긴 답변 속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공감가는 내용이다.



북토크 질문들이 난이도도 있고, 독자들의 <이름>과 사연을 불러내기도 하여 흡입도와 친밀감이 높은 행사다. 내 이름도 호명하여 <액자의 기울기>란 시를 낭독하다. 여러 사연과 낭독은 이어졌는데, 시종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와인도 한 잔 해가면서 행사에 참석한다. 연극인, 마당극단의 이어진 쪽시간들은 그야말로 배틀에 버금가는 진중함까지 꽈악 차오른다.


뒤풀이도 일차 이차에 이어져 자리를 옮길 생각들이 없는 듯 보였다. 덕분에 사단법인 토닥토닥의 친구들이 마음이 풀리고 진지해지고, 어떤 방법들이 좋은지 관찰하고 즐기는 모습이 보기 좋다. 애써 바다보러 일박할 각오로 오시라고 건넨다.


 서영표의 글을 권한 선배에게 따끔을 한방 쏘고 온다. 먹물이란 한계를 딛고 먹물을 뿌려라는 결기와 친밀함, 복잡시선으로 칭칭 몸을 감아라라고 늦밤까지 하늘이 검푸른 바다 색이 되도록 마음을 나누고 오다.


 모두 영상은 이내가수의 행사 맞춤용 창작곡이다. 서진배 시, 이내 곡.


 지인을 중개삼아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포항 작은 책방의 공연도 책도 본 기억들을 나누고, 가을 대전공연소식까지 건네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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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든 싫든 하나의 성적 정체성 또는 사회적 인종적 정체성을 사회가 수용하도록 촉구하고 문제의 정체성 범주에 대한 존엄성과 권리를 부여하도록 사회에 압력을 가하는 운동에 기초하기 마련이다. 이 과정 속에서 그러한 정체성 정치에 기초한 사회운동은 개인을 고정된 추상적 규정성, 예컨대 여성, 동성애자, 노동자, 부르주아지, 기업가 등등의 범주 속에 가두는 위험을 치르게 된다. 161 기질 개념은 섬세한 차이와 존재들의 특수성을 고려하도록 또한 갈등적 관계들을 인정의 용어보다는 인식의 용어로 사유하도록 이끈다. 161


개인적 자아의 해체: 사랑은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내게 잠시 주어진 특성들을 향하고 있을 뿐이다. 그 특성이 신체적인 것인지 정신적인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떠한 특성이든 그것은 모두 빌려 온 것에 불과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몇가지 특성을 사랑할 뿐이다. 165 자아의 유령적 성격 166


사회적 자아의 해체: 이행으로서 기질: 패싱: 패싱이라는 말을 프랑스어로는 이행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어가 지닌 의미론적 다양성 탓에 이해의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바로 그 다양성 덕분에 선을 넘는다는 의미와 두 세계의 경계를 넘는 밀행자가 된다는 의미를 표현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179

 

아니 에르노는 <<남자의 자리>>에서 나는 내가 지금까지 교양 있는 부르주아 세계로 들어갈 때마다 그 문턱 앞에서 내보여야만 했던 나의 유산을 드러내는 것을 그만두었다. 적응은 내려 두는 과정을, 심지어는 새로운 자리를 잡기 위해 기존의 것을 내팽개쳐버리는 과정을 포함한다. 적응은 예전의 가치와 방식을 버리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적응은 자신의 허물로부터 벗어나는 일종의 탈피 과정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변신은 결코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급횡단자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아가게 된다. 183

 

상류층 사람들은 상당한 호감을 준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그들이 인간 조건의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불평과 불만의 토로를 아예 제거해 버리고 누구에게나 유익한 이타주의의 일환에 따라 실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에 계급횡단자가 변신하게 에는 필연적으로 일정한 시간과 긴 숙성의 과정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일단 자신의 화법에서 사람들이 거슬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변신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189

 

수많은 유리잔들과 식사 용품들은 그 사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세련미와 화려함을 보여주는 증표라기보다는 오히려 식사 중 결례를 범할지도 모르는 횟수의 증가를 의미할 뿐이다. 그래서 계급횡단자들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만이 아니라 물건들까지도 두려워하게 된다. 그는 언어의 법정 앞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사물들의 법정 앞에 서 있다. 193

 

계급횡단자에게 사건은 자신의 여유로움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라기보다 그의 불만족스러움을 이겨 내야 하는 시험이다. 스피노자적 용어를 빌려 온다면 자족감보다는 만족을 낳는다. 자족감이 자기 자신과 스스로의 행위 역량을 관조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기쁨이라면, 만족은 바랐던 것보다 상황이 더 낫게 이루어진 일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그러므로 만족은 예상되었던 슬픔을 이겨 낸 기쁨의 형식이다. 계급횡단자의 기질은 무모함과 소심함 그리고 호전성과 유순함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195

 

계급횡단자는 언제나 경계 주변에서만 맴돌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적 코드에 알맞게 행동하고 상황에 어긋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그에게는 잠시 물러나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고, 다라서 그의 생각과 실천에는 항상 거리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209

 

결국 문제는 세상의 모든 차별을 만들어 내는 존재에서 가치로의 이 은밀한 미끄러짐이 어디에서 연원하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240

 

어떻게 하면 이행의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찢기고 파열된 기질의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모든 어려움은 소외되지 않으면서도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이 되는 것에 있다. 타자성이냐 소외냐. 이것이 계급의 변화를 거치면서 일어나는 자기-변형에 걸린 판돈이다. 256

 

강인한 영혼은 올라가는 일이든 내려가는 일이든 상관없이 수행할 수 있다. 260

 

민중 계층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연대와 상부상조는 그 밖의 다른 자원이 전혀 없는 결핍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전된 행동 양식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을 자연적 선함과 온정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연대는 빈자의 유일한 자산이다. 따라서 연대가 알아서 잘 지내는 유복한 계급에는 널리 퍼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울 일도 아니다. 자기 자신으로 남는다는 것. 그것은 민중으로 남는 것을 말하는가? 그러나 우선 실체적 자아라는 것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 내용이 민중적인지 부르주아적인지 논하는 것은 무용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를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가장 어려운 것은 계급 사다리를 오르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 혹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엄격히 말해 민중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아비투스 도야를 통해 민중이 된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하다.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민중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생겨나고 변천하는 여러 민중만이 있다. 265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과 화해는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에 대한 명예 회복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어빙 고프만이 낙인의 전도라고 부른 것, 다시 말해서 모욕의 기호를 도리어 당당히 드러내고 자신의 상징으로서 주장하는 것을 통해 일어난다. 268

 

미슐레가 보기에 개인적 수준의 계급의 변화는 집단적 진보의 운동과 연장선상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올라간 자들이 자신의 색을 잃고 싶지 않다면 그들은 야만인이 되어야 한다. 즉 계몽하는 자가 되어 되찾은 자긍심의 기호들을 널리 퍼뜨리는 기수가 되어야 한다. 이는 계급횡단자들이 단순히 사는 곳의 경계를 바꾼 이행자로 존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과 부정의한 속박의 굴레를 계급과 함께 파괴하고 승리의 역사를 향해 전진하는 개척자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274

 

나는 아버지의 말과 제스처, 취향, 아버지의 삶에 흔적을 남긴 사건들, 나 역시 공유하고 있는 한 존재의 객관적인 기호들을 모아보려 한다. 추억의 시도, 환희에 찬 조롱도 없을 것이다. 평평한 글이 자연스럽게 쓰여졌다. 내가 부모님께 중요한 소식을 말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식 그대로 쓰인 글이. 286

 

대립물들을 합치시킨다는 것은 그것들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는 일이라기보다 타자와 자기 자신 사이의 화해를 이루는 일이다. 이러한 화해는 타자를 그리고 계급 장벅 뒤편에서 부정하고 억압했던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자신 안으로 재통합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재회를 주선해 준 것은 지배자들의 세계 중심에서 획득한 민족지적 문화이다./<<슬픈 열대>>를 반대로 뒤집은 것이 부르디외의 민족지적 프로젝트다. 292




볕뉘


1. 


정체성을 가진 개인, 변하지 않는 자아라는 개념이 기존 철학의 근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죽음을 염두에 둔 가상의 세계-안-존재라거나 딱딱한 고체 형태의 개념을 가진 실존주의자란 서술이 주장하는  즉자, 대자 개념은 여기서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칼폴라니가 자본이 토지와 노동의 뿌리를 끊고 마치 스스로 증식하는 모습을 띤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늘 조직이나 사회에서 발라낸 형태로 개인을 가정하여 사유를 출발시킨 것이다.  발라낸 개인으로 사유하면 환경과 조건들이 세심하게 읽힐 수 없고,  자수성가나 능력자, 천재라는 개념으로 별난 인간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런 무책임한 개념의 개인은 사회와 개인의 층분리를 만들거나 산술적인 합의 계급이라거나 변화를 만들어내는 액체로서 화학적 결합을 갖는 경로를 볼 수 없다. 그 변화가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어떻게 분위기란 색이 바뀌게 되는지 발화나 변동을 쉽게 잡아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2.


결론 부분에서 언급하는  비유인 실타래라는 컨셉은  무척 좋아하기도 하는데, 지나간 과거라는 것이 한 올 한 올 풀어내면서 새롭게 직조할 가능성까지 보여주는 것은 순간순간이 앞으로 열려있는 모습을 드러낸다. 사물이란 것을 엉킨실타래의 형상으로 보게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하나 하나 풀어내기 위해 얽힌 힘들을 구분해내는 것과 끊어지지 않게 조절하는 정교함은 사물 그 자체를 춤추게 하는, 물활의 심경과 시인의 감수성을 동시에 갖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계급횡단자란 개념을 풀어가는 묘사에서 어떻게 그 많은 것들이 연결되어 있는지 손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작가의 능력때문이기도 하다.


3.


부르디외를 선택한 것이 도드라져보이는데, 문화자본이나 상징자본이나 구별짓기 계급의 재생산을 기본틀로 해서 구조적인 부분을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렇게 묘사하거나 기술하고 있는 배경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이 책을 올바로 읽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마르크스로부터 시작하는 자본론읽기가 덧붙여져야지만 이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계급횡단자란 개념엔 계급의 재생산이란 큰 흐름이 있는 것이니 놓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계급횡단자만 쏙 빼내서 읽게 되면 사회적 우울이라든가 구조적 모순 저자가 읽어내고 싶어하는 다음을 가늠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4.


또 하나는  스피노자를 잘 읽어내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감정,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감정에 붙어있는 현실들을 불러내어 감정이란 것이 사회와 역사와 연루된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성과 객관화가 갖는 편협함을 잘 느껴보시길 바란다. 역으로 감정이 갖는 구체성과 주변에 뿌리내린, 뿌리내릴 모습들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면 거꾸로 많은 놀라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독서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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