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통사회는 좋아요의 사회다. 진통사회는 좋음의 광기에 빠진다. 모든 것이 만족감을 줄 때까지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좋아요는 우리 시대의 징표이자 진통제다. 좋아요는 소셜미디어뿐만 아니라 문화의 모든 영역을 지배한다. 어떤 것도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 예술만이 아니라 삶 자체가인스타그램에 적합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고통을 줄 수 있는 모서리나 귀퉁이, 갈등이나 모순이 없어야 한다. 고통이 정화한다는 사실은 잊혀진다. 고통은 카타르시스적인 작용을 한다. 만족의 문화에는 카타르시스의 가능성이 빠져 있다. 그 결과 우리는 만족 문화의 표면 아래쪽에 쌓이는 긍정성의 찌꺼기에 에워싸여 질식한다. 13

2.

신자유주의적 행복장치는 우리를 영혼의 내면관찰로 이끎으로써 현존하는 지배연관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잠재운다. 모두가 사회적 상황을 비판적으로 파고드는 대신 그저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자신의 심리에 대해서만관심을 갖도록 이끈다.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할 고통이 사적이고 심리적인 문제로 간주된다. 개선되어야 할 것은사회의 상태가 아니라 영혼의 상태다. 영혼을 최적화하라는 요구는 실제로는 지배 관계에 적응하라는 요구이며, 사회적 폐해를 은폐한다. 이런 식으로 긍정심리학은혁명의 종언을 확정 짓는다. 혁명가들이 아니라 동기부여트레이너들이 무대에 올라 어떤 불만도, 나아가 어떤 분노도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 22

3.

행복장치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사회의 탈정치화와 탈연대화를 초래한다. 각자가 스스로 행복을 추구해야한다. 행복은 사적인 문제가 된다. 고통 또한 개인적인 실패의 결과로 해석된다. 그래서 혁명 대신 우울이 있다. 자신의 영혼을 치료하려고 이리저리 애쓰는 사이에 우리는사회적 불화를 낳는 사회적 연관을 시야에서 놓치고 만다. 두려움과 불안이 우리를 괴롭힐 때, 우리는 그 책임이 사회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함께 느끼는 고통이야말로 혁명의 효소다. 신자유주의적 행복장치는 이런 고통의 싹을 질식시킨다. 진통사회는 고통을 의학적 문제로, 사적인 문제로 만들어 탈정치화한다. 이를 통해 고통의 사회적 차원을 억압하고 은폐한다. 피로사회의 병적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만성적인 고통은어떤 항의도 낳지 않는다. 24

4.

면역학적으로 조직된 사회는 냉전 시대처럼 울타리와 장벽들로 둘러싸여 있다. 공간은 서로 분리된 구획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면역학적 방벽들은 상품과 자본의 유통속도를 늦춘다. 냉전 종식 후 대규모로 진행되는 탈면역과정인 세계화는 상품과 자본의 흐름을 가속화하기 위해 이런 방벽들을 철저히 제거한다. 효과적으로 면역 작용을 하는 적의 부정성은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 체제에 적합하지 않다. 이 체제 안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과 전쟁한다. 타자 착취 대신 자기 착취가 일어난다. 32

5.

고통은 처음에 이야기의 흐름을 가로막는 “둑”이다. 하지만 이 둑은 “이야기의 물살이 충분히 강해서 그것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행복한 망각의 바다로 휩쓸어간다면” “무너진다.” 아픈 아이를 쓰다듬는 엄마의 손은 이야기가 흘러갈 강바닥을 만들어준다. 그러나 고통은 이야기의 흐름을 가로막는 둑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 자체가 이야기의 강물을 불어나게 하여 이 강물이 고통을 휩쓸어가게 만든다. 고통이 비로소 이야기가 흐르도록 하는 것이다. 이럴 때만 고통은 실제로 “배를 타고 운행할 수 있는 강, 인간을 바다로 이끌어주는 마르지 않는 물을 지닌 강” 이 된다.

오늘날 우리는 탈서사적 시대에 살고 있다. 이야기 Erzählung가 아니라 계산Zählung이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서사는 몸의 우연성을 극복하는 정신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이야기가 모든 병을 치유할 수도 있다는 벤야민의 생각은 일리가 있다. 39

6.

고통공포는 심지어 고통을 유발할 수도 있다. 외부로부터 오는 수많은 고통을 막아내야 하는 훈육된 몸은 둔감하다. 이 몸은 완전히 다른 지향성을 갖는다. 이 몸은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이 몸은 외부를 지향한다. 반면 우리의 관심은 훨씬 더 우리 자신의 몸에 쏠려 있다. 테스트 씨처럼 우리도 강박적으로 몸속에 귀를 기울인다. 이 나르시시즘적이고 건강염려증적인 내면관찰이 우리의 과민성의 한 가지 원인일 것이다. 41

7.

고통의 근저에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 놓여 있다. 예컨대 억압은 부정성의 폭력이다. 타자가 억압을 행사한다. 그러나 타자만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과도한 성과, 과도한 소통, 과도한 자극으로 나타나는 긍정성의 과잉도 폭력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부하負荷로 인한 고통을 낳는다. 오늘날 주로 심리적 긴장이 고통을 낳고 있는데, 이런 긴장은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의 특징이다. 이런 긴장은 자기공격적인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성과주체는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다. 성과주체는 쓰러질 때까지 자발적으로 자신을 착취한다. 노예는 주인이 되기 위해, 나아가 자유를 얻기 위해 주인의 손에서 채찍을 아 자신을 때린다. 성과주체는 자신과 전쟁을 벌인다. 이 전쟁에서 발생하는 내적 압박Pression은 성과주체를 우울
Depression 로 몰아넣는다. 또한 만성적인 고통을 낳는다. 46,47

8.

고통은 인간 현존재의 중력을 형성한다. “기쁨이 커질수록 그 안에 숨어 있는 슬픔도 더 순수해진다. 슬픔이 깊을수록, 그 안에 머물러 있는 기쁨도 더 간절히 부른다. 슬픔과 기쁨은 서로의 안으로 들어가 유희한다. 닦이 가까워지게, 그리고 가까움이 멀어지게 함으로써 기쁨과 슬픔이 서로 어울리도록 조율하는 유희 자체가 고통이다. 그래서 가장 높은 기쁨과 가장 깊은 슬픔은 각각 나름의 방식으로 고통스럽다. 그러나 고통은 유한자의 정조Gemüt를 조정하여anmuten 유한자가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중력을 얻도록 한다. 모든 동요에도 불구하고 유한자가 자신의 본질 안에 고요히 머무를 수 있는 것은 이 중력 덕분이다. 고통에 조응하는 ‘정조 muot‘, 고통에 의해, 고통을 향해 조율된 마음이 우울이다.” 72

9.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은 오늘날 마음대로 할 수 있음의일시적인 중단만을 의미한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는 오직 소비만 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의 총계 이상의 것이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계는 아우라를, 나아가 향기를 잃는다. 이 세계는 머무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은 타자의 다름, 즉 타자성 Alteritat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타자성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다. “근원적 거리˝81없다면 타자는 너가 아니다. 타자는 그것으로 사물화된다. 타자는 그 다름 속에서 호출되는 대신 소유된다. 75

10.

티자에 대한 무방비성을 ˝영혼의 나체성Seederracktheit˝라고 부른다. 타자가 내게 안겨주는 불안은 이로부터 비롯된다. 이 불안은 타자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게 만든다. “그는 자신의 가린한 인간관계에 대해, 자기 마음속의 삶에 대해, 그리고 노년에 갈수록 더 다급하고 강렬하게 사랑하게 된 데 대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대신, 가장 친밀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줄곧 신경 쓰고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갈수록 ‘냉철한 태도를 취하기가 어려워지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 전혀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숨쉬기, 느끼기, 통찰하기가 아닌 모든 것을 경멸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영혼의 나체성은 타인으로 인한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이 타인으로 인한 두려움을 통해 비로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83


11.

이 책의 마지막 장은 “마지막 인간”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 장에 따르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니체가 말한 “마지막 인간으로 체현되는 진통사회를 낳는다. 이 사회는 지속적인 마취화를 실행한다. 때때로 약간의 독을 주입. 이렇게 하면 기분 좋은 꿈을 꾸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기분 좋은 죽음을 위해 다량의 독을 주입 […] 낮에도 작은 쾌락을 누리고, 밤에도 작은 쾌락을 누린다. 그러나 건강을 섬긴다. 마지막 인간은 ‘우리는 행복을 발명했다‘라고 말하면서 눈을 깜빡거린다.”
85

마지막 인간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아니다. 그는 자유보다 안락함을 더 높은 가치로 간주한다. 자유에 대한 자유주의적 이념을 궤멸시키는 디지털 심리정치는 마지막 인간의 평안함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인간의 건강 히스테리는 그가 자신을 영구적으로 감시하도록 한다. 그는 자기 안에 내면의 독재를, 내면의 통제정권을 구축한다. 내면의 독재가 생명정치적 감시와 일치할 때, 시 감시는  더 이상 억압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감시가 건강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90,91

볕뉘.

상을 타야 유명해지는지도 모르겠다. 더 유명해지려는 욕망이 상을 갈망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수상소감으로 신음처럼 가려진 영혼들을 드러내는 것 역시 맞는 일인지도 감을 잡지 못하겠다. 확율이 낮더라도 심리적인 응어리를 풀어준다면, 어쩌면 상들은 가려지거나 비명이 난무하는 분야에는 우후죽순처럼 생겨야 하는 것인지도 헷갈린다.

짤려도 퇴직해도, 그만두어도 배우고 배우고 배우고, 어찌나 배울 것들은 많은 지, 하루하루가 빠듯하다조차 못해 잠이 늘 마중나와 스스로를 맞는다. 즙이 되도록 스스로를 갈아넣을 것이 없을 무렵, 건강과 기울기가 삐끗할 때 우울은 서슴없이 기어온다.

어쩌면 저자의 성실성과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저평가 되어있음을 느낀다. 뼈아픈 이야기임에도 기획하지 않고 다루지 않는다. 진정성과 성실함, 성과를 질투로 느껴서일까. 유독 지식인사회에서 더 인색한 것 같다. 나만의 느낌일까. 무엇을 얼마나 더해야 절규가 진실로 받아지거나 마음을 움직이는 지렛대로 쓰일 수 있을까.

그런 냉소들이 발화자에게조차 허허로움으로 되몰아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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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관련 책을 읽다가 술술 읽혀 책 속에서 글쓰기 책 두권을 소개받았다. 그 책들을 읽다가 눈에 들어온 트레이닝 서적이다.


1.

작가가 되는 방법의 시작은 자신이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어떤 작가를 경멸할 수는 있어도 글을 경멸해서는 안 된다. 물론 자신이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반드시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작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작가가 될 수 없고, 작가가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 중에서 작가가 나온다고 믿는다.

‘감히 내가 작가를?‘

작가를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제 쓴 글을 오늘 고치고, 내일도 자판을 두드리는 사람이 작가라고 믿습니다. 글을 쓰기싫은 마음이 드는 순간에도 참고 쓴다면 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 쓰다 만 글을 끝내 완성하는 사람이 작가입니다. 글쓰기 PT를 시작한당신은 이미 작가입니다.

33

2.

조디는 카야의 부엌에 대롱대롱 매달린 외로운 삶을 보았다. 채소 바구니 속 소량의 양파들, 접시꽂이에서 마르고 있는 접시 하나, 늙은 미망인처럼 행주에 곱게 싸둔 콘 브레드에 고독이 걸려 있었다.

그동안 ‘외롭다‘는 표현을 할 때 쓸쓸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것 같았다‘ 라고 썼다면, 이처럼 사물을 통해 표현하는 방법을 새롭게 터득하는 거죠.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와 점점 닮아가듯,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닮고 싶은 작가의 글을 모방해서 자꾸 써보세요. 문장의 리듬을손끝을 통해 체화하세요. 필사 노트에 낯선 단어와 표현 방식을 채집하고 달아나지 않도록 꼭 붙잡아두세요. 종류별로 최신 장비를 보유한 수리공처럼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47

3.

노하우를 리스티클로 쓰면 글쓰기에 왜 도움이 될까?

- 정보를 선별하고 요약하는 훈련이 된다.

예를 들어 ‘시간 관리 잘하는 법’을 리스티클로 쓴다고 해보죠. 우선 내가 써본 방법이 떠오르겠죠? 시간대별로 해야 할 일을 엑셀에 정리해 기록해둔다든지, 중요도와 급한 일의 우선순위를 따져본다든지,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모두 쓸 수는 없으니 그중 ‘시간 관리 잘하는 다섯 가지 비법’으로 내용을 한정해보세요. 후보군 중 매력적인 다섯 가지를 취사선택합니다. 우선순위를 정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연습이 됩니다. 88

4.

기초 체력을 충분히 쌓았으니 오늘부터는 균형 잡힌 몸매를 만들어봅시다. 부위별로 골고루 글쓰기 근육을 단련하는 것이죠. 사물이나 사유를 세밀하게 표현하는 ‘묘사 근육‘, 상대방을 설득하는 ‘논리 근육‘, 없는데 있는 것처럼 창조하는 ‘상상 근육‘ 같은  것을 붙이면 어떨까요. 92


5.

그림을 썼으면 이제 자신이 리포터가 된 것처럼 상황을 중계하듯 ‘말 쓰기‘를 해봅니다.

그림 쓰기/말 쓰기

큰 초 두 개가 꽂힌 케이크 → 누군가 스무 살을 맞이했나 보네요.

고깔 모자를 쓴 친구들→ 친구들이 축하 파티를 준비한 모양입니다.
주변에 놓인 선물 상자→ 테이블 가득 쌓인 선물 상자를 보고

설레는주인공 표정→ 주인공 입이 귀에 걸렸네요. 114

볕뉘.

몇 가지 팁들을 남겨본다. 애써 시도해보지 않았던 방법들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싶은 내용들. 해보고 싶은 부분들에 대한 실전훈련 방법들이 재미있다 싶다. 자연스럽게 해보게 만드는 방법들이 배여 있다. 끝내주는 맞춤법 책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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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율이 아니라 백금율; 네가 대접받고 싶은대로 대접하지 마라, 남들은 취향이 다를 수 있다.


1.

이 시점에서 내가 자기 계발 장르의 팬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야 하겠다. 내 개인적인 생각에 따르면 우리는 너무 많은 내적 성찰과 너무 적은 외적 성찰의 시대에 살고 있다. 더 나은 세상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와 함께 시작된다. 우리의 주요 임무는 다른 기관을 만드는 것이다. 508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황금률이 부족하다고 믿게 되었다. 10장에서 우리는 공감이 나쁜 길잡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순한 사실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감지하는 데 우리가 항상 능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모든 관리자, CEO, 언론인 및 정책 입안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사실상 강탈하고 있다. 이것이 텔레비전에서 난민 인터뷰를 거의 보지 못하는 이유이다. 이것이 우리의 민주주의와 저널리즘이 대부분 일방통행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유이다. 이것이 우리 복지국가가 가부장주의에 젖어 있는 이유이다. 513

3.

공감과는 달리 연민은 우리의 에너지를 약화시키지 않는다. 사실 그 후 리카르는 훨씬 기분이 나아졌다. 연민이 동시에 더 통제되고, 더 거리를 두고 있으며, 더 건설적이기 때문이다. 연민은 타인의 고통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데 도움이 된다. 뿐만 아니라 연민은 우리에게 에너지를 주입하는데, 이는 남을 돕는 데 정확히 필요한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아이가 있다고 가정ㅇ해보자. 부모로서 당신은 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어둠을 두려워한다고 아들이나 딸과 함께 훌쩍거리지 않을 것이다(공감) 오히려 당신은 그들을 진정시키고 위로하려고 노력할 것이다.(연민) 515-516

볕뉘.

1. 4월초 지인이 머무르다 이 책 얘기가 나와서, 그건 아닌데 싶었다. 성선설, 성악설 그렇게 흑백으로 나눈 것이 문제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추천해준 책이 앨버트 허시먼 전기였다. 그는 인간을 시계추(이 역시 고루한 표현이지만)처럼 왕복운동하는 진자라는 개념을 써서 나아간다. 그랬을때만 사람을 좀더 폭 넓고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고 말이다. 외연의 확장에도 염두에 두면서 이끌어가는 모습이 끌렸다. 또 다른 지인의 글에서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렇게 읽게 된다 싶다.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궁금해 결론부터 손이 간다.

2. vflat을 써보고 있다. 줄간이 이어지지 않아 어색하지만 정확도가 높아 더 사용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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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책들이 손에 다시 잡혔고 다시 읽고 있다. 다시 읽다나니 지난 번 독서는 모호한 끈이론과 다차원, 다중우주에 대한 관심으로 정작 중요한 것들을 지나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읽는 사이로 플랑크 길이로 이루어지는 양자공간, 양자중력으로 양자역학을 통합하는 루프양자중력이론을 다루는 책들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싶다. 


빅뱅이 아니라 빅바운스. 블랙홀에 대한 이론이 다르게 접목되고 있음을 알게된다. 하지만 파인만이 그러한 것처럼 안다고 하는 사람은 많아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에 한표다. 그나마 로벨리, 곽영직의 글들이 역사 속에 실패사례 위주로 하나하나 지워나가는 방식에 오히려 눈에 잘 들어 온다 싶다. 


지난 번 읽기는 책들 사이 날개귀만 접어놓고 기록해두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짬이 되면 밑줄긋기라고 해두어야겠다 싶다. 그래야 다음에 읽기가 조금은 더 수월해질 듯싶다. 아마 또 다시 읽게 된다면 몇 권의 텍스트와 집중해서 보게 될 듯하다. 주말 몇 권이 흥미롭게 대기중이다.
















볕뉘. 


1. 한 세기 양자역학의 탄생과 실험과학의 발전이 있었지만, 환상과 유행이 휩쓸고 지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과학이 점점 소설화해가는 아이러니 말이다. 중력파와 힉스입자 역시 예견된 파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한다. 과학 본연의 임무같은 것은 없겠지만,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검증의 검증, 엄밀화와 더불어 다방면의 앎을 넓혀가는 것도 그 근력을 키우는 방편이겠다 싶다. 역사 속에서도 그런 인물들이 발군의 집중력과 깊이를 보여준다 싶다. 좋은 스승 밑에 훌륭한 제자가 나온다는 사실을 볼 때 지금 여기의 물리학계 현실은 어떤가 되묻고 싶다. 기초체력은 더구나 더...


2. 어쩌다보니 100년이라는 굴레로 우리나가 근대사, 세계경제사, 제3세계, 과학사를 겸해서 보고 있는 셈이다. 미얀마도 그렇지만 지금여기라는 순간이 이처럼 반복될 수밖에 없는지, 시야를 넓히고 확장될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한 안타까움들이 스며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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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덜먼의 책을 덮고, 잠이 제대로 오지 않는다. 늦게 든 잠, 새벽녘에 꿈에 또 다시 시달린다. 한 장만 쓴 페이퍼가 더 홀쭉해보였다. 빈약함이 어울리는 그 페이지는 공중에 찢긴 종이가 날리듯 퍼덕거린다. 날렵함이나 날씬함이 아니라 몰골이 쑥 들어간 빈틈투성이라니 말이다. 부끄럽고 창피하다. 며칠 전에 있던 자만감 같은 것들은 대체 어디로 피신중이란 말인가. 가느다란 작대기. 그것도 이어진 막대기가 아니라 간신히 얼기설기 매어진 잣대. 누군가 훅 불면 후두둑 따로따로 땅바닥에 투두둑 떨어질 것 같다.

그들은 덧붙인다. 아니 어쩌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냉정하기도 하다. ~으로 환원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행위자를 그대로 보려하지 않고 놓아두려하지 않는다. 그저 종속적인 위치로 놓는다. 가령 a라는 사물. 쓰레기나 폐기물이라고 하자. 흔히들 이것은 인간들이 부수적으로 만든 것이기에 그냥 처분하거나 과학기술의 발달로 처리하면 될 것이다라고 한다. 즉 인간위주의 판단에 종속변수로 놓는다. 이런 사유방식이 정작 문제가 생기면 대처를 하지 못하고 답을 찾을 길이 없다. 찾는다고 하더라도 사후에 생기는 일이다. 그러니 쓰레기. 핵똥(폐기물). 공정에서 나오는 신규화합물 등등 사물 그대로 행위하는 행위자인 것이다. 매체인 것이다. 서사뿐만이 아니라 그 똥은 끊임없이 악취나 문제를 일으키는 방식으로 말을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으로 된다거나 해석할 수 있다거나 하는 파악방식은 편의적인 발상이자 다른 것들을 볼 수 없게 만드는 사유방식이다. 이것은 자신의 분과학문이나 흔히 전문분야라고 그 시선과 잣대로 바라보는 방식과 유사하다.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행위자가 행위하는 것은 평범한 인간의 시선을 너머 선다.


레비나스는 인간적인 공정을 앞에 둘 수밖에 없다고 한다. 철학적인 사유에 보태서 윤리적인 존재임을 드러낸다. 칼 폴라니가 토지, 노동, 사람 등 실재로 분리가 불가능한 것들을 발라내고 분리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문제제기를 했다. 그 반면에 허시먼의 저작을 따라가다보면 경제에 정치, 사회뿐만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 심리까지 덧붙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생생하게 마주하는 실체로서 학문을 뜨겁게 달구어 놓는다 싶다.

포스트 휴먼 이론들은 보지 않으려는 곳들을 보게하는 확장성에도 불구하고 차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훅 불면 날라갈 듯 끈기도 풀기도 없는 듯싶다. 그렇게 이 틀들 사이 어디쯤 갈피를 잡지 못하며 서성거리겠지만, 새롭게 버무려지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올 봄에는 아마 이들 사이 여러 갈래길을 거닐고 있을 듯싶다. 설레이기도 기대되기도 한다 싶다.

볕뉘. 허시먼 책에 하이픈이라는 구절이 나와 생각을 이어 보았다. 브라이언트책도 책속의 책이 참 많다. 봄비가 제법 많이 내린다.

하이픈(콕!)

손 내미니 


꽃도

벌도
나비도 한몸.
나-꽃.
너-벌.
우리-나비.

손 잡으니
너-달.
나-별.
우리-하늘.

손 펼치니
나-봄-여름-가을ㅡ겨울-눈
너-겨울-가을-여름-봄-꽃
과학-철학-문학-정치-벌-삶
농도-나비-밀도-글-밥-구름
비-바람-시-가난-풀
이리 한 켜 한켜 쌓다보니
배도 부르고 얼굴도 화끈하고
갈 수 없는 곳도 없다싶어
만나지 못할 사람도 없다싶어
가보지 않은 곳도 가볼 수 있다싶어
어설퍼도 아파도 누추해도 든든해.

마음 모아 ' - 하이픈 '
마음 가득 '하고픈'.
하여튼 하이픈.

하이파이브 닮은 ' - '

 

펼친 부분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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