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6 애니메이션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벤야민이 잘 알고 있었듯 계급화된 쾌락의 양태와 문화적 전파 기술을 공부하게 된다. 벤야민은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의 초기 판본에서 디즈니의 새로운 애니메이션 기술에 특별한 자리를 할당한 바 있다. “디즈니의 만화 세계는 빈곤과 가학성과 폭력의 세계다. 다시 말해, 그것이 우리의 세계다.”

 

146 <내 차 봤냐?>에서는 망각과 멍청함이 결합해 대안적 인식 양태를 생산하는데, 그것은 기억 프로젝트의 실증주의에 저항하고, 생각의 전승을 이해하기 위한 이성애적, 오이디푸스적 논리를 거부한다. 영화의 두 녀석은 (아무 데나 똥오줌을 싸고, 누군가가 먹이고 돌봐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유아적이지만 양육자가 없고, 아버지나 어머니(하지만 아마도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전해 내려오는 지혜가 부재한 탓에, 발전과 진보, 학습을 가로막으리라 예상되는 또래 관계에서 배운다.

 

148 기억과 망각에 관해 다르게 생각해보고 싶다는 말은 사실상 우리가 진보와 성과를 표시하는 데 사용하곤 하는 불가피하고 유기체적인 듯 보이는 모델에 대한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며,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일어난 적은 있는지 주의 깊게 봐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어떻게 변화를 확인하고 알아차리는가? 변화가 모든 것을 끝장냈다거나(죽음) 변화가 아무 의미 없는 것이었다고(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음) 말하지 않고서 그것을 알아차리는 게 가능할까? 옛것을 버리지 않고서 새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시간과 변혁의 여러 구조를 동시에 고수할 수 있을까?

 

150 자신을 스스로 돌볼 수 없을 때 우리는 누구에게 의탁할까? 사회보장제도가 축소되거나 사라지고 직장이 연금 기금을 삭감한다면, 더는 일하지 못하게 됐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될까? 이런 각본에서 가족은 경제적 안정이 공공에서 사적 네트워크로 이동하는 가운데 유일한 자원이 되면서 새롭게 중요성을 갖게 된다. 두건과 킴은 게이 레즈비언 활동가들이 혼인권 요구에 매달리기보다 가구 구성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다른 진보적 가치들을 주장해야 한다고 제언한다.(대안적 친족관계)

 

166 도리는 니모의 어머니 대리자도 말린의 새 아내도 아니고, 그들 중 누구와의 관계도 기억을 못하며, 따라서 기꺼이 5분마다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낸다. 오랫동안 망각은 급진적 행동 및 현재와 혁명적 관계와 연관되어 왔다. 상황주의자들은 스스로를 망각의 파르티잔이라고 이해하며 과거를 잊고’ ‘현재를 살아간다.“ 게다가 그들은 망각이 과거를 갖지 못한 채 선택지라곤 오직 항상 지금이 아니면 결코뿐인 프롤레타리아들이 가진 무기라고 여긴다.

 

247 4으로 들어오는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틀리고, 잃고, 지는 것에는 무언가 강력한 힘이 존재하며, 우리가 각자의 실패를 한데 모은다면 잘 연습해서 승자를 충분히 끌어내릴 수 있음을 알려준다. 실패를 연습한다는 개념은 어쩌면 우리가 내면의 좀생이를 발견하고, 부진아가 되고, 기준에 못미치고, 정신 산만해지고, 우회하고, 한계를 만나고, 길을 잃고, 잊어버리고, 장악하지 못하며, 벤야민의 말대로 승자에의 감정이입은 예외 없이 지배자를 이롭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할지도 모른다. 모든 루저는 앞선 루저들의 계승자다. 실패는 다른 실패를 환영한다.

 

269 저는 삶이란 어려운 것이며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행복 추구에는 전혀, 결단코 조금의 관심도 없습니다. 긍정성 추구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관심 있는 건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고, 그 진실은 종종 행복보다는 그 반대의 것에 가까워 보입니다. 킨케이드의 소설은 실제로 해피엔딩을 내놓지 않는다. 그는 식민주의가 가능성을 제거해버린 탓에 결코 번영하거나 사랑하거나 창조할 수 없는 캐릭터들을 형상화함으로써 식민주의 서사에 섬세한 음영을 그려낸다. 킨케이드는 이런 말을 끝으로 인터뷰를 마친다. “모든 사람을 조금 덜 행복하게 만드는 게 제 임무처럼 느껴집니다.”


 볕뉘


1. 작은 책방에서 세미나 책으로 선정했다고 들어서 사들인다. 최신 만화영화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기도 하다. 니모, 치킨 런, 윌리스와 그로밋, 스폰지밥,로봇, 헷지, 몬스터주식회사, 꼬마돼지베이브 등등


102 픽사 반란 영화들은 주된 관객이 어린이라는 점, 그리고 어린이는 어른이 몰두하는 것에 별로 관심 두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는 듯하다. 어린이들은 커플을 이루지도 로맨스를 품지도 않고, 종교적 도석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죽음이나 실패를 겁내지 않고, 다만 집단적 존재이며, 지속적으로 부모에게 맞선 반란 상태에 있고, 자신들의 영역세서 주인이 아니다. 아이들은 실수하고 갈팡질팡하고 실패하고 넘어지고 다친다. 아이들 주변엔 온통 다름이 있으며, 아이들은 자신의 몸을 통제하거나 삶을 책임지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닌 스케줄에 따라 살아간다. 픽사반란 영화는 꼬마들을 위한 승리의 애니메이션 세계를 선사하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비지니스 세계와 어머니의 가사 영역에 맞서는 혁명이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 행간행간 사이사이 굴직한 사상서들의 징검다리가 있기도 하다.


2. 실패할 권리, 모임에서 나갈 권리를 이야기하기도 하는 움베르또 마뚜라나의 책은 또 다른 결이기는 하지만 그 연장선상에서 읽어도 좋을 책이다.  


3. 실패에서 앞서 작은 실수들의 기쁨을 맛 보는 법도 아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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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달, 잔 일들이 많았지만 글들도 읽힌다 싶다.  행사를 마친 하순 무렵 에밀 시오랑과 한강을 함께 읽는다. 절망과 우울이 사로잡는다. 사로잡힌다. 견뎌내기가 힘들다. 하지만 나이가 갖는 힘일까 저자들이 말하는,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뾰족하고 명확하게 읽힌다. 불면과 우울에 갇혀 있는 사람들. 아픔이 도처에 서려있더라도 한 번 두 저자의 고통을 직시하는 모습을 살펴보길 바란다. 


뚫고 나온 뒤, 읽고 난 뒤 스스로 성숙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란다는 말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으리라. 아주 조금이더라도. 다른 독서와 깊이가 다름을 알아챌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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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볕뉘.


긴 작업의 끝. 무진, 무진장 더운 여름의 끝에서야 작업의 말미가 보인다. 뭉게구름을 그리다나니 뭉게구름과 먹구름이 번갈아 하늘을 메우는 나날이기도 하다. 어느 순간 작업이란 터널에 갇혀 깊숙히 깊이 볕이 보이지조차 않는 여름을 헤메인다. 불쑥불쑥 나날이 마친 작업분들은 새벽이면 어김없이 악어처럼 입을 벌리고 문다. 그렇게 '사부작'이란 단어조차 모르던 길을 지나, 사부작사부작 하루를 채운다. 하루하루 무엇인가 그리며 바위를 올린다. 끝인 줄 알았지만, 그저 한 고개만 넘었을 뿐이다. 그러던 터널에도 볕이 든다. 밀리던 몸은 이제서야 일 앞으로 몸을 숙인다. 물려 통증에 시달리던 새벽도, 소풍가는 날처럼 설렌다. 그랬다. 말미는


오랜 고요의 끝에 바닷가 작은 서점을 들러 시집을 한보따리 싼다. 며칠이면 읽을 줄 알던 그 시의 집들이, 아니 좋아하는 시인들의 등대는 여전히 깜박깜박 빛을 비추인다. 흩어진 삶들의 항해를 먼 시선으로 품는다. 


참고 읽는 시인들은 여전하다. 웅숭깊은 맛은 여전하다. 조금씩 조금씩 낯선 항해의 끝을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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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마지막 코멘트

 

 

캉길렘은 잘 알려진 단절에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유래와 연속성 또한 추적하였다. “이건 어디서 왔지?” 강박적으로 반복되던 이 질문은 때로 우리를 몇 시간 동안이나 단 하나인 문단에 붙잡아 두었다. 137

 

치열하게 사유하는 것캉길렘이 심어 준 윤리는 게으른 사유의 경향을 거부하는 데 있었다. “악은 본질상 게으름인 이기심이다. 게으름은 쾌락의 추구와 노력으로부터의 회피라는 두 측면을 지니고 있다. 행동한다는 것은 이 게으름과 싸우는 것이다. 다른 모든 행동은 기만적이고 덧없다. 우리가 세상에 홀로 남더라도, 그리하여 주변에 아무도 없고 우리 자신에게 부과되는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더라도, 법칙은 동일하게 남아 있을 것이며, 진정으로 산다는 것은 항상 삶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일 터이다.” “고통을 견디기보다는 삶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면에서 회의주의는 옳다. 세계과 자신을 난해하게 만드는 것이며, 혼돈을 선언해야 한다. 그런데 혼돈은 아무 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과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할지말지, 선택해야 한다.” 145

 



3장 역사적 인식론?

 

바슐라르 저작의 본체를 구성하는 세 가지 공리. 1 진리는 얻을 수 없다. 다만 제1 오류들만이 있을 뿐이다.“ 첫 번째 공리는 오류의 이론적 우선성에 관한 것이라고 정식을 인용하며 쓴다. 또 다른 정식 직관들은 파괴당하는 역할을 맡는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하다로 표현될 수 있는 두 번째 공리는 직관에 대한 사변적 평가 절하에 관한 것이다”. “세 번째 공리는 관념의 관점으로서 대상의 지위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실재를 구성해야 하는 필요성 그 자체로부터 실재를 이해한다. 우리의 사유는 실재로부터 줄발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 향한다.” 70-71

 

오류는 무력함이 아니라 힘이며, 몽상은 연기가 아니라 불꽃이다라고 쓸 수 있었다. 능동적 연구에서 오류는 증식한다. 오류는 사유 그 자체에 원천을 두고 있다. 오류들은 욕구, 이미지 그리고 몽상을 관념으로 변환한다. 사유는 자신을 지배하는 동요를 모면했을 때에만 지식을 향한 여정에 가담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새로운 기예를 요구하는 과학사가 나타난다. ” 이 역사는 더 이상 자연사와 마찬가지로 전기들의 모음, 학설에 대한 묘사가 될 수 없다.“ 이 역사는 합리적 가치가 어떻게 과학적 활동 자체를 이끄는지를 보여 주는 개념적 계보의 역사가 된다. 71 바슈라르는 이제껏 하위 범주에 속해 있었던 상황에서 과학사를 끄집어 내 일선의 철학 분야로 끌어올림으로써“ ‘과학사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쇄신했다고 평가한다. 72

 

과학의 논리와 철학 세션의 논문 <17, 18세기 반사 개념의 형성>에서는 낡은 역사(생리학에서 데카르트적 기계론의 역사)와 승인된 역사(생기론의 전통 역사)를 구분할 수 있게 하는 개념적 계통의 역사를 쓴다. 73

 

데카르트는 모든 의학적 실천의 외부에서 의학 이론을 만들었다. 그는 정상적인 것으로부터 병리적인 것으로 나아갔다. 윌리스는 병리적인 것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그는 생명적 운동의 원리와 원천에 대한 거의 시적인 직관에 가까운 유비 추론 능력으로 거의 대부분을 사로잡는다. ”유비의 힘 덕분이다. 윌리스는 생동이자, 임페투스(관성)이며, 불관성에 반하는 노력으로서 생이 빛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것이 그에게 빛의 법칙에서 생의 법칙의 본보기를 발견하는 것이 자명해 보였던 이유이다.“ 이처럼 생기론적과학자의 전통은 윌리스로부터 프로체스카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중요한 것은 임상으로부터 출발하여 생을 현상의 고유한 질서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78 바슐라르 <<불의 정신분석>>참조.

 

테일러주의적 합리화는 노동계의 저항을 야기하면 그 실천적 한계를 드러낸다. 여기 실패의 저변에는 이론적 오류가 자리잡고 있다. 자기 삶의 모든 의미가 박탈당하지 않는 이상 사유하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이 사유를 통해 자신의 고유한 환경을 구성하는 생명체인 인간 개체의 특수성을 무시한 것이다. 그래서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적 오류를 보여주는 증거인 것이다. 82

 

<<방법서설>> 출판 300주년 기념 학술대회 데카르트와 기술에 대한 발표에서 과학 덕분에 자연의 교수이자 선생님이 된 인간이 필연성에 대한 지식을 능력으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이 기획은 자연에서 모든 목적성을 제거하고, 영적 차원을 완전히 부정하고, 물질에 질적인 것은 없다고 이해한 후에만 세워질 수 있는 기획이라고 말한다. 85

 

과학은 기술로부터 생겨난다. 그러나 이는 참이 유용한 것의 체계화, 성공의 기록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기술적 곤경, 불완적한 성공, 실패가 정신으로 하여금 인간적 기예를 통해 마주친 저항에 문제를 제기하게 하고, 마주친 장애물이 인간의 욕구와는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며, 참된 지식에 대한 탐구를 촉발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86

 

기술의 주도권은 생명체의 요구 안에 있다. 이 요구를 전달하는 충동은 이론가의 허가를 기다리지 않는다. 기술은 창조로서 사유되어야 한다. 과학의 문제는 과학의 영역에서 해결될 수 없다. 과학은 기예의 관점에서, 그리고 기예는 생명의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기술이 과학에 우선한다. 기술중심주의적 의미가 아니라 과학적 사유의 비약적 발전의 조건은 기술의 실패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과학은 제작하려는 충동이 마주치는 실패와 장애물에 대한 반성으로서 나타난다. 열역학, 파스퇴르 이론, 탄도학 문제를 사유한 갈릴레이까지 차고 넘친다. 87


볕뉘.


팔월의 끝. 진행중인 작업. 쉼이 필요한가. 쉬어 주어야 하는가. 불안증이 몸을 덮고 있다. 작업실을 달리 세팅하고 스토리라인을 만들어둔 것이 출발하기 전 날이다.  진도는 아주 조금씩 작업실에 거처한 만큼만 나간다. 


다녀오자. 찾던 책도 둔 곳이 어디메뇨 헤매이다 식수냉장고 곁에 꽂아둔 걸 발견한다. 오고가는 길. 오늘에서야 두 권을 마저 읽다.


 다시, 세 권을 주문 넣다. 


현대미술관 청주 수장고 전시를 보다가 얻은 아이디어를 구겨 넣어보니 괜찮다. 또렷하게 시간과 작업을 채워넣으면 된다. 뫔이 많이 편해지고 있다. 횟수만큼 마무리된다고 여기고 나니 말이다.  내일은 구월의 이틀. 사흘.


많이 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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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주말 그림작업중에 후배지인에게서 연락이 온다. 몸을 담았던 단체에서 강연자로 소개한 책이기도 해서 관심있었는데, 곡 읽어보라는 전갈이다.  한 선배에게서 근황을 들었던지 이러다가 이곳 지역사람 되는 거 아니냐고 농담한다. <신곡>이 아니라 접근하고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 감탄스럽다고 다짐을 넣는다.







둘.


 풀은 꿈을 꾸는가? 근래에 불쑥 스며든 생각은 도망치지를 못한다. 살아있는 것들은 생명이라고 하자. 그러면 그 생명체는 잠을 자는 동안 어떤 형태로든 쌓인 것들을 풀게 되어있다. 사람들이 꿈에서 그러한 일을 하는 의식작용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마 꿈도 꾸지 않을까? 그렇게 이름을 붙여야 될 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형태로든 긴장을 푸는 기능들이 있을 것이다. 아메바도 그런가하면 답은 그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어디쯤에선가 그런 책은 나오지 않았을까하고 더듬어 본다.  여러 해, 아니 십년 전쯤에 <들풀>이라는 주제로 책들을 읽었던 적이 있다. 저절로 손이 가는 책이어서 이렇게 손을 뻗는다.




셋. 동결견, 오십견, 관절낭염이라고도 하는 윗옷을 벗기도 힘든 증상이 나타난지 몇 달이 지나고 <어깨동무>라는 한의원에 들렀다. '동결되었다'는 표현이 괜찮았다. 잘 녹혀주면 된다고 말이다. 그래서 3주 진단이 나왔고 하루이틀 지나서 뒤쪽 회전말고는 다 좋아져서 한의사도 놀라는 눈치였다.  <<바디 멀티플>>이란 책은 <동맥경화>를 '중첩'되게 다룬다. 의사, 영상파트, 한의원, 환우, 연령별 차이를 두고 각기 다른 입장에서 이 병을 쫓아가다보면 우리가 하나에 지나치게 권위를 위탁하고 몰아간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러다가 정답같은 것이 없다라고도 느낄 수 있으나 결국 '하나 더하기 여럿 '이라는 판단력이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캉길렘은 알튀세르, 발리바르 등등 프랑스 이론 산실의 거장 은 아닐까. 사유의 풍요로움은 거기서부터는 아닐까. 과학사와 철학사의 겹치게 볼 수 있는 <<조르주 캉길렘>>을 빨리 완독하고 있지 못하다. 이 번 주문한 책으로 겹쳐 소화할 수 있기를 빈다.  어깨가 말렸고, 수직에서 떨어져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날개뼈 아랫근육을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잔근육들을 풀어주면서 살지도 못한다는 습관들이 통째로 걸려있다. '멀티플'하게 증상과 치료효과를 보는 지금에서야 폼롤러를 끼고 있다.












<<과 교환양식>>을 보다가 어 고진이 이런 면이 있었어 한다.  이 책은 무척이나 오래된 책이기도 하다. 고진 책들을 바리바리 싸서 대전 대동 작은 책방에 건네준 적이 있어, 이젠 수중에는 없다. 그의 삼부작은 이 두 권 외에 한 권이 더 있다. 다시 읽어내야 한다. 칸트의 초월성와 마르크스다. 이제는 많이 만만해지기도 하다. 새롭게 읽어내는 기회가 왔으니 충분히 즐길 일이다. 기대된다.







 다섯


 신양객잔 주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강좌를 진행중인 것을 잘못 알아들었다. 프랑스 유학 경험을 듣고 르페브르 전공자의 강연이 있다는 걸 이 분으로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생활세계의 혁명성에 대한 몇 권의 책들을 인상깊게 읽었는데, 지금 다시 읽혀야 할 부분을 나누고 있다는 것이 대견하게 여겨지기도 하다. 이 또한 십여년도 지난 일이지만 지금이 오히려 <혁명>이라는 말에 더 신경이 뾰족해지기도 한다.









볕뉘


이렇게 읽지 않은 책들을 소개한다. 작은 책방에 주문한 책들이고 즉시배송이 아니라 찬바람이 부는 날, 라이딩으로 들르면 이 책들이 배달와 있을 것이다. 그런 기다려주는 행운을 펼치는 기분 또한 새로울 것이다. 그러면 한결 더 흥미롭게 저자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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