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을 먹자. 

편을 먹자. 같은 편.

 

창과 방패를 파는 상인은 있다. 그럴 수도 있지 한다. 그날 그때그때 달리 하면된다. 사는 사람도 수긍한다. 하지만 창과 방패를 모두 가지고 있는 집단이 아직 세상에 남아 있다. 힘이 어마무지 하여, 그 아래 신민들은 창을 쓰고 방패 가운데 무엇을 써야하는지 고를 수가 없다. 바라보는 무리들은 정작 먹고사느라 쓴 것이 창인지 방패였는지, 창고에 처박아뒀는지 알 길이 없다. 그들은 시간을 거느리고 있다. 잊혀져가는 것들에 대한 예민함이 필수이다. 망각을 지배한다. 잊히는 때를, 묻히는 때를, 뭉개는 때를 가늠하는 유전자들이 생겼다.














그들에게 사상이라는 것이 있을까. 동일체다. 짬짜미를 할 수 있다. 어쩌면 뿌리라는 것이 있다. 그 연원은 멀리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감옥의 탄생이전까지. 화형을 하고 효수형에 처하고, 그렇게 보여주기 식에서 푸코가 무슨 연유인지 특별한 경로를 갖지 않고 생긴 감옥들의 탄생을 이야기한다. 더불어 그들의 생리를 짐작하게 하는 무엇들이 더해진다. 기득권에 반하는 행위에 대한 규제들. 이곳엔 이런 처리엔 독점과 월권이 필요하다. 그런 조항들을 하나하나 챙겨 삼킨다.


예전의 사상범들은 감옥에서 책도 보고 가족들과 같이 생활하기도 했다. 거리의 단두대란 교육효과가 아니라면 그 이면의 통제는 느슨했다고 볼 수 있다. 아시다시피 감옥과 사상통제가 심해지면서 별의 별 법들이 촘촘해지면서 옥죄였다고 할 수 있다. 치안유지법, 국가보안법, 일제치하와 미군정, 해방이후 보수수구정권들 틈새에서 이렇게 기괴하게 자랄지 누가 알았을까? 


하지만 이들도 치명적인 단점들이 있기도 하다. 조직문화는 섬과 같다. 주변환경에 적응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오르는 길만 관심이 있지 내려가는 길과 그 방법에 대해서 무지하다. 그 집단자체가 말로를 인지하는 능력이 부재하다. 한번도 제대로 실패한 적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희망과 현실의 차이는 격차가 크다. 그들의 명멸을 맘졸이며 지켜봐 왔지만, 그들의 치졸함이란 법이라는 자양분 앞에서 끝이 없다. 안하무인이라는 괴물과 법망을 모조리 들어삼킨 죄는 헌법마저 삼켜버린 것은 아닐까? 그러니 그들의 그들의 말로를 무속에 기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자멸하는 순간에 그들의 거대한 대교가 무너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스러져가는 힘을 부여잡고자 하는 거대한 군상들 역시 그들을 닮아있다.



볕뉘.


1.


새벽 눈이 떠지자마자 폰을 들여다본다. 라이브를 검색하자 다 지난 라이브다. 아무 일 없다. 권력이 가진 힘이 얼마나 무지막지한가를 새삼느낀다. 되지 않게 하려면 속속들이 곳곳에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힘만 가지면 된다. 안면몰수하고 생까면 움직이기 마련이다. 무속이든 극우든 상관없다.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이게 탄핵정권의 현실이자 민낯이다. 날조와 거짓의 정점으로 버무린 세상을 덮고 사는 사람들과 집단들은 정권 탄생 전부터 민주주의를 잃었다. 맹신과 맹종과 배제와 한 자리 차지하려는 권력욕많이 끊임없이 그 윗자리를 갈아치울 뿐 허리와 밑은 만신창이가 된 지 무척 오래다.


모든 자리들을 박근혜탄핵반대의 태극기부대가 메운 지경이다. 검사들의 나라. 검사들의 정서와 세계관. 신의 양검을 모두 쥔 나라. 그들은 신이자 하느님과 동격이시다. 무결점의 선구자이시며 떠다니는 태양이시다.


왜 부끄러움은 그들 몫이 아니고 우리 몫이어야 하나. 


2.


거대한 뿌리가 썩기 시작한 지는 오래다. 자멸의 길은 반갑기만 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 썩은 부위도 다 도려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들이 퍼먹던 온갖 물들도 청소가 필요하고 소제가 있어야 한다. 급한 일이 아니라 천천히 한 수 한 수 짚어 그 싹들이 올라오지 않게 하는 일들도 헌법을 수호하는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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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인을 하려고 하니 자동입력방지번호가 뜬다. <0927> 숫자의 조합이 낯익다. 밤바다를 바라보며 묵었던 오피스텔 숙소의 비번의 배합이다. 출입구 비번도 외우기는 어렵지 않다. 여수-순천-경주를 경유해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천재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 비범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 일상의 기법에 대한 이야기다. 늘 시작하는 가운데 하나는 자폐인데, 아니 신경다양성에 대한 얘기다. 그들은 왜 천재인가. 그레고리역의 요일을 맞추는 음악인에게 묻는다. 이건 설명하기가 어렵다 한다. 대부분 설명을 하면 듣다가 포기한다는 것이다. 이 친구는 몇년 몇월 며칠은 무슨 요일? 묻자마자 이십여초도 되지 않아 답이 나온다. 끝끝내 설명을 들으려는 친구의 인내 곁에 머무르다가, 아, 이 친구는 외우기위해 엄청난 방법의 수련이 있는 거구나 했다.


여러 기억술과 암기술이 있다. 정말 그럴까. 그런데 왜 나이가 들면 그러지 않을까. 천재임이 틀림없어.


내가 경험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얼굴 드로잉에 관한 것이다.  척 보면 알 수 있다고  아니다. 드로잉 책을 보면 그 기법이 요란하다. 사진의 필름처럼 역으로 테두리를 음각과 양각으로 본다던가 선의 모양에 갖가지 문양으로 기억해두는 것이다. 


9027을 이렇게 기억해본다. 묵은 숙소가 205호다. 902^ 거꾸로 ^209호로 암기한다. 1334란 비번은 13세에서 34세까지 134세라니 이런 잇기를 순간적으로 가감해두는 것이다. 계좌번호를 잘못 외우긴 하지만 못외우는 건 아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 건 아니다. 시 한편 소개하려고 이 서설을 하다니


후면번호판단속중


서진배


지났다고 끝이 아닙니다

지난 뒤를 단속합니다


사람에 다가갈 때 주의했죠

침을 삼키고,

웃어도 보고,

속도를 참았죠

사람을 지난 뒤 더 주의해야 합니다


뒤를 안심합니다

뒤를 방심합니다


뒤와 너무 빠르게 멀어지지 말아요

뒤와 너무 빠르게 헤어지지 말아요


뒤가 나를 따라오게,

뒤가 나를 느리 잊게,


다가와 다치는 것보다 멀어져

다치는 게 더 아프니까요


다치지 않게는 헤어질 수 없습니다

천천히 다치게

느리게 다치게

헤어지세요


당신의 뒤에서

혼자 

헤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신은 더디 오더니 빨리

멀어집니다.


볕뉘


마라톤을 빌미로 하루 일찍 여수 돌산대교를 건너 향일암으로 향한다. 관음전 아래 원효좌대에 한참을 머무른다. 마라톤을 마치고 여수서시장 로타리식당에서 여수막걸리와 백반은 이루말할 수가 없다.


10k 58'21" 얼마만의 기록인가!! 


장도전시관에서 일년 반전 다녀간 한강의 자취도 만나다.


다녀와 뚝딱 시 한편을 건네는 시인의 시집도 기대된다. 남탕시리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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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개념적 질문이 '인간이란 누구인가?라는 개인적 질문으로 바뀌었다. 그럿을 실현하기 위하여, '무엇'을 사용하여 개념을 얻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더 이상 '누가'를 사용하려는 질문은 전혀 없다. 오히려 대답은 질문하는 사람 그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있다. 질문 자체가 스스로 답한다.  171





















나는 내 힘의 소유자이다. 그것도 내가 자신을 유일한 나로 알고 있을 때 그렇다다. 유일한 나 속에서 소유자 자신은 자신이 태어난 창조가 깃든 무로 되돌아간다. 172


그는 이 책을 인간답지 않은 인간에 대해 쓴 것이다. 175


볕뉘


1.


이렇게 전문 연구자와 번역자가 있는 줄 몰랐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도 번역이 되어 있다.  홀로 책읽기 가운데 슈트리너는 터럭 하나의 양주도 생각나게 하

지만, 청년 마르크스와 많이 겹치는 인물이다. 청년마르크스라는 영화도 그렇고 고병권의 자본론 읽기에도 나오는 아나키스트에 대한 과도한 반대와 관련되어 있다. 프루동 뿐만 아니라 그 인물 가운데 하나가 막스 슈트리너다.  슈트리너는 정작 보지 못하고 죽은 독일이데올로기는 이 인물에 비판하기 위한 책이기도 하다.


2.


하지만 후기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도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나 인간이란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느 하나로 규정짓지는 않았다.  청춘 마르크스의 저작들을 읽을 때, 공산당선언뿐만 아니라  독일이데올로기 역시 무언가 발언해야 하는 과도함이 많이 스며들어있다.


3.


이 책에서도 말하지만, 아나키스트의 원류이기도 하다. 세 명의 비평가들 중의 포이에르 바흐이기도 하다.

협동조합의 역사에서 살필 듯이 커다란 사회주의 흐름의 역사는 아나키즘과 따로 분리할 수가 없다. 면면히 흘러오는 뒤섞이는 흐름들로 보아야 할 것이다. 


빠른 니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저작도 나왔으니 세심히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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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국체를 부정하는 자들이 여기저기 출몰하고 그것을 받아적는 무리들의 호흡이 거칠다. 법이 아니라 법 사이사이를 빠져나가는 자들이 법을 물려고 안간힘을 쓴다. 언어도단이 아니라 법치도단이자 절도다. 그들은 알고나 있을까. 아둥바둥 거대한 물길을 막으려고 애써 보았자 더 큰 강물이 흘러오고 있다는 걸 말이다. 모든 것들이 기승전결이다. 목숨을 재촉한 자들이 마치 국민들을 위해 무엇을 했던 것처럼 틈틈이 요란하다. 입법을 하지 않고, 다른 당에 의해서 입법행위가 이루어지면, 국회의원이 거주하지 않는 지역구 네거리에는 자기가 해서 통과된 것처럼 거짓을 일삼는다. 아마도 몇 개월을 지나 몇 년이 지나야 될 것 같다. 무엇을 잘못했는가. 내란을 하고도 그 내란행위를 옹호하는 무리들을 잡아쳐넣지 않는 공권력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들은 모르리라.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이었다는 사실과 불을 지피는 마지막 불쏘시개였다는 일도 말이다. 


세상은 그렇게 접힌다. 




















볕뉘


주말 책방에 들러 차 한잔하다가 손에 넣는다. 쥔장과 현 시국을 논하다.  유튜브 라이브를 끼고보다나니 잠이 제대로 오지 않는다. 독서등에 책들을 펼치고 읽어본다. 이러다가 잠을 놓치겠다 싶다. 일터뿐만 아니라 세상은 이리 들쑥날쑥이지만 난, 우리를 믿는다. 단지 시간이 조금 길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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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배리어가 모래밭이었다면

며칠 반복되는 화면과 장면이 마음에 박혀 빠져나오질 않는다.  한 분이라도 더 살아돌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바램은 정년 뒤 본 항공사를 다니는 친구에겐 어려울 걸세라는 답으로 돌아왔다. 미리. 


알 수 있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 그런 것들이 시간으로 채워져 있다. 오늘도 그런 시간들로 메꾸어진다.  


국회가 넘긴 일들을 행정이 미루지 않고 거부하지 않는 것이 원활한 흐름일 것이다. 매끄러운 흐름을 거부한 정권과 여당은 여전히 몽니와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 이명박정권부터 아전인수의 방송법은 언론과 미디어를 괴물로 키워놓았고, 거기에 심리적 안도감을 느끼는 무리의 시민들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한다. 하나씩 잘못 맞추어진 아귀는 다시 맞추면 되는 일이다. 좀더 시간을 길게 잡으면 제자리를 잡을 것이다. 


자기만 아는 부류들의 말로를 우리는 어김없이 직시하고 있다. 그 소멸하는 권력을 부여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부류들도 알고 있다. 한치도 어김없이 법에서 벗어나는 말종들은 법의 이름으로 행위를 멈추게 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시류와 세상에 분탕질을 하는 인간들은 늘 있어왔다. 자기만 봐달라고, 주변을 전혀 살필 줄 모르는 인간들 역시 늘 있어왔다. 


촘촘하게 자신의 손톱만한 이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부류들. 쥐어짜내다가 자신의 손과 발을 잘라버리는 인간들. 


자본주의 사회에서 왕정을 꿈꾸던 자.

생명과 안전이라는 장벽을 허물려고 하던 자.

조그마한 이익을 더 손아귀에 쥐려고 시스템을 쥐어짜는 자. 모두 한 통속임을 잊지 말기를. 더 이상 그런 자들을 곁에 두지 않는 사회가 되길 세밑에 기원해본다. 


배리어가 아니라 배리어가 아니라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도 생명과 안전이 숨쉬는 일상을 꿈꾸고 바래본다.


볕뉘


2024년 올 한해도 반갑고 고마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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