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모든 타인과 모든 시간을 껴안는 것이다. 395

[ ]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어디에서도 강연한 적도 강의한 적도 없고 공식 석상에 나타난 적도 없으며, 그의 호소 또는 목소리는 전적으로 글로 씌어진 작품에서 울려나오고 울려퍼진다. 이상하게도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떤 친구, 모르지만 가깝게, 더할 나위 없이 가깝게 다가오는 한 친구의 움직임을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증거하고 있듯이, 그 친구와 함께하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블랑쇼 자신이 반복해서 강조했던 ‘모르는 자에 대한 우정‘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블랑쇼는 작품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자, 1인칭 ‘나‘를 보여주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거리 아무 데나 흩어져 있는 이름 없는 자들, ‘그들‘로 하여금 말하게 했을 뿐이었다. ‘그들‘, ‘나‘라고 말할 수 없는 자들, 어떠한 1인칭의 권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자들, 다만 헐벗음으로만 그 권력을 거부하고, 그 권력에 저항할 수 있었던 자들. 필요하다면 결국 자신의 사라짐.지워짐을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침묵의 제3자들, 3인칭의 인간들. 284-285

[ ] 블랑쇼에 대해 말하고 쓰기 어려운 이유는, 개념적으로 붙잡을 수 없는 것, 오히려 예술 작품에서 살아 숨쉬는 어떤 것, 시간에 따라 순간 명멸하는 그것이 그의 사유를 이끌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사유는 아마 이데올로기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유일 것이며, 원칙적으로 가르치거나 전파할 수 없는 사유이고, 결코 무기로 사용할 수 없는 사유이다. 그것은 권력화될 수 없는 사유이다. 287

[ ] 블랑쇼는 사회 문화 정치이론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과 관계없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보다 정확히 말해 그가 향해 나아가는 지점은 모든 문화가 그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는 곳이다. 그 지점은 죽음, 병, 고독, 추방 등 한계 상황 가운데 ‘나‘의 자기 동일성이 의문에 부쳐지는 지점이다. 그 지점은 모든 문화의 바깥이며, 가치체계를 가능하게 하는 세계, 구성적 담론, 예술의 문화 사회적 의미, 나아가 인간의 모든 의식적 가치 부여가 무효가 되는 곳이다. 그 지점은 다만 인간의 유한성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장소, 불가능성의 장소, 죽음의 장소이다. ‘바깥‘, 문화 세계의 바깥을 말하는 블랑쇼의 사유는 일종의 비극적 사유, 세계에서 추방된 자의 사유이다. 그것은 나아가 하나의 이론 또는 담론에 가두어 둘 수 없는 오이디푸스의 신음이다. 293

[ ] 블랑쇼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서 바타유, 낭시와 함께 내재주의와 전체주의를 넘어서 있으며 전체의 고정된 계획을 갖고 있지 않은 공동체의 가능성을 찾는다. 공동체 없는 공동체의 가능성. 기구 조직 이념 바깥의, 동일성, 정체성 바깥의 공동체의 가능성.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바타유)의 가능성. 이러한 공동체에서 나와 타인의 관계, 나와 타인의 함께 있음은 개체의 확대로서의 전체의 실현이 아니며, 전체에 종속된 개체의 의식에 기초하지 않는다...나와 타인의 관계는 개체나 전체의 어떤 본질을 전제하지 않으며, 다만 관계 그 자체에 의해서만 발생하며 개체의 영역으로도 전체의 영역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우리‘의 존재를 드러낸다. 295/블랑쇼는 이 이루기 힘든 공동체, 동일성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고 동일자의 억압을 거부하는 공동체, 오히려 타자의 발견과 차이의 발견으로 역설적으로 지속되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 대한 요구가 나와 타인의 관계에서 취소될 수 없다고 본다. 나아가 이 공동체 없는 공동체에 대한 요구가 미래의 모든 정치적 구도의 설정에서 고려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타자와의 관계의 무한성이, 타자와의 관계가, 가시적인 계획 목적 기구 이념 철학에 따라 한정될 수 없음을, 고정화 사물화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296-297

[ ] 보다 높은 차원에서의 반사회성, 즉 상호간에 이익을 실현시키기 위해 협력하고 투쟁하는 개인들을 묶어 놓는 경제 원리에 입각해 있는 사회에 대립하는 반사회성, 우리의 내밀한 영혼에 호소하면서 경제적 차원 너머에서 삶의 의의와 죽음의 의의를 연결해서 소통의 통합 원리를 가져다부는 반사회성입니다. 그것은 이 세계에, 경제 원리에 종속된 이 사회에 대립하는 반사회성이지만, 보다 높은 지평에서 소통과 통합의 공동 영역을 연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동체성입니다. 299

[ ] 블랑쇼의 은둔은 너무 진부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정치적 현장에서든, 다른 곳에서든, 어떤 정치적 문제와 결부되었든 아니든, 말 또는 글로 언어를 제시하기 전에 자신과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304/그러나 자신과의 대화에서, 그것이 진정한 것이라면, 그 전제나 귀결점은 결코 자기의식의 확신이나 긍정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의식과 모든 의식을 ‘벗어나는‘ 타자에 대한 음악적 공명입니다. 가령 타자의 눈물을 듣는 것이고, ‘그‘의 침묵을 납득하는 것이며, ‘그‘의 절규에 대해 절규하는 것이고, 한마디로 타자의 몸짓에 응답하는 몸짓입니다. 자신과의 대화는 어쨌든 실존의 익명적 공간에, 즉 ‘나‘의 것도 ‘너‘의 것도 아닌 공동의 공간에 기입되는 것이고, 거기로 열리는 것입니다. 305

[ ] 그의 은둔...결국 그가 문학을 통해 그 침묵을, 문화가 배제된 진공이 아니라 문화의 여백 또는 빈 공간인 언어의 자연을 최대한도로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 그의 이론이 아니라 그가 그 자연을 보존하려는 투쟁이 그의 글쓰기에 설득력을 줍니다.) 그가 은거했던 이유는 작가로서 그가 가질 수 있었던 문화적 사회적 권력을 최대한도로 무화시키면서 적극적으로 그 언어의 자연 스스로가 말하도록 내버려 두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309

[ ] 기다림 망각(언어의 현전): 그녀의 ˝부동의 현전˝은 보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진공의 무가 결코 아니며, 부정할 수 없게 그를 가로질러 가는, 오직 들을 수밖에 없는 ‘말parole‘로 나타난다. 따라서 그녀는 그들의 관계가 온전하게 남아 있도록 하기 위해 그를 무한한 기다림 속에 놔두고, 그에게 ˝저는 당신에게 말하라고 요구하지 않아요. 들으세요. 다만 들으세요.˝라고 요구할 수밖에 없다. 어떤 현전은 시선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 다만 들을 수밖에 없는, 사실은 보이지 않을 뿐더러 귀에 들리지도 않는 ‘말-음악‘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망각은 백지를 회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음악을 듣는 것이다. 325

[ ] 보이는 것과 말하여진 것 사이에, 봄과 말함 사이에, 본 것과 기호들 사이에 진공의 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직선 위에서 움직이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의 응축과 현전이, 즉 음악이 있다. 그 사이의 분리를 가져오는 언어는 다만 기억 속에 굳어진 죽음만을 초래하지 않으며, 그 분리 가운데에서 그 분리를 전응의 영원이 되지 못하게 만드는 순간의 현전을 가동시킨다. ˝현전은 다만 분리 속에 있지 않다. 현전은 분리 한가운데에로 또 다시 도래하는 바로 그것이다.˝ 331

[ ]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침묵은 기다림의 망각에서 나타나듯 완전히 언어를 차단하고 맹목적이거나 기계적으로 입을 다문다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흔히 말하듯 ‘비굴하게 입을 다문다‘는 것이 아니다. 말해야 하며, 나아가 말로 절규해야 한다. 그러나 말과 절규의 배면에서, 들리는 말과 들리는 절규가 아닌 침묵이 말해야 한다. 침묵은, 즉 인간의 침묵 또는 언어의 침묵은 백지 상태로 돌아가거나 백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어들의 열림이자 언어를 추진하는 동력이며 언어의 진정성을 보증하는 음악이며, 도한 말하는 ‘나‘와 타자를, 언어에 함께 연루되어 있는 글 쓰는 자와 독자를 잇는 통로이다. 335/ 그는 말을 한다는 것과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떤 시점에서 관계에 내맡겨질 수밖에 없는 ˝주사위 던지기˝(말라르메의 표현)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궁극적으로 언어를 통해 ‘나‘를 주장할 수 없고 오히려 ‘내‘가 바깥으로 뒤집어지고 ‘나‘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아가 언어가 규정된 사회적 관계를 넘어서는 단수적 관계 자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공동의 어떤 자이다. 336

[ ] 한 어린아이: 헤겔에 의하면 인간은 ‘아픈 존재‘이다. 이는 인간이 내적으로 자기 자신과 분리되어 있는 동시에 외적으로도 주어져-있는-존재(자연)와 분리되어 있으며, 그러한 한에서만 인간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고독, 언어가 만들어낸 고독, 인간의, 인간만의 고독, 그렇기 때문에 바타유는 코제브가 헤겔의 죽음에 대한 사유를 성찰하면서 내놓았던 해석을 다시 해석하는 자리에서 ‘언제나 의식 배후에 있는, 죽음의 슬픔˝이라고 썼던 것이다. 354

[ ] 바깥이 주는 공포, 또는 카오스의 글쓰기의 표현대로 ˝카오스의 위협˝. 사회로부터의 배제나 병듦이나 사랑 우정의 상실이나 경제적 토대의 붕괴나 정치적 사회적 아노미 상태의 경험 또는 블랑쇼 자신이 부각시킨 글쓰기의 시련과 같은 ‘심각한‘ 계기가 개입되는 상황에서 각각의 계기가 강요하는 어떤 특정한 고통(몸의 고통, 배고픔의 고통, 심리적 고통)은 존재론적(실존적) 고통으로 덧난다. 말하자면 바깥의 자연 또는 바깥이라는 자연은 ‘나‘의 모든 언어를 와해시키고자 하고, 그에 따라 ‘나‘의 의식적 자아를 붕괴시키려고 하지만, ‘나‘는 자신의 자아를 붙들고자 하고 보존하고자, 즉 ‘나‘의 언어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자연과 문화 의식 사이의 틈(구멍, 심연) 속에 끼어 있는 찢긴 존재..356/굽어보면서 성찰할 시간을 확보한다는 것, 즉 시간 사이의 차이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시간의 시간성의 전개, 따라서 죽음의 시간성의 전개, 죽음의 유예, 죽음을 통과해 나가는 의식적 삶의 전개, ˝동물은 죽어간다. 그러나 동물의 죽음은 의식의 생성이다.˝ 만약 언어가 없었다면, ‘나‘는 기억의 지배를 받지 않았을 것이고, 시간의 시간성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며, ‘나‘의 종말, ‘나‘의 결정적 죽음을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359

[ ] 입이 틀어막힌 그 어린아이가 이제 ‘나‘를 대신해 ‘말하기‘ 시작한다. 즉 침묵을 침묵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침묵의 현전으로서의 말, 모든 말의 원천으로서의 침묵, 모든 말의 근거를 되묻는 말, 이번에는 ‘그‘가 ‘나‘의 입을 틀어막고 침묵을 강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언재나 죽어 있었던, 이미 죽은 줄 알았던 그 어린 아이가 ‘내‘ 안에서 다시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절규 또는 죽은 자연의 침묵, 죽은 자연이 또다시 빠져 들어가는 침묵, 침묵의 침묵, 침묵으로 또다시 열리는 침묵. 371

[ ] 이론적 전체성을 믿고 추구했던 사상가들의 경우에도, 언어의 부정성이 갖는 한계에 대해, 진보 게몽을 향해 무한히 나아가는 언어의 부정성이 진보 계몽과 무관한 인간 안의 ‘자연‘과 불화를 일으키는 지점에 대해 탐색해 보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그들이, 이론의 구축과 담론의 변증법적 완성 완결에 대한 열정에, 관념들의 확실성을 믿고 실현시키려는 광기에 눈먼 언어들이 자신들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러한 언어들 자체로 인해 스스로 자신들 안에 어떻게 갇히게 되는지 되돌아보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377/ 가령 ‘내‘가 눈앞에서 여기 지금 고리치면서 짖고 있는 새까만 작은 이 개를 ‘개‘라고 부르자마자 ‘나‘는 세상에서 유일한 이 개를 즉시 ‘일반적인 개‘로 ‘네발짐승‘ 또는 ‘동물‘로 즉시 변형시킨다. 바로 여기 지금 생생하게 나타나는 단수적인 존재자를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하나의 관념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언어가 살해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이다. 379

[ ] 나르시스를 이미 언제나 죽어 있는 경이로운 어린아이라고 보면서 블랑쇼는 포장하고 왜곡시키는 모든 가상을 걷어 내고 바로 벌거벗은 타자, 우리 모두의 타자에게도 접근한다.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든, ‘우정‘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든, ‘효심‘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든, ‘형제애‘라 부를 수 있는 것이든 어떤 벌거벗은 관계에서, 죽은 그 어린아이가 죽은채로 ‘우리‘의 죽음 가운데, ‘나‘ 아닌 ‘그‘ 또는 ‘그 누구‘의 죽음 가운데, 즉 불가능한 죽음 가운데 되살아난다. 그 죽음을 통해 그 어린 아니는 자신의 맨 얼굴을 드러낸다. 카오스의 경험, 그 경험될 수 없는 경험, 바깥에서의 시련, 바깥이 가져다주는 시련. 387

[ ] 그 어린 아이는 관계 내에 공간적 현전도 의식적 현전도 아닌 시간 자체의 현전으로 현시된다. 다시 말해 과거와 미래의 응집과 산개가, 시간의 전개인 동시에 영원의 전재가 관계 내에서 현시됨으로 공간화되는 것이다. 그 시간적 응집과 산개가 관계 자체를 이루는 것이다. 시간의 공간화, 동시에 공간의 시간화, 왜냐하면 관계를 극단의 시간성이 주재하기 때문이다. 관계가, 단순히 어떤 자들이 한 공간을 공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이어지기 때문에, 공동의 시간이 스스로 펼쳐지고 응결되기 때문에 열리는 것이다. 관계가 ‘나‘의 시간과 타인의 시간이 이어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이다. 394

[ ] 몸은 고정되어 보이거나 잃기는 어떤 것이 아니고, 우리 각자 안에 속해 있는 어떤 부분일 수 없고, 움직임 가운데 있으며, 다만 그렇기에 ‘우리‘와 결부된다. 몸, 분리되어 있는 우리로 하여금 서로가 서로를 향해 있게 만드는, 서로를 서로에게 가깝게 다가가게 만드는 공동의 움직임, 따라서 공동의 몸, 공동의 몸을 통한 소통, 우리는 모두 불행한 찢긴 존재들에 지나지 않지만, 바로 그렇게 때문에 서로에게로, 또한 타자에게로 향해 무한히 나아가는 자들인 것이다. 여전히, 언제나 몸은, 언어로 인해 찢긴 존재의 원초적 불행 가운데 생성하지만, 언어를 통과해 가면서 그 자신을 현시시키고 그 공동의 불행 또는 결핍을 모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찢김의 빛, 찢김으로 드러나는 영광, 찢김으로 인해 열리는 공동의 영역, 몸은 태고로부터, 가장 늙은 기억이 된 수 없는 그 어린아이로부터 이어져 온 과거의 시간을 글쓰기와 독서가 약속하는 가장 먼 미래의 시간 (미래에 도래할 책‘)에 중첩시켜 놓음으로써 무한에 응답하고자 한다. 404


볕뉘

부록에는 블랑쇼의 다른 책들을 소개한 글을 모아두었다. 흥미롭다. 기어이 책을 손에 대게 만드는 듯싶다. 읽고 같이 나눌 이들이 있으면 더 좋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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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박준상, 그린비

[ ] 블랑쇼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문장들을 이해하고 그 의미들을 파악한다는 행위가 아니라, 결국 그 너머에서 어떤 사건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고, 어떤 얼굴과 대면한다는 것, 어떤 눈물과 핏자국을 본다는 것, 결국 어떤 발자국 소리와 절규를 듣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블랑쇼를 한 번이라도 주의 깊게 들여다본 독자라면 누구나 느꼈을 수 있겠지만, 그의 사유를 정식화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워지게 된다. 무언가 일어났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하나의 그림이고, 보다 정확히 하나의 음악.... 12/어떤 예술은, 어떤 음악은 우리로 하여금 침묵과 마주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사건 자체에 되돌려 놓는다. 어떤 예술과 음악은 사건의 ‘순수성‘을 보존한다. 블랑쇼의 글쓰기는 사건에 충실한 글쓰기, 보다 정확히 말해 사건으로서의 글쓰기이다. 즉 음악으로서의 글쓰기. 14

[ ] 침묵의 밑바닥에 있는 그 사건을 가치와 의미의 측면에서 언어로 능동적으로 자발적으로 규정하고 고정시키려는 시도는 , ‘나‘ 아닌 것과의 만남이라는 그 사건의 급진성을 퇴색시킬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 사건 자체를 왜곡시킨다.....하나의 철학이나 담론을 전부라고 절대적으로 믿고 언어적 대립과 투쟁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은 맹목성과 전체주의의 발로이다..그 와중에서도 침묵은 요구되며, 또한 우리에게 어느 순간 침묵과 함께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로, 언어로 세상과 우주를 창조한 신이 아니기 때문이며, 오히려 언어로 인해 한계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우리는 침묵에 들어가야만 한다...블랑쇼의 글쓰기는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문학을 통해 그 침묵으로 넘어가는 길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침묵을 듣고 보고자, 그 침묵과 만나고자 하는 욕망이 블랑쇼의 작품을 읽고자 하는 궁극적 욕망이다. 하지만 블랑쇼의 글쓰기가 말하게 하는 침묵은 결코 평온한 침묵, 평화의 침묵이 아니라 언어의 전쟁을 거쳐 나온 침묵, 요동하는 침묵, 어떤 고통을 가져오는 침묵이다. 17-18

[ ] 그 바깥의 사유는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란 어떠한 것인가? 그것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궁극적 전망을 보여주며, 모든 사회적-이념적 계기 너머에서, 그 이하에서 인간의 헐벗음을 보여주는 급진적 관점을 제시하게 되는가? 이러한 물음들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을 통해 이르러야 할 것이 바로 블랑쇼의 사유에서 ‘정치적인 것‘ 또는 정치윤리적인 것이다...그것은 공표된 정치 이전의, 그 이하 또는 그 너머의 ‘나‘와 타인 사이의 관계의 양태를, 다시 말해 타자와의 관계의 사건을, 공동체의 드러남을, 인간들 사이의 나눔의 움직임과 소통의 급진적 양태를 지정한다. 22-23

[ ] 그에게서 ‘작품‘ 자체, 언어 자체 또는 ‘글쓰기‘는 어떤 움직임, 체계적으로 분석될 수 있고 내용과 형식의 결합으로 여겨지는 작품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는 표류의 움직임이다. 그 움직임은 문자로 씌어진 책 내부에서 발견되고 분석될 수 잇는 애용과 형식의 결합을 넘어서, ‘책 바깥에서‘, 쓰는 자와 읽는 자의 소통을 통해, 다시 말해 쓰는 자와 읽는 자의 작품의 공동구성을 통해 전개된다. 26

[ ] 시예술에 취미를 가지고 모든 위대한 시작품들을 하나하나 이해하며 읽는 독자가 아니다. 그들은 유일무이한 존재들이다. 작품 앞에서, 작품 안에서 저자와 독자는 동등하다...그러한 시실은 저자 못지 않게 독자도 ‘유일무이‘ 하다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독자 역시 시를 다시 말하여진 것, 이미 말하여진 것, 이미 이해된 것으로가 아니라 매번 전혀 새로운 것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매개를 통해, 작품 앞에서 독자와 저자는 동등하다. 독자와 저자는 평등하다. 왜냐하면 독자는 작가 못지 않게 근본적이고 급진적으로 작품의 경험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작품의 경험은 사실 문학의 모든 것이다. 작품은 완성되기 위해 저자와 독자의 대화의 사건을, 양자가 비인칭적 익명적 내밀성 가운데 만나는 사건을 요구한다. 결국 블랑쇼가 저자와 독자의 평등을 말하면서 확인하는 것은 작품을 통한 소통의 궁극적 무근거성(무차별성, 무정부주의), 말하자면 문학에 있어서의, 문학적 소통에 있어서의 민주주의이다. 268

[ ] 목소리가 사물들에 대해 말하여진 것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언어, 간단히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반면 목소리는 삶 가운데에서의 하나의 사건에, ‘나‘와 타인의 관계의 사건, 제3의 유형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사건에 개입되는 한(목소리는 문학 작품에서의 어떤 언어이기 이전에, 삶 가운데에서 나타나는 타자의 몸짓과 얼굴이다) 삶에 대해 타율적이다. 블랑쇼는 살므이 모든 정치적 윤리적 요구로부터 거리를 두고 문학의 본질을 문학 내에서만 찾는 순수 문학 또는 심미주의적 문학을 주장하지 않는다. 목소리가 주도하는 작품 역시 삶으로부터 떨어져 긍정될 수 없으며, 따라서 삶에 대해 자율적인 것이 아니다. ˝글을 쓴다는 것, 삶과의 이 관계, 상관없는 그것이 긍정되는 우회를 통한 삶과의 이 관계˝ 작품은 책 속에서 사라져 가면서 스스로를 긍정하지만, 또한 작품은 스스로를 긍정하면서 삶을 긍정하고, 제3의 유형의 관계에, 우정에 영광을 가져오면서 스스로 사라져 간다. 블랑쇼가 작품의 무위 또는 작품의 부재를 말한다면, 그 이유는 작품이 제3의 유형의 관계를 여는 소통 가운데 소멸해 가기 때문이며, 작품이 결국 삶에 대해 자율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소통은 삶에서의 정치적 윤리적 요구인 ‘우정‘이라는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진다. 270-271/예술의 자율성 또는 자율적 예술에 대한 취소될 수 없는 요청이 언제나 삶에 의존하고 있음을, 따라서 삶에 대해 타율적임을 지적한다....유희충동은 소재충동과 형식충동의 조화로운 중앙이다. 예술만이 인간을 유희충동으로 열리게 해 조화로운 미적 존재로 도야시킬 수 있다는 것, 즉 인간의 미적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이 주장은 예술이 삶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기는커녕 반대로 예술이 자유로운 동시에 도덕적인, 한마디로 자율적인 인간을 형성해야 한다는 삶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271

[ ] ‘그‘ , 즉 ‘나‘와 타인 모두의 타자는 양자의 관계에서 하나를, 하나의 항을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자체를, 만남 자체를 지정한다. 다시 말해 ‘그‘는 우리가 연루되어 있는 탈존 자체, 사건 자체로서 어느 특정 개인에게도 귀속되지 않기에 ‘그‘를 전유할 수 있는 고정된 주체는 없다. ‘그‘는 우리 자체이자 어느 누구도 아니다. ‘그‘는 ‘나‘도 아니고 ‘너‘도 타인도 아니고 명사로 지칭될 수 있는 어떤 제3자도 아니며, 어쨌든 함께-있음이라는 탈존, 타인을 향한 외존, 결국 하나의 동사적 사건이다. 문학(작품)과의 연관하에 생각해본다면, ‘그‘는 작품에서 모든 이미지들이 수렴되고 있는 이미지이자, 작품에서 궁극적으로 감지되는 언어적 현시인 목소리에서 드러나는 익명적 인간의 탈존이자 만남의 사건이다. 목소리는 독자에게 ‘그‘를 공유하기를, 즉 유한성의 익명적 탈존을 나누기를, 간단히 타자로의 참여를, 메텍시스를 요구한다. 273

[ ] 우리로 향해 있는 목소리, 즉 ‘그‘ 도는 ‘그 누구‘인가의 목소리는 침묵의 절규, 자아와 자신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인간의 본질 위에 설정된 모든 휴머니즘을 거부하는 ‘인간의 절규‘일 것이다. ˝따라서 ‘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 ‘휴머니즘‘을 정의의 로고스와 결부시키지 않고 정의해야만 한다. 무엇으로 ‘휴머니즘‘을 정의해야 하는가? ‘휴머니즘‘을 언어로부터 가장 멀리 벗어나게 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절규로, 궁핍의 절규 또는 이의제기의 절규, 단순한 침묵도 아니고 단어들로 표현되지도 않는 절규로, 비천한 절규, 또는 엄밀히 말해 씌어진 절규로, 벽에 그려진 그래피티로 278

[ ] 언어가 더 이상 사물과 세계를 통제하지 못하고 인간의 힘의 한게만을 가리키고 있는, 그러한 시간과 그러한 장소에서조차 또 다른 언어는 타인을 향해 열려 있고, 타인과의 관계를 다시 연다. 그 또 다른 언어, 즉 타인과의 관계를 여는 언어, 사물들과 세계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능동적 언어에 앞서는 언어, 능동적 언어의 한계에서조차 타인을 향해 있는 언어가 시이며, 언어의 조건으로서의 언어, 모든 언어의 밑바닥을 이루는 언어, 모든 언어의 구원으로서의 언어이다. 그 또 다른 언어는 목소리 또는 절규이다. 279

볕뉘

입문서로 처음과 끝. 그리고 여러 책소개 글들을 챙겨본다. 밝힐 수 없는 공동체로 접한 적이 있긴 한데 좀더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외국저자의 소개서보다 박준상저자의 글이 끌렸다. 책 속의 책 몇 권을 주문했고, 저자의 책도 보관해둔다. 언듯 선입견으로는 루쉰과 흡사한 것 같아 놀랍기도 하다. 2003년에 운명을 달리하였다고 하니, 일관되게 자신의 삶과 작품을 동일선상에 놓고 변주해낸 것은 아닌가 싶다. 가까이 갈 일들로 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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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 정치 무대 - 포퓰리즘의 부상: 포퓰리즘적 국면이란 포퓰리즘이 뻗어 갈 수 있는 상황으로, 특정한 사회 분열이 시작되는 역사적 국면을 말한다. 정치, 경제, 문화의 균형이 흔들릴 때, 사람들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통합이 더 이상 굳건하지 않을 때 생겨나는 국면이다. 이때 전 국민은 ˝사회적 홈리스˝ 신세가 된다. 186/감정들은 고정된 정치적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진보적인 감정도, 퇴행적인 감정도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순전히 민주주의적인 감정도 전체주의적인 감정도 없다.....불의에 대한 분노는 좋다고 할 수 있더라도, 외국인을 향한 야만적인 분노는 부정적인 격저이다. 활동하게 하고 연결해 주며 참여하게 하는 긍정적인 감정도 없고, 늘 선동하거나 반대로 늘 움추러들게 만드는 명백히 부정적인 감정도 없다. 감정은 본래 정치적 실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감정은 처음부터 정치적인 것에서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 않았다. 감정은 어느 방향에서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감정은 원료이자 위험이다. 189/슬로터다이크가 분노은행이란 개념을 제시해서 분노라는 원료가 사회 변화를 위한 핵심 원료이자 동력임을 표현했고, 그 분노를 좌파정당에게 맡겼지만, 그 예금을 탕진했다고 한다....좌파 정당만이 감정의 저장고가 아니라, 모든 정당이 감정 은행이다. 그리고 그곳에 분노와 격노만 저장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공포, 희망, 아픔까지 더 많은 감정들이 저장된다. 감정은 채굴을 기다리는 지하자원처럼 그냥 거기 있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또한 생산되고 재생산되며 갱신되거나 약화된다. 그러므로 감정의 집하와 유통만이 아니라 감정의 생산도 있다. 하나의 온전한 감정 경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감정 경제는 위기에 처했다. 감정을 관리하는 모든 은행들이 예금을 탕진한 것처럼 보인다. 190-191/

사회적 갈등은 단순하지 않고 과잉으로 규정되는데, 왜냐하면 이 갈등들은 나눌 수 있는 것과 나눌 수 없는 것, 이성과 감정, 합리와 비합리로 명확하게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민주주의 정치는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결국 나눌 수 없는 갈등은 나눌 수 있는 갈등으로 완전히 번역되지 않는다. 정치적 평화는 개입을 감소시킬 수 있다. ˝그러나 개입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언제나 나눌 수 없는 나머지가 남아 있게 되고, 이 나머지는 끝나지 않을 정치 논쟁을 반복해서 요구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정치는 나눌 수 있는 갈등으로 번역되는, 즉 나눌 수 있는 문제의 해답일 뿐 아니라 또한 특별히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감정이 걸려 있는 확신, 가치, 정체성, 문화와의 관계 맺기이며, 이 해결할 수 없는 나머지와 관계 맺기다. 198

/2차 세계대전이후 복지국가는 사람들에게 돈만이 아니라 사회적 권리가 있는 시민으로서의 정체성도 제공했다. 얼마나 대단한 권한과 권리 부여인가 가장 약한 사람들도 사회적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 사회적 안전은 그들의 권리였다. 경제적 통합이 이렇게 상징적 통합이 되었다. 정체성을 제공하는 대단히 거대한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권리를 보증받게 되었고, 이 권리를 통해 존엄성을 갖게 되었다. 199포퓰리즘은 정확히 나눌 수 없는 것에 집중한다. 잃어버린 나눌 수 없는 것, 오늘날 정치적인 것의 중심에 자리 잡은 바로 그 나눌 수 없는 것, 곧 정체성에 집중하는 것이다. 포퓰리즘 전략은 왜 효과가 있을까? 우리가 정체성들이 더 이상 옛 안전 체계를 통해 보장받지 못하는 포퓰리즘적 국면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202/포퓰리즘이 욕망을 실제로 충족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굴욕이 정당화되는 것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우익 포퓰리즘이 바로 여기에 들어와서 감정에 상처받은 자들의 변호인을 자처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위로는 엘리트에 대한 공격적인 분노와 아래로는 공격적인 인종 차별을 부추기는 변호인이다. 204

/찰스 테일러가 말했듯이 3세대 개인주의 시대에 우리는 어떤 감정을, ‘충만의 경험‘을 추구하고 있다. 이 상황에 맞는 예외적인 인물은 우리에게 충만의 순간을 살 수 있다고 말해주는 인물이다. 우리를 위해 그렇게 살 수 있다고 말해 준다. 이 전형적인 유형이 바로 팝스타다. 정치인 중에도 이런 스타가 있다. 그러한 지위를 자기 소유로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스타들은 바로 우리의 대리인이다. 팝스타는 우리를 대리하여 우리를 위해 산다. 우리를 대리하여 우리를 위해 우리가 살지 못하는 삶을 산다. 팝스타는 우리를 대리하여 우리를 위해 즐긴다. 어쨌든 팝스타는 우리가 모든 것을 승인해 준 자다. 208/ 정치에서 심오한 능력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정치 경험도, 정치 기획도 필요 없다. 단지 음란한 나르시시즘이 필요할 뿐이다. 공적 공간에서 실현되는 나르시시즘, 트럼프는 자신의 청중을 대리하여 즐긴다. 그들이 실행할 수 없는 것, 그들이 실행하면 안 되는 것을 대리하며 즐긴다. 트럼프는 ‘그들을 위해‘ 어떤 부끄러움도 없이 자기애에 빠진 권능이라는 환상을 향유한다. 208/트럼프에 대한 환호는 단순한 권위에 대한 환호라기보다는 기생하며 즐기는 향유다. 트럼프가 공공의 영역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낼 때, 사람들은 그의 향유를 향유한다. 209

/포퓰리즘은 이 상처받은 이들의 관심 어린 호소에, 나뉠 수 없는 굴욕 같은 감정에 무대를 제공한다. 나뉠 수 없는 것들이 이상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무대를 제공해 준다...이 무대를 우리는 감정공간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210/포퓰리즘 우파는 감정 공간들을 상처, 두려움, 거부감에 맡겨 두고, 이 부정적 열정들이 사회에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바로 우익 포퓰리즘이 이 열정들, 특히 일상에 존재하는 인종주의와 결합시켜서 이를 가장 먼저 정치적인 것으로 생산한다. 왜냐하면 포퓰리즘은 ˝거부감과 정서에 안정된 논의 틀과 사회적 정당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211/가상의 위협에 대항하며 포퓰리즘이 가져오는 것은 파시즘의 경우와는 다르다. 초월적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약속도 없다. 포퓰리즘의 모든 것은 오직 지금 여기에서만 작동한다. 이렇듯 타자를 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본질적인 포퓰리즘적 상황, 즉 사회적, 정치적 예외 상황을 정당화하고 지속성을 유지한다. 이 상황에서 내면성을 넘어서지 않는 새로운 권위주의 권력이 번성하여, 지금 여기에서 사회를 지속적으로 동원한다. 219

/다원화는 형태와 영향권을 주조할 뿐 아니라 다원화가 거부되는 곳에서도 존재한다. 다원화는 다원화의 저항형태도 주조하여, 저항 형태들에도 다원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렇게 포퓰리즘은 다원화에 반대하는 특별한 방어 형식이 된다. 다원화된 주체들, 감소된 자아들을 통한, 그리고 그들을 위한 방어 형식이다. 222/민주주의 정치는 실질적인 문제 해결에 더해 감정적 합의도 생산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감정을 다루는 정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방식은 긍정적이어야 한다 또한 정체성을 제공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정체성 제공이 단순히 절대자를 규정하는 반대편이 아니다. 포퓰리즘 수업의 결론은 정치가 정체성을 제공한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정체성을 제공하느냐인 것이다. 225

공유공간 만남광장; 외면적 안전은 더 이상 시대와 맞지 않다. 주의는 개인의 행동 안에 도달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통 참여자들의 개혁이 필요하다. 참여자들은 배려와 주의의 원칙 그리고 함께라는 원칙을 내면화해야 한다...변화는 탈규제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배려심을 가지라는 호소로는 변하지 않는다. 탈규제는 주체의 불안감이 의도적이고 목적의식적으로 만든 생산물이다. 공간 기획자들은 모든 것이 열려 있다고 말한다. 공간의 형성을 통해, 예를 들어 분명하게 편입된 도로 공간을 누락시키면서 개인에게 완전히 의도된 불안감을 생성시킨다. 왜냐하면 이 불안감이 변화된 행동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개인들의 불안함이 보다 안전한 전체 상황을 만든다. 이것이 도로교통법의 역설적 효과다. 230


7.

[ ] 7. 정치적 올바름의 무대- 좌파와 우파의 정체성 정치: 너는 어느 편인가라는 질문은 더 이상 없다. 새로운 질문은 더 나아간다. 너는 누구냐?.....오늘날 우리는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 살아간다. 지금은 따라서 사회적 분열 상황을 정확히 규정해야 할 정치적 요구의 시간이다. 냉전과는 달리 지금의 전선은 분명하지도 선명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전선은 단순히 우리 사회의 가장자리에 있지 않다. 전선은 우리 사회를 관통하여 놓여 있다. 더욱이 현재의 전선은 우리 사회를 관통하여 놓여 있다. 더욱이 현재의 전선은 분명하거나 선명하지 않고 또한 극단적으로 복잡하기 때문에, 바로 그래서 상황을 정확히 규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240/어떤 피해자의 개념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지에 따라 사회를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회가 어떤 동사와 연결되는지에 따라 분류될 수 있다. 바치다, 인정하다, 그리고 있다. 예컨대 ‘희생양으로 바치다‘라는 표현으로 신이나 조국을 위한 자기희생...전쟁이후 긍정적으로 점유된 피해자 개념이 등장했다. 내가 피해자다라는 발언을 하는 주체의 주체성 회복..페미니즘에서부터 반인종주의까지, 해방으로 가는 왕도라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 둘이 아니라 그냥 단순히 피해자가 있다. 이런 동사 결합은 결코 긍정적 함의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 욕이 특별한 정체성적 특징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이때 피해자는 실존적, 순수한 자신의 존재를 통해 피해자가 된다. 이런 피해자는 인권을 가진 포괄적인 인간-존재의 지위를 얻지 못한다...사회에 이런 피해자 자리가 있다는 것을 이 청소년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확신한다. 더 나아가 이 청소년들에게 피해자의 자리는 개인에게 그냥 배정될 수 있음이 확실해 보인다. 252-254

/사회문제는 순전히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예전에는 사회 문제의 제기가 숫자를 말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았다. 사회 문제는 처음에 오히려 정체성 제공과 연결되었다. 계급 문제 또한 정체성 문제였다. 단순히 사회 복지의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권리를 갖는 것이 중요했다. 사회 국가와 분배는 처음에는 사람들을 자선의 수혜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리와 자부심이 있고, 사회적 인정을 받는 시민을 만드는 일을 의미했다. 예전에 좌파 정치와 사회 민주주의 정치는 한 사회 안에서 물질적 그리고 상징적 통합을 의미했다. 그러나 나중에 이 가르침은 망각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 후로 사회 민주주의는 온전히 나눌 수 있는 것에만 집중했다...좌파가 잊은 것은 물질적인 차원이 가져온 그 정체성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을 포퓰리즘이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274-275 프로레타리아가 사라지고 백인 프랑스인으로, 백인 독일인으로, 백인 오스트리아인으로, 백인 남성으로 다시 돌아가는 전이 과정이다. 아직 백인 남성들의 굴욕 경험의 끝에 도달하지 않았다. 교육, 노동 그리고 엘리트 이외에도 백인 남성들은 반대편에서 또 다른 본질적 의미 상실을 경험한다. 권력자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피해자를 통해서도 그들은 굴욕감을 맛보는 것이다. 281

/다원화된 사회의 만남 구역에는 분명한 정체성을 지닌 헌법 애국주의자들이 아니라 제한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돌아다닌다. 이들은 추상적인 시투아앵이 아니다. 시투아앵이 되기에 이들의 차이는 너무 구체적이다. 이들은 스마트폰을 손에 쥔, 본질적으로 고립된 단자들도 아니다. 이들은 만남을 통해 서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남 구역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하나의 감소가 추가되는 존재‘로 경험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감소의 추가는 자기 정체성이 타인의 정체성에 의해 제한된다는 뜻이다. ‘긍정적인 함께가 아닌 오히려 부정적인 함께에 본질이 있는 새로운 방식의 전체‘로 사회를 완전히 새롭게 생각해야 한다. 이 결합은 특수주의들이 서로서로 상대화 하는 곳에 존재한다. 다원화된 주체들의 결합은 그들이 서로서로 경험하는 빠짐 혹은 공제 속에 존재한다. 290


볕뉘.

감정 공간은 늘 생겨나며 그 감정과 유사한 삶의 데이터를 모으고 그리 쏠린다. 감정 경제 역시 변증법의 사유 맥락에서 출구를 찾아 간다. 그 흐름들이 향하는 곳들에 예민해져야 하며 구별되지 않는 갈등을 미리 해결하는 것이 정치이기도 하다. 그 길목에 서성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불안을 체험해서 서로 다른 나를 경험하게 만드는 일이다. 서로 다른 나가 되게 하는 일이다. 차별에 명민해지는 것, 차이는 낳는 불합리가 아니라 차이나 낳는 감정들에 밝아지는 것 닫힌 나가 아니라 하나 빠진 나로 관계맺기를 하거나 또 다른 사건들이 생겨야 감정도 이야기도 그 사이에 오밀조밀....또 다른 길을 걸어갈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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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 1. 과거- 동질 사회라는 환상: 한 사회의 동질화는 단순히 단일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차이가 부차화된다는 데 가깝다. 더는 차이가 없다고 해서 사회가 동질화되는 것이 아니다. 차이가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때, 공통된 것 앞에서 차이가 부차화될 때 사회는 동질화한다. 민족 유형이 제공하는 이 공통된 것은 유사성의 원칙에 기초한다. 공통된 형상 속에서 민족의 모든 구성원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상상된 공동체‘는 이러한 유사성의 사회다. 24

[ ] 극장, 학교, 법원, 교회, 정당, 박물관 등이 모두 같은 기초를 갖는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그것은 다른 모든 색깔을 왜곡하는 전체 조명이며, 아주 특별한 마취제다˝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이 같은 박자일 뿐 아니라 같은 소리로 조율되었다. 같은 소리로 조율된 이러한 일치, 자기 집을 다른 단어로 표현하면 환경이다. 환경이란 주위환경이다. 하나의 전체를,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환경. 민족의 경우 이 하나의 환경이 전국을 에워싼다. 26

2.

[ ] 2. 지금-다원화가 모든 것을 바꾼다.: 변화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일어난다. 첫째는 소속의 변화이다. 즉 우리가 사회에 속하는 방식이 변한다. 둘째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의 변화이다. 다원화는 타인과의 관계를 바꾸고 우리 자신과의 관계, 즉 우리가 자기 자신과 관계 맺는 방식도 변화시킨다. 37/ 당연함의 상실은 말하자면 ‘정상성‘의 상실이기도 하다. 이 말은 ‘정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이상 제시하거나 묘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정상성‘을 정의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거대한 사회 권력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정상성, 당연함은 단지 그 정상성의 형태가 통용되는 집단에 소속된 이들만을 위한 가치다. 다른 이들에게 정상성은 정상이 아니다. 정상성은 배제의 역학이자 제외의 역학이다. 우리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다양성은 기분 좋은 공존이 아니다. 42/가치논의는 언제나 기본 가치의 수용에 대한 논쟁으로 전환된다. 이민자들, 새로 온 자들은 우리의 기본 가치를 수용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완전히 잘못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기본 가치들로 허용의 범위를 정한다. 그러나 가치 논의에서는 새롭게 규정될 수 있는 가치 자체에 대해서는 토론하지 않는다. 기본 가치는 논의될 수 없고 질문할 수도 없는, 고정되고 확정된 데다가 본질화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가치에 대한 호소는 민주주의적 과정이 전혀 아니며, 대신 가치에 대한 복종이 주제가 된다. 43/동질 사회가 우리의 완전한 소속을 약속했다면, 그러니까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어 주고 우리에게 완전한 정체성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면 지금은 그 반대로 말할 수밖에 없다. 이질 사회, 다원화 사회, 다양성의 사회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 더는 온전하게, 직접, 당연히 소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질 사회는 또한 우리가 더 이상 같은 종류의 자아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전처럼 같은 종류의 우리로 구성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온전하지 않다. 45/개인주의의 역사에서 1960년대는 전환점으로 부를 수 있는데 이 지점에서 2세대 개인주의가 시작된다. 2세대 개인주의는 기존 삶의 양식과 표현을 거부했으며, 자기만의 새로운 길을 택했다. 찰스 테일러에 따르면 이 여정은 ˝자기 진실적인 생활 형태와 표현 형태˝의 추구이다. 그래서 테일러는 2세대 개인주의 시대를 ˝자기 진실성의 시대˝라고 명명했다. 마이클 월저의 표현처럼 삶은 ˝개인의 프로젝트˝가 되었다. 이는 새로이 구별되는 개인주의일 뿐 아니라 1세대 개인주의와 완전히 반대다. 2세대 개인주의는 거대 체제의 침식과 정치적, 종교적, 계급 규정적 생활 세계의 종말을 알렸기 때문이다. 월저는 이 상황에 대해 결합 대신 프로그램상의 자유, ˝독립된 존재들의 무리˝가 출현했다고 말했다. 48/ 2세대 개인주의의 정치 즉 정체성의 정치는 원래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민족의 형상 안에 여성을 등록시키는 일 또는 동성애자를 등록시키는 일이 중요한 과제였다. 말하자면 다른 정체성을 온전한 정체성의 규범 안에 수용시키는 일이 중요했다. 이것은 정상성, 즉 무엇을 정상으로 여길지를 정하는 일에 관한 문제였다. 반면 다원화는 이와 크게 다르다. 다원화는 정치 운동이 아니라 목적없는 변화가 낳는 효과다. 다원화는 민족의 형상을 재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족 형상의 침식을 촉진한다. 55/누구도 국민을 체현할 수 없다. 누구도 체현된 형태로 국민을 대의할 수 없다. 클로드 르포르의 주장에 따르면 민주주의 사회에는 여전히 중심이 있지만(왜냐하면 권력의 장소라는 말이 다름 아닌 중심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중심은 텅비어 있다. 즉 민주주의의 중심은 비어 있는 자리다..오늘날 다원화와 함께 민주주의는 그 형상을 잃어버렸다. 이제 민주주의는 벌거벗었다. 56-57/ 3세대 개인주의(다원화 개인주의)는 개인의 분열, 우연성의 경험, 불확실의 경험, 원칙적인 개방성 등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3세대 개인주의는 우연이라는 요소가 심장으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연성에 대항하는 데서 생명을 얻는 정체성의 심장에 바로 이 우연성이 들어왔다. 58/ 더 이상 타자에게 정상의 기준을 제시할 수 없다. 나아가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정상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 말은 우리가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고, 온전하며, 당연한 존재가 아님을 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가 완전히 다르게 살 수 있고,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경험은 지금까지는 소수자의 전형적인 경험이었다. 소수자는 온전하고 완전한 정체성으로 살아갈 수 없었다. 소수자는 어떻게 주류 사회에 대응하여 균형을 잡을 수 있을지를 언제나 자문해야 했다...심리 정치적으로 볼 때 오늘날은 주류 사회도 소수자 사회처럼 기능한다. 오늘날에는 우리 모두 다양성과 다원성 곁에 서야 한다. 다양성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 내면으로, 우리 자신의 전체 정체성에 진입했다...개인들에게 다원화가 미치는 의미를 번역한다면, 감소된 정체성이다! 오늘날 우리는 더 작은 자아다. 왜냐하면 우리는 작아졌고, 우리는 더 이상 당연한 우리가 아니며, 의문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은 자아이며, 오늘날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정체성은 언제나 우리와 완전히 다른 정체성에 연결된다. 60-61/지구도시...오늘날 시골 공간 자체가 도시화되었다. 도일적 생활 양식의 전형인 마을도 다원화되고 있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어느 외진 마을에 가도 터키식 길거리 케밥집이 있다. 어느 고향 마을에서나 ‘이곳 출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러니까 시골의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도시는 거의 모든 시골을 장악했다. 다른 한편으로 도시로 들어온 시골 문화도 아무리 거대한 봉쇄막을 친들 변화와 변환을 피하지 못한다. 64-65

[ ] 우리는 어떻게 이런 다원화된 개인으로 함께 살 수 있을까? 왜냐하면 이 다원성에서 근본적인 새로움은 단지 우리 사회가 도덕적, 종교적으로 다양해졌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새로움은 이제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세계관이 없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통된 세계관도 없이, 공유하는 확신도 없이 다원화된 개인들인 우리가 함께 살 수 있을까? 70/ 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중립성‘뿐이다. 중립성은 구역, 공간, 공적 공간으로 구체화된다. 다양한 문화, 종교, 정체성이 한 사회를 ‘공유‘해야 하는 상황에서 서로 만나면 중립적인 공공 영역이 시급하게 필요하다. 사람들이 다양하고 다원화된 상태로 동등할 수 있는 영역, 중립적인 만남의 장소로서 공공 영역과 공적공간이 필요하다. 이 만남구역 bebegnungszone. 20킬로미터로 다닐 수 있으며 보행자의 안전을 우선하는 교통 구역. 이 만남의 장은 다름이 동등할 수 있는 다름의 공간이다..추상적인 영역에서만 실현된 다름이 동등하게 만날 수 있는, 추상적이지 않은 만남의 장이 필요하다. 70-71


3.

[ ] 3. 종교무대 - 다원화된 신앙인: 오늘날 우리는 신앙을 선택한다. 하나 또는 여러 개의 신앙을 개수와 상관없이 선택하는데, 핵심은 선택이다. 이 점이 과거 종교에 대한 이해와 완전히 다른 점이다. 선택은 세속적이기 때문이다. 세속 사회는 오늘날 종교 세계 옆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인 것은 종교의 심장으로도 진입했다. 전승 안에서 배치되는 대신 자기 전통 혹은 외부 전통을 스스로 습득한다. 어떤 자리에 배치되는 대신 자기 힘으로 어떤 자리를 차지한다. 스스로 선택된 전통은(이 무슨 모순인가!) 과거 종교성과는 반대되는 효과를 낳는다. 세대라는 사슬에 배치되어 탈주체화되는 대신, 선택한 자아가 강화된다. 87

4.

[ ] 4. 문화무대-근본주의의 저항: 제 3의 개인주의가 가지는 특징은 보기보다 덜 추상적이다. 축제, 식생활, 의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와 종교의 병존은 자기 확신이나 정체성, 신앙 등 모른 것을 여럿 중 하나로 경험하게 한다. 그러므로 다원화는 경험이 먼저다. 자신의 정체성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경험이 다원화의 시작인 것이다. 이는 오늘날 자기 자신에게 결정이 필요하다는 경험이며, 자신의 삶과 세계 접근 방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경험이다. 이 경험은 각자 정체성의 심장에 우연성이, 다시 말하면 개방과 불확실성이 침입함을 뜻한다. 이 심대한 경험은 오늘날 누구도 피할 수 없으며 모두에게 도달한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의 당연함을 변화시킨다. 106/오늘날 우리 모두는 다원화된 개인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정체성을 제한받는 개인이다. 그리고 바로 이 경험 안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효력을 발휘한다. ‘다원화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작동한다. 106/다원화된 개인주의 시대에서 문화는 결코 훼손되지 않고 온전한 문화 재화들과 완전한 상징의 집합이 아니다. 문화는 오히려 불안정해진 상징과의 관계를 획득하려는 시도다. 다원화된 개인은 소수의 엘리트와는 달리, 전 지구 안에서 획득 가능한 완전한 상징들의 단순한 주인이 아니다. 다원화된 주체는 기껏해야 불완전한 상징과의 관계 속에서 불안정한 자율성과 권한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135/소수자의 집단뿐 아니라 주류 집단에서도 발견된다. 소수자 집단의 전략은 봉쇄이며, 누구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주류 사회에서는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는 전략이 된다. 배제를 통해서만 생산될 수 있는 폐쇄된 정체성은 발전, 갈등, 문제에 언제나 같은 반응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과도한 감정, 공격성, 그리고 자주 언급되는 공포가 반응의 지표들이다. 이런 반응들이 이성적인지 비이성적인지는 상관이 없다.139/정치 전선은 오늘날 포괄적인 ‘우리‘를 원하는 이들과 배타적인 ‘우리‘를 원하는 이들 사이에 놓여 있다. 이민으로 변화된 이민 이후 사회를 받아들이는 사람과 이민 이후의 현실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로지른다.144


5.


[ ] 5. 정치무대 - 팬으로서의 참여: 미래를 향한 특정 요구들이 아니라 저항의 순간 자체가 중심이 된다. 사람들은 월가 점거 운동과 타르리르 광장에서 열리는 토론회, 위원회, 준비 모임, 총회, 청소, 응급 구호 등의 활동을 하면서 환호하고 웃었다. 정치적 에너지를 다른 배수구 없이 분출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적 순간, 실제 민주주의적 사건의 부활을 보기 때문에 환호한다. 정치적 에너지의 탁월한 원천인 분노는 규정된 길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저항을 구성하는 방법으로 어찌 되었든 이곳에서 새로운 길을 뚫었다. ...민주주의는 ˝만족의 기계˝가 아니라‘ ˝불만족과 관계 맺기˝다. 153/만약 성공한다면 새 경험은 개인에게 참여한다는 느낌만 주는 게 아니라 또한 전형적인 경험이 된다. 다른 사람들도 이 경험에서 자신을 재인식할 수 있다. 이렇게 느낌의 실재는 효력을 발휘한다. 저항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권력에 반대하면서 오직 자신들의 감정, 분노, 불평, 실망만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바로 이것이 풍부한 가치가 있고 민주주의 중심 원료다. 왜냐하면 감정은 3 세대 개인주의에서 특별한 기능을 하고, 대단히 중요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감정은 점점 더 기존의 배출구로부터 풀려나서 다원화된 주체들의 매개체가 되었다. 감정 안에서 사람들은 실제로 개별적인 개인이 된다. 157/원래 쾌락주의는 욕망에 적대적인 도덕을 향한 저항의 징표이자 해방의 울림으로 여겼다. 하지만 오래전의 쾌락주의는 그 반대편에 자리 잡았다. 실현과 성공을 통해 쾌락주의는 저향의 정신에서 빠져나와 참여와 소비의 도구이자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가 되었다. 자본주이는 기능하는 노동력뿐아니라 즐기는 소비자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본 축적에 대한 저항으로 생각되었던, 1967년에 나온 조르주 바타유의 개념인 ‘소비의 경제‘는 시장의 거대한 파티로 변환되었다. 168/민족은 언제나 현재를 과거와 연결 짓는 ˝기억의 공장˝이었다. 민족에서 이런 기능을 수행했던 거대 국민정당들은 그 이름에 이미 충동과 행복 지연을 내세우고는, 미래의 본질적인 지표를 세워 두었다. 그러나 정치적 쾌락주의는 완전히 현재에 정주했고, 지금 여기에서 성취하려고 한다. 이런 쾌락주의 정치는 현재 사회 질서가 변화 불가능하며 대안은 없다는 생각에서 생겨날 수도 있고, 마찬가지로 바로 지금 여기에서 정치적 교체를 이루려는 생각에서 나올 수도 있다. 정치적 대안 또한 더 이상 미래의 좌표가 될 수 없다. 요약하면 정치적 쾌락주의는 변화없이, 수직적인 계층 없이, 충동의 지연됨 없이 개인으로서 완전히 참여할 때 실현된다. 171/옛 계급 사회는 안정되고 분리된 구획을 갖고 있던 개인들에게 포괄적인 표현의 다양한 장을 제공했다. 조직, 적절한 정치적 대리, 언어, 심지어 노래까지 제공했다. 그것은 그 사회에 결합되기 위한 전체 의미 체계였다. 그러나 ˝온전한 개인 실존˝을 향해 노력하는 다원화된 개인의 시대에는 과거와는 달리 이런 통합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3세대 개인주의 시대에는 근본적으로 개인을 적절하게 대의하는 수단이 없다. 집단을 통한 대의는 오늘날 시민들의 정치적 욕구와 맞지 않는다. 사회 문제가 더 이상 없어서가 아니라, 그보다는 오늘날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움직이고 건드리며 자극하는 것은 다른 무언가, 즉 완전 참여를 향한 열망이기 때문이다. 175-176/마크롱 - 이 형식과 모형이 바로 오늘날 시민들의 정치 욕구 및 욕망과 잘 맞았기 때문이다. 즉 참여에 대한 욕망이며, 인정을 향한 기대다.....단지 감소된 자아의 욕구에 접근하는 일이며, 이를 채우는 일이다. 이것은 옛날의 해방을 의미하지 않으며, 대신 새로운 의미의 인정을 뜻한다. 그리고 인정 이후 따라 나올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ㅣ 않는다. 그러나 이 소망, 개인으로서 인정받고 자신의 특별함 안에서 개인으로서 인지도고 싶은 이 소망은 오늘날 삶의 형식과도 잘 맞는다. 우리 모두는 오늘날 개인으로서의 삶에 능통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정치적인 것에서도 개인으로서 인정받기를 원환다. 177/ 여기에서 개인은 옛 자유주의의 개인, 즉 사인으로서의 개인이 아니다. 또한 옛 공화주의의 개인, 즉 동등한 존재로서의 시민도 아니다. 오히려 이 주체는 새로운 공적 존재로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개인이다. ‘공적인 것‘으로서 개인의 등장이다. 이것이 다원화된 사회를 위한 정치 공식이다. 개인주의는 여기에서 공동을 위한 새로운 기초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다 함께, 조화를 이루며, 이 다양한 개인들은 계속 앙 마르슈(마크롱이 창당한 이름으로 전진이란 의미다) 중이다. 179

볕뉘.

무척 충격적이면서도 질서 정연한 책이다. 다 읽은 뒤 생각해보니 라디오 방송을 했고, 인터뷰와 긴 과정을 거쳐내고 난 뒤 만들어서 일 것이다. 다 옮겨적고 싶었는데 무리인 듯싶다. 다음에 다시 한번 남겨야겠다. 철학도서상, 미래의 책 10선에도 꼽혔다고 책갈피에 나와있다. 손색이 없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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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 대가천 2(은어낚시); 나는 은어를 본다/물의 힘줄 속에 그것들의 길이 있다/물의 힘줄을 은어들이 당겨 강이 탱탱해진다//나는 은어를 본다/강의 힘줄이 내 늑간근에도 느껴진다/그 밖에 중요한 것은 없다//나는 은어를 본다/언어에 기대어서/이건 물론 중요한 게 아니다//누가 강의 힘줄을 풀어놓느냐/강에는 은어가 올라와야 한다/그 밖에 중요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하석, [고령을 그리다]에서

2.

[ ] ‘당연하다‘는 판단에 숨은 차별 감정: 차별 문제에 있어서 ˝이는 차별이 아닌 구별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당연하다‘라는 말을 인습적, 비반성적으로 사용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기 때문이다. 남자가 그러는 것은 당연하다. 여자는 당연히 그래서는 안된다. 중학생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 일본인은 당연히 그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는 모든 논쟁을 별다른 고민 없이 ‘당연하다‘는 말로 귀결시켜서 끝내 버리려는 나태한 ‘당연주의자‘이다./차별에 관해 이야기할 때 ‘원래 그렇다‘, ‘당연하다‘,‘자연스럽다‘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조심해야 한다....왜냐하면 그들은 분위기만 읽고서 마이너(소수자)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깨달을 생각도 없다. 14,15

[ ] 어떤 구별로 인해 실제로 이득을 보고 있는 사람은 부채의식을 가져야 한다. 의식적으로라도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는 제안이다. 장애인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감사‘할 것이 아니라 장애인에게 부채 의식을 가져야 하며, 운좋게 미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에, 운 좋게 명석하게 태어났다는 사실에 감사할 것이 아니라, 이를 엄연히 부채로 받아들여야 한다....성공한 사람도 본인이 겸허한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이들이 겸허한 것은 열성형질을 가진 사람, 일에서 실패한 사람, 인생에서 행복에게 버림받은 사람이, 비굴해지지 않고, 자살하지 않고, 범죄에 물들지 않고 사는 것에 비한다면 무한대로 쉬운 일이다...이들 역시 상대적으로 열악한 자질을 가진 사람들이나 불운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부채 의식을 가져야 한다. 12, 13

[ ] 공격성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긍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이를 무비판적으로 배제하고 부정하는 것 역시 위험하다. 차별 감정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 우리 안에 틀림없이 존재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공격=악의를 일소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온갖 악의와 그 표출이 없는 이상적인 사회를 떠올리며 현실을 한탄할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자리 잡은 악의와 싸우며 그것이 폭주하지 않도록 단단히 제어하는, 이러한 노력 속에서 생의 가치를 발견해야 한다. 인간의 악의를 천편일률적으로 말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악의가 있기에 삶이 풍요롭다. 이에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그 삶이 가치를 결정한다. 11

[ ] 어째서 그는 (현재적, 잠재적) 피차별자이고 나는 아닌가? 20; 우리는 이 질문을 걸고 우리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차별 철폐를 향해 매진하는 것도, ‘차별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중얼거리며 포기하는 것도, 모두 아니다. 우리 안에서 꿈틀대는 차별 감정을 비판해야 한다. 차별 감정을 다룰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기비판 정신‘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이론과 실천도 자기비판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면, 무조건 자신이 옳다고 믿는다면, 일단 고개를 돌려 외면해도 무방하리라. 20( 이상을 실현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장애인이나 여성 등 공인된 피차별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시대의 강한 흐름에 몸을 내맡긴 채 역차별을 단행하기 쉽다.)

[ ] 나는, 평소에 ˝평범하기 싫다.˝ ˝어떻게든 나를 평범함에서 빼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즉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은 셈이다. 이는 ˝평범한 세계˝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여러 차별과 차별의 징조를 최대한 알아채고, 그것들에 맞서 자신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바꿔 나가고 싶다˝는 마음이다.....각자 자기 안에 깃든 ‘자기만족에 빠진 자신‘을, ‘고지에서 내려다보는 자신‘을 제대로 인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이 보이지 않게 되는 순간‘을 경계하는 것이다....문제는, 이른바 ‘낮은 곳‘이 이미 ‘높은 곳‘이 되었다는 점이 아닐까. 낮은 곳에 있는 자의 복종이 악취를 풍기는 오만이 되었다는 점이 아닐까....차별 감정과 진지하게 마주한다는 것은 ‘차별하고 싶은 자신‘의 마음에 계속 귀를 기울이고, 그 마음을 열어서 파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괴로워하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다, 차라리 모두 내던지고 죽고 싶다고 바랄 정도로, 즉 차별로 괴로워하는 사람과 ‘대등한 위치‘에 이를 때까지 자기 안에 숨은 나태함과 눈속임과 냉혹함과 끊임없이 싸우는 것이다. 204, 206 나카지마 요시미치, [차별 감정의 철학], 바다출판사 에서

3.

[ ] 참으로 사람다운 삶은/그냥 존재함의 차원에 만족하는 조용한 삶이 아니다./사람답게 사는 삶은/타자에 눈뜨고 거듭 깨어나는 삶이다. 7

[ ] 현대 한국인은 ‘내 것‘ ‘내 새끼‘에 빠져있다. 남의 것을 더 소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서양이 목적 지향적이고 동양이 관계 지향적이라고 했지만, 현대 한국인은 전쟁의 트라우마을 여지껏 앓고 있는 ‘이해관계 지향적‘이라고...잘해줘 봤자 즉각적인 이득이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는 남을 무성의하게 대해도 되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12, 13

[ ] ˝참 피곤하게 사네.˝ ˝너 혼자 그런다고 변해?˝ ˝세상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아˝....역설적으로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세상이 하루아침에 변할까 봐 가장 두려운 듯하다. 41

[ ] 비건은 형용사: 완벽한 비건을 몇 명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다수의 사람들을 더 ‘비건적‘으로 만드는 것이 사회 전체로 봤을 때 훨씬 효과적이라고. 동물을 살리는 데도, 환경을 보호하는 데도, 공중 건강을 위해서도 말이다. 일단 비건-친화적인 사회가 되기만 하면, 실천하기가 점점 쉬워지면서 비건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비건은 내게 정체성이나 명사이기 이전에 형용사이다. ‘비건적‘인 작은 노력들에 대해서도 충분히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비건은 소수자 운동을 넘어서서 정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54

[ ] 덴마크, 독일, 스웨덴에서는 이미 ‘육류세‘의 도입을 의회에서 검토하고 있다. 지구 온난화와 국민 건강 때문이다. 가디언지는 이 제도가 5-ㅔ10년 내에 도입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의 ‘wework‘같은 기업은 사내의 모든 공식 식사에서 육류를 금지했으며, 업무를 위한 식대도 육류의 경우엔 환급을 안 해주기도 결정했다. 71 이상, 김한민, [아무튼, 비건] 에서

4.

[ ] ˝나는 아직도 당신에게 가고 있는 중일까요?˝/˝나도 가고 있는 중이에요.˝/˝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인가요?˝/˝나도 나에게로˝ 0 김숨, [너는 너로 살고 있니]

5.

[ ] 서른세개의 동사들 사이에서: 빛의 옥상에서/서른세개의 날개를 돌려라//오다 가다 오르다 내리다 흐르다 멈추다 녹다 얼다 타오르다 꺼지다 보다 듣다 생각하다 말하다 삼키다 뱉다 잡다 놓다 울다 웃다 주다 받다 묻다 답하다 밀다 당기다 열다 닫다 떠오르다 가라앉다 부르다 사라지다 넘다//서른세개의 동사들 사이에서/하나의 파도가 밀려가고 또 하나의 파도가 밀려올 것이니/세상은 우리의 손끝에서 부서지고 다시 태어날 것이니//기다리지만 말고 서른세개의 노를 저어 찾아라/세계의 손끝에서 마악 태어난 당신을 나희덕 [파일명 서정시] 에서

볕뉘.

1. 이하석 시인의 젊을 적 시집이다. 사진 속의 그는 모서리가 남아있다. 천둥의 뿌리를 왜 쓰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하였는데 이 시 안에 힌트들이 있다. 쉰여섯. 조금은 미숙한 나이. 아니 많이 미숙한 나이. 나에겐 그 나이가 버겁다.

2. 책들을 조금씩보다 놀랍기까지 했다. 어쩌면 한꺼번에 기획을 하듯이 같은 말이, 아니 다른 색의 말들이 우수수 쏟아지는 느낌을 받는다. 어쩌면 폭포같은 하지만 비수같이...침끝같이 온몸에 박혀버린다.... 참 아픈 어쩌지 못하지만 어째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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