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된 기획 - 설맞이 임무 수행처럼 정부의 일들은 뭐라고 하든지 일사천리다. 의도를 가지고 밀어부치는 집단은 하나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역사를 쓰고 있다. 야당은 벌려놓은 일들에 휘둘려 어정쩡한 손들어주기만을 하고 있다. 앞 일에 대한 예상도 없고 대책도 없다. 가장 중요한 일관된 의도도 없다는 것이다. 걸림돌이 없기에 예상되는 반응과 예상되는 결과물들로 자신감은 날로 늘어난다는 점이다. 더구나 대범해지기까지 하고있다. 덩치큰 기획이 더 집요하게 있을 것 같지 않은가. 국민은 국면을 뚫고가는 정치력과 정치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 시나리오도 없고 있어도 변변치 않고 파놓은 함정에 예쁘게도 안착만하는 건 아닌가. 욕이나 해대고 실정에 대해 목소리만 높이는 건 답이 아니지 않는가. 그것도 몰려서 결국 편드는 건 익히 보아왔던 거 아닌가.

발.

1. 새벽꿈이 선명하다. 자취방같은 곳에서 합숙이다. 어제 카페에서 본책들의 속편들이 널부러져 있다. 건너방에서 나눈 gs의 디자인의 디테일에 대한 질문에 sd와 나는 명확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 그 방에서 일어나 나오니 금방 따라 나섰다. 건넌방의 온기는 한숨 더 자야살 듯 gm과 sm은 잠을 더 청했지만 일어나 나갈 맘으로 칫솔을 찾는데 낡고 헤져 쓸수가 없다. 그새 sd은 이부자리를 갠다. 거드니 문밖에서 차가 후진을하고 gm은 장난감 안경에 댄스에 노래를 부른다. 그만하라고 소리치지만 머쓱하다.

2. 잘 되게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안되게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그 짓을 하고 있다. 그 책임은 모두가 져야한다는 것이 더 무섭다. 지혜가 각별한 이유다.

3. 명절 전부터 일어나지 않은 일이 속보자막으로 도배다. 꿍꿍이도 이렇게 원색적이다. 지속적이고 강박처럼 반복이다. 어어 가 아니라 아아다. 기획의 근저를 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끌려다니다가 서로 손가락질 하는 일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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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봄이 계속해서 방법론적으로 의도한 바는 정치와 경험을 대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계급간 논쟁에서 나타나는 전략의 종합으로 정치 개념을 확대하는 것이었다...노동사에서 이 접근의 정치적 요점은, 일상에서 사회적 대립을 경험한자들보다 전위정당이 피압제자의 계급이해를 더 잘 통찰할 수 있다는 개념을 역사적 근거에 입각하여 거부하는 것이다. 346-347

 

홉스봄은 영국의 노동귀족에 관한 두 개의 대논문에서 임금차이를 정교하게 재구성함으로써 실제로 레닌이 추정한 대로 더 많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 계층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리고 그는 1830년대와 1840년대의 격렬한 논쟁들 이후에 계급의식이 중립화되는 책임을 이 계층에게 돌렸고, 이것이 1890년까지 진행된 빅토리아 시대의 놀라운 안정의 원인이라고 보았다. 347

 

좌파 정치운동의 성공 여부는 그들이 광범한 조류의 사회세력이 동원된 원시적 반도 叛徒들에 연결되는가에 좌우되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이전의 저항형태가 팽창된 산업자본주의의 조건 아래서 어떻게 변화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이 학문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문제가 되었다. 홉스봄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적들의 경험과 정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특수한 언어와 상징세계로 표현하면서 낯선 환경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이주민들의 경험을 비교했다. 349

 

그는 1789 -1848년의 대혁명안에서 하나의 포괄적인 변환과정의 개별 요소들을 총괄하고 그것이 자유와 평등 자체의 승리가 아니라 이 가치들에 의거하는 부르주의자유주의 사회의 승리였으며, 근대의 관철이 아니라 세계의 어느 특정 부분에서 이루어진 경제와 국가들의 관철이었다고 보았다. 홉스봄은 특정한 경제적 형세에서 일어난 사회적 관계가 결국 사회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고 그러한 점에서 학문과 종교와 예술도 각인한다고 논증한다. 351

 

프랑스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를 다룬 세 권의 서술은 20세기 삼사분기에 시도된, 드문 세계사적 노력들에 속한다. 그것은 브로델의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세계경제의 역사와, 근대 세계체제에 대한 윌러스틴의 서술과, 자본주의와 시민계급의 관철에 대해 마르크스적 입장의 역사를 인상적으로 증언한 코속의 비교혁명사에 비견되며, (근대화 이론의 보편주의에 대한 모든 비판세서 거의 자명한) 유럽의 우월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연구들과 함께 한다. 이 점은 1990년대의 지구사에서야 비로소 점차 의문이 제기되었다. 353

 

홉스봄이 현실사회주의 실험의 운명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지만, 동시에 그는 장기 19세기에서 그가 제기했던, 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생존능력이 어떤 상태였는가 하는 질문에 충실했다. “파시스트 도전자에 맞서 자기방어를 위해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일시적으로 이룬”, 그리고 민주주의를 구한 기묘한 연합이” “결정적인 순간이면서 동시에 역사적 모순으로 나타난다. 354

 

홉스봄의 세계사적 접근은 모방적인 동의보다는 오히려 경외로써 수용되었다. 베버와 마르크스의 논쟁을 능가하는 역사적 사회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홉스봄의 고백은 새로운 방법론 성찰을 위한 요구로서보다는 오히려 어느 퇴직 교수의 기이한 괴벽 또는 존경할 만한 원칙의 충실로 여겨진다. 그에 반해 홉스봄의 성공은 유럽에서 일어나는 세계사 서술의 르네상스에 대한 고무적인 신호일 뿐 아니라 역사학에서 마르크스적 관점의 매력이 결코 쇠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보인다. 358

 

 

 


 

 

 

 

 

 

 

 

 

 

소설가에게도 그렇지만 역사가에게도 모든 사람의 사생활은 원료와도 같은 것이어서 나는 극단의 시대의 도입부에서 이분들이 만났던 정황을 써먹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들은 두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빈으로 거처를 옮겼다. 20

 

 

1920년대의 중산층 집안에서 자란 아이에게 빈은 어떻게 보였을까? 문제는 그 당시 사람이 알거나 생각했던 것과 자기가 그 다음에 깨달은 내용을 구분하는 것이고, 어른들의 경험과 반응을 그 당시 아이들의 그것과 구분하는 것이다. 1917년에 태어난 아이들이 이제 막 20세기 문턱으로 들어선 그 시대에 대해서 아는 사건이 있었다면 그것은 부모님이나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아직도 현재형으로진행되고 있던 전쟁, 몰락, 혁명, 물가 앙등처럼 어른들이 우리한테 해준 이야기였고 더 개연성이 높기로는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우리가 엿들은 것이었다. 30

 

게토에서 나와 사회에 동화된 빈의 유대인은 동유럽 유대인을 마치 딴 종자인 것처럼 말했다.(우리하고는 너무나 달라 보이는데 동유럽 유대인도 우리와 비슷한 성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성인지, 가족 중에 나이 든 어른한테 물어봤을 때 그분이 곤혹스러워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오스트리아 국민이 히틀러의 독일에 병합되는 것을 열렬히 환영한 것은 상당 부분 이것으로 설명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그들의 정치적 우월감에 부응했던 것이다. 34

 

1920년대 빈에서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어린아이가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성에 눈을 뜨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정치 의식을 갖게 되었다. 37

 

1920년대의 현대 복지국가는 중산층 가정에는 복지 혜택을 거의 주지 않았다. 복지는 어디까지나 노동자 우선이엇다. 그렇다면 누구한테 손을 내밀겠는가? 어려움에 처한 친척을 아무리 평소에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어떻게 안 도와줄 수 있겠는가? 특별히 유대인 가정만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외가쪽 식구들은 적어도 빈에 사는 일가 친척은 가끔씩 만나야 한다는 공동체의식이 있었다. 노천 카페 같은 데서 어른들이 둥근 식탁에 빙 둘러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면서 세상 사는 이야기도 하고 집안 문제를 결정하기도 했던 걸 지루하게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39-40

 

오스트리아의 웬만한 중산층 가정도 전쟁과 전후의 피폐한 현실에서 평화기그러니까 1914년 이전보다 어렵게 살아가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내핍 생활을 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 중산층이 돈 없이 산다는 것은 참으로 고달픈 노릇이었다. 어차피 없이 사는 데 이골이 난 노동자보다 사실은 더 힘들다고 중산층스스로는 생각했다.(나중에 내가 머리가 좀 굵어져서 공산주의에 심취했을 때 그레틀 이모는 그런 너무나도 당연한 주장을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42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사람으로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다. 내 경우로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한 세기의 4분의 3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쌓인 지질학적 퇴적물을 벗겨내 그 속에 묻혀 있던 낯선 사람을 드러내거나 찾아내서 다시 뜯어맞추는 것을 뜻한다. 103

 

 

 

 

 

 

 

 

 

 

 

 

 

 

 

 

볕뉘.

 

1. 확신이 없어 전기를 맛보고 들어갈 생각으로 [역사학의 거장들 역사를 말하다]를 집어들었다. 일목요연하게 쓴 글은 전체적인 윤곽을 훑어보기에 좋았다. 그리고 동네 카페의 지정석에 자리를 잡았다. 에릭 홉스봄의 자서전인 [미완의 시대]다. 바쿠닌의 자서전이나 러셀의 자서전과 사뭇 다르다.그것도 자신이 몸담은 20세기를 담는다는 건. 빨려들듯 어김없이 빈의 거리와 베를린을 살아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패와 활자화된 역사가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상을 롱샷과 근접샷을 번갈아가며 다루는 솜씨는 아연해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읽어내느냐보다 얼마나 길게 따라가느냐가 더 중요할 것 같다. 재즈와 의적을 먼저 연구한 그다. 곳곳에 우리와 다른 문화적 퇴적물이 보인다. 전체적이면서 세세한 조망은 많은 것들을 느끼게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혹 사숙하는 도반이 있다면 한결 수월할 것 같다. 소개글과 자서전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2.  숙모가 위중하다는 소식이 자정무렵 사촌동생에게서 왔다. 마음이 잡히지 않는다. 일터일 마무리하고 급히 서울행이다. 알아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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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대길 건양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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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대길- 봄은 들이는 것이 아니라 불쑥 들어서는 것이라합니다. 씨앗도 새싹도 따듯한 볕에 뭉실몽실 틔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좋은 일들 많이 만들고 가슴에 들어서길 바랍니다. 볕 좋은 날 볕뉘도 온기가 비치는 날. 경사스런 일들만 함께하길요. 책좋아하는 분들께는 더 더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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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마음도 있고, 일도 한 매듭이 풀리는 참에 탁 트일 무언가 필요한 듯싶었다. 영상이 아니라 사진처럼 장면장면 다가온다 싶다. 시종 영상에 더 끌렸다. 극장에 오길 잘 한 듯 싶었다.  배경으로 깔리는 시대는 개척이 아니라 유린, 돌아온 밤. 몇권의 책을 펼쳐보다.

 

 

 

 

 

 

 

 

볕뉘. 사회변혁적 노동조합운동은 노조와 임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생디칼리즘(신디컬리즘)을 통해 혁명이나 변혁의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생각보다 긴 시간 이어져 왔으며 통일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아이슬랜드 등등. 스페인의 내전직전까지 아나코생디칼리즘 구현이 궁금하기도 했었는데 참조가 될만 한 듯하다. 사회주의 미국을 상상하다는 자본주의 역사가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곳에서 사회주의가 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새겨보아야 한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미국은 충분히 물적토대가 되었으며 실현가능하다는 점을 든다. 이 책은 88세의 여류 사회주의운동가 프랜시스 골딘의 희망사항이기도 하다. 버니 샌더스의 돌풍의 진원을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싶다. 일본 구마모토 평화활동가는 낙뢰전문 전기기술자이다. 65세의 나이에 아이같은 웃음이 매력이고, 팝송이자 기타연주자이기도 하다.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imagine이다. 노래가 맴돈다. 이 책도 이 노래로 시작한다.  늘 역사는 다시 맴돈다. 다시 상상하는 것이 더 빠를 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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