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음

 

 

사람들은 마음에 실체가 있느냐고 묻는다. 마음에 달렸다라는 말처럼 관념론에 기반한 사고때문에 그 마음이 오해를 받는 것은 아닌가 한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져보면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는 현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사람은 마음에 있는 일에 열정을 기울이거나 시간에 대한 맷집으로 드러내놓기 때문이다. 논리나 이성, 토론, 논쟁의 자리에서 사람들은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을 분간하려 애를 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의견의 바닥에 깔린 마음을 헤아리기는 어렵다. 늘 진심은 시간에 바래면서 제 모습을 드러내놓는 이유이다. 진위의 자리에 이 마음은 기웃거리고 드러내놓지 못해 상황을 딛고서지 못하기도 한다. 그런 연유로  객관적인 사실이나 논리보다 마음이 더 유물론에 가깝다고 여긴다.  이런 바탕때문에 지금여기의 진보를 믿지 못하는 이유로 마음을 든다.

 

 논리와 이성에 얽매여 마음은 분주하기만 하다. 반짝 눈빛에 감도는 따듯한 마음은 어느 새 해야할 일에 얽매여 마음은 그 사람밖에서 어슬렁거린다. 마음을 모으고, 마음을 어루만지며, 마음을 키울 수 없다. 그 마음은 벌써 여기저기 바쁘게 쫓아가기만 하여 잡을 수 없다. 마음은 끊임없이 갈라서며 마음 모으는 일들 사이 산길에 돌탑처럼 아무것도 쌓이는 것이 없다. 마음은 없고 갈길만 있어 늘 그 자리다. 마음 주는 이들은 많지만 마음이 맞춰지지 않는다. 마음을 비우고 언제 시간에 무르익어 마음이 우연히 딱 맞는 날이 있을거기 때문이다.  이론이나 사명감, 논리보다 마음을 살핀다면 분명 진보의 걸음걸이와 뒷모습이 달라질텐데 말이다. 보무도 당당하게...

 

 

모 임 

 

하나가 아니라 둘, 둘이 아니라 셋. 모임은 연애보다 사랑보다 어려우리라. 왜 둘만이 아니라 셋이상을 지향하는 그 몸말때문이다.  사실 마음이나 모임이나 그 형태소를 보면 다를 것이 하나 없다. 위치와 순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둘이 아니라 셋은 열리고 창조적인 공간이다. 풍성해지는 시작이다. 하지만 뭔가 바라고, 그곳에 쑤셔넣어야 할 것이 있고, 사명감의 단위로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가 들어서는 순간 비참을 각오해야 한다. 모임은 다름을 받아들일 감수성의 공간이다. 모임은 다름을 만드는 창조성의 공간이다. 모임은 다름을 통해 자라나는 시공간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이런 결사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많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민주주의에 대해 진지해본 적이 별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자유스러움에 대해 세심해본 적이 없다.

 

 

나-너 

 

나가 아니라 나-너  또는 너-나, 이것도 많이 부족해 나-너-,  너-나- 에 점선이나 실선을 긋는다. 나의 과잉의 시대, 약한나, 먼나로 나를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강한나의 중력이 무시무시한 나만의 시대. 그래서 너의 손길에 모멸차다. -너의 관계 속에 풍요로워지는 나가 없다. 오로지 나만의 건강, 강함의 족속만 있다. -너-나-너의 추체험이 가능하지 않는 시대이다. 무수한 학문도 이를 가정하고 독립된 나가 없음에도 가정하고 사상누각을 만들어 버렸다. 너의 손길 속에 자라고, 내가 너 속에 깃들여짐으로서 여기까지 왔음에도 너의 호흡이 없이 한순간도 서 있을 수 없는데도 여전히. 아름다움은 불쑥 다가서는 너로부터 생기는 것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나'이다. 학문을 소각해서 없애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 개인을 필요에 의해 만든 뒤로 이렇게 뒷걸음치는 나밖에 없다면 그 의심은 오로지 '나'가 받아야 한다

 

 

온 도 

 

 물과 얼음, 물과 수증기. 얼음, 수증기, 눈의 실체를 믿는다. 거기에다가 변하기 전 그 설레임을 더 믿는다. 온도! 늘 마음과 몸의 경계에 두는 말이다. 지금보다 나은 덧셈의 말이기에 들으면서도 흔들린다. 마음이 통하고 흘러갈 수 있기에 너로 향하는 몸짓이기도 하다. 전복의 말이 아니라 몸짓, 맘짓, 손짓 모두를 조금이라도 받아주는 말이어서 반갑다. 어디에 의탁하는 말이 아니어서 좋다. 나의 끄트머리, 먼나의 곁에 늘 너란 빈칸을 두어서 좋다. 모임과 모임들 사이 어디 하나 우쭐거리지 않아서 좋다. 만남과 만남 사이 냉정히 소비하고 취사선택하지 않아 좋다. 때를 기다려주는 다정다감의 다리는 놓는 말이어서 늘 곁에 두고 싶다.

 

 

뱀발. 자주 쓰는 말들. 혀끝에 맴도는 말들이 별반 많지 않다. 딱딱한 말들은 혓바늘을 돋게 만들어 불편하다. 벗들은 말한다. 당신 말은 너무 추상적이라고, 모호하다고도 한다. 그렇다고 고쳐야 한다는 고치고 말리라는 다짐을 해야하는 이유가 된다고 여기지 않는다. 여울은 여울이고 느긋하게 몸에 담긴 것이 그 색깔이기도 한 연유겠다. 보살펴 살핀 말들, 살피고 싶은 말들에 대한 태그를 달아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다. 너에게로 향하는 점선에 실선을 조금씩 덧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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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끝난 늦은 밤 폰에 연락흔적이 남는다. 걸음 걸음 찾아간 소극장 무대. 나무밴드 노래가 흐르고 편안한 자리에 흥겨움이 잔뜩이다.  즉석 만찬자리. 쉴새없이 무대를 채우는 배우들의 움직임이 날렵하고 야무져 빈틈이 없다.  약속에 없던 만남! 늦은 시간 뒤풀이 자리를 채운다. 자리를 옮겨 공통약수인 노래와 지인의 만남 속으로 헤집고 들어간다. 편안한 일상을 거스르는 편린들의 삶, 박사 공무원을 팽개치고, 삼성이란 직장을 그만두고 삶터를 달리 잡아 귀농하신 분들, 싱어송라이터인 아들 동*,  지방소극장 극단대표, 젊은 배우들... ...

 

 

어느새 아버지가 되어, 욕심이 검질기게 붙어있거나, 열리지 않는 완고함의 더깨가 발바닥의 각질처럼 앉아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수만큼 삶이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삶을 먼저 이야기하지 않는다. 삶은 여유있는 자들의 몫이 아닌데도 금기처럼, 아니면 현실의 압박에 밀리거나 자칫 낭만이라 여겨 한켠으로 미루어졌던 것은 아닐까? 무지하거나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이런 삶에 가로지르며 흔적을 남기는 것이 지금인지도 모른다.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삶에서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짓을 본다는 건, 마치 춤사위를 보는 듯하다. 한 소절, 한마디의 대사, 농사짓는 한땀의 땀방울이 힘이  한발치 떨어진 나에게도 전해진다. 세상의 뭇매, 돈의 뭇매가 강하더라도 그동안 지켜온 삶의 이력들이 고맙고, 지켜낸 한마디 한마디가 힘이 되는 만찬의 자리는 강열하다.

 

 

새벽이 익어  동백꽃처럼 떨어진다.


어느새 밤은 깊은데  기운이 안개처럼 스며들어 뚝뚝 떨어지는 밝은 어스름이다.

 

 

뱀발.


1. 지난 밤 한밭 신 문화의 중심 골목에서 연 콘서트에 다녀오다. 몸도 물먹은 솜이불처럼 가라앉는 날, 마음이 싸해지는 만남이라 적잖이 부담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돈맛으로 움직이는 음반시장의 흔들리는 유혹은 더 강렬했다고 하는데, 모질게 마음 먹는다고 한다. 동의는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완도 옆에는 맑은 섬들이 있다. 고금도, 신지도, 청산도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문화의 자장이 달리 움직이는 곳이고 시간이라는 조바심만 열어둔다면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싶은 것을 더 채우다보면 나무 곁의 사람들 도움말처럼 편히 익어 흘러넘치지 않을까 싶다.


2. 노래가 좋단다. 3곡 [사랑이 아냐],[세상이 나를 살게하고], [아버지] 그리고 다른 곡들은 듣고 또 들어도 물리지 않는다. 아픔이 배여나와 들을수록 진하다.


3. 연인인 젊의 배우들의 끼가 넘쳐 숨돌릴 틈도 없이 웃다나니 취기도 사라진 아침이다. 쌀쌀함이 추위로 바뀌는데도 아빠의 너그러움을 고스란히 받은 동*(여유)의 자작곡의 노래를 듣지 못해 아쉽다

 

4. 너무 가까운 나무라 주례사도 소개도 하고싶지 않았는데, 들을 때마다 아리다. 세속이 묻어있다는 노래가 맴돈다.  아주 많이 마음을 흔든다. 듣고 밤새 울었다는 그녀의 맘이 정직한거다.  기죽지 말고 힘내... ... 살아지지 않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지는 사람들 보다 많아질 때까지..그렇게 사는거다. 바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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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과 목포의 거리이름이 일상의 심미성에 미치는 서설 연구

 

 

초록


이름을 짓고, 이름이 불리며, 이름에서 만나고, 이름을 나눈다. 언어가 갖는 무의식적 함침은 무딘듯하지만 날카롭다. 애써 경관 5)이란 말로 확장하지 않더라도 익숙한 문자에 서서히 몸은 익는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운전자나 생활자로서 일상은 습속을 갖는다. 여행자나 낯선자의 시선은 그래서 또 다른 보기나 다른 문화자산을 향유하는 출구다. 그 실뿌리를 찾아 연구프로젝트4),5),6),7)의 손을 빌리지 않고 쓴다. 천천히 음미하는 산책자의 모습으로 품어온 흔적을 남긴다. 이름을 삼키는 아픔은 때로 거부하는 몸짓이고 싶다. 때로는 거리를 걷는 연인이 대화하듯 지나치는 예쁜 거리의 이름들을 음미해 지금과 달리 어루만지길 꿈꾼다. 아이들이 뒤뚱거리며 걸음마를 하는 속도로 거리를 몸에 배게 할 때를 생각해본다. 장소로서 명명하는 것이 아니라 활발한 시공간을 담고 있는 이름으로 거듭나며 불리길 상상해본다.

 

 

들어가며


세상은 이미 마을과 거리 이름으로 기억과 향기를 간직하지 못한다. 도시의 익명성과 잠시 머무름으로서만 거리를 기억할 뿐이다. 거리와 마을이 향기와 몸으로 체험되고 오감을 충동하는 시공간을 살아내기에는 너무 바쁘다. 거리의 나무한점, 구름한점 마음 속에 붙잡아 두지 못한다.  부질없이 보이지도 않는 무심한 거리이름을 겨워내는 것이 바람직한 일과 상관없는지도 모른다. 도시의 추체험자로서 새로운 도시의 경험자로서 마추치는 거리이름를 비교하여 대면시켜본다.

 

 

목포

 

바닷가 물이끼같은 수분이 증발한다. 코끝과 살갗을 미끌거리며 비껴간다. 음미하듯 걷고 달리는 부주산을 품고 있는 부주로에서 보면 후광대로를 따라 줄지어선 당종려나무와 비파나무의 진초록이 파릇거리는 바다의 물결로 흔들린다. 근대사산책팀이 한밤을 통채로 쓸고 지나간 날 장미의 거리 부근의 순대국과 흐릿해진 기억들이 새롭다. 늙은 큐레이터의 거칠은 목소리의 남농기념관의 소나무 그림과 책자는 갓바위의 완만한 곡선을 따라 남농로로 이어진다. 미항로부터 시작하는 여객선들과 갈치낚시배들은 밤이 깊도록 불야성을 이루는 계절이 있다. 연두네가 목포로 내려온 날 마신 평화주나 인동주, 그리고 맥주한잔 회포를 풀던 곳이 통일대로와 원형로 주변이다. 보름달이 잔잔한 영산강과 월악산에 서로 비치는 길 역시 녹색로이다. 2) 3)

 

 

포항

 

새벽 택시기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악센트의 꼬리를 잡을 수가 없다. 몇번씩 되뇌이는 뭐라고요?는 살짝 열린 문틈사이로 빠져나간다. 엇 박자, 서로 공명하지 않는다.  그 모호한 리듬을 틈타 어느새 새천년대로를 지나 철강산단로를 달리고 있다. 또 하루는 옥산, 옥계계곡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목적지를 가리키는 네비는 연신 끝도 없이 새마을로만 가르친다. 콘크리트를 심어논 새마을은 증발하지 않는다. 하루 두대 새마을호는 포항 전역인 효자孝子역에 멈추지 않는다. 새마을이란 고유명사는 이렇게 인상깊다. 해병부대 근처 해병로, 어김없이 훈련병을 맞는 부모와 친척이 해후한다.  신흥로나 중흥로는 일제와 산업역군을 떠안듯 많은 도시의 동명이소이다. 한켠의 정몽주로나 포은로를 가장자리로 해서 철강로, , 포스코대로, 새천년대로와 희망대로가 삶의 젓줄이란 두툼한 옷을 입고 봄이와도 옷을 벗지 못한다.

 

 

호명이 일상에 미치는 사례

 

SNS에 오늘 철강로를 산책했네여...블라블라보다 장미의 거리에서 만나 활짝 핀 꽃속에 한참 머무르는 정경은 비교하기에도 머쓱하다. 그렇게 말들이 겹치거나 농축되는 사이 한 만번쯤 익숙해질때 광고에 노출된 무의식처럼 이 시공간에서는 무채색의 덧칠이 되어간다. 이름이 뭐 대단한 일이 되겠는가 하고 여기는 사람들의 소양을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이들 이름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것을 보면 이름이 중요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새천년, 백년, 희망이란 레토릭 역시 삶과 일상을 담아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도시가 마을의 색깔과 기획을 갖는 것은 더할 나위 없지만 던져진 이름으로 일상의 회자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좀더 시민의 소양과 상상력이 자랄 수 있는 토양과 자립적인 관심이 일상화되어야 할지 모른다.

 

그런면에서 도시 앞의 거리를 나름대로 부르고 아끼는 것도 한 방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둔산초교 앞 골목을 아**미로라고 서로 호명하거나, 둔산 시*단체로로 불리는 순간, 또 다른 공간으로 아끼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지 않을까? 화분이나 무엇인가 주인없는 빈공간이 아니라 관여하고 싶은 거리로 다시 피어날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혼자 부르는 거리 이름이 아니라 부르고 싶거나 불러주고 싶은, 너-나의 자장 속에 회자되는 이름으로 불린다면 어떨까? 아**미로의 1호 목련과, 은단풍나무, 그 사철나무를 공유하거나, 연산홍을 분양할 수 있는 관계공간이 확장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스며든다.

 

행정의 편의에 사로잡힌 1로 2로가 아니라 또 다른 골목길의 이름을 공유하고 쓰이는 머무르고 싶은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일은 돈이 많이드는 일도 아닐 것이다. 문화자본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서로 부르다가 공개적인 이름짓기 위원회가 생겨 장사 속으로 매몰된 이름사수투쟁이 아니라 인문의 향기나는 경쟁이라도 벌어지면 더 좋은 것은 아닌가? 거리이름짓기가 아카데미로와 시(민)사(회단체)로로 팽팽하게 경쟁한다면 행정 편의 속에 함몰된 둔산로 74번길은 잊혀질 것이다. 머무르고 살고 궁금한 거리로 톡톡 두드리는 순간, 그 시공간은 심미적인 공간과 사회적자본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되는 것은 아닐까?

 

........

........ ing

 

 

 

 

참고문헌

 

1. 포항거리이름들    - 괴동로 · 기림로 · 기북로 · 남원로 · 남미질로 · 달전로 · 대송로 · 대신로 · 대이로 · 대해로 · 도솔로 · 도음로 · 동빈로 · 동해대로 · 동해안로 · 두호로 · 문덕로 · 문덕서로 · 문예로 · 법원로 · 보경로 · 봉좌로 · 부남로 · 불종로 · 비학로 · 새천년대로 · 상대로 · 새마을로 · 서원재로 · 소티재로 · 송덕로 · 송도로 · 송림로 · 신덕로 · 신흥로 · 삼호로 · 삼흥로 · 상공로 · 서동로 · 섬안로 · 성실로 · 수목원로 · 신덕로 · 신항로 · 아치로 · 아호로 · 양학로 · 양학천로 · 연일로 · 연지로 · 영일만항로 · 용당로 · 용흥로 · 우창로 · 운하로 · 월포로 · 이동로 · 자명로 · 장기로 · 장량로 · 장량중앙로 · 장성로 · 장흥로 · 정몽주로 · 중앙로 · 죽도로 · 죽장로 · 죽파로 · 중성로 · 중섬로 · 중원로 · 중흥로 · 지곡로 · 천마로 · 창흥로 · 철강로 · 철강산단로 · 청암로 · 축항로 · 충무로 · 칠성로 · 칠포로 · 포스코대로 · 포은로 · 하원로 · 학산로 · 한동로 · 해동로 · 해병로 · 해안로 · 호동로 · 호미로 · 효자로 · 환호로 · 흥해로 · 희망대로


 

2. 목포거리이름들  - 통일대로, 후광대로, 백년대로, 미항로,평화로,장미로,녹색로,비파로,교육로,삼학로,영산로, 유달로, 해양대학로, 번화로, 수강로, 만세로, 호남로, 삼일로,청호로, 호정로, 산대로, 산정로,연동로,동영로,남농로,안장산로,용두로,용해로,이로로, 마파지로, 연산로, 원산정로,터진목로,죽선로, 죽교천로,양을마을로,상동로,석현로,선곡로,부주로,옥암로,신흥로,삼각로,하당로,송림로,임성로,당가두로,정의로,남악로,원형로,포미로,대양로


 

3. 목포 자전거도로지도

 

 

 

 
4. 이시철, 도시정책과 토지 다이어트의 건강영향 모색, 한국도시행정학회 도시행정학보 제25집 제1호, 2012


5.국립국어원, 언어경관 조성 장기계획 연구, 한국건축역사학회 , 2006: 언어 경관 조성에 대한 외국사례와 법,제도적 정착 시범지구 사업에 대해 전반적인 검토를 한 논문.


6. 김효정,유승호,김민규, 문화도시 육성방안 연구,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 2004 ; 도시의 활동성, 창조성, 쾌적성, 심미성, 문화성,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한국형 문화도시 조성계획 수립에 도움을 주기 위해 연구한 논문


7. 김미영,문정민, 도시 재생 관점에서 문화의 거리 공간특성 분석, 한국실내디자인학회논문집 제19권 6호, 2010

 

연구 ▼

연구는 인문적 소양을 품어야 한다. 연구는 장황하지 않아도 된다. 연구는 삶의 경험을 데이터로 쓸 수 있다. 연구는 도표가 없어도 된다. 연구는 딱딱해야만 할 필요는 없다. 연구는 그것을 바탕으로 그렇게 하고 싶거나 할 수 있도록 충동을 일으켜야 한다. 통찰을 우선으로 한다. 이론적인 근거도 좋지만 일상을 꿰뚫는 삶의 경륜이나 사회의 막힌 혈을 뚫는 통찰을 엿볼 수 있으면 된다. 논문으로 도서관에 사장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나 술자리에 회자될 수 있는 연구를 더 환영한다. 논문들 사이를 간추려 또 다른 움직임의 근거를 만들 수 있다면 그 가공물도 포함한다.

그리고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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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짜투리연구] 고객은 왕이 아니다 - 호칭으로 바꾸는 문화(생협,ing)
    from 木筆 2013-03-13 12:32 
    고객은 왕이 아니다- (생협일터) 호칭의 변화로 만들어 보는 또 다른 이정표 초록소비자는 왕이다. 소비 지상주의의 중독은 모든 관계를 상품과 나로 환원한다. 물건 외에 다른 관계는 묻지도 보지도 않는다.착한 소비만 볼 것이냐? 이것 역시 자유롭지 않다. 소비일뿐 착한은 곁눈질에 불과할 수도 있다. 착한 소비로 안심이다. 나머지는 관심없다. 소비라는 깃발이 남긴 잔흔은 깊다. 승리의 쾌감은 짜릿하다. 주인이 되어보는 쾌감, 순간 귀족이 되는 관계의 역전.
 
 
 

 

뱀발. 

 

1.  차로 도시의 이름있는 곳을 다녀보니 관통하는 도로의 줄기를 어림잡아 알 수가 있다. 책마실보다 몸을 풀어줄 겸 나선다. 나서기가 무섭게 바람이 차다. 잠시 강변을 나서니 열심히 공사중인 곳 말고는 보도와 자전거로로 차도와 강둑을 따라 따로 나서니 편안하고 좋다. 휘황한 불빛과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 작은 배가 있어 낯선 곳임을 알려준다. *포와는 사뭇 거리이름 부터 다르다. 철강대로, 중흥로.....평화대로......

 

2. 일요일 연습삼아 사둔 아크릴물감과 보조재료를 다루기가 영 어색하다. 캔버스에 색도 제대로 나지 않고 붓질도 마뜩하지 않다.  그려보는데 얼굴도 화끈거린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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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 2013-02-05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멋져요,, 저는 재능을 가진 분들이 너무너무 부럽사와요,,

여울 2013-02-05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얼굴 화끈 ㅡ 분발하고 노력할께요. ""
 
 전출처 : 파란여우님의 "트위터를 폭파한 이유"

 

 

파란님, 진도를 많이 나가셨네요. 혼자 블폭?을 할까하다가 몇달 자정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ㅎㅎ 그러다가 심증은 가지만 확증이 없어 쉬쉬하게 되었죠. 이렇게 파란님 글을 대면하다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가상공간이란 것이 예스만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현실의 아니오는 아예없죠. 아니오가 실재를 붙잡아주는데, 늘 녀석들은 예만 바라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저도 그런 중독자이기에 두렵습니다. 현실의 근육이 무뎌지거나 흐물흐물해져 걸을 수도 없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여우님 제안에 솔깃하네요. 고독의 근육!!

 

 

말과 행동, 그런 면에서 욕이 제일 자극적이긴 하죠. 욕설이 아니라 욕이 없는 시공간! 현실과 삶에서 빠져나가 토닥거리기만을 원하는 공간 다시 한번 불꽃 화살을 날려봐야할 것 같네요. 점점 외로워지고 더 더욱 자신과 삶에 소통이 요원해지는 이유를 말에요. 반가워요. 이것도 나와바리와 위무에 대한 이기심이기도 하겠죠. (여울에겐 맹세의 고고학과 피로사회가 가상공간에 대한 문제인식이론으로 도움이 되었어요.)

 

 

 


 

 

결코 저항적일 수 없는 가상공간,SNS

 

새로운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도 타자를 향한 존재의 두께를 더욱 줄여놓는다. 가상공간에서는 타자성과 타자의 저항성이 부족해진다. 가상공간에서 자아는 사실상 "현실원리"없이, 다시 말해 타자의 원리와 저항의 원리에 구애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 가상현실 속의 상상적 공간에서 나르시스적 주체가 마주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다. 실재가 무엇보다도 그 저항성을 통해 존재감을 가진다면, 가상화와 디지털화의 과정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그러한 실재를 지워나간다. 실재는 두 가지 의미에서 우리를 붙잡는다. 즉 일을 중단시키고 저항하여 우리의 발목을 잡을 뿐만 아니다 기댈 수 있는 받침대로서 우리를 잡아주는 것이다.95


맹세의 새로운 위치

 

인간성이 어떤 탈구 앞에 처해있다는, 적어도 살아있는 존재자를 언어와 묶어주었던 결합이 느슨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한편에는 갈수록 더 순전히 생물학적인 실재로, 벌거벗은 삶으로 축소되는 '살아있는 존재자'가 있다. 다른 한편에는 미디어 테크놀로지에 기반을 둔 각종 장치들을 통해 더욱 더 공허해져버리는 말의 경험 속에서 인위적으로 전자에 분리되는 '말하는 존재자'가 있다. 그러한 말에 대해서는 책임지는 것도 불가능하고 또 그러한 말 속에서는 정치적 경험 따위는 갈수록 더 미덥지 못한 것이 되어버린다. 말과 사물(사태)과 인간의 행위를 하나로 묶어주는 윤리적인 연관이 깨지면 사실상 한편으로는 공허한 말이, 다른 한편으로는 입법장치들이 대대적이고 유례없이 만연해 더 이상 통제 불능으로 보이는 그러한 삶 전반을 법으로 집요하게 틀어쥐려고 한다. 145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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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거울 속의 나 (ing)
    from 木筆 2013-01-10 11:11 
    거울 속의 나 - 삶은 계란 팔아요 점점 거울을 보는 횟수가 잦아든다좋아요추천에 근력을 잃는다어느새 흐물흐물 유체이탈한 나는몽롱한 너를 만나 흐물흐물아 이 유치찬란은좋아요리트윗추천의 터네이도로, 어느새 태풍의 늪에 빠져있다 아니오머뭇거림쉬어감과 방지턱이 없는 예스의 고속도로블로거들과 트윗터들과 페부커들이 yes의 연대, N극과 S극으로 유유상종한다 삶도 없고 아니오도 없고술자리의 치고박고도 없고그래그래만 있는 유토피아 오늘도 그 거리만 걷는다. 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