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거의 인문(酌)

1. 가끔 사람들이 그리워지면, 내 마음이 사람들의 울타리 안에 머물고 있는지? 몸이 썰물처럼 밀려나가고 마음만 온전히 남게 되면, 마음 속엔 온통 사람들이 머물고 있음을, 그리워지는 사람들이 그렇게 서성거리고 있음을 느낀다. 내 머리가 아니라 내 몸이 그렇게 사유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 이렇게 생각 속에서만 배회해서는 되지 않는 것이란 것.


2.  그런데 블로거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교차되지 않는 동선, 마음의 그림자만 보여 불안하다. 삶의 동선에서 교차되지 않기에, 그게 뭐 대수인가라고 하지만, 마음들이 울타리안에 머물러 그 마음의 빗물들이 웅덩이에 고이지 않나 싶다.


3.  가끔 머리, 가슴, 몸, 손, 발을 따로 보고 거기에 꼬리말을 붙인다. 머리의 연대, 가슴의 연대, 몸의 연대, 손의 연대, 발의 연대로 말이다. 그러다가 머리(만)의 연대, 가슴(만)의 연대, 몸(만)의 연대, 손(만)의 연대, 발(만)의 연대로 이어가다보면 아프다. 그런데 일상이 그렇게 섬처럼 인지되고, 그 섬을 당연히 여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현실의 진동을 넘어서지 못하고, 그 벽의 자장안에 더 강하면 강할수록 힘들어지는 그런 상황에 가슴이 미어진다.

4. 블로거들의 인문은 벽을 트지 못한다. 갇힌 회로나 갇힌 곳으로 소용돌이의 나선을 그리며 소멸한다. 생활의 자장에 갇혀, 나에게 갇혀 삶은 블로거의 밖을 외출하지 못한다. 빈약한 손과 발. 무서운 속도의 자장. 생각의 과속은 또 다른 색깔을 희석한다.

5. 하지만 누군가 물음을 댈 것이다. 여유가 없으므로 여유가 밀고가지 못하므로 인문은 더 여유없다라구.

1. 그럴까?

2. 삶의 여유가 없다라고 여기나 삶과 여유를 따로 떼어놓고 보면, 연애란 것이 삶의 여유가 있다고 많다고 되는 것도 아니니 그건 핑계의 한부류란 느낌이 든다. 그러니 아마 그것은 머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가슴이 하는 일일 것이다. 가슴이 차가운 사람들의 모임이겠다 싶다. 머리만 끓어넘치는 것은 아닌가?


3. 음주의 잔향은 깊다. 마음을 깊게하거나 들뜨게 만들고, 생각할 엄두를 내지 않던 길을 가게 한다. 그래서 약물복용은 또 다른 진폭을 만들고, 가끔은 이해되기도 한다. 중독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무래도 불특정다수블로거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아마 연애들을 하고싶은가보다. 사람들과 관계하고 싶은가보다. 마음 속에, 밀려나간 몸 속에 꿈 속에 사람들이 남는 것을 보면,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을 궁금해하는 것을 보면... ...

4. 그러다가 마음을 내민다. 머리만, 가슴만, 몸만, 손만, 발만이 아니라 만을 빼내고 (도)를 들이민다. 머리도, 가슴도, 몸도, 손도, 발도. 그래서 머리-가슴-몸-손-발의 그물에 갇히고 싶다. 그 그물에 드러누어 한여름을 보내고 싶다. 해변가 야자수 그늘에 느긋한 낮잠을 즐기고 싶다. 그대도 옆에 눞고 싶은가? 우리는 (만)의 시대에 지치도록 살고 있다고, 그대는 느끼는가? (도)의 시대가 열리지 않으면 (만)의 늪에서 당신의 삶을 소진될 수 밖에 없다고. 당신은 아는가? 당신은 머리가 커서 이미 손과 발이 퇴화되었는지 모른다고, 눈으로만 느낄 수 있다고, 감각이 소멸했고 더 이상 즐거움의 촉수가, 신경이 발라비틀어졌다고... .. 

뱀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살며 몸에 감기는 것이라곤 불감의 기술. 불감은 살아낼 궁리로 이어져 살지 않고 살아지는 삶. 불안을 생산하고 제조하고 갇힌 나는 우걱우적 그것만을 받아먹는다. 이미 씨없는 쾌락만 먹고 싼다. 너로 넘어설 수 없는 금단의 열매만 먹는다. 타들어가는 목. 나는 그칠 수 없다. 이미 세상에 중독되었으므로, 내몸은 담금질 되었으므로. 나를 넘어선 그 무엇도 경험해본 적이 없으므로. 세상은 거울 속에 갇힌 나만 있을 뿐, 거울밖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체념하지 않고 몰락하지 않는 절대나만 있으므로 섞지 않아 살아낼 수 없다. 영원히 너는 없으므로. 너에게서 불감과 불안과 냉소만 받아먹었으므로.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살 수 없다. 체념도 몸에 묻혀 너로 넘어가는 다리. 사그라지는 것도 너로 넘어가는 길. 체념하고 몰락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나는 예외가 될 수 없다. 나만은 고독하지 않을 수 없다. 너를 빌리지 않을 수 없다. 살아지지 않고 살고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삶. 사 ㄹ ㅁ. 아 ㄹ ㅁ.그 공약수와 공배수. 활발한 모임들과 교육, 화려한 강사진과 성찰과 소통에 대한 많은 기획과 행사들. 그 흐름들이 잡고 가는 것들, 섞고 가는 것들은 무엇일까? 뜨거운 교감의 경로를 통해 서로 나누어지는 것은 무엇일까? 강연소비자로 더 더 강한 강연자만 찾는 것일까? 그러다보니 강연평론에 익숙해지는 것일까? 그런 앎이 나의 삶과 어떤 공약수가 있는 것일까? 약발이 떨어졌으므로 또 들어야되는가? 삶과 앎을 따로 떼어낸 것이 어제 오늘일이 아니기에, 앎을 삶에 접속시킨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삶이란 도식이 흔들리는 것일까? 앎을 매개로 사ㄹㅁ의 간극은 움찔하게 되는가? 삶의 머리 속에 아편처럼, 아니면 일용할 양식처럼 주입될 뿐, 요지부동인 살음은 별반 달라질 것이 없다.  

인문을 부여잡는 강연의 주제는 유명세인가 삶의 결을 세세히 확장할 수 있는 공감의 노력인가? 더 쎈 앎, 더 강한 강연자의 끌림을 요구하는가?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 없이 높아지는 눈은 또 다른 불감인가? 내 속에 갇혀있는 앎이 흔들려 요동치는 것인가? 그리고 그 앎이 나의 삶의 근저를 따듯하게 만들거나 나의 동선 속에 있는 일상을 다시 다른 눈으로 보게하는가? 그 따꼼한 소리에 명민해지는가? 가까이 있는 너-나로 예민해지지 못하는 나의 삶만이 아니라 나-너의 삶으로 같이 흔들리지 않는 그저 따라만 유행의 바다처럼, 인문의 단맛만 한차례 흘러내려가는 것이라면, 나의 뿌리깊숙히, 너의 뿌리깊숙히 연결짓지 못하는 앎과 삶의 언저리에도 가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저 황수관류의, 또 다른 건강강좌에 별반 비견할 것이 없다. 

앎과 삶의 연장. 확장. 안온한가? 평안하기만 한가? 그 역시 작고 얕아지고 분권이 되지 않으면 현실에서 교감과 현실의 삶의 결 나누기로 이어지지 않을 확율이 크다. 고민은 대행이 되는 것이 아니므로, 고민의 결이 모여 현실의 바다에 해본 것도 한번 없으므로, 그저 아련한 추억으로 향수처럼 흘러갈 확율이 크다. 그렇지 않기로 했음에도, 너도 나도 기획의 전제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낫다는 것이 맞기도 하는 말이지만, 우려는 [왜]하는지보다 그저 유행된 [소통]과 [연대]처럼 빠른 속도로 현실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우려때문이다. 

아무도 유명강좌나 강연회에 까끌까끌하거나 밤톨같거나 현실의 삶으로 농축되는 어떤 다른 것이 얕아보인다. 아무런 연결에 대한 기획이 없는 것 같다. 기우이길 바라지만 어디서나 강좌인데 그 숨결이 진해보이지 않는다. 그냥 하면 낫지 않을까? 막연한 것은 아닐까? 상흔마저, 상흔을 배후한 독식의 흐름. 그저 우연한 접촉점 이상도 아닌 것 같아 불안하다. 지나가는 길에 맛난 음식을 먹거나 좋은 구경했다는 정도의 인식. 우려의 그물로만 기획이 자라는 것 같다. 없는 것 보다 낫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깊어지지 않는 기획이란 늘 제일 우려스러운 것이 단맛이 빠지면 더 이상 거들떠보지 않는다. 너도하고 나도하는 것도 좋지만, 접촉점의 사람들과 교감도 앎도 삶도 별반 까칠함이나 다른관점이 섞이지 못하는 경험은 그 뒷일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주제의 전환과 구체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벡터 vs 스칼라

1. 벡터와 스칼라. 난데없이 노트북이 말썽을 부려 중동난 흔적과 생각을 다시 쫓는다. 그냥 달아나면 편할 듯하지만, 생각의 덧칠은 자꾸 그리로 배회하게 만든다. 벡터와 스칼라. 아마 쉽지 않은 용어일 수 있겠다.  인문계와 자연계를 갈라놓은 현실은 그래도 이곳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많은 연유로 다음과 같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네이버 지식의 답을 옮겨본다.

     
 

스칼라 량 : 질량,길이와 같이 크기만 갖는 물리량
벡  터 량 :힘, 가속도, 속도와 같이 크기와 방향을 갖는 물리량

먼저 스칼라량이란 것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숫자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끓는 물의 온도는 100도, 키가 177m, 질량이 68kg 등등 크기만을 비교할 수 있는 량이다. 하지만 벡터라는 양은 이러한 스칼라에 방향을 덧붙인 것이다. 운동을 할 때 419m를 뛰었다는 것과 남쪽으로 419m를 튀었다는 것과 분명히 다르다. 런닝머신으로 뛸 수도 있고, 제자리에서, 원형트랙에서도 돌 수도 있지만 남쪽으로 튀었다는 것은 지금에서 그곳으로 419m 떨어진 곳에 있다는 상황이다. 스칼라량으로 표현할 때 부족한 것을 방향까지 표현된 것을 벡터라고 생각하면 된다
.(네이버 지식in)

 
     

 

2. 419m란 것과 참터로부터 419m는 다른가? 그냥 99도와 100로 가는 99도와 다른가? 방향이 하나 더 있을 뿐인데 이것이 정녕 다른가? 스칼라가 현실을 대부분 많은 설명을 해주지만, 그렇게 풍부하게 설명을 해줄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역학이라고 배우는 것도 대부분 정지한 상태의 정역학을 이야기하지만, 현실의 대부분은 방향을 갖는 동역학은 아닐까? 방향을 갖는다는 것은 현실에서 지금에 어떤 의미를 보탤 수 있을까?


3. 슬그머니 인문 人紋 으로 겹쳐 옮겨본다. 셀로판지처럼 햇살에 다른 색들은 겹칠까 아니면 인문계과 자연계를 나누는 현실같은 물과 기름처럼 선명한 밀침이 작용할까? 어쩌면 수학의 정리처럼, 수학의 공리처럼 A는 무엇이다라는 것과 그것을 증명해내는 것은 스칼라의 표현은 아닐까? 백가지방향을 담고 있는 것을 사물은 무엇무엇이다라고 환유하거나 환원하여 사고하는 것은 문제가 없는가? 그러한 무수한 스칼라의 표현으로 일상을 그려내고 있던 것은 정녕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사물에 대한 스칼라식 서술은 생동하는 것을 제대로 잡아낼 수 있을까? 기껏해야 분석을 하거나 사후약방문은 아닐까?  


 


평론(해석) vs 참여(행위)

4. 어쩌면 그러다가 우리는 방향없는 서술이나 크기, 설명에 익숙해져 세상은 마치 그런 것처럼 세뇌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방향없는 결과만이 논의되어 방향을 가지고 있는 과정은 아예 유통조차 되지 않는 것은 아닐까?  


5. 조금 더 진도를 나가본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렇다고 생각한다. A라는 활동(운동)은 무엇이다라고 규정짓고 그것에서 출발한 앎은 안온한가? 그 스칼라는 현실을 풍부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 설명할 수 있다면 늘 결과를 미리 말해줬는가? 결과가 있기 전을 풍부히 말해주는가? A라는 공간에서 사례는 이러했으므로 여기라는 공간도 이렇게 하면된다라는 이식만 하는 것은 아닐까? 어떻게와 왜는 생략된 채 무엇만 유통된 결과는 어떠했는가? A라는 공간에서 성공하려고 했던 연유는 어떠어떠한 방향과 어떠어떠한 고민의 겹쳐지므로 가능했는데, 여기라는 공간은 이러저러한 벡터가 부족하다, 벡터라는 요건이 충족되지 않으므로 이런 것은 힘들지만 다른 C,D,E를 시험해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는 방식은 소통이 아니라 최소한 유통되어본 적이 있는가?

6. 사람 人 을 한쪽을 떼어내어 이러저러하다는 정의와 기술로 출발한 학문들이 온전할 수 있을까? 사람 人 을 다루는 학문을 무엇은 어떻다란 해부를 통한 정의가 헛점없이 온전히 가동할 수 있을까? 행위를 설명해줄 뿐 과연 행위를 하게해줄 수 있을까? 여기저기 스칼라로 널려있는 것을 주섬주섬 모아 끼워넣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을 가진 벡터, 고민을 가진 행위, 고민의 결을 갖는 시도로 온전히 보면 어떨까? 행동하고 반영하고, 행동하고 반영하는 진자운동을 갖는 것이라고 여기면 어떨까? 그 변화가 되먹임되는 것이라면 구구절절한 해석이 필요했던 것일까? 그것이 결론적으로 기차가 떠난 뒤, 늘 평론의 고원에서 노니는 사후 추억담과 같이, 뒷말만 많은 해석의 울타리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도록 할 수는 없을까? 

과정 VS 결과

7. 어떤 A가 유통되는 것이 아니라, --을 하려고 하는 A가, --에 고민이 충만한, --라는 분야의 활동만이 아니라 -라는 분야에 관심이 많은 분들의 방향을 갖는 사람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떨까? A라는 사람이 기계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분해될 수 없으므로 이러저러한 방향을 품은 사람들의 방향이 숙성되도록 하는 분위기는 어떨까? '--려고하는'에 방점이 찍히지 않고, 끈질기게 '--하였고...--했으므로...--와 가까우므로...' 끌어내리거나 분석과 설명하느라 지쳐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둔을 벗어날 수 없을까?

-이다 VS -려는

8. 그냥 분석하고 해석해보는 것도 좋지만, 방향을 갖는 것, 하고자 하는 것, 하게한 것이 보이지 않아 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린 것은 아닌지? 그러다보니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되어 물어보지도 궁금하지도 않고 그냥 저자거리에 방치된 것은 아닐까? 삶에 연관되거나 사람의 동선에 관계된 것인데 서로 다른 부문으로 방향이나 실마리를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너무 외로운 고원에서 어려워하고 푸념하고 한숨만 짓는 것은 아닌가?

9. 방향을 갖는 일상에 관심이 있다면, 방향을 품은 더욱더 풍부한 현실에 눈을 뜰 수 있다면, 방향을 품은 고민의 결에 눈길이 간다면, 스칼라의 늪에 빠져 한치도 달라지지 않는 경계에 있다면, 그렇게 담을 월담하는 담쟁이가 되어 볼 수는 없는 것일까? 끊임없이 향하는 촉수는 담너머를 가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10. 분석이 더 이상 의미를 소진해버린 현실에서, 오히려 통째로 보는 눈이 생긴다면 해보고 되지 않으면 다시하는 벡터를 만들어내는 행위들이 또 다른 벡터를 낳은 것은 아닐까? 벡터를 보는 감성마져 말라 건조증이 걸리기 일보직전인 현실에서 벡터와 벡터가 겹치는 시도 한번 어떨까? 콩깍지씌인 것처럼 방향이 유사하다면, 고민의 진폭이 유사하다면 한번 시험삼아 해보면 어떨까? 그래야 방향이 역방향인지 순방향인지 알 수 있으므로, 다음에 합쳐진 방향이 지시하는 곳을 알 수 있으므로,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공유될 수 있으므로,  그저 밋밋하기만한 평론보다 현실을 밀어나가기엔 낫다는 산술이 나오기에 말이다.

저기 VS 여기

10.1 안타깝게도 평론의 그늘이나 스칼라의 그늘은 저기를 설명할 수 있다. 여기도 저기를 가져와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늘 저기를 빌려왔으므로 방향을 갖는 여기를 설명해내는데 한계가 있다. 끊임없이 저기를 차용해와 여기를 누덕누덕 기워야 한다. 스칼라를 구별해내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그 분이 얼마나 여기를 설명해내기 위해, 그 스칼라가 앞을 현실의 방향을 보지 못하는 안목만 가려내면 된다. 학문이라는 것도 앎이란 것도 얼마나 저기에 집착하는지는 시간의 함수에 빛이 바래기 마련이다. 여기에 궁색하다면, 여기를 늘 변명의 쪼가리로 일관한다면 말이다. 신념의 문제도 지식의 많고 적음의 문제도 아니다. 중독으로 인한 불감증과 끊임없는 편식의 폐해일 뿐이다.

11.' -은 -이다'라는 환상은 현실을 단순화시켜주기는 하지만 강박증처럼 수많은 벡터들의 '-하려는'은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늘 '-은 -이다'여서 그곳으로 모이게 하여야 하고, -이게 하여야만 한다. 수많은 '-하려는'의 방향을 돌릴 수도 없다. 화자는 스칼라인데, 기껏 있어야 방향없는 앎만 있으므로 끊임없이 현실을 유동하는 벡터의 방향을 모을 수도 없다. 앎의 주입으로 벡터의 방향을 없앤다면 모를까? '-은 -이다'라는 마술에서 벗어나는 일. '-은 -이다' 사이에 간극을 두는 일이 필요하다. '-은 -이 아닐 수도 있다.' 그 사이에 또 다른 수식어와 그 명사을 통채로 흔들어버리는 과감이 필요하다. 흔들고 채우면 흔들린 다음 제자리를 하면 그래도 당신의 머리에서 저기 가슴까지는 갈 수 있으므로 말이다. 손과 발까진 가진 못하겠지만, 또 다른 방법은 그 '--이다'라는 스칼라에 덜 연연하면 어떨까?

벡터의 숙성

12. 방향을 갖는 의견, 방향을 갖는 고민, 방향을 갖는 생각들이 - 앎을 나열하는 의견, 가슴의 언저리에 가보지 못한 고민, 손과 발을 필요하지 않는 전달에 대해 - 방향을 담는 그릇에 모이게 된다면, 아직 이것들은 대부분 날것인 경우가 많다. 그러한 연유로 방향이란 가시를 갖기에, 낯선 것에 익숙하지 않으므로 대부분 시간이란 함수에 처리되거나 처분되는 것이 많다. 거의 시간과 실무라는 그물에 걸려 방향이란 가시가 일정한 방향성을 갖기도 힘들게 될지 모른다. 문제는 숙성이다. 좀더 넓은 그물의 지식으로 이 싱싱한 날 것들이 순치될 수 있는 확율이 높다. 작은 고민들을 연결시키는 좀더 큰 그물로 처리될 확율이 높은 위험성을 갖게 된다. 만약 처리된다면 내것, 소수의 것은 될 수 있지만 나-너, 너-나로 스며드는 깊이가 얕다. 그러니 과정이 서로에게 배여드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결과가 처리되거나 처분되거나 할 뿐이다. 기껏해야 너의 머리를 지나 가슴까지...너-나의 머리속이나 가슴속으로 가져갈 확율이 적다. (처리의 유혹)

처리 VS 예행연습

13. 방향을 갖는 고민, 의견, 생각들이란 날것은 의도적인 관점의 다름이 필요하다. 의도적인 관점. 머리의 관점이라면 다른 앎을 바탕으로 한 생각의 연장, 아니면 가슴의 관점, 몸의 관점, 손과 발의 관점의 다름이 논의될 수 없을까? 방향을 담은 그릇은 의외로 연약하고 한가지 관점으로 순치될 위험성이 있다. 그래서 그 방향을 최대한, 방향의 꼭지점을 달리 돌릴 수 있는 연습과 엇갈림이 필요하다. 미리 그 방향의 화살표과 지시하는 곳을 가보는 것이다.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관점이 생기도록 생길때까지 궁금증을 여럿이 놓치지 않는 것이다.(다름의 장려)  

13.1 일리의 장려, 혹 툭 던진 돌멩이 하나도 유효할까?

지금 여기 VS 저기

14. 여기를 다르게 보는 힘은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고민에 힘이란 것이 생길 수 있는 것일까? 지금 문제가 뭔지 생각해보았는가? 당신이 하는 고민이란 것이 다른 사람의 다른 생각의 그물을 통과해본 것인까? 아니면 앎을 빌미로 일방통행해버린 것인가? 당신의 고민의 색이 다른 사람의 같은 물음 다른 색의 고민과 겹쳐진 것일까? 당신의 생각의 맛이 그것에 대한 다른 너의 다른 맛과 버무려진 것인가? 그저 쑥쑥 물만주면 자란 콩나물 같은 것인가? 아니면 현실의 다른 경로를 갖는 이들의 말과 언어, 생각으로 걸러진 것들인가? 몸의 경험이 없는 유식자의 앎만 강조된 것인가? 믿을만한 사람의 이야기라 믿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닌가? 당신의 다름은 격려받고 있는가?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라고 말 벙긋하지도 못할 형편인가? 
 


 

 

 

15. 많이 알고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이 아무런 방향이나 고민을 담고 있지 못하다면, 방향의 가시는 하나도 없는 채 그저 인터넷 공간의 앎으로만 기능한다면 막연한 크기만을 말해준다면, 다른 삶과 변화를 보이는 방향과 차이가 있을 것이다. 앎에 차이는 미미하지만 행위나 삶의 변화, 과정의 차이는 확연할 것이다. 크기만 보는 눈에는 아무런 차이도 발견하지 못하겠지만 어쩌면 방향을 보는 눈에선 그 경계가 날카롭게 갈릴지도 모른다.


뱀발. 원고청탁이 생각나 적던 것이 날라가버렸다. 호흡이 끊긴 뒤, 저녁 말미 그쩍거리기 시작한 것이 쓸데없이 분량이 는다. 아마 더 가지치기를 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남의 맛은 무엇일까->사람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 관심의 그늘로 들어가 마음을 흔들거나 마음을 놓게하는 일은 어떨까 눈치채지 못하게끔 말이야 - > 그러다가 그 사람들 마음밭을 노니다가, 마음도 가끔 추수려지는 것이라면, 그렇게 - > 모른채하며 나오는 것은 어떨까->그러다 한번도 생각지 않은 것들이 불쑥 그(녀)의 마음에서 튀어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이런 것이 현실물정 모르는 랑만적 생각일까? 명랑한 생각일까? 맹랑한 치기일까:ㅣㅣ

>> 접힌 부분 펼치기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