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potenza은 고통 가운데서 만들어진다. 그 힘은 비-존재의 힘이자, 공동체의 힘이다. 힘은 이런 경로를 따라 주어지는 이행의 시간이자, 존재론적 변형의 시간이다. (…) 힘과 고통은 삶의 상보적 차원들이다. 이런 이유로, 힘과 고통은 공동체와 구원에로의 길을 연다.”(『욥』, 172) 햄릿의 고난에서 시작된 코라의 유물론과 욥의 비참에서 시작된 견신의 유물론은 도래할 것의 예측 불가능함에 따른 불안과 고통, 거듭된 좌초와 실패를 공통의 지반으로 삼고 있다. 네그리에게 힘은 고통 속에서 만들어진다. 고통과 힘은 함께 증폭하고 함께 가중된다. 힘과 고통의 상호추동적인 공정을 통해 주체의 변신은 시작된다. 그 공정을 수행하는 이들은 비-존재이며, 그런 한에서 경계 위에서의 삶이며, 유령들이다. 그 공정은 구원의 시간과 맞닿아 있다. - 破 알라딘블로그 120519
삶, 그 얼마나 진부하고 낡은 표현인가? 낡고 낮아 오목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는 로렌스에 대한 비평의 차이로 조정환, 백낙청, 황용승을 함께 걸어둔다. 백낙청은 로렌스의 life를 현실로, 황용승은 자유의 개인으로 해석하는 결이 달라, 로렌스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한다. 조정환이 삶정치, 삶문화, 삶시간....삶을 접두어로 두고 그의 논리를 로렌스에서 차용한다고 한다.
로렌스를 끌어안고 끙끙댄 적이 있다. 그의 시 제대로된 혁명으로 인해 그의 시가 보고 싶었고, 그의 소설을 읽고, 그가 말한 삶에 밑줄을 치고 따라가보았다. 그리고 그 곁에 있는 러셀을 보게 되었다. 러셀은 로렌스의 약간 광적인 모습에 그리 점수를 줄 수 없던 모양이었다. 로렌스가 말한 삶과 그의 삶은 별개의 문제이긴 하지만 로렌스로 통해 읽는 삶이란 접두어는 여기서 되돌아 보아야 한다.
난 조정환의 글을 많이 보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도서들이 다시 끌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이 소장학자의 논문으로 단편들을 많이 꿰게된 듯싶다. 네그리의 책을 보며 지나친 카이로스의 시간에 대한 개념도 다시 잡는다. 시간이라는 것이 양과 길이로 측정가능한 것만이 아니라 각기 다른 시공간으로 자랄 수 있다는 프레임의 재구축만으로도 설렌다. 시간에 대한 이렇게 새로운 시도는 동양에서는 몸에 붙고 익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비코도 시간은 너-나에서 새로 시작한다고 했고, 일리치도 역사의 문화라는 것은 또 다시 접목될 수 있는 것이기에 역사의 시간은 단절되어 있지 않다했다. 그렇게 다시 자랄 수 있다는 것이다.
지하철로 몸을 옮겨 모임으로 향하는 자리. 다시 그 비평을 새긴다. 말미의 그 글이 맺힌다. 힘은 고통 가운데서 만들어진다.( ...) 고통과 힘을 함께 증폭하고 함께 가중된다...힘과 고통의 상호추동적인 공정을 통해 주체의 변신은 시작된다. ........ 모임 사이 삶이 삐긋거리고 비참도 뭍어나는 아픔이 섞인다. 공동 체가 아니라 공동도 우리의 현실에는 없다. 그 간극을 아마 서로 고통이 비집고 들어설지 모르겠다. 아마 그래서 그 셈을 하게되는 것이 그 공동(삶고민)의 실뿌리가 생겼으면 좋겠다. 독립적인 삶의 파편이 아니라 제대로 서기도 힘든 삶의 고통을 서로 기대어 서로주체가 생겼으면 좋겠다. 또 다른 시간으로 자랐으면 하는 바램이다.
불덩이처럼 작렬하는 태양사이 한낮의 모임은 벌써 은교와 욕망을 말한다는 김두식의 글로 시작한다. 영화와 책...그 욕망 총량의 법칙이 있는 것인지? 엘리트의 욕망제어가 갖는 일탈에 대해 색-계에서 김두식은 말한다. 욕망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욕망이란 언어와 개념은 십년도 더 지난 것을 차용한다. 결과만 집착하는 욕망이라는 말보다 밥, 쌀, 뼈, ....골...을 흔드는 말이 필요하다. 그 말이 회자되고 마음을 후비면서 그 욕망은 필요로 대체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로 흔들린다.
무의식에 대한 일갈은 프로이트도 라캉도 들뢰즈도 아니다. 가타리에 대한 살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주체의 무의식은 앞날의 사건을 만든다. 현실의 무의식이 통합-진보라는 명칭에 사건으로 무참히 초라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운동으로 권력을 지향하는 욕망의 무의식에는 적밖에 없다. 그 적으로 인해 자신을 자라게 할 뿐 더 이상 진전이 없다. 그 발목, 그 바닥의 처절함을 느끼는 것이 우리의 수준이다. 우리의 수준이 서로 몸에 들러붙는 순간, 우리의 진보는 숨쉴 수 있다.
너-나가 해야할, 놓치고 있던 것이 가물거린다. 정치적욕망만이 둘둘 들러붙어 있다는 의식조차 없는 이들에게 사회문화적욕망은 이물감이자 불필요인지 모르겠다. 적을 무너뜨리기 위해 스스로 단단해져야 한다는 스스로 얼음송곳처럼 강해져야한다는 강박.......우리의 동토는 이미 해빙이다. 툰트라지역은 여름의 기운이 흥건하다. 나만 우리만 못느끼고 털옷을 입고 있을 뿐, 의식만이 형체도없는 얼음을 지켜왔다. 의식을 내려놓는 순간, 얼음이 녹는 순간 곁의 너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야 아주 조금 현실이 그 사이를 채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삶이라는 것이 격이 있고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이라는 것, 그 비루한 삶을 견뎌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삶권력, 삶정치, 삶...을 나누기 위해 서로 살고 있는 지 모른다. 살고 삶에 기대고 싶은 것이 이땅위에 사는 우수마발이 원하는 것이다.
뱀발. 일식이다. 무더위가 꽂힌다. 모임사이 화살같은 말들이 내린다. 주제넘은 코멘트, 얼치기 잡글로 마음 상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정리되지 않는 느낌을 담는 불손함이 걸린다. 아마추어의 잡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