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미술은 부처가 35세에 성도한 후 최초로 건축한 불찰(불교사찰)인 기원정사나 죽림정사의 성립과 동시에 발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부처가 생존해 있던 당시에 불상이 제작되었다는 전설도 있지만 어디 까지나 그것은 시원적인 또는 전설적인것에 불과하다고 할수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도들에 의해 참다운 조형활동이 시작된 것은 부처가 열반에 든 이후였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견해일 것입니다. 그것은 부처가 열반에 든 직후에 세워진 8탑의 건립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가 쿠시나가라에서 80세로 연반하자 당시 독실하게 불교를 믿던 8국의 왕들이 서로 사리를 가져가겠다는 사리분쟁이 일어났는데 도로나 바라문의 현명한 중재로 여덟나라에 공평하게 나누어 동시에 탑을 세우게 한것이 근본 8탑이 되었습니다. 탑은 불교건축에서는 가장 중요하고 필요불가결한 것이며 불교에만 있는 건축형식으로서 불탑에 대한 숭배사상은 시대가 지날수록 더욱 성황을 이루어 수많은 탑들이 조성되었습니다. 인도의 아쇼카왕이 8만4천탑을 건립했다는 전설은 이러한 상황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탑은 절의 중심이가 불교도의 주 예배대상이고 불교미술의 주류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탑이 불교신앙의 중심이 되었던 시대에는 아직 불상이 나타나지 않은 시기였다고 보는것이 정설입니다. 그후 기원후 1세기경이 되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붓다의 모습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본생도나 불전도 등에 붓다가 표현되기 시작하였으며 불상만 단독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체로 기원후 1세기 경 불교 자체의 교리적인 화와 외래의 영향등으로 불상이 제작되었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불상의 발상지는 대개 두곳이 거론되고 있는데 하나는 인도 갠지스강의 중북부에 위치한 마투라 지방이고 또다른 하나는 인도인도서북부 아프카니스탄쪽이 있는 간다라 지방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마투라 지방은 인도의 상업과 정치의 중심지로서 전통이 강한 곳이었으므로 고대신상조각의 전통이 불교교리의 변화에 따라 발상되어 불상으로 나타났다고 보여지며 간다라 지방은  중근동 혹은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연결하는 관문이였기 때문에 외래적인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였고 기원후 1세기를 전후해서는 헬레니즘문화의 영향을 받아 간다라지방의 불상이 제작되어지기 시작했다고 판단되어 집니다.

   마투라. 간다라 이 두 계통의 불상 발생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지만 불상제작의 엄격한 규제가 풀리게 된 것은 불교교리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것이 일반적입니다. 당시에는 간다라 지방이건 마투라 지방이건 유부계통의 불교가 지배적이였지만 신생 대중부 계통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던 때 였습니다. 대중부는 불교의 대중화운동을 가장 중요시했던 대승불교의 전신으로 대중을 제도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부처님의 형상을 만들어 그 위대성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시청각적인 교화의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불상은 삽시간에 예배의 주된 대상으로 되면서 사원의 중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절의 중심이 탑에서 불상으로 바뀌게 되자 불교미술의 주역도 불상이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새로운 불교미술 시대가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가 바로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시기로 佛像時代라고 하고 불상이 없고 탑만 있었던 기원전 시기를 無佛像 時代라고 한답니다. 불상시대를 불교식으로는 像法時代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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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18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누아 2004-03-19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상이 나타나기 전에 그림에서는 부처님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불경스럽게 느껴졌던지 보리수나 부처님의 발(가섭에게 보여주셨던)을 부처님 자리에 그렸다고 하더군요. 지금도 어떤 절에는 녹야원에서 부처님이 다섯 비구에게 설법하시는 장면에서 부처님 자리에 법륜이 그려져 있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수련 2004-03-19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있게 읽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부처님의 모습을 실재로 그리는 것이 불경스러웠다는 것 보다는 반야심경에 보면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것이 공이라는 뜻이죠. 일시무일시 석삼극 무진본...이런 말도 있죠~~ 초기 무불상 시대는 공사상 때문에 불상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부처님은 그림으로 나타내기는 너무 신성한 존재였던것이지요(그렇게 보면 실재 모습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웠다는 것과도 상통하겠군요) 하지만 불상의 출현은 분명 주변 여러나라와의 문화교류로 인한 영향때문이었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조선인 2004-10-21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전 불화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 말씀이 없으시네요. 언제쯤 다시 이어주실 지.

수련 2004-10-21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이 게으름을 알아차리셨군요.
불화는 차츰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요즈음 여러가지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조선인 2004-10-21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하다뇨.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그저 은근히 기다린다는 정도의 뜻이었습니다. 저같은 문외한이 보기엔 기존 책들이 전문용어가 많아서요. 미술용어도 그렇고, 불교용어도 그렇고. 그에 비해 님의 글이 술술 읽혀서. 혹시 책을 추천해주셔도 좋구요. *^^*
 

고구려 고분벽화의 제작시기보다 수세기 앞선 무덤이 중국의 진시황릉이다. 이 고분에는 벽화가 있는것은 아니지만 고구려 고분벽화와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기 위해 간단히 멘트합니다.( 완전히 발굴이 끝나면 상황이 달라질수도~)

진시황릉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은 드물것입니다. 우리나라   예술의 전당에서도 관련 전시회가 있었고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묘의 부장품 들이 관심을 끌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 왕 영정은 여섯나라를 쳐부수고 전국을 통일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 왕조의 황제가 되었답니다. 진시황은 즉위 후 함양에 대규모 궁실 공사를 일으킴과 동시에 자신의 능묘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 공사는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세상을 떠나고 2세가 즉위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섬서성 임동에 자리잡은 서산 최고봉의 북쪽 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진시황릉은 흙을 달구질해 바른 네모뿔 모양으로 높이 쌓은 지상의 봉분은 남북 길이 350M 동서길이 345M 높이가 47M에 이르는 거대한 묘입니다.< 중국사기>와 <>진시황본기>에 따르면 능묘 안에는 진주와 보석을 비롯해 모형 궁궐과 갖가지 장식품을 가득 넣었고 위에는 해, 달, 별 등의 천문도형을 아래에는 강, 내, 호수, 바다 같은 지리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강과 내에는 수은을 흐르게 하고 묘실 도굴과 파괴를 막기 위해 장인들로 하여금 자동 발사되는 활을 만들게 하여 문위에 설치했다고 합니다. 아직 묘의 발굴이 모두 진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최근 과학적인 방법으로 묘실을 탐사한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묘실 안에는 확실히 수은이 저장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1970년대 고고학자들에 의해 일부 발굴된 병마용은 능묘 밖 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진흙으로 만든 인형인 도용이 수천건, 도마가 수백필, 전차가 수십대 도용이 손에쥔 무기 1만여점 등이 출토이었다고 합니다.

<진시황 본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답니다.

"매장이 끝나자 어던 사람이 말하기를 장인이 기계를 만들었고 함께 참여한 노예들도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그들의 숫자가 많아서 누설될 것이라 했다. 장중한 샹례를 마치고 보물들도 다 파묻히자 묘도의 중앙문을 폐쇄하고 바깥문을 내려 장인과 노예들을 모두 가두니 다시는 빠져 나오는 자가 없었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진시황릉의 비밀을 보장하기 위해 무덤을 제작했던 장인들과 숱한 인부를 모두 묘실속에 가두어 죽여 버렸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70만며명의 인력을 동원해 세운 진시황릉의 비밀 역시 금세기 까지 땅속에 묻혀있었습니다. 

아직까지 고구려 고분속에는 산자를 매장했다는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역시 우리민족은 휴메니스트-

소수의 비밀을 위하여 힘없는 사람덜을 주기다니...무서운 중국사람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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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18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불교는 다 알아시피 인간 스스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미술 같은 것은 전혀 필요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불교가 일반 민중의 구제를 가장 큰 사명으로 삼는 이상  그들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불교의 진리를 이해시켜야 하는 도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일반대중은 처음부터 불교의 심원한 진리를 이해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그들을 쉽게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신앙의 대상인 부처님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탑, 불상, 탱화 등이 조성되고 그것들을 신격화 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 불교미술의 중심이 된 것입니다. 불교미술에는 건축(목조건축 탑), 조각, 공예(종, 목어, 운판, 공양구, 향로,  등), 회화(탱화-불화, 단청) 등 종류가 다양하고  그 표현 기법은  수 없이 많지만 그 중 불화는 어떤 특별한 법칙이 정해져 있는 도상학이라는 규정같은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불화를 그리는데 자신이 원하는 곳에 존상을 배치하고 싶다고 해서 자기 나름대로 아무곳에나 존상(불, 보살 , 천왕, 신중 등)을 배치했다고 가정합시다. 이것은 도상학에 어긋나는 그림이 되어 불화라고 불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불화(탱화)는 엄격히 도상학에 근거해서 작업을 하는 미술로 표현기법은 다양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변상도라고 불리우는 그림은 부처님의 생애나 불교의 진리등 (불교경전속의 내용)을 알기쉽게 그림으로 풀이해 놓은 모든 그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상도를 통틀어 불화라고 하는데, 다시말하면 이러한 불화는 화사가 싫든 좋든 도상학에 근거해서 제작해야만 숭배의 대상으로서 그림의 가치가 있는 것이랍니다.

우리가 사찰에 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것이 석탑일 것입니다. 탑은 돌아가신 부처님의 뼈(사리)를 봉안하는 일종의 부처님의 무덤으로 보시면 됩니다. 부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무덤은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의 어던 흔적이라도 대해야만 부처님이 말한 그 진리의 말씀도 실감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뼈를 모신다는 것은 후대의 불교도들에게는 신앙심의 결정체를 모시는 것이 되었으며 불교의 구체적인 진리에 한층 더 다가서는 것이라 할 수 있답니다. 이러한 이유로 탑은 불교의 대표적인 건축미술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불교미술품 중 불상은 언제 부터 만들어 지기 시작 했을까요?(다음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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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사람들은  죽어서도   영원히

                                살수 있다는 영혼 불멸설(도교적 신선사상)을 믿었습

                   니다. 따라서 고분은 죽은자의 쉼터 혹은 새로운 삶터였고 그 속에 그려지는

         벽화에는 죽은자의 땅과 하늘 그 안에서 새 삶을 누리는 모습을 담으려고 했을 것 입니다.

또한 죽은자의 무덤을  잘 꾸미는 것은 산자의 몫이였고 죽은자의 장식품이 산자의 자랑거리기

도 했습니다. 현재 발굴되는 고구려 무덤들은 그 시대를 대표했던 왕의 무덤이었거나 왕실관 관

련된  사람들의 무덤이었을 것이라고  판단되어 집니다. 따라서 이들의 무덤을 일반인의 무덤과

는 달리 특별하게 꾸미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을 것이고 덕분에 우리는 고구려시기의 지배계층의

생활풍속과 정신세계를 엿볼수 있는 행운이 있는 것입니다. 

  그시대 사람들이 무덤에 그림을 그렸던 이유는 먼 후대 사람인 현재의   우리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던 의도는   결코 아니였습니다.

 현재 우리는 무덤의   피장자을 위해 최선을   다하던 그시대   화사들이 그려놓은 장식문양들을

보고 그 상징성과 아름다움을 분석하고 연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고구려 사람들이 죽은자의 안식처에그림을 그렸던 긍극적인 목적은 죽은자를 위한 최대

한의 의전 행위였던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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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ylontea 2004-03-16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따금씩 방송을 통해 보게 되는 고구려 고분 벽화의 그림을 보면 참 감동적입니다.
죽은자를 위한 최대한의 의전 행위로 죽은자의 안식처에 그림을 그렸다는 말씀에 공감이 갑니다.
 

고분이란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무덤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분벽화란 이러한 고분의 벽이나 천정에 그려지는 그림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의 고분이 현존하고 있습니다.고분벽화는 고구려시기  국내성을 포함하여 평양성 등의 고분에 분포되어 있으며  백제는 무녕왕능이나 능산리 고분군 등이 있고 신라는 어숙묘라고 하는 무덤에  벽화가 조금 그려져 있으나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현재 학자들이  관심있게 연구하는 분야는 고구려 고분벽화입니다.

 이는 그 시기가  357년으로 고구려 고분벽화 중 절대년도를 알수 있는 무덤 중에서 가장 빠른 시기의 것으로 그림의 내용역시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그시대의 생활상, 종교상 등 여러가지 내용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에 연구의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분벽화에 대한 연구는 오래전 부터 해 왔으나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잭트에 고구려 역사편입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학계에서는 고분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해 지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제가 고분벽화를 연구하면서 느낀점. 학술적인 내용 등을 주로 써 가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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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아저씨 2004-03-16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수련님의 서재에 관심이 가는군요,.
좋은 글 읽고 의견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수련 2004-03-17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통이란 오래되어 사용할수 없는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의 이슈로 작용하며 우리곁에 자리하고 있는것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전통문화에 관심을 갖고 서로 향유할 수 있는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쉽고 짧게 쓰려고 하니 더욱 어렵네요
너무 길고 어려우면 읽는 사람이 짜증날까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