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미술


신라의 건국과 발전

한반도 동남단의 경주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조그마한 나라, 신라(BC57~AD668)는 6세기 이후

점점 강성해져서 마침내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었고, 우리 나라의 미술문화 발전에도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를 시조로 하고 있는 신라는 본래 여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합체 또는 성읍국가에서 본격적인 중앙집권적 왕국으로 발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의 나라 이름도 신로, 사라, 서라, 서야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었으나 이것들은 모두 읍리를 뜻하는 사로와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여진다. 신라 초기에는 박․석․김의 3성이 임금을 배출하다가 4세기 중엽에 이르러 김씨 왕조의 전통이 확립되고 국호도 신라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신라는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통합하고 본격적인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었다.

신라는 17대 왕인 내물마립간(356~401)부터 22대 지증왕(500~513)까지의 사이에 국가다운 면모를 일신하였는데 왕의 칭호가 사용된 것도 이 때부터이다. 즉 지증왕때 마립간을 왕으로 바꿔 처음으로 호칭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라가 왕권을 굳건히 하고 다방면에 걸쳐 융성하게 된 것은 23대 법흥왕(514~539), 24대 진흥왕(539~575)을 거쳐 29대 무열왕(654~661)에 이르는 시기였다. 법흥왕 때 금관가야를 멸망시키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528년), 연호를 건원으로 정하였다. 또한 율령을 공포하였고, 무엇보다도 처음으로 불교를 공인함으로써(527년)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될 바탕을 마련하였다. 이 밖에도 백제의 사신을 따라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521), 중국 남조와의 교섭을 도모한 것도 대외교섭의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신라 24대 진흥왕은 신라의 영토를 획기적으로 확장시키고 국기를 튼튼히 함으로써 훗날 통일을 도모하는 기반을 다졌다. 진흥왕은 가야를 통합하고 동남해상의 해상권을 장악,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유역에 진출한 뒤 훗날 그 지역을 독식하였다. 한 걸음 나아가 황해를 장악하고 확장시킨 영토 곳곳에 순수비를 세웠으며 불교의 진흥, 화랑도 편제(576), 거칠부의 국사 편찬(545), 등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다졌던 것이 그의 주요 업적들로 꼽힌다.


신라 미술 개관

힘차고 동적인 고구려의 미술, 부드럽고 인간미 넘치는 백제의 미술과는 달리 신라의 미술은 토속성이 강하고 사변(思辨)적인 성격이 현저하다. 또한 부장품들 중에는 로마나 이란 계통의 유리그릇을 비롯하여 외국에서 전래된 것이 분명한 것들도 꽤 포함되어 있어서 신라문화의 활발했던 국제적 교섭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이러한 외래문화 유물들은 신라가 한반도의 동남단에 치우쳐 있었던 관계로 외국과의 문화적 교섭은 어려웠을 것이라는 종래의 막연한 통념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명백하게 밝혀준다. 또한 경주 등 중심지역과는 달리 순흥 등 신라의 외곽지역에서는 적석목곽분이 아닌 석실봉토분을 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벽화를 그려 넣었던 사실이 밝혀져 중앙과 변방의 문화적 차이를 여실히 드러내기도 하였다.

고구려, 백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라의 미술 역시 고분미술과 불교미술로 대별할 수 있다. 경주를 비롯한 신라 중심지의 평야지대에는 왕가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대규모의 고분들이 산재해 있는 바 이들 고분들은 신라 특유의 적석목곽분들임이 몇 차례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확인되었다. 목곽을 설치하고 시신을 목관에 넣어 안치한 후에 그 목곽을 수많은 돌과 점토로 쌓아 덮고 그 위에 다시 흙을 다져 올려서 동산처럼 만든 무덤이 곧 적석목곽분이다. 이러한 묘제는 석실로 되어 있는 고구려나 백제의 대부분의 왕릉들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목곽이 썩으면 그 위에 쌓여 있던 돌과 흙이 무너져 내려 시신과 부장품을 완전히 덮어 버리기 때문에 방으로 되어 있는 무덤들과는 달리 도굴이 매우 어렵다. 신라 고분의 이러한 구조적 특성으로 인하여 무덤 안에 부장되었던 많은 유물들이 도굴되지 않은 채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대총 등은 지금까지 발굴된 신라의 대표적 적석목곽분들이다.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화려함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관을 비롯하여 각종 목걸이, 귀걸

이, 팔찌, 반지 등의 장신구들, 무기, 금․은제 그릇, 토기류, 유리 그릇류, 공예품에 그려진 그림 등 종류가 다양하고 그 양도 풍부하다.

한편 신라는 6세기에 제도를 중국식으로 바꾸고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면서부터 미술문화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종래의 신라 고유의 토속적 특성에 국제적 성격이 두드러지게

가미되면서 더욱 세련되고 조화로우며 국제적인 성향의 미술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점은 특히 신라의 불교미술문화에서 더욱 뚜렷하게 간파할 수 있다.

불교가 신라에 처음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눌지왕(417~457) 통치 시기였으며, 이차돈의 순교를 겪고 공식적으로 승인된 것은 법흥왕 14년(527)이었다. 이로써 종래 신라 사회를 지배했던 무속신앙, 자연숭배, 조상숭배 등 토속적인 원시신앙 이외에 외래의 국제적 신앙인 불교가 신라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불교를 공인하는 등 보수적 색이 짙었던 신라에서 가장 찬란한 불교미술문화가 이룩될 수 있었던 것은 신라인의 잠재력을 잘 보여주는 일이다. 신라는 불교를 공인한 후 머지않아 흥륜사,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등의 대찰들을 건립하기 시작하였다. 흥륜사는 법흥왕 21년(533)에 착공하여 10여 년 뒤인 진흥왕 5년(544)에 완공되었다. 사원의 남쪽에 연못과 남문이 있었고 그 뒤에 금당과 회랑이 있었는데 금당 안에는 벽화와 고승의 소조상이 있었다고 <삼국유사>에 전해진다. 이로써 당시의 절은 후대와 마찬가지로 불교회화, 조각, 공예, 건축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회화는 경주의 천마총과 황남대총이 발굴되기까지는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들 고분에서 출토된 천마도(天馬圖), 기마인물도, 서조도(瑞鳥圖), 우마도(牛馬圖) 등을 통하여 신라회화의 진면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그림들은 모두 화원의 작품이기보다는 공장에 의한 일종의 공예화이다. 고신라 말기에 왕실의 회화에 관한 업무를 관장했던 채전(彩典)이 설치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의 회화 수준은 고분에서 출토된 공예화보다 훨씬 높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 중 공예품을 가장 많이 남겨놓은 것은 신라이다. 그 이유는 상기한 바와 같이 고분의 구조가

도굴하기 어려운 구덩식 돌무지 덧널무덤[竪穴式積石木槨墳]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벽과 천장이 없기 때문에  고구려 무덤에서 볼 수 있는 벽화 등의 회화에 대한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공예품들은 금관․금띠․금귀고리․금팔찌․금가락지․목걸이 등 순금제품과 유리잔․유리병․숟가락․구리솥․은제 합(盒)․ 방울․순금제 고배(高杯) 등으로 매우 다양하고 화려하다. 이 들 대부분은 금관총․금령총․서봉총․천마총․황남대총 등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신라의 공예품들은 신라인의 호화로운 사치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미적인 우수함과 함께 왕권의 상징물로서 더 큰 의미를 느낄 수 있다.

신라 미술의 사변적인 특성은 고분에서 쏟아져 나온 금관을 비롯한 금속공예품과 토기 등에서도 잘 나타난다. 금속 공예품들은 매우 정교하고 호화로우며 간혹 현대적인 미감각을 풍겨주기도 한다. 특히 신라의 금관은 하늘숭배사상을 바탕으로 토템과 수목 숭배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어 당시 신라인들의 내세관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유리공예는 당시 고구려․백제는 물론 중국에서조차 볼 수  없었던 신라만의 산물로서 멀리 유라시아 서단지역과의 동서교류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이 밖에도 신라 토기는 다소 조방하고 거칠며 문양은 기하학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기마 인물형 토기에서 볼 수 있듯이 조형성이 뛰어난 특성도 보여준다. 또한 무덤에 발견된 각종의 토우들은 당시 신라인의 생활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각광받고 있다.

천마도 - 천마를 타고 온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천마도(국보 207호)는 말이 진흙길을 달려 갈 때 말에 탄 사람의 발 부분에 진흙이 튀지 않도록 말의 배 부분에 대는 말다래 또는 '障泥'라는 마구에 그려진 그림을 말한다. 가로 75cm, 세로 53cm 크기의 자작나무 껍질로 만들어진 말다래에 채색을 사용하여 천마를 그린 것이다. 그림은 마치 이 말다래를 사용한 말이 천마처럼 하늘에 훨훨 날아오를 정도로 잘 달려주기를 바라는 원력을 엿볼 수 있는 듯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 그림은 신라시대 회화 작품으로 몇 안돼는 귀중한 예이다. 이 그림이 출토됨으로서 후에 황남동 155호분은 천마총이라 명명하여지게 되었다. 천마 그림은 이후 여러 곳에서 나타나게 되는데, 장례와 관련된 곳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곧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로 실어 나른다는 신라인의 내세관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1973년 경주에서는 우리나라 고고학사상 최초로 대규모의 신라고분발굴이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미추왕릉 지구의 155호 고분은 규모도 클 뿐만 아니라 도굴되지 않았던 까닭으로 출토유물에 대한 국민적 기대감이 대단하였다. 그리고 기대에 부흥이라도 하듯이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금관과 관모, 관장식, 허리띠, 귀걸이 등의 찬란한 금제 장신구를 비롯하여 무려 1만 2천여 점에 달하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던 것이다.

천마도는 이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회화작품으로서는 유일한 것으로 2장의 말다래에 그려진 그림이다. 말갈기와 꼬리를 곧추세우고 마치 구름 위를 달리는 듯한 백마는 힘찬 기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당시 신라에서 말의 역할은 매우 커서 보화와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신라가 백제로부터 말을 들여오는 대가로 황금과 구슬, 명주 등을 보냈다는 내용에서 잘 알 수 있다. 당시 사회에서 말은 누구나 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지배계급의 특별한 교통수단이자 권위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처럼 소중한 말의 말다래에 천마를 그린다는 것은 곧 강력한 지배력의 표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더욱이 그 말이 소수의 특권층만이 탈 수 있었던 백마라는 사실은 곧 절대권력의 상징임을 쉽게 느끼게 해준다.

삼국유사에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B.C.57~A.D.4)는 한 마리 백마가 가져온 알에서 탄생했는데 그 백마는 하늘로 날아갔다고 기록되고 있다. 또한 신라와 백제의 임금이 모여 회맹단(會盟壇)을 쌓고 하늘에 고하여 두 나라간 평화의 서약을 했을 때에도 백마를 제물로 삼았다는 내용도 전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백마가 하늘의 사자이었음을 의미하며 고대 신라 사회에서 왕은 곧 하늘의 자손이었음을 천명한 것이었다.

천마도는 이처럼 신라인의 사상과 사회 발전상을 잘 느끼게 해주는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신라의 높은 회화수준을 보여주는 유일한 유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구름 위를 질주하는 천마를 활달한 필치로 그려낸 신라화가의 솜씨에서 그 유명한 솔거로 대표되는 찬란했던 신라회화의 전통을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2천년 전 유라시아대륙 동서 교류의 산물 신라 유리병


경주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고분군에서 각종 장신구와 다양한 형태의 그릇 등 유리제품이 많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이 유리 제품들은 당시 신라문화의 국제성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출토된 유리제품들은 당시 신라인들이 제작한 것들도 있지만 외국에서 수입된 것들도 상당수에 이른다. 이른바 '로만글라스(Roman glass)'라 불리는 이 유리제품들의 수입은 로마에서부터 근동지방과 중아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이르는 저 유명한 실크로드를 통하여 전래된 것들이었다.

서봉총에서는 유리로 된 길다란 끈이 그릇 표면에 덧붙여져 간단한 장식효과를 낸 유리 그릇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표형분인 황남대총의 남쪽무덤에서는 유리끈을 망처럼 엮어 그물무늬를 연출한 유리잔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끈무늬장식 유리그릇들은  기원전 5세기경 남부 독일이나 시리아 지방에서 만들어진 로마계 유리제품의 특징으로 밝혀졌다.

또한 동일무덤에서 출토된 봉수형(鳳首形)유리병의 조형은 그리스의 '오이노코에(oinochoe)'라 불리우는 화병형태의 유리제품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 이 병은 포도주를 따르는  주전자인데 '대롱불기기법'으로 제작되었다. 그런데 대롱불기기법은 로마에서 처음 발생하여 기원후 1세기경에는 전 로마제국으로 확산되어 로만글라스의 탄생을 가져오게 된 것이었다.


유리의 종류→● 나트륨 = 소다유리 ● 칼륨 = 포타쉬유리 ● 납 = 납유리

황남대총구슬유리→Si + 나트륨 + 석회 = 소다석회유리<오늘날 대부분의 유리성분으로 로만글라스와 같은 것임>

황남대총의 북쪽무덤에서 발견된 갈색의 나무결무늬 유리잔 역시 남부 독일 쾰른에서 출토된 로마계 유리잔을 방불케 한다. 황남대총의 북쪽무덤과 천마총에서 출토된 거북등무늬 유리잔도 페르시아 사산왕조의 그릇 표면을 커트하여 만든 거북등무늬 유리그릇과 유사한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커트형 글라스는 실제로 유리를 커트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커트글라스형의 틀 속에 녹인 유리를 부어 넣어서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천마총 커트글라스와 유사한 유리잔이 남부 독일 쾰른에서 출현되고 있다.

금령총에서 출토된 푸른반점무늬 유리그릇은 유리 표면에 푸른색의 유리 알갱이를 덧붙인 것으로, 같은 수법의 그릇들이 남부 러시아, 남부 독일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미추왕릉지구 고분에서는 인물이 象嵌된 유리구슬이 발견되었다. 지름이 1.5cm로 아주 작은 감청색 구슬 표면에 색색가지 유리를 삽입하여 그림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작은 구슬에 묘사된 인물들이 서방인의 용모를 보여주는 것이어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묘사된 두 사람의 얼굴모습은 좌우가 연결된 눈썹에 눈이 크며, 입술을 붉은 색으로 표현한 서구적인 인상이다. 머리에는 마치 관을 쓴 것처럼 색색의 유리로 장식하였고, 인물상의 상부에는 부리와 발이 적색과 황색으로 표현되어 마치 오리 같은 흰 새 세 마리 묘사되었다. 또한 그 옆으로 꽃나무 가지가 장식된 모습이다. 이와 같이 인물상을 장식한 유리구슬은 1~2세기경 이집트나 시리아 연안 지방에서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따라서 신라의 인물상감구슬도 그러한 기법으로 제작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아울러 이 구슬의 출처 역시 이집트나 시리아 지방과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해준다.

이렇게 신라에서 출토되고 있는 유리 제품들은 2000여 년 전 유라시아대륙의 서단 로마지역에서 동단의 신라를 연결해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설사 신라의 유리 제품들이 신라고유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 기법의 전래는 분명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따라서 이들 유리 제품들은 신라문화의 국제성과 개방성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로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토우로 보는 신라인의 생활상


천년왕국 신라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문화유산을 남겨 놓았다. 특히 8세기에는 고구려와 백제를 제압하고 그들의 역동문화와 화려문화를 고스란히 넘겨받아 통일신라의 황금기를 꽃피웠다. 그러나 그 이전 삼국기의 고신라는 힘차고 대륙적 기상이 넘치는 고구려나, 해양문화의 꽃을 피운 나무와 기와의 나라 백제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거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저 소박하면서도 투박하고 작은 나라였다. 그 신라인들의 흙으로 빚어낸 것이 바로 신라토우이다.

‘토우’란 글자 그대로 흙으로 빛은 인형을 말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토우는 사람의 형상뿐만 아니라 각종의 동물, 생활용구, 집, 배 등의 ‘이형토기’라 불리는 것을 망라한다. 따라서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하여 당시 고구려 풍속을 알 수 있듯이 다종다양한 신라의 토우에서 신라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토우의 기원과 용도

신라토우는 5~6세기경에만 성행했고 물론 고구려나 백제에는 없다. 토우는 대부분이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원래 토우는 사후의 세계를 믿었던 신라인들이 무덤에 넣기 위한 부장품으로 만든 것이었다. 아울러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기 위하여 지내는 제사에 받치는 희생물의 대용이나, 숭배의 대상(불상), 장난감 등 여러 이유로 만들어졌다.

토우의 종류

토우는 인물이나 동물 등 독립된 형태와 고배의 뚜껑이나 항아리의 주둥이 부분에 부착되어 조형된 것의 두 종류가 있다. 토우의 크기는 대략 5~10㎝정도로 작다. 「주검 앞에서 슬퍼하는 여인」처럼 3.2㎝짜리이거나 커봐야 얼마 되지 않는다. 이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신라인은 흙으로 온갖 모습을 빚어냈다.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하는 남녀상」은 남자 8.4㎝ 여자 8.6㎝의 크기인데 신라의 현악기 중 하나로 추정되는 악기를 타는 남자와 이에 맞춰 가슴에 손을 모아 노래하는 여인의 모습이다. 남자의 표정은 즐거움에 겨운 밝고 건강한 모습이라서 '신라인의 미소'의 전형으로 손꼽히며 전체적으로 풍기는 해학과 풍류도 충분히 표현되고 있다. 「아이를 낳고 있는 여인」과 같은 작품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인물상을 그려내고 있으며 호랑이 ․ 원숭이 등 동물과 전투용품 ․ 생활용구 등도 포괄하여 만들어졌다.

그밖에도 지게를 진 모습, 장군(항아리)을 짊어진 모습, 보따리를 말잔등에 묶은 나그네, 두 발이 묶인 멧돼지를 말에 실은 사냥꾼, 무릎을 꿇은 모습, 배를 타고 노를 젖는 모습, 괭이를 어깨에 메고 절하는 모습, 칼을 차고 말을 탄 모습, 물구나무 선 모습, 상체를 심하게 구부린 형상, 두 손을 목뒤로 돌려 잡고 몸을 힘껏 구부린 자세(요가 모습), 학가면을 쓰고 학춤을 추는 사람, 가무상, 잡기상, 거문고 ․ 피리 ․ 비파 ․ 가야금 ․ 제금 ․ 장구 등의 주악상, 여인상, 노인상, 남성상, 동자상, 노골적인 성애장면(남녀 교합상), 가슴과 둔부가 강조된 풍만한 여성상, 과장된 남녀의 성기, 기마인물상, 애교 있는 오리형상, 각종 희노애락의 얼굴표정 등.

토우에서 나타나는 신라인의 기예

신라토우는 토기와 더불어 신라인의 흙 다루는 솜씨를 다분히 느낄 수 있는 조형예술의 장르다. 이러한 신라인의 기예는 신라말기를 거쳐 고려초기에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한국도자예술의 밑거름이 되었다. 토우를 빛은 솜씨가 서툴다거나 단순해 보인다고 해서 천박하다거나 예술미가 배제된 것은 결코 아니다. 신라토우는 과감한 생략과 왜곡을 통하여 주제를 강렬하게 표현함으로서, 결코 화려하지 않은 소박함과 순수미를 자아낸다. 단순하게 표현되거나 아예 추상화된 토우의 얼굴표정 하나하나에서 극도로 정제된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세련된 절제미와 살아 숨쉬는 생명력을 중시했다. 또한 여기에다 질박한 신라인의 마음가짐과 여유를 그려냈고 더러는 익살과 해학도 엿보인다. 신라토우는 신라인이 몇 줌 안 되는 흙으로 빚어 낸 삶의 미학이자 신라만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독창적인 예술장르인 것이다.



신라 금관 - 사후세계를 위하여

삼국 가운데 유일하게 신라에서만 사용했던 독특한 모양의 금관. 그 안에는 신라 왕족, 나아가 그 사회 전체의 신앙과 체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들어 있다. 그 주인공에 따라 기본 형태와 단수, 장식을 달리한 금관의 특성을 통해 5~6세기 신라인의 사고체계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미술품인 금관은 왜 그런 모양으로 조형되었을까? 고구려나 백제의 왕보다 유독 신라의 왕이 극도로 화려한 금관을 사용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신라 땅에서 금이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신라 사람들이 금에 특별한 애정을 가져서이었을까? 나뭇잎 모양의 장식과 푸른색 곡옥이 어느 것은 무려 100개도 넘게 달려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금관, 금동관, 은관에서 보이는 재료의 차이는 주인의 재력의 차이일까, 신분의 차이일까? 신라금관에 대한 이런 몇 가지 의문을 풀어보기로 하자.

신라금관은 경주 시내에 있는 적석묘라는, 강돌을 수북하게 쌓아 만든 특수한 고분에서만 발견된다. 적석묘는 신라 왕족만의 묘제이다. 따라서 금관은 신라의 왕이나 왕족의 것이다. 반면 금동관은 적석묘 뿐만 아니라 왕족보다 신분이 낮은 귀족의 묘제인 석실묘에서도 여러 개 발견되었다. 따라서 순금관은 왕, 혹은 왕에 버금가는 신분의 인물이 사용한 것임에 틀림없다.

또 금관이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만 발견되는데 비해 금동관은 신라의 영향력이 미친 경상남도로부터 경기도 파주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금, 은, 동의 차이는 분명히 그 주인공의 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경주 호우총에서 금동관과 함께 발견된 호우는 고구려가 광개토왕비 축조를 기념하여 만든 것이다. 신라의 어느 왕족에게 선물로 건네진 이 항아리에는 서기 415년에 해당하는 ‘乙卯年’이란 글자가 명기되어 있다. 또 쌍분인 경주 황남대총의 북분에서는 금관과 함께 ‘夫人帶’란 글자가 새겨진 은제 허리띠와 ‘辛卯年(511년)’이란 명문이 새겨진 은합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금관은 5세기부터 6세기 초까지 유행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기간의 신라왕은 모두 김씨족이다. 그리고 이들 내물(奈勿), 눌지(訥祗), 자비(慈悲), 소지(炤知), 지증(智證) 다섯 사람의 칭호는 ‘왕’이 아니라 ‘今’ 또는 ‘干’이었다. 이는 북아시아 퉁구스어를 사용하던 유목민족의 수장을 일컫는 말로, 지증의 아들 법흥이 선대의 전통신앙인 시베리아계 샤머니즘을 포기하고 중국을 통해 들어온 불교를 공인하면서부터 이런 칭호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법흥왕 자신의 주검도 매장하지 않고 불교식으로 화장을 하였으며, 따라서 금관을 사용하던 선대의 전통도 단절되게 된 것이다.

순금관이 발견된 금관총, 금령총, 천마총은 모두 단분이다. 각각의 무덤의 주인공은 일단 위의 다섯 왕 가운데 한 명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쌍분인 서봉총과 황남대총의 금관은 모두 북분에서만 발견되었다. 황남대총의 북분은 ‘부인대’라는 명문으로 보아 그 주인공이 여자였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신라의 여자 왕족은 쌍분의 북분에 매장되는 특수한 풍속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남자의 무덤으로 생각되는 단분에서는 머리 위에 살짝 올려놓는 마늘 모양의 금제 모자가 발견되고, 여자의 무덤으로 생각되는 서봉총의 북분에서는 최근까지도 내려오는 ‘굴레’라는 여자아이의 삼각형 모자가 발견되었다. 금관의 모양만으로는 주인공의 성별을 알 수 없지만 모자의 모양으로 뚜렷이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5~6세기의 신라에는 여왕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관을 사용한 여인이 두 사람이나 있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라 할 수 있다. 즉, 왕이 아닌 여인들도 금관을 부장품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왕의 전유물로 각인되었던 금관의 용도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이 절박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아울러 신라사회를 이해하는데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한편, 고대사회의 남녀평등사상까지도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고신라의 실존인물 가운데 ‘鳥生夫人’이라는 흥미로운 이름을 가진 여인이 있다. 이는 곧 ‘새가 낳은 여자’라는 뜻으로, 자비 마립간의 여동생이자 지증 마립간의 친어머니였다. 그런데 서봉총에서 발견된 금관의 뒷부분에는 나뭇가지에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다. 새는 북아시아의 여러 민족이 조상신으로 여기는 토템이다. 이런 전통은 고고학 유물로도 남아 있는바 유목민의 오래된 신앙임을 증명한다. 또한 기원전 8~3세기 스키타이, 북아시아 흉노족의 모자에 달린 금제 鳥形장식은 신라 서봉총의 금제 모자에 달린 새와 일맥상통하는 조형양식인 것이다.

지금도 북아시아인 사회에서는 영특한 인물을 낳고자 하는 여인이 높은 나무 밑에서 祈子 행위를 할 때 나무 위에 새가 날아와 앉으면 아이를 잉태한다고 믿고 있다. 이렇게 태어난 인물은 위대한 지도자가 되며, 그가 죽으면 그 생명을 하늘나라로 돌려보내는 존재 또한 새라는 것이다. 새장식은 이런 사유체계가 조형예술로 표출된 것으로 사료된다.

한편 금관 전면의 出자형 장식에 이어 양 옆 뒤로 솟아난 듯이 장식된 條形장식에 대하여 동물의 뿔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되었다. 중앙아시아 북부지역의 유목민족은 식량감으로 기르던 사슴을 잡은 후에는 그 머리의 뿔을 뒤집어쓰고 영혼 천도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다. 즉, 인간에게 고기를 제공한 사슴의 영혼을 위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사슴뿔을 조형한 금동관은 이를 증명해 주는 자료이다. 또한 오늘날 러시아 바이칼호 주변 타이가지역에서 목축으로 살아가는 유목민들은 사슴고기를 주식으로 삼고 있다. 이들 역시 사슴을 잡은 후에는 반드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역시 사슴머리에 돋아난 뿔을 머리에 착용하는 풍습이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신라금관에 조형된 條形장식은 짐승의 뿔을 표현한 것으로 유목민족의 四有체제가 반영된 신라 특유의 조형예술임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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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2004-09-14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제와 신라의 미술에 대해 따로 올렸으나 수업은 예술품 하나하나 영상을 통하여 보면서 할것임. 사전에 복습해 오기바람.

잉크냄새 2004-09-14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를 읽다보니 문득 요즘 문제시되고 있는 중국의 고려사 왜곡 문제가 남다를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자료 잘 읽었습니다.

수련 2004-09-14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직접 현장에 가서 보는 느낌은 또 다르답니다. 여름방학에 중국즙안에 가서 느
낀것인데...그들은 남의 잔치에 축포를 터트렸더군요. 씁쓸했습니다.
중국사람들도 오래된 문화재가 돈이 된다는걸 알거든요.

ceylontea 2004-09-14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의 잔치에 축포를 터뜨렸다라는 말이 묘하게 울림이 있습니다... 참 속상해요...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한테 우습게 여겨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옛날의 그 뛰어난 문화가... 그것도 우리 것이라고 인정받기 어려워지니 참 많이 답답하고 속상한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백제의 미술


백제의 건국과 발전

백제는 온조왕(溫祚王)을 시조로 하여 BC 18년 현재의 한강 북쪽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건국한 고대 삼국 중의 하나이다. 온조왕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朱蒙)의 셋째 아들이다. 온조는 동명성왕의 전처 소생인 유리(琉璃)가 북부여로부터 졸본부여(고구려)로 들어와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동복형 비류(沸流)와 함께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종전에는 인천으로 비정하였으나, 최근에는 충남 아산시 인주면 지방이라는 설이 유력)로 가고,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경기 광주로 비정하였으나 최근에는 충남 천안시 입장면 호당리라는 설이 제기됨)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라 칭하였다.

얼마 뒤 비류가 죽고 그 백성들이 위례성에 모여들어 국호를 백제로 고치고 동명왕묘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이상은 모두 BC 18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BC 5년(온조왕 14)에는 남한산에 천도하고 9년에는 마한을 멸망시켰으며, 10년에는 아들 다루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백제가 한강 유역을 통합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실질적인 시조로 등장한 것은 고이왕 때부터이다. 또한 근초고왕 대에는 마한 전역을 통합한 뒤 크게 발전하여 역대 31왕으로 이어지면서 660년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할 때까지 고대국가로서 큰 축을 형성하였다.

유리한 자연환경과, 지배층이 북방 유이민을 모체로 한 단일체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등의 이점으로 일찍부터 정치 ․문화적 선진성을 과시하고, 4세기 중엽에는 일본, 중국 랴오시[遼西] 지방 ․산둥반도[山東半島] 등지와 연결되는 고대의 해외 상업세력을 형성하였으며, 특히 일본 고대문화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백제 미술 개관

백제는 마한의 한 국읍세력의 일파로써 백제국(伯濟國)이 성장, 발전하여 이룩된 국가이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는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한 북방 이주민으로, 종족적으로는 고구려와 같은 뿌리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백제미술의 근간은 고구려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신라가 국가로 성립, 거듭 발전하면서 각국간에 정치․경제․지역적인 환경의 차이, 대외관계 등에 따라 상호 견제와 영향으로 독자적인 미적 특성이 발달되기 시작하였다.

원래 북방적인 성격을 가진 백제의 미술은 해상교통이 발달되어 점차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불교미술과 중국의 남조 문화를 수용하여 온화하고 우아하며 향토적인 색채의 미적 특성을 발전시켰다. 백제의 미술은 부드럽고 모나지 않으며 인간미가 넘치고 세련미를 보여준다. 이러한 특색은 5세기부터 7세기 중엽까지의 고분벽화, 불상, 와당을 비롯한 공예품, 탑 등의 미술 전반에 걸쳐 볼 수 있다.

삼국시대의 가장 큰 사상적인 변화는 무엇보다도 대륙에서 전래된 불교사상과 그 영향을 받은 미술품이다. 불교는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수용한 고구려보다 12년 후인 침류왕 2년(384년)에 중국의 남조에 해당되는 동진으로부터의 전래되었다. 이전에도 외국의 문물이 직접 교류되어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문화적 접촉이 있었음을 고분의 축조나 출토유물의 성격에서 알 수 있다. 불교의 영향으로 한성시대부터 사찰의 건축과 불상을 조성하였으며, 불교 용구의 생산 역시 한성시대부터 사비시대까지 이어져 문화의 핵심이 되었다.

백제미술의 발전 단계는 정치적인 변천과 맥락을 같이하여 한성시대(BC 18~475년), 웅진시대(475~538년), 사신시대(538~663년) 등 왕도의 천도와 같이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한성시대는 초기의 약 500년간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나 현존하는 미술품은 거의 전무하며, 고고학적 발굴자료에 의해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문헌자료에 의하면 마한이 3세기 후반부터 진나라에 조공무역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계의 돌무지무덤[積石塚]인 경기 양평, 문호리, 삼곶리, 가락동, 석촌동, 연천 등에서 토기, 대롱옥[管玉], 널무덤[土壙墓]출토 흑유거치무늬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중국 동진에서 수입된 4~5세기 미술품은 청자 도연편(陶硯片), 흑갈유 전문편(錢文片), 청자 사이호(四耳壺), 법천리 청자 양형기(羊形器), 화성군 천계호(天鷄壺) 등이 있다. 불교의 전래와 함께 한산에 절을 세우고 승려를 두었다고 하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웅진시대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백제세력이 위축되면서 64년간 천도했던 시기였다. 초기에는 지방호족과의 충돌로 다소 혼란스러웠지만 곧 국내를 정비하여 신라와 동맹을 맺고, 불교를 발전시키는 한편, 중국 양과의 문화적 교류를 통하여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만들었다. 6세기 전반에 축조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속공예품을 위시하여, 새로운 전축분 축조, 대통사 창건, 수원사 등과 같이 불교중흥의 바탕을 이룩하였다. 불교에서 외래양식 수용은 북위와 동시에 동․서위 양식을 받아들여 강건한 기상이 보이는 한편, 백제적인 우아함과 세련된 기법으로 승화시켰다.

백제의 웅비시기라할 수 있는 사비시대는 부여로 천도된 123년 동안을 말한다. 백제 중흥의 깃발을 펄럭이었던 성왕(523~554)은 불교를 장려하고, 중국 양나라와 교류을 통해 새로운 선진 문물을 수용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미륵사, 왕흥사와 같은 대찰이 창건되었는데 사료에 ꡒ사찰과 탑이 매우 많다ꡓ라고 기록될 정도로 부흥하였다. 중국 양쯔강[揚子江] 유역의 남조 문화뿐만 아니라, 북조와의 연관성을 미적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백제미술은 국제적이고, 개방적이면서 백제적인 특징을 찬란하게 승화시킨 절정기의 높은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백제의 회화는 능산리고분의 비운문과 연화문에서 볼 수 있듯이 부드럽고 완만한 움직임의 느낌을 자아낸다. 또, 부여 능산리 고분의 사신도는 매우 세련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백제의 회화는 6세기에 일본으로 수출되어 일본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597년 일본에 건너간 아좌태자는 일본 성덕태자의 초상을 그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부드럽고 인간미가 넘치는 백제 미술의 특징은 불상에서도 잘 드러난다. 서산 마애삼존불은 양식적인 면에서 외래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들의 얼굴은 복스럽고 밝은 웃음으로 가득 차 있어 '백제의 미소'라 불린다. 밝은 웃음이 가득한 복스러운 얼굴에서 백제의 특유의 미소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부여 군수리 절터에서 발견된 금동보살입상과 말기의 대표작 금동관세음보살상은 그 기법이 고졸한 것으로 백제의 온화함에 중국 남북조의 영향이 가미되어 있다. 이러한 불상은 일본에 전해져서

아스카 시대 조각의 터전을 이룩하였는데, 나라 법륭사 백제관음과 광륭사의 목조반가사유상 등 훌륭한 불상 조각품을 탄생케 하였다.

공주 송산리의 무령왕릉은 무령왕에 대한 기록인 지석과 함께 금제 관식, 무기, 그릇, 구리 거울 등 많은 껴묻거리가 발견되어 당시의 발전된 공예 미술을 여실히 보여준다. 최근에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대향로는 도교와 불교의 상징성이 동시에 반영된 훌륭한 공예품으로 밝혀지고 있다. 또한 산수문전은 산수화의 본고장인 중국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는 백제인의 수준 높은 기예를 시사해 주는 중요한 예술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전하는 백제의 건축물은 없다. 그러나 문헌사료에 백제의 공장들이 신라의 황룡사 9층탑과

일본의 법륭사, 사천왕사, 법륜사등을 건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건축에서 백제시대 건축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석탑으로는 목조탑의 건축 양식을 모방한 초기 양식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균형이 잡힌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고 있는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있다. 미륵사지 탑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석탑으로서 9층이며, 우리 나라 탑 건축의 원류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그 구조가 목조 건축의 양식을 번안한 백제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이 탑은 각층의 체감률이 심하여 안정감이 강조되면서도 단순하고 명쾌한 균형미를 잘 나타내고 있어 전체적으로 내강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무녕왕릉과 백제의 영화

무녕왕릉은 백제 제25대 무녕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에 위치해 있다.


무녕왕릉의 발견

1971년 문화재관리국에서 공주의 한 고분에 물이 스며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 뒤쪽에 도랑을 파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한 인부의 괭이 끝에 벽돌이 걸렸는데 그것이 바로 무녕왕릉 앞면 벽의 윗 모서리였다. 이어서 계속 파고 내려가 보니 벽돌로 막고 강회를 발라 단단하게 막은 입구가 나왔다. 무덤이 틀림없었으나 당시에 누구도 그 무덤이 무녕왕의 것이었다는 것을 몰랐으며, 또한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신라고분과는 달리 백제고분은 도굴 당하기 아주 쉬운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까지 백제고분은 처녀분으로 발굴된 것이 전무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우연히 발견한 이 고분은 처녀분임과 동시에 무덤 안에 무덤주인의 이름을 알려주는 지석까지 매장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한국고고미술사계의 일대 쾌거라 할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64년 동안 백제의 수도이었던 공주는 잃어버린 백제의 옛 영화를 그대로 간직한 무녕왕릉을 지켜오다가 1,300년만에 비로소 세상에 내놓게 되었던 것이다.

출토현황

능은 경사면의 풍화암반층을 굴착하고 벽돌로 연도와 현실, 배수구를 만들고 그 위에 분구를 조성

한 아치형 전축분이다. 원형인 분구의 지름은 약 20m이며, 현실의 바닥에서 분구의 가장 높은 지점까지는 7.7m이었는데 토압이 현실에 적게 미치도록 분구의 중심을 현실의 중심보다 5.8m 위쪽에 조성, 축조하였다. 봉토는 현실 주위의 풍화암반을 평평하게 깎아낸 후 석회를 섞은 흙으로 쌓아 원형을 만들었다. 현실은 장방형의 단실분으로 남북 4.2m, 동서 2.72m이며 높이는 3.14m에 이른다. 현실의 내부는 남쪽의 벽면에서 1.09m를 제외하고 모두 바닥보다 21cm 높게 하여 왕과 왕비의 합장관대로 하였다. 네 벽 가운데 남․북벽면은 밑에서 천장부까지 수직으로 올라갔고, 동․서벽은 벽면의 상부에서 차츰 안으로 기울어지는 아치형 천장을 구성하였다. 벽면의 벽돌을 쌓은 방법은 길이모쌓기와 작은모쌓기를 반복하였는데, 길이모쌓기는 4개의 벽돌을 누여 포갰고, 작은모쌓기는 1개의 벽돌을 세워서 배열하였으며, 공적법(空積法)을 사용하였으나 벽돌과 벽돌 사이에 간간이 석회나 진흙이 끼어있다. 아치형 천장의 구성은 남북의 수직 벽 최상부의 좁아진 부분에서 작은모쌓기를 생략하여 벽면을 좁혔으며, 동서의 벽은 7단, 8단에서 작은모쌓기에 키가 작은 사다리꼴의 벽돌을 사용하거나, 길이모쌓기도 벽돌을 3개로 줄이고, 그 중 1개는 횡단면이 사다리꼴로 된 것을 사용하여 점차 만곡도(彎曲度)를 증감시켜 완성하였고 천장에서 벽돌의 이음새에는 석회를 발라 견고하게 하였다.

현실을 구축한 벽돌에는 사격자(斜格子)의 망상문(網狀紋)에 6~8엽의 연화문, 그리고 인동문(忍冬紋)이 장식되어 있는데, 길이모쌓기의 벽돌과 작은모쌓기의 벽돌에 시문된 형태가 다르다. 길이모쌓기의 벽돌에는 망상문과 연화문을 1개의 벽돌 안에 시문하였지만, 작은모쌓기의 벽돌은 연화문 반절과 인동문을 배치하며 2개의 벽돌을 맞대어 문양이 완성되도록 하였다. 현실의 벽면에는 5개의 보주형 등감(燈龕)이 설치되었는데 북면에 1개, 동․서면에 각각 2개씩이 있으며, 보주형의 윤곽을 따라 화염문이 채색되었고, 주위에는 등잔불에 그을은 흔적이 남아 있다. 현실의 바닥과 관대는 벽돌을 이중으로 깔았으며 밖으로 드러나는 윗면의 벽돌을 삿자리모양으로 배열하였고, 밑부분의 벽돌은 석회를 발라 암반에 고정시켰다. 관대는 암반층인 지반 자체를 높게 깎고 벽돌을 깐 것이다. 연도는 현실의 남벽 중앙에 설치되었는데 길이 2.9m, 너비 1.04m, 높이 1.45m로 현실과 같은 아치형이며, 바닥에는 삿자리모양으로 벽돌을 깔았는데 현실의 바닥보다 높아 관대와 동일한 면을 이루었다. 연도 입구의 좌우에는 塼壁을 수직으로 쌓았는데 그 높이는 3.04m이다. 연도의 전축방법은 현실과 동일하나 문양을 구성하는데 있어 8엽 연화문을 구성하는 전을 사용하지 않았다. 배수구는 현실과 연도의 경계부에서 시작하여 연도의 가운데 바닥 밑으로 설치되었으며, 남북으로 19.7m의 길이에 이르게끔 벽돌을 사용하여 구축하였다.

연도 입구에 놓여 있던 지석에서 보면 무녕왕은 523년 5월에 사망, 525년 8월에 왕릉에 안치되었고, 왕비는 526년 11월에 사망, 529년 2월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왕릉은 왕이 죽기 11년 전인 512년에 이미 축조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08종 2,906점에 이르고 있다. 중요한 것으로는 연도 입구에 동발 , 청자 육이호 등이 쓰러져 있었고, 바로 그 뒤에는 왕과 왕비의 지석 2매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오수전(五銖錢) 한 꾸러미가 얹혀 있었으며 지석 뒤에는 석수(石獸)가 남쪽을 향하여 지켜서 있었다. 현실의 남쪽에도 동발과 청자 사이호 등이 쓰러져 있었으며, 현실의 관대 위에는 원래 왕의 목관은 동쪽에, 왕비의 목관은 서쪽에 놓여 있었던 것이 썩으면서 쓰러져 서로 겹쳐져 있었다. 목관의 판재들 밑에서는 왕과 왕비가 착장하였던 장신구들과 몇 점의 부장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중요장신구로는 왕의 것으로 보이는 금제관식 1쌍, 금제뒤꽂이 1개, 금귀걸이 1쌍, 은제과대와 요패 1벌, 금동신 1쌍, 단룡환두대도와 金銀裝刀子 각 1개 등과 왕비의 것으로 보이는 금제관식 1쌍, 금제귀걸이 2쌍, 금목걸이 2개, 은팔찌 1쌍, 금팔찌 1쌍, 금은장도자 2개, 금동신 1쌍 등이 출토되었다. 그밖에 왕과 왕비의 두침(頭枕)과 족좌(足座)가 관 안에 놓여 있었고, 중요부장품으로는 청동거울 3개, 금팔찌 1쌍, 은팔찌 3쌍, 청동용기, 은제탁잔(銀製托盞) 등이 있었다. 여기에서 발견된 지석은 삼국시대 고분 가운데서는 최초로 피장자와 축조연대를 확실히 밝혀주는 자료가 되고 있으며, 왕과 왕비의 관식 등도 백제문화의 수준과 풍속의 일면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무녕왕릉의 역사적 의의

71년 7월 충남 공주 웅진동 송산리 고분군서 발견된 무령왕릉은 한일역사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 그후 30년. 무령왕릉의 발굴에 따른 연구성과는 어떤 것이며 그것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공주대 부설 백제문화연구소(당시 소장 朴秉國)는 1991년 10월 18,19일 이틀간 공주시 문화회관 소강당에서 {무령왕릉의 연구현황과 제 문제}란 주제로 학술회의를 열고 그 동안의 연구성과를 점검하는 한편, 백제사 연구의 진로를 모색했다. 참가학자들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을 비롯, 모두 108종 2906점에 이르는 유물의 학술적, 문화재적 가치에 대해 논의하고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왜, 양과와의 관계, 백제를 둘러싼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에 대해 진단했다. 학술회의에서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관재의 나무 종류를 농학자가 분석, 백제와 왜의 관계를 규명하는 논문을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박상진교수(경북대)는 {백제 무령왕릉 출토관재의 수종}이란 발표에서 {무령왕릉에서 사용하고 있는 관의 목재는 일본열도 남부지방에만 분포하는 금송(金松)임을 각종 검사를 통해 확인했다}며 따라서 이 관재는 당시 倭서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박교수는 {이 원목은 가공 전 직경 1백30cm, 길이 3m, 무게 3.6t이며 수령은 3백년이상으로 추정되는 거목으로 당시 두 지역간의 엄청난 교역규모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관계연구에도 중요한 증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석(매지권 국보 제163호)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일종의 묘지매입문서를 말한다. 무녕왕릉 연도중간 석수 앞에 나란히 놓여졌던 2개의 지석은 각각 왕과 왕비의 것이다. 이 지석에는 왕의 출생연도나 경력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고 장례에 필요한 기사만 명기하였다. 왕비지석의 뒷면에 묘지매매계약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매지권임이 분명하다.

지석에는 모두 53자가 새겨져 있다.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사마왕은 무령왕 생전의 칭호이고, 무령왕은 돌아간 뒤에 붙인 이름이다)이 62세가 되는 계유년(523) 5월 7일에 돌아가시니 을사년(525) 8월 12일에 장사를 지내고 다음과 같이 문서를 작성한다"는 내용이다. 그 문서란 바로 다른 돌인 매지권을 말하는데, 토지신으로부터 땅을 샀음을 밝힌 것이다. 거기에는 돈 일만문(文)과 은 일건을 주고 토왕, 토백, 토부모와 상하 지방관의 지신들에게 보고하여 (왕궁의) 서서남방의 땅을 사서 묘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왕의 매지권은 너비 41.2cm, 길이 약 35.1cm,두께 약 4.5cm, 왕비의 매지권은 너비 약 42.4cm, 길이 약 54.5cm,두께 약 4.3-6cm 로서, 장방형 판석 앞뒤면에 행선을 긋고, 육조체의 영향을 받은'해

서'로 음각하였다. 왕의 매지권 앞 면은 무녕왕이 양나라로부터 받은 작호, 무녕왕의 사망시 나이와 시신을 능묘에 안장한 시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주요부장품

진묘수(국보 제162호)는 무덤을 지키는 짐승을 말한다. 무령왕릉 진묘수는 뭉툭한 코에 툭 튀어나온 눈을 하고 입을 벌린 채로 지석 뒤쪽에서 버티고 서 있었다. 양쪽 옆구리에 날개 같은 것이 조각되어 있고 머리에는 나뭇가지 모양의 철제 뿔을 달고 있어 현실적인 동물 모양이라기보다는 상상의 동물이라고 보아야 옳을 듯하다. 입술에 붉은 칠이 있고 몸에도 칠을 했던 흔적이 있어, 붉은 색으로 잡귀를 쫓는 전통을 따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 돌짐승은 악귀를 막고 사자를 보호하려는 뜻에서 놓은 것으로 중국 한대 이래의 풍습을 들여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의 것은 대개 흙으로 조성하는 것에 견주어 돌로 만든 것은 역시 뛰어난 문화적 소화력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겠다.


금제경식 (국보 제158호/ 한 쌍. 길이 각 14cm, 16cm/ 국립공주박물관)

왕비 쪽에서 출토된 목걸이로 아홉 마디로 된 것과 일곱 마디로 된 것 두 종류이다. 이 중 일곱 마디 목걸이는 발굴 당시 아홉 마디 목걸이의 밑에서 겹쳐 나와 먼저 착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일정한 간격으로 활처럼 휘어진 육각의 금봉을 각 마디의중간부는 굵게 하고 끝은 차츰 가늘게 하여 고리를 만들어 다른 것과 연결시킨 다음, 남은 부분을 세몸에 감아서 풀리지 않도록 하였다. 1개의 금봉에 고리와 매듭을 겸한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두 목걸이 모두 한 끝에 목에 걸기 위한 세환이 끼워져 있을 뿐 매우 간단한 구조를 하고 있지만, 미적 감각과 함께 세련되어 보인다.


금제뒤꽃이 (국보 제159호/ 길이 18.4cm/ 국립공주박물관)

위가 넓고 밑으로 긴 역삼각형이며, 밑은 세 가닥의 긴 핀 모양으로 되어 있다. 윗면 중앙에는 보주형 돌기가 있어서 마치 새의 머리 같이 보이고, 좌우는 호형을 그리면서 굴곡 진 형태로 날개처럼 보인다. 좌우의 측선은 안으로 차츰 좁혀져 있는데 윤곽을 따라서 융기선이 한 줄 찍혀 있다. 삼각형부는 아래위로 구분하여 그 구획선과 상단 윤곽에는 점렬문을 찍었다. 그 가운데 상부에는 좌우에 팔화형을, 그사이 아래․위로는 원점을 두드러지게 찍었으며, 구획의 아랫부분에는 S자형의 쌍선을 대칭으로 그린 다음 그 여백에 꽃무늬를 찍었다. 왕의 머리위치에서 발견되었고, 끝이 새줄로 갈라진 점으로 보아 머리에 꽂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제수식부이식 (국보 제157호/ 길이 11.8cm, 8.8cm/ 국립공주박물관)

왕비의 크고 작은 두상의 세환식 귀걸이다. 한 쌍은 복잡한 형식의 길고 짧은 두 줄의 수식에 달려 있고, 또 다른 한 쌍은 한 줄로만 되어 있다. 앞의 귀걸이 중 긴 가닥에는 4 개씩의 원형 영락이 금사슬에 7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맨 끝에는 작은 고리를 연결하여 여덟 개의 원형 영락을 단 아래에 탄환모양의 수하식이 매달려 있다. 이러한 탄환모양의 수하식은 고구려의 유적에서는 발견된 일이 있으나 신라 유적에서 는 그 예를 볼 수 없다. 짧은 줄의 수식은 다른 한 쌍의 것과 거의 같은 수법으로 긴 가닥에서의 탄환모양 장식이 없고, 잎사귀모 양의 영락과 담록색의 둥근 옥이 달려 있다. 잎사귀형 영락 아래에는 사익형의 초실형 수식이 있고, 맨 끝에는 작은 돌기가 달려 있다.


금동용봉대향로와 백제의 위대한 예술성

1993년 부여 능산리 고분군과 부여 나성 사이의 백제시대 집터를 발굴하던 중에 거대한 향로가 출토되었다. 「금동용봉대향로」,「금동용봉봉래산대향로」라 불리게된 이 향로의 출현은 백제 공예사 뿐만 아니라 , 나아가 삼국시대 우리 나라의 미술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궁중에서 사용하는 물건을 제작하였던 공방터의 바닥 진흙 속에 파묻혀 있던 체로 출토된 이 향로는 공기가 통하지 않았던 까닭으로 거의 녹이 슬지 않고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전고 64cm 나 되는 이 거대한 향로는 아주 섬세한 조각과 화려한 장식들로 장엄되었다. 하부 받침은 머리를 들어올린 용의 입에 마치 큰 연꽃을 물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조각되었으며, 연꽃 위에는 여러 개의 산들이 중첩되어 솟아오르고 있다. 그리고 맨 꼭대기에는 한 마리의 봉황이 날개를 활짝 젖힌 체로 사뿐히 앉아 있는 모습이다. 향로의 뚜껑부분은 불로장생의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중국 동쪽 바다 가운데 봉래산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꼭대기의 봉황 역시 봉래산에 살고 있다는 상서로운 전설 속의 새로 보이는데 천하가 태평할 때 세상에 나타난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 봉황은 음악이 있는 곳에서 저절로 노래하고 춤추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예로부터 춤과 음악이 있는 곳에 흔히 동반되었다. 봉황의 모습은 깃털과 벼슬, 부리, 발가락 4개 등 세밀한 표현으로 꼬리를 길게 날리고 양 날개를 퍼득이며 막 비상하려는 듯 조형되었다. 눈은 아래의 산을 내려다 보는 듯 하고 날개와 뒷 꽁지에는 화염문이 장식되어 있다. 머리부위와 몸통은 둥근 구슬로 연결되었고, 보주 바로 밑 목덜미에는 향연구멍이 두 개 있고 양다리를 밟고 있는 형상이다.

봉황은 고대로부터 신성시 여긴 상상의 새이다.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고 하는데 그 생김새는 문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주서(周書)>에 이르기를 “형체가 닭과 비슷하고 뱀의 머리에 물고기의 꼬리를 가졌다"고 한다. 또한 <설문해자>에 ”봉의 앞부분은 기러기 뒤는 기린 뱀의 목, 물고기의 꼬리, 황새의 이마, 원앙새의 깃, 용의 무늬, 호랑이의 등, 제비 의 턱, 닭의 부리를 가졌으며 오색을 갖추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악집도>에는 닭의 머리와 제비의 부리 뱀의 목과, 용의 몸, 기린의 날개와 물고기의 꼬리를 가진 동물로 봉황의 모양을 묘사 하고 있다. 봉황은 동방 군자의 나라에서 나와서 사해의 밖을 날아 곤륜을 날아 지나 지주 의 물울 마시고 약수에 깃을 씻고 저녁에 풍혈에 자는데 이 새가 세상에 나타나면 천하가 크게 안녕하다고 한다. <산해경>에서도 “이 새는 먹고 마시며 절도에 맞고 절로 노래하고 춤을 추는데 이 새가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하다>고 설하고 있다. 또한 봉황은 갑골문에서 상제의 사자, 또는 천자의 상징으로서 인식되기도 하였다.

74개나 되는 산봉우리 사이사이에는 온갖 진기한 영물들이 피어나듯 장식되었다. 호랑이, 코끼리, 원숭이, 사슴, 멧돼지, 등 실존하는 짐승들 39마리가 16명의 인물상과 함께 조각된 모습이다. 정상부 봉황의 바로 밑에는 5인의 악사가 빙 둘러앉아 마치 천상계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으며, 악사들 바로 뒤에 작은 구멍을 뚫어 향의 연기가 피어 나오도록 장치했다. 또한 산골마다 자리한 각 인물들은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낚시를 하는가 하면 머리를 감고 말을 타고 달리거나 사냥을 하는 등 다양한 모습이다.

몸체는 만개한 연꽃으로 사이사이에 두 신선과 날개 달린 물고기를 비롯한 수중생물 총 26마리가 조각되었다. 이러한 몸체를  한 마리의 용이 세 발을 이용하여 바닥에 안정케 하고 머리를 처 들어 받쳐 물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한 발을 허공에 힘차게 쳐들고 있는 모습은 용의 기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요소이다. 하부의 연꽃은 만물의 생명이 연꽃에서 탄생한다는 연화화생관(蓮華化生觀)을 표현한 것이다.

이 향로의 전체구조는 음양의 체계를 적용하여 하나의 우주를 완성하고 있다. 하부 수중계는 음(陰)의 대표 격인 용을 등장시키고, 그 위 몸체에는 수중 또는 물가와 관련된 동물과 연꽃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지상계를 상징하는 뚜껑에는 산악과 선인들과 짐승을 배치하였으며, 천상계인 정상에는 양(陽)을 상징하는 봉황과 원앙을 장엄한 것이다.

이 향로는 일찍이 봉래산 향로가 유행하였던 중국 한나라의 유물과는 도저히 비견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봉래산 신앙의 원조인 중국에서조차 최고수준의 청동기 제작기술로도 실현하지 못하였던 백제의 용봉향로는 전 세계인이 또 한번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위대한 예술품으로 홀연히 우리 곁에 돌아온 것이다.


산수문전으로 보는 백제 회화의 경지

‘산수화'란 말 그대로 산과 물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즉 자연을 그린 풍경화의 일종인 것이다. 산수화는 혼란기이었던 중국의 육조시대(六朝時代, A.D. 265~581)부터 시작되었다. 극심한 정치적 격정을 겪었던 당시 지식인들은 세속을 떠나 자연 속에서 자연과 교감하며 사는 이른바 호복한상(濠僕閒想)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게 이상적인 삶의 혜택을 누릴 수 없었으므로 그 대신 환상적인 절경의 산수화를 그림으로 제작하여 벽에 걸어놓고 감상하는 기풍이 유행하게 되었다. 바로 거기에서 “산수화의 태동"이라는 인류예술사의 큰 발자취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날 당시의 그림은 단 한 점도 전해지지 않는다.

1937년 봄 충남 부여군 규암면 외리에 위치한 백제의 옛 절터에서 문화재 발굴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출토된 150여 개의 벽돌 속에서 산수무늬벽돌이 발견되었다. 물론 산수문전은 중국에서조차 전무한 것으로 매우 진귀한 것이다. 백제의 산수화 역시 단 한 점도 전해지지 않는 상황에서 화상전의 출현은 우리 나라 산수화의 시작이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벽돌에 부조된 산수문전(山水紋塼)의 그림은 매우 도식적이긴 하나 백제 산수화의 발달 정도를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걸작이다.

화면의 하부에는 흐르는 강물이 도식적으로 표현되었고 그 위로 기암절벽과 산들이 중첩되어 자리하였다. 세 개의 봉우리를 가진 산들의 정상에는 저마다 송림(松林)으로 우거진 형상이며, 하늘에는 상서로운 구름이 배치되어 조화로운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기암과 봉우리형 산들이 겹겹이 중첩되어 서로 견주듯 조화를 이루고 은연중에 원근감을 보여준다. 중앙의 절벽 뒤에는 기와집 한 채가 소담스럽게 표현되었고 오른쪽 기암 사이에는 승려로 보이는 인물이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인물상은 그 동안 탁본으로 닳아져 모습이 많이 희미해졌다. 둥글둥글한 산 모양이 더없이 부드러워 백제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보는 듯하다. 또한 살짝 도드라진 양각에 한 겹 얇은 테두리를 넣어 현대적인 미감을 연출하고 있다. 마치 신선경 또는 무릉도원을 꿈꾸었던 백제인의 산수사상을 한껏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산수문전은 전체적으로 백제 특유의 유연하고 부드러운 양식으로 한 폭의 산수화라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더욱이 이것이 벽돌에 부조로 표현되어 구워진 것으로 장인(匠人)의 솜씨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시 화가들의 작품 수준이 상당한 경지에 있었다는 추측을 쉽게 해 본다. 나아가 이 산수문전은 백제뿐만 아니라 중국에조차 남아있지 않은 육조시대 산수화의 양상까지도 짐작케 하는 소중한 작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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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2004-09-15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송한 말씀입니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관심이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관심이 가다보니 알게되고 알다보니 가르치게 되나봅니다. 더욱이 백제 역사재현단지의 단청자문건으로 백제의 문양을 깊이있게 연구해야할 필요성 역시 간과할 수 없었구요~~~퍼가시어서 잘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고구려 고분벽화


고구려는 우리 민족이 세운 가장 광대하고도 강력했던 제국이었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대륙과 인접한 지리적 여건에 따라 백제, 신라에 앞서서 이끌고 많은 영향을 주었다. 고구려의 문화는 호방하고 진취적이며 활력이 넘치는 것이었다. 지역적으로는 중국과 서역의 문화를, 종교와 사상적으로는 불교와 도교를 동시에 수용하는 등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면서도 지극히 독자적이고도 독특한 문화를 창출하였던 것이다.

고구려의 문화적 양상과 특성을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구려 벽화고분이다. 오로지 단편적인 기록들에 의거하여 막연하게 추상적으로만 짐작할 수밖에 없었던 고구려 문화의 풍부한 내용과 성격을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고구려 고분벽화들인 것이다.


1. 벽화고분의 분포와 현상

현재까지 확인된 벽화고분은 만주지역〔집안일대〕에 23기, 평양․안악 일대에 68기 등 91기에 이른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한 연구는 1907년 프랑스의 학자` 솨반느(E. Chavannes)가 산화연총을 학계에 소개한 이래 1930년도의 일본인 연구와 80년도의 중국인 연구로 이어지면서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90년 초 한․중 간의 국교수립과 한국인의 동북지방 방문러시에 따라 집안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93년 고구려문화국제학술대회를 계기로, {아, 고구려전}(조선일보)와 94년 KBS의 {고구려고분벽화}로 국민적 관심사로까지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중국 집안에 분포된 고구려 고분은 대략 1만2천여 기, 그 중에서 제대로 발굴된 고분은 극소수이고 중국 당국의 무관심한 방치로 인하여 유적은 서서히 훼손되고 있다. 그 유명한 수렵도나 무용도의 모습은 일제시대 때 찍은 사진들로만 감상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들 벽화는 이제 그 형체만 경우 남아 있을 정도인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북한 당국의 벽화 고분 관리는 비교적 양호하다. 중국 당국이 철문으로 고분 입구를 막는 방식과 달리, 북한은 고분 내에 사면을 유리벽으로 만들고 온도 조정 장치와 입구 조정 등을 통하여 벽화 보존에 노력하였다. 또한 집중적인 연구조사를 통하여 얻어진 결과물들을 한데 모아 책으로 간행하기도 하였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지구촌에서 유래 없는 훌륭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유적의 중요성을 느낀 일본인들도 북한 당국과 협력하여 고구려 벽화들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의 등록을 추진하고 있다. 더 이상 고구려 벽화 고분이 정치적 논리에 의해서 훼손되어 가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 남. 북한이나 중국 등 모두 이해관계를 떠나 벽화 고분 보존에 모두 노력을 해야 한다. 고구려 벽화 고분은 우리 선조들이 남긴 아주 귀중한 유적이지만, 이제는 우리 것만이 아닌 세계인이 소중히 여기는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관리해야 할 것이다.


2. 고구려 고분벽화의 역사적 변천

고구려 고분벽화의 발전 단계는 대체로 3기 또는 5기로 구분하고 있다.

3기구분 : ①인물풍속도 ②인물풍속과 사신도 ③사신도

5기구분 : ①인물풍속도 ②인물풍속 및 사신도 ③장식무늬 고분 ④장식무늬와 사신도 ⑤사신도 고분.


⑴ 초기(인물풍속도)

초기에 해당되는 .A. D. 4~5세기 초반에 인물 풍속을 그린 단실분, 감 또는 측실로 조영된 2실분구조가 주류를 이룬다. 동수묘(안악 3호분/375년-북한에서는 이 묘를 미천왕릉 또는 고국원왕의 것으로 보고있다), 요동성총, 평양 역전 고분, 대성리 1호, 약수리 고분, 복사리 고분, 팔청리 고분, 대성리 2호분, 덕흥리(408년)고분, 안악 2호분, 고산리 9고분, 매산리 사신총, 통구 12호분, 용강(安城洞)대총, 감신총, 연화총, 천왕지신총, 삼실총, 대안리 1호분, 장천 1호분, 가장리 고분 등이 초기 벽화고분에 해당된다.

인물풍속도는 벽그림과 천정그림으로 구분된다. 벽에는 집안 생활풍속도가 그려졌는데 가족, 측근, 시중과 호위무사 등 남녀 인물들이 묘사되었는바, 그 내용은 행렬, 사냥, 씨름, 전쟁, 무악 등이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무덤의 입구에는 문지기그림도 나타난다. 벽화에서 볼 수 있는 건물그림에서는 기둥, 주두, 두공, 도리 등이 묘사되어 당시 목조 건물의 형식을 재현시키고 있다. 또한 성곽, 부엌, 마구간, 외양간, 우물 등 각종 건축시설물도 생생하게 표현되었다. 천장에는 일월성신과 비운(飛雲) 등 하늘, 즉 천상의 세계(혹은 내세의 상징)가 묘사되었다. 1970년 발견된 중국 집안 장천 1호분의 예불도는 무덤의 주인인 부부가 부처님께 예배하는 모습으로 경건하고 엄숙함이 종교화로서 최대 걸작이다.


⑵ 중기(인물풍속 및 사신도)

5세기 중반부터 6세기 초반 벽화고분들이 중기에 해당된다. 고분의 내부구조는 대게 인물풍속 및 사신도의 단실분 또는 측실을 갖춘 2실분으로 조성되었다. 쌍영총, 각저총, 무용총, 산련화총, 귀갑총, 안악 1호분, 환문총, 성총, 기마총, 고산리 1호분 등을 들 수 있다.

인물 풍속과 사신도 고분은 인물 풍속도와 함께 사신도가 묘사된 고분이다. 벽화 내용은 전기 인물 풍속도의 벽화보다 더욱 다양한 요소가 그려졌다. 즉 인물풍속도와 함께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의 사신도와 비천, 신선 등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⑶ 후기(사신도)

후기에 해당되는 6~7세기에는 사신도를 그린 단실분이 주류를 이룬다. 강서대묘․중묘, 호남리 사신총, 진파리 1호․4호분, 통구 사신총, 내리 1호분, 오회 4․5호분 등이 후기에 해당된다. 사신도 고분은 벽화가 사신도 위주이다. 고분 내의 4벽에 사신을 묘사하고 천장에는 황룡 또는 연꽃을 중심에 배치하고 일월성신, 서조(瑞鳥), 영초(靈草), 비운(飛雲), 기린(瑞獸 ?), 신선, 비천, 구름, 인동무늬 등을 장식하였다. 그 외에도 장식무늬, 인물 등을 그렸으며, 문에는 문지기도 묘사하였다.


3. 고분벽화의 특징과 상징성

고구려 고분벽화에 담겨진 내용을 통하여 고구려인들의 기상과 종교, 사상, 우주관, 생활상과 풍속, 예절, 남녀 인물들의 복식과 관모, 꾸밈새와 화장법, 각종 시술과 문물, 건축양식과 실내장식, 회화의 기법과 발달정도, 문화의 성격과 변천, 외국문화와의 교류 양상 등등 수많은 것을 엿볼 수

있다. 즉 고구려 벽화는 문화적 보배인 동시에 소중한 역사적 사료인 것이다.

또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벽화내용의 전개가 매우 짜임새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후기의 벽화들은 그 구성이 정확히 맞물리도록 완벽에 가깝게 짜여져 있어 마치 불교회화의 만다라를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 밖에도 화려한 채색과 안료의 발달을 엿볼 수 있다. 벽화의 채색은 후기로 내려올 수록 극도로 화려하고 강렬하다. 천 수백 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 빛깔이 선명하게 전해지고 있다. 또한 심한 결로 현상에도 불구하고 박락되지 않은 것을 보면 안료의 제조와 설채(設彩)기법에 수준 높은 과학기술이 뒷받침되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⑴ 인물풍속도

벽에 그려진 인물풍속도는 대체로 서사적이며 설명적인 경우가 대부분으로 주로 피장자의 생애와 연관 깊은 내용들이다. 벽화 중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전투, 수렵, 씨름, 등 힘과 관련된 주제들이 많이 등장하는 점이다. 이것은 한족이나 북방민족들과 끊임없이 대결해야 했던 고구려인들의 용맹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고구려 벽화는 웅혼하고, 힘차며, 동적이고 긴장감 넘치는 특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힘찬 필치의 특성은 인물 풍속도가 완전히 사라진 후기의 사신도에서도 이어지는바, 형상과 필선이 힘차고 속도감 있으며 팽팽한 긴장감이 넘쳐흐른다. 특히 초기, 중기보다는 후기의 벽화에서 필치의 한층 무르익은 완숙미를 느낄 수 있다. 그 예로서 후기 벽화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많이 나타나는 사신도 용그림의 역동적인 용틀임은 힘찬 필법의 경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우선 고구려고분벽화의 주된 내용인 인물풍속화를 살펴보면 주인공과 함께 다양한 배경이 공존하고 있다. 사방 벽면에는 건축부재의 기둥과 두공을 그려서 묘실내부를 실제 목조건물과 같이 구성하고, 다양한 무늬를 부가하였으며, 천정에는 해 ․ 달 등 천상의 세계를 묘사하였다. 즉 벽에는 주인공의 현실 세계를, 천정에는 내세의 모습을 반영한 하나의 「소우주」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벽화의 주제는 생전 주인공의 권위와 생활상을 표현한 것으로, 의식주와 풍속 ․ 무용 ․ 음악 ․ 씨름 ․ 사냥 ․ 행렬 ․ 전투 ․ 공양 등의 다양한 주제는 물론 등장인물 각 개인의 개성이 두드러지도록 묘사되었다. 

집안장면에는 거실 ․ 부엌 ․ 마구간 등 각종 건물이 그려지고 있다. 동시에 벽화에 나타나는 인물화는 환상적 인물로 종교와 신화의 세계를 반영하여 ‘인간과 동물’,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표현한 형상이다. 즉 비천․용․기린․학을 타고 비행하는 신인(神人)의 모습이나 우수인신(牛首人身)의 신농씨(神農氏/중국의 전설상의 제왕으로 삼황(三皇)의 한 사람. 백성에게 경작을 가르쳤다고 하며, 불의 덕으로 왕이 된 데서 염제(炎帝)라고도 함), 제륜신(製輪神) 등에서 그러한 의식세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인물화의 경우, 무용총의 접객도에 나타난 시자와 시녀들의 모습이나, 안악 3호분(冬壽墓)에서 보여준 다양한 수행자들을 거느린 모습, 그리고 약수리고분벽화 주인공의 화려한 행렬도에서 고구려 귀족사회의 생활상을 쉽게 살필 수 있다.


⑵ 인물도와 복식

안악3호분과 덕흥리고분의 주인공 초상화에서는 주인공의 권위와 위상을 확인할 수 있도록 주변에 다양한 시종자를 함께 묘사하였다. 주인공은 아담한 실내장식과 화려한 복장, 머리에는 백라관을 쓰고 있다. 원래 고구려의 나관은 백 ․ 청 ․ 비나관이 존재하였음을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 벽화에서 그대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안악3호분의 행렬도에는 수많은 수행원을 거느린 주인공이 백라관을 쓰고 있다. 그 외에도 덕흥리 고분벽화의 주인상 역시 백라관을 쓴 채 위엄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벽화에 나타난 인물상에서 가장 화려한 것은 여인의 복식이다. 안악3호분의 여주인과 시녀들, 무용총의 접객도, 수산리 고분벽화의 행렬도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복식은  매우 다양하고 화려함을 보여준다. 특히 여자의 머리모양은 더욱 다양한데 얹은머리․ 내린머리(애교머리) ․ 올린머리 등으로 한껏 멋을 부린 모습이다. 그리고 어떤 여인은 멋과 실용성의 능률을 위해 머리에 수건을 쓴 모습인데 약간 앞으로 젖힌 수건을 살짝 접은 형상으로 표현되었다. 대게 벽화에 그려진 여인들의 용모는 화려하고도 다양한 머리형태와  무늬 있는 복식, 사뿐한 버선발, 그리고 갸름한 얼굴 등이 여인상의 공통된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남자 인물상의 경우, 절풍(折風)은 주로 새털(鳥羽)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되며, 문관의 모자로 생각되는 책(責)은 뿔이 난 것과 없는 것이 있다.

고구려고분벽화에 나타난 여인의 복식이나 외형에서 두드러진 차이점은 신분에 따라 저고리와 바지의 통이 다르다는 것이다. 지배계급일수록 남녀 모두 바지통이 넓어 좌식계급으로서 비활동적인 생활상을 나타낸 듯하다. 또한 고구려 복식의 실용성과 장식성은 단정하면서, 아름다움보다 빈번한 외침과 혹한과 같은 자연적인 악조건을 극복하려는 독자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남성상은 왕 이외에는 주로 기사와 역사가 중심이 된다. 대체로 말을 타고 달리며 수렵 ․ 전쟁을 상징하는 장면들이 대표적이다. 특히 무용총의 기사도는 상무(尙武)적이며 호전적인 고구려인의 기질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용감한 고구려인의 기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통구12호묘와 삼실총의 벽화이다. 아울러 고구려 인물상을 대표하는 벽화로는 삼실총의 역사도를 들 수 있는데 가슴보다 굵은 팔뚝에서 패기 넘치는 힘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둥글고 긴 얼굴, 짙은 눈썹, 그리고 크고 순한 눈을 볼 때 상무적이며 전투적인 고구려인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삼실총의 역사나 안악 3호분의 주인공 등은 알맞게 살이 쪘고 갸름하며 여유 있는 낙천적 용모로서 결코 무섭지 않은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삼실총의 무인상 역시 갑옷은 입었으나 얼굴은 통통하고 순하게 생긴 모습이다.

고구려 벽화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등장인물이나 동물, 그리고 모든 주제가 조화와 균형을 이룬다는 점이다. 5회분 4․5묘의 [태양신과 월신]이나 [화염문 사이에 낀 남녀상] 등은 색감이나 구도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무용총 기사의 경우 백마(위)와 흑마(아래)를 각각 타고 서로 반대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또한 무용도의 경우 무용수의 복장이 서로 상․하복의 색깔이 엇갈리게 채색하였다. 즉, 전자의 상의(저고리)가 붉고, 하의(바지)가 흰색이면, 후자는 상의가 흰색이며 하의는 적색으로 대칭을 이루었다. 좌우․전후의 대칭적 조화는 접객도의 탁자 모습에도 보여 진다. 이러한 조화와 균형의 미는 인동당초문의 경우에도 예외 없이 나타나고 있다.


⑶ 가무도

고구려인물화에서 특기할 또 다른 사항은 노래와 춤을 즐기는 가무도이다. 빈번한 전쟁 속에서 여유와 긴장완화를 노래하는 고구려인의 현실감각은 진(晉)나라의 학자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한 ꡔ삼국지(三國志)ꡕ 「위지」 동이전의 <其民喜歌舞 國中邑落 暮夜男女群聚 相就歌戱>라는 기록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고구려인들이 집단 가무를 통하여 결속과 단합을 꾀하였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가무도에는 각종 악기가 그려졌는데, 『수서(隋書)』에는 비파․오현․피리․생(笙)․퉁소(簫)․요고․패 등 14종류가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벽화상태가 거의 원형을 잃고 있기 때문에 모두 다 확인할 수는 없으나 다양한 악기는 찾을 수 있다. 특히 5회분 4호묘의 요고, 무용총의 횡적(젓대), 강서대묘의 대각(쌍나팔), 집안17호묘의 각(나팔)과 현금 등이 대표적인 악기들이다.


⑷ 서수․서조․사신도

동물화는 인물풍속화와 함께 고구려 고분벽화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주제이다. 벽화에 등장하는 동물에는 말 ․ 소 ․ 개 ․ 범 ․ 사슴 ․ 닭 등의 실제동물과 청룡 ․ 백호 ․ 주작 ․ 현무 등 이른바 사신도와 같은 환상적 동물이 있다. 환상동물에는 그 외에도 날개와 발을 가진 물고기(안악 1호분), 삼족오와 두꺼비의 일․월신(쌍영총․각저총), 기린도 등과 같은 특이한 형상의 모습도 등장한다. 무엇보다도 5회분4호묘에서 보여주는 해와 달의 신은 세발까마귀와 두꺼비를 머리에 이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의 결합이라는 고구려벽화의 특징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동물화에서 볼 수 있는 날개 달린 물고기나 날개 달린 사슴(안악1호분), 천마도 등은 고구려인의 환상과 꿈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다신교적 의식세계를 표방한 것으로 사료 된다.

날개 달린 물고기나 인두작신(人頭雀身)의 형상은 『산해경』에 보이는 비중원적 요인의 특징으로 고구려 문화의 성격을 가늠케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용을 탄 인간과 우두인신(牛頭人身), 수신양두인(獸身兩頭人/아래는 동물이며 위는 머리 둘을 가진 인간), 그리고 인두작신(덕홍리 고분․삼실총)과 같이 인간과 동물의 공생을 통해 다신교적인 고구려인의 의식이 중원문화와는 분명 다른 북방 문화의 영향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인간과 동물과의 공생관계는 용이나 뱀만이 아니고 소(5회분5호묘)와도 연결되며 주작(삼실총)과도 공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물화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사신도이다. 이는 단순한 환상의 동물이 아니라 방위신 내지는 도교를 포함한 종교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선 청룡은 동방의 수호신으로 네 발을 갖고 있어 외형상으로는 백호와 비슷하지만 머리 부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청룡은 긴 혀를 갖고 있으나, 백호는 큰 눈과 날카로운 이빨이 있을 뿐이다. 북방수호신인 현무도는 거북과 뱀이 머리를 마주 대고 얽힌 형상으로 힘과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있으며 박력 있는 생동감으로 고구려벽화의 활달한 필치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현무는 거북과 뱀이 뒤엉킨 모습이 대부분이나, 약수리고분과 삼실총의 예처럼 양(염소)과 뱀이 어울린 형상도 드물게 나타난다. 남방수호신인 주작은 상상의 새로서 닭이나 봉황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날개와 꼬리가 길고 크다. 따라서 5회분5호묘에는 유난히 빨간 날개를 가진 새가 주작으로 표현되었고, 무용총에는 수탉이 그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동물화에서 특기할 것은 고구려와 신라의 문화적 관련성이다. 태양 속의 까마귀(三足烏)가 결국 예언자로서의 새(朱雀)로 연결되었으며 고구려의 주작과 신라(天馬塚)의 새가 형태나 특징이 거의 유사한 모습이다. 이러한 양국간의 유사성은 장천1호분의 천마그림과 경주 천마총의 천마도와의 유사성과 함께 고구려 문화의 신라전파를 추정케 한다. 고구려벽화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새는 사자(死者)를 하늘로 연결하는 사자(使者)로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변한․진한에서 장례 때 새 깃을 함께 묻어 죽은 사람이 하늘로 날아가기를 빈다는 기록을 구체화시킨 것이라 하겠다.


⑸ 패턴장식

장식화에는 식물무늬․기하무늬․운문․기둥무늬․별자리 등이 있다. 식물무늬는 연꽃무늬와 인동문이 특히 많은데, 전자는 무용총과 삼실총에서, 그리고 후자는 강서대묘와 사신총에서 진면목을 볼 수 있다. 기하무늬에는 원형․거치문․귀갑․병풍무늬 등이 있으며, 구름무늬가 두드러진 소재이다. 기둥무늬는 무용총이나 각저총에서 볼 수 있는 지상건물처럼 보이게 한 것으로 기둥․두공․도리 등을 묘사한 것이다. 별무늬는 무덤 천정에 그려져 있는 것으로, 진파리 4호분이나 장천1호분의 성좌도도 그 일종이다.

장식화에서 가장 많은 것은 연꽃이다. 연꽃무늬는 대체로 비슷한 형태를 갖고 있으나, 무덤에 따라 그 모양이 약간씩 다르게 묘사되었다. 연꽃무늬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표현은 만개된 연꽃의 형상으로서 진파리1호묘의 현실 중앙 천장 연꽃그림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꽃문양도 다양한 형상으로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특히 연꽃을 옆에서 묘사한 경우와 연봉우리 형상도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연꽃 위에 사람의 두상을 표현하거나 보주와 화염무늬를 장식한 경우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연화문은 고구려의 본격적인 불교의 유행과 더불어 망자의 연화화생, 정토화생을 상징하는 교리적 의미를 그림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또한 장식무늬에서 큰 비중을 갖고 있는 인동당초무늬는 여러 가지 모양을 하고 있다. 특히 사신총(집안)의 것은 나뭇잎 가운데 꽃망울이 있는 것과 새모양으로 색깔을 달리하면서 당초문 형식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 멋과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다. 그러나 대부분은 같은 무늬를 연결시킨 것이다. 그 외 구름당초도 있으며, 무용총과 각저총의 측면 연화문(博山文)도 있었다. 이러한 장식무늬는 그림의 주인공이나 주제를 부각시키며 공간을 메우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 무늬는 대개 천정 고임부분을 장식하였고, 그림과 그림사이를 연결시키는 고리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동당초문의 유행은 중동 및 서역문화와의 밀접한 관련을 찾을 수 있다.

장식무늬 중에 특이한 것은 성좌도이다. 현실천정 꼭대기에는 대부분 성좌도가 있다. 동쪽에는 태양(3발까마귀)이, 서쪽에는 달(두꺼비)이 있고, 몇 개의 동심원이 그려져 있으며, 거의 북두칠성이 예외 없이 나타나있다. 이러한 성좌도에서 고구려의 천문학이나 과학의 높은 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 성좌도의 내용에서 『삼국사기』에 보여진 혜성․오성․태백․토성 등의 출현은 단순한 천변(天變)이 아니라, 정치적 의미가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장천1호분에 있는 성좌도는 북두칠성이 남북으로 교차되어 있으며, 달에는 두꺼비 외에 토끼형상이 이용된 것도 있다.

이 밖에도 벽화의 소제로 풍경화가 그려지기도 하였다. 풍경화의 소제로는 산, 나무, 구름 등이 주로 등장하고 있는데 그 형태가 단순화되거나 상징화 또는 도식화된 형상이다. 풍경화는 벽화의 주제로서 단독으로 그려진 예는 없으며 주로 수렵도의 배경으로 활용되었다.


4. 벽화의 기법

고구려 벽화는 벽면에 회를 바르고 완전히 건조한 후에 채색하는 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것을 가리켜 혹자는 서양의 프레스코(fresco)기법으로 단정하는 경우가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프레스코기법은 벽에 바른 석회 바탕칠이 건조하기 전에 물이나 석회수로 갠 내(耐)알칼리성 토성안료를 빠르게 채색하는 방법으로 ‘부온 프레스코(buon fresco)’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벽화기법은 마르기 전까지 채색이 가능한 예정부분(조르나타: giornata)에만 회반죽을 바르고 채색을 하는데, 정해진 시간에 조르나타가 다 채워지지 못하면 건조된 부분의 회반죽을 긁어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또한 스며든 채색이 마르면서 나타나는 특성상 고구려 벽화에서와 같이 활달한 필치의 구사는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고구려 벽화의 채화기법은 이와는 근본이 다른 방식이다. 석면(石面) 위에 회반죽을 바르고 완전히 건조한 다음 자유롭게 채색한 방식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기법을 오히려 석회바탕이 완전히 마른 상태에서 석회수로 갠 안료나 템페라(tempera)로 채색하는 세코(secco, 프레스코 세코라고도 한다)기법에 가깝다. 템페라는 라틴어의 ‘temperare(안료와 매체의 혼합)’를 어원으로 하는 그림물감의 일종으로, 난황․난백․아교질․벌꿀․무화과나무의 수액 또는 양이나 염소, 기타 수피(獸皮)로 만든 콜로이드 물질을 단독 또는 적당하게 혼합한 매개제로 채색의 정착을 기한 불투명 물감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이와 유사한 밀타회 채색기법을 이용하여 제작된 것으로 사료된다. 밀타회기법은 채색의 피막이 견고하고 내구성․내수성이 강한 특징으로 삼국시대부터 전통적으로 사용된 채색 방식이다. 밀타유는 들기름이나 오동기름을 질그릇에 끓이고, 납에 열을 가하여 얻는 밀타승(密陀僧) 즉 산화납(Lead Oxide)을 혼합하여 끓인 것을 식힌 다음 여과하여 만든 기름이다. 이것에 동양 고유의 안료를 혼합하여 채색하는데, 그 특성이 서양의 채료인 유화(油畵)와 비슷하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바로 이러한 기법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자유로운 묘사와 활달한 필치의 구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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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2004-09-07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생들에게...
학교정보란에서 강의록을 다운 받을수 없는 학생들은 이곳에서 아쉬운대로 카피받아가시기 바람. 간략하게 정리해 둔것이니 참고가 될것임. 이번학기엔 3,4학년도 많이 듣던데 취업때문에 바쁘더라도 결석하지 말고 열심히 하기바람.

ceylontea 2004-09-10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것도 퍼갈께요.. 감사합니다.
 

한국의 암각화

1. 암각화의 분포

1970년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경남 울주군 천전리 암각화가 발견되고서부터 본격적인 암각화 조사 연구 시작. 그 이후 울주 대곡리, 고령 양전리․안화리, 안동 수곡리, 영일 인비리․칠포리, 영주 가흥동, 함안 도항리, 남원 대곡리, 여수 오림동, 영천 보성리, 경주 석장리․안심리, 고령 지산리 등 모두 16개의 암각화 유적이 발견됨.

우리 나라 암각화 유적의 분포는 한반도의 동남부지역에 편중. 특히 암각화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 방패무늬 암각화의 경우 10개 유적 중 9개 유적이 경상북도에 있고 나머지 하나만 전라북도 남원에 소재. 남원 역시 고대 이전에는 영남문화권에 속하거나 영향을 많이 받은 지역. 그밖에 다른 유형의 암각화의 경우 실례가 드물기 때문에 지역 특성을 검출할 수 없음.

이러한 지역 분포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한반도에서 암각화문화가 일반화되지 않았다던가, 숨겨진 유적을 아직도 찾아내지 못한 연유 때문. 그러나 우리 나라의 암각화에 대한 연구조사활동이 초미의 단계에 있는 만큼 단정지어 말할 수 없음. 다만 방패무늬 암각화의 경우 밀집 분포된 양상과 제작 시기를 고려하면 고대국가 탄생기에 영남지방을 거점으로 발달한 특정 문화와 관련 깊을 가능성이 비쳐짐.


2. 암각화의 제작기법과 종류

우리 나라 암각화의 종류는 크게 人物 ․ 動物 ․ 器物 ․ 圖形 ․ 生活像의 다섯 가지 유형으로 구분됨. 암각화의 제작기법은 쪼아새김(pecking), 면새김(engraving), 갈아새김(grinding) 등 세 가지 기법. 유라시아 북반구에 집중된 암각화 제작기법은 일명 트라겐(X-ray)기법으로 대상의 내부를 선과 동그라미로 채우는 방식으로 쪼아새김과 면새김이 주 요소. 우리 나라 대표적인 반구대 암각화는 면새김과 선새김 기법을 주로 사용.


(1) 인물․동물무늬

인물, 동물무늬 암각화는 어로와 수렵을 주제로 사람과 사냥 동물을 사실적 기법으로 새긴 문양. 울산 대곡리가 대표적이며 천전리와 석장리 암각화에도 일부 표현됨. 쪼아새김을 기본으로 면과 선을 파고 새긴 형식. 수렵과 어로의 풍성과 번성을 기원하는 사냥미술로서 그 문화전통이 동북아 대륙의 암각무늬와 맥을 같이함.


① 인물․동물무늬 암각화의 특징

국보 제 285호 울산 반구대 대곡리 암각화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 면새김과 선새김 기법이 혼합됨. 고래․거북이․물개 등 바다짐승들(면새김 기법). 사슴․호랑이․멧돼지 등의 뭍짐승들(선새김 기법). 또한 사람들이 배를 타고 고래를 잡거나 사냥하는 모습, 제사를 지내는 모습, 울타리(동물사육) 등 약 300여 점의 그림들로 가득 채워짐.

같은 태화강 상류의 국보 제 147호 천전리 암각화는 사슴 등 주로 뭍짐승과 사람(탈 포함)을 면새김한 그림. 기하무늬(갈아새김) 형상들이 먼저 새겨진 동물상 그림들 위에 덧새긴 양상으로 원래 동물상들이 암벽 전체에 가득히 새겨져 있었던 것으로 사려됨.

대곡리 암벽에는 특히 48 마리나 되는 다종의 고래가 새겨짐. 이곳은 고래출몰지역인 울산만에서 20km내외의 거리.(내용: 10~20명 씩 가느다란 배를 타고 수많은 고래들 사이를 용감하게 누비는 모습, 분수모양의 숨을 내뿜는 고래, 머리가 망치처럼 생긴 고래, 새끼를 업은 고래, 고래에 접근하는 배, 작살 꽂는 포수, 작살 꽂힌 고래, 고래를 끌고 가는 배 등 마치 고래사냥의 교과서를 방불케 함) 대곡리 암벽그림 속에 등장하는 성기를 드러내고 춤추는 듯한 인물상- 제사를 주관하는 무당(일본에는 산으로 사냥하러 들어갈 때 산신 앞에서 벌거벗고 제사지내는 풍습이 현재까지 전래됨) 대곡리는 어로․수렵의 양면성. 천전리는 수렵 편향성이 강한 차이점. 원시시대에 식량확보라는 경제적 욕구 충족에 목적이 있었던 것만큼 지리적으로 인접한 대곡리와 천전리 인물동물상 암각화의 문화적 배경은 그들의 경제 주체가 무엇이었든 간에 狩獵 ․ 漁撈와 깊은 연관성을 시사해줌. 이들 암각화의 주인공들은 어로나 수렵의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전문집단으로 사려되며 그러한 기술을 전수하려는 목적으로 암각화를 제작하였을 가능성이 제기됨.


제작시기

이들 암각화의 제작시기는 동물상과 경제상을 들어 신석기시대로 보는 일부 견해도 있음. 그러나 배가 신석기문화 단계의 뗏목이나 통나무배가 아닌 승선 인원 20여명의 捕鯨船. 포경에 사용된 작살과 작살을 쏘는 弩의 그림에서 금속문화를 강하게 느낄 수 있음. 대곡리나 천전리 동물상 암각화는 이미 금속문화 단계에 진입한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임.


(2) 청동의기․도형상

① 석검/석촉무늬 암각화

영일 인비리는 검 두 자루와 살촉 하나를 새긴 모습. 여수 오림동 것은 내려꽂듯 새긴 검 한 자루를 향해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경배하는 사람과 그 뒤에 서서 바라보는 사람, 그 아래 무언가 찌른 듯한 琵琶形銅牟 한 자루를 새긴 형상.

석기나 청동기의 창검류가 일반적으로 고인돌의 부장품이었다는 점에서 이 그림들도 같은 문화의 계통으로 사려됨. 창과 검은 권력과 신분의 상징. 권력을 유지 안보 하려는 의미와 삶과 죽음의 세계를 연결하려는 뜻이 있다고 사려됨. 특히 함안 도항리의 경우 사후 세계의 안녕에 대한 인간의 강렬한 열망을 엿볼 수 있음.


제작시기

영일 인비리는 청동기전기 B.C. 7~6세기, 여수 오림동은 청동기중기 이후 B.C. 6~4세기, 함안 도항리는 청동기후기의 B.C. 5~4세기 고인돌이 축조될 때 새겨진 것으로 추정.


② 기하문 암각화

울주 천전리 암각화가 대표적. 넓고 깊게 선갈아 새긴 동심원, 마름모, 거치무늬, 곧은줄, 굽은줄무늬를 독립 또는 복합적으로 연결한 형상. 또는 사람을 기하학적 도형으로 추상화시킨 형상들.

각 문양의 상징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음.

동심원․마름모 - 태양의 상징, 풍요의 기원, 풍우를 주관하는 天神의 의미 등

인면․사람 - 神接한 주술사, 땅을 주관하는 地神 등

갈라진 능형 - 여성의 성기, 다산의 상징. 곡물의 성장과 숙성을 상징 등

다양한 기하무늬들의 조합 - 사물을 개념화시킨 일종의 繪文字, or 반복되는 행위를 통한 주술적 의식의 표상 등

이 그림들은 청동기 이후 농경사회에서 공통적으로 행해진 종족번성과 풍요 기원의 산물로 추정할 수 있음(지배적인 견해). 갈아새김 행위 그 자체가 고도의 수준에 이른 종교 의식이고, 제작 행위가 곧 주술의례이기 때문에 이를 제작한 사람은 전문 주술사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음.

한편 천전리 각석의 중하부의 명문에는 3백여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음. 오른쪽 원명은 법흥왕 12년(525) 진흥왕의 부친인 입종갈문왕(사부지갈문왕)이 가신을 거느리고 서석골에 나들이 한 것을, 또 왼쪽의 추명은 법흥왕이 동왕 26년(539)에 사부지갈문왕을 비롯한 신하들을 거느리고 와서 놀았던 것을 기념 삼아 새겨 둔 것.

명문에는 호세(好世: 진평왕 때 화랑), 수품(水品 : 선덕여왕 때 화랑), 영랑(永郞 : 통일신라 직후의 화랑), 문정랑, 주매랑 등의 이름도 보임. 이러한 글을 본다면 이곳이 화랑들의 국토 순례장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음.  

이 밖에도 함안 도항리 그림은 마치 은하계를 표현한 듯 암벽 전체에 크고 작은 바위구멍을 빼곡이 새겼고 태양이나 큰 별을 나타낸 듯한 겹고리를 장식함.


제작시기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등이 다양하게 제시됨.

그림 전체의 내용에서 당시의 사회는 祭政分離는 물론, 기능과 역학적 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분화된 사회를 추정 가능케 함. 따라서 최근에는 이미 철기문화를 접한 고대국가의 태동기인 초기철기시대 초~중기라는 주장이 제기됨.


③ 청동의기형 방패무늬 암각화

철기문화가 들어옴으로써 집단간에 서로 먹고 먹히는 정복 활동이 왕성. 방패무늬 또는 검파무늬 암각화는 사회가 새로운 질서에로 급격히 개편되어 감에 따라 불안해진 집단들이 자신들의 존속을 위해 안보를 기원하는 의미로 제작했다는 견해.

방패무늬 암각화의 전개 과정을 단계별로 살펴보면,

생성기 - 앞 시기의 쪼아새김 전통이 강하게 잔존해 있고 그림 구성이 다양하며 사실적 표현이 강한 경주 석장리와 안심리가 生成期로서 반달돌칼, 홈자귀, 돌검 등 주변 유적의 출토유물의 성격으로 미루어 청동기 후기 어느 시점에서 발생하여 초기철기 초입까지 이르는 것으로 추정.

정형기 - 영천 보성리와 고령 안화리에는 방패무늬 그림 윗면에 머리털 모양의 짧은 선이 새겨짐. 이것은 그림에 군사적 의미가 강화되면서 석장리의 방패무늬가 고깔무늬와 결합해 의인화(擬人化)된 복합형 방패무늬로 발전한 모습. 테두리 삼면에 깃털 같은 방사선을 위엄 있게 갖춘 고령 양전동 방패무늬는 신격화된 祭壇主神으로 자리잡음으로서 형식이 定型化를 이룸. 이 시기의 안보기구(安保祈求)는 그림의 면모와 갈아새긴 기원 행위에서 엿보이듯 이미 집단신앙화의 괘도에 오른 단계임을 시사해 줌. 시기는 보성리가 안화리 보다 다소 앞서고, 안화리가 양전리 보다 다소 앞선 시기의 것이나 크게 묶어 초기철기시대 것으로 사려됨.

변형기 - 변형기에 접어든 칠포리 단계에 이르면 神象의 방패무늬 모습이 군사적 성격이 더욱 강화된 개갑형(鎧甲形)으로 바뀌고 크기도 초대형화 되며 새김도 넓고 깊어김. 이것은 그들의 정치 군사적 현실이 극도로 불안해짐에 따라 집단의 존속을 위한 심각하고 간절한 기원이 있었던 것의 반영. 바로 이 시점이 새로운 철기문화의 도래로 집단간의 정복과 복속이 활발히 전개되어 정치 사회적 질서가 재편되어 가던 역사적 분기점으로 시대구분은 초기철기중기에 해당됨. 이곳에 여성 생식기의 등장은 어쩌면 평화적 개념에서의 종족번성이 아니라 군사력의 절대 요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견해. 남원 대곡리(-1-2-3-4), 포항 칠포리(-1-2-3-4)가 여기에 해당됨.

消滅期 - 마지막 소멸기인 영주 가흥동(-1-2-3), 단계에 이르면 그림의 형식이 지극히 도식화됨. 전통신앙화로 굳어진 기원 행위가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베풀어져 왔음을 뜻함. 정치 질서가 재편되고 사회가 안정됨에 따라 이전 시기와 같이 강렬한 표현은 사라지고 전통적 신앙의례로 전승되어 가는 모습. 이 즈음 성읍국가의 연맹 체제가 성립된 고대국가 탄생기로 시대 구분상 초기철기시대의 마지막 단계.


방패무늬 암각화는 보다 강한 집단이 그 힘을 바탕으로 약소 집단을 지배하며 또 다른 사회 질서에로 진입해 간 청동기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함. 새로운 무기의 발달로 사회 불안이 더욱 고조된 초기철기시대에 성행하다가 고대국가의 탄생으로 안정된 사회질서가 확립된 역사초기에 자연히 소멸해 간 집단안보 기원의 祭壇畵. 

(3) 생활상 암각화

생활상 암각화는 천전리 암각화 중 날카로운 철제 도구로 그어 새긴 세선 그림들. 기마행렬, 항해, 인물, 말, 새, 용을 그림의 소재로 삼아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는 모습들을 사실적으로 매우 생동감 있게 조형.

기마행렬도에 보이는 낙타를 타고 가는 사람, 그 뒤이은 파초선 등 일련의 모습은 여느 행렬 같지 않고 국제교류 의식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해 놓은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어 주목됨.

또한 또 다른 기마행렬도와 연이어 보이는 航海圖가 특별히 주목됨. 이 그림 위에 있는 명문과 연관지어 그림을 부인 非德이 유행(遊行)하는 행차로 보는 견해도 있음. 앞뒤가 치솟은 큰배의 위용, 거대한 돛, 닻을 내리고 정박해 있는 모습은 연안 나룻배가 아닌 외양 범선임이 분명함. 그림의 성격상 어떤 특정 사건이나 사실을 기록하려는 의도를 느낄 수 있음.

그림의 새김세나 형식(모습)이 신라토기에 새겨져 있는 것들과 통할뿐만 아니라 주위에 같은 새김법으로 새겨 놓은 명문들과도 무관치 않음. 따라서 이 그림은 역사시대의 초미부터 통일신라시대에까지 계속해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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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2004-09-11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각화(상징으로서 예술)은 레포트로 대체함. 추석연휴로 휴강이 끼어 고구려 고분벽화 한주 당겨서 할것임. 착오없도록....

ceylontea 2004-09-10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꾸욱... 퍼가도 되지요??
오랜만에 들러서 좋은 글 올려주셨네요...
바쁘셨군요... 어찌 지내시나 궁금했답니다.

수련 2004-09-11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껏 퍼가세요. 강의용이라서 내용이 좀 지루하기도 하고 딱딱하죠?
실론티님두 잘 계시죠? 예쁜지현이도 잘 자라죠?...
그림자님을 위해 언제 조선후기미술 간추려 보겠습니다.
 

고구려는 4세기~7세기에 걸쳐 우리민족이 세운 가장 광대하고 강혁했던 정복국가였다 또한 문화적인 면에서도 삼국시대의 다른 나라들을 앞서서 이끌고 영향을 끼쳤던 나라였다. 그 문화는 호방하고 진취적이며 활력에 넘치는 것이였고 지역적으로는 중국과 서역(돌궐, 유연)의 문화를, 종교와 사상적으로는 불교와 도가사상을 수용하는 등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 국제적인 동북아 문화권을 형성하는가 하면 지극히 독자적인 독특한 문화를 창출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이러한 문화적 양상과 특성을 우리에게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구려 고분벽화이다. 만약 고구려의 고분 벽화가 남아 있지 않다면 우리는 고구려의 문화와 의식세계 그 냉요과 성격을 단지 추상적으로 짐작만 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당시인들의 생활상과 내세관, 문화생활 전반을 이해하는데 없서서는 안될 귀중한 자료이며 삼국시대 미술사뿐 아니라 고대동아시아 미술사 연구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고분벽화에 대한 지금가지의 연구 성과는 묘제형식이나 벽화의 회화사적 위치를 재고하는 미술사적 접근이 주를 이루게 되었으며 제작기법이나 벽화의 물리적 특징을 파악하는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었다.

이런 현상은 제작기법이나 물리적 특성을 살피기 위해선 현장 관찰과 과학적인 조사가  뒷받침되어야 하나 분단의  현실적 측면에서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기존 연구를 주도해온 고고학이나 미술사학자들이 접근하기에는 다소의 관점차이가 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연구가 이뤄지지 못하였다.

지금까지 조지벽화(자연석 표면을 다듬어 화면을 조성한 후 그 위에 직접 채색 표현한 형식의 벽화)를 제외하고 화장지 벽화(벽체 조성후 회나 흙으로 벽면을 마감하여 화면을 구성하고 그 위에 채핵한 벽화기법)의 형식을 한 고분벽화에 대한 고고학계나 미술사학계의 기존 논문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묘실을 석재로 쌓고 들 표면에 석회를 바른 다음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2. 석회는 (또는 호분)두께가 0.5센티내지 1센티되도록 정제하여 바르고 표면을 매끈하게 마감한 다음 그림을 그렸다.

3.벽화는 붉은 색 또는 검은색 선으로 밑그림을 그린다음 다시 결정적인 먹선으로 백묘를 하고고 색을 칠해 완성하였다.

4.안료는 대체로 천연광물성이지만 식물성 역채채료도 일부 보존재로로 사용하였으며, 적,황, 녹, 흑, 백색등이 주를 이루고 금은박 및 옥,상감기법까지 동원하여 장식하기도 했다.

5. 안료는 주로 아교 특히 개가죽 아교에 섞어 그렸다.

6. 고구려고분벽화는 화면이 둗기전에 그림을 그리는 방법과 듣은 다음에 그리는 방법 두가지고 있고 앞의 기법은 프레스코화법과 유사하다.

이 외에 앞으로 안료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어야 하고 지금까지의 기법의 연구가 전체를 말 할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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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4-08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침 고구려 고분벽화 이야기를 읽던 중이라 많은 참고 되었습니다. 감사히 퍼가겠습니다. 넙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