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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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관한 문제


레몬, 권여선, 창비, 2019.


   오늘도 과자가 탔다.

   되는 노릇이 하나도 없군요 우리 베티 번 씨


  「레몬과자를 파는 베티 번 씨」를 찾아봤다. 자작시라고 했으니 실제하지 않을 텐데도 인터넷상에 저 시가 있을 것만 같아서. 첫 연의 다음은 어떤 시구로 채워져 있을까. 시큼한 레몬을 쳐다보며 마무리되지 않은 시의 나머지를 생각했다. 어째서 소설의 나머지가 아니었는지는 모르겠다. 더웠고 되는 일 하나 없는 또하루였다.

  소설은 날마다 보는 살인사건 기사가 담지 않을 것을 이야기한다. 고교생 A양과 B군 혹은 김양과 한군에 관한 기사가 아니다. A양과 B군 혹은 김양과 한군을 알고 있는 “생생한 삶의 내용이 파괴된” 이들의 삶의 이야기다. 다언, 상희, 태림 세 화자가 장마다 연도를 바꿔 이야기를 전개하고 2002년의 어느날 경찰서 취조 장면을 상상하는 다언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어떤 삶은 이유 없이 가혹한데, 그 속에서 우리는 가련한 벌레처럼 가혹한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우리 삶에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걸까.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걸까. 그저 한만 남기는 세상인가. 혹시라도 살아 있다는 것, 희열과 공포가 교차하고 평온과 위험이 뒤섞이는 생명 속에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일 수는 없을까.


  뭐라 형용할 수 없을만큼 아름다운 언니의 죽음. 그후로 다언은 ‘되는 노릇 하나 없다’ 말하지도 못하는 삶을 산다. 나머지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사라진 삶. 거기다 사실은 언니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에 죄책감과 부채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삶. 용의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명확히 특정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해언의 죽음에 가해자는 없는 셈이다. 소설은 가해자를 정확히 밝히지는 않고 있다. 화자의 독백을 통해 유추하도록 했다. 특별히 미스터리함이 강조되진 않는다. 다언이 해언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에서 벗어나 어떻게 애도에 이르는가에 더 중점을 둔다.

  세 화자를 중심으로 했는데 다언 외에 두 사람은 용의자가 아니다. 작가는 이들을 비켜두고 사건의 목격자 태림과 특별한 등장인물을 등장시킨다. 다언의 동아리 선배 상희다. 언니가 죽은 동아리 후배와 잘 아는 자의 삶은 그 ‘죽음’에 얼마만큼 영향을 받을까. 다언에서 상희의 시점으로 바뀌는 지점에서 이 소설이 다른 소설과 다르게 느껴졌다. 왜 상희가 등장할까, 상희의 역할은 무엇일까. 상희의 목소리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제법 한다. 상희가 본 다언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다언만이 뭔가를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나 또한 뭔가를 잃어버렸다. 오히려 더 치명적인 쪽은 나일 수 있었다. 다언은 자신이 뭘 잃어버렸는지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는 데 반해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다언을 관찰하고 다언의 말을 들으며, 이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저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관대한 척 고개나 끄덕이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다언에게 내 속을 들키자 발끈하여 그녀를 공격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상희는 다언을 관찰하는 위치에만 머물지 않는다. 다언의 지적처럼, 상희의 자각처럼 상희는 사건의 피해자, 유가족을 바라보는 자들이다. 어설프게, 섣불리 위로하려 들며 내밀한 이야기들을 들으려는, 들을 자격을 부여받은 듯이 행동하는 그런. 어쩐지 나도 뜨끔해진다.

  소설은 한편으로는 그 구조가 엉성하게 느껴지면서도 뭔가 단단하게 느껴진다. 이 아이러니를 모르겠지만 그렇다. 먹먹함이 사로잡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용의자로 다언의 증오를 한껏 받은 한만우의 삶이 그의 동생 선우가 그의 어머니가 겪은 삶이 있으니까. 원래 부르려던 이름 대신 바꾸게 된 이름이 죽음을 부르게 된 것은 아닐까 싶어 죽은 딸의 이름을 개명하려는 다언 어머니의 행동이,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할 줄도 모르고, 당한 줄도 모르고 여전히 사모하던 여학생의 기억에 수줍은 웃음을 웃어대는 한만우의 미소가, 계란 후라이를 부쳐먹는 만우와 선우 남매의 모습이 계속 맴돈다. 이건 누가 누구를 죽였는가에 관한 질문과 답이 아니니까, 그래서일 것이다. 삶에 관한 문제니까. 


이제 그들은 죽고 없다. 한만우의 죽음을 경유함으로써 나는 비로소 언니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삶과 마찬가지로 언니의 삶 또한 고통스럽게 파괴되었다는 것을, 완벽한 미의 형식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내용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있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면 그밖의 것은 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살아 있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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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줄다리기 - 언어 속 숨은 이데올로기 톺아보기
신지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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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이 짜장이 되도록

언어의 줄다리기-언어 속 숨은 이데올로기 톺아보기, 신지영, 2018.


  말은 인격을 나타낸다는 말이 오랫동안 사용되었음에도 지극히 저급한 인격을 나타내는 이들이 있다. 그래도 전혀 괘념치 않아하는 ‘집단’이 있다. 그들이 표출하는 집단적 품격과 인격은 무지가 아니라 ‘이기’에서 나온다. 무지라면 좀더 알려주면 되지만 저 표독하고 끝없는 이기의 언어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혀버리고 만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말을 믿기에 쓰레기처럼 쏟아져 나오는 그들의 말이 세상을 울릴 때마다 환멸이 쌓여간다. 이런 감정을 의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꽤 익숙하게 사용해온 언어일지라도 특정 집단에 의해 지속적으로 사용될 때면 그 단어가 가진 뜻과 뉘앙스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그렇게 어느 때부턴가 새롭게 생각하게끔 되는 단어들이 늘어간다. 지양되어야 할 언어가 확산되는 것은 특정한 집단의 ‘이기’적 생각을 담은 개인미디어의 확산도 영향이 클 것이다. 언어 속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려는 그 지독하고 지난한 노력들. 그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무용한 일이겠지만―던져주고 싶다.

  이 책 『언어의 줄다리기』는 흔히 사용하는 단어를 선정하여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기에 매우 쉽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단어를 선정하고 있기에 오히려 그 점이 아쉽다. 가령 미망인이나 ‘여류’ ‘여교사’ ‘미혼-기혼’ 등에 담긴 이데올로기는 너무나 익숙하게 지적하고 있으니 말이다. 새롭게 등장한 언어나 은어가 담고 있는 표현을 다루었다면 현재의 시점에서 작용하고 있는, 작용하려 하는 이데올로기를 더 잘 알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저자는 언어 사용에 민감할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 언어감수성을 높일 것을 권고한다. 언어가 사고체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제일 먼저 선택한 것은 ‘각하’다. 이 말이 가지고 있는 뜻에서부터 언제,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지를 설명한다. 정확하게 따진다면 잘못된 표현이지만 대통령을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되어 왔고 권력은 그것을 선호했고 별칭을 법적으로 강요했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이 단어는 지양해야 할 단어로 꼽고 있다. 아니 명백히 틀린 단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각하가 담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사람의 신분에는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신분제를 전제하는 이 표현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부인하는, 반민주공화국적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그렇게 부르기를 강요당함으로써 언어사용에 사고체계에 남아 있는 이 단어는 은연 중 여전히 신분제를 옹호하는 단어가 아니고 무언가. 특정한 집단이 특정한 인물에게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해진다.

  우리나라 언어의 장점으로 꼽히는 높임말 사용에 대해서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그토록 나이에 민감한 이유, 그것은 호칭 때문이다. 2002년 월드컵 대표팀 히딩크 감독이 경기진행시 호칭에 존대를 없앤 일을 우선했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누군가를 알아가는 일은 누군가를 부르는 일부터 시작한다면 우리는 누군가를 호칭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 항상 필요했고 그것이 ‘나이’를 알고 나서 이루어졌다.


호칭의 문제에 대해 한국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가장 민감하고 심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사실은 모두 언어 사용과 관련이 있다. 한국어 사용자들은 대화 상대자와 호칭과 서열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대면하여 말을 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있다. 이것이 바로 지금 한국어 작동방식이다.


  언어가 우리의 사고체계를 그렇게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 선조들은 위아래 열넷 정도는 모두 벗으로 사귀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동일한 해에 태어난 경우만을 오로지 친구로 편하게 말을 하고 선후배의 엄격한 위계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의 잔재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안타깝다.

  저자는 크게 여덟 개의 단어 속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얘기하고 있는데 그중 많은 부분은 차별요소를 가진 단어다. 특히 성차별적 언어다. 미망인, 여교사, 여검사 등등의 단어. 매우 익숙한. 이 외에 ‘자장면’ 투쟁사와 더불어 ‘자장면‘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짚는다.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짜장면‘을 발음하지 못하고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자장면‘의 세월 동안 자장면의 매출 또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사람들은 왜 그토록 ’짜장‘을 허하기를 요구했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재미있다.


언어 규범은 언어 사용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하는 기준이 된다. 그런데 언어 사용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기본적으로 언어 사용자들의 사용에 기반해야 한다. ‘관’으로 대표되는 몇몇 사람들이 만든 규정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규범은 관이 만들고 ‘민’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민이 만들고 관이 정리하는 것이다. 즉 관이 해야 할 일은 규정을 만들어 민의 사용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민의 언어 사용을 관찰하여 민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 현실을 규범화하는 것이다.

  

  한편으론 ‘짜장면’은 되는데 왜 다른 표현은 안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비민주적이고 차별적인 언어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맞다. 자연도태 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제재방법 또한 필요한 일이다. 넘쳐나는 혐오표현을 바로잡는 일은 왜 안되는지, 언어가 가진 힘과 한계가 무엇인지를 이 책을 읽어가며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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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 - 2019년 제4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윤이형 지음 / 문학사상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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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제도와 인간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 문학사상사, 2019-01-18.


  제법의 고양이들이 거리를 배회했다. 울음소리가 격렬한 밤이 지나면 길 어딘가에 죽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 적 있다. 아직까지 죽은 고양이를 본 일은 없었기에 고양이에 대한 혐오를 실천하는 사람은 동네에 없구나 생각했다. 반려묘를 키우는 이들이 많은가 하면 고양이를 싫어하는 특히 길고양이를 혐오하는 사람들도 많다. 길고양이에 대한 혐오는 길고양이를 돌봐주는 사람을 향한 혐오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때면 고양이보다도 그 사람에 집중하게 된다. 반려묘의 두 번째 죽음에서 시작하는 이 소설 역시도 고양이로 시작하며 고양이에 관해 이야기할 것 같지만 결국 사람의 이야기다.

  윤이형의〈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는 이혼한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결혼제도 속에서의 인간의 삶을 이야기한다. 각자 살아온 가정과 사회에서 삶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달리 형성해 온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움켜쥐려는 것과 벗어나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일견 결혼이라는 제도 하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가치와 ‘나’를 재정립하는 과정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어쩐지 이 과정은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결혼이란 사람을 늘 같은 형태로 몰아넣는다는 생각이 든다.

  <대니>는 아이돌봄 로봇에 관한 이야기다. 대니는 아이를 돌봄에 있어 결코 지치지 않는 에너자이저로서 설계된 감정도 인지하는 완전한 인공지능로봇이다. 자신처럼 아이돌봄을 수행하는 할머니와의 공감과 연민, 유대와 애정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멀리서 할머니를 처음 보았을 때 자신처럼 로봇인줄 알았다가 다른 모습을 찾아내고 그래서 ‘아름답다’ 느끼는 대니는 이십대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할머니는 곧 칠십이다. 대니는 할머니가 아이들 돌보는 모습을 보며 자신과의 차이점을 이렇게 말한다.


할머니는, 견디고 있었어요. 저는 견디지 않아도 되거든요.


그런데 할머니는 그렇지 않았어요. 할머니의 어떤 어려움은 없어지지 않는 것 같았어요. 견디는 거죠, 그런 건?


  살아가는 일이 견딤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하루하루를 견딘다는 말이 주는 씁쓸함은 크다. 프로그램화되어 있는 대니가 느낄 수밖에 없는 인간의 견딤이, 고통이 아이돌봄에 관한 것이든 늙어감에 관한 것이든 영원히 그것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 관한 것이든 할머니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며 인지하는 대니에게서도 느끼게 된다.


저에게는 매 순간이, 말하자면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과 같아요. 농구공을 돌대에 넣는 것과 같죠. 나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있고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요. 그게 저의 기쁨이에요. 그다음은 없어요. 기쁘지만, 없어요. 그래서 저는 움직여요. 만약 한 사람을 돕지 못해 어려워지면 다른 곳으로 가서 다른 사람을 도와요. 그럼 어려움은 없어져요.


  각각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자전작의 작가는 윤이형이다. 두 이야기의 바탕은 결혼과 육아가 크게 자리한다. 생각하면 제도는 그 모든 것을 ‘대니’화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제도 그 자체는 어디에도 흔들림없이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 그러나 제도란 항상 완벽한 것이 아니기에 보완이 필요하고 냉정과 감성이 함께 필요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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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 한나 아렌트의 삶과 사상을 그래픽노블로 만나다
켄 크림슈타인 지음, 최지원 옮김, 김선욱 감수 / 더숲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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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과 싸이코패스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켄 크림슈타인, 더숲, 2019.


  이 책은 한나 아렌트의 생애를 주요한 세 번의 탈출로 정리한다. 한나 아렌트는 베를린에서 파리 그리고 뉴욕으로 국경을 넘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다. 나치의 억압을 피하기 위한 치열한 생존이었다. 1906년생 한나 아렌트는 유대계 독일인으로 어머니로부터 ‘유대인이라고 공격 받으면 유대인이라는 사실로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고 배웠으며 14살 무렵 칸트를 모두 섭렵한 아이였다. 칸트의 저서만이 아니라 칸트가 읽은 책까지 모두 읽고 고대 그리스어를 공부하고서는 그리스 비극 연극단을 결성하는 매우 열정적인 아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매우 똑똑한. 이런 한나 아렌트가 일찌감치 다른 대학생들, 훗날 유명한 사상가들로 알려진 이들에 비해서 두각을 나타냈음은 당연하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자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며 쓴『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으로 유명하다. 세상 모두가 나치는 악마라고 생각하고 있던 때에 그들은 누구와도 다를 리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얘기함으로써 동료 학자들로부터 질타와 외면을 받았다.


아이히만을 사악한 괴물이라고 한다면 어떤 면에서 그의 범죄를 용서해주는 거야. 그리고 우리 모두 잠재적인 죄를 짓게 되지. 철저하게 사유하지 못한 죄.

슬픈 진실은 선과 악에서 마음을 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제일 사악한 일을 저지른다는 거야.

  

  결이 다를지 모르지만 최근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준 고유정 사건의 프로파일러들이 고유정은 ‘싸이코패스’가 아니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에 관해 프로파일러를 비난하는 글들이 넘쳤다. 고유정은 싸이코패스가 되어야만 고유정의 행위가 설명되는 것처럼 댓글들은 성토했다. 드러나는 단편적인 것만으로 이해하고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어떻게 보면 ‘싸이코패스’라는 말 한마디는 모든 사건의 이유를 쉽고 간단하게 치부해버리는 말처럼 느껴진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이 사건의 이유가 단지 ‘싸이코패스’라고 한다면 이해가, 되는 건가. 그렇게 되면 법적 처벌의 강도가 달라지는 건가. 이런 물음이 떠오르지만 어쩌면 그래서, 프로파일러를 비난하는 이들의 심리가 어쩌면 나치 전범자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했을 때와 같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한나 아렌트의 이 통찰은 인간과 인간의 행동에 대해 더욱 경악과 경각심을 갖게 함은 분명하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전에는『전체주의의 기원』을 통해 ‘악이 어떻게 발생하느냐’를 다루었다. 이 모든 한나 아렌트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 있다. 한나 아렌트는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첫 번째 인물인 스승 마르틴 하이데거를 만난다. 하이데거는 한나 아렌트에게 사상적 영향을 미친 사람이자 연인이었다. 평생의 연인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하이데거는 유부남이고 한나 아렌트는 두 번의 결혼을 한다. 첫 번째 남편 권터 슈테른, 두 번째 남편은 독일 시인이자 철학자 하인리히 블뤼허다. 한나 아렌트는 권터 슈테른의 사촌 발터 벤야민과 사상적으로 교류가 깊었는데 이 책에서 한나 아렌트의 이야기만큼이나 발터 벤야민에 매혹된다. 아케이드를 보면 자동적으로 벤야민이 떠오르는데 벤야민의 자살은 생각할 때마다 매우 안타깝다.

  지성인이라는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싶은 한나 아렌트는 생애 수많은 학자와 사상가, 예술가, 정치가들과 교류했다. 그 시대가 그러하였기도 하지만 수많은 사상가들이 세상의 폭압 속에서 인간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들은 참으로 애틋하고 벅차는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책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사상의 나눔, 그 사유와 철학자들의 대화를 들여다보면 (어쩌면 이 책이 그것을 지나치게 극화한 측면이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심오하다는 생각, 어렵다는 생각 외에도 조금은 낯간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무슨 말장난인가 싶기도… 삶은 던져짐이라… 학창시절 하이데거의 생애에 관해서는 배우지 않고 그저 시험에 나올 정도의 하이데거의 이론에 대해서만 배우기에 하이데거의 삶을 보고서 놀랐다. 이 책을 통해서도 하이데거의 사상적 깊이, 사람 자체에 대한 끌림을 얻지는 못했다. 하이데거의 책을 통해서는 느낄 수 있을까. 엉뚱하게도 한나 아렌트가 왜 하이데거에게 끌렸는지 이해하지 못함은 외적인 부분에서가 아니라 한나 아렌트의 생애 한나 아렌트가 발전시켜온 사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건 꼭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 사상가들의 사상과 행동의 일치는 항상 같지 않다.

  이 책은 한나 아렌트가 제시하는 대표적인 사상적 이념을 쉽게 이해하게 해준다. 사유의 중요성,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존재적 고민을 왜 이토록 어려운 길로 헤매며 이해해야 싶은 생각들을 할 때가 많은데 그 핵심을 잘 포착할 수 있다. 만화형태의 이 책은 무겁고 딱딱하지 않은 문체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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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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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꺼내본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21세기북스, 2011.


  제목을 본 순간 양자역학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 게 우습게도 그런 책은 전혀 필요치 않았다. 왜 미리부터 긴장하고 그로 인해 시간을 흘려보냈는지 모르겠다. 새롭게 출간될 줄 알았다면 좀 늦게 읽을 걸 그랬다. 언뜻 보았을 때 바다 위의 돌고래 사진과 연한 하늘색이 제목이 주는 압박을 줄이고 편안하게 다가왔다. 다시 보니 새와 사람이 등장하는 사진이라서 순간의 착각이 주는 이미지가 얼마나 큰가, 생각했다. 포터 이름이 그렇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새삼 베아트릭스 포터가, 피터 래빗이 떠올랐다. 아련하고 동화적인 느낌들이 이 책에서 느끼는 것인지 포터에서 느끼는 것인지 헷갈렸다.

  단편 열 편이 실린 이 책을 읽으며 나의 자리에 대해 생각했다. 어느 한 지점에 머물러 있는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은 비밀스럽게 뭔가를 숨겨놓은 장소이며 빠르게 지나쳐가고 싶지만 참을 수 없는 냄새로 인해 온전히 그 냄새를 묻힐 수밖에 없는 곳이다.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존재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장소이자 기억. 삶에는 늘 그런 지점이 있다는 것을 그로 인해 내 생각이, 내 언어가, 내 삶이 더디게 흐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순간의 이야기들을 작가는 그리고 있다. 


잠시 후 칼러 씨가 집에서 나오더니 내게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는 말했다―그것은 이후 좀체 내 마음을 떠날 줄 모르는 말이다―그는 말했다. “얘야, 이 일은 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란다.” ― <강가의 개>


  아무리 칼러 씨가 네게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해준대도 그 순간에 내가 있었으므로 ‘나’는 그 일에서 그 누군가에게서 쉬이 벗어나지 못할 감정을 안고 있다. 훗날에 과거의 지점을 돌아보는 이야기는 그리하여 좀더 애틋하고 저리게 다가온다. 결코 그 순간이 바꿔질리 없기에 감정이란 그때만큼 달라질리 없기에. 하지만 머언 미래의 감정을 그린대도 달라지지 않을 거란 걸 알게 된다. 그것을 단편소설은 몇장이어야 한다는 형식에 미치지 못하는 두페이지 소설 <피부>에서 그리고 있다. 부부가 과거 낙태의 순간을 기억하는 것과 머언 날에 과거를 기억할 그들을 생각하는 일은 과거형 문장과 미래형 문장으로는 다르게 나타나지만 문장이 담고 있는 감정은 전혀 다르지 않다.


이것이 앞으로 일어날 일이다. 그러나 오늘 오후 부드러운 라임 색 카펫 위 그녀의 벌거벗은 몸 옆에 누워, 비와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만 클로이의 피부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의 이름처럼 서늘하고 부드러운, 내 젊은 아내의 창백한 피부. 바깥 거리에서 음악 소리가 커지고 클로이가 내 쪽으로 몸을 굴린다. 맨 먼저 나의 가슴에 키스하고 차츰차츰 아래로 내러간다. 나는 눈을 감는다. 조금 후면 우리는 매일 밤 그러하듯이 우리의 조그만 매트리스 위에서 함께 잠이 들 것이다. 창문 밖 종려나무들을 흔들고 지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잔인한 짓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는 안개 속의 꿈을 믿으면서. 

― <피부> 


  그렇게 보면 빛의 입자가 가는 경로를 예측하기란 알기 어렵다는 리처드 파인만의 이론은 맞지 않을 지도. 어떤 상황에서의 감정이란 시간이 흘러 정확히 닿을 지점에 가 닿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서 보여주는 헤더의 감정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준의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진다. 


나이가 들면 역설에 환멸을 느끼기가 쉬워지지요, 하고 그는 말했다. “젊어서는 도전뿐이에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 그저 피곤해지거든요. 모든 물리학자에게는 자기 너머 수준의 사고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와요. 자기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준”이라고 그는 말했다. ―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나이가 아주 많은 로버트 교수와 느끼는 교감은 헤더에게는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다. 헤더는 자연스럽게 흐르는 이 감정과는 다른 종류의 감정을 더 의식한다. 그것은 사회가 요구하고 사회가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것이다. 우리 삶은 사회라는 시선을 너무 의식하는 까닭에 그 시선에 맞추는 것을 ‘잘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헤더가 사회가 용인하고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사회적 시선에 맞는 콜린과의 결혼을 선택하면서 헤더가 잃어버리는 것은 영원히 헤더를 채워주거나 구원해줄 수 있는 존재다. 그 결핍을 결코 콜린이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콜린은 헤더를 채워준다. 이 이상한 결핍과 채움의 과정 속에서 헤더는 행복한 순간이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죄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연인들에게 이런 비밀을, 이런 진실들을 말하는 이유다. 이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떻게든 일말의 죄의식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는 추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죄의식은 자초하여 입는 모든 상처들이 그러하듯 언제까지나 영원하며, 행동 그 자체만큼 생생해진다.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그것은 다만 모든 이들의 상처가 될 뿐이다. 하여 나는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 역시 내게 그러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이 섬세하고 아린 소설을 읽으면서 과거의 행위들로 그로 인한 감정으로 영원히 지속될 상흔 속에 머물러 있는 미래의 나를 떠올리게 된다.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끌어안고 기억이 퇴화되기를 바라는 것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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