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 E. W.
김사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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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스


N. E. W. 김사과, 문학과지성사, 2018-08-08.


  새로운 세상이 디스토피아적으로 그려지는 소설은 낯설지 않다. 동화도 미래세계를 그림에 있어 그 기괴함이야 만만찮지만 대체로 긍정적 환상으로 가득하다. 기대하지 않기 때문인지 기대가 너무도 크기 때문인지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은 기괴한 세상을 창조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 계보에 이 소설도 놓일까. N.E.W. 새로운 것일지 새것일지를 가늠하기엔 애매하다. 소설이 그리고 있는 공간은 꽤나 익숙하기에. 낯설지 않다는 말은 새롭지 않다는 것, 새것 같지 않다는 것이므로 N.E.W.라는 단어에 일치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한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발견한 사람 같은 표정으로, ‘엔, 이, 더블유, 뉴N. E. W.가 현대 세상을 결정했다.’ 그게 무슨 약자인지 아세요? 신경학neurology, 전기electricity, 제2차 세계대전World War 2. 믿어지세요? 제 아버지가 이렇게 황당할 정도로 유치한 사람이라는 것이? 그런데 사람들은 아버지를 두려워하죠. 그게 다 아버지의 연기에 속고 있는 거야.


  내가 속고 있는 건 무엇일까. 아무리 보아도 소설이 구축하고 있는 세계는 막장드라마 일컬어지는 배경을 지닌 인물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그런 인간군상에게서 보던 삶을 살아가는 패턴은 새로움과는 거리가 멀어, 새롭게 읽어나가기엔 무리이다. 적당히 환상이라 생각하며 넘어가줘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이 익숙한 그림 속에서 제목 때문에 N.E.W.를 되뇌며 연관성을 억지로 주입하다 눈길을 사로잡는 문장에 생각은 다른 방향, 그리스신화 속으로 흘러간다.


새로운 시대엔 새로운 시대에 맞는 거짓말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새로운 세계에 걸맞은 환상이요. 죄송한데요, 아버지의 시대는 끝났어요. 아버지의 거짓말은, 아버지의 사기는, 그 조잡한 마술은 이제 통하지 않아요.


정말로 죽어주시면 안 되나요? 저와 제 아내를 위해서. 아버지에게 드리는 제 유일한 부탁이에요.


  제우스의 할아버지 우라노스는 아들 크로노스에 의해 거세당한다. 자식에 의해 같은 꼴을 당하지 않으려는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크로노스 또한 제 아비와 같은 운명이 될 뿐. 이것은 과거가 물러나고 현재가 도래하는 것이니 아버지 세대가 사라지고 아들 세대가 오는 것이다. 오손그룹의 정대철 회장이 구축하고 있는 권력이 그의 세계에 속한 아들 정지용과 며느리 최영주에게로 옮겨가는 과정이야말로 완벽하게 과거와 현재의 교체이며 ‘N.E.W.’가 아닌‘N.E.W.’의 모습이다. 그런데…신화와 소설이 이토록 다르게 느껴지는 까닭은 뭘까. 아니다, 결국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권력이란 그렇게 신들이 벌이는 전쟁처럼 그들만의 리그라는 것을. ‘신’으로 나타났을 때는 범접하지 못하는 존재인마냥 세뇌당한 그 세계가 현실에도 얼마나 강요되고 있는지를.


정 회장이 굳이 복잡하게 5평짜리 서민용 원룸과 2백 평짜리 최고급 펜트하우스까지 한 건물 안에 섞어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거기에도 그만의 독특한 신념이 숨어 있다. 가난한 자들은 부유한 자들과 완전히 섞여서도 안 되지만 완전히 격리되어서도 안 된다. 그들은 멀리서, 보이지 않는 벽 너머에서 끊임없이 서로의 존재를 느껴야 했다. 그래야 쌍방간의 두려움이 유지되며, 살얼음 같은 평화가 지속될 수 있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수준의 두려움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 그것은 통제의 가장 기본적인 기술이가 가장 까다로운 예술이다.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느껴질 때, 두려움의 대상이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개달았을 때 사람들은 용감해진다.


  국숫집 성공자도 BJ 이하나도 욕망을 갖는다. 어쩌면 성공이라 이름할 수도 있겠다. 그들이 벌이는 처절한 ‘노력’과 대비되게도 모자란 한량같은 정지용은 쉬이 권력을 가진다. 5평짜리 서민용 원룸에서 사는 이들이 몸과 마음으로 발버둥칠 때 정지용은 그저 아버지 하나만 제거하면 늘 하듯 재밌는 게임에 몰두하다가도 오손그룹이란 세계를 거머쥘 수 있다. 아, 그조차 제 힘으로 거두지도 못한 것이지만. 심오할 듯 보이는 정회장의 독특한 신념이란 결국 권력을 더욱 드높이게 보이는 수단일 뿐이다. 2백평 펜트하우스만 늘어선 곳에서 권력을 명확히 휘두를 수 있을까. 2백평 펜트하우스가 더욱 빛날 수 있는 건 그 옆에 놓인 5평짜리 원룸의 존재다. 그들이 어떤 신념으로 그들 자신을 이미지화시키든 5평의 인생이란 그들에게 개를 키우는 공간일 뿐. 정지용이든 최영주든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여 제 왕국을 세우든 변하지 않는 것, 여전히 5평짜리 원룸을 만들어 낼 것이고 그 안에서 그들을 위한 개를 사육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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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전병근 옮김 / 김영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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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같은 소리하고 있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유발 하라리, 2018.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21세기가 나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라고,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노래하고 있다. 20세기에서 그린 21세기는 상상하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었을지언정 무조건 살기좋은 세상이었다. 진보와 발전이란 거부할 수 없는 단어였고 기대감을 가속화·극대화시켰다. 하지만 21세기는 20세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진보와 발전이란 제한적인 단어였고 어제에서 이어진 문제는 지속적이다. 미래라고 불린 사회가 현재가 된 지금 문제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고 그에 대한 해결 방안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시각은 영향력을 갖는다. 유발 하라리도 대표적이다.

  인류가 직면한 커다란 질문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나느냐”라고 유발 하라리는 말한다. 그러니까 현재, 인류는 고통에 처해 있다는 말이겠다. 그 고통의 주원인이 그토록 21세기에 기대하던 기술혁명이라는 점은 또다른 아이러니긴 하지만 결국 익숙하게 겪어왔던 대로 기술혁명은 인간소외를 급격히 부추긴다. 총체적으로 보면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가지는 한계라 말할 수 있으며 유발 하라리는 그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21세기의 전례 없는 기술적, 경제적 파괴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는 새로운 사회적, 경제적 모델을 최대한 빨리 개발해야 한다. 이런 모델들은 일자리보다 인간을 보호한다는 원칙을 따라야 한다. 많은 일자리들이 따분한 고역이고 구할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아무도 현금출납원을 평생의 꿈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고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을 보호하는 일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한계로 도태된다며 사회주의·공산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주장했고 자유민주주의는 ‘공산주의식 복지 제도’를 도입하여 마르크스가 한계로 지적한 부분을 수정하며 지속해 왔다. 물론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은 다르지만 말이다.


점점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한 가지 새로운 모델은 보편기본소득제UBI다. UBI는 정부가 알고리즘과 로봇을 지배하는 억만장자들과 기업들에 세금을 물려서 그 돈을 모은 개인에게 기본 필요를 충당할 만큼의 급료를 제공하는 데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이것이 빈곤층에는 실직과 경제적 혼란에 대비한 완충 역할을 할 테고, 덕분에 부유층은 포퓰리즘에 의한 대중의 격분으로부터 보호받을 거라는 구상이다.


  유발 하라리도 ‘보편기본소득제’를 제안한다. 항상 예산을 두고 다툼을 벌이는 국회는 선발시에는 ‘복지’를 부르짖으며 그것이 유용하다고 활용한다. 하지만 그 이후 실행은 복지예산을 삭감하는 것에서 보듯이 대중의 격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것이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고 유용하게 흘러간 패턴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의 격분 역시도, 쉬이 사라졌으니까. 자유민주주의를 완벽히 포장해주는 것이 복지제도이다. 복지제도를 이렇게 갖다 쓰는 한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이는 복지제도를 혐오했다. 그것이 이용당하고 버려질 것이기에. 목적이 무엇이냐를, 본질을 파악하지 않으면 결국 당하고 만다.

  목적을 정하는 것도 인간이기에 어쩌면 유발 하라리의 인간의 겸손을 외치는 목소리도 수긍은 간다. 하지만 ‘겸손하세요’라고 해서 겸손할 수 있다면 인간의 고통이 있을 리가 없다. 유발 하라리의 말에 귀기울이고 맞다고 감탄하며, 무릎을 탁 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렵지 않은 글임에도 왜인지 명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자아성찰과 자기반성의 명상과 자기계발서로 바뀌는, 마무리되는 장르에 당황하지는 않지만 허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유발 하라리의 생각과 글에 대한 매력은 책이 출간될 때마다 하강곡선을 그리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책이 나오면 읽게 되겠지. 결국 나도 늘같은 유권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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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뻬 씨의 핑크색 안경
프랑수아 를로르 지음, 양영란 옮김 / 마시멜로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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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색 안경을 쓰고 노란 조끼


꾸뻬 씨의 핑크색 안경, 프랑수아 를로르, 2018.


  파리는 여전히 노란조끼 시위가 한창이다. 유류세 인상 반대에서 시작되었다는 시위는 최저임금 인상, 교육제도 개편 반대, 연금제도 개선 등의 정부정책에 반대하며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확산되고 있다. 파리 정부의 친기업 정책이 시위 확산을 가속화시키는 이유라고 하는데 내일 대규모 시위가 예고된 가운데 에펠탑을 비롯한 주요 관광지는 폐쇄조치가 이뤄졌다.

  파리의 정신과 의사 꾸뻬씨는 이 상황에서 어떤 색 안경을 쓰고 있을까. 꾸뻬씨는 행복과 불행은 어떤 안경을 쓰고 삶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한다. 항상 행복을 이야기하는 꾸뻬씨는 행복에 관한 답을 찾기 위해 ‘지금’ 그가 있는 곳을 떠나 여행을 한다. 다시 돌아올 파리의 노란조끼 물결은 어떻게 되어 있을지가 궁금해진다.


옛날 옛날에 꾸뻬 씨란 정신과 의사가 살았다. 그는 사람들한테 핑크색 안경을 만들어주는 일이 자기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환자들이 주변을, 자기 자신을, 또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꿀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건 이를테면 이들에게 새로운 안경을 만들어주는 일과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꼭 새롭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환자들이 평소 끼고 있으면서 그들의 삶을 망치게 만드는 안경보다는, 삶을 덜 암울하게 덜 왜곡되게 보게 해주는 안경을 만들어주는 일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의 일에 대한 고민을 안고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통해 치유와 깨달음을 얻는 꾸뻬씨의 여행은, 생각은, 글은 고민을 안고 있음에도 가벼웁게 띄워올린 풍선처럼 느껴져서 맑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서 진중함에서 밀려난다.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는 삶에서 흔히 부딪히는 문제들로 엄청난 통찰로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기보다 도덕교과서를 보는 기분이 들게 되는. 익숙하고 반복적인 알고 있지만 실천의 문제라서 그것이 소설의 형식을 빌려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더라도 감정의 정화로까지 이어지진 않는다. 이래서 비극 어쩌면 막장 요소를 열광하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감정을 드러내게끔 하니까. 아니, 행복의 문제는 단지 마음가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개인적인 차원으로 깨닫고 반성하며 치유하는 일은 할만큼 한 것 아닌가 싶기도.


비록 젊지는 않지만, 꾸뻬 씨는 자아실현이 삶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이고, 앞선 세대와는 달리 이를 악물고 자신은 이미 운이 좋았다고 자위하면서 세상을 전혀 바꾸지도 못한 채 그저 자기 의무만 다하면 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첫 세대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랄딘에 비해서는 권태를 잘 견디지만, 부모님이나 다른 세상, 다른 시대에 속하는 동갑내기들에 비해서는 못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기 삶의 뭔가를 바꿔볼 작정이었다.


  파리 시위의 이유가 무척 익숙하다. 이번 시위가 파리에서 발생했을 때 ‘파리 테러’라고 들었던 듯하다. 유럽에서 테러는 생각보다 자주 발생하니까라고 생각했지만 곧 파리 폭력 시위, 과격 시위라는 제목으로 나아가더니 ‘노란 조끼’가 등장하면서 파리 시위, 집회라는 제목을 달고서 기사들이 연잇는다. 그동안 기사를 놓친 것인지 언론의 논조가 변한 것인지 모르겠다. 어떤 이들에게 정치란, 국민을 위한 정책을 위한 고민의 방식은 어떻게 빙빙돌아 항상 그 자리로 가는가에 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가장 센 것은 돈이 되는 건가.

  ‘세상을 전혀 바꾸지도 못한 채 그저 자기 의무만 다하면 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세대’. 삶의 뭔가를 바꿔볼라치면….  새삼 폭력없던 시위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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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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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그리고 적


적을 만들다, 움베르토 에코, 2014.


  제목은 기억하기에 확실한 우월을 지닌다. 에코의 에세이가 다루는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읽은 시간이 지나 기억에 떠올리는 건 역시 제목 <적을 만들다>인 것을 보니까.


적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치 체계를 측정하고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그것에 맞서는 장애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뉴욕에서 파키스탄 택시 기사로부터 이탈리아의 적은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적이 없다 답한 에코는 다시 생각한다. 이탈리아가 지닌 불행 중 하나가 적을 두지 않은 것이라고 말이다. 위와 같이 ‘적’이 지닌 가치와 ‘적’의 필요성을 논하는 에코의 의견은 오랜 역사를 통해 실례로 뒷받침되어 왔다. 하지만 ‘적’이란 자연발생적으로 존재해주지 않는다. 필요와 가치를 다하기 위한 ‘적’이란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 있다. 

  적을 만들지 않는 삶을 찬양해 왔던 것은 거짓이고 속임수였다. 항상 ‘적’을 만들어냄으로써 ‘적’에게 기생해왔던 것은 정치였다. 아니 권력이던가. 어쨌든 북한이란 ‘적’을 항상 필요로 했던 권력을 떠올리면 에코의 의견에 동감하게 된다. 누구를 ‘적’으로 두느냐가 정체성을 확실히 보여준다는 것을.


따라서 적이 없다면 만들어 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는 폭넓은 유연성을 지니는데, 베로나의 스킨헤드족이 하나의 집단으로서 자신들을 식별하기 위해 그룹에 속하지 않는 자라면 누구든지 적으로 겨냥한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우리를 위협하는 적을 거의 자연적인 현상의 측면에서 규명하는 일이 아니라, 그 적을 만들어 내서 악마로 만드는 과정이다. 


  또한 세상이 수초도 지나지 않아 그것을 요구한다. no야 yes야? 이 편이야, 저 편이야? 묻고, 물음조차 없이 프레임을 씌워 제 기준에 맞춰 타인에게 정체성을 부여한다. 단답형의 말 한마디로 속전속결로 이뤄지는 타인에 대한 평가는 어떤 가치를 위해 싸우는 것일까. 난무하는 혐오의 단어와 예의를 상실한 말들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처럼 이루어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님에 틀림없다. 적이 생겨나고 있음은 확실히 불행의 조짐이다. 작은 잽을 날리며 곳곳에서 들끓는 적. 한때는 이런 적들을 한방에 훅, 날릴 수 있으리란 기대가 가득했는데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서인지 ‘적’이 쌓여간다.  

    

우리의 적이 되는 대상은(미개인들의 경우처럼) 우리를 직접 위협하는 자들이 아니라, 우리를 위협하지 않을지라도 누군가에 의해 위협적인 존재로 묘사되는 자들이다. 따라서 우리와 다르다는 것은 그들의 위협적인 태도에서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다름 그 자체가 우리가 찾는 위협의 신호인 것이다.

 

   가치가 상대적이라고 한다지만 절대적 가치는 있는 법이다. 지켜야 하는 걸 지키는 것과 없어져야 하는 것을 없애는 것, 어느 것이 더 힘든 일일까. 새삼 ‘적을 만드는 일’보다 쉬운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달력 한 장 남은 2018년, 없어야 할 것이 소멸하는 것을 보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가. 비에 씻겨가지도 않을 적이 계속 만들어진다. 쌓여만 간다. 한해의 마무리를 편안하게 하고 싶었건만 요즘 끊임없이 내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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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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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복과 인복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문학동네, 2018.


  소설속 인물을 현실로 끌어들여와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고 생각하는 일은 아주 오래전에 끝난 것 같다. 언제부턴가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이름은 K이거나 M이거나 또는 L이거나 그랬다. ‘J 스치는 바람에 노래 가사처럼 나만의 J를 불러낼 수는 있었겠지만 그런 K, M, J는 익명과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뚜렷하게 이름이 기억되는 작품이 있었던가.

  그 이름들을 수식하는 말에 의해 정체성이 확보된 각각의 주인공들은 고유명사였지만 결국 보통명사가 되어 주위를 맴돈다. 강민호도 권순찬도 최미진도 한정희도 나정만도 박창수도 김숙희도 반경 1km 안에 분명 살고 있을 것 같다. 가까이에 그들이 살고 있기에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삶이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 그들 때문에 잘 살아가려는 내 삶이 방해를 받는다. 타인을 배려하고 약자를 이해하며 더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누구에게나 친절하려 ’애쓰는’ 나의 노력이 끝날 것 같은 기분.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알게 해준 것은 권순찬과 한정희다. 


우리는 왜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지에 대해서.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정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죄와 사람은 어떻게 분리될 수 있는가, 우리의 내면은 늘 불안과 절망과 갈등 같은 것들이 함께 모여 있는 법인데, 자기 자신조차 낯설게 다가올 때가 많은데, 어떻게 그 상태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나는 그게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 자신이 다 거짓말 같은데……  [한정희와 나]


  친절, 윤리,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 말이 주는 무게와 권위에 눌려, 경직된 채로 기계적으로 행하고 있음을. 감정이라는 것이 진심이 녹여든 마음은 어떻게 다를지, 어떤 형태로 이뤄지는지를 말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느끼는 당혹감 또한 강박적인 윤리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해와 친절의 한계를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 기계적 친절은 나를 더 옥죌지도 모른다. 또한 그 형식적·기계적 배려를 느끼는 이가 결국은 나를 멀리할 지도 모르겠다.


    왜 어떤 사람은 살인자가 되고, 또 어떤 사람은 정상이 되는 것인지.

    왜 어떤 사람은 수치를 느끼고, 또 어떤 사람은 염치를 생각하는지.

    나는 지금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나를 혐오하게 될 박창수에게]


  소설 속 이름들은 윤리적이려 하는 나를 방해하는, 시련을 주는 인물이기도 하면서 윤리적이라고 자부하는 나에 의해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들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이해가 힘들었던 김숙희에 대해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마음과 마음이 오고가지 않은 과장된 친절이 배려가 불편함을 줄 수 있는지 나아가 모욕으로 다가올 수 있음에 대해서도.

  감당할 수 없음에도 거절하지 못하는 탓에 일을 쌓아놓고 살았던 때가 있었다. 한때 내가 가장 많이 듣던 말은 일복은 많고 인복은 없다였다. 강민호, 권순찬, 김숙희 등등이 하루 걸러 내게 뭔가를 부탁했고 많은 일거리가 내게로 왔다. 완전히 물러가지 않은 성향으로 인해 힘겨워 턱턱거리면서 나를 탓하다가도 상대방을 탓한다. ‘미안한데’, ‘정말 미안한데’, ‘이러면 안되는 걸 알지만’으로 시작하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거절의 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거절의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과한 부탁을 하지 않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론 과하고 때론 습관적인 부탁의 말을 하는 자의 윤리를 생각했다. 거절이라는 불친절한 말 한마디를 하는 것을 그토록 꺼리며, 어떤 불편함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은 친절의 과장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에도 불편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배려였을까, 이기였을까. 결국 내게는 힘겨움이란 결과만을 주었던. 그래도 여전히 내가 해야 할 거절보다 그들이 하지 말아야 부탁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내가 있다.


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모욕을 당할까봐 모욕을 먼저 느끼며 모욕을 되돌려주는 삶에 대해서.

나는 그게 좀 서글프고, 부끄럽다. [최미진은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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