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모시빛 서재 (모시빛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at, 31 Oct 2026 14:30:31 +0900</lastBuildDate><image><title>모시빛</title><url>https://image.ala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모시빛</description></image><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사회·정치</category><title>선광부[쇳돌] - [쇳돌 - 사라지는 세계, 사라지는 노동, 사라지는 목소리를 채굴하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87237</link><pubDate>Thu, 22 Oct 2026 21: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8723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72002&TPaperId=1758723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389/4/coveroff/8972972002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72002&TPaperId=1758723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쇳돌 - 사라지는 세계, 사라지는 노동, 사라지는 목소리를 채굴하기</a><br/>이라영 지음 / 동녘 / 2026년 02월<br/></td></tr></table><br/>선광부<br>쇳돌-사라지는 세계, 사라지는 노동, 사라지는 목소리를 채굴하기,&nbsp;이라영, 동녘, 2026-02-20.  &nbsp;  <br>  &nbsp;&nbsp;세상이 급하게 변하고 미래산업이 발전하면서 사라지는 산업이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산업이 사라지는 건 ‘자연적인 흐름’만이 아닌 ‘정책적 의도’에 의해 일어나기도 한다. 직업이라는 게 쉬이 바꾸기 어려운데 새로운 산업이 등장할수록 이에 대한 이해와 기술력이 부족한 노동자는 어떻게 살아가고 살아내었을까.&nbsp; 미래산업과 로봇 성장의 시대를 얘기하면 떠오르는 기막힌 이야기는 ‘일본의 도장찍는 로봇’ 이야기다. 제법 오래전부터 일본의 로봇 기술력은 세계에서 상위에 랭크되었다. 일본이 보여줄 로봇에 대한 기대와 선망이 높았을 게다. 그런데, ‘도장찍는 일본 로봇’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일본은 문서가 전자화되지 않고 아직 종이문서인데다 수기로 도장을 찍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인장협회 등 관련 단체의 힘이 너무 막강하여 이런 형태를 바꾸지 못하고 해결책으로 좀더 효율적인 업무를 위해 이런 로봇을 만들었다 한다. 이러한 얘기를 접하고선 도대체 일본의 지향점을 무얼까 싶었다. 기술이 발달하는 시대, 단지 물리적인 기술력이 아니라 ‘기술’을 어떻게 다루고 무엇을 위해 기술이 필요한지에 대한 ‘생각’과 ‘비전’ 속에 기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걸 생각하게 된다.&nbsp; 이 책 『쇳돌』의 저자는 “경제성, 합리화, 건전성 등의 언어로 포장된 정책은 국가 경제를 위해서는 경제적이고 합리적이고 건전한 방향일지 모르나 개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붕괴시키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석탄산업합리화 정책” 속 ‘합리화’는 노동자들의 언어도 아니고, 어떠한 부정적 의미도 드러내지 않고, “직장을 잃은 광부에게, 그의 가족들에게, 이들이 거주하던 마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말해주지 않는다.”고. &nbsp; 그래서 이 책의 저자가 말해준다. 한 가족의 ‘광산 노동이동사’를, 그의 가족들을, 이들 거주하던 마을의 일들을. 그렇게 한 가정의 가정사가 사회 변화와 맞물리며 흘러온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거대한 담론을 논쟁적으로 풀어낸 것이 아니라 친구가 들려주는 ‘우리 아빠, 우리 집 이야기’를 들으며 사회사, 노동사라는 객관적인 실태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 이라영은 정말 탁월한 수다쟁이다.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감정이입을 하며 진지하게 때로는 흥미진진하게 친구-다소 수다스런-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nbsp; ‘막장 드라마’할 때 ‘막장’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경상도에서는 쌈장같은 된장을 ‘막장’이라고 부르는데, 드라마와 얽힌 막장은 석탄이나 광석 등을 채굴하는 갱도를 말한다. ‘막장드라마, ’막장 인생‘은 이처럼 광산 산업 노동자들의 삶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막장 인생이 어떤 거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nbsp; 광산 산업은 90년대 이후 감소하며 광산이나 광산노동자, 광부의 삶은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일이 되었다. 그렇게 ’광산‘은 하나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딱히 긍정적으로 그려지진 않는다. 대체로 가난하고 가난한 이들이 행하는 노동, 인생의 끝에 몰린 이들이 살아가는 인생으로 이들 삶을 표현한다. ’막장‘은 위험하고 험한 일터이고 그들의 삶 또한 그렇다고. 공장단지가 떠난 지역이 그러하듯 폐허처럼 남은 빈 집, 늙어가는 노인과 그만큼 늙어가는 개들만이 남은 곳, 광산 지역. 그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nbsp; 저자의 아버지는 “다 죽었지”라고 답했다. 저자는 그제야 양양광업소 노동자, 민주노조위원장 출신인 아버지의 양양 광산에서 일했던 기록을 찾기로 한다. 광산노동자들이 열심히 캐고 골라내던 ’쇳돌‘처럼 철광산 산업의 흥망성쇠 속 그때 그 지역의 모습을, 가족의 삶을 광산 노동자들의 삶을, “변화하는 산업 지형과 소멸하는 직업 속에서 견디고 이동하는 사람에 대한 기록”을.&nbsp; 이 책을 통해 “선광부”를 알게 된다. 광산하면 광부가 떠오르고 광부는 남성이다. 경리라고 부르는 일 정도는 여성이 했을지라도 광산은 남성의 일터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저자의 아버지는 또 말한다. “거기 맨 젊은 여자지”. 쇳돌 고르는 작업은 거의 여자들이 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쇳돌이란 철광석처럼 광석을 고르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선광부”라 한단다. 석탄 광산에선 선탄부라고 한단다. 저자의 고모도 선광부로 일을 했다 한다. 광부는 ’鑛夫‘로 ‘사내 부夫’자로 쓰이는데 선광부는 ‘부녀 부婦’자를 쓴단다. 광석 고르는 일을 여자가 주로 하니 쉬운 일이라고 가볍게 생각하면 안된다. 이 일은 “광산의 굵직한 일 중 하나”이고 “분진 속에서 하는 일이라 노동 강도가 세기 때문에 '지상의 막장'이라고도 불렸다.”&nbsp; 그리고 과거에 양양 사람들을 비하하던 표현인 “양양하와이”. 양양이 뒤늦게 남한에 편입했기 때문에 붙여진 말이라 한다. 양양 사람들은 남쪽 사람들과 대화할 때 조심하느라 말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휴전된 지 35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진짜 남한이 아니’라는 배제의 시선이 깔려 있는 이 말을 저자는 적어도 지금은 잊혀진 말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하지만 서핑의 도시로 알려진 양양을 보면 ‘하와이’ 해변이라거나 까페 등 ‘하와이’라는 이름 붙은 가게들이 보인다. 지금은 비하의 의미는 아니겠지만 뭔가 아이러니하다.  저자 또한 양양에서 양양 비하의 경험자로 살았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는 내내 저자의 어머니는 양양을, 광산을, 노조를 자식들과 분리하려 애썼다고 기록한다.  저자의 아버지는 연좌제의 피해자다. 남로당 활동을 했던 조부의 ‘행불’은 삶 내내 아버지와 고모를 따라다녀 공무원이 되지 못했고, 고모 역시 하고픈 일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 국가에게 감시당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노조’ 활동을 했고 노조위원장이 되었다. ‘노조위원장’의 부인인 아내의 삶은 딱히 좋았다고 할 수 없다. 노조 때문에 “가정이라는 게 없이” 사는 삶이었고, 가난한 삶에 도움 또한 되지 않는 그런 삶이었다. 뒤늦게 과거를 기록하는 시점에서 저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서로 다른 태도를 맞닥뜨린다.  &nbsp;  “아니, 할아버지가 왜 서대문형무소에 갔냐니까?”라고 재차 물어보면 “그게 다 관련이 있는 거야”라며 거대한 역사 속에서 제 아버지의 위치를 해석하려 애쓴다.“ […] 개인의 삶을 역사 속에서 해석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아버지에게는 꽤 익숙해 보인다. 나는 이 점이 남성 중심의 역사와 문학적 서사를 다양하게 접한 개인이 체득한 말하기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고모나 어머니는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았다. 고모는 숨으려 했으나 흘러넘치는 분노의 말을 주체하지 못해 끝내 붕괴되고 미쳐버렸다. 어머니는 지금도 “옛날 이야기 하기 싫다”라며 외면하는 선택을 한다.  &nbsp;  &nbsp; 저자는 동네서 가사만 하는 여성을 거의 본적 없다고 한다. 여성들은 하나같이 농사를 짓거나 시내에서 장사를 했고 겉보기에 ‘집에서 살림하고 애 키우는‘ 여자들은 다들 집에서 부업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여성은 광산 노동자의 부인으로서 가사노동만을 할 수 있는 삶은 아니었다. ’여성‘에게 부여된 전통적인 성역할-가사노동과 돌봄노동-과 함께 광산 노조 투쟁에 함께 하고, 부업 활동도 해야만 했던 삶이었다. 한편, 저자는 아버지가 노조투쟁을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부인들‘ 얘기를 들으며 적극적인 투쟁활동을 했던 여성들 외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도 언급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가정을 지킨다고 생각하는 여성의 위치”에 대해서 말이다. “적지 않은 여성들이 ‘어머니마저‘ 밖에서 투쟁에 참여했을 때 자식들의 위치가 더욱 취약해질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얘기한다.   이처럼 이 책은 남성의 세계로 인식되는 광산 노동자의 삶을 얘기하지만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는다. 그것은 분리될 수 없는 이야기, 함께 해 온 역사인 것이다. 이와 함께 저자는 “서울 중심, 중산층의 목소리가 과잉대표되는 동안 밀려나고 사라진 목소리”에 주목한다. 그 목소리를 함부로 제거하고 싶지 않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그러했던 것처럼 석탄 광산 노동자와 노동자의 가족 등 다양한 목소리를 담는다. 또한 광산을 소재로 영화, 드라마, 문학 작품 속에서 광산 산업과 노동자 가족의 삶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도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찾아낸 문학작품 속 이미지와 실제 ’목소리‘를 통해 본 삶이 어떻게 다른지,&nbsp;어떻게 그들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지 비교해볼 수도 있다.&nbsp; 저자는 이 책을 단순 기억에 의존, 구술에 의존하여 기록하지 않았다. 다양한 문학작품은 물론이거니와 광산 산업의 역사적 흐름과 실태를 잘 알 수 있는 사료를 파악하여 전해준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그 방식이 딱딱하지 않고 친구가 들려주는 조금은 진지하게 듣게 되는 가정사같다. &nbsp; 많은 이야기 속 머리를 치는 하나의 사건이 있다면 노조 투쟁으로 얻은 주간업무에 대한 광산노동자들의 반응이다. 시대의 변화 속에 24시간 채광하는 교대근무가 사라지고 주간업무만 하게 되었지만 노동자들이 그렇게 달가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급여와 관련한 부분이 클 것이다. 하지만 머리를 띵하게 했던 건 이 말이었다.  &nbsp;  “아침에 출근해서 퇴근할 때는 저녁인데 그럼 우리는 하루종일 햇빝도 못 보고 살지 않느냐”  &nbsp;  &nbsp; 비로소 이 말이 광산노동자의 ’일‘에 대해서 직관적으로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모든 노동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특성과 어려움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소멸하는 직업 세계에 속했던 사람들이 그들의 가치 또한 사라진 듯해서는 안될 텐데 살아온 삶이 노동과 노동자의 가치를 높일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AI로 대체되는 인간 노동에 대해서 지금도 끊임없이 얘기하고 있다. 광산 노동과 이들의 노동이 다를까. 신성장산업이라는 정책 기조 속에 사라질 노동의 세계, 그 노동이 사라진다고 사람이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저자가 계속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389/4/cover150/8972972002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3890449</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사회·정치</category><title>﻿﻿모멸받는 투명인간 A.B.C[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 종속적 자영업자에서 플랫폼 일자리까지]</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84702</link><pubDate>Wed, 21 Oct 2026 16:4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8470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32835576&TPaperId=1758470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8244/71/coveroff/k43283557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32835576&TPaperId=1758470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 종속적 자영업자에서 플랫폼 일자리까지</a><br/>전혜원 지음 / 서해문집 / 2021년 11월<br/></td></tr></table><br/><br>모멸받는 투명인간 A.B.C<br>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 종속적 자영업자에서 플랫폼 일자리까지  &nbsp;  전혜원, 서해문집, 2021-11-11    &nbsp;  &nbsp;&nbsp; 비정규직이 역대 최대라는 기사가 뜬다. 어제, 산재사고 사망률이 감소했다는 성과를 대대적으로 치하하는 모습 뒤로 2024년 23명이 사망한 아리셀 공장 대표들의 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되고 절규하는 유족들 모습이 겹친다. 대표들의 어마어마한 감형 기간 대비 유족들이 흘리고 흘릴 눈물의 시간이 뭐라고, 그렇게 또 지나갈 일이다. 반복된 산재사고는 늘, 형태가 같다. 그리고 어김없이 결과도 같다.&nbsp; 사고가 발생하지 않고 산재 사망자가 없는 것이 당연히 바람직하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통계란 다른 방향으로도 해석될 여지나 감춰지는 부분이 있다. 제조업 산재 사망자 수는 증가했다거나, 기사에서 지적하듯 노동자의 감소, 특히 “건설 경기 불황으로 현장이 줄어든 영향” 같은 것 말이다*. 물론 이에 대해 정부는 반박하며 “예방·감독과 현장의 안전 노력”이 이룬 결과라고 한다. 산재사고 발생 현장이 ‘제조업’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늘 같은 패턴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통계표를 보며 마냥 좋을 수는 없는 일이다.&nbsp;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듯 ‘비숙련 노동자’의 증가는 ‘아리셀 공장 참사’에서도 드러난다. 생산 목표와 납품 일정을 위해 비숙련 노동자,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거 고용하여 제품을 생산했다. 배터리를 다루는 위험한 생산환경에서 불량품 발생과 잇단 발열과 폭발이 이뤄졌음에도 공정을 계속했고, 공장은 비상상황에 대피하기 어려운 구조였으며 노동자들 대상으로 제품생산뿐만 아니라 안전에 대한 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는데 ‘안전관리’에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는가. 양형 사유는 유족과 합의란다. 놀라운 점은 “피해 회복 노력을 형량에 반영하지 않으면 피고인들이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을 줄이거나 포기할 수 있다”는 취지의 감형 사유다. 이건 늘 그래왔듯이 “돈이 장땡”이란 사고의 확정 아닌가. “유족들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위로, 사과 한마디 없이 돈 몇푼 쥐어주며 처벌불원서를 받으려 하고 있는 회사 측을 용서할 수 없다(동아일보, 2025.1.9)”, "국가에 버려진 느낌(한겨레, 2026.10.20)는 유족이 말이 눈에 밟힌다. 이 또한 얼마나 반복되어 본 모습인가.&nbsp; 왜 한국에선 ‘노동’과 ‘노동자’는 멸시받아 왔고 더불어 ‘불온’의 대상이 되었는가. 5월 1일 조차도 ‘노동자’라는 말 사용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한사코 ‘근로자’를 고집하던 한국 사회. 더구나 더 들아가서 ‘노동자’를 더 세세하게 분류하며 차별을 더 공고히 한다. &nbsp; 노동자가 아닌 사람이 있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하지 않고 살아가기는 어렵다. 필연적으로 모두 노동자일 수밖에 없기에 ‘나’의 가치를 부각하기 위해 그토록 세세하게 구분하는지도 모르겠다. ‘노동’에 매겨진 가치, 그것은 누가 결정하는가. ‘시장’이라 말하겠지만 그 ‘시장’에서 형성된 가치가 온전히 자유로운 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농업사회를 거쳐왔음에도 너무도 오래 ‘육체적’ 노동을 천박하게 여겨 온, 세뇌된 인식이 그 기본틀을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특정 집단들이 계속 이 틀이 유지되도록 힘쓰고 있다.&nbsp; 저자는 이런 오래되고 고착화된 노동에 대한 인식에 대해 논하기보다는, 기자로서 노동현장의 취재를 바탕으로 현재 일터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 문제에 주목한다. 저자의 논점은 흔히 말하는 진보와 보수에서 주장하는 바와 드러내지 않는 부분에 대해 논쟁적으로 접근한다.&nbsp; &nbsp;2021년 출간된 책이니만큼 취재한 노동현장은 2020년 이전이다. 그때와 지금, 여전히 주목해야 하는 문제는 다를까. 다만, 오래 묵은 기본적인 관념틀을 배제하고서 ‘노동’에 대해 말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떠올린 건 “산재” 때문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 부분이 산재사고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재를 다루며 소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일터에서 죽지 않을 권리- 우리는 왜 날마다 명복을 비는가”<br>&nbsp; 노동현장 사고가 발생 기사를 보면 놀랍지 않다. 노동현장의 A씨, B씨, C씨……끝없는 A, B, C. 사고 발생 날짜와 사업장소만 다를 뿐 사고가 발생한 상황, 원인은 복사한 듯 똑같고 사고가 발생한 후 머리를 조아리며 울어대는(울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지만) 사업주의 모습, 시간이 지나면 특정 업체의 사고 소식은 다른 업체의 사고 소식을 덮이고 그렇게 어디가 어디였나 가물한 채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희미해진다. 그리고 어김없이 사업주들은 대형 로펌을 수임하고 최소한의 법적 처벌을 받고, 죄가 사해진 양 환하게 웃는다. 사고가 나서 울고 사고처리 과정에서 울고 법적인 판결 후에도 우는 건 오로지 노동자, 미치게도 똑같은 데자뷰.   &nbsp;  2016년 지진 당시 KTX 김천구미역에서 사람이 두 명 죽었다. 선로 보수유지에 투입된 노동자들이 달려오는 열차에 치인 것이다. 그날 지진으로 열차가 두 시간 정도 연착된다는 사실은 《연합뉴스》를 비롯한 여러 언론에서도 수차례 예고했다. 이렇게 중요한 정보가 정작 현장 노동자들에게는 전해지지 않은 까닭이 무엇일까.  &nbsp;  &nbsp; 2021년 출간된 이 책의 기사 속 KTX사고, 그후로도 몇 년이 지났건만 난 지역만 달리한 이러한 기사를 더 본 기억이 있다.   &nbsp;  *청도 무궁화호 열차에 선로 작업자 7명 치여…하청근로자 2명 사망 &lt;2025.8.19. 연합뉴스&gt;*아산 KTX 선로 공사장서 30대 작업자 컨베이어 벨트 끼여 숨져 &lt;2026. 7. 1. 뉴스1&gt;*경부선 의왕역서 작업자 열차 사고…50대 코레일 직원 심정지 &lt;2026.08.29. 기호일보&gt;  &nbsp;  &nbsp; 특히, 경북 청도에서 발생한 사고는 사고내용이나 원인이 같다. SPC 빵 공장과 쿠팡의 사망사고는 얼마나 또 반복적이었던가. 그래서 사고 후에 달라졌는가. 열악한 근무환경의 변화보다는 그저 사람이 대체될 뿐.&nbsp; 저자는 2016년 사고 전까지 “외주화는 선험적으로 나쁜 것이며, 산재는 그저 불쌍하고 안타까운 일로만 여겼”다가 이 사건을 계기로 관점을 전환한다. “긴박하고 긴밀한 소통이 필요한 상황에서, 분산된 고용구조가 어떻게 ‘조율 실패’를 초래”하는지, 그리고 “외주화가 왜 위험한지”. 물론 노동의 영역도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행위자들이 합리적이거나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면서 벌이는 일련의 상호작용’임을 알게 해주었다고 말한다. 난, 그 행위자들의 상호작용이 균등하지 않고 불균형이 있다고 본다. 그렇기에 오랜 관념에 따른 ‘노동천시’, 기업가와 법률가란 행위자들의 힘을 우선하는 이 사회의 세계에서 ‘노동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제외하고 논의할 부분이 아니라고 본다. 비교적 ‘노동’에 대한 가치가 우리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게” 여겨지는 유럽의 경우, 이러한 산재사고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다르다.  &nbsp;  기업이 책임을 면하려면 사고 당시의 일반적인 기술 수준이나 경제 상황, 동종업계 관행에 비춰봤을 때 충분히 합리적인 조치를 했다고 기업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반면 한국은 안전규정을 기업이 고용한 ‘노동자(주로 중간 이하 관리직)’가 지켜야 할 규정으로 이해한다. 사고가 나면 그 회사의 안전보건 시스템에 책임을 묻기보다 노동자 개인의 규정 위반을 처벌한다.‘  &nbsp;  &nbsp; 그러고 보니 화성에서 23명의 사망 사고가 하나 더 떠오른다. 1999년 역시 경기도 화성에서 일어난 씨랜드청소년 수련원 사고 말이다. 이 사고에서도 23명이 사망했고 대부분 어린이였다. 이 사고 대표자는 징역 1년형(금고 4년)을 받았고 씨랜드 사고가 난 그 장소 부근에서 대형 까페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1999년에도 처벌을 강화해야 하니, 처벌이 약하니 어쩌니 말은 많았는데 이렇다. 1999년 이후로 얼마나 흘렀나. 대한민국은 선진국, 민주주의의 상징이자 문화강국으로 발전하고 있는데 얼마나 변화했나.   &nbsp;  누가 죽어도 바뀌지 않는 게 있다면, 그 죽음이 실은 무겁지 않다는 뜻이다. 그 죽음들에 부아가 치미는 인간의 수가 적다는 의미다. 그게 조직이든 사회든. 그럼에도 각자의 위치에서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안다.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nbsp;  &nbsp; 사고가 아무렇지도 않은 나라. 사고는 일어나기보다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더 많고, 사고가 나면 그건 운이 없고 재수없는 일일 뿐이고, 사고예방을 위한 조치를 취하기 보다 사고가 난 뒤의 벌금이 더 수익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끝없이 나오는 ’사람‘을 돈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행위자들, 그의 동조자들이&nbsp;’법‘을 통해 만들어내는 형태다. 이 책의 소갯말이, “소멸하는 일자리와 모멸받는 사람들에 관한 한국 노동”이다.&nbsp; 새로운 세상이 열린 줄, 이전보다는 나은 상황이 되리라 기대했는데 하루하루 모멸감만 쌓여간다. 소멸하는 일자리보다 먼저, 내가 소멸해 버릴 것 같다.  &nbsp;    &nbsp;  *연합뉴스, 2026.10.20.(https://v.daum.net/v/20261020100237683)<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8244/71/cover150/k43283557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2447101</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한국문학</category><title>차가운 감촉[시간의 감촉] - [시간의 감촉]</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81008</link><pubDate>Mon, 19 Oct 2026 19:0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8100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82139749&TPaperId=1758100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36/43/coveroff/k18213974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82139749&TPaperId=1758100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시간의 감촉</a><br/>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06월<br/></td></tr></table><br/><br>차가운 감촉<br>시간의 감촉,&nbsp;은희경, 문학동네, 2026-06-22.  &nbsp;  &nbsp; 요즈음 난 ‘몸’에 대해 할 말이 많다. 노년에 대해서도.&nbsp; 이 소설은 ‘몸’에 대한 기억이다. 아니, 그보다는 ‘밀도 있는 삶의 기록, 기억’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나’를 설명하려 해도 ‘나’의 생김새는 ‘몸’이란 형체에서 시작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몸’보다는 ‘정신’에 더 우위를 두듯 이야기한다. ‘한낱’이나 ‘기껏’ 육체로 폄하하고 병든 육체일수록 노화된 몸일수록 더더욱 소외되기 일쑤다. 하지만 ‘몸’과 분리한 ‘정신’이 있을 수 있을까. ‘몸’은 필연코 ‘정신’, ‘영혼’을 발산하는 기본이다. 나무의 나이테와 같이 ‘몸’의 변화에 따라 삶의 변화가 이어지듯이. 그렇다. 삶을 기억하고 기록한다는 것이 ‘몸’이란 형체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소설 속 안나가 말하듯 “몸에 관한 한 타인은 결코 개입하지 못한다. 남이 볼 때 남루하든 비참하든 한심하든 몸의 당사자에게만 유일하게 감각되는 고유의 삶인 것이다.”&nbsp; 여기 ‘몸’의 주인 둘이 있다. 안나와 경선 두 자매다. 자매의 이름이 안나와 경선인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듯 이름을 들여다본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항렬자를 쓰는 탓에 이름 끝자만 다르다. 대체로 형제자매라면 비슷하게 이름을 지을 텐데, 유독 다르게 느껴지는 어감으로 자매의 이름을 설정한 것에 쓸데없이 의문을 품는다. 더구나 안나는 1월생, 경선은 12월생이다. 의문은 품지만 끝내 특별한 이유는 찾지 못하고, 괜시리 이름 때문인지 ‘안나’는 독립적이고 고립된 삶, ‘경선’은 경쟁적이며 북적한 삶을 그 이름 속에 품은 듯이 여긴다.&nbsp; 안나가 예순다섯 생일 아침 홀로 커피를 마시며 ‘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무위와 단조로움’이 한몫한다. 안나는 “가족이 없고 경제활동도 끝났고 빚도 없고 만날 사람도 만들지 않”지만 하루의 삶을 유지하려면 ‘몸’이 기본적인 일을 수행해야 한다는 유기체의 숙명을 생각한다. 그리고, 일년 정도는 보지 않고 지낼 정도인 자매, 오랜만에 만난 ‘경선’의 변화, 늙음을 압축적으로 느낀다. 안나는 경선의 간병인으로 병원에서 경선을 만난다.&nbsp; ‘경선’은 오피스텔에서 “무력감과 압박감”을 느끼며 깨어나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전남편의 사망 소식과 자신의 건강검진 결과에 “자신이 느낄 수 있는 죽음의 실체는 잠든 뒤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상태로 상상”된다. “죽음은 소멸이고, 모두가 겪는 일이라고 해서 두려움이 덜어지는 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nbsp; 이렇듯 자매가 만나게 되니 서로가 지난 과거를 떠올린다. 안나는 경선을 중심으로 경선의 탄생과 백일, 그즈음의 이웃들과 친척들까지, ‘생로병사’의 사건들을 생각하며 그 속에서 느끼고 생각했던 삶의 모습들을 생각한다. 또한, 안나의 사랑과 경선의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며 “몸이란 삶의 조건이지만 한편으로 죽음의 조건”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경선의 경우, 막연한 죽음이 훨씬 더 가까이에 따라오고 있음도.&nbsp; 일년에 한번쯤 만날까 하는 두 자매는 격렬하게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애틋하게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다. 어릴 적에야 함께 성장한다지만 성인이 된 후에야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 보통이니까. 그래도 동생의 병간호를 부탁하고 해줄 만큼의 사이인 자매. 사사건건 사물을 보는 시각에서 차이를 나타내며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어린 시절 자매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듯하다. 마음은 그토록 지난 기억을 갖고 있는 ‘어린’ 자매이건만 지금 두 자매는 시간의 흐름에 따는 필연적인 ‘노화’를 맞이하고 있다. 경선은 ‘노화’와 함께 ‘병마’까지를 ‘몸’에 새기고 있는 순간이다.&nbsp; 집중력과 기억력이 뛰어난 편이었던 안나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상대에게 답답함과 짜증을 느껴왔는데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자 “노화란 어쩌면 자신이 혐오했던 모습으로 퇴화해가는 고통과 저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한다. 자기혐오가 우울증이 되고 우울증이 때로 증오와 공격성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경선에게 안나가 그 대상이 된다. &nbsp; 두 자매는 노인으로 보이기 싫은 시기에 이르렀고, 노화와 병마 속에 이처럼 자기혐오에 빠지게 되는 것은 “노인으로 대해지는 게 불만스러운 마음 안에는 스스로 동의하지도 않았는데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세상의 잣대에 맞춰야 했던 데 대한 분함과 심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혐오 속에 점멸될지 모르는 두 ‘노인’은 경선의 손녀 ‘다니엘’과 함께 해외여행을 하며, ‘우리의 첫 경험에 대한 게임’을 하며 생각의 전환을 맞는다. &nbsp; 경선이라는 이름처럼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의 가난과 고독에 견주며 그보다는 낫다는 데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순간들이 있었던” 경선도 왜 안나와 친밀한 사이가 되지 못한 채 그저 그런 자매로 살아왔는지를 기억하며 “사람은 병과 실수와 약점을 통해서도 교감”하며 “고통과 맞닥뜨리는 걸 피해버리면 화해할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갚을 길 없는 빚이 되고마는 것”임을 인식한다.   &nbsp;  어떤 시간은 생활의 때묻은 이력으로 채워진 채 흘러간다. 하지만 같은 시기의 또다른 어떤 시간은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 그대로의 세계 안에서 흘러간다. 삶이란 그처럼 의미가 다른 여러 개의 시간이 겹쳐져 흘러가는 게 아닐까. 몸의 일상은 현실의 시간대에서 변해가지만, 언젠가 포착한 적 있었던 꿈과 이상의 시간은 그 나름의 도착지를 향해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그것이 인간이 마지막까지 품고 있는 시원이나 본향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nbsp;  &nbsp; 두 노인의 ‘몸’에 대한 이야기, ‘노인’으로서 ‘노화’된 몸을 바라보는 이야기는 삶의 기록과 엉기어 자연스럽게 노화를 수용하는 형태로 나아간다. 그것은 몸이 살아온 시간만큼 겪은 그 수많은 ‘사건’들을 다시 바라보고 기억을 재생하며 현재에 그때 자신의 행동에 대해 ‘반성’과 ‘화해’를 담는다. 비록 힘겨운 몸으로 인해 짜증이 나고 자기혐오에 빠지게 되었을지라도 그것이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데 한걸음 더 나아가는 길이다. 비록 앞으로의 미래가 얼마나 남았을지, 아니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 다가와 있을지 모른데도 마냥 두려워하거나 회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하루하루 첫 경험인 듯 첫 기억인 듯 살아내는 것.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그것은 모두 ‘첫’이니까. “그것은 ‘가장 오래된’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최근’과 ‘우리의 다음’이 되기도 한다.”&nbsp; 두 자매처럼 노년과 병마에 힘겨운 부모님이 ‘노화’를 ‘노년’을 좀더 자연스럽게 인식하며 좀더 평안하기를 바라지만 두 자매는 부모님에 비해서 너무나 청춘이다. 육십 오세, 그래 아직은 청춘 아닌가. 세상의 변화는 빠르기도 하다. 삶을 살아내는 데 좀더 바빠 어떤 여유를 가지기 힘겨웠던 부모님 세대, 삶을 반추하기도 전에 ‘자기혐오’ 속에 허우적거리는 건 아닐지, 아니 그러고 있는 것도 같은데 무얼 어찌해야 할지 모를 시간이 간다. 자식에게도 힘겨운 시간이다. 처음 겪어보는 현실이니까. 안나와 경선처럼 저 나이가 되면 노화를 긍정하면서 더 깊어진 노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손에 쥐어지는 시간의 감촉이 갑자기 너무 차가워진다.   &nbsp;  &nbsp; &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36/43/cover150/k18213974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364364</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한국문학</category><title>10분만 더 숨쉬다가[유리 조각 시간] - [유리 조각 시간 - 제2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81002</link><pubDate>Mon, 19 Oct 2026 18:5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8100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52138332&TPaperId=1758100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30/91/coveroff/k65213833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52138332&TPaperId=1758100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유리 조각 시간 - 제2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a><br/>성수진 지음 / 나무옆의자 / 2026년 05월<br/></td></tr></table><br/><br>10분만 더 숨쉬다가<br>유리 조각 시간 - 제2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nbsp;성수진, 나무옆의자, 2026-05-20.  &nbsp;  <br>  &nbsp;&nbsp;도망치는 일도, 힘을 쏟아야 한다. 책을 덮고 왜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nbsp; ‘유리 조각 시간’이란 게 가늠되지 않아서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궁금했다. 시간이 유리 조각처럼 파편화되는 것을 말하는가.&nbsp; 책을 읽는 동안엔 오래 전 스쳐 본 유튜브 영상이 떠올랐다. 단편적인 기억에 의존하여 몇 날 며칠 유튜브를 헤맸다. 실로 일주일 넘게 미친듯한 집착이었다. 마침내 찾았을 때 감정을 뭐라 표현할 길이 없다. 몇 단어에서 기억과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왜 그토록 이 기억을 완전하게 할 원본을 찾고 싶었을까. 대략 6분 정도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nbsp;  ‘나’는 열아홉 살에 엄마, 아빠, 오빠를 교통사고로 한번에 잃었다. 장례식 후 가족 따라 가려고 양화대교에 섰다. 10분만 더 숨 쉬다가 뛰어야지, 가야지 하다가 해가 뜨고 지나가는 차들이 많아져서 조금 기다리는데 조금씩 밝아지면서 보이는 강물이 너무 예뻐서 잠깐 보고 있다가 잠시 지난 시간을 생각하며 서 있었는데 자전거가 지나가다 멈췄다. 자전거에서 누가 손을 잡았는데도 세상에 감흥이 없어 놀라지도 않고 그 사람을 쳐다보는데, “새벽공기 좋지?”하는데 눈물이 났다. 따스한 말에 주저앉아 마구 울었고 또래였던 그 친구가 자기 얘기를 오래도록 들어주었다. 그 친구가 ‘나’를 너무 챙겨줘서 살고 싶어졌다고. 그 친구가 말하길 경찰에 신고하려다가 너무 슬퍼보여서 자기도 모르게 옆에 갔서 말 건 거라고. 스무살 둘이 원룸을 구해서 같이 의지하며 잘 생활하며 행복하게 지냈는데 5년 지나 그 친구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미쳐버릴 것 같은 마음에 울기만 하고 쓰러지기도 했는데 열아홉 살 때처럼 극단적인 생각은 들지 않았다고. 친구가 알려준 것이 너무 많아서, 그 친구가 준 사랑에 힘입어, 삶으로 이끌어준 그 친구 생각하면서 하루하루 잘 살아가고 있다는.   &nbsp;  &nbsp; 소설 속 유영은 하루하루 ‘10분만 더 숨 쉬다가’를 읊조리는 ‘나’ 같다. 그러면 ‘경진’은 그 친구일 수밖에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실체를 알 수 없는, 무겁고 가라앉은 분위기에 놓여본” 유영은 아홉 살에 감각적으로 그 실체를 파악한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건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 사고로 사망한 언니 유경의 존재였다. “곁에 있는 나를, 내게 드리운 그림자를 보듬어줄 것”을 바라지만 영원한 아픈 손가락 유경이 엄마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하여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아 유영은 엄마가 “내가 죽어야 나를 이해해줄 것 같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영은 제 존재에 대한 의심과 외롭고 쓸쓸함을 가득 안고서 성장하게 된다.&nbsp; 가족 속 결핍을 외부에서 찾게 된 유영은 중학생 시절 채팅 사이트에서 ‘경진’을 만나 우정을 나눈다. 채팅 속 문장으로 만난 ‘경진’, 채팅명 ‘델’은 유영에게 위안이 되는 존재였다. 유영은 “찬란한 아픔. 아름다운 구역감.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 말로 하면 빛바래고 어딘지 유치해지는 그 느낌”을 델하고만 공유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메일과 문자를 주고받으며 소통하던 ‘경진’에게서 소식이 끊어진 지 오래, 간호사가 된 유영은 업무 문제와 가족 안에서 여전히 편치 않은 상황에서 낯선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자 병원을 그만두고 출국을 준비한다. 그러던 중 5년 만에 경진에게서 메일이 도착한다. ‘경진’이 보내온 ‘유영’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돌이키면 상처 가득한 과거를 회상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 &nbsp; 채팅으로만 만나던 둘이 처음으로 만나던 날, 유영은 다리 난간에 섰었다. 그날 델은 필사적으로 유영을 끌어안았다. 이제야 생각하면 그때 유영이 다리 난간에 선 것은 ‘치기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는지 그때 델은 “자신의 마음을 돌릴 수만 있다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듯한 태도”로 유영을 붙들었다. 그날 델의 품 안에서 한참을 울던 유영은 델의 왼쪽팔에서 ‘부풀어 오른 흉터’를 보았다. ‘하나의 긴 선과 그것을 가르는 짧은 선들을’. 델은 주머니에 유리 조각을 넣고 다니며 제 몸에 상처가 나길 기다리는 아이였다. 그런 델, 아니 경진은 “자신이 어떤 세계의 일원이 되고 싶은지 파악했으며 그 세계에 속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러면서 연락이 뜸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나는 서로에게 몰두했다가 조금씩 빠져나온 뒤 자신의 일상에 복귀해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이 사랑과 우정의 공통된 과정”이지만 그래도 변화된 관계가 눈물 날 만큼 서글펐던 유영은 갑작스런 경진의 소식에 불길한 느낌과 함께 경진을 찾는다.&nbsp; 아마도 다리 난간에 섰었던 유영과 이를 막으려던 경진의 모습에서 “10분만 더 숨쉬다가” 영상이 연상되었을 거다. 5년이라는 시간 또한 연상작용에 한 역할을 했을 테고. 물론 유튜브 영상 속 10분만 더 숨쉬다가와 유영이 가진 상처와 외로움이 ‘가족’으로 기인한 것이라 해도 다르다. 그 곁에 선 ‘친구’의 존재가 삶에서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숨을 쉬게 해주는 존재인지는 알 것 같다. 가끔 생각한다. 오래 전 연락이 끊긴 친구의 갑작스런 소식에 반응하는 나의 모습에 대해서. 유영이 생각한 것처럼 “서로에게 몰두했다가 조금씩 빠져나온 뒤 자신의 일상에 복귀해 관계를 이어나가는” 이 반복적인 과정에서 가끔 선택의 순간이 찾아오게 될 때, 결정적 요인은 무엇인가에 대한 뭐, 그런. &nbsp; 학창시절엔 이상하게도 ‘친구’에 대해 ‘우정’에 선택해야 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그런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뭔가 ‘마음이 끌리는 대로’가 아니라 ‘그래야만 해야 하는’ 형태로 움직였던 것도 같다. 나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많은 친구에게 본능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신경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시간의 길이’의 우위를 ‘우정’의 선택 순위에 높여 놓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취향이나 생활반경 내 존재하는 이들이 우정의 대상이 되었다가 사라지기도 했다. 그래도 특정한 몇을 제외하고 직장에서 만난 관계는 오래 유지되지는 않은 것 같다. 어릴 때 만난 친구들일수록 취향이나 사회를 보는 시선이 얼마나 다른가도 확인하게 되기도 한다. 소식이 끊긴 가끔 생각나는 친구도 있고. 달라진 게 있다면 한때는 ‘친구’란 같은 나이인 경우에 한정했다면, ‘친구’는 ‘나이’와는 상관없는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저런 생각 속에 내가 ‘유영’이라면 시간이 흘러 찾아온 이 상황에 어떤 반응을 하게 될까.  &nbsp;  “그렇게 각별한 친구야? 몇 번 만나지도 않았다며…….”희주의 물음을 듣고 나서야 마음속에 아주 확고하게 다른 결심이 들어섰다. 얼마나 자주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었는지, 서로의 생활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지 아닌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오직 내게 중요한 건 김경진이라는 존재 그 자체였다. ‘친구’라는 단어로는 차마 설명할 수 없는, 그냥 김경진. 우리가 서로를 만났다는 것.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 이유는 충분했다. 나는 경진이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었다.  &nbsp;  &nbsp; 경진은 “자신이 고유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소설을 쓴다”고 했다. 나는 영화나 소설 속에 묘사되는 ‘멋진’ 친구의 모습이 되고자 한 때가 있었다. 어느 순간엔 내겐 그런 친구가 있는가란 물음을 하게 되곤 한다. 어릴 적부터 오랜 시간을 친구로 지내오면서 사소하다고 해야 할지 그런 일들로 관계를 끊었다고 얘기하는 주위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 걸 알게 되면서 뒤늦게 ‘관계를 끊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유영은 ‘각별한 친구’는 몇 번 만나지 않은 것 정도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났다’는 이유, ‘존재’ 자체로 ‘김경진’을 각별한 친구로 정의했다. 그들의 학창시절이 그 기억이 유영과 경진이 ‘각별함’을 보여주는 요인이 된다. 마음 속에 누군가에 대해 어떻게 기억하고 있느냐, 어떤 시간을 나누었느냐가 현재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친구란 “삶으로 이끌어주는” 존재, 지금은 이 말이 와 닿는다. <br>손바닥에 유리 조각을 두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소주병 혹은 사이다병이 깨지고 난 뒤의 시간을 짐작해보았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모래사장에서 바람과 파도를 맞으며 서서히 마모되어온 시간을. 수많은 모래알 사이에서 나는 초록으로 빛나는 작은 유리 조각 하나를 주워 경진에게 건네었고, 오랜 시간이 흘러 경진은 그것을 다시 내게 돌려주었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30/91/cover150/k65213833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3309129</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역사·과학</category><title>호모 심비우스[히스토리아 비테이] - [히스토리아 비테이 - 46억 년 전 지구 탄생부터 기후 변화와 AI까지, 세계적 석학이 들려주는 생명의 빅히스토리]</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75512</link><pubDate>Fri, 16 Oct 2026 16: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7551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82138333&TPaperId=1757551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31/0/coveroff/k28213833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82138333&TPaperId=1757551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히스토리아 비테이 - 46억 년 전 지구 탄생부터 기후 변화와 AI까지, 세계적 석학이 들려주는 생명의 빅히스토리</a><br/>최재천 지음 / 지식서재 / 2026년 06월<br/></td></tr></table><br/>&nbsp;호모 심비우스<br>히스토리아 비테이&nbsp;- 46억 년 전 지구 탄생부터 기후 변화와 AI까지,&nbsp;세계적 석학이 들려주는 생명의 빅히스토리,&nbsp;&nbsp;최재천 (지은이), 지식서재, 2026-06-08.<br><br>&nbsp; ‘히스토리아 비테이Historia Vitae’는 저자가 정의한 ‘역사와 삶의 관계’를 의미한다. &nbsp; “Historia Magistra Vitae(역사는 삶의 스승이다)”는 로마의 정치 사상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변론가에 대하여』에서 역사를 정의한 말이다. 이 책은 “지구가 탄생한 46억 년 전부터 지구 생태계가 위기에 처한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지구 역사의 빅히스토리”를 다루기 때문에 저자는 이 말에서 제목을 차용한다.&nbsp; 최초의 생명 탄생부터 지금까지 지구 생명들이 살아가는 환경은 변화했다. 지구 탄생 46억년,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을 담기에 328쪽은 매우 적다. 저자가 택한 방법은 지구 생명체의 탄생과 더불어 생태계 변화에서 생명체의 소멸과 진화, 그 생명력을 주요하게 다룬다. 더불어 그에 생명체에 대해 종종 궁금하게 여기는 부분, 중요하게 인식해야 하는 부분을 질문 형태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겪어온 위험한 생태계와 더불어 현재 진행되고 있고 곧 도래할 위험한 생태계 환경에서 ‘생명체’에 대해 꼭 알아야 할 것들은 무언가.&nbsp; 지구 탄생은 46억 년 전이다. 우주를 떠돌던 성운이 뭉쳐져 지구가 만들어졌고 그로부터  8억 년쯤 뒤 “늪처럼 물이 있는 환경에서 다른 것은 할 줄 모르지만 자기와 똑같이 생긴 물질을 복제하는 능력을 가진 이상한 화학물질이 어쩌다 우연히 탄생”했다. 이 지구 최초 생명체가 “자기를 복제하는 과정에서 자연선택을 받으며 분화를 거듭한 결과,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생명체가 출현”했다. &nbsp; 다양한 생명체, 그중에 “인간 종, 호모 사피엔스”가 있다. 동물이 파충류, 조류, 포유류 등으로 나누어지고 포유류 일부는 영장류로, 영장류에서 약 30만 년 전에 하나의 가지 끝에서 탄생한 인간 종, 그러니까 “모든 생명이 하나로부터 왔다는 다윈의 ‘생명 일원성’”. “인간”이 모든 생명체의 우위에 있는 별도가 아닌 존재라는 것이다. 다윈이 탐구 과정에서 이를 ‘진화론’으로 발전시켰다. &nbsp; 하지만 자연이란 항상 경쟁적이다. 생존을 위한 필수의 몸부림이지만 ‘누가 더 강한가’에 집착하는 인간이 자연을 그렇게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식물은 동물보다 열등하다고 치부하고, 또다시 동물은 ‘본능’에 따르는 존재로 인간은 ‘이성’이 있음을 치켜세운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우리가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다. 밀이 우리를 길들였다”라고 했듯 식물의 능력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저자는 사과나무의 입장도 들어 보자고 한다. “사과나무는 자신의 씨앗을 먼 곳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동물을 이용한다.” 식물은 단것으로 적극적인 구애 활동으로 벌을 유인한다.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1983년 미국 다트머스 대학교 연구진은 곤충 공격 시 공격받지 않은 쪽의 나무들도 유독한 화학물질을 내뿜어 방어 전선을 구축하는 매커니즘으로 곤충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많은 연구들에서 알려졌듯이 동물의 행동은 학습이나 경험을 통해 정교화되며 단순하지만 않은 의사소통을 사용하기도 하며 짝짓기 시에는 다른 종의 의사소통 수단을 익혀서 사용하기도 한다. &nbsp; 아무튼, 인간에 대해서만 보다 가치를 부여하는 오랜 습성을 가진 인간은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에 대해서 좀 더 객관적으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렇게 홀로 잘난 종이라고 생각하며 독야청청 살다가는 자멸할 거라는 것, 자연은 모든 생물과 함께 하는 ‘장’이다.&nbsp; 오래도록 인간이 파괴해 온 자연을 되살리려는 노력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긴 하지만 여의치 않다. 기후변화는 너무도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저자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고 얘기한다. 그것은 뇌의 4단계 ‘설명의 뇌’로 보는데 이것 때문에 호모 사피엔스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공유하는 능력”을 지닐 수 있었고 “소수 집단으로 몰려다니던 네안데르탈인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인류가 열등한 신체 조건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건 타인과 소통하고 사회관계를 유지하는 능력 덕분”이라는 것이다. 이에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호모 심비우스”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호모 심비우스는 저자가 거의 30년 전부터 제안한 새로운 학명으로 ’자연과 공생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nbsp;  “집단 내에서는 이기주의가 이타주의를 이긴다. (하지만) 이타적인 집단이 이기적인 집단을 이긴다”라고 주장했다. _데이비드 윌슨  &nbsp;  &nbsp; 저자는 “남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로 인한 이익은 혼자 가지려는 사람들은 따돌림을 당하기 쉽고 결국 응징당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호혜성 이타주의를 발달시키는 진화 과정에서 공동체가 만들어낸 효율적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nbsp; 팬더믹을 겪고 기후 위기가 가속화되고 있는 시대다. 다른 생명체들이 하나의 속 안에 여러 종들이 공존하며 살아갈 때 인간 종 사피엔스만이 같은 호모 속에 속하는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등을 없애고 독야청청 살아남았다. 그뿐인가. 수많은 동식물을 멸종시킨 이력이 있다. 과거에만이 아니라 최근에도 진행형이기도 하다. 어쩌면 깊이 박혔을 ’멸종의 DNA에 “데이비드 윌슨”의 말이 유효할까. 아니, 동물도 본능만이 아니라 학습이나 경험을 통해 행동이 정교화된다는데, 인간이라면 학습하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nbsp; ‘다양성’을 인식할 수 있는 충분한 사료들이 존재함에도 자연을 보며 좀더 겸허해지고 공존하는 방식에서 비껴가는 현재에 끊임없이 자연의 생물들을 통해 자연은 이러하다고 보여주고 있음에도 ‘인간은 말이야’로 받아치고 있는 듯하다. 프로그램 중에 “나는 자연인이다”가 계속 인기라고 하는데 인간이 생각하는 “자연인”은 생존과 진화의 측면에서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개발하는 것보다 훨씬 더 경제적”이라는데 여전히 자연에서 무언가를 얻어내는데 급급한 인간이다. “호모 심비우스”, 저자가 30년 전부터 주장하던 학명인데 오래도록 이 학명이 확산되지 않은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함께”,“같이”라는 공생의 말이 공허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건만. 과연, 공생할 수 있을까.    &nbsp;    &nbsp;  &nbsp;&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31/0/cover150/k28213833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3310095</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한국문학</category><title>약속의 8회는 있는가[약속의 세대] - [약속의 세대]</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71844</link><pubDate>Wed, 14 Oct 2026 17: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7184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32137187&TPaperId=1757184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29/70/coveroff/k73213718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32137187&TPaperId=1757184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약속의 세대</a><br/>백온유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03월<br/></td></tr></table><br/><br>약속의 8회는 있는가<br>약속의 세대,&nbsp;백온유, 문학동네, 2026-03-20.&nbsp; &nbsp;  &nbsp;    &nbsp;&nbsp;“약속의 8회가 왔습니다”&nbsp; 야구 경기 8회가 되면 늘 이런 코멘트가 나온다. ‘8회에 도대체 무엇을 약속했기에’라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8회에는 꼭 무슨 일인가 벌어져야 한다는 강렬한 기원, 주술같은 이야기에 휩쓸리고 만다. 승리 굳힘일지 역전의 날림일지 모를 8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패배가 굳혀진 경우가 더 많았지만 그 ‘약속의 8회’는 항상 당연한 듯 이어지고 머문다. 아무것도 몰랐거나 아무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한순간의 유흥으로 지나갔을 ‘8회’는 ‘약속의’라는 단어가 붙은 후엔 단순하지 않은 마음을 휘젓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기에 기대에 미치지 못한 후폭풍은 전신을 휘감는다. 『약속의 세대』에서 ‘약속의 8회’를 떠올리는 건 기시감일까. &nbsp; 이 소설집엔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약속의 세대’를 제목으로 하는 소설은 없다. 「사망 권세 이기셨네」에 ‘5분위 약속 세대’가 등장할 뿐이다. 소설 속 ‘5분위 약속 세대’는 “역전교가 세계의 주인이 되었을 때를 대비해 일찍부터 통치자 교육을 받은 집단”이다. 작가는 여기에서 제목을 가져왔고 일곱 편 모두에 ‘약속’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곱 편의 소설을 아우르는 ‘약속의 세대’가 뜻하는 건 무언가, 어느 세대를 말하는 건가.&nbsp; 작가의 말과 인터뷰에 모든 소설을 관통하는 것이 ‘약속’이라고 했다. “헌신하는 만큼 보상이 따를 거라는 기대, 인내하면 찬란한 미래가 당도할 것이라는 믿음”에 배반당한 “헐거운 약속이 지켜지기를 바라며 사는, 삶의 비애를 감내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그렸다고. &nbsp; ‘약속’, ‘약속의 세대’라니 뭔가에 너무나 매여 있는 느낌이다. 자신도 모르게 주어진 책임감을 끌어안고 있는 특정한 세대가 있는 건가. 소설집을 읽기 전 수록된 소설 중 「반의반의 반」을 읽었기에 약속의 세대를 ‘노인 세대’라고 생각했다. 이 사회에서 무언가를 약속하는, 그러니까 내가 받은 것과는 상관없이 무언가 끊임없이 ‘주어야 하는’ 세대. 무언가를 준다는 건 ‘가지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그것이 물질이든 마음이든 ‘줄 수밖에 없는’ 세대. 하지만 생각보다 노인들의 등장은 많지 않았고 난 완전히 반대로 생각했던 거였다. ‘약속의’ 의미를. 약속이란 상호적이기도 한 것 아닌가. 그러니 약속하는 사람이 있으면 약속을 받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약속‘하는’이 아닌 약속‘받는’ 것에 대한 것을. 그러니 이건, 약속의 8회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nbsp;「의탁과 위탁 사이」에는 병원에 입원한 할머니를 간병하는 이십대 손녀가 나온다. ‘엄마’는 자연스럽게 잠시만 할머니를 돌봐달라고 딸 ‘연수’에게 부탁하는데 연수는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길러졌기에 그에 대한 부채감과 더불어 이를 수락한다. 여기서 눈여겨봐지는 건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당연하게 ‘돌봄’의 주체가 되는 ‘엄마’가 열외에 있다는 것이다. ‘아이’ 돌봄도 ‘노인’ 돌봄도 엄마는 비껴가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손녀와 할머니를 중심으로 돌봄 과정에서의 감정이 이야기를 차지하지만 이 감정의 영역에서 ‘엄마’는 배제되지 않는다. 할머니는 병원 사람들에게 “오래전부터 친밀했고, 유독 살가웠고, 그만큼 각별했노라고” 손녀와의 관계를 이야기하지만, 그럴 리가. 손녀는 “할머니를 진정으로 측은해하지도, 가여워하지도 못했”고 그 이야기를 힘겹게 듣는다. ‘엄마’가 해야 할 역할이 ‘할머니’와 ‘연수’에게 각각 전이된 상황에서 연수는 자신을 돌봐 준 할머니에 대한 애정보다 엄마에 대한 적개심을 더 갖는다. 또한 일상의 모든 것을 챙겨 준 할머니보다도 가끔 물질적인 것을 주었던 할아버지를 더 따르기도 했다. 손녀에 대한 할머니의 애정은 약속받지 못하게 된 건가.&nbsp;「광일」을 보며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 떠올랐다. 인력거꾼 김첨지는 택시 운전사 광일로 재탄생했다. 게다가 ‘광일’을 단순 이름 풀이하면 빛나는 하루가 아닌가. 광일에게도 계속 택시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광일’에게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는-좋지 않은 쪽으로-예감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 아내에게 거듭 일찍 가겠노라고 약속하지만 “안락하고 평안한 우리의 미래를 위한 일”이라며 거듭 아내가 바라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광일이다. 택시기사로서 자신을 “신”으로 여기기까지 하는 광일이, 삶의 동반자인 아내를 “헤매지 않고 원하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도록 할 수 있을까.   &nbsp;  “이따금 신이 택시 기사의 모습을 빌려 사람들을 인도한다는 거예요. 인간은 자신이 신의 안내를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로 그 순간을 통과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그건 기적적인 일이죠. 헤매지 않고 원하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에요.” _「광일」  &nbsp;  &nbsp;「사망 권세 이기셨네」속 ‘미리’는 “삶에 위독한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그 근원을 나와 내 어머니로 지목하는 세주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럼에도 “작정하고 조목조목 반박하지 않고” 세주가 원하는대로 끌려다닌다. “종교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적”이 있기 때문일까. 역전교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럼에도, “치리(治理)하고 싶은” 마음에, “훌륭한 왕이자 좋은 백성이 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외면했던 것에 대한 반성일까. 어린 나이부터 역전교로부터 ‘배반’당한 위치는 같은데도 ‘미리’는 ‘세주’를 또다른 교주를 모시듯 종속되고 만다. 종교가 제시한 찬란한 미래가 파괴되고 세주가 미리를 착취하며 삶의 결핍과 좌절 속에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면, 미리는 세주를 끊어내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초연과는 다른 모습이다. “사망 권세”를 이기기라도 하고픈 심정인 건가. 사이비 종교에 대한 글을 읽으면 늘 드는 의문이다. 왜, 어떻게 계속 믿느냐. 열망뿐만이 아니라, ‘믿음의 배반’이 무서워 의문을 갖더라도 ‘회피’하는 거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 ‘미리’도 그런가. &nbsp; 믿음도 배반도 흔한 시대, 무엇을 믿는지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의 ‘진리’는 이제 하나가 되어 가는 것 같다. ‘내게 좋은 것, 이익되는 것’이 곧 ‘선’이라는. 사회가 외치는 ‘약속’이 함께 만들어가는 ‘약속’이 그 자체가 ‘문제’를 담고 있어서는 안될 거라는 생각을 한다. 또한, 명확한 대안없이 그저 주술처럼 외치는, 일단 질러버리는 ‘약속의 8회’도.   &nbsp;    &nbsp;  *https://v.daum.net/v/20260328130128275/&nbsp;https://v.daum.net/v/202604010432363900&nbsp; &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29/70/cover150/k73213718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297059</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한국문학</category><title>자유는 팍팍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젊음의 나라] - [젊음의 나라]</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67966</link><pubDate>Mon, 12 Oct 2026 16: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6796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72030204&TPaperId=1756796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844/29/coveroff/k87203020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72030204&TPaperId=1756796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젊음의 나라</a><br/>손원평 지음 / 다즐링 / 2025년 08월<br/></td></tr></table><br/><br>자유는 팍팍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br>젊음의 나라,&nbsp;손원평, 다즐링, 2025-08-08.&nbsp;  &nbsp;  &nbsp; “넌 늙어봤냐, 난 젊어 봤다.”&nbsp; 이런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노인들 영상은 드라마 속에서 꽤 경쾌하였건만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오래전이었는데, 가사도 풍경도 왜인지 서글프게 느껴졌다. 나이 듦, 늙음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인 건가. 늙음은 젊음을 대척점에 두고 얘기된다. ‘늙음’이 ‘늙음’으로 서기 위해선 젊음과 비교하여 그 가치가 정립되지 않아야 한다. &nbsp;『젊음의 나라』는 ‘늙음’을 전면에 드러냄으로써 ‘젊음’을 부각하고 있다. 청년인 ‘나(유나라)’의 일기에서 그려내는 ‘늙음’, 이 책을 지금 이 시대 젊은이가 바라보는 노인세대에 대한 인식으로 바라보아도 좋을까. 언뜻 보면 ‘청년’에게 닥친 문제는 모두 ‘늙음’으로 인한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늙음’의 문제를 해결하면 ‘젊음’에게 닥친 문제는 해소될 수 있는가.&nbsp; 이 책은 가상의 미래공간 “시카모어 섬”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섬은 “치열한 경쟁과 엄격한 심사를 통과한 35세 이하의 청년 60퍼센트와,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슈퍼 리치 시니어 30퍼센트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최고의 삶을 누리는 꿈의 섬”이다. 아니다. 유토피아 같은 이 섬에 살기 위하여 현실을 살아가는 29세의 ‘나’가 위치한 곳은 ‘유카시엘’이니 이곳이 진짜 배경이라고 해야 한다. 현실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nbsp; ‘나’가 보는 현 세계는 저출생 고령화시대로 노인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인간보다 로봇의 기능이 더 확대되는 사회다. 이민자들이 증가하고 혐오와 차별이 증가한다. 이런 사회에서 ‘나’는 자신보다 “더 젊고 어린 사람들에게 그리고 기계에게 밀려나고”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룸메이트인 이주 2세대 ‘엘리야’를 ‘사회적으로 공인된 약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약자가 강한 존재이자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더더욱 하루하루가 조바심나고 버겁다. 친밀감이 덜하고 인간관계도 좁은 ‘나’는 어린 시절 빛이었던 연락도 닿지 않는 ‘민아 이모’에 대한 그리움과 오직 ‘시카모어 섬’에 가고픈 열망으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리고 시카모어 섬에 가는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유카시엘 상담사로 일하게 된다.&nbsp; ‘나’가 일하는 유카시엘은 어떤 곳인가. 시카모어 섬과 업무 협약을 맺고 있는 국내 최대의 노인 복지 시설로 사회적 위치외 경제적인 상황(어쩌면 균질성)에 따라 유닛 A부터 F까지 다섯 곳으로 분류된다.  &nbsp;  여러 사람이 한 장소에 모였을 때 분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뭔지 알아? 바로 균질성이야.비슷해야 해. 모든 면에서 서로의 수준이 맞아야 갈등이 줄지. 최소한 경제적 조건과 사회적 위치라도 비등하면 분란의 여지가 적어.   &nbsp;  &nbsp; ‘나’는 좌천되어 자의반 타의반으로 유카시엘의 모든 유닛을 경험한다. 유닛 A인 ‘사파이어 레이크’에서 ‘선샤인 마운틴’, ‘뉴시티 필드’, ‘아리아드네 정원’, ‘프리 하우스’ 순으로 높은 단계에서 낮은 단계의 시설에서 일하게 되는데, 이는 곧 ‘사는 곳’에 따라 다른 노인들의 삶을 경험한다는 것이다.&nbsp; 유닛 A ‘사파이어 레이크’는 “여기 올 수만 있다면 자신이 가진 젊음을 늙음으로 바꾸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상상이 들 만큼 “모든 게 완벽”한 곳이다. 거주 노인들은 “사회의 중심을 이끌면서도 긴 세월 동안 재력을 유지한 사람들”로 그들은 “주류에 속해 있는 동시에 이 나이 되도록 가진 걸 잃지 않고 꼿꼿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남들 눈에는 세상 편해 보일지 몰라도 뼈를 깎는 노력”을 하고 있다. 반면 유닛 F는 ‘더 이상 갈 곳 없는 노인들을 마지막으로 맡아주는’ 곳으로 노인들은 숙식을 제공받기 위해 ’노동력을 제공‘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이들이 하는 일조차도 기계로 대체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결국 세상에서 가장 싼 건 사람”이기도 하다. &nbsp; 유닛 B ‘선샤인 마운틴’의 거주 노인들을 상담할 때 나이가 들어 습진 때문에 손끝이 자꾸 갈라지는 것이 불편함이라고 얘기한다. ‘나’는 “삶의 끝자락에 다다라 마음에 품은 고민이 손끝의 습진 정도라면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생각한다. 유닛 C ‘뉴시티 필드’에선 꿈을 꾸기도 하며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제자리인 노인, ‘선 넘지 않고 함부로 꿈꾸지 않은’ 채 살아온 노인, ‘자기연민’ 가득한 삶을 보며 “어제의 행복이 비참함과 불행으로 전환되는 오늘이 진저리나게 서글프다”고 느낀다. 유닛 F의 전단계인 유닛 D ‘아리아드네 정원’의 노인들은 “대체로 조용하고 경직된 인상을 풍겼”는데 벌점을 받으면 퇴출되는 유니시엘 시스템에서 아무도 유닛 F에 가길 원하지 않으므로 벌어진 풍경이다. ’나‘는 “강한 법규 아래에서 인간이 얼마나 고분고분해질 수 있는지를 확인”하며 씁쓸함을 느낀다. &nbsp; 각 유닛을 거칠 때마다 ‘나’는 거주 노인과 상담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또한 그때마다 엘리야와 자신의 ‘노인’에 대한 시선과 삶에 대한 생각을 기록한다. 요양병원 간호사인 엘리야는 ‘노인 세대’에 대한 반감과 혐오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사회의 변화를 위해 유닛을 철폐하고 청년을 위한 복지를 늘려야 한다는 ‘급진파’에 속한 엘리야는 ‘나’에게 집회에 참가할 것을 권유한다. 노인들은 소비도 생산도 하지 않아 “뭔가가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 전반을 삐거덕거리게 하고 느리게 만드는 존재들”, “사회와 경제가 굴러가는 데 하등 보탬이 되지 않는. 그냥 시스템의 얼룩 같은” 존재라고. 그렇기에 “적어도 새로운 소비 주체, 미래의 납세 주체를 만들어 낸, 최소한 젊었을 때 아이라도 한 명 낳은 사람이 더 당당”한 거라며 ”평생 자기의 개인적인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개, 고양이만 키우다 늙어버린 사람의 노후“를&nbsp;지탱해줘야 하는 것에 불만을 갖는다. ‘나’는 ”차별이란 단어를 무기로 써서 속을 거리낌없이 표현할 수 있는“ 이민자 엘리야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가지면서도 ”노인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있다“고, ”나이가 들어서까지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젊은이들의 막대한 세금을 빨아먹고 있다“고 생각하며 방관자에서 벗어나 집회에 참여한다. &nbsp; 더불어 여러 유닛을 거치면서 ’나‘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죽음만큼은 모두에게 공평한 것일지 모르나 “죽음의 형태는 그 사람의 계급을 드러낸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유니시엘에서 그것을 명확히 확인하게 된다. 존엄한 죽음에 이르는 방법 또한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선전하지만 사실은 재력이 넘치는 유닛 A나 B의 시니어들에게만 제공되는 서비스”였으니까. “자유는 팍팍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고 했는데 재력이 없는 유닛 F의 이름은 ’프리 하우스‘이다. 무엇이 프리한 걸까.&nbsp; 이 소설은 ’나‘를 비롯한 청년세대, 젊은이가 고령화시대에 느끼는 늙은이, 노인세대에 대한 인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소설에서 ‘나’가 바라는 것이 한가지 있다. 시카모어 섬을 만든 카밀리아 레드너가 ‘나’가 아는 ‘민아 이모’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녀를 다시 만나고픈 순수한 열망, 그리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금수저’이고픈, ‘권(재)력에 연을 만들고픈’ 염원으로 생각될 수 있다. 이것이 혐오와 자기연민과 더불어 청년들의 꿈꾸는 세계인가. 소설에선 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진 않는데 청년세대의 언어는 지극히 공격적이고 극단적이다. 엘리야를 비롯해 유카시엘 고액 연봉자 선택사 담당 의사 재희, 남북 개방 후 북에서 내려온 브로커 수현까지 정형화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청년과 노인에 대한 갈등과 대비를 너무 작위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요즈음 현실이 그렇긴 하다. 극단적인 혐오의 표현을 더 쓰지 못해 안달이지 않은가. &nbsp; 이러한 현실에서 보다 발전적인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유카시엘 유닛을 거치면서 어떤 인식을 가지게 되었는가. ‘나’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사회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그것이 이 소설의 핵심적인 화두일 것이다. 그에 대한 답은 시카모어 섬의 면접장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소설은 ‘나’의 일기를 통해서 이 모든 사회의 모습과 ‘나’의 생각과 행동 ‘내면’을 속속들이 기록한다. “지금보다 상황이 나아져 있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일기를 끄적”인 ’나‘는 ’사카모어 섬‘에 갈 수 있는가. ’민아 이모‘는 만났는가. ’민아 이모‘는 사카모어 섬의 창시자가 맞는가. 설렘을 주었던 의사 재희와는 어떻게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 ’나‘가 선택한 결정에 만족하는가. 유토피아가 만들어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nbsp; 물론 “시카모어 섬”이 유토피아인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좀더 고급버전의 유카시엘 아닌가 싶은데, 가보지 않아서 뭐라 말할 수는 없다. 유카시엘 유닛별로 나타나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삶과 죽음의 형태에 대해 생각해본다. 한편으론 ’나‘가 유닛 A에서 유닛 F의 노인들을 만나는 과정이 아니라 유닛 F에서 유닛 A의 노인들을 만나는 과정이었다면 ’나‘, ’유나라‘의 인식은 어떠한 형태가 되었을지 궁금해진다.   &nbsp;    &nbsp;  손원평, 노인, 청년, 세대, 갈등, 혐오, 차별, 젊음, 늙음, 고령화, 일기, 기록, 죽음, 존엄]]></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844/29/cover150/k87203020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8442913</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세계문학</category><title>춤추는 슬픈 감정[남편의 아름다움] - [남편의 아름다움 - 스물아홉 번의 탱고로 쓴 허구의 에세이]</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65053</link><pubDate>Sat, 10 Oct 2026 23:4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6505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02035478&TPaperId=1756505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324/16/coveroff/k202035478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02035478&TPaperId=1756505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남편의 아름다움 - 스물아홉 번의 탱고로 쓴 허구의 에세이</a><br/>앤 카슨 지음, 민승남 옮김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br/></td></tr></table><br/><br>춤추는 슬픈 감정<br>남편의 아름다움 - 스물아홉 번의 탱고로 쓴 허구의 에세이 앤 카슨, 민승남 (옮긴이), 한겨레출판  &nbsp;  <br>  &nbsp;&nbsp;&nbsp;앤 카슨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읽은 책과 아직 읽어 보지 못한 책을 찾아보니&nbsp;앤 카슨의 책을 처음 읽었던 때보다 더 많은 책이 번역되어 있었다. 고작 두 작품을 읽고도 아는 이를 만난 것처럼 반가운데 새로운 책들이 나올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나 싶다. 새롭게 이 책을 훑어보다가&nbsp;예전에 이 책을 읽고 제법 ‘분노’에 차 있었구나란 생각에 웃음이 났다. 다시 보면서도 역시 '남편'을 똑같은 인물로 떠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분노를 잠재우고자 그깟 (남편의) ‘아름다움’보다 ‘탱고’에 더 빠졌었던 것을. 세월이 흘렀는데도&nbsp;안타깝게도 다시 한번 훑어보며 여전히 같은 감정이 솟기도 하고, 달리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리뷰를 쓰고 나서야 예전에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썼음을 알게 되었다. 세월은 내게 동일한 감정을 유지시키기도 하지만 이렇게 기억에 장애를 주기도 하다니......&nbsp; 앤 카슨은 존 키츠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이 글을 썼다. 단순한 영감이 아니라 이 책 29장마다 존 키츠의 시와 메모, 편지 등에서 인용한 글을 담아 헌정하고 있다. 난 ‘존 키츠’나 ‘T.S 엘리엇’보다도 ‘실비아 플라스’가 생각났고 책을 덮는 마지막까지 ‘남편’은 ‘실비아 플라스의 남편’으로 치환되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리스 항아리보다도, 그리스 항아리에 새겨진 그림보다도 더 아름다운지 정말 모르겠는 ‘남편’인지라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고, 아름다움 앞에 ‘남편’이 붙는 것조차도 탐탁지 않았다. 앤 카슨처럼 뭐, ‘아름다움 때문에 그를 사랑했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br>    그 무엇에도 충실하지 못했던  내 남편. 그럼 나는 왜 소녀 시절부터 우편으로 이혼 판결을   받은 중년의 나이까지  그를 사랑했느냐고?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그건 비밀이랄 것도 없다. 나는 아름다움 때문에 그를 사랑했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  &nbsp;  &nbsp; 하지만, 앤 카슨이 “그가 가까이 온다면/다시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아름다움은 확신을 준다.”라고 이어서 쓴다면 그건 다르다.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때는 부끄러울 것이다! 내게 아름다움이란 그렇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울 때 아름답다고 하는 거라고.&nbsp; ‘아내’가 열다섯 소녀 시절부터 오랜 시간 사랑한 ‘남편’은 “그 무엇에도 충실하지 못했고”, “정부가 있다고 말하며 수줍으면서도 자랑스럽게 사진 한 장을 내밀“정도였으며 ”스스로 생각을 시작하는 건 싫어“하여 정부에게 보내는 글에도 아내의 글을 제 것인 양 사용하였으며, ”모든 것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이런 남편. 아니, 이런 정도의 성정과 행태를 보이는 사람을 두고 ‘아름답다’는 표현은 맞지 않을 테니, ”아름다움“은 필시 외형적인 형태에 대한 것일 게다. ‘외형에 대한’ 기준도 결국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말로 ‘절대적 아름다움’이어야 할 테다. 누구라도 믿어 의심치 못할. 저러한 행태를 보이는 남편이라면 더더욱 그래야하지 않는가.   &nbsp;    나는 많은 아내들처럼 남편을 신의 위치까지 끌어올리고 거기에 붙들어 두었다.  힘이란 어떤 것인가?  친구들이나 가족의 반대는 그걸 더 강하게 할 뿐이다.  &nbsp;  &nbsp;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남편을 신의 위치로 끌어올리고 거기에 붙들어 두었“다는데. 이젠 달릴 수밖에 없다. 남편은, 남편이, 남편을, 아, 아름다움이라니. &nbsp; ‘아내’는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결혼했고 결혼한 지 1년 남짓한 때 남편에게서 직접 외도 고백을 듣는다. 다행히 사랑하고 결혼하고 배신을 겪은 뒤 ‘별거’도 ‘이혼’도 한다. 다만, 여전히 남편의 아름다움을 추종한다. 아니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 맞는가. 남편은 끊임없이 아내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필요를 얘기하고 감정적 반응을 바란다. 아내는 여전히 남편의 ‘아름다움’ 때문에 헷갈린다. 이토록 절절한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이라니! 아니, 외도한 남편으로 인해 겪은 그 마음들을 단지 욕설과 분노로서가 아니라, 우아하게 비틀어 표출할 수 있는 아내의 아름다움이라니!&nbsp; 존 키츠는 ”아름다움이 진리“라고 했다. 아름다움이 인간 구원이라고 했다. 존 키츠의 후예인 것 같은 아내라면 ‘아름다움’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아름다움이 외형이 맞는가. 아름다움이 도덕적인 비난을 줄줄이 발사하게 만드는 그 순간마다 속속들이 있는가. ‘탱고’는 겉으로는 화려하게 보이는 춤이지만 ”춤추는 슬픈 감정*“이라 불린다. 이민자들의 애환-고독과 상실, 향수, 사랑의 아픔 등이 깊게 담겨 있다. 이 슬픔 감정을 파트너와 함께 표출한다. 수많은 감정을 상대와 함께 호흡하며 맞추어가는 춤. 이 춤을 통해 위로받고 치유될 수 있다면 탱고야말로 구원이다. 아름다움이란 결코 외형적인 것만이어서는 안된다. 모든 상실과 고통을 격렬한 탱고로 춰버리고 나면, 마침내 찾아오는 치유의 순간에 머뭇거림도 사라지고 ‘신의 위치’ 또한 바뀌어 가려졌던 인식도 뚜렷해지지 않을까.  &nbsp;     모든 신화는 풍부해진 형태이자,   두 얼굴을 지닌 것으로,   그 주체로 하여금 겉과 속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이중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이유로 고대에는 모든 시인이 거짓말쟁이라는 관념이 존재했다.  &nbsp;  &nbsp; ‘아내’와 ‘남편’이란 관계에서 대놓고 무식하게 폭력적인 사람보다도 더 끔찍하고 역겨운 사람은 고급 언어를 휘두르며 우아하고 고매한 ‘척’하며 ‘선’을 넘는 사람이다. 거짓과 교묘한 언어로 사람을 휘두르려는 자, 자기 통제 속에 사람을 가두려는 자다. 정말로 자신이 ‘신’인 것처럼 구는 그런 인간.   &nbsp; 남편은 ‘신들의 방식이라고 부르는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했다’ 전혀 다른 의미로, 마음대로 의미를 바꾸어. 모든 것에 대해 거짓말하는 존재. 비로소 아내가 남편을 직시하며 깨닫고야 마는 것은 ”남편“과 ”아름다움“을 동일시, 절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은 아름다움의 일부임을 깨닫는 것이다. 또한 도덕적이지 않고 여러 가지로 모순과 거짓과 문제가 많은 남편이 아름다웠다고 한 것처럼 아름다움이 곧 선함, 도덕성과도 일치하지 않음도. ”삶에는 몇 가지 위험들이 있고 사랑은 그중 하나이며 끔찍한 위험들.“이지만, 그럼에도 아내는 ”아름다움을 붙잡아라“라고 외친다. 남편을 사랑했던 순간도 삶의 일부이며 생, 그 모든 순간 그건 결국 ‘아내의 아름다움’이었다고 생각한다.  &nbsp;      나는 한 가지를 간과했다.    아름다움을 접하게 되면 그것이 우선하게 될    것임을―내 심장 속에서,    이미 먹혀버린,    목적의식과 신전들과 신이 있는 바깥이 아니라.  &nbsp;      안에서. 그곳에서 그는 이미 나였다.    나의 상태였다.  &nbsp;  &nbsp; 내가 간과한 것은 이 책 속 그렇게 길게 등장하지 않는 '레이', '돌로르', '메르세드'는 이름이 있음에도&nbsp;‘아내’와 ‘남편’은&nbsp;&nbsp;이름이 명명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특정한 누군가를 떠올리며 분노한 것이다. ‘특정인’에 매몰되어 인식할 때 나의 한계는 분명했다. 특정인에 대한 '분노'와 '비난'만이 합당한 것처럼 여기며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내가 이름붙인 '등장인물'의 이름을 지우고 ‘아내’와 ‘남편’으로 인식할 때, 언어는 보다 풍부해지고 세계 또한 확장된다.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에 대한 인식도 그것을 '진리'로 인식하는 마음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삶은, 스물아홉번의 탱고만으로는 부족할 얘기가 넘치기야 하지만 오로지 단순한 분노의 폭발이 아닌 '춤추는 슬픔 감정'을 출 때, 아름다움을 붙잡을 수 있을 것 같다.<br><br>*https://v.daum.net/v/20080530095512483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324/16/cover150/k202035478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3241663</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세계문학</category><title>남자니까[﻿남극] - [남극]</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45860</link><pubDate>Wed, 30 Sep 2026 14:5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4586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52034089&TPaperId=1754586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079/65/coveroff/k75203408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52034089&TPaperId=1754586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남극</a><br/>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2월<br/></td></tr></table><br/>남자니까<br>남극 Antarctica.&nbsp;클레어 키건 (지은이), 허진 (옮긴이), 다산책방, 2025-12-17.  &nbsp;  <br>  &nbsp;&nbsp;이 작품이 클레어 키건의 첫 작품이라고 한다. 출판사가 출간해 주는 순서대로 읽다보니 작가의 데뷔작을 가장 마지막에 읽게 된다. 클레어 키건의 대표작 『이처럼 사소한 것들』, 『맡겨진 소녀』에서 느낀 느낌을 안고 책을 펼치면, 움찔한다. &nbsp; &nbsp;‘아일랜드’는 가본 적 없는 곳이지만 국가명만으로도 사람을 생각에 잠기게 한다. 건조하며 서늘하지만 매섭진 않은, 묘하게 아득한. 또한 가본 적 없는 ‘남극’은 극한의 추위 속에서도 ‘펭귄’ 하나가 대표적으로 떠올라 갑자기 동화같은 상상 속에 빠지게 된다. 그렇기에 ‘남극’을 사실주의 그림이 아니라 동화같은 판타지 세상으로 이미지화하여 책을 읽는 순간, 전례없는 폭풍을 경험한 듯 매서운 추위를 느낀다. &nbsp; 『남극』을 관통하는 단어는 아마도 ‘남자’가 아닐까. 다른 말로 하면 ‘남자’로 대변되는 폭력과 억압의 세계, 그에 동조하여 무력하거나 피폐해지는 여성들의 이야기. 이렇게만 적어놓고 보면 페미니즘 문학이다, 익숙하게 보아 온 서사다, 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아니다! 클레어 키건이 다루는 이 이야기는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도 그 내용도 다르다. 클레어 키건  특유의 건조한 문체가 덧대어져 감정적으로 휩쓸리지 않는데, 감정은 극에 달한다.   &nbsp;  그녀가 어렸을 때 수녀님이 지옥이란 사람마다 다르다고, 각자가 생각하는 최악의 장소라고 했었다. “난 지옥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추운 곳이라고 늘 생각했어요. 반쯤 얼어 있지만 절대 의식을 잃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차가운 태양과 당신을 지켜보는 악마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면 나의 지옥은 황폐한 곳이겠네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 말이에요.” 남자가 말했다. “악마도 없고. 지옥에 사람이 바글바글할 줄 알고 늘 마음 놓고 있었는데. 친구들이 전부 거기 있을 테니까요.”_「남극」  &nbsp;  &nbsp; 「남극」의 강렬함은 표제작이라 첫 페이지에 배치되어 모든 감각을 마비시킨다. 그러니까 지금 ‘지옥’에 ‘영원’히 갇혀버린 여자를 본다. ‘남자’가 만든. 그러나 생각할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것,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던 여자”에 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서다. “행복”한데 왜 여자는 “멀리 나갈 때마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하는지, 그건 무료함일까. 어떤 결핍이 있다면 그걸 “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행복한 결혼 생활”에 갇혀 생각이 너무 빙빙 도느라, 뛰어넘어보기로 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던 여자”의 일탈에 대한 의외성을. 극히 미미하게 묘사된 그 일상의 모습을 “행복한”이라 할 수 있는지를.&nbsp; 어떤 일탈은 극단적인 상황을 초래한다. ‘남극’에 대한 동경인 걸까. ‘남극’을 동경할 수는 있다. 가보지 않았던 곳, 그곳의 실체를 알 수 없으니. 그러나 남극은 지구에서 가장 추운 곳, 단지 춥다는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곳이다. 자연의 극한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아, 이렇게 생각하니 왜 남극이라 제목을 지었는지 알 듯하다. 너무나 행복한 일상과 대비되는 남극의 풍경이.&nbsp;「남극」속에서 주요한 것은 위의 인용문에서 보는 것처럼 남자와 여자의 ‘지옥’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던 여자”로 본다면 자칫 여성이 이 ‘남극’에 있게 됨을 ‘불륜으로 인한’ 것으로 생각할 여지가 있다. 종교에서 간통한 여성에게 행하는 ‘마땅한’ 형벌로 ‘여성의 욕망’에 대한 형벌이라는 당연성으로 귀결될 수 있음이다. 불륜이 문제라고 한들 ‘여성의 욕망’은 어째서 ‘남성의 폭력과 통제’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인가. 여성이 자유롭고 탐험으로서의 성적 욕망을 희망한다고 할 때, 남성은 늘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대상, 소유와 통제의 대상으로 여성을 위치시킨다. 결국 두 동등한 성적 욕망이 맞닥뜨렸지만, 여성은 자신의 몸과 정신의 주체성을 남성에게 폭력적으로 빼앗기는 존재가 될 뿐이다. 영원한 지옥에 갇힌, 남성이 만든 ‘남극’의 세계 속으로.&nbsp; 그래, 어쨌든 「남극」을 성적 욕망으로 행복한 가정생활을 일탈한 여자가 당한 비극이라 치다. 그러면, 성적 욕망을 바라지도 않았던 그 많은 여성들은 ‘행복한 가정’ 생활을 누리지 못하고 폭력과 억압 속에 휘둘리는가. 소설 속 여성들, 삶은 왜 이다지도 힘든가. 그 ‘힘듦’을 준 것이 남성들이라는 점, 남성들의 세계라는 것을 키건은 잘 보여준다. 아, 결국 「남극」속 여자는 “포기해놓고 그것을 행복이라고 불렀던“ 건가.  &nbsp;  방에서 친척 여자들이 차를 들고 내 주변으로 모여든다. 찬장 깊숙이에서 꺼낸 도자기 잔과 잔받침이 쟁반에서 쨍그랑거린다. 트위드 차림의 뼈대가 굵은 여자들로, 나에게 옳고 그름과 예의범절을, 또 힘든 노동의 가치를 가르쳤다고 생각한다. 포기해놓고 그것을 행복이라고 부르는, 배가 납작하고 변덕스러운 여자들. 우리는 남자를 위로하는 여자와 절대 거절하지 않는 남자의 후손이다._「남자애한테는 이상한 이름」  &nbsp;  &nbsp; 소설 속 아일랜드, 교외의 가정들은 한국을 닮았다. 이렇게 먼 이국의 가족풍경이 한국과 닮았다니. 그 속엔 아이를 책임지려 하지 않는 남자가 있고, 자식에게 무관심하며 차별하는 남자가 있고, 아이와 아내를 여자를 두들겨 패는 남자가 있고, 불륜을 일삼는 남자가 있고, 강간하는 남자가 있고, 일하지 않는 남자가 있다. 그들은 왜 그럴까. ”남자니까.“ 그래도 된다고 누가 부여한 것인마냥. 이 사회에서 언제나 그 하나면 족하다. ”남자니까.‘  &nbsp;  아빠가 다트판을 직접 건 다음 다트를 던지고 분필로 점수를 적는 동안 엄마와 나는 모자 달린 방한 재킷을 입고 돼지와 소와 양에게 먹이를 주고 암탉을 밖으로 내보낸다.“왜 아빠랑 오빠는 아무것도 안 해요?” 내가 엄마에게 묻는다. 나는 따뜻한 짚 안으로 손을 넣어 더듬더듬 달걀을 찾는다. (…)“남자니까.” 엄마는 이 한마디면 전부 다 설명된다는 듯이 말한다._「남자와 여자」  &nbsp;  &nbsp; 남자니까, 남자라서 그저 절대적인 권력과 폭력을 휘두르며 다른 이들을 그 권력에 순응하도록 하고 서로를 싸우게 만든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아버지의 손이 어떻게 15년 동안 어머니를 멍들게 했는지” 말해주면서 “똑같이 잔인한 눈을 가졌기 때문에 나도 아버지만큼 싫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남자가 아닌 이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마는데 계속 이 ’위험하고 찌질한‘ 남자들로 인해 ’행복을 포기하고 말 것이냐‘는 생존과도 직결된다. 되물림되는 폭력과 그로 인한 고통과 상처는,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적어도 “욕망”도 감추고 순응하고 “포기해놓고 그것을 행복이라 부르는” 일은 없어야 한다.  &nbsp;  나는 너에게 위안을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남자를 아이처럼 보살피는 여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여자는 내 세대에서 끝이다. _「남자애한테는 이상한 이름」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079/65/cover150/k75203408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0796507</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에세이</category><title>고랑이랑[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 - [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45855</link><pubDate>Wed, 30 Sep 2026 14:5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4585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32137988&TPaperId=1754585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05/48/coveroff/k532137988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32137988&TPaperId=1754585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a><br/>이랑 지음 / 이야기장수 / 2026년 03월<br/></td></tr></table><br/>고랑이랑<br>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nbsp;이랑, 이야기장수, 2026-03-12.  &nbsp;  &nbsp;&nbsp; 내가 아는 이랑은 고랑과 짝을 이루는 단어가 전부다. 아니다. ‘누구’와 혹은 ‘무엇’과 ‘함께’를 나타낼 때의 이랑도 안다. 고랑과 함께 쓰일 때, 이랑은 뜻이 분명해지고 은유도 폭발한다. 그래서인지 이랑에는 필연적으로 고랑이 따라붙는 듯하다. 고랑과 함께하는 이랑. 삶의 정점과 하강이 공존하는.&nbsp; 그리고 이제, 이랑이 예술가의 본명이라는 것을 안다. 예술가에게 ‘미친’이란 수식어는 최고의 찬사가 아닌가. “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일 때, 딸 하나는, 이랑의 언니는, 이슬은, 미친년이 되지 못해서 “미래를 더이상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이슬’의 이야기가 각인되어 ‘이슬’을 애도한다. 미친년이 되어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 제목을 보고 미친 듯이 이 책을 읽고 싶었다. 나름 머릿속에 상상되는 이야기의 내용과 흐름이 있었다.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다르게 흘러갔다. 엄마와 딸들과 고양이의 역사로 흘러가는 중에 ‘이슬’이 계속 맺힌다.  저자인 이랑은 언니 ‘이슬’이 소진사消盡死하였다고 했다.   &nbsp;  우리가 가진 가족은 너무 허약했고 결핍투성이였다. 언니는 그들에게 힘을 보태느라 자기 힘을 다 소진해버렸다. 나는 언니의 죽음이 ‘자살’이라기보다 힘이 다 빠져 죽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죽음은 뭐라고 부를까. 소진사消盡死? 가끔 그렇게 가진 힘을 다 소진하고 죽는 사람들의 소식을 듣는다. 평생 남을 위해 살던 사람들.  &nbsp;  &nbsp; 38세의 이슬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일상을 잘 버텨오다 갑자기 “저승에 갔다. 이승을 떠났다. 하늘에 갔다. 사망했다.” 가정폭력 피해생존자 동지로서 사랑한다고 말하던 언니는 “죽음을 선택하고 죽음을 실행했다.”&nbsp; 동생 이랑은 언니가 ‘장녀병’이었다고 질타했는데, 그 병에 걸린 언니가 안타까웠다. 언니를 둘러싼 그 환경(이랑의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미쳤고, 아빠는 쌍놈이고, 할매들도 다 정신병자고, 친척들은 사기꾼이니.”, 게다가 남동생은 장애인이다.)을 떠나 조금 편안해졌기를 바랄 수밖에. 되물림되는 불치병인 장녀병을 치료할 약은 없는 건가. 이기적이고 천재적인 동생에게 “너만 너 하고 싶은 대로 한다”며 비난했지만 점점 “너라도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라”하던 언니 이슬의 변화된 말들이 미래를 암시하는 말이었을까. 비공개로 차곡차곡 쌓아 둔 이슬의 몇 개 되지 않은 기록이, 편지가 그 담담한 편지가 이랑의 노랫말보다 더 가슴을 치고 들어왔다. 그런 것쯤 제쳐두고 좀더 미쳐버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제 능력을 소원을 가두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는 건, 얼마나 아픈 일인가.&nbsp; 이랑의 엄마 김경형은 힘겹고 아픈 삶을 어떡하든 혼자 헤쳐나가려 노력했지만 어찌보면 실패했다. 가족과 친척 사이에서 ‘미친년’이 되어버린 엄마는 사는 동안 고통과 아픔과 답답함과 울분을 산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해소하고자 했다. 하지만 산에서 심각한 ‘폭력’을 당한 후 더 이상 산엔 갈 수 없었고, 이후 장롱 속 이불 속에 머리를 박고서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대신했다. 나는 이랑 엄마의 이 모습이 너무 처절하게 느껴졌는데, 더불어 가스오븐에 머리를 박고 자살한 실비아 플라스가 생각 나, 더더욱 가슴이 답답했다.   &nbsp;  가부장제와 남아선호사상에 물든 대가족 집안에서 태어난 우리 엄마 김경형의 ‘미친년 인생’은 엄마 탓이 아니다. 엄마 탓은 아니지만 엄마가 미친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잔혹한 굴레 속에서 나 또한 미친년으로 자라났다. 그나마 나는 내 이야기를 세상에 꺼낼 수 있는 미친년이라 다행이다. 하지만 나뿐 아니라 엄마의 미친년 역사도 무척 소중하기에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다.  &nbsp;  &nbsp; 이랑이 정의하듯 ‘미친년’의 역사는 되물림되었다. 이랑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미친년이 되었고 그리하여 언니도 그러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동생 이랑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건 언니 이슬도 춤을 추었다는 것이다. 방송댄스, 라틴댄스 등을 비롯해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즉흥 춤”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제대로 미칠 수 있을 정도의 것은 아니었고 그것과는 별개로 온전히 떠안고 있는 가족에 대한 경제적인 어려움과 힘겨움을 상쇄하기에는 부족했나보다 싶었다. 그것만으로는 이슬이라는 한 인간이 보다 편안하고 자유로울 수 없었노라고.&nbsp; 이젠 남은 자가 있다. 떠난 자를 그리워하며 아파하며 떠난 자가 남겨둔 것을 고스란히 옆에 두고 있는. 이랑의 가족사를 들으며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성장해 온 나날을 보며 이랑에게 하루하루 “끝없는 혼잣말”이 얼마나 필요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가사를 쓰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연극을 하고 이 모든 행위가 일찌감치 가족 내에서 불거진 상처와 슬픔을 다독이는 것이라면 여전히 이랑 작가는 계속 써야만 할 것이고 몸의 행위를 지속해야 할 것이다. 사랑이라 말하지만 가장 근원적인 고통과 슬픔, 아픔을 남겨준 가족, 그리고 그 가족을 고통 쪽으로 더 가깝게 만드는 고루하고 폭력적인 관습들로 누군가는 폭발적으로 감정을 드러내고 누군가는 감정을 거세한다. 세상에 이토록 내밀한 가족사를 털어놓지 않더라도 온전한 감정을 느낄 수 있기 위해선 이랑처럼 ‘미친년’이 될 필요는 있다. 누르고 있는 기억과 감정을 끄집어 온기를 찾아가는 여정, 특히나 이 땅의 ‘미친년들’에게는 더욱 그것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랑의 이 책은 위로와 함께 용기를 북돋우는 책이다.   &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05/48/cover150/k532137988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054879</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한국문학</category><title>여우야, ‘인간’이란 그런단다[너의 나쁜 무리] - [너의 나쁜 무리]</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22020</link><pubDate>Thu, 17 Sep 2026 15:3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2202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137509&TPaperId=1752202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83/21/coveroff/k852137509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137509&TPaperId=1752202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너의 나쁜 무리</a><br/>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4월<br/></td></tr></table><br/><br>여우야, ‘인간’이란 그런단다<br>너의 나쁜 무리,&nbsp;&nbsp;예소연, 한겨레출판, 2026-04-04.  &nbsp;  <br>&nbsp; 요즘 아니 그보다는 좀 더, 쪼~금 더 된 어느 때부터 “나쁜 무리”가 많음을 느낀다. 그들은 매일매일 매시간, 이렇게 확인하고 외치고 있는 건 아닐까. “이제부터 우리는 한패야”  이러한 ‘나쁜 무리’들이 내 삶을 망가뜨리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나쁜 무리’들의 움직임은 언제나 유치하게 기민하다. ‘나의 무리’가 아닌 ‘너의 무리’, 나는 ‘너’를 알지만 나는 그들과 ‘한패’가 되지 않으려 한다.&nbsp; “정말이지, 서로가 서로에게 길이 들었군요.” _「작은 벌」&nbsp; 아, 생텍쥐페리 「어린왕자」속 ‘길들이다’는 단어가 이토록 불온하게 들리는 상황이라니. 여우야, ‘인간’이란 그런단다.   &nbsp;  &nbsp;《너의 나쁜 무리》는 일곱 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읽었을 땐 불온하게 봤다. 뭐 이렇게 하나같이 나빠. ‘뭐지!’ 했는데 시간이 흐르고 나서는 그 감정이 많이 소멸되어 ‘뭐지?’.  〈작은 벌〉은 탈주극이다. 죽음을 앞둔 환자와 보호자가 사설 구급차 운전원 ‘이중일’에게서 구급차를 빼앗는 상황을 보여준다. 어떡하든 이중일을 속이고 구슬려 구급차를 탈취하려는 이들과 어리버리하게 휩쓸리는 이중일의 모습엔 살고자 하는 자와 살기 싫은 자의 대비가 뚜렷하다. 구급대원으로 타인의 삶, “환자들의 삶에 관여하는 것이 죽도록 싫었던” 이중일은 그럼으로써 ‘평화’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제 그에게는 ‘평화’가 올까? 그렇다면 제목은 왜, 「작은 벌」일까.  &nbsp;  그들은 결코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이중일은 속으로 그 문장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거짓말같이 그들은 선한 사람들이며 자신에게 결코 해를 끼치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nbsp;  &nbsp;「추운 뺨에 더운 손」은 관계 ‘맺음’이 아니라 이미 관계인 사이의 ‘끊을 수 없음’에 대한 이야기다. 추운 뺨에 더운 손은 한 명의 상태일까, 두 명의 상태일까. 추운 뻠에 갖다대는 더운 손이 타인의 것이라면, 일단 두 사람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만은 않은 듯하다. 그것이 허용되는 관계인 것이니, 이미 이뤄진 관계에서 그 상황을 호의, 선의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아니면 거부하고 싶은가가 중요하다.  &nbsp;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함께 볼 수 있는 게 마임이야. 내가 그것을 보고 있다는 믿음을 통해서.   &nbsp;  &nbsp; ‘선의’를 쉬이 파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얼마나 쉬울까. 하지만 ‘선이’에게 ‘선의’를 파악하는 건 쉽지 않다. 이미, 선의로 해석될 수 없기에.&nbsp; ‘선이’의 엄마는 다른 사람의 돈과 물건을 훔친다. 이런 엄마라서 부끄러운 ‘선이’는 엄마와 분리되고 싶다. 그러나 ‘엄마’라는 이 관계가 완전히 타인이 될 수 있는 존재일 수 없다. 더구나 어린 ‘선이’에게는 더욱. 그렇기에 선이는 “나로 살고 싶고”, 나로 살고 있는 이들을 미워한다. 엄마에게 짓눌린 어린 ‘선이’가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방법은 있는가. 이해는 해야 하는 건가. ‘선이’에게 새로운 시각을 던져주는 인물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 친구 ‘기문’이다. 선이는 ‘기문’이 그 옛날 자신의 엄마가 훔쳤을 ‘기문’엄마의 금두꺼비를 달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건 그들의 관계도 더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불안을 주는 부분이기도 하니까. 여기에 ‘기문’은 ‘마임’ 이야기를 한다. ‘기문’의 마임 철학을 통해 ‘선이’는 ‘선의’를 볼 수 있을까.    표제작과 같은 「너의 나쁜 무리」속 이 ‘무리’들을 뭐라 불러야 좋을까. “쉽게 오염되거나 잃어버리기 쉬운 물건은 아예 들이지조차 말라”고 했던 여사, “여사와 우리가 되기 위해 애썼던” 유선. 버림받는 것에 두려움을 갖는 둘은 동일한 사람에게 버려진 사이다. ‘여사처럼 살 거다’라 외치지만 ‘너도 떠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여사를 위해 기꺼이 버림을 선택한 유선이다. 정말 진심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인 건가. 「너의 나쁜 무리」속 전개는 점점 점입가경이 되는데, 궁금해진다. 이들의 행동이 ‘연대’라 할 수 있나. ‘유대’라 할 수 있나. 어떤 의미로 서로의 비밀을 움켜쥔 사이에서 무척 강한 연대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부정적일수록 접착력을 더 강화하며 쉬이 물드는. 나쁘지 않은 것, 맞나?  &nbsp;  나는 여사처럼 살 거다. 아주 많은 사람에게 마음 주고 몸 주고 절절매며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갈 테다. 그러다 진심으로 그런 생각도 했다. 나쁘지 않은데……? <br> &nbsp;「아무 사이」. 아무 사이는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사이를 말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사이를 말하는 걸까. &nbsp; 시터 일을 하는 ‘희지’는 이 일에 의미를 둔다. 이전일을 하면서 쌓인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변화된 것이다. 그러니까 할머니들을 돌보며 이들에게 자신이 필요한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희지’는 성심성의껏 노인들을 돌보고 애정을 쏟는다. 그런데, “아무 사이”라니. 여기 “아무 사이”는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 전혀 관계맺음이 필요없는 사이, 이미 맺어진 그 어떤 관계에도 불구하고 ‘엮이고 싶지 않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러니까, ‘희지’를 이른바 ‘고용’하고 있다 여기는 보호자가 ‘희지’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심지어 희지의 돌봄을 받는 노인조차도 마찬가지다.   &nbsp;  “저는 최선을 다했는데요.”“희지 씨, 그러지 말아요.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요.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정말로. 그래서 괜찮은 거예요.”   &nbsp;  &nbsp;「작은 벌」에서는 최소한의 관계맺음도 없기를 바라는 건조한 사이에 끈끈이가 뿌려져 뭉침이 이루어졌는데, 「아무 사이」에선 최선을 다한 ‘애정’을 주었음에도 끈끈이가 붙지 않을 수 있음을 보는 듯하다.&nbsp;「너의 나쁜 무리」속 ‘여사’님의 말마따나 “딱히 중요하지도 않은 주제에 사람 마음을 초조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들”이 각각의 소설에 있다. ‘징글징글한’ 관계다. 이 징글징글함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항상 반경 안에 있게 되고 “너무도 쉽게 흔들리고 마는 꼴”을 보게 된다.   &nbsp;    &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83/21/cover150/k852137509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832113</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젠더</category><title>삼성이체로부터[자연은 퀴어하다] - [자연은 퀴어하다 - 장소에 토박이가 된다는 것, 속한다는 것, 그리고 자연의 온갖 퀴어함에 관하여]</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10193</link><pubDate>Fri, 11 Sep 2026 20:1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1019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22137780&TPaperId=1751019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99/29/coveroff/k122137780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22137780&TPaperId=1751019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자연은 퀴어하다 - 장소에 토박이가 된다는 것, 속한다는 것, 그리고 자연의 온갖 퀴어함에 관하여</a><br/>퍼트리샤 오노니우 케이시언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6년 04월<br/></td></tr></table><br/>삼성이체로부터<br>자연은 퀴어하다&nbsp;- 장소에 토박이가 된다는 것, 속한다는 것, 그리고 자연의 온갖 퀴어함에 관하여  &nbsp;퍼트리샤 오노니우 케이시언, 노승영 (옮긴이), 에이도스, 2026-04-14  <br> &nbsp; ‘퀴어하다’. 이 단어를 흘낏, ‘퀴어’보다는 ‘자연’에 방점을 두고 책을 펼쳤기에 이런 전개를 예상하지 않았다. ‘자연’에 관한 다큐 정도로 생각하고 책을 펼치는데,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당황할 수밖에. ‘퀴어’를 너무 간과한 건가. 원제를 본다. 『Forest Euphoria』. 그리고 작가 소개를 본다.&nbsp; ‘퀴어하다’가 자연스러운가. 대체로 ‘퀴어’라는 단어는 ‘동성애’라는 특정한 의미를 부각하며 한정적으로 사용된다. 그렇기에 이러한 의미를 들이댄다면 제목이 자연스럽지 않다. 혐오와 멸칭, 황색 언론에서 주로 다루는 소모적인 논쟁의 형태가 아니라 ‘다른 의미’를 가졌다. 저자가 확장하여 이야기하고픈 ‘퀴어함’은 뭘까. 적어도 생물학자로서 저자가 왜 자연에서 “Euphoria”를 외치는지 너무나 공감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마케팅 측면에서 “퀴어하다”를 붙이고야 마는 까닭도 알겠다.&nbsp; 시작부터 저자는 ‘명료함의 결여’, ‘모호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성적 정체성으로 인해 스스로 ‘명료함이 결여’된 인간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살아 온 아르메니아인. 시작이 어디에서부터였나 따져가는 건 중요한 부분이 아닐 테다. 그것이 ‘저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가 더 중요하다. 아르메니아도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모호한 위치’에 있는 나라로 평가받는다. 현재 저자는 ‘인종학살을 피해 아르메니아에서 미국으로 피란한 이민자 가정 출신의 여성 생물학자’로 소개되고 있다. &nbsp; 저자는 이 책을 쓴 의도를 서두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의도가 이 책을 끌고 가기보다는 숲에서, 자연에서 “Euphoria”를 체험하고 ‘인식’한 것이 이 책을 쓸 수 있게 하는 ‘동기’를 강화하고 ‘의도’를 견인하였다고 본다. 이 순서는 중요하다. 그리고, 인간은 자연에 속한다. 그러니까 자연 이야기에 인간 이야기가 삽입된 것에 내가 너무나 ‘퀴어하지 않게’ 반응한 것이다. 그렇다면 ‘퀴어함’이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nbsp;  퀴어는 오늘날 문화에서 ’정상‘으로 간주되지 않는 성 및 성별 범주를 가리키는 데 주로 쓰이지만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일탈‘인가를 모호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뭉뚱그려 가리키는 데에도 쓰일 수 있다.  &nbsp;  &nbsp; 자연은 다양하고, 복잡하고, ’순수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다양성과 복잡함과 다르게 ’순수성을 부여‘할 때는 대체로 생물종의 ‘성별이나 번식’에 제한하여 이야기한다. 이에 따라, 자연에, 생물종에 “지독한 폭력을 가한다.” 이분법적 강박과 이성애 규범을 강제하면서 말이다. 생물학종은 모두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는다. 단순한 암수 구별법으로 정의되지 않는다는 거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 순수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된다. 저자는 생물학자로서 연구를 깊이 하면 할수록 ‘이분법적이고 이성애적인 접근’ 체계가 얼마나 지배적인지, 심지어 기존 질서를 그대로 따름에 따라 객관적 오류를 일으키는 경우도, 학자의 선호에 따라 생물종에 ‘혐오’를 담은 명명을 하는 경우도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통제, 예측 가능성, 확고한 정의(定意)를 요구하며, 청결, 순수, 상업적 생산성을 기대”하는 우리 문화에서 저자와 같은 성별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소외되고 배제당한다. 외롭고 아프고 힘겨울 수밖에 없다.&nbsp; 이럴 때, 저자 앞에 나타난 자웅동체이거나 삼성이체인 ‘균류’와 같은 존재들! 이러한 생물들은 다양하고 많다. 혹고니는 동성끼리 짝을 이루며, 뱀장어는 뚜렷한 생식기간이 없이 살아가기도 하며, 달팽이 또한 성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분법적 사고와 ‘인간 중심’의 사고 체계에 따르면 모두 배제되는 문제적 생물군들. 이것은 저자가 스스로를 존중하고 소속감을 느낄 수 있도록 ‘전환’시켜 주는 존재가 된다.   &nbsp;  균류는 전복적이다. 나는 이 전복에서 나 자신을 보았다. 그들의 논바이너리 몸에서, 범주와 정의의 거부에서 나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강하게 했다. 그들을 연구하면서 명료함과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더 나은 언어를 찾았으며 더 중요하게는 나의 유동성, 양서류성, 집단적 반향을 향한 끌림을 인정받고 공감받았다. 그들은 내가 스스로의 사람됨을 찾고 이해하고 찬미하게 해주었다. 그들은 나를 이름으로 불렀다.  &nbsp;  &nbsp; 버섯에 대한 EBS 다큐를 꽤 흥미있게 본 기억이 있다. 그 몇시간 짜리로도 버섯에 대해 제법 매료되었는데 ‘명료함이 결여된’ 생물학자의 눈에 버섯은 얼마나 흥미로울까. 이러한 균류로 인해 저자는 “퀴어함”의 가치에 대해 생각한다. 모호하고 뒤죽박죽인 자연에 대해 생각한다. “이성애 규범 바깥의 생식을 연구하며 진화와 생물학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자연의 “퀴어함”을 받아들이는 데서 나아간다.&nbsp; 이 책은 자신을 보다 더 사랑하고 싶지만 기존 위계 질서 속에서 힘겨웠던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재인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동안 얼마나 힘겨웠는지 ‘균류’에 동질의식과 소속감을 느끼며 자신을 정립해 나가는 저자의 몸부림이 이 책에 잘 담겨 있다. ‘소외’되고 배척당한다고 느끼는 이들이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지 그 방법적 측면에서도 도움이 되는 책이다. 처음부터 명확히 밝힌 저자의 의도, 그건 다음과 같다.  &nbsp;  이 책에서 나는 자연이 얼마나 퀴어한지 탐구한다. 나는 어릴 적 경험, 퀴어 정체성, 균류를 연구하는 과학자로서의 작업을 통해 자연이 억압될 수 없고 제한될 수 없고 똑바로 정의될 수조차 없음을 배웠다. 자연에 편재하는 퀴어함은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이분법적 규칙에 도전한다. 성이 셋 이상인 균류, 까마귀의 동성 동반자 관계, 달팽이와 장어의 간성 몸에서 우리는 인류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영감을 얻는다. 궁극적으로 퀴어함은 우리 모두를 정체성과 무관하게 더 불확정적이고 불확실하고 이행적이고 혼합적이고 상호의존적이고 협력적이고 비위계적인 존재 방식으로 초대한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99/29/cover150/k122137780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992924</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역사·과학</category><title>노엄 촘스키는 못 듣는다[나에게는 새의 말이 들린다] - [나에게는 새의 말이 들린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02246</link><pubDate>Tue, 08 Sep 2026 09:5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50224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92139971&TPaperId=1750224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01/69/coveroff/k39213997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92139971&TPaperId=1750224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에게는 새의 말이 들린다</a><br/>스즈키 도시타카 지음, 김소연 옮김 / 오팬하우스 / 2026년 05월<br/></td></tr></table><br/>노엄 촘스키는 못 듣는다<br>스즈키 도시타카,&nbsp;김소연 (옮긴이),&nbsp;&nbsp;오팬하우스,&nbsp;2026-05-27.  &nbsp;  &nbsp;새벽이 아닌 휴일 오전, 집단으로 날카롭게 울어대는 새들의 소리에 나가보았다. 까치 무리와 까마귀 무리의 대치! 제법 오래 이어진 이 대치를 ‘굳이’ 직관하며 새들은 무슨 말을 할까, 궁금했었다. 전선줄에 병정처럼 늘어선 까치와 까마귀 무리들. 어디서인지 계속 수를 늘려가는 이들의 전투는 무엇때문일까. 까마귀에 의해 둥지가 점령당한 것 같은 까치들이었기에 까마귀는 왜 까치 둥지를 침략하는 건지 궁금했고 잠시 뒤엔 까치와 까마귀가 서로 연합하는 듯이 보여 이건 또 뭘까 궁금했다. 멀리 지나가는 사람들 소리에 ‘고양이’가 섞여 있어 둥지를 공격한 고양이에 맞선 새의 연합작전(?)이라는 상상의 나래를 펴기까지, 그리고 점차 나뭇잎의 흔들림도 잠잠하고 새들의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뭔가 멍하고 소외된 듯한 기분으로 현장을 벗어났다. 그때 이 책을 알았다면 뭘했을까. 새의 말이 들리는 저자였다면 당장 새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챘겠지만 내겐 그저 새의 감정과 기분을 나타낸 듯 다르게 들렸던 소리가 기억난다.&nbsp;&nbsp; 이 책은 ‘새 언어’ 탐구 과정을 기록했다. ‘새new’가 아니라 ‘새bird’. 저자인 스즈키 도시타카‘는 아시아 최초로 영국 동물행동연구협회 국제상’을 수상한 일본의 생물학자이다.  &nbsp;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언어는 인간의 전유물로 여겨져 왔다. 그리고 오늘날의 인간과 자연의 괴리가 생각났다.하지만 박새들은 그건 틀린 생각임을 가르쳐주었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언어가 있듯 새에게는 새들의 언어가 있다. 인간의 언어는 동물 언어들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자연을 올바르게 보는 눈을 잃었지만 새들은 다른 동물의 언어까지 제대로 이해하며 살고 있다.  &nbsp;  &nbsp; 핵심은 이거다. 저자는 ‘박새’가 ‘언어’를 가지고 있음을 오랜 시간 탐구와 실험을 통해 ‘증명’한다. 저자의 이러한 노력은 과학계, 동물학회에 반향을 일으키며 세계 유수의 실렸고 저자는 이 과정을 이 책에 담고 있다.&nbsp; 하지만 페이지를 넘겨가면 약간 당황하게 된다. 이 책은 20년의 연구, 탐구서인데 책의 내용이나 서술이 몹시 가볍게 느껴진다. 20년의 노력이 아니라 잠깐의 취미활동을 기록한 것처럼. 굳이 서론을 길게 하지 않고 핵심만을 간략히 서술하는 것, 그 심플함이 이 책의 장점일 수도 있겠다. 오랜 실험과 탐구를 담은 책인데 그와 관련된 ‘사진’ 한 장 없다니 하고 생각했는데, 일러스트로 그려진 그림이 유쾌함을 주는 요소일지도. 저자가 ‘직접 그린’ 것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새가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이 놀라운 연구를 좀더 ‘탐구’하고팠던 나에게는 상당히 아쉬움이 남았고 저자가 ‘논문’에는 어떻게 썼는지 매우 궁금해졌다. 이런 나의 생각이 풀리게 된 건, 저자가 중학생 대상으로 강연을 제법, 주욱 했다는 서술에서였다. 아, 그러한 활동으로 이 책이 학생들에게 보다 쉽게 읽히고 다가갈 수 있도록 서술된 건가! 내 아쉬움은 진정시키며 다른 저작물이 소개되기를 바랄 뿐이다.  &nbsp;  하지만&nbsp;증거가 없다는 사실이, 무언가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한다.&nbsp;중요한 것은 동물의 울음소리가 그저 감정의 표현인지 인간의 말처럼 특정한 의미를 전달하는지를 구별하는 ‘방법’을 고안해 내는 것이다. 만약 사고 절약 원칙에 따라 생각해도 구체적인 의미를 전달한다고밖에 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한다면 동물에게도 언어가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해낸 사람은 전 세계에서 나밖에 없다! 나는 ‘동물은 말하지 않는다’라는 2천 년 이상에 걸친 역사상 최대의 오해를 풀고,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된 인류를 구하기 위해 일어섰다.  &nbsp;  &nbsp; 생물학자이자 연구자인 저자는 일본에서 가장 흔한 새 중 하나인 ‘박새’의 소리가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을 알아내고 각각에 ‘의미’가 있음을 실험을 통해 증명했다. 나아가, ‘새’가 ‘언어’를 사용함을 단계별로 증명했다. 분명 그러할 것인데, 이를 위한 ‘증거’가 없다고 그것이 아닌 것이 될 수 없다는 이 마음으로 저자는 끊임없이 실험하고 실험했다. 대표적인 것이 ‘나뭇가지’ 실험이다. “박새의 ‘츠르르르르’가 ‘뱀’을 의미하는 ‘단어’라면 그 소리를 들은 박새는 뱀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고 “평소에는 뱀으로 보이지 않던 것을 뱀으로 착각”할 것이라는 가설에 따라 ‘츠르르르르’ 소리를 들려주며 나뭇가지를 움직이는 반복된 실험을 한 결과, “‘츠르르르르’ 소리를 들은 박새는 머릿속에 뱀의 이미지를 연상하고, 뱀처럼 생긴 것을 찾는 것을 확인했다”&nbsp; 또한 인간이 단어를 조합해 문장을 만드는 것처럼 박새도 “인간처럼 규칙을 사용해 울음소리를 조합하고 어순에 따라 의미를 이해할 것”, “박새에게도 문법 능력이 있다‘라는 가설을 설정하고 또한 이를 실험으로 증명해냈다.&nbsp; 책에서는 간단히 서술되었지만 이 실험이 하루 이틀에 끝나는 건 아니다. 몇 년에 걸쳐 반복된 실험을 진행한다. 저자는 매번 박새가 언어 능력이 있음을 기본으로 하여 이와 관련된 의문을 품고 이 의문에 맞게 실험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과정을 거쳤다. 새의 언어 능력을 파헤치고픈 저자의 욕구는 일상에서 개그 프로를 보던 순간에도 ’새의 언어‘ 능력을 탐구할 수 있는 가설을 떠올리기도 한다. 얼마나 많은 시간 집중하고 이에 따른 행동력을 보이는지, 이러한 열정이 ’새‘가 언어가 있음을 증명하는 놀라운 ’사건‘을 만들어낸 것이다.&nbsp; 저자는 새들의 언어 세상과 인간 세상을 이어주는 노력 또한 진행했고 ”동물들의 대화를 이해하고 그들의 세상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의 하루하루는 더욱 풍요롭고 멋지게 바뀔 것“이라 믿는 1983년생(자료를 찾아보니 1983년생이라 하여 또 놀란다) 학자다. ’20년간 박새 연구를~‘이라며 책소개에 있는 저자 사진을 보며 ’어려‘보이고 ’음악가‘ 같은 모습이라 매치가 잘되지 않았는데, 20년, 학자, 탐구 이런 단어를 기본으로 하여 내게 ’과학자‘, ’연구자‘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었구나 싶었다. &nbsp; 이 책의 추천자인 ’최재천 교수‘는 저자에 대해 ”내가 가장 시기하고 질투하는 학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했다. 나 또한 저자의 이 열린 사고와 행동력에 감탄한다. 특히나, 노엄 촘스키와 비교되어 더더욱! 사실 이 책보다는 시작과 동시에 추천사인 최재천 교수님이 노엄 촘스키와 만난 일화를 보며 놀랐다. 노엄 촘스키는 언어학자이자 정치사상가로 활동해온 영향력있는 학자다. 노엄 촘스키의 그동안의 저서가… 물론 학자로서 확고한 자기주장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에 대해 놀라는 건 아니다. 그저 생각보다 유연하지 않고 경직된 학자인가 생각들었을 뿐이다. 찾아 보았다. 1928년생이다. 2009년에 이미 80대가 넘은 학자였다. 이 나이쯤되면 자기가 아는 세상만이 다라고 생각하는 노인들이 많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세계와 다른 얘기를 하면 자신을 공격하는 줄 알며&nbsp;조금만 감정이 상하면 삐지기도 한다. 열린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면, 다른 주장을 가진 이를 만났을 때 ’공격‘력이 살아나 더 신나지 않았을까. 좀더 논쟁할 수 있을 테니… 왜 최재천 교수가 이 책을 노엄 촘스키에게 가져다 흔들고 싶은지 이해가 된다. 이 책의 저자가 책에서도 계속 강조하듯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 저자가 이야기한것처럼 ”우물 안에 있어도 괜찮은 것은 올챙이 때까지뿐“이다.   &nbsp;  그는 내게 요즘엔 무슨 연구를 하느냐 물었다. 나는 너무도 당당하게 까치의 언어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내 설명을 듣던 그는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끝내 내 말을 끊으며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뿐”이라고 단언했다. &nbsp;(…) 그날, 밤 늦게 나는 한국 방문을 거절한다는 그의 이메일을 받았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01/69/cover150/k39213997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016945</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여행·기행·예술</category><title>모네의 가장 아름다운 명작[모네가 사랑한 정원] - [모네가 사랑한 정원 - 화가이자 정원사, 클로드 모네의 그림과 정원에 관한 에세이]</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91910</link><pubDate>Thu, 03 Sep 2026 16: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9191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27807472&TPaperId=1749191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8094/18/coveroff/892780747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27807472&TPaperId=1749191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모네가 사랑한 정원 - 화가이자 정원사, 클로드 모네의 그림과 정원에 관한 에세이</a><br/>데브라 N. 맨코프 지음, 김잔디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6년 03월<br/></td></tr></table><br/>모네의 가장 아름다운 명작<br>모네가 사랑한 정원 - 화가이자 정원사, 클로드 모네의 그림과 정원에 관한 에세이데브라 N. 맨커프 (지은이),&nbsp;김잔디 (옮긴이),&nbsp;&nbsp;중앙books(중앙북스), 2016-03-30.  &nbsp;  &nbsp;    &nbsp; 86세에 사망한 모네는 생애만큼 많은 이야기가 있다. 거기다 2,500점이 넘는 그림을 떠올린다면, 그만큼 모네의 이야기는 많을 테다. 그래서 모네에 대한 책을 보면 본 적 없는 그림이 계속 나온다. 모네 생애와 작품을 이야기하는 저자마다 지면이 허락하는 한, 대표적인 것 이외 더 소개하고픈 그림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네에 대한 책은 한 두 권으로는 미진한 느낌이다. 물론 모네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그렇겠지만. 모르는 것이 약이고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조금 아니까 아직 힘이 되지 않는다.&nbsp; 이 책은 모네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공간 “정원”을 중심으로 한 모네의 그림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모네는 인생의 마지막 29년을 정원에서 보냈다고 하는데 이 정원은 그냥 있는 공간이 아니라 모네가 창조한 공간이다. 모네 자신 “정원은 나의 가장 아름다운 명작”이라고 말했고, “자기 그림을 이해하려면 백마디 설명보다 자신이 직접 가꾼 정원을 보는 게 낫다”고 말했을 정도다. 모네의 정원을 가본 많은 이들도 모네의 정원에 대해 찬사했다. 어떤 이는 모네를 이해하려면 정원을 보라고, 그림보다 정원이 낫다고 했을 정도다.&nbsp; 처음 모네가 정원을 가꾼 곳은 1871년 파리와 떨어진 아르장퇴유다. 이곳 테라스에 화분을 놓고 화단을 장식, 정원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때 정원을 배경으로 한 가족들을 그리며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이때의 정원은 전원주택에서 꽃을 가꾸는 것처럼 소소한 형태였고 대규모의 정원으로 확대하게 된 건 지베르니에 정착하고서다. 1883년 파리 북서쪽 작은 마을 지베르니에 처음 정착하고서도 모네는 빛을 그리는 화가로 자연 풍경을 그리기 위해 노르망디 해안, 루앙, 리비에라 등으로 여행을 다녔다. 곧 자신의 정원에 자신이 그리고픈 세계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그 세계를 위해 ‘정원을 창조’했다.&nbsp;<br>그는 화단을 색과 높이에 따라 분류한 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대규모의 정물화처럼 꾸몄다. 강렬한 자연광 아래에서 꽃을 관찰하여 싱그러운 색채의 향연을 표현했다. 무성한 풀과 나무, 꽃을 심고 굽이치는 둑을 만들었으며 구불구불한 길을 내어 물의 정원을 조성했다.&nbsp;  &nbsp;  &nbsp; 이렇게만 보면 실제 모네가 정원을 창조하기 위해 들인 노력이 가늠되지 않는다. 모네는 정원과 관련한 서적을 찾아 읽는데 시간을 더 들였고 정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카유보트와 소설가 옥티브 미르보, 비평가 귀스티브 프루아 등)과 교류‘ 하고 온실을 두 개나 만들고 정원사를 여섯 명 고용했다. 1893년 초 초지와 연못이 있는 땅을 추가로 구입해 앱트 강의 지류인 루강이 더 잘 흘러 나가도록 공사를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이웃들의 다툼과 복잡한 행정절차를 모두 감내하고 말이다. 그리하여 모네의 정원은 ’물의 정원‘이라고도 불린다. 모네는 습지와 같은 이 땅을 “밝은 색 수련이 잔잔한 수면에 떠 있고 주위에는 갈대와 버드나무, 아이리스가 자라는 연못정원으로 바꾸겠다는 구상”을 실현시켰다.&nbsp; 모네는 19세기 후반 ’자포니즘(Japonisme)‘의 열풍 속에 ’우키요에‘에 매료된 대표적인 화가다. 우키요에는 모네의 화풍과 정원 조성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물의 정원‘은 우키오요에 판화에 등장하는 전통 풍경과 일본식 아치형 다리를 본따 설계하였고, 로저 마르크스가 “당신이 미술계에 미친 영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말해달라”고 하자, “내가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꼭 찾아내야겠으면 옛 일본식이라는 정도로 해두시오.”라고 말했을 정도다.&nbsp; 모네의 대표작으로 ’수련‘ 연작이 꼽힌다. 이 정원의 수련을 관찰하여 그린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모네는 관상용으로 수련을 심었을 뿐 그릴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순간 수련에 매료된 모네는 “어느 순간 갑자기 연못에서 황홀한 광경을 보았다. 나는 바로 팔레트를 집어들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만장일치로 평단의 호평을 받은 &lt;수련&gt; 연작이 탄생한다.<br>로저 마르크스는 예술 잡지 &lt;가제트 데보자르(Gazett des Beaux-Arts&gt;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평단이 가장 대담하다고 평가한 요소를 소개했다. 모네는 &lt;수련&gt; 연작을 그리면서 지상의 닻에 얽매여 있던 풍경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이제 더 이상 땅도 하늘도 그 어떤 제한도 존재하지 않는다. 잔잔하고 비옥한 물이 캔버스의 들판을 완전히 덮고 있으며 빛이 넘쳐흘러 녹청색 잎의 표면에서 활기차게 뛰논다. 화가는 원근법의 피라미드식 선이나 단일 초점을 추구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서양의 전통적인 회화규칙에서 벗어났다.˝  &nbsp;  &nbsp; 모네는, 언제나 기존 질서에서 벗어났다. 평단이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을 뿐. 모네의 기본을 달라질 리 없는데 평단이 변한 건가. 시간의 흐름과 모네의 끝없는 열정과 노력의 결실이 빚어낸 것일테다. 인상파를 조롱하던 때, 루이 르루아의 평론이 실린 때가 1874년이고, &lt;수련&gt; 연작이 전시되던 때는 1909년이니 무려 35년의 시간이 흐른다. 물론, 그 사이에 모네는 런던의 안개 연작도 &lt;건초더미(1890~1891년)&gt; 연작도 호평을 받았다.   &nbsp;  유명 신문 &lt;르 샤리바리&gt;의 평론가 루이 르루아는 모네의 작품 &lt;인상:해돋이&gt;를 풍자하여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에서 이렇게 썼다. “대체 뭘 그린 걸까? 어디 보자. ’인상‘이라고? 나도 그럴 줄 알았다. 나 역시 인상을 받았으니까. 그렇다고 이 그림에 인상이 존재하는지는 의문이다.” 조롱하는 의미로 한 말이었지만 르루아의 발언은 화가들의 모임에 ’인상파‘라는 명칭을 부여했고, 인상파 화가들은 이후 11년에 걸쳐 전시회를 일곱 번 더 개최했으며 1886년에 마지막 행사를 가졌다.  &nbsp;  &nbsp; ’인상파‘ 화가로서 찰나의 순간을 화폭에 담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빛의 흐름을 표현하려 했던 모네는 강렬한 햇볕에 노출된 탓에 극심한 눈의 피로와 고통이 있었고 백내장 진단을 받는다. 수술 후에도 심한 부작용을 겪으며 심리적으로 위축되기도 한다. 잘 보이지 않거나 사물의 색이 왜곡되어 보이는 현상을 겪는 건 자연을 그리는 화가로서 얼마나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을까. 그럼에도 모네는 기억과 감각에 의지해 붓을 놓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린다.&nbsp; 이때 그린 그림들을 보면 이전에 그렸던 색채보다 훨씬 강렬하다. 원래 그의 붓터치처럼 거칠고 생략된 표현도 더욱 두드러진다. 이때 모네가 그린 그림들을 많이 보게 되니 비로소 모네가 ’추상주의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 두 그림만으로는 알 수 없는 변화된 그림의 색채, 그 색채의 강렬함이 노년 모네의 고통 강도 같이 느껴진다. &nbsp; 모네의 그림과 정원이 유명해지고 이곳에 많은 화가들이 모네와 교류하고자 찾아들었다 한다. 그리하여 화가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이들 중 모네가 교류한 사람도 있지만 전혀 교류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한다. 오랜 시간 이웃에 살면서도 전혀 교류가 없을 수는 있지만, 모네의 정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크고 모네에 대한 유명세도 있었을 텐데, 굳이 관심두고픈 세계가 아니었는지, 단순한 사람 사이의 인사들도 없이 완전한 단절이었는지, 특별히 그러한 관계가 된 연유도 쓸데없이 궁금해진다. 세상을 살면서 마음맞는 사람을 만나는 일,  마음을 나누는 일, 사람과의 교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끔 한다. 이웃과의 일을 떠나 모네 자체는 오랜 생을 사는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모네를 돌보아 준 이들이 많았던 건 모네의 복일 게다.&nbsp; 꽃을 좋아하고 사랑한 모네가 죽을 때 관에 검은색 천이 덮여 있어서 이것을 걷어내고 창문에 걸려 있던 화사한 꽃무늬 커튼을 덮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꽃을 사랑한 모네가 마지막 쥐고 있던 꽃은 무엇일까 했는데 모네의 이런 당부가 있었다고 한다.  &nbsp;  꽃이나 화환은 절대로 원하지 않아. 꽃으로 장식하는 건 헛된 일이야. 내 정원에 있는 꽃을 이런 일에 쓰려고 꺾는 건 신성모독이지.<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8094/18/cover150/892780747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0941876</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여행·기행·예술</category><title>눈부신[모네, 빛의 순간들] - [모네, 빛의 순간들 - 100개의 대표작으로 만나는 클로드 모네의 모든 것]</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89409</link><pubDate>Wed, 02 Sep 2026 16:3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8940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32139770&TPaperId=1748940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76/13/coveroff/k932139770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32139770&TPaperId=1748940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모네, 빛의 순간들 - 100개의 대표작으로 만나는 클로드 모네의 모든 것</a><br/>박송이 지음 / 빅피시 / 2026년 05월<br/></td></tr></table><br/><br>눈부신<br>모네, 빛의 순간들 - 100개의 대표작으로 만나는 클로드 모네의 모든 것   &nbsp;박송이, 빅피시, 2026-05-27.  &nbsp;  &nbsp;  &nbsp; 모네는 ‘빛’, ‘인상’이라는 단어들로 소개된다. 이 책은 ‘빛의 순간들’이라는 이름으로 모네의 대표작 100점을 연대기순으로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프랑스 공인 문화해설사다. 2016년부터 파리에서 거주한다고 하는데, 미술관이나 모네의 자베르니 정원에서 모네의 작품을 책에 쓴 것처럼 설명하겠구나 싶었다. 문화해설사가 들려주는 화가와 작품 이야기다.&nbsp; ‘인상주의’하면 파스텔톤 풍경화가 떠오른다. 모네의 작품도 그렇게 여기고 있다. ‘빛’의 활용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림을 그리지 않는 나로서는, 미술책에서 본 그림만으로는 ‘빛’의 흐름이나 머묾을 세세히 잡아내기 어려웠다. 설명을 듣는다 해도 예민한 그 감각을 따라가기가 벅차다. 그러니, 어쩌면 그림은 한 순간의 ‘인상’이고 그림이나 화가의 이야기에 더 관심갖게 되는 것 같다. 신화나 성경을 배경으로 한 그림은 어떤 내용인지를 구체적으로 찾아보게 되니 풍경 그림의 장소가 ‘어디’인지를 궁금해하는 것하고는 좀 다르니까. 그래서인가. 미술계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이 나올 때면 화단계 영향력있는 이들이, 수용하지 못하고 비난과 비판을 주로 하는 것이.&nbsp; 모네 또한 파리 유력 평단으로부터 외면당한 대표적인 화가다. 모네가 활동하던 초창기, 당시 화단에서는 “전통적인 역사화나 신화적인 주제를 선보이는 것이 일반적”이었기에 모네의 그림은 프랑스 왕립미술아카데미가 주관하는 공식 전시회에 입선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조롱받거나 거부당했다. 물론, 모네는 1866년 살롱전에 &lt;초록 드레스를 입은 여인&gt;을 출품하여 수상했다. 이는 모네가 입선을 목표로 하고 그린 그림, 그러니까 현재로 생각한다면 입시용이나 공모전 수상 패턴을 분석하여 이에 맞게 그려서 수상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 같고 모네 자체는 ‘빛’의 표현에 더 관심을 두었기에 이 그림에 만족하지 않았다고 한다.&nbsp; 모네를 ‘빛’의 표현으로 이끈 이가 모네의 스승 외젠 부댕이다. 15세 모네가 그린 캐리커쳐에 매료된 외젠 부댕이 모네를 자연의 세계로 이끈 것이다. 외젠 자신이 바깥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고 함께 야외에서 그림을 그린 모네는 이 경험 이후로 “야외에서 눈앞에 펼쳐진 자연을 바라보며 이해”함과 동시에 ‘풍경화가’로서 그림을 그리기로 한다. 나아가 모네에게는 “빛의 표현”, “밖에서 보고 기억한 ‘관념적인 색채’가 아니라 야외의 자연광을 받은 ‘지금 눈에 보이는 색’이야말로 그의 관심사였다.”&nbsp; 모네는 1866년 살롱전 입선 후, 바로 파리 근교의 빌 다브레에서 정원이 딸린 집을 빌려  2.5m가 넘는 큰 캔버스를 야외에 설치하고 대규모 인물화를 제작한다. 캔버스가 너무 커서 윗부분에 손이 닿지 않아 정원의 땅을 파고 도르래를 설치해 캔버스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장치를 설치하고 그렸다. 이 그림이 모네의 연인 카미유 동시외가 그려진 &lt;정원의 여인들&gt;이다.  &nbsp;  살롱의 평가는 냉혹했다. ‘그림에 주제가 없다’, ‘붓질의 마감이 거칠다’는 이유로 모네는 그해 살롱전에서 고배를 마셨다. 이를 두고 모네의 전작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던 비평가이자 소설가 에밀 졸라는 “모네는 살롱의 문을 열었지만, 그가 들고 온 ‘빛’이 너무 눈부셔 심사위원들은 서둘러 그 문을 닫아버렸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nbsp;  &nbsp; 이런 평가는 또 있다. &lt;까치(1869년)&gt; 또한 심사위원들로부터 살롱 출품을 거절당했다. 이유는 “그림이 지나치게 밝아서 눈이 멀 것 같다”는 것. 마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가 생각나는 평이다. 주제가 없다라니, 내가 보기에 &lt;초록 드레스를 입은 여인&gt; 또한 무슨 큰 주제가 있나 싶은데 말이다. ‘빛이 너무 눈부셔 서둘러 그 문을 닫아버렸다’라는 에밀 졸라의 평이 너무나 인상깊다!&nbsp; 이렇게 화가로서 초기부터 평단으로부터 외면받았기에 모네의 삶은 어려웠다. 모네의 일대기를 보면 “평생 가난과 궁핍”하다는 설명들이 있기에 정말 아주 가난한 거리의 화가로 생각했다. 그러나, 모네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고 어린 시절은 풍족하게 보냈던 것 같다. 모네의 궁핍은 ‘화가’가 되어 평단으로부터 외면당한 것과 카미유 동시외와의 결혼을 아버지가 반대함에 따라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인 카미유는 아들을 낳았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고 1867년 아들 출산 시에는 카미유의 곁에 있지도 못했다.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눈치를 보며 아버지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모네는 20대 후반이다. 당시를 생각하면 충분히 독립하였을 나이인데 아버지가 된 상황에서도 모네는 여전히 ‘어린’ 느낌이다. 부유한 집안의 철없는 아들 같은 느낌이랄까.&nbsp; 화가로도 자리잡지 못한 상황에서 한 가정을 가졌으니 경제적인 궁핍은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모네는 계속된 경제적 궁핍에도 철학이 있었으니, “열 병의 저렴한 와인 대신 단 한 병의 좋은 와인을 택하는 삶”이 그것이다. 모네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나는 항상 어느 정도의 안락함 속에서 살아야만 하네. 그래야 네 모든 에너지를 그림에 쏟을 수 있기 때문이지”&nbsp; 모네는 빚을 지거나 임금을 체납하면서도 고용인들을 해고하지 않고, 돈을 잘 벌 때도 아끼고 저축하기보다 저명한 양복점에서 옷을 맞춰 입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이와 함께 모네에 대한 많은 글 중엔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달라’ 호소하는 내용이 많다. 이런 생활 속에서도 그의 그림은 &lt;여름(1874년)&gt;과 같이 “햇빛이 비치는 풍경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는 듯한 상쾌함”이 깃든 그림들이다. 글쎄, 이것은 좀더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고 안정화하기 위한, 지난 어떤 경험으로 인해 쌓인 방어기제였을까. 모네는 1868년 6월,&nbsp;강물에 몸을 던진다. 곧 자신의 무모함을 깨닫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물 밖으로 빠져나왔다는데, 모네는 화가 프레데릭 바질(Frédéric Bazille)에게 보낸 편지에 이를 ‘실수’라고 표현했다. 모네의 전기학자들은 이를 모네의 ‘자살 시도’라고 얘기한다. 이때, 모네의 상태는 아버지의 후원 중단으로 인한 지속된 궁핍, 살던 집에서 쫓겨나기 일보 직전에 그림까지 압류될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고 화가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상실감도 있었을 테다.&nbsp; 모네 인생을 보면 동료와 후원자를 비롯하여 ‘인복’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네의 경제적 궁핍 호소에 그의 그림을 사주거나 경제적 지원을 하였던 이들이 많다. 그들은 화가로서 ‘모네’를 보았을까. 인간 ‘모네’를 보았을까. &nbsp; 모네는 “빛이 매 순간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나는 눈부신 대화들을 기록할 뿐”이며 이것이 그가 꿈꾸던 화가의 삶이라고 했다. 그저 낯선 구도를 중시하며 과감한 붓질을 통해 “ 빛의 표현”하던 모네는 그의 아내이자 모델 카미유가 사망하는 순간에도 “사별의 아픔을 겪는 남편이기보다 빛의 변화를 포착해야만 하는 화가라는 실존적 숙명을 깨달았다. 임종의 안색에서 푸른색, 노란색, 회색의 조화를 분석하는 본능을 자각한 순간, 그는 슬픔을 앞서는 예술적 관찰력에 경악하며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그리고 〈임종을 맞은 카미유 모네(1879년)〉를 완성해냈다. 모네는 단순히 정적인 풍경을 담기보다는 빛의 산란이나 구도를 위해 거칠고 험한 곳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예술적 집착이 정점에 달했던 1890년 5월 초, 모네는 봄이 오면서 돋아난 초록빛 나뭇잎들이 겨울의 황량한 구도를 망치자 기상천외한 지시를 내렸다. 인부들을 고용해 그림 속 참나무의 잎을 일일이 다 따 버리게” 하기도 했다. 사진작가들이 자신이 원하는 구도로 대상을 촬영하기 위해 자연에 험한 짓을 하는 일이 있다는데 잠시 이 상황이 동일시되어 순간…… 문화해설사인 저자는 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nbsp;  자연의 시간마저 자신의 캔버스에 맞추려 했던 이러한 행위는, 화가를 넘어 창조주로서 대상을 통제하고자 했던 모네의 광기 어린 집착을 여실히 보여준다.<br> &nbsp; 광기 어린 집착이라, 예술가들에게 필연적이고 오히려 이런 면모가 유명한 예술가라는 인정처럼 여겨지는 부분이 있다. 연작 시리즈로 유명한 &lt;건초더미(1890~1891년)&gt;를 그리던 때에는 이웃 농부들의 사유지를 “최적의 각도를 찾기 위해 수시로 농작물이 심어진 구역을 가로질렀고”, “농부들의 대화 소리나 마차의 굉음이 자신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린다며 항의”하기도 했으며 이에 농부들과 갈등이 멈추지 않았다. 탈곡을 위해 건초더미를 치워야 하는 시기가 되자 모네는 농부들에게 탈곡을 늦추는 대가로 현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한다. 또한, 연작이 많았던 만큼 “갤러리에 천창을 설치해 외부 날씨와 태양의 위치에 따라 그림의 색채가 실시간으로 변하게”하거나 “작품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연결되어 있어, 전체의 흐름과 공간까지를 모두 작품”으로 여길 수 있게 전시되도록 갤러리도 직접 구상하고 기획하기도 했다. &nbsp; 삶의 안정기, 모네는 1899년부터 1901년까지 매년 작업을 위해 런던을 찾았다. 1870년 보불전쟁을 피해 머물던 시절 매료된 ‘안개’를 다시 그리기 위해서였다. 이전까지 사람들은 안개를 불편하고 성가진 존재로 여겼는데 모네가 그림을 그리고 나자 안개가 아름답고 신비로울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nbsp; 모네는 수많은 그림을 남겼다. 많은 화가들이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모네는 86세까지 생존했다. 자연의 ‘빛’을 중시하는 화가로서 일찌감치 ‘눈’으로 고통받았는데 말년에는 백내장과 수술 후 부작용으로 색채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증상을 겪었다. 이때 모네는 기억과 감각에 의존해 그림을 그렸으며 사망한 해에는 폐암으로 극심한 고통 속에 있었다. 86세의 화가는 신체적 질병과 그로 인한 고통뿐만 아니라 첫 번째 아내 카미유, 두 번째 아내 알리스와의 사별, 아들과 의붓 딸,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때문에도 슬픔과 아픔 속에 있었다. 모네는 고통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그림을 그렸다. &nbsp; 그의 작품들은 여러 유명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모네의 그림을 ‘국가’가 소장해야 한닥 강력하게 주장한 친구와 모네의 그림을 사랑한 사람들 덕분이었다. 모네의 그림을 수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기까지,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조력자가 있었음을 새삼 느낀다. 클레망소도 대표적인 사람이다. 모네가 사망할 당시 모네의 관 위에 검은 천이 덮여 있었다. 이때, 클레망소는 “안 돼! 모네에게 검은색은 안 돼! 검정은 색이 아니야!”라고 외치며 관 위의 검은 천을 치우고 창문에 걸려 있던 화사한 꽃무늬 커튼을 뜯어와 덮었다고 한다. 검은색을 싫어하고 꽃을 사랑한 친구의 마지막을 진정 “꽃길”이 되도록 해준 것이다. &nbsp; 모네의 삶은 꽃길이었을까. 모네가 사랑하고 가꾼, 그의 예술의 공간인 자베르니는 개방된 곳이라고 한다. 화창한 여름, 그곳에 가보고 싶어진다.  &nbsp;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76/13/cover150/k932139770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3761387</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여행·기행·예술</category><title>에밀 졸라[마네와 모네] - [마네와 모네 - 인상주의의 거장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89397</link><pubDate>Wed, 02 Sep 2026 16: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8939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72531748&TPaperId=1748939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1995/99/coveroff/k17253174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72531748&TPaperId=1748939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마네와 모네 - 인상주의의 거장들</a><br/>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17년 10월<br/></td></tr></table><br/>에밀 졸라<br>마네와 모네 - 인상주의의 거장들김광우 (지은이), 미술문화, 2017-10-23.<br>&nbsp; 2026년 클로드 모네가 사망한 지 100년이 되는 해란다. 모네는 마네와 함께 거론되는 교과서에서 다루었던 화가다. ‘인상주의’로 대표되는 것 외에, 학창시절 기억에 의존해도 마네와 모네는 늘 헷갈렸고 대표적인 작품이 무엇이었는지도 가물해지는 때, 2025년 ‘모네에서 앤디워홀까지’ 전시회가 있다고 하여 오직 ‘모네’ 작품만을 생각하며 전시회를 갔다. 모네 작품은 어디에를 연발하며 그저, 모네 작품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아예 잊어버린 채 돌아왔다. 전시회 제목에 딱 쓰인 것이 모네인지라 모네의 수많은 작품이 어느 정도는 될 줄 알았더니 모네의 작품은 1점이었다. 모네는, 그러니까 미끼였던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Johannesburg Art Gallery, JAG)’의 주요 소장품 143점에 모네 작품이 하나일 줄 어찌 알았겠는가. &nbsp; 사실 대부분이 그렇지만 모네, 마네는 화가의 일대기도 그림도 제대로 본 적 없었던 것 같다. 교과서에 조그맣게 있었던 그림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 외에는 다른 책을 통해서 보다 자세히 접해 보지 못한 화가였다. 우리나라는 ‘고흐’에 관한 책은 정말 많은데 생각보다 다른 화가들에 대한 책들은 많지 않다. 아니, 고흐에 관한 책이 너무 절대적인가. 두 화가의 이름은 기억하지만 둘 다 같은 제목으로 그린 그림 때문에도 헷갈렸고 주의깊게 살펴보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전시회에서 본 모네의 그림은 팸플릿에서는 아주 인상적이었지만 전시회에서는 인상적인 기억이 되지 않았다. 작품이 한점이기에 오히려 더더욱 모를 화가로 남았는데 이 책을 보고 모네와 마네를 명확히 구분한다.&nbsp; 마네와 모네는 대조적이구나. 비슷한 화풍이었던 것 같다며 마네, 모네를 한 유형 한 묶음으로 생각했는데, 두 화가의 그림과 일대기를 보며 어쩌다 이런 혼란을 고정시켰는가 싶었다. 미술 수업을 제대로 안 들었나?! “풀밭 위의 점심 식사” 때문이었을까!&nbsp; 인상주의라는 이름 하에 간단한 인상을 말하자면 마네는 선명함, 모네는 흐릿함이다. 두 화가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화가로 마네가 모네보다 연상이며, 동일한 제목으로 그린 그림이 몇 있지만 마네가 ‘인물’에 중심을 둔 사실주의적 그림을 주로 그렸다면 모네는 ‘풍경’에 중심을 둔 ‘인상주의’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대충 요약하는데 저자는 세련되게 이들을 비교하여 보여준다.  &nbsp;  마네는 의도적 구성이나 생략으로 화가 자신만의 느낌을 나타내는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인물화에 관심이 많았고 그에게는 모델이 매우 중요했다.  &nbsp;  마네는 모더니즘을 연 사람으로, 모네는 최초의 회화 혁명을 체계적으로 일으킨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nbsp;  &nbsp; 마네와 모네는 동시대를 살며 교류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 책은 이런 마네와 모네의 삶과 작품을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동일한 제목의 그림이 각각의 특성을 가진 채 어떻게 다른지, 잘 보여주고 있다. &lt;풀밭 위의 오찬&gt;(대체로 그림 제목이 풀밭 위의 식사, 풀밭 위의 점심 식사, 풀밭 위의 오찬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이 책은 풀밭 위의 오찬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오찬’ 표현이 이상하게 별로다.), &lt;생리자르역&gt;을 비롯하여 아르장퇴유에서 그린 마네와 모네의 그림들도. 앞의 두 작품이 마네오 모네의 명확한 차이점을 보여준다면 모네가 살고 있던 아르장퇴유에서 모네 부부를 그린 마네의 그림은 아르장퇴유에서 모네가 그린 그림들과 유사한 형태를 보여준다. &nbsp; 이 책에서 두 화가를 알게 되긴 하지만 기억에 남는 건 “에밀 졸라”를 비롯한 평론가이기도 했다. 두 화가는 파리 화단의 인정을 위한 살롱전(국전)에 끊임없이 출품하였지만 대체로 평단으로부터 ‘악평’을 받았다. 이 때마다 두 화가의 그림을 분석하여 그림을 해석하고 화가의 의도를 설명하며 그림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것은 에밀 졸라였다. 전통적인, 익숙함에 길들여지고 그것만이 옳고 조금이라도 다르면 ‘틀린’ 것으로 치부하는 다른 평단을 향해 제대로 된 비평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당시에도 누드 그림은 성행했는데, 그러고 보면 왜 그다지도 ‘누드’ 그림에 열광하였는지 참 모를 일이다. 그런데, 마네의 그림만은 적나라하게 공격받았다. 모두들 외설적이라 비난했고 황제는 “뻔뻔스러운 그림”이라고 비난했다. 이 그림은 그래도 ‘낙선전’에 전시되었고 황제의 비난 덕분에 홍보가 되어 인기가 좋았다. &nbsp; 이 책은 마네와 모네에 대한 평단의 비난에 대한 에밀 졸라의 비평이 잘 담겨 있다. 에밀 졸라의 시각으로 그림에 대한 비평을 보고 있노라면 오늘날 이 두 화가를 대표하는 평들이 에밀 졸라에게서 시작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평을 저자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원문을 번역하여 그대로 보여주는 점이 좋았다. 이를 보면서 그림에 문외한인 내가 그림에 대해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눈으로 보고 뭔가를 느끼거나 혹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때, 어떤 점이 포인트가 되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게 한다. 물론 두 화가의 작품을 다룬 책인데도 “에밀 졸라”만 생각나는 것도 있지만.&nbsp; 두 화가의 공통점은 평단에 비난 단골이라는 점이다. 이들에 대한 비난에는 ‘기존과 다르다’, ‘새롭다’, ‘낯설다’라는 평이 많다. 그리고 이것을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는 형태로 이야기했다. 그렇기에 이들은 오늘날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낸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바로 ”과거의 전통적인 형식을 파괴하고 미술 자체의 본질과 순수성을 추구했던 혁신적 태도”인 “모더니즘”이다. 저자가 처음 설명하고 있듯이 마네는 “모더니즘”의 선구자이자 인상파를 연(물론 본인은 인상파이기를 거부했다 한다) 화가로 모네는 인상주의의 대표 주자로 “최초의 회화 혁명을 체계적으로 일으킨 사람”이자 추상 미술을 연 화가로 대표되고 있다.&nbsp; 이처럼 훗날에도 이름을 날리며 영향력 있는 화가가 되기까지 이들에게 온갖 말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동료, 평단, 친구, 화단,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두 화가를 둘러싼 반응을 세밀하게 보여주는 이 책을 통해 누군가 ‘나( 더더군다나 예술가라면)’ 를 알아주는 이 한 명이라도 만난다면 참으로 행복한 인생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nbsp;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1995/99/cover150/k17253174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9959971</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한국문학</category><title>환상의 존재들[﻿괄호 밖은 안녕] - [괄호 밖은 안녕]</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83175</link><pubDate>Mon, 31 Aug 2026 15: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8317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52137743&TPaperId=1748317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28/77/coveroff/k15213774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52137743&TPaperId=1748317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괄호 밖은 안녕</a><br/>이주혜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04월<br/></td></tr></table><br/>환상의 존재들<br>괄호 밖은 안녕,&nbsp;이주혜, 문학동네, 2026-04-10.  &nbsp;  <br>&nbsp; 책을 덮고 나면 ‘번역’이란 단어가 둥둥 떠오르는데 아, 이주혜 작가가 번역가이기도 하다는 걸 알았다. 소설집 속에 반복된 ‘번역’이란 언어와 언어만이 아니라 존재와 비존재, 동식물, 기억에 대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이 아니라 항상 ‘낯선 곳’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서 공간에 대한 ‘번역’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 모든 것들, ‘언어’가 아닌 것을 ‘의미화’하여 해석하는 이야기들. 그래서 한편으론 이 낯선 곳에서 여행하면서 ‘번역’으로 인한 어려움이 전혀 없다. 「안개의 기분」에 등장하는 “사슴 키리‘의 능력을 부여받은 것처럼, 어찌 이다지도 소통이 어려움없이 이어질 수 있는 것인가.&nbsp; 번역으로 힘든 몸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든 어떻든 소설 속 인물들은 여행을 떠나는데 이 여행 장소는 주로 ‘일본’이다. 일본은 또한 ‘번역’과 같은 과정을 거쳐야 언어를 이해하는 공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왜 굳이 여행의 장소는 일본인 걸까. 세계화가 된 지 오래, 점점 다른 나라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일본’ 배경은 이제 한국소설에서 아주 기본으로 자리잡은 느낌이다. 일본이라는 공간이 지리적으로 가까워서일까. 분명 우리나라와는 심리적정서상 이질감과 거리낌이 있는 ‘일본’이란 나라, 꼭 이 나라가 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가, 필연성이 있는가 생각해볼 때가 있다. 젊은 세대에서 ‘일본’에 대해 우호적(?)이고, 한국인이 가장 많이 여행가는 나라가 ‘일본’이라는 것을 본 것도 같다. 굳이 배척할 필요야 없지만 굳이 더 챙기고(?) 그럴 것까지야 있는가 생각하기도 한다. 아직 뭔가 해결되지 않은 듯하여. 하지만, 그런 점에서 또한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인이 주는 ‘소설적인 요인’들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문제는 그래서 일본이 배경인 소설들이 주는 이미지, 정서가 대체로 비슷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nbsp; 아무튼. 소설에서 일상을 벗어나고픈 이들은 자신의 언어가 닿지 않는 낯선 곳을 선택한다. 여행은 보다 ‘낯선 방향으로’ 가서 ‘익숙함을 발견’하고 오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그랬던가. 여기,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낯선’ 곳으로 가, ‘낯선 것 이상의 기묘한 것’을 만나고 ‘과거를 기억’하고 온다. 과거의 ‘기억’을 괄호 밖으로 끄집어내어 ‘해석’하고 온다고 해야 할까. 살면서 타인에 의해서든 자이로든 단단히 갇혀 두었던 그 기억 속 말들을 끄집어낼 때, 그것은 적어도 해석되고 해체되어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게끔 만든다. 그렇다면 이건 치유의 과정인 건가. 「안개의 기분」에서 마주치는 말하는 사슴 ”키리“를 보자. 느닷없이 나타난 키리는 “마음을 다하면 저절로 상대방의 말을 할 줄 아는” 존재다. 소설집에서 이런 존재는 불쑥 나타난다. 여행을 떠난 ‘나’는 비로소 ‘마음을 다하여’ 자신의 마음 속에 숨겨놓은 ‘언어’를 마주할 용기를 가지게 된 걸까. 그것을 위해 작가는 툭툭, 여행 속에서 이러한 존재들을 내밀고 있는 것인가.  &nbsp;  여자는 음성언어 외의 언어 소통에 능숙했다. 오직 손짓과 몸짓, 표정만 동원할 뿐인데 이상하게도 여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저절로 이해되었다. 여자는 마임 배우라고 해도 좋을 만큼 동작이 섬세하고 표현력이 뛰어났다. 몸에서 출발한 언어는 의식적으로 해석할 필요 없게 단단한 괄호에 담겨 곧바로 내 몸에 도착했다._「괄호 밖은 안녕」  &nbsp;    「괄호 밖은 안녕」속 비오는 날에 만난 맨발의 여자도 그렇다. 사슴 키리처럼. 그러나 이런 존재들이 정말 존재하는지, 아니 이들을 마주쳤는지는 모를 일이다. 환상처럼 유령처럼 마주한 이들에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놀라지 않고, 자연스럽게 융화되고 그들 너머의 기억을 소환하니까. &nbsp; 어떤 기억들을 소환하느냐, 「안개의 기분」에서는 민해라는 이름이 ‘민중해방’의 민해인지를 묻는다거나 외할머니와 엄마와 아들이 성이 같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기억을, 「괄호 밖은 안녕」에선 가정폭력에서 도망친 이웃집 여자에 대한 기억과 자신의 가족사를, 「초록 비가 내리는 밤」에선 남성 가부장제의 피해자를, 「여름 손님입니까」에서는 내가 질투한 엄마의 조카인 영란 언니를, 「순영, 일월 육일 어때」에선 결혼과 임신을 이유로 ‘수은’의 인생에서 사라진 언니다. 대체로 ‘가족’에 관한 기억이다. 위안이 되는 존재로서의 ‘가족’ 인지 상처를 주는 가족인 것인지.&nbsp; 「초록 비가 내리는 집」은 인상적이다. 가부장적인 남편 ‘박천일’에게 40년이 넘는 세월을 순종하며 살아야 했던 ‘양순덕’이 병으로 사망하며 화분 100여개와 그 식물을 키워낸 기록을 적은 노트를 남긴다. ‘박천일’은 아내의 기록을 읽어내지도 식물을 키워내지도 못하고 ‘손우정’에게 집을 세주는데 사회에서의 또다른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손우정’은 ‘양순덕’의 기록을 보며 식물을 되살리고자 한다.<br> 손우정은 비를 피하는 게 화분에 이로울지 맞는 게 이로울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헛웃음이 터졌다. 저 많은 화분 중 초록으로 살아난 식물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손우정은 아직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식물들이 번개와 폭우를 견뎌내리라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로 화분들 간 틈이 거의 없게 바짝 붙여주고 가장자리의 아주 작은 화분들은 창고 처마 밑에 옹기종기 모아놓았다. 손우정은 화분 백 개와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속삭였다. 우리 꼭 살아남자.  &nbsp;  &nbsp; 식물을 가꾸는 아내와 함께 산 남편이 전혀 해내지 못하는, 아내의 기록마저도 무슨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는 남편과 다르게 타인인 ‘손우정’은 ‘양순덕’의 식물에 대한 기록을 읽어내고 해석하고 그를 바탕으로 자신이 당한 억압에서 해방되고 치유하고자 하는 ‘손우정’은 서로 본명도 모르지만 서로를 위로하는 「할리와 로사」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싱글맘의 서사, 가정폭력 피해자, 돌봄 노동에 갇힌 여성들 등 가부장제, 남성 피해에 맞선 여성의 상처에 대한 공유와 연대를 생각나게 한다. "우리 꼭 살아남자".&nbsp; 생각해보면 “마음을 다하면” 될 일인데, 해석할 수 없는 언어로 존재하는 관계들이 있는 법. 그리하여, 낯선 여정이 해방이 되고 ‘이소’를 꿈꾸는 이들이, 괄호 밖으로 나가기 위한 존재들이 소설에 가득 차 있다. 그들에게는 아직 이 현실에서는 환상의 존재들이 필요하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28/77/cover150/k15213774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0287776</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한국문학</category><title>습설의 삶[복자에게] - [복자에게]</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83162</link><pubDate>Mon, 31 Aug 2026 15:2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8316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74496&TPaperId=1748316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4977/7/coveroff/895467449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74496&TPaperId=1748316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복자에게</a><br/>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09월<br/></td></tr></table><br/>습설의 삶<br>복자에게,&nbsp;김금희, 문학동네, 2020-09-09.  &nbsp;  <br>  &nbsp;&nbsp;‘고고리섬’이 어디메쯤 있는지 찾아본다. 가장 닮았을 섬으로 상상하며 섬 찾기를 멈춘다.  제주의료원 산재 사건을 찾아본다. 제법의 기사들이 검색된다. 10년, 재판은 길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을 읽게 되면, 사실 먹먹함이 더 배가된다. 여기에 그들이 살았었구나, 어딘가에 살고 있겠구나, 좀더 실체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소설 속 문장을 빌려오자면 ‘습설’의 삶이 내게로 옮겨오는 듯하다. 내 삶은 옮겨가지 못하고 겹겹이 습설이 되어가기에, 그렇다고 한다면.   &nbsp;  “사람을 한번 만나면 그 사람의 삶이랄까, 비극이랄까, 고통이랄까 하는 모든 것이 옮겨오잖아. 하물며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언제나 억울하고 슬프고 손해보고 뭔가를 빼앗겨야 하는 이들이야. 이를테면 판사는 그때마다 눈을 맞게 되는 것이야. 습설濕雪의 삶이랄까. 하지만 눈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으려면 빨리 털어내야 한다고.”  &nbsp;  &nbsp; 사는 동안 무엇을 털어내어야 했을까. 오래도록 끌어안고 있거나 푹 파묻힌 습설의 삶을 사는 이로써 새삼 묻게 된다. 털어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nbsp; 작가는 소설을 다 쓰고 나서 한 문장을 떠올린다면 “나는 실패를 미워했어”라는 문장이라고 했다. 순간 난 생각했다. 누구의 실패일까. 무엇을 실패라고 보는 걸까. 내겐 ‘습설의 삶’이 기억나는 한 문장이다. 돌이켜 보니 “억울하고 슬프고 손해보고 뭔가를 빼앗겨야 하는 이들“이라면 그 삶 내내 실패와 실패의 거듭이겠구나 싶다. 다만, 저 말은 ‘판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의 말이다. 우리나라 판사들의 행태를 보면 그들이 정말로 ‘습설의 삶’을 살고 있는가 의구심이 든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듯이 습설의 삶을 느끼는 판사들도 분명 있겠지. 이영초롱 판사는 어떤가. &nbsp; 소설은 나, ‘이영초롱’이 1999년 열세 살 한때 살았던 고고리섬에 좌천되어 오면서 어린시절 만난 ‘복자’와의 시간을 회상하고, 또한 재회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부모의 사업 실패로 고고리섬 고모에게 맡겨진 이영초롱은 ”씩씩하고 많이 웃고 더 진취적인 아이“ 복자를 만남으로써 섬생활을 버텨낼 수 있었다. 하지만, 섬 어른들 사이 갈등에 휘말린 상황에서 ”자주 상처받고 여러 번 실망한 아이가 쉽게 선택하는 타인에 대한 악의“로 이영초롱은 복자의 간절한 부탁을 거부함으로써 상처를 주고 화해하지 못한다. 이 이후로 이영초롱은 편지를 쓴다. 복자에게, 복자야 안녕?, 복자야, 복자에게…… 끝나 버린 그들의 관계처럼, 부치지 못하고 폐기되어 버린 편지들이다.<br>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자가 필연적으로 짊어지게 되는 무게와 끊임없이 유동하는 내면의 갈등과 번민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nbsp;  &nbsp; 어린 시절의 이영초롱은 ‘어톤먼트의 브라이오니’가 연상되었는데, 필시 훗날 제 이러한 행동을 후회할 것이다 싶었다. 일찌감치 고모로 인해 ”미안함“을 인생에서 가장 무거운 기억으로 간직했기에, 이영초롱은 눈을 빨리 털어내지 못하는 판사가 되었다고 본다. 눈은 빨리 털어내지 못했는데 법정에서 욕설은 내뱉으면서 이영초롱 판사는 고고리섬으로 가게 된다. 다시 만나게 된 복자는 힘든 삶 속에 있었고…… 그건 어린 시절 그때 이영초롱이 한 일 때문만은 아니지만 이영초롱 판사는 ‘어톤먼트의 브라이오니’가 그랬던 것처럼 ‘복자’의 삶에, 사건에 개입하여 ‘복자’를 위해 ”힘을 쓰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nbsp; ‘복자’는 실제 사건이 모티프가 된 ‘제주의료원 산재 사건’의 당사자다. 병원의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일한 수많은 간호사들이 유산하거나 기형아를 출산했고, 간호사로 근무하다 유산한 복자는 이들과 함께 산재소송을 진행 중이다. 허나, 익숙하듯 ‘병원’과 ‘대형로펌’이라는 거대 자본 골리앗 연합에 이들은 작은 돌조각 하나도 제대로 쥐지 못한 다윗일 뿐이다.&nbsp; 소설은 산재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물론 ‘재판’이라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이영초롱과의 연결이 이루어져 전개된다. 하지만 사건이 중심이 된 소설이기보다는 고고리섬을 중심으로 이영초롱의 고모, 복자에게 엄마같은 이선 고모, 친구 고오세, 그리고 이영초롱의 동료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들은 모두 삶 속에서 각자의 빛과 어둠을 품고 살아가며 복자의 산재 사건도 이의 한 부분이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 연상되는. 소설은 오세가 드론을 띄워 찍은 고고리 영상을 통해 이러한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nbsp;  오세는 드론을 띄워서 찍은 고고리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바다 위에 그 작은 고고리섬이 떠 있는 게 기적처럼 느껴졌다. 연속해서 몰아치는 파도를 견뎌가며 섬은 마치 가지를 뻗듯 선착장과 부두를 만들고 꽃처럼 다채로운 지붕의 집들을 피우고 보리밭과 해바라기밭을 보듬으며 거기에 있었다. 해안의 거친 바위들, 섬의 유일한 공장인 보리 도정공장과 밭둑의 고인돌들까지, 그렇게 위에서 보니 모든 것이 한없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드론이 점점 내려앉아 지붕의 시점이 되고 잠자리들의 시점이 되고 우리의 눈높이가 되고 갯강구들의 자리까지 내려와 착륙하면 슬픔이 먼지처럼 피어올랐다.   &nbsp;  &nbsp; 참, 본질적으로 모든 것은 그 자체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슬픔을 지는 존재들일 것도 같다. 살아간다는 건 사실 얼마나 버거운 일인가. 본능을 감당하는 일도 억제하는 일도 힘겹다. 지성과 이성을 끊임없이 담금질하여 문명인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도 끊임없이 사람들과 관계맺음 속에서 감정을 교류하는 일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nbsp; 하지만 마냥 어렵다, 버겁다, 힘들다고만 할 수 없으니… ”마냥 우울하고 슬플 수가 없어서“,  ‘복자’처럼 “할망! 나! 슬! 펏! 저! 소리치고 나면 슬픔이라는 게 아무것도 아닌 듯하고 그냥 숨 한번 크게 쉬고 나면 괜찮은 듯“ 살아가는 거겠지. 그조차 하지 못했던 이영초롱은 그러한 삶을 깨달아가는 것일테고.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어느 정도는 냉소적인 이영초롱이 유년의 상처와 죄책감을 털어가는, ”나 슬펏저“라고 외치는, ‘실패를 용인할 줄 아는 이’가 되어가는 이야기이다. 나는 이 인생에서 ‘복자’인지, ‘이영초롱’인지.  &nbsp;    &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4977/7/cover150/895467449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49770777</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그냥 끄~~적</category><title>﻿오만원이든 오천만원이든[반의반의 반]</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76379</link><pubDate>Fri, 28 Aug 2026 00: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76379</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42038673&TPaperId=1747637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143/59/coveroff/k742038673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오만원이든 오천만원이든<br><br>백온유,&nbsp; &nbsp;[반의반의 반」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백온유외, 문학동네, 2025-04-02.<br>&nbsp;&nbsp;아버지가 그랬다. 폰지갑에 있던 5만원이 없어졌노라고. 어디에서 없어진 건지는 알지만, 아니 그렇기에 누군가를 의심하지만 자신이 폰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기에 따지지 않을 거라고. 오천만원도 아니고 오만원에서 시작된 아버지의 이 의심은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건강에 대한 염려를 강하게 하기보다 아버지의 과거 행동까지를 소환하며 뭔가 점점 거리를 두게 되고 골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nbsp; 이건 정말 소설같은 이야기다. 백온유의 「반의반의 반」속 영실처럼 오천만원이라고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버지가 그 말을 한 곳은 병원이었고 나는 심각하게 나타났던 섬망을 떠올리며 정말 치매가 진행되는 건 아닌가, 의심했다. 점점 아프고 병들어가는 ‘아버지’에 대한 걱정과 연민이 변질되어 가는 것을 느끼며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이래서 나오는 건가 생각해보기도 했다.&nbsp; 백온유의 「반의반의 반」에서 소설에서 ‘잃어버린 오천만원’의 행방은 ‘영실’이 잃어버렸다고 할 수 없다. 잃어버렸다면 영실은 그 돈을 찾아야 하는데 찾지 않는다. 딸인 ‘윤미’와 손녀인 ‘현진’은 오천만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고 두 모녀는 오천만원을 요양보호사 ‘수경’이 가져갔다고 의심한다. 정작 ‘수경’은 영실이 자신에게 준 것이라 하고 영실은 ‘수경’을 감싸며 더 의지한다. 요양보호사가 영실을 돌보고 있는 것처럼 영실은 인지능력에 어려움을 겪는 치매 환자다.&nbsp; 오천만원은 각자에게 과거를 떠올리고 미래를 그리게 한다. ‘윤미’와 ‘현진’이 떠올리는 과거 속에서 ‘영실’은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이른 나이에 현진을 낳고 젊은 시절 이혼하며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살아온 ‘윤미’는 결정적인 도움이 필요할 때조차 ‘영실’의 외면으로 딸인 ‘현진’과 오래도록 헤어져 있어야 했다. 이때, ‘영실’이 ‘윤미’에게 한 말은 “현진이는 내가 돌볼 테니 죗값을 잘 치르고 와라˝였다. 그렇기에 점점 ‘윤미’는 마음이 자꾸만 차가워지고 ”오한처럼 다가오는 원망이라는 감정“을 느끼며 어머니의 모성에 의문을 가진다. 계속 어머니에게는 허전함을 느끼게 될 것이지만 이런 어머니의 인색한 사랑을 서운해하는 것조차 부질없을 정도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nbsp; 그러면 ‘현진’은 어떤가. ”어릴 때부터 현진은 자신의 외할머니가 남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왔고 ”할머니를 조금도 닮지 않은 엄마를 바라보며 줄곧 아쉬움을 느꼈다“. ”오십대 중후반까지도 할머니에게는 영화배우 같은 아우라“가 있었고 ”외로움과 고독의 냄새를 풍기며 자식들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어느 정도 위안을 가지기도 했다. 강인한 할머니, 하지만.&nbsp;현진은 할머니가 고관절 수술을 받은 후로 어느 정도는 자신과 엄마에게 위악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발음이 어눌해질 때, 괄약근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때, 다리에 힘이 없어서 손녀의 작은 등에 억지로라도 업혀야 할 때, 그럴 때마다 정신이 온전한 건 너무 괴로우니까. 자기 자신이 초라해질수록 말을 함부로 하고 노망을 가장한다고 이해했다. 할머니는 천부적으로 연극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달았으니까. 그런데 지금의 태도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어디까지가 위악이고 어디까지가 노망인지 알 수 없어졌다.&nbsp;&nbsp; 애정과 사랑이라는 게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상호 주고받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 DNA에 박힌 것처럼 맹목적이고 당연한 일이라거나 사람의 도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따위로 복잡미묘한 마음을, 현실적인 어려움이 해결될 수 있을까. 이 소설에서 손녀 ‘현진’이 바라보는 ‘영실’의 모습이 인상깊게 남는다. ”위악“이란 말이. 내가 느낀 지점이기도 하다. 분명히 아픈 ‘노인’은 위악을 부릴 줄 안다. 아픔을 과장할 줄도 안다. 그리고 ‘영실’처럼 돈에 집착하는 모습을 본다. 그것이 현실적인 치료를 하게 하고, 아픈 몸을 의탁할 자식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힘’일 테니까.&nbsp; 또한 ‘윤미’처럼 내가 돌봐야 하는 ‘환자’가 된 ‘아버지’를 보며 점점 ‘많이 힘들고 지친 아픈 환자’, ‘늙은 아버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아버지로서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하셨느냐, 내게’를 따져가게 되는 것을 본다. ‘도리’에 매몰되어 ‘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빠져 있다가 점점 ”내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늘어간다. 미래를 그리기보다 ‘과거’의 일들을 자꾸 생각하게 되는 일이 잦다. 돌봄이란 끝나지 않을 일이다. 멋지고 다정한 아버지가 아니었던 과거를 계속 떠올리며 ‘반의반의 반’으로 줄어드는 마음을 만들어내는 게, 아픈 부모를 돌보는 많은 이들이 겪게 되는 일일까. ‘영실’이 잃어버렸다는 오천만원이, 아버지가 잃어버렸다는 ‘오만원’이 실제하는 힘을 작용하긴 할까. 이 불편한 감정적 소모가 반의반의 반이라도 줄어들 수 있는 방법은 찾을 수 있을까. 삶은 소설보다 더 소설같다는데, 소설에 대해 삶을 묻고 싶어진다.&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143/59/cover150/k74203867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1435920</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그냥 끄~~적</category><title>창문 넘어 도망치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76281</link><pubDate>Thu, 27 Aug 2026 23: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76281</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72037765&TPaperId=1747628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832/83/coveroff/k172037765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38832&TPaperId=1747628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0048/51/coveroff/8936438832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창문 넘어 도망치기<br><br>&nbsp; 최근 재활용센터에서 절단된 다리가 발견되었다. 이 뉴스 이후 그 다리는 요양병원 입원 환자가 다리가 심하게 부패하여 절단한 것이라는 뉴스가 이어졌다. 어느 요양병원 환자의 입에서는 구더기가 나왔다는 뉴스가 전해진지 며칠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사건을 보면서, 다시금 요양병원에 대한 노인들의 두려움과 기피가 크겠구나 생각했다.&nbsp; 요양병원을 가는 것은 이제 끝이 아니겠느냐는 인식, 심각한 몸 상태에도 요양병원을 꺼리는 아버지에게 요양병원을 가라고 더 이상은 말하지 못했다. 우리 아버지는 절대 ‘알란’이 되지 못할 것이므로 더더욱.&nbsp; 창문 넘어 도망치는 대신 자식들에게 소리부터 지를 아버지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점차 변화하는 상황에서 요양병원을 믿고픈 마음이 가득한데, 현실에서 나타나는 요양병원 사건을 접하고 보면 이로 인해 안타깝게 욕을 먹는 병원도 존재하겠지만 안타깝다.<br>&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nbsp;아버지의&nbsp;해방일지, 정지아, 창비, 2022-09-02. /&nbsp;그 개와 혁명 - 2025년 제4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nbsp;예소연 외,&nbsp;&nbsp;다산책방, 2025-02-18.  &nbsp;  &nbsp;  &nbsp; 절대 혁명할 수 없는 아버지로 인해&nbsp;「아버지의 해방일지」와&nbsp;「그 개와 혁명」&nbsp;속 아버지가 남다르게 느껴진다. 아니, 사실 창문 넘어 도망치신 100세 노인이 더! 아버지도 100세가 되면 달라지려나.&nbsp; 죽음이 유쾌할 수는 없겠으나 삶을 보다 긍정적인 마무리로 그리고 세상에 대한 포용과 이해를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데, 그리하여 엄숙하거나 혹은 형식적인 장례식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그런 것을 생각해봤는데 안될 일이다. 좀더 편안하게는 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 &nbsp; 한편으로 그것은 내가 삶에 가지는 태도와도 관련되어 있음을 느낀다. 아버지가 삶에 대하여 얼마나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nbsp;&nbsp;「아버지의 해방일지」&nbsp;속 아버지와&nbsp;「그 개와 혁명」&nbsp;속 아버지는 닮아 있다. 그래서 두 소설이 너무 닮은 느낌이었다. 두 소설 속에 나타난 혁명. 전위적인 분위기, 무엇보다 두 아버지들의 성격이나 행동들이 너무나 같다. 그러나 소설을 소설로 보지 못하고 ‘아버지’의 생애에 더 초점을 두고 보니 내게 이 두 소설은 낯설게, 그리고 멀게만 느껴지던지.&nbsp; 새삼스레 아버지의 생애가 어떠했다고 해도 마지막 즈음 아버지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해방’하고 죄고 있던 것을 좀더 놓기를 바랐건만. 그렇게 되지 않는 듯하다. 오히려 좀더 가지지 못한 것에 분노하고 보다 더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없을 거라는 불안에 휩싸인 모습을 보면서 생각해 본다.&nbsp; 너무 오래 생각해보지 않은 부모님의 노후. 죽음을 향해 가는 나이에 이들에게 나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까지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돌봄이란 것이 사회화로 대체되고 있지만 온전히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될 일이 없다. 돌봄은 부모에게도 자식에게도 힘겨운 일이 되고 있다. 아니, 죽음이 그런 건가.&nbsp; 소설 속 부녀 관계가 낯설어서인지 더더욱.<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0048/51/cover150/8936438832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00485187</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그냥 끄~~적</category><title>유령들의 별점[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70600</link><pubDate>Tue, 25 Aug 2026 12: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70600</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92137800&TPaperId=174706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0/97/coveroff/k992137800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유령들의 별점<br>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 강순희 말하고 유시민 듣다 유시민, 김세라, 은빛, 2026-03-25.  &nbsp;  <br>&nbsp;  &nbsp;&nbsp;희한한 광경을 봤다. 그것도 ‘책’이 있는 곳에서, ‘독서’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공간에서.&nbsp; 이 광경에 놀라 흔한 말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고 기가 막혀 탄성도 튀어나왔다. 참 애달프다 싶기도 하고 짜친다는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특정 시기부터 집중적으로 벌어졌던 일련의 사태의 연장선이겠거니 해도…… 유럽 도시 기행 3편이 출간되기 전이었으니 집중될 곳이 여기였나? &nbsp; 내게 이 책은 ‘강순희의 삶’이었다. 특별히 ‘인혁당 사건 희생자의 아내 강순희’도 아니었고 그냥 ‘강순희’였다. 그건 강순희 삶의 일부였을 뿐이다. &nbsp; 발단은 이 책은 ‘강순희’의 이야기이니 ‘강순희’에 대해 더 검색하다 출판사 소개글도 읽고 스크롤을 더 내리던 과정에서 본 텅 빈 별점 때문이다. 알라딘 서재 리뷰는 별점을 작성토록 하고 있는데 별점을 매기는 게 탐탁지 않아 서재에 글을 쓰던 초창기에는 거의 페이퍼로 작성했다. 어느 순간 리뷰로 몽땅 올리고 있지만 여전히 내 서재는 페이퍼 수가 더 많다. 타인의 글에 별점을 매기는 건 쉽지 않다. 좋았어도 별로였어도 편하지 않다. 내 별점이야 내 기준에 따라 부여하는 건데도 신경쓰인다. 어차피 내 감상을 적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공개된 공간에 작성하는 마당에 내 기준의 일관성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보면 소심하게 대충, 어떨 땐 신중하게 대충 별 수를 클릭하고 별점이라는 게 없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부여할 ‘별점’에 대해 항상 조심스럽다는 말이 더 맞다. 아무튼, 별점!이 어떤 상품을 평가하는데 가시적이긴 하다만, ‘테러’라는 말처럼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순수한 상품의 가치를 난도질하는 데도 직빵이긴 하다. &nbsp; 그래서 별점. 뜬금없이 책의 별점과 리뷰, 나아가 좋아요를 이렇게 들여다보기도 처음이다. 한편으론 그건 또 타인의 이 책에 대한 의견이고 감상이니까. 그런데, 별점이 너무 낮은 리뷰가 연속적이라 어떤 부분들이 별로였는지,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를 보았는데, 이런!  어떻게 서로 다른 리뷰어들의 서재 구성이나 리뷰의 수, 리뷰를 작성한 시기, 리뷰의 글자체와 글자 줄간격, 내용들이 거의 같을 수가 있지? 별점에 색깔이 있는 이들의 리뷰를 보면 각각 개성있는 서재 구성과 글자체가 보였다. 뭐, 그럴 수도 있다 싶다만. 그럴 수 있지. &nbsp; 좋아요 수가 너무 많아 일일이 클릭해봤다. 좋아요를 누르면 ‘이 글을 좋아요 한 사람들’ 목록이 뜬다. 딱히 서재의 글이 없기도 하지만 좋아요 누른 사람들의 서재 구성과 글자체나 글의 내용이 왜 다 비슷한 걸까.&nbsp; 재밌는 건 리뷰에는 구매자도 뜬다는 거다. 구매하지 않은 이들의 별점은 왜 또 그렇게 하나같이 낮게 나타나는지. 물론 책을 사는 곳이야 오프라인도 있고 다른 서점도 있으니 꼭 구매자로 표시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나처럼 도서관에서 주로 빌려 읽는 경우도 많을 테다. 이 책의 경우 출간되고 나서도 몇 달 내내 계속 지역의 전 도서관 대출현황을 보았을 때, 작은 도서관에서도 쉽게 대출이 되지 않을 만큼 인기도서였던 걸 생각하면 책을 빌려 읽기도 쉽지 않았을 거다. 읽고 싶은 책도 무수히 많은데, 시간들여 공들여 굳이 맘에 안 드는 이의 책을 읽는 심리는 뭘까. 아니, 적극적으로 그 책이나 작가에 대해 ‘의견’을 피력하고 감상을 공유하려는 그 마음의 기저는 뭘까.&nbsp; 물론, 안다. 왜 그러는지.&nbsp;&nbsp; 그냥 너무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고 그게 시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 오늘부터 또 계속 여기저기 일어나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 굳이 이 곳을 찾아와 다시 들여다보았다는 거다. 어제 이후 날짜로 업데이트 된건 없는 건가 싶어서, 여전히 그게 잊혀지지 않아서, 이걸 굳이 글로 남긴다. 나도, 참.&nbsp;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이 글을 좋아요 한 사람들’ 수십 명 이름이 일렬로 뜨는데 하나같이 마치 유령들이 줄지어 선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이름 옆에 프로필 이미지가 하나같이 텅 빈 채 있어서다. 마치 유령들이, 귀신들이 일렬로 늘어선 채 ‘영혼없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아서, 갈 곳 모르고 자꾸 엉뚱한 길로 가는 것 같아서, 이 잔상이 너무 깊게 남아 잊혀지지 않는다. 서재의 많은 이들이 서재명에 따라 프로필 이미지를 정체성처럼 나타내며, 수많은 책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책 이야기 하는데, 책을 토대로 삶을 이야기는 책이 있는 공간에서 무엇 꺼낄 것이 있다고 나를 감추고 영혼없는 모습으로 적의만 가득한 걸까.  아, 그러고보니 나도 프로필 이미지가 없다. 그건 귀차니즘 때문이기도 하고 뭘 넣어 알라딘 서재의 ‘나’가 될까 확정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새삼 유령처럼 보인 이미지를 떠올리고 보니 프로필 이미지를 채워넣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nbsp;    &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0/97/cover150/k992137800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509769</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한국문학</category><title>또한 나의 것[오직 그녀의 것] - [오직 그녀의 것]</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59846</link><pubDate>Wed, 19 Aug 2026 15: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5984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72031546&TPaperId=1745984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298/43/coveroff/k37203154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72031546&TPaperId=1745984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오직 그녀의 것</a><br/>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09월<br/></td></tr></table><br/>또한 나의 것<br>오직 그녀의 것,&nbsp;김혜진, 문학동네, 2025-09-30.  &nbsp;  &nbsp;  &nbsp;어떤 형태의 직업을 가진 이든 평생 그 일을 이어온 사람의 생애는 비슷하지 않을까. 거기에 내게 조금 익숙한 세상엔 적절한 동조나 차별성을 찾아내려 할 테고, 내게 낯선 세상의 이야기는 호기심과 의문을 가지며 바라보게 될 터이다. 편집자의 삶이란 잘 안다고도 낯설다고도 할 수 없는 세계, 이 책을 펴고 읽는 순간에도 페이지가 몇 장을 넘어가는 순간에도 이 책이 이런 내용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nbsp; 1990년대 초 출판계에서 일하는 여성의 이야기는 엄청난 ‘사건’을 바탕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일’을 주요 소재로 소소한 업무와 함께 제 삶을 이야기하는 회고록이나 자서전 형태의 일기와도 같다. 어떻게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일 중에서 왜 그 일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된 인연들, 그 과정에서 일에 대해 자신이 가지는 감정과 태도들을 담고 있어 어쩌면 후배들에게 또는 어떤 직장의 신입들에게 ‘일하는 자세’를 들려주는데 적합한 이야기처럼도 느껴진다. 사회초년생에서 책임을 지는 위치에 올라선 이가 들려주는 어쩌면 직업에서 성공한 이야기처럼. 그래서, 그녀는?&nbsp; 그녀, ‘석주’가 조금이나마 목적을 가지고 생기있게 활동한 건 대학 시절 문학 창작 동아리에 가입한 것, 거기에서 나아가 소설 창작 수업을 청강한 것이다. 이후로 교사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뜻에 맞서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과 함께 스물 넷에 ‘교한서가’에 교열자로 입사한다. “크게 보면 오탈자와 문법적인 실수를 바로잡는 것이 교정이고, 문맥과 흐름을 파악하여 표현과 문장을 다듬는 것이 교열”로 교열자는 교정자로 원고의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는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다. 교열자로서 석주는 상사 ‘오기서’ 아래에서&nbsp;“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은 주제넘어 보였고, 과도하게 수용적인 자세는 태만하게” 보여 “원고에 어느 정도로 관여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며 점차 교열 업무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진다. 이후 ‘오기서’의 추천으로 부서를 이동하여 인문교양부 편집자로 일하면서 ‘편집자의 마음 같은 것’이 자리하며 편집 일에 대한 열정이 셩겨난다. 편집자 소모임을 찾아가기도 하며 “자신과 비슷한 속도로, 닮은꼴의 꿈을 좇는 듯” 보이는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었”으며 소속감을 느낀다. 또한, 그곳에서 만난 편집자 ‘조원호’와 매일의 산책같은 사랑과 연애를 시작한다.  &nbsp;  그러게요. 참 이상하죠? 일이 쉬워지는 법이 없으니. 오래하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 일은 그렇지도 않아요. 좋아하는 게 이렇게 무섭습니다. 밉고 싫고 그만두고 싶어도 꾸역꾸역 해나가게 되거든요. 예전에 제 사수가 그러더군요. 뭘 좋아한다는 게 원래 그런 거라고. 더 좋아하고 많이 좋아할수록 마음 다칠 일이 많다고. 그땐 무슨 이런 감상적인 소릴 하나 싶었는데 지나고 나니 틀린 말도 아니더라고요.   &nbsp;  &nbsp; 물론 연애만큼이나 일에 대한 ‘석주’의 열정과 애정 또한 깊어간다. 직장생활을 해본 이라면 반복된 일 속에서도 혼을 쏟아가며 일을 해내고, 소진이 오기도 하는 반복된 업무의 일상을 보낸다는 것을. 그 과정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와 트러블이 있으면 일은 더 힘들어지기도 하고 보상처럼 승진이 걸려 있다거나, 주어진다면 더욱 열정적으로 그 일에 매몰되기도 한다는 것을. 출판사의 편집자인 석주에게는 어땠을까.&nbsp; 출판사에서 일하는 편집자, 문학 동아리에 가입하고 소설 창작 수업을 들은 이라면 이후 업무와 관련하여 ‘석주’가 맡게 되거나 하게 되는 일이란 건 예측이 된다. 또한 1990년대 출판사에서 일하는 여성 편집자라면 당시에도 당연하게 흘러갔을 노동하는 여성, 전문직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분위기가 어떠했을 지도 짐작된다. 일과 사랑이란 왜 이분법처럼 나눠지는 선택이어야 하는 것인지.   &nbsp;    “그럼에도 먹먹함이 밀려왔다”  &nbsp;  &nbsp; 그렇다. 이 소설은 ‘석주’가 말하는 것처럼 “닮은꼴의 하루가 반복되는 진부한 이야기 같았다. 극적인 사건도, 놀라운 반전도 없는 서사, 개성도 매력도 없는 주인공이 완성해 나가고 있는 그 스토리”와 같다. “어떤 독자에게도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못할 것 같”은 스토리. 하지만 그럼에도 먹먹함이 밀려오는.  &nbsp;  시시하고 평범한 그 이야기는 다름 아닌 자신의 삶이었다. 석주가 미약하게나마 감동을 느낀 건 쓰지 않은 것과 쓸 수 없는 것까지 모두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대단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그 여정은 오직 석주에게 속한 것이었고 그녀만의 것이었다.<br>&nbsp; 여기에서 소설의 제목이 등장한다. 오직 그녀의 것. 업무도 다르고 처한 상황도 다름에도 ‘석주’의 서사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 그것은 ‘석주’가 하는 일을 다른 업무로 대체한다고 했더라고 보편적으로 느끼게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얼마간 자신과 닮은 듯했고 때때로 자신처럼 느껴지는” 이야기. ‘석주’가 그 마음까지를 모두 알려주는 꽉 닫힌 엔딩.  &nbsp;  특별한 사건도, 감정의 동요도 없는 그 이야기에 어째서 마음이 끌리는지 석주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가 읽는 건 작가가 상상한, 현실에는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인물은 얼마간 자신과 닮은 듯했고 때때로 자신처럼 느껴졌다. 석주는 알고 있었다. 이야기가 향하는 곳이 자신의 내면이라는 것을. 허구의 서사가 불러일으키는 것은 내밀한 기억의 감정이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신에게도 돌아오는 것이 실은 읽는 행위의 전부라는 것 또한.  &nbsp;  &nbsp; 이것이 ‘오직 그녀의 것’이 ‘나의 것’이 되어가는 이야기다.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298/43/cover150/k37203154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2984358</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한국문학</category><title>봄날의 햇살[달걀의 온기] - [달걀의 온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59389</link><pubDate>Wed, 19 Aug 2026 11: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5938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39936&TPaperId=1745938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60/17/coveroff/893643993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39936&TPaperId=1745938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달걀의 온기</a><br/>김혜진 지음 / 창비 / 2026년 04월<br/></td></tr></table><br/>봄날의 햇살<br>달걀의 온기,&nbsp;&nbsp;김혜진, 창비, 2026-04-08.  &nbsp;  <br>  &nbsp;&nbsp;“넌 봄날의 햇살같아.”&nbsp; 우영우가 이런 말을 했을 때, 분명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 빛나는 언어 표현도 우영우를 대하는 ‘봄날의 햇살’ 행동도.&nbsp; 한국인은 ‘정’이라는데, 최근에는 외국인에게 어필하되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부담스럽게 여겨지거나 의심부터 하게 되는 문화가 되어가고 있는 것도 같다. 오랜 시간 뼈 속에 박힌 이 정서가 쉬이 사라지진 않겠지 싶으면서도, 개인주의를 넘어 점점 이기주의로 치닫는 세상에서 누군가의 마음이 정인지, 오지랖인지, 범죄를 위한 미끼인지 생각해야 하는 일이 서글프다. 『달걀의 온기』는 이런 마음을 모듬은 소설집이 아닐까.<br>  삶에서 사소한 정을 주고받는 일이 점점 드물어진다는 생각을 그녀는 자주 했다._「빈티지 엽서」  &nbsp;  관심도 지나치면 병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과 생활 방식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세요. 참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_「관종들」  &nbsp;  그러니까 안전하고 평화로운 하루를 영위하는 현명한 사람들이 매일 반복하는 일. 그건 애실이 평생 노력했으나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던, 현서로 인해 잠시 잊었던 일상이었다. …… “애실씨, 혹시 걔한테 돈 빌려줬어?” _「하루치의 말」  &nbsp;  &nbsp; 그러니까 타인의 호의에 반신반의하게 되고 선뜻 타인의 손을 잡기 힘든 불편한 기류들이 흐른다. 그래서 내가 행한 단순한 선의가 타인에게 불경한 것으로 치부되며 뒷담화의 소재로 사용될 때, 「빈티지 엽서」속 ‘나’는 자기변명과 자기합리화로 자신을 단속해야 한다. 내 일상을 변화시키며 그 안으로 스며들어 좋은 기운을 전하는 이, 그래서 좀더 삶을 애착하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 그 사람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행복할 수 있을 듯한 순간, 호의가 ‘목적’을 위한 것, 거짓임을 알았을 때 느끼게 되는 당혹감. 「하루치의 말」속 애실이 경험하는 감정이다. 아마, 다시는 사람에게 호의도  삶의 환희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nbsp; 하지만 이 소설집의 제목은 『달걀의 온기』다. “무슨 일이 있나 한번 살펴주는 게 뭐가 어려워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세상에서 마냥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관종들」의 정해는 가까운 이들에게서도 모진 말을 듣지만 타인에게 관심을 두는 걸 거두지 않는다. “아이들을 생각하고 불안과 걱정을 나누는 데 시간과 마음을 들이는” 일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니까. 작가는 이처럼 ‘최소한의 온기’를 나눌 수 있기를 더 소망하는 듯하다.&nbsp; 닭이 갓 낳은 달걀은 따스하다. 그 달걀을 맛보려면 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온기를 느끼는 것 또한 조심스러울 일인데, 그 온기를 나누려면 따스함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더 세심해야 할까. 「달걀의 온기」에서 선희가 청란 두 알의 따뜻함을 느끼는 부분은 의미심장하다.   &nbsp;  선희는 아이가 건넨 청란 두알을 받아 들었다. 따뜻했다. 그건 바깥의 열기와 무관한, 내부에서 만들어져 흘러나오는 온기였다. 아니, 바깥에서 불어넣지 않았다면 결코 생겨나지 못했을 온기인지도 몰랐다.&nbsp;_「달걀의 온기」<br> &nbsp; 내부, 속으로만 흘러 들어가서는 깨닫지 못할 온기가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다. 아마도 이것이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관계맺음 속에서 ‘나누는 온기’일 것이다. &nbsp; 선희는 투자 사기를 당하고 아버지가 살던 고향집을 처분하기 위해 내려와 지내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니 마음이나 행동이 까끌까끌한 상태이다. 혼자 닭을 키우고 달걀을 팔며 살아가는 소녀 ‘민지’를 보며 선희는 과거의 자신을 마주한다. 자신이 얼마나 자기연민에 빠져 있는지, 그만큼 타인에 대한 원망을 하고 있는지를. &nbsp; 「푸른색 루비콘」속 ‘그’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에 대한 갈망이 크지 않고, 새로운 만남이 기대되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서 재미를 찾지 못하는, 관계 안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는 부류가 아닌 ‘그’의 관심사는 늘 내부로 향했는데 교회에서 만나게 된 ‘남자’와 엮이며 차가 구덩이에 빠지는 일을 겪기도 하지만, 결국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를 통과한 햇살이 그의 얼굴에 따뜻하게 와닿”는 것을 느끼고 ‘남자’가 준 꿀물 한잔은 ‘그’에게 “입안에 달콤한 내음이 감돌게 하고, 나른한 졸음을 주며 잠깐의 평화를 가져다주었다.”&nbsp; 하나의 세계는 필시 다른 세계와 엮일 수밖에 없다. 홀로, 내부로만 집중해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다. 타인의 선의를 기대하다 실망하고 문을 닫아버리기도 하지만 내가 타인에게 선의를 줄 수도 있음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봄날의 햇살’처럼 무심히 행하는 보살핌과 애정을 받게 되면 “마음을 뭉클하게 하며 당혹스럽고 부끄러운 감정을 불러오게” 한다. 나그네의 옷을 벗긴 따스한 햇살의 온기처럼 조용히 퍼져나갈 온기를 잊지 않기를, 타인에 대한 애정을 감각하기를 소설은 전하는 듯하다.  &nbsp;  선희는 지갑을 가지러 집 안으로 들어가며 청란을, 그 청란이 품고 있는 온기를 떠올렸다. 그러나 왜 그것이 돌연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지, 왜 당혹스럽고 부끄러운 감정을 불러오는지에 대해선 깊이 고민해보지 못했다. 그것이 자기 삶에는 없다고 여겼던, 스스로 감쪽같이 지워버렸던 누군가의 보살핌과 애정 같은 것을 일깨웠다는 사실을 안 건 시간이 더 흐른 후였다. 그러니까 그녀가 이곳을 떠날 때 동력으로 삼았던 원망과 미움이 옅어지고, 그 아래 자리한 것들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거였다.&nbsp;&nbsp;_「달걀의 온기」  &nbsp;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60/17/cover150/893643993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9601774</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한국문학</category><title>전시장에 이력을 명시하듯[해파리 만개] - [해파리 만개]</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59381</link><pubDate>Wed, 19 Aug 2026 11: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5938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0909874&TPaperId=1745938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19/88/coveroff/8960909874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0909874&TPaperId=1745938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해파리 만개</a><br/>김초엽 지음, 박지숙 그림 / 마음산책 / 2026년 04월<br/></td></tr></table><br/>전시장에 이력을 명시하듯<br>해파리 만개   &nbsp;김초엽, 박지숙 (그림), 마음산책, 2026-04-30.  &nbsp;  “쓸모없는 것은 정말로 쓸모없는 것일까”  &nbsp;  &nbsp; 짧은 소설집이라고 하나 그다지 짧은 소설은 아니다. 여섯 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데 단편 분량이 넘는 소설도 있고 각각 제법 길이가 길다. 그런데 짧은 소설이라고 하고 있으니 “짧다”는 건 무언가 생각하게 된다. 읽고 나면 “짧다”라고 느껴지긴 한다. 스토리와 등장인물이 단순하기에 얘기의 길이가 “짧다”. 그렇기에 캡쳐한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순간적이고 특정한 단어가 둥둥 떠다닌다.&nbsp; 김초엽 작가하면 광활한 우주를 떠올리는데 해파리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바다가 연상되었고, 서두에 쓰여진 “쓸모없는 것은 정말로 쓸모없는 것일까”라는 문구 때문에 책을 덮는 순간까지도 쓸쓸함이 느껴졌다. 쓸모라니, 이 단어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직간접적으로 받고 있는 압력을 대표하는 말 아닐까 싶다. 끊임없이 쓸모를 묻는 인간은 모든 것을 쓸모로 ‘판단하고’, 모든 존재를 그에 맞춰 생각하기에 ‘무용’을 업신여긴다. 그렇다고 ‘쓸모 쓸모’하면서 얼마나 쓸모 있게 생을 살아가는지는 모르겠다. 쓸모를 따져가며 외치는 ‘성과’ 따위가 얼마나 이루어졌는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뜨악한 결과물을 ‘성과’로 포장하기도 하니까.&nbsp; 모든 생물들이 제 쓰임이 있을진대 그 쓰임의 기준을 ‘인간’으로, ‘나’로 하기에 ‘위기’니 ‘멸망’이니 하는 말들도 솟아나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탈탈 털려 도구적 존재로 전락해버리는 수많은 존재들이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이다지도 어려울 일인가.   &nbsp;  아까부터 너무 과한 해석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젤리는 무척 우울해 보인다.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고 기피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 같다. 어떤 기분일까? 꼭 필요한 존재였다가, 자신을 필요한 존재로 만들었던 바로 그 특성 때문에 모두가 자신을 피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_「젤리의 우울」 <br>&nbsp; 모래를 그러니까 우리가 모래하면 당연 떠올릴 그 모래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는 누가 있을까. “네가 지닌 진짜 힘은 고정하는 힘이 아니라 바라보는 힘이야. 응시하는 힘이지. 너는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이 세계가 느린 숨을 쉬게 해.” &nbsp; “서로를 낯선 순간 속에 붙들어” 세상을 달리는 모래의 존재 때문에 이다지도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에서 숨을 쉬는 것일지 모른다. 모래를 찾아 바다로 가는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도. 모래에 대한 이 정의만으로도 이 책을 계속 읽어갈 이유가 된다. &nbsp; 하지만, 우주선에 불시착함으로써 끊임없이 눈물을 전파하고 있는 ‘젤리’들을 마주하게 된다면. 해파리들이 원하지 않을 만큼 계속 증식하고 있다면. 접촉하면 ‘말과 생각과 느낌을 주입하는 ’끈적이‘를 마주하게 된다면. 이미 쓸만큼 써서 버린 것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이 소설은 이러한 ‘존재’들을 새로이 인식하는 이야기로 읽힌다. 과하게 표현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마치 ‘존재’에 대해 더 세심히 파악하여 특징을 찾아내 ‘재활용’ 방안을 찾아내는 것 같달까. 전시장에 전시하기 위해 이전의 이력을 명시하고 있는 과정 같달까. 이미 그것은 그들의 존재의 의미를 보였으므로, 충분히 다시보기 또는 재정의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nbsp;  천장 틈새로 보이는 도시의 골목이 해파리의 보랏빛으로 물든다. 해파리들은 기능이 없고, 쓸모가 없고, 그저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존재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할 것이다._「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  &nbsp;  &nbsp; 앞으로도 세상엔 의도하든 의도치 않은 수많은 ‘존재’들이 탄생케 될 것이다. 잊히고 버려지는 그 존재가 ‘나’가 아니게 되리라 장담할 수 없다. 이러한 ‘존재’들을 마냥 외면하고 살아갈 수도 없다. 누군가에겐 무섭고 두렵고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 힘있는 것들에 의해 ‘쓸모없는 것’으로 규정되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이란 또한 마냥 예측가능한 것만은 아니어서 우리가 마주하게 될 무수한 ‘존재’들은 어떤 ‘쓸모’로 되돌아올지 모른다. <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19/88/cover150/8960909874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198878</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한국문학</category><title>주저없이, 막[정전] - [정전 - 제3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43170</link><pubDate>Mon, 10 Aug 2026 19: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4317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92137268&TPaperId=1744317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90/6/coveroff/k59213726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92137268&TPaperId=1744317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정전 - 제3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a><br/>함윤이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03월<br/></td></tr></table><br/>&nbsp;주저없이, 막<br>정전 - 제3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함윤이, 문학동네, 2026-03-13.   &nbsp;<br>  &nbsp;&nbsp;함윤이 작가의 소설은 리얼리티 속에 환상을 흩뿌린 작품이 유독 많다. 아니다, 환상이 주고 리얼리티를 첨가한 건가? 이 소설 또한 작가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어떤 부분을 ‘환상’으로 삼느냐가 중요한 포인트인 듯한데, 작가의 단편소설 「강가/Ganga」에서의 모호하고 환상적인 부분은 좀 버려두고 ‘현실 사건’을 갈무리하여 최대한 현실적인 틀 안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것 같다. 해결에 방점을 두자면 ‘환상’으로 회피하기보다 ‘환상적’으로 해결하고픈 노력이 보인다랄까.&nbsp; 어렸을 적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은 순간이동력이었다. 어느 곳이든 가고 싶었던 마음이 남긴 염원이다. 내가 그런 능력을 갖고 있음을 말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참 좋겠다. 아무튼 다른 사람은 가지지 않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활용할지, 쓰임새를 만들기 위해 애쓸 듯하다. 현실적이든 아니든. 그렇다면 ‘타인’이 나의 ‘능력’의 쓰임을 찾아 요구할 때, 주저없이 응할 수 있을까.   &nbsp;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다시 만난 세계’가 불려지는 순간  &nbsp;『정전』을 이야기하자면 ‘임을 위한 행진곡’이 아니라 ‘다시 만난 세계’가 불리는 그 변화의 순간이 떠올려진다. 투쟁의 이유를 파악하고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의 유사성도 인식하지만 방법은 다른 형태. 현재 내가 가진 상황을 고려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흐름. 논의나 논쟁보다는 즉각적인 실행력이 돋보이는 방식. 그리하여 좀더 발랄함이 가미되고 다소 엉성하고 우려되는 부분이 있지만 그럼에도 울컥하게 되는 그런 투쟁 말이다. 『정전』속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이들이 ‘청년’이기에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닌가 싶다. 연령으로 누군가를 규정하고 싶지 않지만 MZ세대가 경험한 ‘투쟁’은 민주주의의 가치가 묵살당하던 시대의 투쟁과는 또다른 모습인 것은 분명하다. 최루탄과 쇠파이프 등을 휘두른 공권력에 맞서 돌멩이, 화염병으로 방어하던 시대에서 촛불로 LED등으로, 이제는 응원봉으로 변화한 것처럼 말이다. 투쟁가도 “다시 만난 세계‘를 비롯하여 다양한 노래가 울려펴지는 ’문화 퍼포먼스‘의 형태로 변화했다. 일상에서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 막상 ’이슈‘가 생기면 관심을 두고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그 기저는 각자 다르겠지만.  물류를 멈춰 세상을 멈추자_정전아 일어나라  &nbsp;&nbsp;‘물류를 멈춰 세상을 멈추자’는 대표적인 투쟁구호다. ‘기계를 멈춰’, ‘물류를 멈춰’,‘공장을 멈춰’, ‘세상을 멈추자’라는 구호는 오래도록 이어온 ‘노동’의 가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슬로건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노동자’는 필요하지만 ‘노동’에 대한 가치는 크게 달라진 것 같진 않다. ‘자본’과 ‘노동’의 끝없는 대립에서 오히려 ‘자본’의 가치가 더 부상하는 느낌이랄까. AI시대, 노동에 대한 인식과 그로 인한 재정의는 계속 이루어질 것이다. 물론, 아직은 전통적인 ‘노동’이 ‘공장’이 존재하고 있으며 ‘노동자’를 대하는 방식 또한 급격한 변화가 있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되는 ‘노동자’의 사고와 사망 소식은 주로 20대이거나, 이주노동자인 경우가 많다. 물론 정확한 산재사고 현황은 알려주지 않고 나또한 열심히 찾아보지 않았지만. 더구나 그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이들이니까, 뉴스가 알려주는 대로 그렇게 받아들인다.&nbsp; 하지만, 내가 아는 누군가가 취재를 통해서랍시고 보도에 나온 기사를 보면, ‘막’처럼 ”이게 다가 아닌데“라고 생각할 것이다. ”기사 속 A씨의 삶은 서글픈 결말을 향해 필연적으로 달려가는 양 묘사되어 있었다. 문장들을 핥으면 비리고 쓴 맛만이 가득할 것 같았다. "얘는…… 이렇게 어두침침하고 서글프기만 한 사람이 아냐.“   &nbsp;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막은 파우더가 들어가지 않게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왜냐하면 네 손가락은 내 손가락보다 훨씬 짙은 색깔이잖아. 밀크 파우더 안에서라면 더더욱 눈에 띌 거야.  &nbsp;    금방 찾을 수 있다던 ‘A’의 손가락을 찾을 수 없다면, 찾는 노력이 없다면 ”어두침침하고 서글프기만 한“ 것이 아닌 ”더 넓고 많은 애“를 알리기 위해 여전히 ‘기계를 멈춰’, ‘공장이 멈춰’가 유효한 세상이 된다. 『정전』속 화자 ‘막’은 그렇다.  &nbsp;  “내가 원하는 건 공장 전체가 정전되는 거야. 단 하루만이라도 말이야. 하룻밤만이라도 그 안의 일이 완전히 꼬여버리면 좋겠어.”    &nbsp;  어긋난 사랑의 작대기  &nbsp;&nbsp;누군가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건, 그 사람과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특별한 관계가 되고 싶다는 고백이다. ‘은단’의 고백은 ‘막’에게 불편함을 안긴다. 서로 어긋나는 마음, 교류는 그것으로 단절된다. ‘은단’이 아무리 눈 한번 깜빡임으로 눈앞의 전등을 꺼버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대도 ‘막’에게는 와 닿지 않는 능력이며, 감정이다.&nbsp; 스무 살의 ‘막’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휴학하고 등록금을 벌기 위해 제약회사에 들어간다. ‘잠깐 일을 하러 나왔을 뿐인 대학생’으로 일하고 있지만 공장생활을 하며 ‘수지’와 ‘영준’, 외국인 노동자 ‘라히루’를 만나 친구가 된고 ‘라히루’에게는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라히루’에게는 애인 ‘서영’이 있고, ‘라히루’는 기사 속 A가 된다. 공장에서 버려진 라히루를 위해 노조에 가입한 ‘막’은 노조활동이 어렵고 스스로 ‘노동자’의 정체성이 크지 않기에 노조 활동을 그만둔다. ‘라히루’에 대한 감정이 큰 ‘막’은 어떤 형태로든 ‘막’을 돕기 위한 방법을 찾는다.&nbsp; 여기서 기획자 ‘막’이 활용하는 것이 ‘은단의 능력’이다. 고등학교 졸업식 이후로 만나지 않았던, ‘은단’과 엮이고 싶지 않았던 ‘막’은 주저없이 ‘은단’에게 연락하고 ‘은단’이 능력을 발휘하기를 요구한다. ‘은단’을 만날 때마다 원인도 모를 ‘신물이 치솟는다’는 ‘막’이 ‘은단’을 대하는 방식은, 솔직히 상당히 불쾌하고 불편하다. ‘라히루’에 대해 애정으로 필요한 ‘은단’이기에 신물을 삼키며 참고 “은단이 막을 부를 용기를 내기 전에 서둘러 달아나”는 ‘막’의 이기적인 행태에 혹은 제 사랑을 위해 헌신하는 놀라운 행태에 대해서. 오로지 ‘막’에 대한 애정으로 오케이를 외치는 ‘은단’에게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유없이 외면당하는 인물인 것 같아서도 그렇고 ‘공장에서 행한 일’로 죄책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면서 더더욱 그러했다. &nbsp; 그들의 계획이 성공하든 아니든 ‘막’이 사람을 대하는 행태는 내게 영원한 물음표와 느낌표를 안길 것이다. 무턱댄 혐오와 자신을 좋아하는 이에 대한 압도적인 우위를 가진 것처럼 행하는 행태, 주저없이 막 사람을 ‘도구’로 대하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크나큰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한 우정과 애정에서 시작한 ‘막’의 행동은 ‘은단’에게 행하는 방식 때문에 무척 아쉽게 느껴졌다. 아니, 무섭게 느껴졌다. 거듭 생각해보는데,  내가 혐오하는 이에게 내 필요에 의해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내겐 없을 것이다.&nbsp; ‘정전’은 공장의 정전, 노동소설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거침없는 스무살의 이야기라라고도 볼 수 있겠다. 멈춤의 방식은 함께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막’처럼 홀로 돌진하는 형태가 되는 걸까. 스무살이 세상에 나와 겪게 되는 일과 사람에 대한 거침없는 감정의 펼침을 마주한다. 그러니, 이건 사람과의 ‘교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군가와는 ‘교류’가 아니라 ‘정전’이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90/6/cover150/k59213726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900696</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한국문학</category><title>부유물이 되지 않으려[자개장의 용도] - [자개장의 용도]</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43158</link><pubDate>Mon, 10 Aug 2026 19: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4315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4694&TPaperId=1744315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789/42/coveroff/893204469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4694&TPaperId=1744315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자개장의 용도</a><br/>함윤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1월<br/></td></tr></table><br/>부유물이 되지 않으려<br>자개장의 용도함윤이, 문학과지성사, 2025-11-11.  &nbsp;  <br>&nbsp; 자개장무늬 책표지를 덮으며 생각했다. 아이들 책처럼 표지가 팝업으로 되어 열리면 좋겠다고. 그 문을 열고 나도. &nbsp; 강가/Ganga로 가볼까. Ganga가 함께 표기되어 있지 않았다면 “강줄기와 육지가 맞닿는 부분”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아니, 작가가 친절히 강가에 대해 알려주고 있음에도 그것은 작가가 설정한 세계일 것이라 여기며 Ganga를 사전으로 찾고, 그럼에도 ‘강의 언저리’롤 떠올렸다. “강까”라는 된소리 발음으로 자꾸 ‘강가/Ganga’를 읽어내는 탓이다.   &nbsp;  G a n g a.글자들은 잘 지은 집처럼 견고해 보인다. 입속으로 또 한 번 발음한다. 강가―이 단어는 보통 강줄기와 육지가 맞닿는 부분을 의미한다. 강과 땅 모두의 가장자리지만, 어디에도 제대로 속하지 않는다. 강가―이는 지체 높은 집안의 딸이 자신보다 낮은 집안에 시집가는 행위를 뜻하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대개 왕족의 딸이 신하의 가문으로 시집을 가는 일을 의미한다. 새하얀 천을 얼굴 앞으로 늘어뜨린 여자들이 강둑 위를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강가한 여자들, 왜 그랬지? 사랑 탓인가? 다들 행복한 삶을 꾸렸을까?동시에 강가는 신의 이름이다.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강가는 강의 신이다. 악어와 닮은 마카라를 타고 다니며 속죄와 정화를 담당한다. 여신은 수 해 동안 이어진 왕의 기도탓에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갠지스강으로 변했다. 갠지스 강은 인도 북부를 흐른다. 바라나시는 이름의 도시를 품에 안은 강으로도 유명하다.  &nbsp;  &nbsp; 그리고 여기 하나의 의미를 더 추가한다. 강가, 그것은 ‘나’의 이름이다. 낯선 곳에서 ‘나’가 ‘나’가 아니고 싶을 때, 아니 ‘나’를 규정하고 싶을 때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새 이름을 부여한다. 그리하여 모호한 경게 속의 ‘나’로, 속죄와 정화의 여신으로서의 ‘나’로 나를 정의한다. 아니, 그러한 이름을 선택한다. 그렇다면 ‘나’에게 이 이름은 의미를 나열하는 이 행위는 이미 함의가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강가’로 불리고 싶은 마음. 하지만 막상 ‘그’가 ‘나’의 이름을 물어보자 ‘나’는 ‘강가’라 말하지 못한다.  &nbsp;  그는 떠나기 직전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이름이 뭐죠? 아는 어떤 이름도 대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이 도시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자 결심했는데, 막상 누군가 이름을 묻자 무엇도 답할 수가 없구나. 상대방의 이름을 묻는 일 역시 불가능했다. 질문하는 일도, 답하는 일도, 두려울 뿐이다. 나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름 모를 남자는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유 쎄이브 마이 라이프. 당신이 내 목숨을 구했어요. 유 쎄이브 마이 라이프. 당신이 내 목숨을 구한 거예요. 나는 그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고, 번역한다. 몸의 떨림이 멈추자 눈앞의 모든 색이 선명해진다. 오래 기다린 죄책감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nbsp;  &nbsp; 여러 단편이 실려 있는 이 책에서 ‘강가/Ganga’가 기억에 남았던 것은 이런 이유였을 것이다. 몽유병 환자가 겪는 일처럼 대체로 환상적이며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낯선 여정을 하는 이들이 주로 등장하지만, 가장 멀고 긴 여정의 이야기라는 것. 그러나 ‘파랑새’의 결말처럼 행복은 나의 곁에 있었다, 그렇게 떠올려지는 마침표 같은 이야기 같아서.&nbsp; ‘강가/Ganga’ 속 ‘나’의 행동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공장에서 이주노동자와 함께 일했던 ‘나’가 산업재해를 당한 여공과의 연대를 거부하는 일은 이해된다. 함께, 연대를 주장하는 ‘쿠쿠’의 말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 것도. 하지만 “너는 내몰린 게 아니야. 너는 선택한 거야. 우리 대신에, 너 홀로 여기에서 살아가는 일을 택했어. 아냐. 부정하지 마. 화내지도 마. 비난하는 게 아니야. 네 선택을 이해해.”라고 말하는 ‘자자’의 말에 이른바 ‘긁혀서’, “남자를 가져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그래, 역시나 남자가 필요하다. 내 모든 선택을 칭찬하며, 절대로 힐난하지 않는 남자”로 이어지는 생각과 실제 그 행동을 하는 것 말이다. &nbsp; ‘나’는 ‘쿠쿠’와 ‘자자’의 고향 ‘바라나시’에서 “남자를 사러 왔다”고 말하고 다닌다. ‘나’의 기준은 너무 높아 그런 남자는 살 수 없다는 말을 듣지만 그럼에도 ‘나’는 남자를 사야 한다. ‘나’가 ‘강가’한 여자가 되는 것은, 될 수 있는 것은 ‘돈’을 쥐고 있음이다. ‘자본’으로 계급적 우위를 누릴 수 있는 ‘나’가 남자를 사려는 이 전개는 ‘강가’에 ‘降嫁’라는 의미가 있음에 그 내용이 필연적으로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럼, 이제 ‘나’는 물에 빠지려나?&nbsp; ‘나’가 물에 빠져야 할 이유는 너무도 명백하다. ‘나’의 모든 선택을 칭찬할, 힐난하지 않을 남자를 사는 건, 결국 ‘나’의 선택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책임’을 회피하고 있지만 사실 강박적으로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표현대로 “오래 기다린 죄책감”이다.&nbsp; 인도 여행에 대한 지인들의 반응은 극과 극이다. 그건 갠지스강에 대한 반응과도 대체로 일치한다. 갠지스강을 인도인처럼 성스럽게 여긴다거나 깨달음에 무게를 두고서 감흥을 느낀 이도 있지만 갠지스강의 악취와 오염, 무질서로 인해 신성한 느낌은커녕 최악의 장소로 기억하기도 한다. ‘쿠쿠’에게는 “신처럼 이쁜 강”이지만 ‘나’에게 갠지스강, 강가강은 더럽고 너저분한 강인 것처럼 말이다. 이런 강에, ‘나’가 어쩔 수 없이 뛰어들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며, ‘나’는 오롯이 잠긴다. 물에 빠진 이를 구하려다가 모두 죽을 상황이 된다고 ‘쿠쿠’와 ‘자자’를 떠올리며 생각하지만 ‘나’는 내가 돈으로 ‘구한‘ ’그’를 물에서 ‘구하게’ 되고…… 강가강에 빠진 ‘나’, 하염없이 떠도는 부유물이 될지 속죄하고 정화되었을지, ‘강가’, 그 의미처럼.   &nbsp;    &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789/42/cover150/893204469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7894266</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한국문학</category><title>﻿﻿﻿참요, 적들의 이름을 부른다[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 - [소설 보다 : 여름 2025]</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35042</link><pubDate>Thu, 06 Aug 2026 04:5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3504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4058&TPaperId=1743504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571/93/coveroff/893204405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4058&TPaperId=1743504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소설 보다 : 여름 2025</a><br/>김지연.이서아.함윤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06월<br/></td></tr></table><br/>참요, 적들의 이름을 부른다<br>소설 보다 : 여름 2025,&nbsp;김지연, 이서아, 함윤이, 문학과지성사, 2025-06-10.  &nbsp;  <br>&nbsp; 그래서 ‘적들’은 누구인가?  소설을 읽는 내내 궁금했던 부분이다. “난 저기서 계속 적을 기다렸어요.”라고 ‘선화’가 말할 때는 ‘고도를 기다리며’가 생각나긴 했지만, 대체로 사이비 종교집단이 먼저 연상되어읽는 내내 미간이 수평을 유지하지는 않았을 게다. 영화 &lt;미드 소마&gt;의 장소가 파스텔톤 속 ‘찡한’ 색감으로 각인되어 있다면 이 소설은 건조하며 폐허 속 섬같은 느낌이었다. 어쨌든 소설을 읽고 나서도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가 반복되어 머릿속을 흐르고 있었다.<br>  ”난 저기서 계속 적을 기다렸어요.“선화는 말했다. 때로는 그것이 어떤 가르침보다 중요하게 느껴졌다고도 했다. 모든 책에서 구원은 적의 공습 뒤에 찾아왔다. 적들이 온다는 것은 긴긴 괴로움으로 뭉쳐진 기다림,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가 되어버린 기다림이 끝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선화는 매일 찾아오는 이들을 유심히 살폈다. 산을 타고 올라와 그들의 이 고된 기다림을 끝내줄 사람을 기다렸다.“그래서 나는 우리가 만난 게 대단한 운명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nbsp;  &nbsp; 그래서, ‘적들’을 기다리는 이 무리는 도대체 뭘까. 작품의 주인공이 ‘노아’인지라 성경 속 노아의 방주를 떠올렸다. 그렇기에 ‘노아’가 이들에게 구원의 존재가 되는가 생각했는데, 노아는 이들 무리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가명을 사용한다. 어이없게도 그 가명이 무리의 리더 이름과 같다. ‘선화’라는 리더 이름을 듣자 ‘선화공주님은~’ 하며 ‘서동요’를 떠올리고 선화라는 이름이 담은 뜻은 무언가라는 생각으로 흘러 등장인물들의 이름에 꽂혀버렸다. 노아는 왜 노아이며 선화는 왜 선화인가. 왜 상사의 이름은 녹원인가. 녹원은 인도에 있는 불교 유적인데, 단순하게 생각하면 녹원이야말로 대척점에 있는 이름 아닌가. ‘적’이라 할 만한.&nbsp; 구원을 위해 ‘적’을 기다리는 것. 마치 내가 잘났음을 타인을 깎아내리며 얻으려는 누군가처럼 여기 ‘천문대’를 점령한 사람들은 그렇다. 자신들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라고 타인에게 끼치는 민폐를 당연시하는지 의문인데, 그들은 오히려 마을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토록 철저한 현실반영이라니! 명확하지 않은, 막무가내로 ‘적’을 상정해 놓고서 부르는 노래, 그래서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는 참요같다. 아니, 주술이다. 명백한 세뇌 또는 가스라이팅.&nbsp; 왜 종교적 믿음은 항상 기이한 형상으로 표출되는지 모르겠다. 집단의 힘이란 그런 건가. 힘이라고 해야할 지 광기라고 해야할 지 모를 그 스산함이 계속 리더 선화 주위에 맴도는 듯하다. 항상 머무르지 않고 떠날 것이라고 하는 그 무리가 드디어 떠날 때인가, 선화는 마지막으로 여는 행사에 노아를 초대한다. “즐거울 테고, 아주 아름다울 거예요”라는 말과 함께. 세상만사가 귀찮아진 때라면 그냥 넘기고 말았겠지만, 좀더 생생한 때라면 그 버리지 못할 호기심 때문에 나도 노아처럼 가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천문대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하는데도 머릿속에서 봉화대쯤으로 인식하고 있던 나는 ‘관측대의 돔이 열리고’라는 글을 보자 멈칫하고 만다. 내내 상상하던 이미지와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행태는 이질적이지는 않았다. 검은 털옷을 입고 불을 피우고 고기를 태우고 다함께 춤을 추는 건 미드소마 같이 사이비 종교에서 주로 보게 되는 행태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지 이해하기 싫은 것인지 모를 그 무리의 행동은 언제나 낯설지 않다. 그래서 구원되었나. 노아는 그들이 즐겁고 아름답다고 느꼈던가,&nbsp; ‘적’들이 오고나서야 ‘구원’이 있었다, 그러니 ‘구원’받기 위해서는 ‘적’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 은연 중에 타인을 ‘적’으로 규정하는 삶이 평안할까. 그러면 ‘구원’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은 구원과 적이 모호한 삶을 만든다는 생각이 짙어진다. 모호한 적에 대해 생각한다. 모호한 구원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냥 그 모호하고 막연한 두려움 자체가 ‘적’이고 그렇기에 가시적인 ‘적’을 만들어내어야 오히려 평안한 마음이 될 것이라 할지 모르겠다. &nbsp; 참요. 어쩌면 삶에서 나를 위한 참요는 필요할지 모른다. 나를 구원하기 위한 스스로에 대한 응원. 그러나 나를 위해 타인에게 부적같은 의미를 부여하는 일, 타인을 ‘적’으로 만드는 일에 대해 새삼 생각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이들 또한 또다른 형태의 ‘적’이기도 하다. 함께 살아가기 힘든, 이해할 수 없는 존재. 하지만 ‘가시적’인.&nbsp; 선화는 독수리인가. 검은 옷을 두른 선화 무리들 위로 날아드는 독수리 떼가 그들과 겹쳐보이기도 한다. 어디로 가려는지 모를 그들은 또다시 다른 곳으로 찾아가 지금과 같은 행태를 계속할 것인지 궁금해진다. 다시금 도돌이표처럼 깃드는 물음. 무리들 위로 날아드는 독수리들은 정처없이 날개를 펼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진 날개짓일 텐데. 그래서, 구원이 뭔데? 구원이 왜 필요했던 건데? 반대로 ‘적’을 만들기 위해 구원이 필요한 건가?<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571/93/cover150/893204405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5719368</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한국문학</category><title>﻿﻿﻿﻿﻿로데오[히데오] - [소설 보다 : 가을 2025]</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35039</link><pubDate>Thu, 06 Aug 2026 04:5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3503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4392&TPaperId=1743503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210/39/coveroff/893204439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4392&TPaperId=1743503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소설 보다 : 가을 2025</a><br/>서장원.이유리.정기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09월<br/></td></tr></table><br/>로데오<br>소설 보다 : 가을 2025,&nbsp;서장원, 이유리, 정기현, 문학과지성사, 2025-09-11.  &nbsp;  &nbsp;  &nbsp;&nbsp;로데오. 발음의 유사성 때문인지 소설 제목이자 주인공 이름인 ‘히데오’를 보면서 로데오를 되뇌고 있었다. 로데오는 카우보이들이 가출을 몰아 모으던 것에서 생겨난 스포츠로 길들이지 않은 말이나 소를 탄 채 떨어지지 않고 오래 버티거나 길들이는 경기다. 우리나라에 로데오 거리가 제법 있는데 어릴 적부터 로데오 거리라는 이름도 그 주변도 참 이질적으로 느껴졌었다. 말을 탄 카우보이 조형물도 어색하게 느껴지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히데오를 읽으며 로데오를 떠올렸던 건 발음의 유사성 때문만은 아니었던 거다. 로데오 거리에서 느꼈던 그 이질감과 어색함이 히데오에서 로데오를 떠올린 이유 아닐까.&nbsp; 로데오 거리가 미국 베버리 힐스(Beverly Hills)에 있는 패션거리인 ‘로데오 드라이브’에서 유래했다는 걸 먼저 각인했다면 달랐을까만. 어쨌든 ‘로데오 드라이브’도 스페인어 지명인 '엘 로데오 드 라 아쿠아(El Rodeo de las Aguas, 물이 모이는 장소)'에서 유래된 거니까(https://www.kado.net), 로데오는 카우보이 로데오와 무관하지는 않은 거다. 다른 나라에 제 이름을 단 지명이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유사성을 찾고 특이점을 찾고…….   &nbsp; 히데오는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는 일본에서, 부모님의 이혼 후에는 어머니를 따라 한국에서 살았다. 히데오는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차별을 경험한다. 일본에서 살았던 좀더 어렸던 시절, 또래들은 한국인 어머니를 모욕하며 히데오를 괴롭혔고 고교시절 역사나 국어 시간에는 특히 일본에 대한 혐오의 말들을 항상 들어야 했다. 히데오는 원어민 일본어 교사에게 쪽발이라고 하는 것이나 일본인이 자신의 어머니를 모욕하는 것이 다르지 않아 보였다고 이야기한다.&nbsp; 대학교 연극반에서 히데오를 알게 된 ‘나’는 히데오가 이와 같이 남들에게 말하지 않는 비밀을 자신에게 얘기할 때마다 친밀함 이상의 감정을 느낀다. 누군가 나에게만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필시 ‘나’에게 호감이 있음이라는 오해와 기대로 깃든 마음이다. 그러므로 “나를 좋아했지만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는 아니었”고 “그의 감정이 달라질 가능성도 거의 없을 것 같”은 히데오와 ‘나’의 관계는 점점 소원해질 수밖에 없다. &nbsp; ‘나’는 로데오 경기에 나선 승리한 카우보이가 되지 못했다. 히데오를 길들이는 법을 알지 못했다. 세상에 한번쯤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을 털어놓고 싶은 존재가 있다.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수줍고 자기 확신이 부족한 히데오에게 ‘나’는 제 비밀을 털어놓으며 위로받고 지지받고 싶었을지 모르나 당시의 ‘나’는 히데오의 이러한 마음을 충분히 보듬어주지 못한다. 훗날에야 그때 히데오에게 ‘다르게’ 말해줬어야 했다고 생각하지만, 이제 히데오에게 그런 말은 필요가 없다. 히데오는 그때 그 히데오가 아니기에.&nbsp; 사람은 태어나서 주위 환경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으나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삶의 여정이 아닌가 싶다. 히데오는 주류 사회의 시선에서 자신을 약한 자로 위치짓는다. 그렇기에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힘겨울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우리가 내면화하는 어떤 시선은 내가 어떤 관점을 가지기 전까지는 일방적이고 그렇기에 나를 단단히 여미기가 힘들어지는지도 모르겠다. &nbsp; 오랜 시간 동안 히데오는 자신을 단단히 여미지 못한 상태였지만 ‘나’가 쓴 희곡 &lt;따귀 게임&gt;을 통해 달라진다. 마치 로데오 경기를 치르는 카우보이처럼 자신만의 정체성을 잘 벼르고 길들일 줄 알게 된 것이다. 이 희곡이 뭐기에 히데오의 변화를, 성장을 이끌어 주었는가를 말하자니 일견 히데오에게 감춰진 폭력성을 폭발시키는 역할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lt;따귀 게임&gt;은 ‘나’가 쓴 모범소년과 불량소년의 따귀를 맞는 거래에 대한 이야기다.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 사람만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믿는 모범소년은 불량소년이 들려주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학대이야기에 값을 매겨 매일 따귀를 맞는 것이 주내용이다. 불량소년 역을 맡은 히데오는 폭력을 행하면서 ‘나’에게 비밀로 들려주었던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배우로서 활동하는 히데오는 자신에게 약점이 되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충분히 활용할 줄 알게 되었다.  &nbsp;  이제 히데오는 그를 찾는 인터뷰마다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레퍼토리는 늘 비슷하다. 어렸을 때 일본에서 자랐으며 그곳에서 심각한 이지메를 당했다고 고백하고, 그래서 한국으로 이주하여 보낸 학창 시절이 소중하다고 강조한다. 일본에서도 한국인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전한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나는 이제 더는 히데오가 아닌 히데오를 히데오라고 부르곤 한다.  &nbsp;  &nbsp; 비밀이 드러나 더 이상 비밀이 아닐 때 드는 당혹감, 이제 누군가의 비밀을 혼자만 공유하는 대상이 아니게 되었을 때의 씁쓸함을 느껴본 이라면 ‘히데오가 아닌 히데오’가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그의 변화된 모습이 ‘나’가 바라던 대로였고 그것이 어쨌든 ‘나’의 영향이 있었던 것이라면 ‘나’는 히데오의 변화와 성장을 도와주는 역할을 했음에 위안과 만족감을 가지면 될까. 자신의 옛 연인 ‘영도’를 기준으로 연인에 대한 기준, 바라는 방식을 가졌던 ‘나’가 변화된 ‘히데오’와 홀로 이별한다. 새로운 비밀을 가지게 된 히데오, 이젠 비밀을 공유하는 대상조차 되지도 못한 ‘히데오가 아닌 히데오’. ‘나’의 히데오는 더 이상 ‘나’의 히데오가 아니며 앞으로도 ‘나’가 바라는 ‘나’의 히데오가 될 수 없다. 이제는 주눅들지 않고 매번 로데오 경기를 잘 겨뤄 낼 히데오를.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210/39/cover150/893204439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2103996</link></image></item><item><author>모시빛</author><category>한국문학</category><title>기억하기[소설 보다 : 가을 2024] - [소설 보다 : 가을 2024]</title><link>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24159</link><pubDate>Fri, 31 Jul 2026 16: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yellowlight/1742415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3140&TPaperId=1742415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629/51/coveroff/893204314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3140&TPaperId=1742415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소설 보다 : 가을 2024</a><br/>권희진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09월<br/></td></tr></table><br/>기억하기<br>소설 보다 : 가을 2024&nbsp; &nbsp;권희진, 이미상, 정기현, 문학과지성사, 2024-09-09.&nbsp; &nbsp;<br>&nbsp;권희진, 「걷기의 활용」<br>&nbsp; ‘나’는 ‘걷기’를 시작했다. 대다수에게 알려진 것처럼 ‘걷기’는 육체의 건강에도 필요하지만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매우 효과적이다. 이 단순한 걷기를 통해서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얘기한다.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구직자 신세인 ‘나’도 생각을 정리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걷기를 시작한다. 목적지가 있지 않은 걷기를 할 때마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꼬리물기하는데, 자주 떠오르는 인물이 ‘태수 형’에 관한 기억이다. ‘태수 형’과의 기억은 특별한 사건이 있다거나 강렬한 이미지는 아니다. 태수형과 태수형의 여자친구 K, 그리고 ‘나’가 기억 속의 이야기에 등장하지만 친한 친구들이 그러하듯 어떤 일이 있거나 없거나 그저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고, 취업 문제며 여러 가지로 고되고 복잡한 나날 속 그저 걷기만 할 뿐인데 왜 ‘태수 형’의 이야기로 귀결되는 것일까. 마치 태수형을 이야기하기 위해 걷기를 시작한 것처럼.   &nbsp;    “나는 형과 같이 늙어가고 싶었다.”&nbsp; 이 말이 걷기의 멈춤을 가져왔다가 다시 걸어갈 힘을 주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이 걷기는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정체성을 명료하게 하는 순간이기 때문이기에, 그렇기에 ‘나’는 산책이 아니라 ‘걷기’였어야 한다. 산책은 ‘나’가 이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하기에 조화롭지 않다. 목적지가 없을지라도 좀더 직선의 느낌을 주는 이 ‘걷기’가 감정을 모호하게 두지 않고 ‘나’라는 사람을 정리하는데 탁월하게 활용될 수 있다. 마치 미취업생, 백수인 청년 세대의 무력감을 쏟아낼 것 같았던 이 이야기는, 제 존재에 대한 이야기였다. 취업 문제도 연애 문제도 누구에게나 헤치고 나아가야 할 문제인데, ‘나’에게는 태수를 정의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소중하다. 그것이 세상살이에 더 힘겨움으로 작용하는 요인이 되겠지만 어쨌든 그 자체가 ‘나’이기에.     &nbsp;  이미상, 「옮겨붙은 소망」<br>&nbsp; 여기서 옮겨붙어야 하는 건 ‘5억 원에 매수한 아파트가 10억 원이 된 것’이어야 하지 않은가. 이런 소망이 현실이 되는 것…을 ‘아, 좋다’고 소망하는 건 나의 시선이고 작가는 다르다.  2억 빌라로 이사하고 시세차익으로 수익을 얻은 n&amp;n's 부부는 ‘남은 시간 동안 한 반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해보기로 하고 매번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한달에 300만 쓰면 70대까지 살 수 있을 테고, 돈 떨어질 때까지 살명 되므로. 남편이 사고로 사망한 뒤, 아내는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 n&amp;n's를 통해 앤틱 소품, 빈티지 주얼리를 구매하고 ‘나’가 물건 구매 도우미로 고용된다. ‘나’는 이들 부부의 삶을 궁금해하고 아내의 이 구매행위는 ‘수익창출’이 목적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구매다. 노동시간이 아니라 내가 하고픈 일을 하는 것, 또한 누군가의 시간과 기억이 남아 있는 물건을 구매함으로써 그에 대한 흔적을 기억하는 것이다. 남편에 대한 애도이고 그들이 소망하던 방식의 삶을 진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남편이 갑작스럽게 사망했듯 아내 또한 무한한 시간을 살 수는 없다. 그녀 또한 ‘시간’ 속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다. 남은 그녀의 주얼리들은, 남는다. n&amp;n's 아내는 이것을 클릭도우미 ‘나’에게 남긴다.<br>  어떤 사람들은 인생을 포기했기 때문에 집에서 구더기가 나오는 줄 안다. 하지만 의외로 구더기는 의욕이 바닥났을 때가 아니라 다시 막 샘솟을 때 나오기도 한다.그리고 때로 그것은 의욕을 품은 것에 대한, 새 삶을 꿈꾼 것에 대한 처벌처럼 느껴진다.  &nbsp;  &nbsp; 로또 당첨의 바람 속에도 이 부부처럼 ‘돈을 위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지 않고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에 대한 소망이 담겨 있다. 어느 누구라도 이런 소망을 갈구할 것이라 생각한다. 시간은 유한하니까, 그 한정된 시간 속에서 보다 여유롭고 행복하게 삶을 살아가고픈 마음. 이들의 소망은 타인에게 ‘전이’되는 걸까, ‘전가’된 걸까.  &nbsp;  <br>정기현, 「슬픈 마음 있는 사람」<br>&nbsp; 이 소설은 거여동의 고가교 기둥에 적힌 낙서를 읽는 것에서 시작한다. 요즘은 담벼락이 많지 않아서 문자로 쓰여진 무언가를 보는 일은 쉽지 않다. 함부로 남의 건물에 낙서를 하면 검찰에게 끌려갈 수도 있다. 엘리베이터에 붙은 인가받지 않은 게시물도 뜯어내면 재물손괴가 되는데, 남의 집 담벼락이며 공공건물에 어떻게 낙서를…… 그럼에도 그렇게 ‘어떤’ 할 말이 있기에 낙서를 하는 걸까. 이런 낙서들은 대부분 욕설이나 혐오, 비방문구다. 굳이 좋은 문구들은 쓰이지 않는다. 소설 속에 씌어진 낙서도 “김병철 들어라”로 시작해 욕설이 기본인데, ‘기은’과 ‘준영은 이런 낙서에 관심을 둔다. 조금 더 적극적인 건 ’기은‘이다. ’기은‘은 잠시 휴직하며 무력감을 겪던 중 가게 된 교회에서 ’준영‘을 만나 소소한 일상을 보내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며 가까워진다. 그리고, 가벼웁게 동네를 산책하며 오래된 낙서를 발견하고, ’한국오카리나박물관‘ 같은 기이한 장소를 찾거나 노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기은‘의 일과가 되었다. 동에 곳곳에 새로 발견한 낙서를 볼 때면 ’기은‘은 ’준영‘을 떠올린다. 「걷기의 활용」속 ’나‘가 태수형을 떠올리는 것처럼. “기은은 오늘 모험을 나선 목적이 김병철의 낙서를 밝혀내는 데 있지 않고 준영에게 이 모든 것을 알려주고자함에 있었다는 사실까지도 연달아 알게 되었는데, 그러자 마음에 슬픔이 깃들었다.”&nbsp; “그러자 마음에 슬픔이 깃들었다”. 마치 성경 문구같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 제목인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이 찬송가 제목이라서 그런가. 노래 가사를 찾아보니 이렇게 시작한다.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예수 이름 믿으며/영원토록 변함없는 기쁜 마음 얻으리”&nbsp; ’기은‘에게 깃든 슬픈 마음은 좀 다르다고 느꼈는데 이것을 찬송가로 성경으로 빗대어 보면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어쩐지 슬프지 않은 것 같은 슬픔이라고 해야 할까. 마치 축복받은 슬픔인 것처럼 느끼는 ’기은‘이 아닌가 생각하며, 나는 이것이 슬픔인가 생각했고 역시 슬프다가 아니라 ’슬픔 마음 있는‘이란 말이 맞다는 생각을 했고, 이것은 슬픔을 오롯이 느끼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졌다.   &nbsp;  “슬프지 않은 사람들은 슬픈 얼굴을 하고슬픔 한가운데 선 사람들의 기색을 살피다 집으로 돌아갔다”  &nbsp;    「소설 보다 : 가을 2024」속 세 단편은 각각 ’기억하기‘다. 하염없는 걷기이든 동네를 탐색하는 산책이든 빈티지 물건을 구매하든 누군가를 지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한 일, 또한 생생히 되살리고 정리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새삼.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4629/51/cover150/893204314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46295197</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