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주
김소윤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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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주가 없다


난주, 김소윤, 2018.


죄인 정난주는 더럽고 탐욕스러운 사학에 심취하여 임금께 씻을 수 없는 불충을 범하였고 제사를 폐하는 무부무군한 패륜을 저질렀다…… 죽은 자의 나라가 되살아난다는 요언을 일삼고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혔으며…… 나라를 파는 데 앞장선 대역죄인 황사영의 처로 백성을 현혹한 죄가 죽어 마땅하나……


  지구 탄생이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이니 그만큼 수많은 사람들의 탄생과 죽음이 있었다. 구전과 문자로 전해지고 기록된 사람이 있는 반면 존재함조차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숨결이 이 세상에 머물렀다. 이렇게 존재했던 누군가의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건 아련함으로 인해 흥미를 끈다. 시대와 상황, 생각하는 바가 다른 어떤 사람의 생애가 회자된다는 건 현재에 우리들에게 어떤 종류이든 울림을 주기 때문일 텐데, 난주란 인물은 어떨까.

  으레 사람을 소개할 땐 누군가와의 관계성을 앞세우긴 하지만 난주를 소개할 때에도 이렇게 시작한다. 정약용의 조카. 정약현의 딸. 정약용과 그 집안이 가지는 영향력이 있기에 정난주가 정약용 집안이라는 점에서 예상되는 바가 있다. 지식인, 강인함, 종교적 신념, 더불어 박해, 탄압 그런 것.

  황사영은 신유박해로 천주교가 처형되고 탄압을 받자 그 실태를 명주천에 적어 북경에 있는 프랑스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된다. 포교의 자유를 위해 프랑스 함대를 보내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이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천주교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고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는 제주도 관비가 된다. 이러한 정난주의 삶을 그려낸 소설이다.

  정난주의 삶은 주어진 환경의 영향과 개인의 심성과 신념에 기인한다. 당시의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에도 천주교에서 구원와 삶의 가르침을 얻고자 한 정난주는 살아가는 내내 종교적 신념을 굳건히 하고 그에 따른 삶을 살아나간다. 흐트러짐 없이 강인하며 품격을 잃지 않는 정난주의 태도는 많은 이들에게 공경과 공격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정난주의 삶의 태도가 이 소설의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 있고 그 태도가 종교적 신념에 따르는 삶이라고 했을 때 소설에선 종교적인 색채가 그렇게 눈에 띄게 느껴지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핍박받은 천주교인이라는 점과 그 이미지만을 안고 있다. 어쩌면 천주교만이 가진 색채와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 아니라서일 수 있겠다. 그저 매우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수준에서 종교적인 뉘앙스를 다루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살아온 방식보다 살아갈 방식이 더 힘겨운 상황에서 정난주가 지켜가는 삶의 자세는 매우 인상적이다.

  정난주는 매우 격정적인 상황을 자주 맞닥뜨리지만은 가장 격정적인 장면은 아들에 대한 것이다. 난주는 제주도로 유배가는 길목에서 어린 아들을 ‘버린다’.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 부모들이 아이를 입양 보낸 것이 생각나는데 신분제 사회에서 노비로 살아갈 아들의 미래를 염려하며 아들 경헌을 추자도 갈대밭에 내려두고 떠난다. 다행히 경헌은 마을에 살던 노인의 손에 길러졌다. 평생을 그리움과 죄책감 가득 살아가는 정난주의 마음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이후 정난주는 제주에서 다른 아이들을 제 자식처럼 거두고 보살피며 살아간다. 아들과 함께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장면만큼이나 인상적인 장면은 마을에 전염병이 돌 때이다. 아마도 이 시점에서 <난주>를 떠올리게 된 건 이 부분 때문이다.

  마을에 전염병이 돈다. 그 시작이 난주의 양딸 보말로부터 시작된다. 세상 가장 무서운 전염병, 마마님의 급속한 확산에 전염병 치료를 맡게 되는 정난주는 실로 성심성의껏 치료에 힘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니 어떤 차별도 없이 병의 위중을 보아가며 치료에 힘썼고 최선을 다했지만 병의 시작이 양딸로부터 시작되었으니 그에 대한 책임감 또한 막중했으리라. 어떤 경우이든, 어떤 종교이든 인간에 대한 존엄과 사랑이 핵심이고 본질이 아닐까. 그런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려고 포교 활동을 하는 게 아닌가? 말로 떠드는 게 아니라 그런 삶의 태도를 실천하며 자신이 믿는 종교의 뜻을 보여주는 거 아닌가?

  가짜뉴스가 나돌고는 있다고 하지만 감추고, 무질서하며, 보편적인 예의를 갖추지 않은 종교인들의 태도가 종교 자체에 대한 믿음을 줄 수 있을까. 소설 <난주>는 집단의 힘이 세상에 내놓은 영향이 아니라 오로지 한 개인의 성정으로 만들어간 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종교적 힘이 <난주>의 삶을 이끌었을까 했던 생각은 종교의 힘이 아니라 개인의 힘이라는 생각을 더하게 한다. 그리하여 지금 ‘난주’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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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손님 (양장)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안드레 애치먼 지음, 정지현 옮김 / 잔(도서출판)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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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을 불러줘


그해, 여름 손님, 안드레 애치먼, 2018.


  그해 여름을 기억하며 시작하는 소설은 “나를 당신의 이름으로 불러 줘요”라는 말로 끝맺는다. 제목이 전체 소설 이미지를 가늠‧장악한다는 점에서 원제와 다른 번역본 제목은 상반된 느낌을 준다.  <그해, 여름 손님>은 나른하고 간지럽고 아련한 느낌이다. 과거의 어느 시간대에 머물러 있는 느낌을 준다. 시간과 공간이 주는 이미지, 감각적인 분위기에 더 휩쓸려 보게 된다. 반면 원제는 강하고 격렬한 느낌이다. 아련함보다는 움켜쥐려는 느낌과 대화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두 이미지를 겹쳐두고 보면 결국 이 소설은 사랑이야기다. 아주 익숙한. 그렇잖은가?


내가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세계였다. 하지만 이 세계가 좋았다. 이 세계의 언어를 배우고 더욱 좋아졌다. 그것은 내 언어이고 호칭이었다. 가장 깊은 곳의 갈망이 정감 어린 농담으로 밀수되는 곳. 두려운 일에 미소를 보이는 것은 더 안전해서가 아니라 내가 새로 발 들인 세계의 모든 욕망은 오로지 연기로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랑이란 경험해보기 전에도 사랑하는 그 순간에도 늘 판타지일 것이다. 열일곱 살 엘리오는 ‘한번도 와 본 적 없는 세계’라고 말한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사랑을 채워가는 과정의 호기심, 떨림, 두려움은 엘리오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엘리오는 감성적이고 감각적이고 또한 열일곱 소년의 무게로 자유분방하고 매우 도전적이기도 하다. 그해 여름 이탈리아 해안가의 별장에서 소년은 부모님이 초대한 학자 스물넷의 올리버를 만난다.

  소설은 회상이기에 올리버를 만난 그해 여름은 특별히 기억된다. 햇살 하나까지도.

  올리버이기에 엘리오의 마음이 끌린 것일까. 그때 그해, 열일곱으로 성장한 엘리오의 그 나이가 그 마음을 불러일으킨 것일까. 어쩌면 일탈, 그러나 사랑. 어쨌든 엘리오가 올리버에게 더욱 적극적이다. 올리버의 시각으로 쓴 책이기에 엘리오의 감정이 뚜렷이 드러나지만  학자로서 스물 넷 성인으로서 올리버는 좀더 제 감정을 컨트롤하려 한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연주할게요,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내 손가락이 벗겨질 때까지. 난 당신을 위해 뭔가 해 주는 게 좋고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테니까 말만 해요.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았어요. 친근하게 다가가는 나에게 또다시 얼음처럼 차갑게 반응할 때조차. 우리 사이에 이런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 여름을 눈보라 속으로 가져가는 쉬운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절대로 잊지 못할 거예요.


  우리나라와 외국의 문화는 매우 다르고 특히 성과 사랑의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엘리오를 미성년자로 두 사람을 동성이라는 틀로 가두고 보면 이 사랑은 매우 ‘문제시’되는 것으로 치부된다. 실제 상황이라면 엄청난 파급력으로 가십의 대상이 되어 포털을 뒤흔들고 있을 얘기다. 어쩐지 이탈리아에서 벌어지는 이 이야기는 배경 때문인지 소설을 읽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인지, 전혀 놀랍고 심각하게 보이지 않는다. 엘리오와 올리버만이 조심스럽다. 그들 또한 마냥 자유롭지 못하기에 그들의 사랑은 좀더 내밀하고 비밀스러운 눈짓과 손짓으로 오간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란 어느 정도 타인에게 감춤과 드러냄의 밀당을 지속하는 과정이다. 그러하기에 틀을 치우고 본다면 그냥 사랑하는 사람들이 ‘썸’을 타고 사랑을 확인하는 일련의 감정과 상황이 자연스럽고 감각적으로 펼쳐진다. 그 간질거림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수많은 이들의 첫사랑처럼. 

  그래서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열일곱 소년이라거나 동성애라거나. 특별할 것 없는 사람과의 사랑이야기라고. 하지만 이것 역시 ‘틀’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의 작용이 아닐까 싶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보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소설을 읽어가며 사랑에 눈뜬 소년의, 특히 피아노 치는 아이의 감성은 다르구나 생각하면서 읽었지만,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 내 이름으로 너를 부를게”, 딱히 이 문장이 다가왔던 건 아니다. 우리에겐 너무도 유명한 “김춘수의 꽃”이 있어 이 문장에 대한 생각은 나름 각인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지점에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 어떤 느낌이지 생각했다. 

 

그동안 난 어디에 있었던 거지? 올리버, 내가 어릴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요? ‘이게 없는 삶은 무슨 의미일까?’라는 질문이기도 했다. 끝에서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그만둔다면 난 죽을 만큼 괴로울 거예요. 그만둔다면 난 죽을 만큼 괴로울 거예요.”라고 말한 사람이 그가 아니라 나인 이유였다. 그것은 내 꿈과 환상, 그와 나, 그의 입에서 내 입으로, 다시 그의 입으로 입에서 입으로 왔다 갔다 하는 욕망의 말을 완성하는 길이었다. 내가 외설스러운 말을 시작했는지 그가 부드럽게 따라 하다가 말했다.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 줘. 내 이름으로 너를 부를게.” 태어나 처음 해 본 일이었다. 그를 내 이름으로 부르는 순간 나는 그 전에, 어쩌면 그 후에도 타인과 공유한 적 없는 영역으로 들어갔다.


  공유. 타인과의 합일. 사랑할 땐 흔히 눈이 먼다고 한다. 생각은 많이 하지만 한 부분에 집중되어 생각되기도 하고. 엘리오는 올리버를 사랑하면서 자신의 사랑과 정체성에 대해 생각한다. 열일곱 소년은 더욱 더, 혼란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기에 휘둘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각하는 것은, 어떤 순간에도 나는 나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 그 이상적인 뜻을 수긍하면서도 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 나는, 사랑할 때일수록 내 이름을 지켜야 할 거라는 생각을 아주 굳건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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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 - 앤드루 숀 그리어 장편소설
앤드루 숀 그리어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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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회복력


레스, 앤드루 숀 그리어, 은행나무, 2019.


  “대체 아서 레스가 누구야?”


  하나, 둘, 셋… 숫자를 세어 본다. 삶의 마지막 순간 내 장례식장을 채울 사람의 숫자라고나 할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무도 없으면 좋겠어와 아무도, 없으면, 어떡하지?

  때때로 실연이란 여러 가지로 자신을 재발견하게끔 한다. 실연 후의 가장 대표적인 반응이 여행이라는 점에서 실연은 현재 상황을 환기하고 변곡점이 되는 기회다. 실연과 여행은 한 덩어리로 끈적끈적하게 붙은 상실과 집착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결정하게 한다.

  레스 역시 9년 차 연인 프레디가 보낸 청첩장을 받고 여행을 채택한다. 지금껏 가보지 않은 세계 여러 나라의 문학 행사에 기꺼이 참석하기로 했다. 물론 레스가 작가였기에 합리적 결정이었다. 오십이 되었어도 여전히 무명작가이든 아니든 레스에게 “뜨뜻미지근한 평론이나 무심한 모욕은 더 이상 그에게 상처를 줄 수 없었지만 실연은, 진짜 진정한 실연은 그의 얇은 가죽을 뚫고 예전과 똑같은 색조의 피를 낼 수 있었기에” 가능하고 필연적이었다.


선생이나 저나, 우리는 천재들을 만나봤죠.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람들 같지 않다는 걸 알고 있잖습니까? 계속해나가는 것, 자기가 천재가 아니라는 걸,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계속 살아나간다는 건 어떤가요? 내 생각엔 그게 최악의 지옥인 것 같아요.


  레스는 멕시코, 이탈리아, 독일, 모로코, 프랑스 등등에서 열린 문학 행사에 참여하면서 인생과 작가로서의 자신에 대해 새롭게 발견하고 정립한다. 그냥 ‘형편없는 작가’라고만 생각했던 자신이 ‘형편없는 게이’이기까지 하다는!

  오십년만 돌아보면 되는 아서의 인생은, 문학 기행이 펼쳐지는 장소에서 다양한 에피소드와 함께 한다. 멕시코의 행사는 천재 시인 로버트에 대한 심포지엄이었고 레스는 무대에서 30년 전에 만난 로버트의 아내 메리언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당시 로버트의 아내 메리언은 레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 로버트 좀 잘 챙겨줘.” 잘 챙겨주다 못해 로버트를 잘 챙겨간 레스는 로버트와 15년을 함께 살았다. 

  

우리 세계의 아름다운 점을 보여주는 게 우리 의무거든요. 게이 세상의 아름다움 말이에요. 하지만 레스 씨는 책의 등장인물들이 아무 보상없이 고통받게 만들어요. 내가 뭘 잘 몰랐다면 레스 씨가 공화당 지지자인 줄 알았을걸요. <칼립소>는 아름다웠어요. 아주 슬픔으로 가득했지. 하지만 너무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자기 증오에 차 있었어요. 한 남자가 어느 섬으로 휩쓸려 와서 몇 년 동안 게이 연애를 한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아내를 찾으러 돌아간다! 그것보다는 잘 쓸 수 있잖아요. 우리를 위해서. 우리에게 용기를 달라고요, 아서. 더 높은 목표를 잡아. 이런 식으로 말해서 미안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말이어서 하는 거예요.


  아서는 실연의 상처에 더해 재능없음에 대한 한탄이 가득하다. 오십의 아서는 젊음마저도 없다는 사실을 더욱 자각한다. 그럴수록 아서의 인생은 과거도 미래도 형편없는 삶으로 점철되는 듯하다. 자존감이 바닥으로 치닫고 끝없는 슬픔과 상실에 깊이 빠진 아서의 이 여행은 그래서인지 일명 ‘웃픈’ 상황의 연속이다. 제 자신의 ‘형편없음’에 매몰된 아서, 짠내 나는 아서의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그럼에도 계속된 여행을 하는 아서가 놀라울 뿐이다.

  소설은 코믹한 상황 설정과 유머를 구사하며 형편없는 게이 작가의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그 설정에 비해 마냥 유쾌하게 느껴지거나 책장 넘기는 속도가 나진 않는다. 때론 누구에게나 자기연민이 필요하지만 지나친 자기연민은 독이 된다. 시작부터 일관된 아서 레스의 자기연민과 비하가 책장 넘김을 더디게 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더불어 레스와 마찬가지로 나만의 지난 시간을 회상하느라 더뎌지기도 했다. 젊음. 청춘. 내 인생에 있었던 지난 시간.

  지난 시절을 회상하다 보면 레스의 인생에서 이 실연의 아픔은 결국 로버트와 프레디, 그 연인들 자체에 대한 상실감보다 지나간 인생에 대한 회한인 것만 같다. 지난 그 시절의 레스, 젊은 시절의 레스. 그 시절이 만들어낸 지금의 레스. 


아서 레스.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최고의 인생을 누렸어.

돌아갈 수는 없어. 그게 전부 나쁜 것만은 아니지. 이젠 사람들이 항상 너를 어른으로 생각할 거라는 뜻이니까. 널 진지하게 생각할 거야.


  시종일관 늙고 형편없음으로 자신을 무장한 아서 레스가 많은 사건과 사람들과 만나는 과정에서 자신이 마냥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아니라는 쪽으로 생각하게끔 되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이 아닐까 한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 제 형편없음의 근거로 삼던 아서 레스가 사소한 것에서부터 인생에 대한 긍정적 기운을 생각하는 과정. 어떤 형태로든 사람은 제 인생에서 ‘자기회복력’을 가질 시간이 필요하다. 레스는 그것을 잘 실천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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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18 - 모르는 영역
권여선 외 지음 / 생각정거장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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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힘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18-모르는 영역 


  비록 난 대상 수장작가 자선작 <전갱이의 맛>에 더 매료되지만 <모르는 영역>을 읽고 나면 왜 이 작품이 이효석 문학상 대상작인지 느껴진다. <메밀꽃 필무렵>이 바로 떠올려진다. 봉평 장날 풍경은 떠들썩한 식당 안 풍경으로, 메밀꽃 핀 달밤은 어둠 가득한 저수지와 차오르는 달의 이미지로, 부자관계일지 모를 허생원과 동이의 대화는 소원한 부녀관계인 명덕과 다영의 대화와 닮은 듯 여겨진다. 내용은 다르지만 전체적인 인상에서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여운이랄까, 여백이랄까 그런 이야기 분위기가 닮았다.

  가족관계에서 시간이 지나면 더욱 어색해지는 관계, 부녀관계가 아닐까. 언제부턴가 아버지의 ‘딸바보’가 대세처럼 자리하고 있지만 사춘기를 지나 성인이 된 딸과 아버지의 관계는, 더구나 어머니가 부재한 부녀관계는 소설 속 부녀관계처럼 소원할 것이다. <모르는 영역>은 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가족이란 가깝지만 먼 그런 관계다. 그 관계의 익숙함을 경험하고 느끼고 있는 모습을 “모르는 영역”이라는 단어로 “해 입장에서 밤에 뜨는 달은 영영 모르는 거지”라는 문장 속으로 잘 그려내었다.

  <전갱이의 맛>은 권여선 작가의 단편이다. 첫 낚시 경험은 양식장 사이의 바닷가에서 장난감 같은 낚시줄로 우럭을 몰아쳐 잡은 거였다. 함께 장난감 낚시를 하던 이는 전갱이만 잡힌다고 울상이어서 전갱이가 맛이 덜한 물고기인줄 알았다. 그날 밤 잠결에도 우럭을 건져 올릴 때의 짜릿함이 손가락 끝에 머물렀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우럭 잡기가 쉽지 않다는 말에 의아해하면서도 우럭만을 건져 올린 것에 심취해 있었던 것인지 바닷가에 돌아와서 내내 천원짜리 줄낚시에 대한 경험을 늘어놓던 때가 생각난다. 어쩜 우럭잡기에 대한 이야기는 더 우려먹을 지도.


그러니까 사람은, 사람이란 존재는……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혀로 맛보고, 그렇게 감각하는 자체만으로 도저히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더라고. 내가 지금 이걸 느낀다, 하는 걸 나에게 알려주지 못하면 못 견디는 거지. 어떤 식으로든 내 느낌과 생각을 내게 전달해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감각이나 사고 자체도 그 자리에서 질식해버리고 마는 것 같았어.


  남자는 성대낭종 수술을 받고 회복과정 동안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그 시간 동안 남자는 말에 대해 생각한다. ‘말’이라는 게 타인과의 관계에서 필요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와의 대화라고. 그런 생각을 하게끔 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말을 들려주기 위해 표현하려는 과정들이 마음에 와 닿았다. 새삼 말이, 언어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내 낚시 바늘을 비껴간 전갱이의 맛은 여전히 모른다. 그럼에도 이혼한 전남편과 우연히 만난다면 전갱이보다는 우럭을 먹을 것 같지만 식당이고 시장이고 널린 것은 우럭이기도 했다. 소설 제목을 보자마자 든 생각은 내게 없는 감각이었다. 나는 전갱이 맛을 모른다. 그 결여된 감각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그 무엇, 그 이야깃거리.


나의 말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기억되거나 발견되는 거야. 내가 어떤 언어를 간절히 원했던 순간을 기억하거나, 그 간절함이 생겨나는 그 순간을 발견해서 내 말로 삼는 거지. 그러니까 내 말들은 어원을 잃는 법이 없어. 최초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그 위에 다른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말 속에 삶이 깃드는 방식이라고나 할까. 때로는 뜻을 알 수 없는, 그저 표현으로 먼저 생겨난 말도 있고, 가끔 아주 외설적인 말도 뛰어나와.


  전갱이의 맛을 읽고 조금 벅찬 감정이었는데 언어가 가지는 힘에 대한 경외감이라고 할까. 타인과의 대화를 몇날 며칠 하지 않는다고 질식하지 않으리라 자신하지만 끊임없이 생각이란 걸 하고 있다는 건, 남자가 말한 것처럼 자신과의 대화를 놓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그 수단인 말. 내가 말을 하는 방식, 내가 말을 생각하는 방식, 그런 것들이 내 삶을 채워간다는 생각에 나는 좀더 말에 대해 겸허하겠다 생각하는 동시에 보다 많은 말을 건져 올려야겠다 싶다. 내가 기억하고 발견하는 만큼 나의 ‘말’이 내 언어의 ‘어원’이 많아질 것이므로. 작가는 원고를 마치고 나면 술을 마신다고 했는데 이런 감각을 얻으려면 소주에 전갱이를 먹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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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수상작
박솔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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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움이라 할 수 있을까


을, 박솔뫼, 자음과모음(이룸), 2010.


  ‘을’이란 제목을 보자마자 갑을병정 사회에서 살아가기에 그 ‘을’이라 생각했다. 을이 있으려면 갑이 있어야 하고 그런 이야기일거라는 예상은 빗나갔고 시공간이 어딘지 짐작할 수 없을 소설을 만난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을이란 걸 알았음에도 책을 덮고 나서 뿌연 안개를 걷어내지 못한 채 생각했다. 이건 갑을의 그 을이 맞노라고.

  어쩌면 이렇게 기억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 ‘을’이라는 소설은 세 사람에 관한 소설이고, 그런데 그들은 연인도 친구도 아니고 정확히 어떤 사이인지 알 수 없었다고. 외딴 호텔에 그들은 머물렀고 호텔은 어느 나라,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아무데나 갈 수 있잖아’라는 대사처럼 도대체 등장인물들의 마음이 행동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만큼 이 소설이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소통의 매개가 아니라 기호의 등가물이 되는 것들을 사랑’하는 을처럼 소설은 독자와 소통할 의사가 없는 것 같다. 익숙한 소설의 서사 방식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기호와 메시지같아 소설은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진다. 작가의 의도를, 이야기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언제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며 글을 읽었던가. 그래서 등장인물의 이름 ‘을’이 아니라 갑을관계의 ‘을’이란 기호로 읽어버린다.

  소설 속 인물의 이야기보다 ‘을’이 본 영화 얘기가 더욱 흥미롭다. 하긴 그것이 그들의 관계를 암시하는 내용일 것이다. 호텔은 행복한 낙원은 분명 아니지만 막상 한방의 총성이 울린 호텔은 더욱 불온하게만 느껴진다.


을이 보았다는 영화는 세 사람에 관한 영화였다. 어떤 외딴 곳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연인도 아니었고 친구도 아니었다. 을은 그들이 정확히 어떤 사이인지 알 수 없었다. 을은 그들이 외딴 곳으로 몰린 사람들로 보였다. 그들이 어떤 사이인지 알 수 없었지만 ‘외딴 곳’이라는 장소가 그들에게 동지애 비슷한 것을 느끼게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사는 외딴 곳에 새로운 사람이 방문하게 되었다.


  장기 투숙자를 대상으로 한 호텔에 ‘을’이 머물고 있고 ‘민주’를 불러들였고, 또다른 투숙객 ‘프래니’와 ‘주이’가 있고 하우스 키퍼 ‘씨안’이 있다. 이렇게 세어 보면 다섯이 되지만 이야기는 늘 셋을 말한다. 처음부터 셋이 아니라 둘이었다가 더해진 셋의 이야기로서. 그래서인지 둘 사이에 더해진 셋은 관계를 흐리게 한다. 둘일 때에는 마치 명확해 보였던 관계가 셋으로 인해 다르게 보인다.


두 명이 있을 때는 다른 할 일이 없다는 듯 뒤엉켜 뒹굴기만 했으나 세 명이 되자 그들은 나라라도 세울 듯이 열심히 일했다. 머릿속으로는 인류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비장하며 가슴 떨리는 상상을 했다. 그렇게 비장하며 건설적이고 청교도처럼 부지런한 날들이 흘렀다. (…) 노동 후 피곤했던 그들은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런데 누군가가 살며시 일어나 어둠 속에서 칼을 들어 누군가를 찔렀다. 푹 하고 찌르는 소리와 끅 하는 비명이 짧게 순차적으로 들렸다. 또 다른 한 명은 가만히 일어나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칼을 들었던 이는 죽은 이의 시체를 질질질 끌고 나갔다. 모리세이는 계속 노래를 부른다. 방 안에는 다시 두 사람이다. 그들은 짙은 어둠 속에 앉아 있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엉겨 붙어 뒹굴었다.


  을과 민주, 프래니와 주이의 관계는 기존 사회질서에서 쉬이 용인되는 관계는 아니다. 그렇기에 사촌 자매인 프래니와 주이는 가족과 나라를 떠나왔다. 남성이 안정된 경제력을 가지고 여성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상황이 통상적인 사회에서 을과 민주는 그렇지 않다. 변화를 위해서 그들이 호텔로 온 것인지 아리송할 정도로 호텔 투숙객으로서 이들의 삶은 목적도 의지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자유로운 듯 위태로워 보이는 일상이기에 지켜보는 입장에선 불안하기만 하다. 서로 자신이 ‘을’인 것처럼 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을질’인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관계는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인지 깨려고 하는 것인지조차 아리송하다. 그렇기에 어쩌면 셋의 존재가 중요할 것이다. 그들 서로의 관계를 명확히 해줄 세 번째의 존재, 그 세 번째 인물의 위치가.


이 세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고 있음이 보였다. 그것을 질투나 시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본능적인 긴장감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력한 감정. 그들은 공을 던지듯이 긴장감을 던졌다. 던지는 사람은 늘 서툴렀고 받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렇게 쉼 없이 빠른 속도로 강력한 감정들을 주고받아냈다. 던지고 싶어서 던지는 것도, 받고 싶어서 받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긴장감 안에서 스스로를 지켜낼 수 없었던 것이다.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던지는 것이고, 어디선가 날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얼떨결에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다시…… 그러다 그렇게 주고받던 감정들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사람이 칼을 든 것이었다. 그가 들지 않았다면 누구라도 칼을 들었을 것이다.


  둘 사이에선 더 많이 이야기하는 자가 을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더 많이 지켜보고 그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렇게 알고 있음에도 더 알고 싶고 그러나 더 다가가지 못하는 어떤 관계들. 신인문학상을 받은 소설로 심사위원은 노마드적 사고, 자유로움이 소설에 가득하다고 이야기한다. 분명 끈적이지 않는 이야기다. 새로운 투숙객을 맞이하는 깔끔하게 정리된 침구류를 만진 듯한 느낌과 건조한 문체는 분명하지만 자유로움에 대한 갈망이 느껴지진 않았다. 씁쓸하고 쓸쓸하며 지극히 공허한 느낌이 가득한데 어쩌면 그건 타인과의 소통과 관계를 미적거리며 남긴 탓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쿨한 관계 정리가 아니라 쿨내 나 보이게 했을 뿐인 관계로 인한 미적거림. 그렇게 소통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 이유로,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머물렀다는 생각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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