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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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박사


밀크맨, 애나 번스, 창비, 2019.


“내게 딸이 있다면, n번방 근처에도 가지 않도록 평소에 가르치겠다. 내 딸이 지금 그 피해자라면 내 딸의 행동과 내 교육을 반성하겠다”

- 경제연구소 박사라는 자 曰. 2020년


“사진 찍어 돌린 남자가 90% 잘못한 것이지만 처음 만난 사이에 술에 취해 잠이든 여성도 10%의 잘못은 있어 보인다“  - 의학 박사라는 자 曰. 2015년


  숨쉬는 것처럼 이런 말을 들어왔다. 박사뿐만 아니라 검사, 의원, 교수, 사장, 회장, 기자 할 것 없이. 회장이 호텔방에서 검사가 별장방에서 경찰이 클럽에서 행했던 ‘그 일’에 피해자를 공격하고 탓하며 혐의없음을 만들어주니 끝없이 ‘방’들이 생겨나는 거다. 무한히 뻗어나가는 n번방. 박사가 무한 증식한다. 

  맨부커상 수상작(2018) 『밀크맨』을 생각한다. 폭력 상황에 노출된 열여덟살 익명의 소녀가 그 상황과 심정을 토로하는 소설, 특정 장소도 인물도 지칭하지 않지만 뚜렷하게 상황이 인식되는 소설, 상당한 몰입감으로 소녀의 말에 귀기울이게 되는 소설이다. 언제 우리가 피해자의 목소리에 제대로 귀 기울인 적 있던가. 지치지 않고 이야기하는 소녀의 언어는 그렇게라도 해야만 숨쉴 수 있을 거라는 외침이며 증언이기에 한마디도 놓칠 수 없다.

  소녀가 살고 있는 마을은 길 하나를 두고 대치중이다. 무장세력과 무장세력 간의 테러와 보복이 극에 달한 ‘일촉즉발인 사회’다. 북아일랜드 출신인 작가이기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세력과 저지하려는 세력이 대치했던 1970년대 북아일랜드 상황을 배경으로 생각하게 되지만 작가는 그 어떤 구체적 지칭을 하지 않는다. 길건너, 물건너, 국경너머와 같이 장소를 말하며 북아일랜드만을 한정하지 않은 확장된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한국도 떠오르고….

  십남매의 가운데아이, 열여덟 소녀는 책읽기를 좋아하며 길을 읽으면서도 책을 읽는다. 어느날 소녀에게 한 남자가 다가온다. 사람들이 밀크맨이라고 칭하는 우유배달부, 하지만 우유배달부가 아닌 마흔한살의 유부남인 밀크맨은 소녀가 있는 곳곳마다 불쑥 나타난다. 소녀는 ‘개인공간 침해’라는 게 뭔지 몰랐고 ‘불편한 느낌을 가지더라도 누군가가 접근하는 것을 꺼리거나 거부할 권리가 있음’도 알지 못했다. ‘신체 폭력이 없는 한, 명백한 언어적 모욕이 가해지지 않는 한, 눈앞에서 조롱당하지 않는 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는 게 기본 원칙이었으니, 그러니 일어나지 않은 일에 피해를 당했다고 할 수도 없었던’ 소녀는 밀크맨으로 인하여 불안과 공포의 일상을 보낸다. 소녀는 밀크맨의 행동에 대해 가족에게도 어쩌면 남자친구에게도 이웃 사람들에게도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만약 내가 “『아이반호』를 읽으면서 경계 도로를 따라 걷는데 그 사람이 차에 타라고 했어”라고 말한다면 “대체 왜 위험한 경계 도로를 따라 걸었고 왜 『아이반호』를 읽었는데?”라는 말이 돌아올 것이다. 만약 내가 “저수지 공원에서 러닝을 하는데 밀크맨이 나타나서 나하고 같이 달렸어”라고 한다면 “그렇게 위험하고 수상한 곳에 대체 왜 간 거고 러닝이라니 그런 걸 왜 했니?”라는 말이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제대로 알려 하지 않고 소녀와 밀크맨이 불륜관계이고 소녀가 밀크맨을 유혹한 것이라 소문을 부풀린다. 근거는 없다. 소녀가 길을 걸으며 책을 읽는 게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라 탓한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면 이유는 하나, 무장독립투쟁군조직의 주요 인물이라는 ‘밀크맨’이 가진 지위 때문이다. 사실과 진실에 무관하게 권력에 대한 맹목적 믿음과 충성은 열여덟 소녀의 삶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눈에 보이는 폭력이 마을 전체를 휘감은 상황에서 밀크맨과 가족과 친지와 이웃의 이 폭력까지 견디며 살아간다. 마을 사람들은 ‘정치적인 것과 무관한 죽음이 일어나면 당황하고 불안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하면서 그들이 소녀에게 가하는 이 폭력을 인지하지 못한다.

  소녀는 말한다. 밀크맨 때문에 ‘얼마나 꽉꽉 닫혀 있었는지, 얼마나 감정도 생각도 없는 존재로 굳어졌는지’를. 더불어 그것은 ’공동체 때문, 정신적 분위기 때문, 점령 상황 때문이기도‘하다고. 한 사회가 가진 의식이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 수 있다. 한국 역시도 소녀가 당한 ‘폭력’의 문제를 정치적인 대립으로 이끌어 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도록 여성을 향한 폭력에 관대하게 반응한 이 사회가 이번 n번방 사건에선 다를 수 있을까. 달라진다면 그건 뚜렷하게 ’권력‘을 가진 가해자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일지, 제외하고서일지 알 수 없다. 소녀의 마을에서 보이는 분위기는 한국 사회에 흐르고 있고 수많은 밀크맨들 간 카르텔이 공고하다.

  그래서, 그렇다고, 소녀는 계속 타인의 공포 속에서 움츠리고 있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소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지, ‘자기와 대립하는 세상에서 겹겹의 장애물을 맞닥뜨리면서도 자기 방식을 고집한다면 미친 건가’를 물어보게 된다.


만약 우리가 이 빛을, 투명함을, 광휘를 받아들이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그걸 즐기게 되고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익숙해지면 어떻게 될까, 그걸 믿게 되고 기대하게 되고 감명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희망을 갖게 되고 해묵은 전통을 버리고 빛에 물들고 빛을 흡수해서 우리 자신이 빛을 내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나는 소녀가 끊임없이 책을 읽는 장면을 떠올린다. 이것은 총격과 살인이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 총을 든 자와 총을 따르는 자들과 대비된다. 소녀는 많은 부분을 책에서 질문을 구하고 답을 찾는다. 그래서 소녀는 마을 사람들과 ‘다르다’. 공동의 적을 향해서는 오로지 하나의 목표에 모든 것이 매몰된다. 공포와 억압으로 다양성을 통제하며 매우 중요시되어야 하는 ‘인간존재’를 무시하고 인간을 도구화시키는 까닭이다. 소녀가 폭력과 전체주의 사회에서 깨달은 것.


살다보면 많은 일이 믿음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법이다. 나는 결국 산다는 일이 믿음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일이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아무튼 밀크맨의 이름에 대한 소식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속았다고 생각했고 겁에 질렸고 당혹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밀크맨’을 가명이나 암호명이라고 생각했을 때에는 신비스럽고 은밀하고 연극적인 가능성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 이름이 상징이 벗겨진 채 일상적이고 평범하고 친근한 톰, 딕, 해리 같은 이름의 세계로 끌어내려지자 무장단체 핵심요원의 이름에 덧붙였던 존경심이 순식간에 줄어들더니 아예 사라져버렸다.


  익명 세상에 숨어 있던 박사가 이름을 찾았다. 이름이 드러난 순간 익명 세상에서 벌이던 행태와는 다른 행동을 보이고 사람들 역시도 다른 태도를 보인다. 박사의 실체를 찾아내는데 어느 피해자의 끈질긴 노력과 구체적인 행동이 있었다는 글을 보았다. 그 분의 노력에 빛이 들어야 한다.


타인에 대한 공포처럼 다른 사람의 심리를 장악하는 것들은 숙주가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고 숙주를 제거하면 자기도 제거될 수밖에 없다.


   ‘여성 문제는 혼란스럽고 까다롭고 아주 빌어먹게 성가신 문제이고 문제 여성들은 완전히 맛이 간 사람들‘이라는 신념을 주장하며 여성을 도구화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것들에게 『밀크맨』이 닿지는 않을 테니, 그들이 가지려 애쓰고 가지고 있는 ’권력‘을 제거하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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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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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허블, 2019-06-24.


  오로지 비현실적인 상황 자체로만 ‘이것은 SF소설이오’라고 내미는 소설이 있다. SF라는 소재를 반감시키며 대체로 경직된 분위기, 옅은 과학적 상상력, 매력적이지 않은 문체로 인해 오랜 여운을 주는 SF소설을 찾기란 어려웠다. 그래서 잘 읽어지지 않고 찾게 되지 않는다. 열광하는 외국 작가 몇몇에 의지하게 되는 이유다. 이들의 소설이 소재와 생각의 무한함을 보여주며 얼마나 우아하고 매력적으로 이야기를 펼쳐놓는지 말이다.

  과학도였다는 작가의 이 소설집은 그동안 읽어본 한국 작가의 SF 소설과는 다른 느낌이다. 과학이라는 표피만을 훑어서 이야기를 쏟아놓지 않았다. 익숙한 주제들을 푹 고아서 독자들에게 먹기 좋게 내밀어 준 듯 느껴졌다. 다소 테드 창의 소설을 보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래서 좀더 편안하게 읽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인상적이고 좋았다.

  소설 주인공으로 할머니가 제법 등장한다. 우주는 항상 아득한 느낌인데 할머니라는 단어 또한 그런 느낌을 준다. 아득함과 아득함이 만나 소설은 친숙하기도 하고 낯선 감정과 조금은 서글픈 감정에 빠지게 한다. 이런 감정은 잘 팔릴까.

  「감정의 물성」은 다양한 감정을 물성처럼 만들어 판매하는 회사와 이를 소비하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기쁨이나 즐거움만이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들도 잘 팔린다. 왜?


“부정적 감정 라인은 판매되는 물량에 비해 실 사용량이 적대요. 다들 쓰지 않아도 그냥 그 감정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언제든 손안에 있는, 통제할 수 있는 감정 같은 거죠.”  -「감정의 물성」


  눈물 흘리는 누군가를 위로할 때 “울지 마”가 아니라 “그래, 실컷 울어”라고 말할 때의 기분을 생각했다. 실제로 이렇게 통제만 적절히 이뤄진다면 온갖 부정적 감정들을 물성화해 생산해 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현대 사회가 다채로운 감정을 펼칠 기회를 주지 않고 특정한 감정만을 발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궁극적인 행복을 위해 말이다. 감정적 동물이어서는 안되겠지만 감정이란 필요한 것이니까.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는 유전자 선택으로 장애도 없고 혐오와 차별도 없는 그리고 사랑도 없는 유토피아 같은 행성을 그린다. 그리고 여전히 혐오와 차별과 장애가 있는 그런 지구가 있다. 지구로 순례 여행을 떠난 이들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마치 「감정의 물성」에서 우울체를 손에 쥐고 있으려는 구매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떠올려진다. 하지만 우리는 답을 알고 있다. 이미 없는 것이 가득한 그 세계보다 단 하나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 어쩌면 늘 정답으로 정해진 그 하나의 이유, 그것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당장 내일도 미래이지만 과학기술이 좀더 발전된 어느 미래라고 해서 인간의 삶이 특별히 달라져 보이지는 않는다. 삶은 기술발전에 따른 편의와 편리를 경험한다 해도 감정의 스펙트럼은 특별히 달라질리 없으니까. 여전히 희로애락이란 삶을 지배하는 절대적 요인이 된다. 여전히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는” 기술적 한계와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가득한 세상이다. 달라진 듯 달라지지 않은 풍경 속에서 그럼에도 의지하고 기대고 위로받는 것은 역시 인간이라는 사실. 그래서 「스펙트럼」속의 루이는 할머니에게, 인간에게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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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문장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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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만들어진다


단 하나의 문장, 구병모, 문학동네, 2018.


  여성에게 소설쓰기와 아이 기르기는 어떤 의미일까. 구병모 작가의 여덟 단편을 읽고 난 첫 질문은 이것이었다.

   「지속되는 호의」와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를 보며 끝날 줄 모르는 짜증과 답답함이 있었다. 그 감각이 여전히 뒷목을 서늘하게 한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산골로 거주지를 옮긴 정주에게 모든 것을 간섭하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 다른 아이들을 보살피는 과정에서 점점 노골적으로 무례함을 보이는 아이들의 태도, 그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 지 모르는 불안과 공포가 잊히지 않는다. 공동육아, 육아에 대한 사회서비스가 증가하고 체계를 갖춘다 해도 ‘내 아이’에 관한 한 관대하고 편협하게 행동하는 부모의 존재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움직여야 하지만 합의된 방식이란 여전히 모성신화를 기반으로 하는 건 아닌가.

  엄마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모성신화는 실존을 뛰어넘는다. 그보다 우선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기에 모성신화만큼 건드릴 수 없는 절대적인 프레임이 있을까. 환상적 신화에 맞추어 현실이 창조된다. 그래서 엄마는 있지만 나의 엄마는 없는 듯이 생각되기도 한다. 모든 것에 우선해 ‘나’라는 존재의 확립이 중요할 거라는 건 완벽하게 짜여진 신화 앞에 기꺼이 무너진다. 그래서 여성 자신의 자아 찾기에 관한 담론이 늘어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현실을 벗어난 가상의 세계 속에서 새로운 신화를 찾아보고자 만들어보고자 하는 것인지도.

  소설집을 읽으며 거듭 나의 언어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현실 세계이든 가상 세계이든 상황을 인식하며 나라는 정체성을 명확히 하며 살기 위해선 어떤 ‘말’이 필요한지, 어떤 ‘말’에 휘둘리지 않아야 하는지 그런 생각들. 글이란 글쓰기란 존재를 자각하는 행위라고 생각할 언어 자체가 한계를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할 것이다. 「오토포이에시스」는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주체는 AI 소설 기계이지만. 그 이름이 ‘백지’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그는 날마다 수많은 한 문장을 쓰고 버렸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였다. 꿈은 이 세계 바깥의 현실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거나 모든 것을 기억하라. 미로에서 빠져나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솟아오르는 것이다. 모든 것을 관조하라. 우아함은 정열의 독이다. 이 같은 문장들 사이사이에는 아무런 서사적 인과관계가 없었으나, 한 문장 한 문장은 저마다 자꾸만 무언가 의미를 담아내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백지가 그토록 버리려고 했던 의미를.   ―「오토포이에시스」


  미래를 상상하는 건 무궁무진하지만 어느 상상력이든 현실과 유리되지 않은 삶의 연장선이다. 새로운 세계에도 그 세계를 지칭하는 신화와 말은 존재한다. 그곳에서 또한 나는 규정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이야기의 주제를 압축하는, 나아가 그 모든 이야기와 무관한 궁극의 문장”. 본질적인 나를 규정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규정된, 원치 않는 신화를 깰 언어가 문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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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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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Mother가 아니다


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문학동네, 2020.


  인도인은 갠지스 강을 ‘Mother Ganga’라 부른다. 이 강물을 마시고 강물에 기도하고 몸을 씻는다. 생명의 원천, 번영과 구원의 강가가 모든 잘못을 씻어 주어 영혼을 맑게 해주기를 기원한다. 강가는 살아있는 자들만이 아니라 죽은 이들에게도 신성한 곳이어서 기꺼이 죽은 이들의 묘지가 된다. 갠지스 강에 대한 의식은 오래도록 인도의 상징처럼 알려졌다. 이건 잘못되었다. 이 책을 읽으며 그것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인도에 간다 해도 갠지스 강에 손 담그는 일은 없을 거라 확신한다. 인도에 대한 나의 이해도 여기서 더 나가지 못하리라 인정해야 한다. 인도를 이해하기가 버거워 책을 읽는 내내 덜컥거렸다.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 위에서 종교도 관습도 사회를 지배하는 그 모든 체제를 이해하는 건 위태롭다. 그럼에도 더 이상 넘어갈 수 없는 선, 그 선에서 빙빙 돌며 피상적으로 인도를 생각하게 된다. 종교적으로 갈등을 빚으며 파키스탄과 카슈미르로 나뉘어 전쟁을 벌이는 나라. 신이란 무엇인가, 생각을 거듭해도 영원한 난제이며 신의 이름으로 벌이는 학살과 전쟁은 신의 뜻인지 인간의 뜻인지 늘 헷갈린다. 빙고 게임을 하듯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음이 쓰이는 것을 하나하나 쓰고 지워나간다. 무수한 사람들의 이름이 지워진다. 이해하지 못할 인도가 남는다. 반복하여 책을 읽어갈수록 인도는 지워지고 잔나트가 Mother가 잊힐 수 없는 존재들의 이름이 가슴에 꽉 들어찬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인도는 그 체제 그대로 늘 강건할 것이다. 그 불변의 틀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상처를 다독이며 살아간다. 이 책은 그 사람들의 이야기다.

  Mother Ganga는 인도의 힌두교인이 부르는 말이라는 것이 더 적확하다. 그렇게 보면 상처입은 이들이 강이 아니라 잔나트로 모여들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무슬림과 힌두교인의 끝없는 싸움은 인도를 파키스탄과 카슈미르로 분리하여 여전히 지속되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힌두교의 계급, 종교, 성, 인종을 구분짓고 나누어 차별하는 인도에선 그 세세한 구별이 폭력의 당위성을 가진 듯 하위 계층을 향한 폭력이 끊이지 않는다. 잔혹한 학살이 무슬림과 힌두교인 사이에서 인도와 파키스탄, 카슈미르에서 끝없이 발발한다. 이러한 인도에서 개인은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기보다는 특정 집단에 속하는 계층으로서 명명되기를 강요받는다.

  그리하여 태어나자마자 구별되는 성(性). 그 이분법적 성에 속하지 않은 제3의 성, 히즈라라가 차별과 소외를 경험하며 규정 밖으로 떨쳐진다. 남성과 여성 생식기 모두를 갖고 태어난 안줌 역시 히즈라다. 안줌은 아들로 키우고자 하는 부모의 뜻에 따라 남자로 키워진다. 당연하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고 학대와 폭력 속에 살아간다. 딸이 되든 부인이 되든 여성이라는 존재는 남성의 종속적인 노예, 부속물이기에 그 자체로 권력인 남성의 삶을 원할 것이다. 소설 속에선 차지하는 가장 빈번한 폭력의 희생자는 여성이다. 그러나 안줌은 여성의 정체성을 선택하고 히즈라가 살고 있는 공동체 콰브가에서 삶을 시작한다.  


   “신이 왜 히즈라를 만들었는지 알아?”

“일종의 실험이었어. 신은 행복할 수 없는 생물체를 만들어보기로 결심한 거야. 그래서 우리를 만들었지.”


  신의 실험대상은 안줌만이 아닌 듯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없는 이유들을 안고서 소설 속을 누빈다. 행복하지 못한 이유들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큰 범주로 모은다면 결국  계층 때문이 아닌가. 나뉘고 나뉘어 가난하고 차별당하며 병든 이들에게 신만이 아니라 국가도 따스하게 품어주지 않는다. 국가 인도는 그들에게 어머니가 되어 주지 못한다. 반면에 여성으로서의 본능적 정체성인지 안줌은 엄마 되기를 꿈꾼다. 마침내 버려진 채 울고 있는 여자아이를 데려와 사랑으로 키우던 안줌은 몸이 아픈 아이의 건강을 빌기 위해 구자라트 지역의 사원으로 갔다가 이슬람교도를 향한 힌두교인들의 폭동에 휘말린다. 2002년 인도 구자라트에서 벌어진 이 폭동에서 안줌과 동행한 자키르 미안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다. 자키르 미안의 시신 위에 죽은 척 누워 있던 안줌은 발각되지만 살아남아 외쳐야 했다. “어머니 인도에게 승리를! 어머니에게 경의를!”

  학살자-힌두교인-들이 안줌을 살려준 건 히즈라를 죽이면 불운이 따른다는 미신때문이었다. 학살자들의 행운이 되어 살아남은 안줌은 고통과 굴욕을 잊지 못하고 마을의 낡고 피폐한, 안줌의 가족이 묻힌 공동묘지로 간다. 그곳에서 허름한 집을 짓고 살아가던 안줌은 점점 거주지를 넓혀 잔나트라는 이름의 게스트하우스를 만든다. 파라다이스라는 뜻의 잔나트엔 가난하고 갈 곳 없는 이들과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시신들의 장례식장이 된다. 산 자와 죽은 자의 몸과 영혼이 함께 하는 곳. 마치 Mother Ganga처럼.

  소설 속에서 지복의 성자는 안줌의 어머니가 안줌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빈 페르시아 출신의 성인인 하즈라트 사르마드를 가리킨다. 그는 일생의 사랑을 찾아 인도로 와선 유대교를 버리고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가 힌두교인 소년과 사랑에 빠졌고 알라신만이 유일신이라는 고백문을 외라는 황제의 명을 거부하고 처형당하는 순간에도 사랑의 시를 외웠다. 그래서 “지복(至福)의 성자이자, 위로받지 못한 자들의 성인이며, 정확히 규정될 수 없는 자들, 신자들 속의 신성모독자, 신성모독자들 속 신자”가 되었다. 하즈라트 사르마드는 종교에 대해 참으로 유연하다. 하지만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묵직하다. 가볍고 쉬운 마음으로 종교를 넘나든 것이 아님은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는 것에서 드러난다. 그가 보여준 종교에 대한 포용성은 하나의 종교만을 강제하며 학살과 분쟁을 일으키는 인도가 ‘보아야 할’ 존재다.  


“우리에게 가장 힘든 일이 뭔지 알아? 가장 싸우기 힘든 상대가? 연민이야. 우린 자기 연민에 빠지기가 너무 쉽지…… 우리의 사람들에게 그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으니까……집집마다 끔찍한 일을 당했어…… 하지만 자기 연민은 너무도…… 너무도 심신을 쇠약하게 만들어. 너무 굴욕적이고. 이제 싸움은 아자디보다도 존엄을 위한 거야. 우리가 우리의 존엄성을 지키는 길은 맞서 싸우는 것뿐이야. 설명 패배한다고 해도. 설령 죽는다고 해도.


  잔나트에서 안줌은 행복할 수 없는 생물체의 표본이 아니라 행복을 주는 여신처럼 버티고 있다. 잔나트는 우울하고 음울한 분위기가 아니다.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생물체들의 실패 사례를 모아 놓은 듯 기묘하게도 따스하고 정감어린 기운들이 넘쳐흐른다. 한 개인의 삶의 역사를 따지고 들어가면 슬픔과 절망과 분노가 폭발할 사연들이 넘쳐나지만 그들은 앞으로의 삶을 희망과 행복에 더 두기로 한 듯 의연하다.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 남은 것이 희망이라는 것이 과연 긍정인 걸까 생각해 보지만 그들이 펼쳐가는 행복의 미소에 비소를 날리고 싶진 않다. 애잔함이 아직 마음 깊은 곳에 가득하지만 희망은 정녕 선물이 맞다고 응원해주고픈 마음이 든다.

  아룬다티 로이는 이 책 속에서 답없는 인도의 답답함을 보여주지만 결국 희망은 ‘사람’임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인간에겐 희망이 있어야 한다. 잔나트의 사람들이 신이 아니라 안줌에게서 위안을 얻으며 서로 믿고 의지하며 함께 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인도라는 체제가 사람들을 비극속으로 몰아붙이지만 그 체제에 잽을 날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아질수록 사람을 사람으로서 연민하고 존중하고 포용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경계들이 조금이라도 허물어지지 않을까. 다양한 상징을 갖는 수많은 성자들이 탄생할수록 계층 밖의 사람들이 꿈꾸는 희망의 크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여전히 비극은 진행형이지만 잔나트가 지니는 가치 속에서 성장할 미스 우다야 제빈 2세의 등장처럼 새로운 세대가 내일을 기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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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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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순교자, 김은국, 문학동네, 2010.


 

  “그런데 그 신목사를 당신이 경멸할 수가 있겠소? 그리고 나를?”

  “당신은 분명 우릴 경멸하고 있어. 그렇지 않소?”

  “왜 그래? 자넨 나까지도 경멸하고 있나?”

  “내가 경멸하는 건 자네들의 그 행동이야!”


  소설에선 거듭 ‘경멸’이란 단어가 나온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통해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경멸’이다. 사전상 말뜻을 머리로 ‘이해한다’, ‘알겠다’가 아니라 마음으로 ‘알겠다’. 앞으로 경멸이란 단어가 어떤 상황과 감정에서 사용할지를 체감했다. 1950년도 6·25전쟁 당시의 현실을 바탕으로 관념적인 이야기를 잘 펼쳐내고 있다. 관념이란 으레 머릿속으로 맴돌기 마련이다. 알듯 하면서도 아리송하다. 명쾌함을 같기 까지는 더 많은 생각과 시간이 필요하다. 읽는 순간엔 가슴이 벅차지만 소설을 바탕으로 한 물음이 명쾌하게 완료되었다고 보기엔 어렵다. 그렇게 한곳에 밀쳐두었던 생각들이 요즈음의 상황에서 되살아난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신천지교인들의 코로나 증가 상황과 그들의 대응방식을 통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쾌해 지려나 보다.   


목사님의 신이건 그 어떤 신이건 세상의 모든 신들은 대체 우리에게 무슨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당신의 신은 우리의 고난을 이해하지도 않을뿐더러 인간의 비참, 살육, 굶주린 백성들, 그 많은 전쟁, 그리고 그 밖의 끔찍한 일들과는 애당초 아무 상관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


  6·25전쟁 당시 평양에서 공산군 비밀경찰에 체포된 열 네명의 목사 중 열 두 명이 총살당한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육군본부 소속 이대위가 파견된다. 이들의 총살 이유가 무엇인지 이대위는 생존자 신목사에게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려 하지만 신목사는 침묵한다. 이대위는 사건의 진실을 알고자 하고 장대령은 진실과는 상관없이 사망한 목사들을 순교자로 규정한다. 이 사건을 훌륭한 선전 자료로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아주 중대한 종교탄압의 경우”로 이용하기 위함이다.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이 미스터리처럼 펼쳐지며 흥미를 자아내고 ‘진실’에 대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태도가 큰 줄기이다. 종교나 믿음, 신앙과 신이란 무엇인가는 지속될 질문이라면 그에 답하는 과정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성립되고 변화되고 완성되어 갈 것이다.


목사님의 신 ― 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예상가능하다. 그 고난을 신이 주셨고 고난 동안 함께 하실 거다…이에 대해 신에게 감사함을 표시하는 이들이 각각의 ‘신’을 믿는 자가 될 것이고 “뭔 소리래”라고 하는 이들은 신을 믿지 않는 자가 될 것이다.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이 고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방법일까, 고난을 주는 방법일까. 고통스런 상황을 극복하고 견디어 낼 수 있기 위해 무언가에 의지하려는 인간에게 신의 필요성을 말하지만 ‘신’을 믿는 방식에도 이해관계가 있다는 것을 ‘신’의 존재를 설파하려는 신도들에 의해 알게 된다.


기독교인이나 목사도 인간이란 점을 잊지 마시오. 그들을 잴 때는 다른 인간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척도와 저울대 위에 올려놓고 그 감정과 허약함을 재어야 하지 않겠소? 나는 나 자신은 물론 다른 어떤 성직자도 육체적 정신적 고문에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종교인에 대해 남다를 것을 기대하는 심리. 기대가 무너지고 나면 인간 자체가 아니라 그 종교 자체에 대해 거부감을 갖게 되는 것 말이다. 신이, 교리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종교적 신념이 있을 필요가…. 목사든 신의 대변자라 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이 해석한 대로 말하는 신의 말씀, 그 교리는 신도들의 행동을 통해 전파될 수밖에 없다.  


나 자신의 믿음도 그를 통해서 큰 힘을 얻었소. 그의 행동과 신앙의 말들―그렇소. 그 사람의 그 견줄 데 없는 신앙의 말들을 통해서 큰 힘을 얻은 거요. 나는 그 사람 덕분에 내 믿음의 현 상태를 검토하고 하나님에 대한 나의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료 교인들과의 관계를 다시 검토해볼 수 있었소.


  그렇기에 어떻게든 종교인들은 자세는 달라야 한다. 그토록 부르짖고 진실을 밝히려 자, 숨기려는 자, 왜곡하는 자, 신의 존재를 각자의 이익으로 해석하려는 이들 중 결국 승자는 누가 될까. 마을 사람들은 열두명의 목사를 순교자로 받들며 그들의 희생과 영웅적 행동에 감사한다. 그렇기에 그 사건에서 살아남은 신목사에 대한 비난은 당연한 양상이다. 진실은 그렇지 아니하다, 그런 냄새를 풍기면서도 솔직하게 사건의 진상을 이야기하지 않는 신목사와 이대위와의 언쟁, 현장에 있었던 제3의 인물의 시각에서 보는 사건의 진실 등이 켜켜이 쌓여 신과 믿음, 삶과 죽음의 문제, 거짓과 진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안 난 화자 이대위의 말과 사고에 의지했다. 나의 감정이 냉정하라고 요구하면서도 거침없는 분노와 경멸이 차올랐으니.


이봐, 난 자네도 그 누구도 경멸하지 않아! 내가 경멸하는 건 자네들의 그 행동이야! 그들이 원하는 것, 그들이 필요로 하는 걸 주었다고? 하지만 왜 그 사람들을 속여야 하나? 이미 수없이 속고 속아온 사람들을 무엇 때문에 또 속이는 거야? 그들의 비참한 생애 어쩌자고 거짓말까지 보태는 거냔 말야? 그들이 원하는 걸 주었다고? 그래 그들이 원하는 것이 거짓말 한 보따리란 걸 자네가 어떻게 알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정말 그런 것인지 자넨 자신 있어? 그들에게 필요한 건 진실이야.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이야말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고, 자네들은 그걸 줘야 하는 거야. 이 모두가 그들을 위한 것이고 그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아니지! 자네들이 그러는 건 선전을 위해서, 교회를 익명에서 구해내기 위해서야. 만사 괜찮아질 것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그들을 잘 보살펴주시고 국가는 그들의 운명을 진지하게 걱정해주고 있고 그러니 만사 괜찮아질 것이다―사람들이 이렇게 믿게 하기 위해서지. 그것도 그들의 이름으로 말일세. 난 지쳤어. 이 모든 가식, 이 모든 고상한 거짓말,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을 위해 저질러지는 이 모든 것이 이젠 역겨워 견딜 수 없어.


  며칠 사이 하루하루 기사를 보는 내 심정이 그렇다. 걱정과 분노를 넘어서 쌓여 있다 폭발하게 되는 경멸. 개별적인 교리의 내용이 다르더라도 종교 그것이 가진 궁극적인 목적, 보편성은 있으리라는 내 당연한 믿음은 무너진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신’의 존재함을 증명받고 공동체의 존립을 유지하는 원대한 뜻을 펼치는 기회일지 모르나 나는 신의 존재를 말하는 그들의 행동으로 다시 한번 신의 존재를 의심할 뿐이다. 신, 그들만의 신. ‘내’게만 존재하는 신. 그들 식의 ‘순교’가 아니, 순교라는 단어 자체가 내게 상당한 모욕감을 준다. 순교라니, 신이라니. 무엇이, 무엇을 위해? 아니, 마귀라니?

  소설은 인간 행동의 이기를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1950년 전쟁의 참혹함 상황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지금 인간의 이기를 발현할 특수한 상황인 건가. 모두 신목사 같은 존재들만 있는 건가.

  작가는 ‘노벨문학상 후보’였던 김은국 작가다. 세계 최고의 문학상이라 일컫는 노벨상 후보이자 커피 광고에 나온 작가로 기억된다. 번역서임을 보며 미국으로 건너간 작가가 미국인이기도 하다는, 아니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살아계셨다면 더 많은 작품을 쓰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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