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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119104입니다



     


•빅토르 E.프랑클 저, 박현용 옮김,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 책세상, 2012.

•안나 S. 레드샌드, 황의방 옮김, 빅터 프랑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찾다, 두레, 2008.



■ 그의 생에서 ‘강제수용소’는 어떤 의미였을까


  ‘죽음의 수용소에서’라고 번역된 책을 읽으며 이의 저자에 대해서 의사라는 이에게 가지게 되는 일반적이고 고정적인 이미지를 생각했다. 일견 건조해 보이고, 합리적이며, 다른 것에 관심두지 않는 모범생의 이미지. 폭발적이고 격정적인 감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냉철한 이성주의자. 투철한 직업관을 가진 성실한 의사.

  하지만 그 자신이 90세에 써내려간 회고록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와 안나 S. 레드샌드가 쓴 『빅터 프랑클』을 보면서 ‘의사 빅터 프랑클’이 아니라 한 사람의 빅터 프랑클을 만났다. 그러니까 그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원제가 ‘삶의 의미를 찾아서’인 만큼 빅터 프랑클의 인생을 좀더 생생하게 담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빅터 프랑클은 고작 3년 수용소에서 살았을 뿐이다(이렇게 말하는 것을 이해하고 용서해 주시길! 그 기간이 결코 짧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고통이 짧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92년의 생애에서 3년이란 기간은 지극히 한 부분이란 것이다. 물론 그의 생에 전반에 걸쳐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며 로고테라피 이론을 창시하게 된 것은 수용소 체험이 절대적이며 그의 삶을 지배하는 부분이지만, 거기서는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빅터 프랑클의 모습을 너무나 잘 보여주었을지언정, 인간 빅터 프랑클을 얘기하기에는 많이도 부족하다.

  그래서 92년의 생애에서 아우슈비츠에서의 3년은 매우 작게 느껴졌고, 수용소의 삶 또한 그가 선택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니까 그 수용소는 히틀러에 의해 자행된 학살의 장소가 아니라 빅터 프랑클이 그의 로고테라피 이론을 정립시키기 위해 그가 선택한 일종의 정신병원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것은 무리이고 과장임을 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강조되는 ‘의미찾기’에 대한 그의 주장은 수용소의 삶과 경험이 그에게 의미를 준 게 아니라 그의 의미찾기의 일환으로 수용소의 삶이 주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어쩌면 그가 수용소를 선택한 것은 맞는 말이다. 많은 이들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기 이전부터 그는 미국 이민 비자를 신청했고 1941년 수락 통보를 받았다. 많은 유대인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시점에서 나이 많은 유대인이 먼저 끌려갔으므로 그는 자신의 부모 역시 끌려 가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을 보호해줄 사람 역시 자신뿐이라는 것을, 로스차일드 병원의 신경과장이라는 직책이 그의 부모를 보호하고 돌봐줄 수 있으리란 생각을 했다. 그는 떠날 것이냐 남을 것이냐의 고민 끝에 성당에서 기도하였으나 아무런 응답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날, 그의 식탁 위에는 대리석 조각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의 아버지에 의하면 그것은 유대인 교회에서 나온 조각으로 히브리 문자 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의 하느님 야훼가 준 땅에서 오래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빅터 프랑클은 남았다. 그리고 다음 해, 수용소로 끌려갔다.


■ 프로이트와 마주하다


  프로이트는 어린 시절의 부모로부터의 양육경험이 개인의 성격을 결정짓는다는 생각을 가진다. 이 프로이트의 사고로 접근한다면 프랑클은 부모로부터 어떠한 양육을 받았기에 그의 성격을 형성하게 되었을까.

 1905년 오스트리아 빈,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랍비 집안이었고 부모 모두 유대교 교리를 엄격히 지켰다. 아버지는 의사를 꿈꾸었으나 돈 때문에 중퇴하여 공무원이 되었다. 어머니가 감성적이고 선하고 자애로운 성격을 가졌다면 아버지는 스파르타적인 인생관과 그 반대의 성격을 지닌 원칙주의자였다. 훗날 그가 심리테스트를 받은 결과 극단적인 합리주의에서 예민한 감정주의에 이르는 폭넓은 기진을 가진 사람으로 나타났는데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영향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세 살 때부터 의사가 되기를 소원했던 프랑클은 철학과 심리학 서적을 읽고 프로이트를 만나면서 정신과 의사로 진로를 정하게 된다. 그리고 학창 시절, 당대 명성이 자자했던 프로이트에게 서신과 논문을 보냈다. 프로이트는 즉각 답장을 해 주었고 그의 논문을 정신분석학회지에 발표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17세에 쓴 그의 논문, 「긍정과 부정에 대한 연구」가  19세이던 1924년 전문적인 국제 학술잡지에 발표되었다. 그리고 의대생 시절 우연히 그는 프로이트를 만나게 된다. 그때 프로이트는 프랑클의 집 주소를 그대로 외쳤다 한다. 그들의 서신 왕래를 기억하는것이다. 다만, 이때는 프랑클이 아들러의 지도를 받을 때였다. 프랑클은 정신분석에 대해 차츰 비판적이 되었고 정신분석의 몇 가지 부분들-무의식에 존재하는 성적, 공격적 충동이 인간 행동을 결정한다-에 의문을 품고 다르게 접근하는 아들러 정신분석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이다.


■ 아들러에게서 배우다  


  체르닌가세 6번지에서 태어난 프랑클의 집 맞은편에 개인심리학(사회심리학)자의 창시자인 아들러가 살았었다 한다. 그와 아들러의 운명은 이렇게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들러의 이론을 주창하는 이들은 아들러 학파로 불리며 그들의 이론-사회적으로 우월해지려는 욕구가 인간의 행동을 결정짓는 힘-을 발전시켰다. 1925년 아들러 학파의 정식 회원이 되어 논문을 발표하거나 기조연설을 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러나 곧 이 이론에 대한 의문점으로 일부분을 비판하였기에 이들 개인심리학협회로부터 쫓겨났다. 그리고 그 후 아들러는 다시는 빅터와 얘기하려 하지 않았고 빅터의 노력에도 모른 체 했다. 그러나 빅터는 늘 프로이트와 아들러는 그의 이론을 정립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얘기한다. 무엇보다 제일 큰 영향은 프로이트였으며 그리고 아들러였다.


■ LOGOS


 “존재와 인생이 나에게는 하나의 꿈이 되었네“


  열 다섯 살 무렵 쓴 그의 시의 한 구절이다. 그에게 의미란 중요한 것이었다. 네 살 땐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치자 잠들기 직전 놀라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삶의 허무함이 인생의 의미를 파괴하지 않을까에 대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어린 나이에서부터 ‘삶의 의미’와 관련한 질문에 매료되었던 그는 의과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 로고테라피 원고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아들러의 사회심리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의 일부분에 동의하지 않고 진정한 자아, 의미있는 삶을 찾고자 하는 욕구에 대한 관심이 깊었던 그이기에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도록 도움으로써 정서적 고통을 치료하는 그의 이론, ‘로고테라피’를 발전시켜 가고 있었다. 그리고 24세 무렵에는 이미 로고테라피를 위한 세 가지 주요한 방법까지 생각할 정도로 그의 이론은 이르게 정립되고 있었다. 이러한 자기 생각을 실제로 이용하는 방법을 궁리하며 빅터는 청소년 상담센터를 세워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성직자들이 봉사하도록 했다. 당시 청소년 자살율은 매우 높았으나 센터 설립 2년째 빈에서 학생 자살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가 뒷날 회상하듯 우연히 광장공포증을 가진 게슈타포와의 대화 도중 자신의 로고테라피 이론 중 역설적 의도를 사용하였던 것이 유효하여 그의 수용소로의 강제 징집이 1년간 유예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수용소에서 그는 자신의 로고테라피 이론을 적용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이는 수감자뿐만 아니라 카포, 당원들에게도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수용소에서 견딜 수 있었던 삶의 의미는, 그가 잃어버린 「의료 성직자」를 다시 쓰려는 의지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는 실제 마흔 살 생일에 그의 동료가 준 몽당연필과 두 어 장의 작은 친위대 서식 용지에다 원고를 다시 써 내려 갔다. 청소년 시절엔 단편소설을 쓰고 싶다는 꿈을 꾸었는데 사라진 노트를 열병에 걸린 사람마냥 찾아다니는 주인공에 관한 내용이었다는데 마치 수용소에서 잃어버린 원고로 상심하다 다시 작은 종이 조각에 그것을 쓰고 있는 빅터의 모습이 그려진다.

  정신과 의사가 된 후에는 빈 정신병원의 여성 자살미수자 병동을 책임졌으며, 1942년 체코의 테레친 수용소에 수감될 때까지 의사로서의 책무를 다하며 수많은 환자들이 나치의 안락사 계획에 희생되는 것을 막고 그 자신의 이론으로 수용소에서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불러 일으키도록 도왔던 그, 그는 진정 학자였으며 또한 확고한 신념을 밀고 나가는 사람이었다.


■ 그의 이름은 119104입니다


  빅터는 서른 다섯 살에 로스차일드 병원의 간호사인 틸리 그로서를 만났고 결혼을 원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결혼을 허가하는 관공서는 따로 설치되어 있었고 아이를 낳을 수도 없었다. 임신이 확인되면 강제수용소로 호송되었던 것이다. 전쟁 중 빈에서 결혼을 허가받은 마지막 사람이 되는 그나마의 행운은 있었지만, 틸리는 태중에 있던 아이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의 저서 <의미를 향한 소리없는 절규>는 그 아이에게 헌정한 책이었다.

 이렇게 수용소 아닌 곳에서도 그 어떤 자유도 누리지 못하던 유대인 빅터의 가족은 1942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 갔다. 그러나 가족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그의 아버지는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에서, 어머니는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뒤 가스실에서, 형은 아우슈비츠 부속 수용소로 이송된 뒤 광산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아내 틸리는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죽었다. 그의 아내는 스물 다섯이었고 그와 결혼한지 일년도 되지 않았던 때였다. 그리고 그는 수용소에서 석방되고 난 몇 개월이 지난 1945년 가을에서야 그의 아내 틸리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가족을 다시 만나리라, 자신보다 15살이나 어린 아내가 살아남았으리라는 희망이 무너져 버린 경험으로 많은 이들이 자살을 하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가 되었다.

  실제 수용소에서 빅터는 의사도 아니었고 그저 유대인으로서 119104였다. 노예노동을 하며 그의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죽음에의 공포 속에서 생활하면서 그에게 힘이 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생각이라고 깨달았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가지고 있던 이들이 살아 남으며 시련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면 그 시련을 견디어 냄을 알았다. 그는 수용소에서도 사람들과 대화를 하게 되면 그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잃어버린 자신의 원고를 쓰는 작업이 또한 그의 생명을 부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 당신의 삶은 긍정이었습니까?


  프랑클의 책 제목 중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yes라고 말하라”가 있다. 그는 그의 삶에서 늘 긍정적이었다. 그것은 그의 의지의 산물이기도 했을 것이고, 그의 천성이기도 했다. 그의 삶에서 항상 의미를 찾으려고 했던 그는 가족 모두가 수용소에서 사망한 것을 알게 된 그 때에도, 그 시련 속에서도 그에게 주어진 의미를 찾으려 했다. 스스로도 밝혔듯이 그는 천성 자체가 삶을 즐기는 편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누군가가 좋은 행동을 하면 잊지 않지만, 나쁜 행동을 하면 담아두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마음이 상하거나 괴로운 일을 대부분 잘 이겨낸다고. 사소한 괴로움에는 화를 냈지만 큰 문제들에는 불평하지 않았다고 한다. 85세 어느 날인가 눈이 멀었음을 알았을 때에도 불평하지 않았다 한다. 그는 단지 이렇게 말했다 한다. “엘리, 나 장님이 됐어.”

 그는 92세까지 살았고, 90세에 그의 회고록을 썼다. 그렇다면 그는 실명을 한 채로 글을 썼다는 것이 된다. 그 때에 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좋아하는 암벽 등반이었을 뿐이다. 27개의 명예박사 학위보다 알프스 암벽 두 곳을 최초로 오른 뒤 ‘프랑클의 비탈길’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을 더 좋아한 그였다. 67세에 첫 비행을 했고 이듬해 솔로 비행을 감행한 그였다. 삶의 많은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렇듯 열정적이었다. 단지 공부와 책만 아는 조용하고 학자적인 기질만이 넘쳐나는 사람은 아니었던 듯하다. 또한, 빅터 스스로도 유머러스하다고 하며 강연에서나 대화에서나 언제든 유머와 재치를 활용한다고 한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아 넥타이에도 관심이 많고 안경테 전문업체가 시리즈를 출시하기 전 초안을 보여줄 정도로 안경테 디자인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작곡도 좀 할줄 안단다. 그가 작곡한 비가는 공식 오케스트라 연주로 공연되기도 했고 탱고 음악은 텔레비전에서도 사용되었다고 하고, 드라마도 좀 썼고 연기도 한 적 있고....이렇게 그는 다방면에 관심과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문득, 이러한 관심들이 그가 수용소에서 겪었던 일들, 수용소에서 가족을 잃었던 그 기억들로 인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적으로 그의 천성이 그러할 수도 있지만, 깊은 고통의 기억 속에서 다양한 분야에 눈을 돌리며 관심을 흩뜨리는 이들의 모습이 생각나서다.

  수용소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지만 그의 아픈 기억들을 조금씩 치료해줄 새로운 여성이 나타난다. 그렇기에 그의 삶은 또한 긍정이었다. 수용소에서 홀로 살아남아 그 경험에 관한 책을 쓰던 1946년 2월, 그는 빈 폴리클리닉 병원에 신경과 과장으로 취임했다. 수용소의 경험과 가족을 잃은 슬픔은 그에게도 우울증을 주었고 또한 그 자신의 성급한 기질로 언성을 높이는 일이 더러 있었다 한다. 그로 인해 사람들이 그에게 부탁하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했는데 그 때, 그의 아내가 된 엘레오노레 슈빈트를 만났다. 그녀의 나이 20세였고 그 병원의 간호사였다. 그는 그녀에게 첫 눈에 반했고 빅터에게 그녀는 수용소의 경험, 인생의 목표 등을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였다. 틸리의 공식적인 사망진단서가 없어 그들은 결혼하지 못하다가 1947년 7월 16일 공식적인 사망 통보를 받고 7월 18일 간단히 결혼식을 올렸다. 빅터는 유대인이었고 엘리는 가톨릭 신자였기에 아무도 이 결혼을 주재할 수 없었다 한다. 어찌 보면 수용소에서 나오고, 그들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고, 엘리를 만나고 결혼하기까지의 기간이 너무 빠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슬픔과 고통을 경험하고 그것에 무뎌지기까지 말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정신의학과 교수이며 학자이니, 그 나름의 치료 방법을 찾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그가 슬픔에서 빨리 벗어나도록 엘리라는 의미가 주어진 것은 아닐까. 시련에서 사랑으로 그를 살아나게 한 의미인지도, 그 무수한 고통을 경험하고 슬픔과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그의 로고테라피를 전파시켜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라는 의미였을지도. 전쟁을 겪은 그들에게 보다 큰 의미이자 희망이 될 아기가 탄생했다. 빅터의 나이 마흔 두 살이었다. 그가 92세로 심장마비로 사망하기까지, 그는 엘리의 도움과 사랑 속에서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로고테라피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독려하며 그의 삶을 마쳤다. 손가락 하나 까딱으로 이뤄지는 선별 심사에서 어쩌면 가스실로 끌려 갈 뻔한 그 상황에서 스스로 움직여 가스실을 벗어난 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고 의지를, 책임감을 가지려던 그이다. 그러니, 그의 삶 곳곳에서 yes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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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YES! YES! YES!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 로고테라피 행동강령


  이 책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으며 삶의 의미를 추구한 프랑클 박사의 체험 수기다. 이 시대의 체험수기가 수용소에서 느낀 감정이나 생활들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과 그에 대한 생각들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프랑클 박사는 그가 창시한 정신분석방법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전개하고 있다.

  이 책의 한국 번역본의 제목이 수용소라는 곳에서의 경험을 부각시킨 <죽음의 수용소에서>이다. 그러나 저자가 지은 제목은 그의 로고테라피 이론과 연결되는 ‘삶의 의미를 찾아서’이다. 물론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어 여러 판이 나오면서 <인간의 의미 탐구>로 번역된 책도 있으나 모두 그의 이론을 부각시킨 ‘의미’를 제목으로 하고 있다.

  독립적이었을 각 장들은 서문을 쓴 고든 알포트에 의해 첨가되었다. 제1부는 프랑클의 대표적인 저서로 그의 수용소 체험을 토대로 한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 2부는 그가 창시한 로고테라피에 대한 개념과 이를 설명하는 내용, 3부는 비극 속에서의 낙관으로 로고테라피 세계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

  프랑클은 1부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그가 겪은 시간의 순서로 엮으면서 그 때의 체험들을 그가 주창하는 로고테라피의 이론을 정립하는 형태로 이끌며 기술하고 있다. 2부의 로고테라피 개념은 그 제목이 개념이듯이 그의 이론에서 제기하는 개념들을 설명해 나가고 있다.  각각 내용을 이어가는데 간략한 표제어를 두고 있다. 이 표제어만으로도 전체적인 내용이 이어질 정도로 매우 상세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만큼 내용의 명확성을 더하도록 서술하고 있다.


인간의 삶에서 의미를 빼앗아가는 것은 고통만이 아니다. 죽음도 그렇다. 하지만 나는 인생에서 정말로 무상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잠재 가능성이라는 말을 입이 닳도록 해왔다. 가능성은 그것이 실현되는 순간 바로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과거로 옮겨간다. 이렇게 과거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일회성을 탈피해 영원한 실체로 보존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속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그 속에서는 모든 것이 고정된 상태로 보존된다. p197


  읽어가면서 ‘삶의 의미’라는 단어는 확실히 각인되었다. 그것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었고 화두이니 말이다. 그러나 내가 감동적으로 느끼는 것은 그의 생각인지 그의 경험인지가 대두된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그의 체험의 사례들에서 이어가는 그의 사고는 분명 감동적이고 존경스럽다. 끊임없이 삶에의 의미를 찾으려 하고 의지를 찾으려는 일관된 그의 삶의 태도는 존경스럽다. 그리하여 운명에 대한 얘기, 수용소에서 타인의 삶들을 관찰하며 조심스럽게 그들에게서 자신의 이론들을 찾아내는 서술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의 사례와 이론을 적용함에 적절히 자리한 니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말들도 그의 글들을 이해하고 감동을 더하는데 크게 자리한다. 또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은 ‘테헤란의 죽음’이란 부분이다. 이것이 그의 삶에서도 분명 적용되는 기분이다. 이러한 운명론적인 얘기를 보며 수용소에서 맞닥뜨린 그 많은 그의 운명들과 비교해 보며 다시 한번 인간의 운명과 의미에 대해 숙연하게 고뇌하게끔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yes라고 말하라”는 인생관은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놀랍다. 그의 삶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그럼에도를 가지고 있으니까.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열등의식에 시달렸다. 그것은 복합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과거에 ‘대단한 사람’이었거나 혹은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하찮은 존재로 취급되고 있다. 일반적인 수감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계층이 하락했다는 것을 느꼈다. p115~116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앞에서 우리는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수감자들이 공포로 가득 찬 현재를 덜 사실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과거를 회상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러나 실제 존재하는 현실에서 현재를 박탈하는 행위에는 어떤 일정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사실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린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p129~130


  그는 왜 이 책을 썼을까? 그가 경험한 수용소에서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니면 로고테라피 이론이 무엇인가를 알리기 위해서?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신분석의 내용을 전개한다는 특징 외에 이 책은 작은 의미의 단락으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니까 대분류, 중분류, 소분류의 체계적인 분류로 내용을 전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용의 연결이 지극히 부자연스럽거나 하지는 않다. 오히려 작은 표제어 속에서 그 내용과 의미를 명확히 한다는 장점을 가진다. 반면 이것이 단점으로도 작용한다. 큰 체계를 두고 관련 내용들을 하위의 항목으로 두고 내용들을 정리하는 전개방식이 아니므로 전체적인 틀로서의 체계나 의미를 찾아내는 데는 조금 더딜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나무를 보느라 숲이 무엇인지를 찾는데 약간은 방해로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그의 저술 방식으로 인한 특성이 이렇게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세 명의 여성 속기사들에게 그의 구술을 받아쓰게 하여 원고를 작성했다. 자료 없이 오직 그 자신 안에 있는 것을 9일 동안의 구술로 정리한 것이다. 그의 체험으로 인해 생생한 묘사와 그의 생각들을 전하고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글로써 다듬어진 글의 느낌보다는 말로써 다음은 느낌이 강하다. 물론 그가 겪은 경험의 고통을 이토록 차분히 비교적 절제된 톤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놀랍긴 하지만 그의 수용소의 이야기, 경험들이 이론적인 연결로 인해 부족한 듯이 보인다. 나는 저자의 수용소의 체험 속에서 느끼는 생각의 전개가 더 보고 싶으니 말이다.

  일단 로고테라피에 대한 설명이 서문을 쓴 고든에 의해 요구된 것이라고 하니 이는 처음부터 같이 연결되어 묶을 의도가 있던 내용들은 아니었다. 2부가 첨부되고 이어서 3부가 첨부되어 이들 각각의 독립적인 내용들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졌을 뿐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각각 1부와 2부가 서로 간의 신빙성을 보완하고 있다고 기술했고 1부는 자전적인 이야기이며 2부는 경험에서의 교훈을 요약한 것이라 서술하고 있다.

  제2부의 로고테라피의 개념의 표제어와 그의 체험의 표제어들이 별반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실제 그 내용에서도 큰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반복된 내용이 연이어 3장이 중복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것이 저자의 수용소의 체험에 방점을 두었다면 수용소의 경험들이 조금 더 드러나는 것이 좋았을 듯하다. 그리고 로고테라피에 대한 개념과 이해에 방점이 있다면 그 개념에 대한 명쾌하고 체계적인 분류와 서술방식으로 내용이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 저자는 로고테라피 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요약정리하여 3부로 첨가시켰는데 이론적인 결론을 갱신하기 위해 덧붙인 것이라 하고 있다. 그것이 발표된 자료로서는 그 의미를 더하였겠으나 1부와 2부에 연이어 첨부되어서는 오히려 2부의 내용들을 더욱 깔끔하게 체계화하여 정리하는 것이 이론적인 명확성과 완결성을 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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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인간은 땅에서 유래하지만, 두 번째 인간인 내적 인간은 ‘하늘에서’,

즉 현실을 넘어서는 차원에서 유래한다.”

 - 융의 묘비에 씌어진 글(p209~211)-

 

 

카를 융 - 생애와 학문, 게르하르트 베어, 한미희 옮김, 까치,| 1998.

 

 

 ■ 기억할 수 있는 것

 

 심리학책뿐만 아니라 여타의 책에 부지기수로 등장하던 프로이트를 난 좋아하지 않았다. 강박적으로 그의 이론부터 시작되던 심리학의 많은 부분을 참아내야 했지만, 프로이트의 핵심적인 이론에 회의를 느꼈고 그의 이론과 더불어 사람 자체에 대해서 흥미가 당기지 않았다. 프로이트의 정신상태가 이상하다는 생각과 더불어 그의 이론도 ‘이상’하다, 집착적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융님이 나 홀로 탐탁치않게 여기던 프로이트에 대한 나의 생각을 고정화시켜 줘서 기쁘다(?).

 집단무의식과 원형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융을, 융의 입으로 만나면서 프로이트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융에게 더 이끌렸다. 그의 세계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부러웠던 것 중에 그가 살고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그가 그 집을 가지게 된 것도 결국 그의 세계 속의 움직임이니 결국 마찬가지다. 그는 호숫가 옆에 탑을 짓고, 또 짓고, 또 짓는다. 그의 복잡한 심정은 계속 확장된 집이 되어 간다. 그리고 그는 미로같고 문명의 기구들을 들이지 않은 그 탑에서 미로같고 문명이 들어차지 않는 자신의 내면 속으로 침잠해간다.

 

 1) 공간

 

  융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친구가 보덴호숫가에 성을 가지고 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때의 호숫가에서 놀던 시절을 생각하면 그 호소의 광활함을 즐거움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 호수 근처에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에 깊이 박혔다고 했다. 그 어린 날의 기억이, 그를 호숫가로 이끈 것일까.

  호숫가에 지은 그의 탑은 단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의 머리속에서 구상하고 그의 몸으로 만들어낸 이 탑은 그가 처음 탑을 짓고 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보완된다. 이 공간에서 그는 어떤 문명의 기구도 외면한 채 원시적 삶으로 살아간다. 그것이 그의 내적인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장소가 주는 신성함, 장소가 주는 안정감, 장소가 주는 창조성. 이 모든 것들을 만들어 간 융의 볼링앤 탑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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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의 볼리엔 탑 / 85세 생일에 모인 융의 가족들>

 

 2) 시간, 기억

 

  무수한 시간의 흐름 속에 자신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융이 놀랍고 부럽다. 과거의 사건들은 핵심적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내면의 생각들은 언제고 잊혀지게 마련이다. 관심두지 않는다면 존재했는지도 까마득하다. 그 모든 것들을 융은 살려내었다. 시간을 되돌려 놓았다, 그의 기억을 통해.

 그는 자신의 생애를 가리켜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그의 인생을 지배한 무의식은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용이었던 것이다. 융은 죽기 전 인터뷰에서 기자의 신을 믿느냐고 물음에 "나는 신을 압니다."라고 답했다. 무의식을 통해 그 자신도 충분히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융은 스위스 주간지 「벨트보헤」와의 한 인터뷰에서 자신과 자신의 활동을 다음처럼 평가했다.

 

 “나는 인간 및 시대의 질병을 다루고, 고통의 현실에 맞는 치료수단을 생각하는 의사입니다. 정신병리학적인 연구를 하며 나는 역사적인 상징과 형상들을 무덤의 먼지 속에 깨워 일으켰지요. 나는 환자들의 증상을 치료를 통해서 없애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상이라기보다 약간의 현명함과 자기관찰과 무의식적 경험에 대한 신중한 종교적 고찰입니다.”

 

3) 그림


  그가 그린 그림들을 보고 놀랐다.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었는가. 이렇게 조각품을 잘 만드는 사람이었는가. 그는 매우 손재주가 있다. 예술적인 감각이 있다. 그는 이것들을 모두 단순하게 작업했고 무의식의 일련에서 행한 것이라 하지만 보고 있는 나에게는 경탄까지 일으키게 했다. 그가 의사가 되지 않았다면 예술가 쪽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그와 이름이 같은 할아버지가 의사였다는 점이 그의 진로에 영향을 미쳤으니 분명 집안에 화가가 있었다면, 예술가가 있었다면 달랐을 지도 모른다. 또 한편으로는 그의 기질이 예술가적 기질보다는 학자풍이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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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이 그린 그림, 1917년  좌, 필레몬을 비롯한 여러 인물과 지구 /우,  칼을 든 기사>


 융의 다양한 연구 속에 동양철학과 종교에 대한 관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만다라를 그리기도 하고 만다라가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아갔다. 만다라는 그에게 날마다 새롭게 나타나는 '자기' 상태와 연관되는 암호와 같은 것이었다. 융은 그것이 어떤 핵심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꼈고, 그 기간에 '자기'에 관한 생생한 개념을 더욱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융은 만다라를 그리는 것이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실제 그는 만다라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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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그렸다는 융이 그린 최초의 만다라>

   

4) 관계

 

 융의 아버지는 개신교 개혁파 목사이며 박사학위를 가진 문헌학자이며 신학자였다. 어머니는 바젤의 유명한 목사 가문 프라이스베르크 출신이었고 이름이 같은 할아버지는 바젤 대학 교수이자 의사였다. 할아버지는 대학교수와 의사로서 많은 존경을 받았고 외할아버지 프라이스베르크 역시 그러하였다고 한다. 그가 말하듯 그의 뿌리는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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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은 오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의 나이는 수백만 년을 헤아린다. 개인의 의식은 땅 속에 있는 다년생 뿌리로부터 자라나 계절에 따라 개화하고 결실을 맺는 꽃과 열매에 불과하다. 뿌리의 존재를 함께 고려하는 사람은 진리와 보다 더 일치할 수 있다. 왜냐하면 뿌리는 모든 것의 모체이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인 융은 1875년 스위스에서 태어났고, 1902년 취리히 대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로서 취리히 대학 교수였던 정신의학자 오이겐 블로일러 밑에서 공부를 하다가 프로이트와 교류하였고 국제정신분석학회 회장까지 역임한다.

  하지만 무의식에 대한 견해 차이로 프로이트와 결별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심리학을 연구하면서 자신의 활동영역을 구축해갔다. 특히 그는 집단무의식의 원형을 중점으로 연구하였고 문화사 및 종교사적 비교 작업을 함께 했다.

 그의 생애동안 융은 다양한 철학자들에게 매료되기도 했고 심리학과 정신의학 분야에 대한 연구를 위해 다양한 독서의 세계에 있기도 했다. 그가 의학을 선택한 것은 그의 조부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 에빙의 정신의학교과서를 처음 보고, 심리학 및 정신의학 분야가 자신의 적성에 가장 맞는 분야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대학을 마친 후 보조의사로서 부르크휠츨리 병원에서 일하면서 이 병원의 엄격한 규칙을 묵묵히 따라고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한 융의 노력은 병원장의 신임을 얻게 되고 파리 유학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이에 융은 1905년 취리히 대학 교수 자격을 취득했고, 부르크휠츨리 병원의 수석의사가 되었다. 의사로 일하면서 1913년까지 취리히 대학에서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처럼 공부만 하고, 책만 읽고, 비사교적이고 엄숙하였을 것만 같은 융은 대학시절 사교성이 뛰어났다고 한다. 학생단체 “초핑기아(Zofingia)"의 회원으로서 열정적인 춤꾼이기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아버지의 이른 죽음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한 상황이 그의 기질을 온전히 드러내기를 어렵게 한 듯하다. 그는 학비를 모으기 위해 계속 일을 해야 했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아내가 된 엠마에게도 의사 자격을 얻은 후에야 청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진 것 없는 그에게 엠마의 부모가 결혼을 허락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융은 취리히 대학 강사를 하던 무렵 자신의 이후 생애와 창작활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두 만남을 갖게 되는데 샤프하우젠 출신의 젊은 스위스 여성 엠마 라우셴바흐와 ‘스승’이자 한때 친구로 지내게 되는 비엔나의 지크문트 프로이트이다. 융은 아내 엠마와의 만남을 이렇게 전한다. 융은 대학에 다닐 때 14세의 엠마를 그녀의 집에서 잠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엠마를 보자마자 “깊은 충격을 받았고”, 곧 그녀가 미래의 아내라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말한다. 그렇게 1903년 결혼한 부부의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곧 심각한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엠마의 인간적인 성숙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고 게다가 엠마는 점차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노련한 심리치료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융은 자신의 아내 엠마가 죽은 뒤 너무나 큰 고통과 충격에 힘들다고 말하는데, 애정 깊고 사려 깊은 엠마라는 반려자가 없었더라면, 카를 구스타프 융의 삶과 작품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트와의 대결은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융에 대한 책을 쓴 게른하르타 베어는 적고 있다.

 여기서 결혼하고 곧 심각한 어려움에 부딪혔다는 것이 바로 샤비나 슈필라인과의 관계가 아닌가 한다. 놀랍게도 그토록 자신의 아내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오랫동안 기다려 청혼한 아내와 결혼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융은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바로 자신의 환자 샤비나 슈필라인이다. 샤비나는 융의 정신과 환자로 융은 그녀에게 Talking cure(대화치료)를 적용하는데 이 치료 방법의 위험성이 환자가 의사에게 가지게 되는 애착 혹은 의사가 환자에게 가지는 애착이라 한다. 어쨌든 샤비나는 단순한 정신과 환자가 아니었고 후에 자신의 이론을 구축한 심리학자가 된다. 이들의 관게에 프로이트가 가세하면서 당시에는 삼각 스캔들로싸지 퍼졌다고 하는데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 엠마 덕분이 모양이다. 엠마의 생애도 더불어 궁금해진다. 

  그리고 융에게 영향을 미친 프로이트는 융보다 19세 연상이다. 프로이트 이론에 매료된 융은 당시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에도 프로이트에 대한 옹호와 지지를 표명했고 이것은 프로이트와의 서신교환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융을 자신의 아들처럼 여겼고 융 역시 프로이트를 따랐다. 그러나 곧 그들은 견해 차이를 보였고 융은 프로이트의 한쪽 면에만 치우친, 그리고 개인적 권위를 진리보다 더 내세우는 태도에 환멸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은 시작이 그러했던 것처럼 편지를 통해 결별했다. 정신분석학회에서 영향력을 가지고있던 프로이트와의 결별은 그동안의 친구와 친지들을 떠나가게 했고 사람들은 융의 책을 쓰레기라고 말하며 등을 돌렸다. 그는 학회도 탈퇴하며 그의 길을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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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 기억을 아우르는 힘

 

    이 책은 자서전이기에 융의 생애가 담겨 있다. 융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연대기적 순서로 나열하여 그의 생애와 순간들을 담고 있다. 다만 그가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이자 비서에 의해 집필되고 정리된 것이다. 융이 한 문장 한 문장 손을 보았기 때문에 융 자신의 집필로 이루어진 저서라고 강조하고 있다.

책은 융의 유년기부터 말년까지를 회고하는, 연대기적 흐름으로 서술되고 있다. 다만 그 개별적인 내용들은 시간적인 흐름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기보다는 어떤 특정한 일련의 사건이나 체험에 대한 융의 내적 체험들을 중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내적체험을 중심으로 서술하다 보니 이것은 그것을 겪었던 당시의 느낌과 생각에서 변화된 생각,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이후의 일들이 얽혀서 기술되는 형태이다.

융은 자신의 인생에서 공간에 대한 애착을 보이는 것 같다. 마치 신성한 장소에서 사색이 더욱 경건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그에게 그의 집, 탑, 돌 등은 많은 의미를 가진다.

 

여기 돌이 있네. 보잘것없는 것.

값도 아주 싸고......

바보들로부터 무시당할수록

현자들로부터는 더욱 사랑을 받는다네.

-연금술사 아르날두스 드 빌라노바, (1313년 죽음) 의 라틴어 시구절- p406

 

   이 글은 무지한 자들로부터 경멸당하고 배척되는 연금술사의 돌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융이 돌에 새겨넣은 최초의 글이다. 이처럼 돌에다가 글을 새겨넣는 것 이상으로 사물이나 사건, 모든 것, 특히 꿈에 의미심장한 기억들을 가지며 의미를 붙이는 융이다.

 

오늘날 인간은 지상에 있는 온갖 고등생물을 방사능으로 없애버릴 수 있다. 세계 소멸의 관념은 이미 부처에 의해 그 단초를 갖게 되었다. 피할 도리가 없이 노쇠, 질병,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인연의 사슬은 큰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존재의 환영은 소멸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부정은 이미 심상치 않게 가까이 다가온 미래의 문제를 예언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 꿈은 인간세계에 오래 전부터 있어온 생각과 징후, 즉 피조물이 그의 창조주를 근소하지만 결정적으로 능가한다는 관념을 드러내고 있다(p395).

 

   대체로 비슷한 형태로 글이 전개가 되고 있다. 그가 어렸을 적 혹은 당 시기에 맞닥뜨렸던 내적체험에 대한 기억과 분석. 어릴 적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 그 장면에 대한 끊임없는 해석을 시도하는 그의 모습이 놀랍기도 했다. 무엇에나 의미를 붙이고 설명하려는 것은 역시 그의 표현대로 자기실현의 과정이었을 터, 그 무수한 자기실현의 과정들 하나하나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물론 나는 꿈이 그와 같이 실제임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깨어나도록 하는 것이 과연 무슨 뜻인지 자문해보았다. 보통은 그런 것을 유령 출몰에서만 경험한다. 깬다는 것은 현실을 자각한다는 뜻이다. 그 꿈은 현실과 같은 상황을 연출하여 일종의 깨어있는 상태를 만들어놓는다. 이런 종류의 꿈은 일반적인 꿈에 반해서 반복에 의해 강조된 뚜렷한 현실감각을 꿈꾸는 자에게 전하려는 무의식의 경향을 드러낸다. 그런 현실성의 원인은 한편으로는 원형적 이미지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p411~412).

 

   자신의 체험을 융은 이렇게 설명한다. 반복적인 수백 명의 음악소리, 축제적인 그 꿈은 고독현상으로, 외적인 공허와 정적을 사람들 무리의 이미지로 보상하려는 것이라고. 그것은 똑같이 보상적인 현상인 은자의 환각에 해당할 것이다. 그가 외로움으로 너무 예민해져서 그곳을 지나가는 ‘젤릭 뤼트(축복받은 죽은 자들)’의 행렬을 감지했을 것이라고. 융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융 옆에 고독과 쓸쓸함의 이미지를 같이 새겨넣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말이 또 기억에 남는다.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p624).

 

간에게 가장 큰 제약은 자기 자신이다. 그것은 "나는 다만 그것에 불과하다!"는 체험 가운데 나타난다. 내가 자기 자신 안에서 아주 좁게 제약되어 있다는 의식만이 무의식의 무한성에 접속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성에서 나는 나를 유한하면서도 영원하며 이것이면서도 저것으로 경험한다. 내가 나를 개인적인 결합 속에서 궁극적으로 제약되어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알게 되면서 또한 무한한 것을 의식할 수 있는 가능성도 지닌다. 오직 그러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이다(p573).

 

   어떤 사건과 마찬가지로 그의 꿈이나 맞닥뜨린 체험의 이야기들이 재미있게 다가왔다.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그에 대한 해석들, 그러니까 나이가 들어서도 그에 대한 해석을 덧붙이고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집중해서 보자면.....

    

1) 객관적 ‘사건’이 아닌 내적 체험의 구현

 

   이 책은 융의 제자이자 여비서인 아니엘라 야페가 융이 82세가 된 1975년부터 5년 가까이 그와 줄기차게 대담을 한 결과를 엮은 것이다. 이른바 자서전이다. 특히, 융이 한 문장 한 문장 손을 보았기 때문에 융 자신의 집필로 이루어진 저서라고 강조하고 있다.

자서전이기에 융의 생애가 담겨 있다. 융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연대기적 순서로 나열하여 그의 생애와 순간들을 담고 있다. 처음에 융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출간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죽은 후 출간 조건으로 동의했다 한다. 이미 자신의 할 이야기들은 충분히 다양한 논문과 저서를 통해서 했고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표출하는 것에 대해서도 꺼려하는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 그의 이전의 무의식의 이야기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을까. 외적 사건들보다는 내적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한 것은 그래도 ‘외적 사건’들을 말하지 않기 위함이었을까. 야페의 입으로 전한 융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종종 융에게 외적 사건들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얻는 것이 없었다. 인생경험의 정신적인 정수만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으며, 그것만이 애써서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융은 스스로도 객관적인 ‘사건’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객관적 형태의 자서전 출간은 거부했던 것으로 보이며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만의 특성을 살린 자서전을 출간한 것이다.

   이 책의 제목 '기억, 꿈, 사상'처럼 기억과 꿈과 사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결국 단지 관찰 대상이 융 자신의 내밀한 것이었다는 특징만 있을 뿐 우리가 자서전이라는 데서 기대하는 일련의 이야기들을 기대하지 못한다. 어쨌든, 자서전이라는 것이 생의 모든 것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은 그의 저서에서 다루는 것과 같은 이야기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의 생각과 경험과 그것에 심층으로 들어간 이야기들은 이미, 보아 왔는데, 알고 있는데란 생각을 하는 것은 왜인지. 좀더 가십적인 이야기거리를 찾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무의식에 대한 해석도 해석이지만 그냥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찾아낸 것은 왜 슈필라인의 이야기는 없는가였다. 한 개인의 자서전이라기보다 분석심리에 관한 또 하나의 사례가 들어간 논문이라고 해야 할까.

   융 자신 외적 사건에 대해 할 말이 없고 경험이 없다고 하지만, 그렇기에 그러한 별로 없는 외적 사건을 겪을 때의 내적인 체험과 의식이 궁금하게 와 닿는다.

 

 2) 기억을 아우르는 힘

 

   아리송. 내가 남의 꿈 이야기를 이렇게 주절주절 듣고 있어야 하는가. 그의 생은 온통 꿈의 역사다. 인생의 결정도 꿈과 함께 하고 인생의 고난도 꿈과 함께 한다. 아주 어린 시절의 꿈을 생생히 기억하는 것은 살아있는 나날 동안 반복적으로 꿈을 의식하고 분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꿈에 대한 오랜 시간이 지나서의 해석은 객관성을 상실한다. 하지만 사실, 객관성을 가질 필요가 없다. 자신이 꾼 꿈에 대하여 느낀 감정을 ‘객관적’이지 않다고 나무랄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융 자신이 자신에 대해 객관적일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의 꿈 이야기는 그런 꿈을 꾼 것이 사실인지 조차도 의심스럽게 만들 요지가 다분하지만, 융에게 거짓말쟁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융이라는 ‘객관적인 존재’의 힘으로 이루어진 성과다. 즉 기억과 꿈을 이야기하는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융이라는 프로필이 그의 거짓말같은 꿈 이야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학술적인 느낌을 갖고 또한 상당부분 학술적 이야기로 나아가고 있는 이유일 것이라 본다. 결국 융은 ‘객관적 일 수 없는’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학문적인 형태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결국 나름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 융은 끝까지 자신의 꿈 이야기를 주관적 형태로 남기지 않고 ‘객관화’ 하도록 이끌었다.

 

3) 융이 작성하지 않은 소제목

 

   각 장의 제목 이외 소제목은 원서에는 없다 한다. 독자들이 읽기 편하도록 임의로 구분한 것이라 한다. 없어도 무방했단 생각이 든다. 오히려 제목 구분을 저자가 한 것인 줄 알고 더 의미있게 들여다봤다. 그러면서 뭔가 주제어를 잘못 뽑았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융의 강조점이 이것이었나, 생각하며 보게 되었다. 제목은 각 단락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간과한 것이 제목을 융이 달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비로서 두번읽기에서 이 구절을 발견하고 첫번째에서 맘에 들지 않았던 소제목의 의문이 풀렸다. 번역작에서는 흔히 가독성을 위해 이러한 장의 구분과 제목입히기를 시도한다. 나는, 이러한 방법에 대해 부정적이다. 번역하여, 번역자가 따로 주석을 붙이고 해석하는 책이 아니라면 나는 '원문'에 충실한 책을 원한다. 바란다.

   섵부른 구분이 지나치게 친절한(?), 단순한 번역자와 출판사의 의도가 책을 통해 저자가 이끌어온 흐름을 방해한다. 내면체험과 의식의 흐름으로 일관하는 융의 책에 구분을 통해 흐름을 조절하는 것이 책을 읽는데 편했을까? 나는 중간중간 들어찬 제목으로 인해 흐름이 방해받았다. 제목에 깔린 의도를 생각하느라 그랬다. 사실 제목이란 글의 의미를 함축하고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아닌가. 적절하지 않는 제목을 통해 저자의 의도가 왜곡될 소지가 있다면 이것은 지양해야 할 점이다.

더불어 생각한 것이 글을 단락으로 끊어서 작성하기와 길게 나열하기에 대한 생각이다. 융처럼 큰 장만을 구분하고 그 장의 내용은 구분없이 작성하는 방법, 역자가 행한 것처럼 가독성을 위해 소제목을 통애 내용을 끊어가는 글쓰기의 방식은 어떠한 주제를 담고 있느냐에 따라 달리 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에서 쓰는 소위 교재를 보면 우리나라는 지나치게 체계적으로 흐른다. 늘 1장, 1. 1) ....이런 형태로 도식화환다. 이것은 논문 형식으로부터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논문이나 보고서는 도식화된 형태를 요구하고 그것이 일견 명확성을 보여준다. 보기에 편하다. 그러나 딱딱하다. 나 교재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개념의 명확성을 익혔다는 생각, 무언가에 대한 짜깁기와 요약이란 생각만이 강하다.

   반면 서양의 교재들은 다르다. 도식화보다는 소제목을 어느 정도 단 전개로 흐른다. 수렴이 아니라 확장이다. 생각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해준다. 내가 본 교재들은 그랬다. 목적에 따라 글쓰기의 형식이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을 구현해내는 작가의 역량에 따라 글의 맛이, 책의 맛이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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