챈들리스크


레이먼드 챈들러 - 밀고자 외 8편, 레이먼드 챈들러, 현대문학, 2016-04-08.


  새정부 들어 공인탐정제에 대한 논의가 있다. 탐정은 어린 시절부터 읽은 셜록 홈스 덕분에 익숙하고 열광적인 직업으로 여겨진다. 아니, 직업으로서의 탐정을 생각해보진 않았기에 왠지 로망이 현실가 맞물려 어떤 형태가 될지 궁금해지긴 한다. 실제 존재한다면, 실생활에서 적용한다고 생각하면 소설 속에서 보던 그 낭만적인 느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탐정’의 형태가 흥신소의 고급 버전이니까. 흥신소가 갖는 그 불법적이고 불쾌하고 음침한 이미지가 ‘탐정’에 드리워질까 염려되는 점이 있다. 그래도 나날이 범죄가 증가하고 CCTV 보관기일의 한계로 단서를 놓치는 경우도 많으니 이 제도가 도입이 된다면, 어떤 형태로든 범죄수사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단점도 있을 테고 그 장단점이 잘 맞물려 해결되기를 희망할 뿐이다.

  범죄가 증가하는 것은 싫지만 범인을 잡고 사건의 해결하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은 분명 짜릿함 쾌감이 있다. 탐정소설, 추리와 미스터리 소설이 인기있는 이유일 것이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이 탐정소설을 ‘문학’으로 이끈 작가로 유명하다. 또한 헤밍웨이체로 유명한 ‘하드보일드’를 장르화시킨 장본인이자 여타의 작가들-무라카미 하루키, 로스 맥도널드, 마이클 코넬리, 하라 료-이 그의 영향을 받았음을 얘기하고 있다. 1930~40년대의 미국의 분위기를 흠씬 드러내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은 영화계에서도 크게 호응해서 그의 작품은 영화화된 것이 많다. 그리고 그가 남긴 것이 바로 탐정 필립 말로이다. 유명한 캐릭터를 창조한 것이다.

  “하드보일드.” 이 말의 본뜻은 삶은 계란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푸욱 삶은 계란이다. 반숙이 아닌 완숙으로 팍팍하고 물기 없는 건조한 계란을 가리키는데 이 말이 소설과 영화로 넘어가면서 새로운 의미가 더해졌다. 바로 건조한 문체다. 수식이나 감정은 배제한 사실주의적인 표현을 쓰는 걸 가리킨다. 폭력의 잔인성 때문일까, 폭력적이니 주제에 주로 사용되어 오히려 더 공포감을 배가시키기도 한다. 당연, 탐정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고 레이먼드 챈들러가 이런 스타일로 탐정소설을 가볍게 읽고 넘기는 글이 아니라, 문학적인 경지로까지 이끌었다고.

  작가의 생애 또한 흥미롭다. 1932년 대공황으로 일자리를 잃고 대중소설 잡지를 읽으며 지내다가 소설을 쓰고 마흔이 넘어서 작가로 데뷔한다. 하지만 대공황 이전에도 그는 특별히 ‘일’에 대한 애착이 있었던 것 같진 않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지만 6개월만에 그만두고 몇 번의 일자리를 얻었지만 그때마도 불성실한 근무태도를 보였다. 전쟁에 참전하였고 18세 연상의 여인과 연애를 했고 어머니의 반대로 어머니의 사망 후에 결혼했다. 다른 여성들과의 염문 이야기도 흘러나오는데 아내의 죽음 이후에는 과음과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고 건강악화로 입퇴원을 반복했다. 그가 사망하던 해엔 비서에게 병원에서 청혼했다고 한다. 70평생의 그의 삶을 보건대, 어쨌든 자유로운 영혼이었다고 느껴진다.

  고전적인 느낌이 드는 그의 소설은 탐정소설임에도 그 건조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낭만성이 풍긴다. 시대적인 분위기가 가미되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확실히 ‘흥신소’에 일을 맡긴 것이 아니라 고급 탐정에게 일을 맡긴 기분이 든다. 잔인하고 악랄한 느낌보다 쓸쓸한 느낌이 먼저 다가온다. 어쩌면  사건보다 인물, 탐정 필립 말로에 중점이 두어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날 밤 사막바람이 불었다. 고온 건조한 샌타애나의 전형적인 열풍이었다. 이 바람이 산 고개를 넘어 내려오면 머리카락이 곱슬곱슬 말리고 피부가 가려워지고 괜히 초조해진다. 그런 밤이면 어느 술판이든 한바탕 싸움으로 끝난다. 유순하고 가냘픈 아낙네들은 식칼의 날을 만지며 남편의 목을 노려본다. 어떤 일이든 가능하다. 칵테일 바에서 거나하게 맥주를 걸칠 수도 있다.

  

  사건이 있었고 문제가 발생했고 그것을 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사건’보다 저런 묘사가 기억에 남는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이야기, 스토리를 이해하며 쫓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표현방식에도 눈길을 주고 있다는 걸 다시금 알았다. ‘챈들리스크Chandleresque’라 불리는 작가의 문체가 갖는 힘일 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잔 이펙트
페터 회 지음, 김진아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족, 그 불안정한 혼합물


수잔 이펙트, 페터 회, 현대문학, 2017-04-20.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긴 하지만 본질적인 것 아닌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사용하며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재능없음에 좌절하기 바쁜데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그것을 누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어쩐지 재앙같기도 하다. 어떤 재능인가가 더 중요한 것인가.

  수잔은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상대가 진실을 말하게 하는 것, 자신도 모르게 솔직한 말을 거침없이 하게 만드는 이 능력. 그리하여 그것은 ‘수잔 이펙트’라 명명된다. 이 능력의 필요성이 인정되다가도 수잔 이펙트가 내게 적용되면 그땐 또 그렇게 좋은 기분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은 들긴 한다. 이런 능력을 가진 수잔이 심리학자라거나 상담사였다면 혹은 범죄 조사자였다면 재능에 맞는 직업을 선택했구나 하겠지만, 수잔은 물리학자다. 하긴 원하지 않은 상황에서 시도 때도 없이 수잔을 붙들고 자기 속내를 마구 드러내고 있다면, 그 입장도 곤란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니 평범하지 않은 삶을 꿈꾸는 이에겐 이 수잔의 평범한 삶에 대한 욕구가 과연 진심의 욕구인가 궁금하기도 하다.


너희가 이건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인생을 살면서 꼭 이루고 싶은 게 뭐였는지 아니? 평범한 삶을 사는 거야. 내겐 그게 물리학의 세계에 입문하는 것보다, 이 효과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어. 아니, 뭘 알고 싶다는 것 자체보다 훨씬 중요했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언제나 평범한 삶을 갈구했어. 가정과 직장, 남편, 아이들, 월급 통장, 가족이 둘러앉아 먹는 삼시 세끼, 그리고 카오스와 엔트로피가 내 삶에서가 아니라 닫힌 시스템 안에서 유효하다는 확신. 그리고 난 그걸 얻었어.


  심리 추리 스릴러 소설의 특징이기도 하겠지만 상황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세밀하다. 그럼에도 속도감이 있어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무엇보다 독특하고 독보적인 수잔 캐릭터의 힘, 수잔만큼이나 개성있는 수잔의 가족들의 활약상, 끝날 줄 모르고 무한히 확장되는 이야기의 끝이 궁금하여, 수잔 이펙트의 실패 사례는 혹여 나오나 싶은 궁금증이 책장을 넘기는 힘이기도 하다. 물리학자인 수잔의 시선으로 사건이 전개되기에 여러 요소에 과학적인 해석이 등장한다. 그 또한 독특하고 재밌다. 안 그래도 수잔 이펙트가 인간의 솔직한 심정을 마구 노출하는 것인데 그렇게 마구 분출되는 인간의 감정을 과학적인 이야기로 살짝 정리시켜 주는 느낌도 든다.

  이야기는 수잔의 네 가족이 인도에서부터 사고 친 데서 시작한다. 인도에서 범죄자가 될 뻔한 네 명 모두가 덴마크 국가 기관의 도움으로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풀려나기 위해 국가 기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딱히 제안이 어려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 젊은 인재들의 ‘미래위원회’의 마지막 보고서를 찾는 일이다. 이것이 자신을 강간하려 한 배우를 때려눕혀 받은 25년형보다 인도 부족장의 딸과 도망쳐 마피아에게 쫓기는 남편보다, 골동품 밀수혐의로 고소당한 아들보다, 백만 명의 신도를 거느린 승려와 도주 중인 딸의 안전보다 결코 중요한 일은 아니라는 점에서, 간단히 끝이 날 거란 생각에서, 덴마크로 돌아가고 싶기에 수락한다. 그러나 예상 가능하듯 이 일은 보다 복잡하고 거대한 음모가 가득했다. 당연, 끝없는 목숨의 위협이 있고 연이어 관련된 자들의 죽음이 발생한다.

  국가 기관이 개입한 비밀스런 일은 너무 당연하겠지만 좋은 쪽과 나쁜 쪽이다. 국가라는 권력을 이용한 온갖 악행의 비리를 숨기려고 하거나 국가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이익을 얻으려는 형태가 대부분이라 미래위원회 보고서를 찾는 것은 핵심적인 사항으로 여겨지진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거들 뿐, 이 이야기가 이끌어가는 방향은 처음부터 짠하고 자신들만의 독특성을 알린 이 네 가족의 여정과 관계였다. 이제 헤어질 가족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으면서도, '태생부터 독불장군에 극도의 개인주의자‘인 네 명은 이 일을 해결하는데 함께 한다. 각자의 의견과 의지를 결코 굽히지 않은 채로 이들이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은 각자의 길로 나뉘는 결말로 향해 갈지, 그렇지 않은 길을 택할 지 그 역동성과 내밀한 관계의 변화가 미래위원회를 둘러싼 거대한 음모의 이야기보다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바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이들에겐 엄마라고 불리기보다 ‘수잔’이라 불리기 원하고 엄마들이 누구의 엄마로 명명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수잔이다. 하지만 수잔 역시 아이를 구하기 위해 눈, 머리카락, 연금, 모든 걸 내놓는 안데르센의 어머니 이야기의 어머니와 같이 행동한다. 어쨌든 자신이 ‘아이의 엄마’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반쪽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수잔은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면서도 방황하는데 이것은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기억에서 연유한다. 또한 춤추는 것을 더 중요시하며 자신을 제대로 돌보아주지 않은 어머니와의 관계가 수잔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수잔 이펙트를 떠나서도 매력과 능력을 가졌음에도 오랜 시간 스스로를 옭아매는 이 기억이 수잔과 수잔의 남편과의 관계도 소원하게 만들었다. 또한, 수잔의 남편 역시도 수잔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또한 어린 시절 가족에게서 부모에게서 받은 외로움이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고난을 함께 하고 문제를 함께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이 독불장군의 이기적인 네 명은 서로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서로를 이해해 간다.


“그 이야기를 해줄 때 엄마는 우리에게 방을 만들어주려고 한 것 같았어요. 전 그걸 느낌으로 알았어요. 아주 환한 방을, 완벽한 방을 만들어주려고 하는구나. 엄마가 말했잖아요, 물리학은 항상 완벽한 공간을 만들어내려 한다고. 빛이 완전히 차단된 공간, 완벽한 진공상태의 공간, 무중력의 공간, 무균상태의 공간. 엄마 아빠는 우리에게 그런 공간을 만들어주려고 했어요. 엄마가 옛날이야기를 해줄 때 전 그걸 가장 분명하게 느꼈어요. 그리고 엄마는 그렇게 해줬고요. 거의 그렇게 했다고 해야겠죠. 그런데 전 그 방에 들어가기가 싫었어요. 만약 그 방에 들어가면 다시 나오는 게 너무 힘들 것 같았어요. 문제는 바로 그거예요. 정말 아픔이 없는 그런 공간을 만들 수 있다면 그건…… 위험하잖아요. 왜냐면 그냥 거기 있고 싶어질 테니까.”

“엄마, 내 생각에 엄마는 물리 숙제를 고치듯 세상을 수정하려고 했어요.”


  수잔의 딸 티트의 말은 미래위원회가 벌인 일과도 연관되어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어쩌면 미래위원회가 한 일들도 넓게 보면, 게다가 긍정을 끌어들여와 좋게 표현하면, 수잔과 라반이 하랄과 티트 쌍둥이에게 공간을 만들어주려는 것과 같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목적과 실행에서의 결정적인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미래위원회가 세기말의 상황에서 추진하려 했던 그들만의 공간이, 위험하다는, 권력자들 역시도 그들만의 권력과 욕망과 권위로 세상을 수정하기 위해 열심히라는, 그 방향이 어떤가를 좀더 생각지 않고 마구 달려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만을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수잔이 찾아낸 ‘수잔 이펙트’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더욱 또렷하게 느껴진다.

    

사람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그리고 이 효과의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게 뭔지 아세요?

타인이에요. 사람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사는 건 바로 타인이에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정적 추리


분실물이 도착했습니다 - 다섯 개의 미스테리, 오오사키 코즈에, 생각의집, 2017-02-10.



  분실물이 도착했다.

  찾으려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 것이 아니라 우연처럼 제 스스로 도착했다. 전체 다섯의 단편이 있는데 부제가 다섯 개의 미스터리이다. 추리 소설인가 했는데, 다 읽고 나서야 왜 제목이 전혀 잃어버리지 않은 분실물일까에 대한 의문이 풀린다. 여기, 다섯 개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잃어버린, 제쳐두었던 기억들. 그 기억들이 결국 분실물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의도치 않은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된 지난날의 기억은 그때 해결치 못한 이야기에 대한 이해를 가늠케 한다. 오래 전 잃어버린 물건들이 나도 모르는 새 집으로 도착해 내 손에 쥐어진 것처럼 여기 이야기들은 모두 그런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러니까 미스테리하다. 분실물은 어떻게, 왜 지금 도착한 것일까.

  미스터리니까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날의 일의 파장이 무엇인지, 또 범인은 무엇인지 등등에 대한 궁금증도 생기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 소설들에 관통하는 느낌은 그러한 범인 추적이나 사건의 전말을 알아내는 것보다 분위기이 듯하다.


저는 ‘살아온 일대기’를 이야기하고 싶은 게 아니라, 오랜 시간 마음에 담아두었던 단 하루의, 아니 한 순간일지도 몰라요. 그 정도로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 「들장미 정원으로


  기존 미스터리물에서 볼 수 있는 팽팽한 긴장감이나 서늘한 느낌보다는 정제되고 깔끔한, 담백한 느낌이다. 그러니까 공포와 잔인함이 가미된 미스터리가 아니라 아련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단편 속 대사처럼 오랜 시간 마음에 담아두었던 어떤 일들이 다른 계기로 인해 이야기되면서 그때 당시에는 알지 못했던, 알 수 없었던 이야기의 전말을 가늠하게 되는 이야기들이다. 해결되지 못한 기억들은 그렇게 잔상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그 기억에 대한 마무리를 완결을 하고픈게 사람들 마음인 듯하다. 우연찮게 책을  들었는데 첫 번째 단편 「사라의 열매」의 인상이 괜찮아서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사라의 열매」는 부동산 중개업자 코히나타 히로시가 업무일로 방문한 집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만나 20년 전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 나누면서 시작된다. 결국 자신이 관계된 그날의 이야기, 그러니까 소풍날 히로시는 납치됐고 그 시간 사망한 남자가 있었던 사건. 자연적으로 가정폭력에 대해 나아가는 이 이야기에서, 상처와 죄책감의 흔적이 짙게 묻어난다. 그리고 친구….


원치 않게 사람을 상처 입히고 죄의식에 사로잡힌 주인공이 방황을 하던 중 들어가 산소에서 거짓말처럼 아름다운 하얀 꽃을 보게 되었어. 그는 그 꽃에 완전히 매료되어 몇 번이나 산에 왕래했고, 그러다 어느덧 계절이 바뀌고 꽃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네. 그 열매를 가지고 돌아와 하얀 꽃의 모습에서 자비를 빌며 표식을 새기였지. 자기가 타인에게 입힌 상처. 자기가 자신에게 입힌 상처. 이렇게 가로로 두 줄의 상처를 내고, 그것을 봉인하기 위해 세로로 상처를 내었어. 그리고 일생 동안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고, 숨기겠다고 맹세하지. 그런 이야기였어. -「사라의 열매」


  히로시가 들고 다니는 두 줄의 흠집이 새겨진 노각나무 휴대폰 고리. 사건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꿰맞춰보던 선생님의 숙제처럼 남은 죄책감. 힘들 때 의지할 어른이 되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마음이 오래도록 남아 아동학대에 관심을 기울였던 선생님은 히로시에게도 그 죄책감을 덜어버리라고 말한다. 과거의 열매를 버림으로써. 그것은 히로시가 범인임을 단정하고 하는 말인가.


사라쌍수의 꽃이라고 알아? 헤이케모노가타리의 앞부분에 ‘기원정사의 종의 소리, 제행무상의 울림이 있고, 사라쌍수 꽃의 색, 성자필쇠의 이치를 나타낸다’라는 문장이 있잖아. 그 사라쌍수의 꽃 색깔이 하얀 색인데, 이게 그 열매야. 정말이래. 특별한 열매야. 상처가 없으면 꽃이 피지만 말이야. 심지 말고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어. 너에게 맡길게. 그냥 부적 같은 거야.  - 「사라의 열매」

      

  히로시는 더 이상 무겁고 괴로운 짐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노각나무 열매를 건네지도 않았다. 그 자신도 맡아 놓고 있는 것이었으니. 차 속에서 오래도록 흐느껴 우는 성인의 모습이 참으로 애잔하게 기억되는 사라의 열매다. 사라의 나무는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날 때 근처에 있었다는 나무고 노각나무는 사라의 나무라 불린다고 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노각나무 단편의 이야기가 맞물려 이야기의 풍성함을 더한다. 


벚꽃 이야기를 했어. 전화를 든 채로 커다란 벚꽃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하얀 것이 떨어지길래, 꽃잎 인가 하고 봤더니 눈이었다. 정말 예뻐서, 이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 「거미줄」


  유달리 다섯 이야기에는 꽃이 많이 등장한다. 그것이 아련한 느낌을 더욱 배가시켜 주고 있는 듯하다. 「거미줄」속의 벚꽃도 이야기의 주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헤어지는 연인들의 대화 속에 지나간 어느 날의 사소한 일 하나가 어떤 이에겐 중요한 기점이 되는 일로 작용하는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어떤 이의 생에 대한, 나의 생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인생에 대한 비애를 공감하면서 그러나 헤어짐은 변함없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의 날.


그 ‘이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이 마음 깊이 남았어. 뭐라고 할까? 땀 투성이가 되도록 동네를 뛰다가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릴 때에 문득 하늘을 바라본 느낌? ‘이제 됐어’ 그렇게 중얼거리면 어깨를 짓누르던 무언가가 사라지고, 숨쉬기도 편해지지. 아슬아슬하게 지탱하고 있던 버팀목이 뚝하고 부러진 걸지도 몰라‘.’이제 됐다‘는 그 말이 나에게 들려주는 말처럼 느껴졌어. 분명 지쳐있던 걸 거야. 나도, 선배도 너무 많은 일을 무리하게 했어. -「거미줄」


  이제 됐다. 왜 이 느낌을 알 것 같은가 모르겠다. 내 기억 속에도 어깨를 짓누르던 무언가가, 숨쉬기 힘들었던 기억들이, 아슬아슬하게 삶을 지탱하던 버팀목을 붙들고 있던 순간들이 있었으니까. 이 대화가 나오기까지의 두 연인들의 희극적인 상황도 블랙코미디같이 여겨졌다. 삶은 참 여러모로, 아니러니다. 참 서정적으로 다가온 미스터리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용서하지 않을 테다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 Four Ways To Forgiveness

어슐러 K. 르 귄 시공사, 2014.

 

   지난달 지구와 닮은 7개 행성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으며 이 책이 떠올랐다. 지구와 닮은 행성이란 의미는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이라는 말이다.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행성을 발견했다는 발표는 자주 접한 듯한데 후속보도가 없다. 지구인처럼 살아가는 생명체는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러한 행성들을 찾는 지구인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과학적 사실에 대한 발견, SF에서 보듯 지구인의 영토 확장? 지금의 심정이라면 지구가 아닌 새로운 행성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프다. 어쩌면 혼란일수도 어쩌면 더 확고한 질서가 잡힐 수도 있을 그곳. 엉망이 된 터전에서 벗어나고픈 욕구가 조금은 진정이 될지 모를 39일이다. 외국도 아닌 다른 행성을 찾아야 하는 일은 발생할까.

   알 수 없는 일인데, 왜 미래 세계에 대해 희망보다 쓸쓸함을 느끼게 되는 걸까. SF 소설의 대가로 알려진 어슐러 르 권의 연작 단편집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은 우주 공간의 다른 행성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일곱 개 달을 가진 행성 웨렐과 웨렐의 식민지 행성 예이오웨이가 배경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과학 발달을 충족시켜주지 못한 채 소설 속 행성은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이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유배지의 인상을 준다. 황량하고 문명이 파괴되어 버린 터전으로 보인다. 1995년에 발표한 연작 단편집으로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용서와 사랑에 관한 것이고 각 이야기의 배경과 등장인물들이 연결되어 있다. 결국 지구 밖 행성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배경이 그러할뿐 인간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식민지 행성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듯이 권력과 투쟁이 있는, 그리하여 용서와 화해가 필요로 한.

   작가는 SF와 추리소설에서 역량을 발휘하고 수상전력도 화려하다. 이 책 발표 당시 그 의미와 아름다움과 중요성에서 영원히 남을 작품” “미국의 가장 영예롭고 존경받는 작가라는 찬사를 안겨주었다고 한다. 그들이 매료된 이 책의 이야기는 무얼까.

두 행성은 식민 행성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듯 주인과 노예 계급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것은 피부색으로 결정된다. 소유주라 불리는 이들은 피부색이 검고 인구의 10퍼센트 정도이나 피부색이 옅은 사람들을 정복하며 자산으로 취급한다. 자산들이 불리는 이름은 먼지놈’ ‘분필’ ‘흰둥이등이다. 당연, 여성은 구분조차 없는 남자의 자산으로 취급되었고 소유주의 부인이어도 그저 열등한 특권 계급이었다.

 

여기서, 이 세계에서 여자들이 어떤 존재인지 아나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자들은 정부의 일부가 아니에요. 여자들이 해방을 이뤄냈어요. 여자들은 남자들과 똑같이 해방을 위해 노력했고 죽었어요. 하지만 여자들은 장군이 아니었고, 대장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을에서 여자들은 하찮은 존재 그 이하이고, 일하는 짐승이고, 새끼 낳는 가축이에요. 여기선 조금 나아요. 하지만 좋진 않아요. 전 베소의 의료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어요. 전 의사예요. 간호사가 아니라. 보스들의 지휘 아래, 전 이 병원을 운영했어요. 이젠 남자가 병원을 운영해요. 이젠 우리의 남자들이 소유주예요. 그리고 우린 언제나와 같은 처지고요. 자산이죠. 이러자고 우리가 그 기나긴 전쟁을 싸워온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당신 생각은 어떤가요. 특사님? 우리는 새로운 해방을 이뤄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우린 그 일을 끝내야 해요. - <사람들의 남자 , p226~227>

 

   이러한 사회구조를 가진 나라가 만든 식민행성이라고 다를 리 없다. 그 관례를 그대로 적용하며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지배체제를 구축한다. 그 방식이란 집단 내 경쟁과 권력 다툼을 통해서다. 기시감이 느껴지듯 그 방법 속엔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동원되고 그 어떤 외부 정도도 차단된다. 식민행성의 여성의 지위는 주행성보다도 열악하다. 심지어 남자노예일지라도 여자노예를 성적으로 착취한다.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은, 심지어 살인도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수용된다. 다른 점이라면 식민행성이므로 주행성에 대해 끊임없이 독립을 시도한다는 점이랄까. 식민행성의 여성들이 더욱 그 갈망이, 행동력이 강하다는 점이랄까.

 

예이오웨이에서 사람들은 그 자산들을 자유계약인(freedpeople)이라 불렀다. 자유민(free people)이 아니라, 자유계약인이었다. 그때, 내가 읽던 역사책이 말했다. ‘왜 우리가 자유민이 아니지?’라고 그 사람들은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 <한 여자의 해방 p. 310> -

 

   이러한 지배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유를 위한 갈망은 30여년의 해방전쟁 상태를 만든다. 당연 혁명군도 반혁명군도 존재한다. 배신도 음모도 빠질 수 없다. <배신>의 이야기는 전직 혁명대장 압버캄의 이야기다. 그는 식민행성 예이오웨이의 혁명을 이끌었지만 권력 남용으로 쫓겨났다. 압버캄이 누명을 썼다거나 혁명의 새 시도를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불명예스러운 상태로 노숙인과 같은 상태로 살아가는 전직 혁명대장의 끊임없는 회의를 그려내고 있다. 그런 그가 좌절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요소의 존재가 서로에게 필요로 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한 여자의 해방>은 웨렐의 노예로 태어난 라캄이 여성 해방운동을 경험하며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식민행성과 노예라는 구조에서 혁명이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다. 그들 모두는 주어진 체제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하기에 글을 읽는 것도 아는 것도 죄악시되는 사회에서 모순을, 불평등을 인식하는 계기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이 노예에게 지식을 배제시키는 이유일 것이고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사람들의 인식을 강압하고 세뇌시키는 이유일 것이다.

 

나는 혁명이 뭔지 전혀 몰랐다. 에로드가 말해줬을 때는, 예이오웨이라 불리는 곳에서 플랜테이션들의 자산들이 자신들의 소유주들과 싸우고 있다는 의미였고, 나는 어떻게 자산들이 그럴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세상에는 높은 존재와 낮은 존재, 주님과 인간, 남자와 여자, 소유주와 피소유자가 있도록 정해져 있었다. 나의 세상은 쇼메케 영지가 전부였고, 쇼메케 영지는 그 하나의 토대 위에 서 있었다. 누가 그걸 뒤엎고 싶겠는가?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 아래에 깔려 짜부라질 텐데. - <한 여자의 해방 p283>-

 

   한 인간의 변화는 인지를 통해서 또한 인지한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많은 이들이 그저 그렇게 구축한 세상에 대해 변화에 대한 의미조차도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더 나은 세계를 인식한 순간 그들은 변화에 대한 갈망을 느꼈고 그 주체가 자신이 될 수 있음을 안다. 이 소설 속에서 그 방법은 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그리고 다른 이들을 통해서다.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서 오해와 반목을 풀어가고 함께 혁명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 해야 할 것,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은 혼자서 이루어가는 것이 아님을 알아가며 이해의 소길을 구가하려는 모습들은 사랑이라는 뻔한 결말로 나아가지만, 또한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이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주장하던 이들이 그 갈등을 해결하고 나아가는 모습은 인간사회의 모든 모순은, 갈등은 결국 인간들의 편협한 사고때문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마침내 그들은 새로운 행성을 만들어 가는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한번에, 단번에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점진적인 변화의 형태일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변혁을 원한다면 그것은 이루어야 할 일이다. 바뀌어야 할 일이다. 그리하여 식민행성 예이오웨이에도 헌법 수정안이 이루어졌다.

 

헌법 수정안은 예이오웨이 해방 18년에 투표에 부쳐졌고, 거의 비밀투표였다. 여기까지의 사건들, 그리고 그 뒤의 사건들은 대학 출판사에서 새로 나온 세권짜리 <예이오웨이의 역사>에서 읽을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말해달라고 부탁받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들처럼, 나 역시 두 사람의 결합으로 이야기를 맺었다. 두 세계의 역사, 우리 평생의 위대한 혁명들, 희망들, 우리 종족의 끝없는 잔학한 행위들 속에서, 한 남자의 그리고 한 여자의 사랑과 욕망은 과연 무엇인가? 아주 작은 것이다. 하지만 작은 열쇠가 문 옆에 있을 때는 그 문을 연다. 열쇠를 잃어버리면, 문은 절대 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바로 우리의 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잃거나 자유롭기 시작하고, 바로 우리의 몸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노예생활을 받아들이거나 끝낸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썼다. 이제껏 나와 함께 자유롭게 살아왔고 자유롭게 죽을, 내 친구를 위해. - <한 여자의 해방 p372>-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을 보았지만, 난 용서하고 싶지 않다. 용서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용서와 사랑은 무조건 베풀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용서할 수 있을 때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할 위치인가를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그런 용서가 필요치 않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책 속의 이 말이 기억에 남는다. 지금 이 시대에 과거회귀가 웬 말인가. 우리 사회가 한편으로는 심각한 무지와 문맹의 나라라는 것을 절감하는 때이다. 글자를 안다고 문맹이 아니랄 수 없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문장의 의미를 아는 일이다. 여전히 지식이란 것을 학력을 통해 갖추었으나 무지와 문맹이 가득한 사람들의 쇼를 보며 생각한다. , 정말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고. 책 열심히 읽어야겠다고. 무지와 문맹을 바탕으로 한 탐욕은 정말 용서할 수 없다고.

 

무지는 자신을 사납게 방어하고, 문맹은 나도 잘 알듯 날카로워질 수 있다. - <한 여자의 해방 p35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변하지 않는 세계



혁명하는 여자들


조안나 러스・팻 머피・수전 팰위크・어슐러 K. 르 귄・

파멜라 사전트・히로미 고토・엘리자베스 보나뷔르・켈리 에스크리지・

반다나 싱・캐서린 M. 밸런트・캐롤 엠쉬윌러・안네 리히터・

카린 티드베크・에일린 건・앙헬리카 고로디스체르, 

아작. 2016-09-20.


  페미니즘이 과거에서부터 이어진 차별과 억압에 대한 것이기에 과거와 현재의 경험과 사건은 중요하다. 지금과는 다른 상황을 위한 페미니즘의 노력은 과거와 현재의 경험과 상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래는,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기대는 희망이자 노력이다. 그런데 미래에도 지금과 다르지 않다면, 이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면, 더 경악스런 일들이 이뤄지고 있다면, 어떤가. 미래의 생활이 어떠할지는 막연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이 소설에서 그리는 미래의 모습을 보는 것은 끔찍한 경험이다.

  페미니즘이라 불리는 소설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건과 경험 속의 여성과 남성의 모습과 내면을 부각하고 있다면『혁명하는 여자들』은 그 경험을 미래라는 진보된 과학과 접목한다. 이른바 SF 소설이다. 열다섯 명의 작가가 쓴 글을 묶은 SF 페미니즘 소설집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소설이 아니라 1960년대의 작품부터 최근의 작품이 수록되었는데 대체로 70, 80년대 소설이 많다. 그때에 이미 미래의 모습을 상정했는데도 현재에서 느낄 수 있는 여전한 차별과 고정된 인식들이 팽배하다. 도대체 사고의 전이는 어떠한 사건과 맞닥뜨려야만 가능한 걸까.

  이 많은 작가들 중 아는 이름은 어슐러 르 귄이 유일했다. 낯선 작가들의 이름만큼이나 낯선 미래의 상황. 여자들은 모두 현재의 순간에 느끼는 감정들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고 있다. 기술의 발전이 이뤄진 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그만큼 따라주지 않는 의식과 사고들은 삶을 근본적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데는 기여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미래의 삶 속에서의 여성들은 여전히 일상의 차별속에 놓인 채 살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집 속의 소설들은 기괴한 풍경 속에서 쓸쓸하고 안타까운 여운을 남긴다.

  어슐러 르 귄의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초기 남극탐험에 관한 보고서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그 탐험가 모두가 여성가였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그 탐험에 관해 자신들을 떠벌이지 않으며 심지어는 지금까지도 당부한다. 아문센에게는 절대 비밀이어야 한다고! 그가 끔찍스럽게 당황하고 실망할 것이라고.

  반다나 싱의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하는 여자>와 안네 리히터의 <식물의 잠>을 읽으면서는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생각났는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각각 자신을 행성과 식물이라 생각하는 여자가 행성과 식물이 되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들이 자신을 다른 ‘모습’으로 생각하는 것은 타인들의 눈엔 비정상적인, 미친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여성’으로 가두는 사회의 억압 속에서의 의문과 스트레스에서 기인한 것이다. 

  파멜라 사전트의 <공포>는 제목만큼이나 공포스러운 감정에 휘말렸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답답함이 가득찼다. <공포>속의 세계는 극단적인 남성지배사회를 그린다. 그 속의 주인공이 낯설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그들의 에덴에 이브는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시내에 나갔던 일이 그런 생각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러나 우리는 미래를 향한 신념도 함께 거둬 간다. 나의 소멸은 단지 개인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가슴이 편평한 남성의 형태 안에 여성의 흔적만이 남을 것이다. 어쩌다 나오는 표정, 자세, 감정 따위, 사랑은 재생산과 결별하고 열매를 맺지 않는 결합 속에서 스스로를 증명해낼 것이다. 인간의 애정은 유연하니까.

나는 한 남자의 선물인 내 작은 자유를 애지중지하며 내 집에, 내 감옥 안에 앉아 있다. 나 같은 이들에게 주어졌던 자유는 언제나 그런 것이었고, 나는 과연 다른 가능성이 있었는지 다시금 의아해졌다. p314~315

 

   수잔 팰위크의 <늑대 여자>는 늑대와 인간의 삶을 사는 여성의 이야기다. 그 여성을 길들이는 인간 연인은 네 발일 때는 ‘제시’인, 두 발일 때는 ‘스텔라’인 이 여성과 어떻게 함께 할까. 결국엔 파국이 되고 마는 이 관계. 이러한 결말로 이끄는 것은 외적인 상황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나의 마음의 변화다. 늑대 여자의 연인은 제시일 때는 개로, 스텔라일 때는 여성으로 늑대 여자를 착취한다. 물론 사랑으로 보살필 때도 있었다. 그런 날들이 있었기에 제시가, 스텔라가 그의 옆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제시의 말에 스텔라의 사정을 깊이 이해하고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늑대 여자의 연인은 필요에 의해 제시와 스텔라를 대했고 그리고 필요가 떨어졌을 때 잔인하게 대했다. 늑대여자라는 설정을 빼고 본다면 현실의 남녀관계의 전형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그만큼 외적인 테두리의 변화가 남녀 관계의 근본적인 역할과 차별의 상황을 변화시키진 못하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소설 속의 이야기들은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곳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은 별반 현실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만큼 인간의 사고의 변화가 어렵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오래도록 이어온 관습인가, 생물학적인 요인인가. 물론 이 소설이 이야기하는 세계 자체는 극단적이라 할 지 모른다. 그러나 어차피 SF라는 장르가 가지는 특성 아닌가. 현실 자체도 디스토피아가 가득하다. 그렇지 않다 해도 현실의 상황에서 극단적이지 않은 것은 또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딱히 낯설지도 극단적이지도 않다. 이 소설 속 세계의 개연성은 충분하다.

 안타까운 것은 책의 제목은 <혁명하는 여자들>인데 그런 여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미래 세계는 달라진 모습을 기대하건만, 그것이 여성이 남성을 정복하고 여성들을 위한 세상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과는 달라진 사회가 특정 성이 이루는 전쟁같은 승리 후의 세계가 아니라 이상적인 형태의 사회변화의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착취당하고 상처받고 억눌리는 그런 모습 속에 여성들은 놓여 있다. 남성들 역시도 현재의 정형화된 남성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모두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들을 그려볼 수 있는 모습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기에, 이러한 미래 사회를 살아가고 싶지 않기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의문을 제기하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방법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의견이 있을 것이지만 그 근본에 대해서는 공감하며 그 방법들을 나누는 것이다. 이 소설 또한 그 역할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집의 작가들은 다양한 문학상을 수상했고 작품 또한 수상작인 경우가 많다. 소설의 취향을 떠나서 이 소설의 역할은 현재의 페미니즘에 대한 끊임없는 일깨움이다. 현실 자각인 동시에 미래에 대한 각성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