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로니 프로젝트
김솔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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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소스페소(caffe sospeso)

마카로니 프로젝트, 김솔, 문학동네, 2018.


  이탈리아 피렌체, 그곳에서 생활하지 않는 나에게 그 도시는 낭만적 공간이다. 관광객의 눈으로 바라보며 실생활을 잊는다. 100년 전통의 카페 소스페소(caffe sospes) 문화 또한 환상과 낭만의 분위기를 주는 요인이 된다. 주문해놓고 마시지 않은 커피, 맡겨둔 커피. 이 문화가 경제위기를 타고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커피를 마신 손님이 여분의 커피값을 미리 지불해놓으면 카페의 주인은 입구에 그 숫자를 표시해둔다. 그러면 누구라도 주인에게 무료 커피를 요구할 수 있는데 보통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 커피 없이는 하루를 시작하거나 끝낼 수 없는 나폴리에서 시작된 전통이다.


  이 카페 소스페스 문화를 전세계적으로 확산시킨 이탈리아 피렌체에 미국 본사를 둔 다국적 무기회사의 공장이 있다. 이 무기회사는 이탈리아에 어떤 문화를 심겨놓을까. 카페 소스페소는 여전히, 진행될까.

  본사는 피렌체 공장 폐쇄를 결정한다. 영업 실적이 부진하니까 더 돌아볼 필요 없는 결정이다. 진행해야 한다. 모든 직원을 해고해야 하니 저항하지 않게 잘해야 한다. 본사가 생각하는 ‘저항하지 않게’는 해고될 수밖에 없는 모든 직원들을 위한 최대한의 보상과 안정 협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본부장, 공장장, 부서 팀장들을 중심으로 한 ‘마카로니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자들과 생존을 박탈당할 위기에 놓인 일반 직원들의 갈등 속에 본사는 관망하며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 팀장들은 함께 일한 동료에 대한 안쓰러움과 배신한다는 죄책감 사이에서 힘겨워하고 직원들은 저항, 시위, 호소, 약탈 등등을 벌이며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이뤄진다. 이 소설은 공장폐쇄 과정에서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들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연대도 부르짖지만 미묘하게 파고드는 이간질에 넘어가며 나와 내 가족의 불안한 미래로 인해 당장의 이익을 더 생각하게 되고, 동료는 타인이 되어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마음들이 ‘이기심, 본성’이라는 이름으로 집결된다. 진창에 빠진 인간이 해야 할 생각과 행동, 마냥 선을 추구하는 것은 가능할까.

  

인간에 대한 깊은 절망이야말로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어떤 절망도 극복할 수 있다는 확고한 논거가 될 수 있었다. 특히 누군가의 시체를 뜯어먹으면서도 여전히 불평하고 있는 자들의 이기심은 니코에게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의무들을 극명하게 주입해주었다. 돼지우리의 진창 속에 하루종일 코를 박고 살면서 정신적 순결과 우주적 이상을 갈망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우리 밖으로 나오려면 돼지의 삶과 돼지라는 인식에서부터 해방되는 게 급선무였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공개되는 정부의 비밀문건에 비장하기도 또한 우습기도 한 작전명이 여럿 있었다. 한국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가. 국민을 위한 중요하고 엄중한 것들도 있었지만 국가권력 유지를 위한 작전들이 수두룩했다. 비둘기를 위한 파티도 있었고 계엄령문건이나 사법부의 재판개입, 댓글공작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엄중한 작전명을 달고 진행되어 왔다. 김솔의 마카로니 프로젝트의 주체는 기업이지만, 뭐 다를 리 있을까. 사람의 삶을 진창으로 몰아넣고 시체를 뜯어먹고 있는 무리들에 맞서야 하는 힘없는 자들의 노력은 늘 연대, 연대, 연대. 쉬이 연대를 무너뜨릴 힘을 가진 무리에게 패배하고 마는 이들이 가져야 할 높은 수준의 합리성과 순수한 선, 이 불합리한 균형. 절대적 선에 이르지 못했기에 절대적 악이 이기는 게임.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나약해진 것만큼은 분명하다. 나약해진 인간은 오로지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서만 그들을 둘러싼 위험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데도, 더 많은 이익과 더 안락한 조건을 편취하려는 욕망에 이성이 마비되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인간이 늘어가고 있다. 실업과 파산과 가난의 대물림이 이어지는 세태에서 노동은 더 이상 자본가들에게 재갈을 물릴 수 없다. 교육조차도 혁명의 무기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소비가 혁명을 야기한다.


  이 책을 보며 생각했다. 프로젝트는 얼마나 많았을까, 라고. 지금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프레임들도 언론의 논조들도 따지고 보면 마카로니 프로젝트의 진행 아니던가. 목표를 위해 인간들의 연대와 선한 마음 사이를 파고드는 갈등 조장에서 믿을 만한 것이 인간의 양심이라는 것은 모순이다. 결국 이뤄지는 것은 인간의 파멸인데, 단지 문학적으로 이상적인 표현으로서 인간 모두 파멸했다고 말한들 무슨 소용인가. 삶의 명백한 현실에서 패배는 또렷이 나타나는데.


인간이 파멸해가는 과정을 덤덤하게 적어 내려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오히려 그들이 스스로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을 기록하는 일이 훨씬 어렵다. 왜냐하면 파멸의 과정은 명징하고 짧지만 치유의 그것은 불분명한데다가 너무 길고 더디기 때문이다.


  그렇다. 어쨌든 그 과정은 다를 리 없을 것이다. 무너진 인간이 어떻게 치유되고 회복되어가는가는 중요하다. 그것은 어렵고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에는 직원들뿐만 아니라 공장이 있던 인근 식당이 문을 닫고 지역경제가 영향을 받는 상황이 묘사된다. 실제로 해고노동자들의 연이은 자살 소식은 해고라는 사건이 있은 지 오래 시간이 지난 후에도 들려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가에게 권력가에게 카페 소스페소(caffe sospes) 문화의 순수한 정신을 기대하는 일은 어려운데,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자들에게 절대적 선을 기대하는 일은 당연처럼 되는 것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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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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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의 편지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장은진, 문학동네, 2009.


편지를 받을 사람이 있고 또 답장을 보내줄 사람이 있다면, 생은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단 한사람뿐이라 하더라도. 


  일주일쯤 전에 편지가 도착했다. 북에 띄운 메시지가 USB에 담겨 왔다. 되돌아온 편지가 아닐 걸 알면서도 전달되지 못한 편지처럼 느껴졌다. 북에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 씁쓸했다. 만나지 못하면 소식조차도 받을 수 없는 건가.

  이산가족 상봉 뉴스 속에는 젊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뉴스에서 연신 말하듯 고령의 노인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부둥켜 우는 모습들이 마음을 짠하게 했다.

  “할머니는 저렇게 울진 않았을 거야. 별로 안 애틋했어.”

  남북정상회담이 확정되기 전에 이산가족 상봉 추진이 있을 거라는 걸 알았다. 작년부터 적십자 관계자들의 연락과 방문을 받았으니 이산가족과의 만남은 준비가 오래 걸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남북 생존자 명단이 교환될 즈음 북에는, 할머니의 사망 소식이 전달되었을까. 돌아가시기 전에 동생은 한번 보시겠구나 했지만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이산가족 상봉단이 되지 못했더라도 아쉬울 것 없었을 거라는 이 위안은 할머니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살아 계셨다면 동생을 만나고 가셨을 텐데라는 아쉬움은 내가 갖는 것이니까.  

  아버지는 외사촌들의 소식을 자유롭게 알게 될 날이 올까. 북에서는 아무도 편지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외삼촌의 생존 소식조차도 전해받지 못했다. 남북 이산가족 만남의 정례화를 계속 이야기하고 있지만 어떤 매체들은 그런 것조차도 탐탁지 않게 이야기한다. 이산가족들의 사연들이 소개될 때마다 아직 만나지 못한 이산가족이 많다는 것을, 남아있는 가족보다 이미 사망한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듣게 된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이산가족’은 없어지겠지만 그 쓸쓸하고 슬픈 마음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삶의 시작은 기쁨이지만 삶의 결말은 결국 슬픈 것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기억나는 건 제목과 이 문장이다. 때로 이 제목이 맴돌 때가 있다. 소설은 참 쓸쓸하면서 따스했다는 기억을 준다. 삼 년 동안 길 위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이야기하며 친구를 맺은 ‘나’가 그들에게 띄우는 편지. 단 한번이라도 답장이 온다면 여행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는데 아무도 ‘나’에게 편지하지 않는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함께 한 눈먼 개 와조와 전전하며 하루의 마감때 쓰는 편지는 그날의 여행과 가장 잘 맞을 것 같은, 잘 이해해 줄 것 같은, 편지를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해줄 것 같은 사람에게 띄운다. 여행 중 만난 사람을 번호로 기억하는데 자기 책을 파는 여자 소설가 751과는 여행을 함께하기도 한다.

  ‘나’는 편지를 쓰는 것만큼이나 편지가 왔는지를 확인한다. 우체통이 비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마다 ‘나’는 절망하지만 다음 날이면 다시 편지가, 답장이 오기를 기대한다. 서로 교감하고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맞닥뜨리고 위로하기도 했는데 소통했는데 답장을 하지 않는 일련번호들. 할아버지 장례식날 받은 연인의 이별통지처럼 ‘나’만 그들에게 일방통행의 소통을 했던 것처럼 아무도 편지하지 않는 3년여의 나날. 모텔이 꽉 차는 날 고시원에 묵다가 화재로 겨우 살아나기도 한다. 기력이 다해 가는 와조 때문에 아무에게도 편지받지 못하지만 집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돌아온 집에서 와조는 ‘나’의 곁을 떠난다. 편지를 받기를 원하는 집엔 ‘나’를 맞이한 편지도, 가족도 아무도 없다. 

  ‘나’가 와조와 함께 이렇게 편지여행을 다니게 된 시작에는 ‘나’의 지독한 외로움이 담겨있다. 고통과 고독과 절망의 순간을 견뎌가는 ‘나’의 여행의 끝이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기를 기대하는 만큼 세상에 혼자이고 싶지 않은 ‘나’가 간절히 열망하는 것은 교감이다. “진정한 외로움은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게 아니라 둘이 있어서 외로운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 ‘같이 있다’가 아니라 ‘같이 나누다’이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이 끝없이 확장되는 일련번호에게 가 닿았으려나.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는 10년쯤 전 출간된 소설 제목이 기억나는 건 ‘나’가 여행에서 만나는 수많은 일련번호들처럼 번호표를 달고서 가족을 기다리는 이산가족의 사연들이 오버랩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들도 이렇게 한번 만나고서 돌아가면 간절히 서로의 편지를 기다리겠지. 그러나 받을 수 없었던 편지, 그로 인해 절망하고 그러나 또 희망하면서. 우리 할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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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민정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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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 

세실, 주희[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젊은작가상 9년. 그동안 보아오던 낯익은 이름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올해 수상작가의 단편 한두편을 읽었으니 이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대거 신입사원을 만난 듯한 기분과 함께 세월이, 이렇게도 흘렀구나 싶었다. 점점 깨닫게 된다. 내가 살아온 경험치가 소설속 현장을 이해하는데 모자라다는 걸. 생각을 더하게끔 하는 소설속 주요 ‘사건’을 직접 겪거나 지근거리에서 보거나 몇 명에게서 전해 들었는데 언제부턴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직업이나 행동반경이 그리고 사고방식이 어느 정도 ‘상상’을 동원하게끔 하는 ‘현실’에 있다. 분명 현실인데 내가 경험한 현실과는 조금 떨어져 있다고 느낄 때 아, 세월, 나이, 이해, 그런 것들이 생각난다. 내가 살아온 그 틀에서 기본적인 이해를 하게 될 텐데, 이때의 나의 이해란 얼마나 보잘것없음일까, 아니 구시대적인 것일까. 이런 기분들로 인해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세실, 주희」속 대사를 빌려, 이번 작품집을 읽은 끝이 고작 나이듦을 느끼는 것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나도 너처럼, 주희가 여행 내내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었다. J처럼 무람없이 외국 사람들과 어울려보고 싶었고, 그들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 끝이 고작 포르노 영상이 되리라고는 주희는 예상하지 못했다.


  박민정 작가의「세실, 주희」에서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은 동일한 경험을 통해서임을 새삼 실감했다. 감정이입과 이해의 깊이에 개입되는 동질감의 차이가 있음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한 조건이 아니라는 것도. J와 주희와 세실의 경험이 병렬적 구조로 구성된 이야기는 흥미로웠지만 폭력을 당한 느낌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주희에게서. 주희는 뉴올리언스 마르디 그라 축제에서 겪은 끔찍스러운 경험으로 인해 안내자이기도 했던 J에 대한 반감을 가진다. 타문화에 대한 동경과 J에 대한 선망이 어우러진 여행의 예상치 못한 결과는 당혹스러움 이상이었다. 하지만 주희는 그 상황을 복기하며 ‘모든 게 내 탓이오’ 쪽으로 무게 짓기도 했다. 포르노 영상의 피해자가 하게 되는 반성은 늘 안타깝고 화가 난다.

  주희가 깨달은 바는 단지 그것만은 아니고 주희가 겪은 일과 세실이 겪은 일은 커다란 차이가 있지만 소설에서 두 상황을 병렬선상에 놓고 있으므로 주희를 통한 세실의 경험은 또 다르게 다가온다. 어쩌면 주희가 J를 통해 통렬히 깨달은 것을 세실에게 전가하는 것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배려를 가장한 무심함, 상황을 인지하면서 행하는 가해를 알기에 느끼는 공포였을지도 모른다. 좀더 ‘친절’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주희가 당한 그 불편하고 부당한 경험이 확산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전쟁영웅의 후손으로서 세실이 참여하게 되는 위안부 집회에 대한 정확한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더 타당했으리라 제대로 된 역사인식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강박 또한 있었을지 모른다.

  그랬어야 한다고,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주희에게 은연중에 질책하는 나를 보고 적잖이 당황스러웠다면 삶의 어떤 문제들에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한 다음, 그것으로 끝내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오지랖이 넓지도 않거니와 정의감이 투철하지도 않고 더하여 어느 정도 소심함마저 지녔다면 주희와 다를 리 없었을 거라는 깨달음, 굳건히 박혀 있는 집단의 이데올로기, 내가 아는 선에서의 이해, 그럼으로 인한 타인에 대한 몰이해, 그렇게 행하는 방관 내지 폭력. 내가 살아온 경험이 이미 굳어진 시각과 행동패턴의 나를 만들어 냈고 타인을 이해해보고자 경험타령을 해본다 한들, 그것의 온전한 이해는 나를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을 거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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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형식을 만든다

 

 언론에서 뜨고 있는 작가라며 지인들 사이에서 작가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받은 작가에 대한 인상은 소설을 읽어가면서 전혀 달라졌다. 일단 언론은 이 작가를 전혀 소설에 관해 교육받지 않은 노동자 작가로 소개했고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글이 이미 온라인에서 엄청난 호응을 얻어 책으로 출판된 작가이며, 이미 써 둔 글도 300편이 넘고, 기존의 소설 형식을 파괴하는 그동안 없던 새로운 작가라고 홍보했다. 작가와 글에 대한 소개만으로는 ‘노동’쪽에 방점을 두고 있어서 노동소설의 계보 쪽으로 생각했더랬다.

  소설을 읽고 나서 왜 언론은 작가를 계속 ‘노동자’ 작가임을 강조하는지 그것이 커다란 차별점이자 특성인 듯이 소개하는 것인지 의아했다. 장정일 작가가 등장했을 때 중졸임을 강조하는 것과 같은 맥락일까. 이미 게시판에서 커다란 호응을 얻은 글이 출판되기는 쉬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호응을 바탕으로 독자층이 구비되고 더 많은 독자로까지 확산되었을 김동식 작가의 책들을 한번에 읽었다. 그만큼 쉽게, 빠르게 읽힌다.

  강조하듯 익숙하게 보아오던 소설의 형식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은 익숙하게 보아오던 인터넷 게시판의 글과는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우화구나, 세태에 대한 풍자가 재밌고 옹골차기에 흥이 솟았고 삶에 대한 반성과 깨달음을 지속했다. 문장이나 구성의 힘 보다는 SF, 판타지가 가미되어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형태가 기묘하게 흐르는 것이 재밌는 요소라고 느꼈다. 

 최근 짧은 소설 역시 인기 있는 추세가 되었고 소설이라고 하면 생각되는 익숙한 패턴 또한 다양화되기도 했다. 김동식 작가 역시 이렇게 익숙한 소설 패턴을 벗어난 작가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작가의 책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이야기 한편 한편의 틀은 같다. 그러니까 김동식 작가 자신만의 소설 형식, 틀을 구사하고 그 틀에서 이야기의 내용을 바꾸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겠다. 흔히 한 작가의 책을 한번에 읽게 되면 작품마다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문장, 이야기, 구조를 보게 된다. 그것이 김동식 작가의 작품에서는 뚜렷이 나타나, ‘새롭다’는 말이 무척이나 식상하게 느껴졌다.

  인터넷 공포 게시판에 글이 올라왔다고 하는데 대다수의 글들이 ‘공포’에 어울린다. 현실의 모습을 풍자한 글들이 한창 펼쳐지고 있었을 때에는 더더구나 엄청난 공포였으리라. 세상은 회색빛에 요괴가 가득하고 주위엔 온통 김남우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온 정신으로는 버틸 수 없으리라 여겨지다가도 과연 ‘온 정신’이라는 게 어떤 상태인가고 묻게 된다. 적어도 이런 세계를 잘 컨트롤 하는데 ‘김동식’이라는 작가가 어울릴 거라는 생각을 한다. 작가 자신이 개척한 익숙한 패턴의 반복이 아닌 소설이라는 형식에서 익숙한 형태로 글을 쓰면 작가의 글은 어떤 묘미를 지닐까 궁금해진다. 300편이 넘는 글을 써두었다니 4~5개월 사이에 다섯 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이미 써두었던 이 책들이 출간되고 난 이후의 글, 그 글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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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러스크로노스
윤해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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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어둠

코러스크로노스, 윤해서 저, 문학과지성사, 2017.2.24.


  테 포케레케레,라 말하는 아프리카 원시부족의 존재가 궁금해진다. 그 부족은 아프리카의 어디쯤에 살고 있을까. 하고많은 말 중에 ‘테 포케레케레’를 전한 것인지, 그곳의 말을 ‘얻은’ 작가는 이 말만을 각인하고 왔는지를 알아야 할 것 같다. 마치 소설의 모든 문장들이 그 부족의 언어인 것처럼 이질적이게 느껴지는 글들. 테 포케레케레, 미지의 어둠. 모든 문문장이 미지, 낯선 나라의 언어를 마주한 듯하다. 부족원들은 열심히 말하고 손짓하지만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고 뜻을 유추하지만 아직은 명확히 소통하지 못할 서로의 언어. 그리하야 소설의 문장은 음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코러스크로노스. 시간합창. 소설 속에서는 어느 골목에 위치한 건축물의 이름이지만 무한한 공간이자 상상의 공간에 가깝다. 이곳에 들어서면 시간은 잊어먹게 되지만 시간을 의식하게 된다. 현실감이 떨어지는 시간에 대한 인식만이 남아 미래의 공간이 아니라 오래 전의 시간을 여행하고 있는 듯한, 문명과 떨어져 있는 듯한 생각에 빠진다. 미래가 아닌 과거의 시공간에 머무른다 함은 완전한 미지와는 또 다르다. 그 실체를 경험해보지 못하였을 뿐 수많은 문자와 이미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이다. 하지만 그곳에 서서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알고 있다’는 것이 허구임을 알게 된다. 익숙한 것에 기대어 의미를 읽어내고 표현한다 한들, 알 수 없는 것들이 흘러오고 흘러나오고 그리하여 내뿜을 수 있는 말들은 의미조차 지니는지 알 수 없는 음률들. 그리고 이미지. 그럼에도 그 세계에는 여지없이 폭력이, 죽음이, 독재가, 지진이, 테러가, 위기가, 존재했다. 그토록 어딘지 모를 곳을 돌고 돌고 돌고 돌아서 들어갔음에도.


    때마침 얼음의 얼굴에 어른거리는 물그림자.

    불행한 사람들이 꿈꾸는 방식.

    여행.

    죽은 붕어가 세상을 뜬다.

    말로의 말로. 죽은 붕어가 물에 뜬다.

    그래서, 그러므로, 그리고, 그러나, 그런데.

    모든 접속 부사들 속에 ‘그’

    내가 속해 있어.

    나는 말로의 말로. 문장과 문장을 연결한다. 문단과 문단을 연결한다. 부채와 부채를. 부재와 부재를. 이 도시의 말로. 나는 당신과 당신 사이에.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잇닿아 있다.

    말로의 말로.


  언어의 묘미를 한껏 살려 결국 언어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가진 익숙한 언어를, 구조를 작가는 해체하고 작가가 준 몇 개의 단어에 의지해 문장을 생성하여 독자는 의미를 읽는다. 한없이 시간으로 들어가지만 시차에 부딪친 듯 어지럽고 몽롱해진다. 아직 아프리카 원시부족의 말들을 다, 헤아리지 못했다.


말이란 결국 환멸입니다. 많은 경우 환멸이죠. 그렇지만 그 환멸의 힘으로 밀고 가는 삶도 있는 겁니다. 환멸에 떠밀리는 시간도 있는 거죠. 우리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말을 많이 하고 삽니까. 우리가 얼마나 안 해도 될 말을 많이 하고 삽니까. 동생은 안 해도 될 말을 오래 하고 있었다. 동생은 말로, 끝없는 말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뱉어지자마자 사라지는 말로. 동생은 존재했다.

     

  이렇게 갈라진 언어로 이 죽음의 시간을, 공포의 시간을, 우울의 시간을 위로할 수 있을까. 뜻을 알 수 없는 노래로 의성어로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동일한 언어를 사용함에도 말이 가닿지 못하는 시간들을 되돌려, 이렇게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를 건네며 그 속에 표정을 담고 그저 음률을 담아 시간을 흘러가는 것도 좋으련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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