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제8회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백수린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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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빌라에 갇혀

2018 제8회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과지성사, 2018.


  몇몇 작가는 다른 작품집에서 본 단편이 수록되어 있고 몇몇 처음 보는 작가가 있다. 문지문학상 작품집에서 본 소설은 다른 문학상 작품집에서 본 소설들의 흐름과 두드러지게 다른 파노라마를 그린다. 대체적으로 한두 편 정도인데 문지문학상은 절반 이상이다. 작가들의 인터뷰가 실려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돋운다.

  열한편의 단편이 이 계절의 소설로서 계절로 나뉘어 있는데 계절의 느낌을 담았나, 계절과의 연관성이 무언가 생각했더니 단지 매 계절마다 출판사에서 작품을 뽑는 이름이었다. 아무튼 계절이랑은 상관없었다. 사촌동생이 작품집 제목을 보더니 ‘여름의 빌라, 제목이 좋다’라고 했다. 평범한 제목이자, 일상의 말인데 어떤 면에서 좋다라고 느끼는지 궁금했다. 묻질 못해서 답을 못 들었지만, 그냥 막연하게 여름의 빌라라는 제목을 반복해 본다. 이 작품집에서 유난히 걸리던 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한부분이 걸리자 좀체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해버린 감정이 여름의 빌라에 있었다.

  문지문학상은 수상작은 백수린 작가의 「여름의 빌라」. 서간체로 써내려간 소설은 주아가 스무살에 만난 독일인 노부부를 삼십대에 다시 만나 남편과 함께 캄보디아에서 여름휴가를 보냈던 시간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노부부와 주아의 오랜 우정이 한순간 깨어져버리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은 주아 자신의 눈일까. 남편 지호의 눈일까.


레오니를 제외한 우리 넷이 나란히 앉아 발마사지를 받던 밤. 나는 나의 피부색이 당신의 피부색보다 어둡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어요. 그리고 나의 피부색은 내 발을 정성스레 닦아주던 젊은 안마사의 피부색보다는 밝았지요. 나는 그 사실에 대해서 그날밤 골똘히 생각합니다. 앳된 마사지사는 무릎을 꿇고 우리의 발을 박하와 레몬으로 정성껏 문질렀습니다. 한국에서였다면, 마사지를 해주는 사람이 한국인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불편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나는 그 후로 승합차를 타고 가며 보는 풍경들, 허름한 집들이나 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툭툭 같은 것들을 보는 일이 괴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이 소설에서 주아가 갑자기 인식하는 ‘인종’에 대한 의식과 그에 대한 지호의 적대적인 감정은 상당히 불편하다. 한스가 캄보디아 사람들의 낙천적인 삶과 천성을 경이롭다고 할 때 지호는 캄보디아의 가난을 이야기하며, 독일인의 자격을 따지며 격렬한 반응을 보인다. 지호는 평소 윤리와 실존을 떠들던 베레나가 보기엔 ‘반듯한 도덕관념’을 지닌 사람이다. 하지만 내겐 ‘삐딱한 도덕관념’으로 느껴지는 이 모든 행동과 말들은 단지 지호뿐만 아니라 주아에게서도 느껴진다. 지극히 관념적인 도식을 한국의 젊은 부부는 가지고 있다.

  캄보디아 마사지사로 인해 인식된 피부색의 차이로 거리감과 불편함을 느끼는 주아는 한국이었다면, 한국인이었다면 불편한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 캄보디아 마사지사가 그들에게 마사지를 하는 일은 자본의 일이지 인종의 일이 아니다. 가난한 나라 캄보디아, 그곳에 사는 캄보디아인 모두는 가난하고 불행한 인종으로 분류하는 지호와 주아에겐 캄보디아 보다는 한국이 한국보다는 독일이 더 우위에 있는 나라이며 국민으로 인식되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독일인이라는 것, 전범 국가의 국민이기에 한스 부부를 현재의 가해자로 인식해버린다.


폭력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은 폭력 이외의 수단을 갖지 못한 자들뿐이라고.


  폭력에 대한 지호의 말이 얼마나 허황되게 들리는가. 그렇게 지호와 주아라는 개인이 한스 부부에게 개인적으로 가하는 잔인한 폭력의 말은 폭력에 대한 관념적 인식에 골몰하는 지호의 의식에 환멸을 느끼게 한다. 한국에서 마사지를 받았다면 지호는 계급의식으로 인해 반듯한 도덕관념에 의해 힘들어 할까.


당신은 우리가 함께 타프롬 사원을 걸었던 날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난 2016년 12월 이후 당신은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쉽게 폭력 앞에 소멸되는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고요. 하지만, 주아. 당신은 그렇게 덧붙였습니다. 긴 세월의 폭력 탓에 무너져 내린 사원의 잔해 위로 거대한 뿌리를 내린 채 수백 년 동안 자라고 있다는 나무. 그 나무를 보면서 나는 결국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한스부부가 캄보디아인의 삶을 여유와 낙천으로 보며 동경화한 건 테러 피해자로서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솔한 감정의 발로였다. 이 지극히 관념적인 도식 속에서 언뜻 비장하고 비판적이며 자신의 생각의 틀에 맞추어 사고하는 지호에게서 룸펜의 모습이 떠오른다. 세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그 끈끈한 지호의 지배적 사고에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것, 그런 시각으로 지호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무심히도 상처를 주고 있는지를 ‘반듯한 도덕관념’의 소유자는 알까. 자기 세뇌에 빠진 채 머리로만 인식하다 보면 얼마나 많은 것을 잘못보고 판단할 수 있는지 느끼게 된다.

  노부부가 캄보디아 마을에서 느낀 그 감정이 어떻게 연유한 것인지를 알게 될 때 국가와 인종에 대한 일반적인 도식으로 에워싸면서 개인, 타인의 삶에 대해 얼마나 몰이해하고 있는지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타인을 바라보는지를 생각하며 끝끝내 불편하게 자리한 지호가 주아가 걸려서 나가지 않는다. 내게 있는 그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여름의 빌라에 갇혀 최근 소설에서 보지 못한 다른 스타일의 소설들에는 덜 눈이 갔다. 한참을 지호에게 소모적인 감정을 발산하고 났으니 선을 지우고 다른 아이를 받아들인 레오니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빌라에 갇힌 이 마음을 풀어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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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의 식탁 오늘의 젊은 작가 19
구병모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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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없는 식탁

네 이웃의 식탁, 구병모, 2018.


  제목을 본 순간부터 ‘네 이웃’의 ‘네’는 자동적으로 인칭대명사로 인지됐다. 소설을 읽으면서 식탁을 둘러싼 네 가족의 이야기임을 알았으니 ‘네 이웃’은 숫자 4의 의미도 있다. 내 이웃이 넷이라는 건 축복일지 악몽일지 모를 일이다. 살아보지 않는다면, 겪어보지 않는다면.

  EBS 한국기행은 한국의 자연환경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다룬다. 이런 이야기에는 도시 생활을 접고 시골로 정착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웃과 더불어 함께 행복한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모습을 이상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럴 때면 그 모습에 현혹되어 그 삶속으로 뛰어들고 싶어진다. 그것은 좋은 것 이면에도 그냥 사람으로서의 삶이 있다는 것은 잊어버리고픈 꿈꾸고픈 아름다운 꿈, 삶이었을 것이다. 그곳에서의 역할이 있음을 간과한 채로 그저 모든 것이 아름답게 꾸며놓아진 식탁일 거라고 기대하는.

  이 소설을 통해서 그 식탁에 대해 좀 더 현실적인 생각을 더했고 꿈꾸기가 다소 파괴되었다. 그러나 분명 내 가정의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지역의 공동체 또한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격하게 깨닫게 된다.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건 웬만한 소음은 배경음악으로, 어수선한 광경은 손닿지 않는 액자 속 풍경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꿈미래공동실험주택.” 어딘가에서 이뤄지고 있을 것 같은 이 공동주택은 저출산 국가에서 세 명 출산을 조건으로 입주가 가능한 곳이다. 저출산 사회이기에 TV에서는 연일 다자녀 가족의 삶을 보여주고 있지만 실제로 아이 세 명은 굳건한 결심이 있지 않고서야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또한 이 나라는 내 집 하나 마련키 어려운 곳이니, 안정된 주거를 갖춘다면 행복은 덤이 될 것만 같은 내 집 없는 설움과 고통에 놓여 있으니, 어떤 방법이라도 깨끗하게 새로 지은 내 집을 가질 수만 있다면 아이 셋쯤이야, 하며 아직은 교통이며 제반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도심에서 벗어난 이 주택에 입주를 꿈꾸는 이들이 있다.

  요진과 은오, 단희와 재강, 효내와 상낙, 교원과 여산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 네 가족이 그랬다. 각각의 생활방식이 다르지만 공동주택에 놓인 커다란 식탁 위에서 그들은 연신 ‘함께’ ‘같이’를 외치며 공동체 생활의 첫 활동과제로 공동 육아를 시행한다. 공동 육아의 현장에서의 역할만큼 각자의 삶을 채워야 하는 이들은 일터로 나간다. 네 가족 중 세 명의 아빠와 한 명의 엄마가 일터를 향하고 식탁엔 세 명의 엄마와 한 명의 아빠가 앉는다. 한 명의 엄마 효내는 어린 아이를 돌보고 며칠을 밤새워 하는 일로 인해 공동육아 시간에 딱 맞게 참석하는 것이 힘들고 어렵다. 한 명의 엄마 요진은 멀리 일을 하러 가기 전 공동 육아에서 해야 할 일을 담당하느라 힘들고 지친다. 남편 은오는 집에 있지만, 가사일을 도맡아 하지 않는다. 공동 육아에 찬성한 은오는 그것이 마땅히 해야 할 공동체 생활의 일이고 빠질 수 없노라 얘기하지만 자신의 역할을 찾아서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단희는 은오에게 기대하는 바는 낮고 이해하는 듯 보이지만 효내에게는 못마땅함을 감추지 않는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사이에서 여섯 살 시율이가 동생들을 챙기는 모습은 자연스러운 모습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길들여진 것일지도, 기대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함께, 같이의 역할에서도 아이를 돌보는 일에는 성역할이 명확히 구분되는 것일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관절과 같은 것이라 활액이 없이는 삐걱거리며, 그에 따른 통증과 불편을 실제로 느끼고 감당하는 쪽이 으레 따로 있다는 게 단희의 주된 불만이었다. 어디까지나 뭔가 인사를 못 얻어서가 아니라 공동주택에 살면서 그 정도가 최소한의 상식과 도리라고 단희는 믿었다.


  각자의 가족이 지닌 생활의 무게, 그것이 각자의 문지방을 넘어 식탁으로 오르는 일은 순식간이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잘 해나가려 하지만 요진도, 단희도, 효내도, 교원도 타인의 행동이 내 마음과 같지 않을 때,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다. 공동체라는 이름하에 각자가 행해야 하는 “최소한의 상식과 도리”는 무엇이고 얼마만큼일까. 각각의 사람을 대하는 스타일과 타인에게 느끼는 친밀감의 속도와 정도가 다를 진대 우리는 이 간극을 어떻게 좁혀갈 것인가.


요진이 불편하고 불쾌하면 곧 그것이 선을 넘는 일이었다. 그러나 요진은 가능한 한 ‘누가 봐도 이상하며 그럴듯하지 않은’ 일에 반응하고 싶었다. 해석의 방식과 범위에 따라 불쾌지수가 널뛰는 일에 낱낱이 발끈함으로써 서로에게 개운치 않은 뒷맛을 초래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피곤한 여자로,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달려드는 예민한 이웃으로 간주되기 싫었다. 좋은 게 좋은 줄 알며, 사소한 농담에 호응해 주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회인이 되는 게 바람직했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이 가족들의 공동체에 대한 열의는 공동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리고 공동체에서의 최소한의 상식과 도리에 대한 인식만큼이나 가정에서의 최소한의 상식과 도리를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느끼게 된다. 가정은 공동체라는 보이는 식탁을 장식하기 위한 꽃이 아닐진대 보여지는 면에 의식을 두다 보면 정작 잘 가꾸어야 하는 가정은 조용히 이지러지게 된다. 내 가정의 안락한 삶을 무시한 채 타인의 가족과 어우러진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내 가족에게 배려가 부족한데 타인에 대한 무한 배려와 이해가 가능할 수 있을까.


기중기를 동원하지 않고는 어려워 보였을 뿐더러 왠지는 몰라도 이 공간은 이렇게 활용해야 마땅한 곳 같았다. 어떤 효용이나 합리보다는 철저한 당위가 지배하는 장소.


  우리는 공동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실천에 대한 의지없이 ‘공동체’라는 단어 자체에 함몰되어 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저 그것 자체로서 절대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을 이루어가는 각각의 주체들을 배제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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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스피드
김봉곤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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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픽션을 읽을 때의 곤란함

여름, 스피드, 김봉곤, 2018.


  여섯 편의 중단편은 전체적인 틀에서 연결되게 느껴졌다. 소설에서 반복되는 단어는 사랑과 글쓰기였는데 사랑을 해서 글쓰기가 된 것인지 글쓰기를 하기 위해 사랑을 하는 것인지 애매할 정도로 둘은 분리되기 어려웠다. 누구나 사랑을 하면 시인이 되고 작가가 된다고 했다. 사랑을 하면 세세한 것 하나라도 기억되고, 잊히지 않고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모든 사랑하는 자의 심리가 아닐까. 또한, 사랑하다 헤어진 이들의 마음도. 사랑과 사랑하는 이에 대한 글쓰기, ‘글을 쓰고 그를 쓰는’ 이야기라서 독립적인 서사가 애매한 모든 ‘그와 나’에 관한 이야기는 '나'를 제외한 등장인물 모두에게 몰개성이 느껴지게 했다. 

  또 이런 말들이 있다. 모든 사랑하는 연인들은 진지하고 심각하지만 보는 이들에게는 유치하고 그저 그런 연애사라고. 그래서 여기, 소설속 사랑이야기가 그저 그런 연애사로 보인다. 그 연애사를 절절하게 묘사하지 않기에 작가의 심리에 다가가지 못함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작가의 의도라고 봐야하는 걸까.

  이 소설은 제목만큼이나 스피드하게, 그리고 가벼이 읽혔다. 공부중인 '나'의 현재 고뇌는 ‘그와의 사랑'에 집중되어 있고 ‘그’와 사랑하기 전에도 사랑 중에도 사랑 후에도 '나'는 허세가득한 글에 매몰되어 있다. 섬세한 사랑의 결은 어디로 흘러가고 자의식의 과잉으로 보이는 일기 같은 기록이 남는다.


그는 나의 거짓 과제를 보고서도 나의 글쓰기에 대해 비난했다. 넌 이런 식으로밖에 쓰지 못해. 그건 너의 무능력을 증명하는 길이야. 헛웃음이 나왔다. 미니멀리즘에 대한 신물나는 애정, 그가 말하는 글쓰기의 기본인 행동하기, 보여주기, 외화(外化).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글쓰기가 선이라 생각했고, 그것을 강요했고, 아니, 그 이전에 자신이 옳다는 생각을 결코 굽히지 않았으며, 그것이 결국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말했다. 보여주기보다 말하는, 행동하기보다 의식을 좇는 나의 글은 그의 눈엔 그저 멋부림에 불과했다. 교수 자신은 거리낌없었던 전위나 실험을 내가 하는 것은 객기였다. 그럴지도 몰랐다. 그러나 내가 무릅쓴 것에 대해 그렇게 쓰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것은 분명한 오만이며 강요라고 생각했다.


  나도 일종의 ‘교수’가 되려나. 이 전위와 실험의 글쓰기를 객기로 보는. 그러나 나와 같은 ‘교수’만 있었다면 작가는 신춘문예에 당선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신춘문예 등단작 「Auto」의 심사평―“퀴어의 사랑과 이별, 기억, 시간, 장소, 글쓰기 등의 다양한 무늬를 점프 컷과 소격효과 등의 기법을 통해 노스탤지어라는 캔버스에 개성 있게 그려낸 작품”―은 여전히 이해가 쉽지 않으며, 홀로 이 소설에 대한 이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건가 싶은 생각에 두리번거리게 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내 스탈이 아냐”를, “문장과 서사들이 나에게는 맛깔스럽지 않았어”, 이런 말을 충분히 할 수 있을 텐데 이 문장 하나를 쓰기 전에 변명같은 말들을 먼저 꺼내게 되는 이유에 대해.

  소설의 차별점이 무언가를 생각한다. 사랑과 글쓰기가 소설 전반의 내용이라 했지만 그보다 이 여섯편의 소설을 지배하는 건 퀴어, 라는 단어 아닐까. 시작부터 끝까지 ‘보편적이지 않은’ 퀴어의 사랑이야기가 작가 자신의 이야기, 그리하여 자전적 체험을 소설화한 것이 차별화되는 지점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소재의 차별화라고 할 수 있지만 소설의 매력이나 색다름과는 구별되는 것이고 소재를 어떻게 ‘소설적 형상화’ 하여 독자의 마음에 와 닿는가는 다른 문제이니, 내게는 강렬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어떤 면에선 남동생의 일기장을 들여다본 기분이 들기도 했다.


오토픽션을 쓸 때의 부끄러움은 사생활이라 여겨지는 나의 내밀한 삶과 생각을 밝히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이 진실된 문장과 이야기인지, 어떠한 감정을 추출하고 획득해내기 위한 작위가 없었는지―나와 독자에게 모두―에 대한 경계심에서 비롯되는 감정으로, 꾸밈을 유혹받는 데서 오는, 혹은 필연적인 착오를 무릅써야 한다는 한계에서 생기는 부끄러움이다. 또 언제나 문학과 남자로 수렴되고 마는 나의 편협함에서 생기는 가벼운 수치심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글 읽기/쓰기와 남자, 절대 끊을 수 없는 것.)


  이 소설 스타일이 맘에 들지 않아라는 말을 하기에 왜 이다지 껄끄러운 느낌이 드는가 했는데 거듭 소설에서 작가를 분리하기가 어려워서인지도 모르겠다. 전혀 아는 바 없는 작가인데도 ‘오토픽션을 쓸 때의 부끄러움과 곤란함’을 느끼는 작가와 마찬가지로 타인의 오토픽션을 들여다볼 때의 곤란함이 솟구쳐서인지도. 그리하여 나는 이것이 소설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자칫 작가에 대한, 평가로 비쳐지는 건 아닌가 우려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타인의 삶을 천천히 음미할 수 없을 것이란 불안과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누군가를 한입 가득 집어넣고 게걸스럽게 해치우는 짓은 그만하고 싶었다. 그것이 쓰든 달든 아주아주 천천히, 이번에는 꼭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첫 소설집이니 다음에 작가의 소설에서는 이러한 ‘불안과 강박에서 벗어나’, ‘스피디하게 읽어 해치우는 것’이 아니라 ‘쓰든 달든 아주아주 천천히’ 읽을 수 있을까. 다음번에는 꼭,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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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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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밀기 

경애의 마음, 김금희, 창비, 2018.


  양희와 필용이 다시 등장한 듯했다. ‘반도미싱’ 팀장과 팀원, 공상수와 박경애. 양희같고 필용같은 경애와 상수의 너무한 남의 연애사. 옆에 이들이 있으면 참 재미있겠다, 생각들만큼 그들의 그네밀기를 보고 있으면 미소가 지어진다. 

  소설의 필연이 주인공들의 운명적 연결고리이기에 경애와 상수도 과거부터 이 줄을 서로 쥐고 있었다. 그러나 소설은 사건보다는 사건의 이후의 감정과 생각들을 풀어내는데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마음이랄까. 누군가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조금만 열어보면 어떤 일들에 대해서 같은 마음으로 아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행복해하고 그리워하고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호프집 화재사건에서 친구들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경애와 그 사건으로 친구를 잃은 상수에게는 이때부터 이미 ‘같은’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경애 엄마는 경애가 씻는 것, 머리를 감고 이를 닦고 세수를 하는, 누구나 하루에 한번쯤은 귀찮아도 후다닥 해내는 그런 일마저도 너무 무거운,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남들에게는 자신을 방치하는 일이고 자신에게는 최선인 그런.


  상실에 상실이 더해진 경애가, 그러니까 오랜 연인과 이별하고 무력감에 빠진 경애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건 페이스북에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었고 형의 학대와 일찍 어머니를 잃은 상수의 상처, 직장에서의 냉대와 배제, 낙하산이라는 굴욕이 더해진 상수가 하는 일은 ‘언니’로서 페이스북에 상담 솔루션을 해주는 일이었다.

  7~80년대의 공장과 오버랩되는 ‘반도미싱’은 그시대를 살고 있는 것처럼 당연하게 부당한 운영들을 일삼고 이에 맞서 파업하는 이들 속에 경애가 있다. 부당하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처럼 연애와 사랑, 관계에 관해서도 경애는 부당함을 말하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움직이고 행동할 수 있을까.

  경애의 흘러가고 복잡하게 오가는 이 마음들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상실의 기억에서 같은 마음으로 절절해진다. 내면의 섬세한 감정들이 작가의 독특한 문체의 결에 얹어져 『경애의 마음』은 명쾌해지지는 않는데도 불구하고 뭔가 포근해진다. “아무리 꽉 엎드려 있어도 경애가 만들 수 있는 어둠에는 한계가 있는” 경애의 힘인가.


그러자 세상은 어느 맥락에서 그렇게 순해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영은 복날이 되면 야산의 개들도 그때쯤 사람들이 자기를 잡으러 다니는 걸 알아서 더 깊은 산속으로, 도시의 외곽으로 달아난다고 했다. 그러다가 여름의 고비가 지나면 도로 밑으로 내려와 무리를 지어 달리면서 일영 같은 외부인들을 경계하면서 쫓고 그사이 또다른 개들을 낳기도 하다가 문득 일영이 건네는 먹이로 배를 채우기도 한다는 것. 그렇게 해서 개들도 순해지고 수도검침원도 순해지는 시간. 누구도 상처받지 않은 채 순하게 살 수 있는 순간은 삶에서 언제 찾아올까.


  한계 경애의 힘이 그런 시간을 찾아낼 것이다. 본질적으로 내재한 경애의 힘이 순하게 살 수 있는 순간으로 접목하고자 하니까. 흐르는 경애의 마음이 常數로서의 존재, 질서가 있는 상수에게로 수렴하는 시간이면 더 이상 “남들에게는 자신을 방치하는 일이고 자신에게는 최선”인 시간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남들에게도 최선인 생각과 행동으로 그들의 마음결을 찾아갈 것이다. 사는 건 시소가 아니라 그네밀기라고, 그저 각자 발을 굴려 공중을 느끼다 서서히 내려오는 것이라 말하지만 이들은 결국 서로의 그네를 밀어주며 오를 수 있는 최대의 공중을 자주 느껴가는 것이 그 순간이라는 것을 알아갈 것이다. 그것이 언제나 ‘언니’의 마음으로 살뜰히 상처받은 이들을 챙기던 상수의 마음이 가닿는 순간일 것이다.


결국 상수는 마치 추처럼 어떤 것과 어떤 것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는데 경애는 그가 그렇듯 갈등하는 것에 고유한 윤리가 있다고 느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상수는 막무가내의 이기주의자나 꼴통, 심지어 고문관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마음의 질서가 있는 사람이었고 다만 그런 자기윤리를 외부와 공유하는 데 서툰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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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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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없는 사람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문학동네, 2018.


  『내게 무해한 사람』속 일곱 개의 이야기는 누군가와의 관계가 끝나버린 시점을 찾는 이야기 같다. 각각의 이야기마다 지난 시간을 회상하는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훅 지나가는 것, 지금은 내 곁에 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없는 그 사람에 대한 회상은 좋았던, 아름답게 지냈던 날들을 기억하게 한다.

  소설이 작가의 분신이라고 하는 만큼 작품마다 작가의 분위기가 비슷하게 녹여 나오겠지만 인물들이 뚜렷한 개성없이 그가, 그녀가 다 같게 느껴진다. 모두, 같은 한자리에 모여 한가지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끝나버린 관계들에서 헤어나지 못한. 그러한 관계들이 단지 한명이 아닌 것처럼. 누군가가 의미있게 다가왔다기보다 누군가에게 의미를 부여하며 마음을 나누었을 날들이 점차 사그라지는 건 어떻게 일어나는지, 마음속 자그마한 균열이 어떻게 크게 상처로 대체되는지를 보여준다.


사람이란 신기하지.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아. 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모래로 지은 집」


  「그 여름」은 학창시절 만난 수이와 이경의 동성애를 보여주고 있지만 소설 전반에서 작가는 여성과 여성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하고 있다. 연인만이 아니라 가족, 친구 등 삶에서 의미있는 존재와의 우정, 사랑, 연대와 같은 감정들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심하게 서술되어 아픔과 상처도 더욱 깊고 길게 울린다. 


여자는 어쩌면 자신에게 삶의 무거움을 미리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자신이 세상과 인간에 대해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고, 그저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으로 그렇게 행동했는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손길」


  하지만 세상과 인간에 대해 미리 겁을 먹은 이들은 상처받지 않기 위하여 움츠리고 움츠려 있을 뿐이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누군가의 상처와 고통을 외면하거나 느끼는 대로의 진실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포장하기도 한다.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한다”는 건 관계의 진전을 이룰 수 있는 감정일까, 생각하게 된다.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고백」

 

 과거를 회상하는 자의 쓸쓸한 목소리가 전반에 울리는 소설에서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는 제목이 가진 맛깔이 좋다. 이 제목만으로 이 책이 따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다르게 읽힌다. 내게 무해한 사람이란 상처를 줄 수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에서 말하고 있지만 내게 무해한 사람이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혀 그들의 말과 행동이 내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사람들. 세상을 살다보면 힘들고 어려웠던 그 순간들이, 가장 미워하는 누군가가 가장 보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시간이 흐른 후 지난 관계들을 되돌려 굳이 상처받았던 순간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들을 사랑했던 나를 돌아보는 일이자 감정들을 회복하기 위한 일이다. 결코 그 순간을 잊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한 일이다. 상처받았던 그 순간들을 복기해 그날의 원인들을 찾아내어 자신을 반성하는 소설의 ‘나’가 단련된다면 그들은 타인의 눈빛에도 의연해 질것이다.  


그 난장판 속에서도 미주를 바라보던 무당의 표정은 슬퍼 보였었다. 아마 미주는 자신을 안타까이 보는 무당의 그 눈빛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타인의 얼굴 앞에서 거스를 수 없는 슬픔을 느끼니까. 너의 이야기에 내가 슬픔을 느낀다는 사실이 너에게 또다른 수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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