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되는 페미니즘


그녀 이름은, 조남주, 다산책방, 2018-05-25.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누군가의 글은 마음을 끌어당기고 누군가의 글을 마음을 닫아버리게 할까. 이런 경험을 하다보면 역시 글을 쓰는 이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글잘쓰는 이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일 지도. 한편으로는 ‘너는 바른 말을 해도 꼭 그렇게 싸가지 없게 들리냐’와 같은 말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 책이 하고픈 말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는다. 82년생 김지영 역시도 그렇다. 하지만 같은 말을 전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내가 왜 이 책을 읽었어야 하는가를 생각하면 다르다. 이 책은 왜 소설인가. 왜 소설이어야만 했는가에 대해 나는 아직도 물음을 갖는다. 록산 게이의 소설이 나왔을 때는 록산 게이가 그려내는 소설은 어떨까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졌고 록산 게이가 주장하는 이야기를 다른 형태로 잘 그려냈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 방식이 소설보다는 경험을 녹여낸 에세이가 더 좋았을 뿐이다. 그렇다고 소설이 나쁘진 않았다. 자신의 이야기이지만 다른 형태로, 확고하고 강하게 여성이 처한 현실과 극복방안에 관한 부르짖음을 타인의 경험을 덧대어 은유와 상징으로 엮어낸 『어려운 여자들』도 나쁘지 않았다.

  최근 100만부를 돌파했다는『82년생 김지영』작가의 이후의 책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또한 같은 이유로 읽지 못했던 이 책을 읽고 나서 생각이 정지되었다. 할말이 없다가 먼저였지만 곧 록산 게이의 소설이 생각나면서 이 책에 대해 할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별론데가 아니라, 이게 뭐지였다.

  얼핏 책 제목을 보면서 생각하긴 했지만 어쩌면 다르지 않은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는데 난 이 책에 대해 상당한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을까. 소설인가? 왜 작가는 이런 형태로 이 책을 쓰며 소설이라 이름하였을까. 차라리 소설이 아니었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삶을 실제 취재했으므로 그 자체로 이야기는 소중한 경험이고 생각거리를 준다. 하지만 소설에 기대하는 것이 어디 정확한 내용의 전달만을 바라겠는가. 어쩌면 82년생 김지영에서 느꼈던 바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회수하지 못한 마음들이 이 책을 통해 더 느껴졌다.

  82년생 김지영을 통해 작가가 우리 사회에 불러일으킨 반향은 매우 긍정적이다. 따라서 그 문제의식을 지속하고 있는 작가에게 더욱 박수를 보낼 일이다. 하지만 문제의식을 좀더 잘 형상화했으면 어땠을까. 책을 읽고 있는 내내 내가 무얼 읽고 있는가, 생각했다. 그녀들의 삶에 공감이 되어야 하는데 조금은… 딴데로 정신팔려 버린. 문학은 무엇인가와 소설과 기사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했다. 소설과 인터넷글에 대해서 생각했다. 최근에도 별별 사건이 벌어지며 특히 여성혐오가 극렬한데 개인적인 감정에 치우친 글, 잘못된 정보에 기대어 올린 상황의 한 일면만을 보고 느끼는 글이 생각났다. 많은 이들이 등장하며 나열된 글은 그만큼 사회에서 겪는 어려움과 차별은 연령과 처한 환경을 가리지 않고 끝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겠다만. 그렇기에 이 글은 르포여야 했다. 소설이 아니라. 문학에 대한 내 생각이 너무 고리타분하여,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해서인지 이 ‘소설’을 보고 있으면 글을 쓴다는 것에 회의감이 든다.

  이 책이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보이게 할까를 생각했다. 페미니즘이 소비되는 형태에 대해 생각했다. 한국사회는 오랜 동안 페미니즘에 무심했다가 갑자기 왜곡되게 흐르고 있다. 언젠가부터 페미니즘은 사회문제를 인식하는 언어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언어가 된 것 같다. 자본주의, 가부장제 사회시스템에 의해 차별과 억압받은 이들의 투쟁이자 생존의 언어가 아니라 자본주의에 의해 소비적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이 소설이 그에 대한 대표가 아닐까 한다. 그것에 기대어 기획된 듯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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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 토니오
정용준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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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다 살아진다


프롬 토니오, 정용준, 문학동네, 2018.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외국이다.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섬. 언제부턴가 한국소설에서 외국 배경은 자주, 오히려 한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구나 느껴질 정도로 나타나기에 낯설지 않다. 드라마마다 해외촬영은 당연하고 첫장면부터 이국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의 형식처럼 자리잡은 것처럼 소설 또한 마찬가지로 여겨질 뿐이다. 그저 외국이 익숙한 나라인가 아닌가의 거리감이 있을 뿐. 현실 역시도 국경이라는 경계는 형식의 선일뿐 어디든 갈 수 있고, 살 수 있고, 이야기는 만들어지기에 그저 굳이 외국 배경이 필요할까, 외국이어야 했을까 생각되는 소설이 있었을지언정 외국에 대한 특별한 환대도 배척도 없다.

  그런데 이 소설은 배경만 외국이 아니라 등장인물 또한 외국인이다. 한국인은커녕 한국계조차도 등장하지 않는다. 표지에 고래가 등장함에도 고래가 나올 것조차 예상치 못한, 아니 아무런 생각을 갖지 않고 읽은 이 책이 전적으로 배경이 외국이어야 했던 이유를 그 당연함을 소설 중반에서야 알게 된다. 그때 이 소설은 외국을 배경으로 한 한국소설에서 기억에 남을 책이 된다.

  파일럿고래 스물여섯 마리의 스트랜딩 현장, 즉 스트랜딩, 해양 동물의 집단자살 현장에서 연인의 죽음으로 스트랜딩 상태인 것만 같은 시몬은 흰수염고래의 입에서 튀어나온 기이한 생명체와 마주친다. 시몬에 의하면 사람도 동물도 아닌 이 생명체를 돌보는 것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연인을 잃어버린 화산학자 시몬처럼 슬픔으로 인한 무력함이 휘감던 이 소설이 토니오의 등장으로 기이한 활기를 띠면서 펼쳐지는 세계는 시간을 뛰어넘고 국경을 뛰어넘고 바다로 뛰어든다. 가보지 못한 세계, 미지에 대한 환상이 현실과 엮이는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그리고 토니오, 이 기이한 생명체의 존재는 이야기의 정점을 찍는다. 토니오는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처럼 쉬이 가보지 못한 심해의 공간에 대해 들려준다. 바다속엔 유토가 있고 또 우토가 있고 끝없이, 비밀스럽고 낙원과도 같이 인식되는 세계가 있음을 들려준다. 시몬이 사랑한, 실종된 연인의 소식까지도 전해주는 토니오에게는 시몬의 연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은 토니오의 연인에 대한 마음과 닮았다. 시몬과 토니오는 그것으로도 연결된다.


내가 누군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어디에서 왔는지는 말할 수 있네. 유토피아는 두 가지 어원을 갖고 있어. 유토포스(eu-topos), 말 그대로 ‘좋은 곳’이라는 뜻이지. 그리고 우토포스(ou-topos),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지. 이 세계엔 유토피아가 없지만 내가 있었던 세계엔 있지. 바다 깊은 곳에 또다른 바다가 있네. 바다의 바다라고 해야 할까. 거기에 유토(euto)가 있네. 그곳의 대기가 이렇게 황금빛이었네. 머리 위의 하늘과 흐르는 물결 속에 금이 녹아 있었지. 녹은 철과 금으로 이루어진 바다, 유토. 나는 그곳에서 건너왔네.


  알지 못하기에 상상으로만 그리는 그 세계는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곳으로만 상상되지만 유토와 우토를 알려주던 고래에 의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공간이다. 유토는 지구의 중심, 바다 밑의 바다이고 우토는 유토 속에 존재하는 더 이상 존재하고 싶지 않은 이들이 모인 세계이다. 이렇게 바다 속에서 또 수없이 공간의 공간이 존재하지만 본 적이 없는 세계이기에 막연한 상상으로만 이미지를 그리게 된다. 그곳은 그저 알던 세계와는 다른 곳, 그러나 어쩌면 유토피아는 아닌 곳이다. 그들에게 유토피아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 바로 그곳일테니까. 그리하여 토니오가 최종적으로 가고자 하는 곳, 그곳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다.

  전체적으로 몽환적이며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이들이 그들 스스로도 반신반의하는 이른바 과학자들이다. 지각현상을 연구하는 화산학자, 지진학자, 해양학자, 그리고 의사. 대체로 우리는 과학자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 사고로 증거가 없는 비가시적 세계에 대해 믿지 않는다 생각한다. 이런 과학자들이 토니오가 전하는 현실적이지 않은 세계의 이야기를 점차 이해하는 과정은 참 동화적인 느낌 가득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그려진다. 자연스레 설득되고 몰입되는 토니오의 이야기, 그의 과거의 행적속에서 알게 되는 그의 존재, 한때 사라졌던 비행사. 그리고 그의 이름!


인간의 생각은 의미와 이해에 대한 집착으로 예민하게 활성화되지. 앞뒤가 맞지 않거나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경계해. 그건 당연해. 기존의 논리로 이해가 되지 않거나 과학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현상 앞에서 단번에 의심과 공포를 느끼게 되어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해되지 않는 모든 것을 불가능하다, 비현실적이다 결론 내리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지. 상식, 과학, 생물학? 그놈의 논리! 이성! 공부 좀 한다는 바보들은 자기들이 이해가 안 되면 다 부정하곤 하지. 동화라고? 당신은 언제나 내게 사과해야 할 거야.


  토니오를 따라 심해의 유토와 우토의 세계를 헤매며 상실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다 이해된다고, 그 세계에 유토에, 우토에 가보고 싶다고 거듭 생각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믿어의심치 않는다고 그리하여 책장을 덮는 것이 아쉽다고 토니오에게 말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몽환속에서 빠져나온다 해도 언제나 몽환속이다. 가져 본 적 없고 본 적도 없음에도 깊게 느껴지는 상실감, 무엇을 잃은 것인지도 모르게 슬픔은 쓸쓸함은 더해진다. 환상의 이미지가 끝나고 난 후의 허무가 쉬이 빠져나가지 않는다. 현실로 돌아와 토니오에 대한 궁금증은 증폭된다. 토니오, 그는 정말로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곳에 가만히 있으면 삶이지만 그곳을 향해 가면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요.”

  연인을 잃은 상실감에서 시몬은 한걸음씩 벗어나고, 지진으로 가족을 잃은 데쓰오와 같은 이들을 현혹하는 사이비 교주로 인해 냉소적일 수밖에 없었던 데쓰오는 마음을 풀어낸다. 이러한 변화가 토니오와 함께 하면서 이루어진 변화, 가만히 있지 않고 토니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걸음씩 나아간 그들이 함께 토니오의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프롬 토니오』, 환상과 진실이 잘 설계되어 가공된다. “애도는 자기 연민의 연장일 뿐”이라는 소설 속 말처럼 나의 애도도 이쯤에서 끝맺어야 한다. “이곳에 남은 자로서 이곳의 삶을 살아야 하기에” 무한의 자기연민을 끝내고서 실체가 몽롱하여 그리기 애매한 유토와 우토의 이미지는 보아 구렁이가 삼킨 모습으로 그려보는 것도 왠지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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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기원
천희란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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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

영의 기원, 천희란, 현대문학, 2018.


  0의 무게는 얼마큼일까. 죽음이 많아서 참으로 무겁겠다 싶은 죽음이 짙게, 깊게 드리워진 단편집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방식은 하나라 생각했는데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수만 갈래고 곳곳에 죽음이 서려있다.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필연적으로 오는 죽음을 선택한 이들의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산다는 것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외면받은 그들의 삶들을 돌아보게 된다. 그 삶들의 가지는 친화되지 못한 이유들을. 


죽을 용기로 살았어야 해.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니까 죽을 용기와 살 용기, 그것은 과연 같은 종류의 용기일까. 나는 맑스와 마르크스, 그리스인과 희랍인, 자정과 0시, 두 번의 침묵, 분명 같은데 서로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것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죽을 용기로 살았어야 한다는 그 말에 대해 영이 무어라고 답을 할지 상상해본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상상 속에서 어떤 동의나 항변도 구하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재차 확인하게 된다. 영은 아무것도 쓰지 않았고, 이제는 아무것도 쓸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살아 있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한 답을 결코 알 수 없다. 물론 내가 알 수 있는 확실한 사실이란 거의 없다 해도 좋을 것이다. 빈 편지지와 잉크가 가득 찬 볼펜은 무엇인가를 쓰기 위해 존재하는 물건이라는 것. 영은 죽었고, 나는 살아있다는 것. 그렇다. 그것뿐이다.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는 문학상 수상집에서 읽은 것으로 또한번 읽게 되어 다른 단편보다 또렷이 기억되었다. 타인의 죽음의 순간은 당연 강렬할 수밖에 없고 그에 대해 할 말은 그 모습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라는 것에서 일찌감치 눈치챘어야 했다. 대상이 정해진 편지, 그 속에 담긴 어느 글의 진의가 몰고 올 파장이, 충격이 내도록 머리에 가슴에 머문다. 아니 소설 전반을 뚜렷하게 지휘하는 단어, 죽음. 그 단어가 끌어들이는 무거움과 우울함의 파장이 작가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는 글 속에 잠긴다. 


절대로 쓰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가진다는 것의 의미를 알 것 같다. 한 작가에게 쓰고 싶지 않은 것은 곧 쓸 수 없는 것일 테다. 비열한 글쓰기란 자신과 타인의 삶을 팔아 연명하는 것도, 핍진한 허구를 구성하지 못하는 것도, 삶의 새로운 의미를 발굴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저 쓸 수 없는 것을 쓸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는 것, 지금까지의 절망이 모두 허위였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떠난 이는 말이 없기에 그 이유들을 기억하는 것은 오로지 현재의 삶을 사는 이들이다. 그들은 눈앞에서 연인의 죽음을 목격하고 목격자로서의 이야기를 하며, 죽기 전날의 눈오는 밤, 술에 취해 찾아와 여러 물건들이 든 편의점 봉투를 내밀었던 친구의 사소한 몸짓들을 기억하며, 아내가 죽은 이유를 알기 위해 일기장을 보고 자취를 뒤따르며, 죽은 동생이 남긴 메모를 쫓아 비밀 모임 속 죽음을 마주하며, 불멸의 삶이기에 기꺼이 자살을 감행하는 예술가를 지켜본다. 이런 일들은 모두 죽은 자의 몫이 아니다. 죽음을 보는 것은, 그에 대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은, 그것에 대해 느끼는 것은 언제나 목격자, 함께 세상을 살던 자들이다. 그렇기에 죽음이란 타인에 의해서 더 강하게 각인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죽음의 이야기는 그들의 삶이 아니라 내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재단되고 해석된다. 그것이 죽음을 바라보는 자의 특권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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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손보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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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인식하는 방식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손보미, 문학과지성사, 2018.


  제법 본 단편이 여기 수록되어 있다. 단편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 수상작이다. 책 제목과 같은 단편은 없다.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내 관심에선 밀려난다. 고양이는 조용히, 우아하게 밤에 찾아드는 존재가 아니라 한밤 미칠듯이 갸르릉거리는 소리로 싸워대는 고양이가 더 각인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하더라도 끝끝내 이곳이 제 자리라 주장하는 것처럼, 옮겨야 하는 건 나인 것처럼 쳐다보는 고양이들의 그 소리없는 움직임에 오히려 놀라는 건 나라는 걸 기억해 낸 때문인지도.

  소설 속 무단침입한 고양이들처럼 내가 마주친 고양이들은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종류의 침입”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드럽다니, 이미 침입 자체가 부드러움이란 말을 허락하지 않는다. 침입이란 이미 폭력의 한 부류 아닌가.

   

나는 가끔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 생각에 그건 아주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종류의 침입이다. 아주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천천히 파고들어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고 부지불식간에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하지만 때때로 무단 침입한 고양이는 정반대의 작용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게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징그러울 정도로 냉정한 방식으로.


  후자의 의미가 이 소설집에 어울린다. 조용히 침입하여 자리잡고 있던 고양이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그 고양이를 발견한 순간에 인식하게 되는 것들. 그로 인해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모습을 보게 된다. 아닌듯하면서 줄곧 고양이를 의식하고 있던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해야 할까. 그러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 고양이에 대한 생각, 즉 타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생각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타인에 대한 외부에 대한 지나친 의식은 이미 나를 갉아먹는 것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며칠 후 그녀는 혼자 백화점에서 쇼핑을 한 후 백화점 안 카페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쇼핑백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저들 중 나처럼 진짜 고통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진짜 삶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삶이 무엇인지 운명이 무엇인지를 한번쯤 생각해보는 일은 달달한 케이크를 맛보면서도 생겨날 수 있는 물음이다. 살아가는 동안 가벼이, 쉬이, 무심히 여겼던 어떤 일들이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칠지는 쉽게 가늠되지 않는다.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알게 된다. 인생이란 그냥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이란 것, 사는 건 다 그런 거라는 말들이 책속에서 자주 반복된다. 커다랗게 갸르릉거리는 것에만 몰두하고 그것만이 삶을 뒤흔드는 역할을 하리라 생각하지만 소소하고 사소한 일들의 반복과 우연으로 점철되는 삶, 그것이 주는 파장에 대해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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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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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껄 그대

체공녀 강주룡, 박서련, 한겨레출판, 2018.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일제강점기, 아직 독립은 먼 1920~30년대다. 생각해보면 이 시기를 살아가던 우리 민족은 헤아릴 수 없음에도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의 삶으로 사람들의 모습이 유형화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이 문학작품에서 그릴 수 있는 진정성있는 이야기이자 주권 잃은 민족이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실제 모습일 수밖에 없음이다. 이 소설은 그런 전형적인 삶을 살아가야 했던 여성이 태어날 때부터의 이름, ‘강주룡’으로 ‘두루주에 용룡 자, 내 한 몸으로 이 세상 다 안아주는 용이 되라’는 이름 뜻처럼 오래도록 기억될 삶을 소설화했다. 당대의 전형적인 유형을 이끌어가는 모습이 아니라 실존인물이 살아간 삶의 이야기다.

  1930년이 아니라 마치 1970~80년대 여공들의 삶이 아닌가 여겨진다면 강주룡이 한 일에 대한 놀라움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노동운동가이자 최초의 고공투쟁가인 강주룡의 인생은 소설에서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그렇다는 것은 무언가 삶의 전환이 이루어졌음으로 봐도 무방하다. 노동운동가로서의 강주룡의 일생만을 알았다가 소설을 통해 독립운동가로서의 강주룡의 삶 또한 알게 된다.

  1901년생 평안 출생 강주룡의 삶은 시대적 배경 속에 흐르고 흘러가는 삶을 보여준다. 당시 수많은 이들이 간도로 이주한 것처럼 일제의 억압과 가난으로 강주룡의 가족 역시 서간도로 이주한다. 그때 나이 14세, 그 시대의 여성의 삶이란 일제에 의한 억압에 더해 가부장제 속에서의 부모와 남편에 의해 더 억압당할 수밖에 없는 삶이다.


주룡은 말을 건다. 얘, 강녀야, 넌 곧 시집을 간다. 몹시도 고운 이 하고 부부가 된다. 강녀야, 너는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그런 것 상상이나 해봤니, 서방은 널 집에 돌려보내고 곧 죽는다. 넌 살인범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다. 하나만 일어나도 기가 막힌 일이 연달아 일어난다. 이 같은 말들을 꿈속의 강녀는 듣지 못한다.


  스무살,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5살 어린 신랑과의 혼인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면 독립 운동에 뜻을 품은 남편을 따라 ‘함께’하기로 한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까. 그 선택, 필연적으로 보이는 그 선택은 강주룡에게 내재한 신념에 따른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독립군에서도 뛰어난 기지로 활약하는 강주룡이 같은 뜻을 지닌 독립군에게 그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여성’으로 부각되어 당하는 조롱과 질투, 멸시를 보고 있으면 그 답답한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 독립이라는 뜻을 품은 이들의 생각과 행동이 그러할진대 ‘시어머니’와 ‘아버지’라는 가부장제의 뜻을 따르는 대표들은 오죽하랴. 아들, 자기 자신의 삶과 안위를 중시하던 그들에 의해 강주룡이라는 사람으로서의 가치는 훼손당한다. 독립운동 하던 남편의 병사의 책임이 오로지 강주룡의 몫이라 규정짓는 그 흔하디 흔하게 하는 말, ‘남편죽인 년’, 당연한듯한 그 굴레에 이젠 나이 많은 지주에게 팔려가야 하는 삶이 그 시대에도 여성들의 삶이었다.


돼먹지 못한 인간이 한 고약한 말은 잊으면 그만이다. 누가 나더러 모단 껄이 아니라 했다고 내가 정말 모단 껄이 아닌 것은 아니다.


  독립운동하는 남편을 따라가 직접 독립운동활동가가 되었던 것처럼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규정짓는 삶을 살기 위해 강주룡은 그들이 씌운 굴레를 내던진다. 가족을 떠나 평양 고무공장의 노동자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물론 그 환경이 여성에게 가하는 핍박이 덜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일이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강주룡은 모단 껄에 대한 왜곡된 시선과 여성 노동자를 향한 차별과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올바른 것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굳건히 하며, 그 부당한 노동환경에서 특히 여성에게는 더욱 더 열악하고 차별받는 상황에서 노동해방과 여성해방을 외치며 노동운동의 선두에서 활약한다. 평양 을밀대 12m 지붕에 올라 임금삭감을 반대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고공투쟁의 선구자가 된 강주룡은 이후에도 단식투쟁을 지속한다. 1970~80년대 내 나라에서도 노동운동은 힘겹고 어려운 일이었고 무참히 짓밟히는 일이 허다했으니 일본경찰에 잡히고 감옥을 드나들며 투쟁하는 강주룡의 몸이 쇠해지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렇게 서른살 강주룡의 삶이 이야기가 끝이 난다.


내래 배워 아는 것 중 으뜸 되는 지식은, 대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처럼 명예로운 일이 없다는 거입네다. 하야서 내래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우에 올라왔습네다. 평원 고무 공장주가 이 앞에 와 임금 감하 선언을 취소하기 전에 내 발로 내려가는 일은 없습네다. 끝내 임금 감하를 취소치 않는다면 내 고저 자본가 압제에 신음하는 노동 대중을 대표해 죽기를 명예로 여길 뿐입네다.


  강주룡의 일대기, 전기문을 보는 듯이 쓰인 소설은 쉬이 책장이 넘겨진다.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벌써 끝이 난 건가라는 생각이 든다. 실존인물의 삶이니까 상상에 보태더라도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한계가 있겠지만 어쩐지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 더구나 노동운동의 이야기를 다룬 2부에서의 고공투쟁을 다룬 부분은 생각보다 너무나 휘익 지나가는 듯이 느껴져 단신 기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아쉬움은 강주룡 생애에 대한 안타까움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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