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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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억의 그 이후

오직 두 사람, 김영하, 문학동네, 2017-05-25.


  어떤 기억은 감각에 의해서도 강화된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 속에 음악이 삽입될 때 장면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느낌 감각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니 전혀 손을 대지 않고도 손에 무언가를 쥐었다가 놓친 듯한 감각을 느끼고 있다. 소설 속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내 손을 스르륵 빠져나가는 그 무엇. 어쩌면 책을 덮고 나서 그 감각 때문에 「아이를 찾습니다」의 장면장면을 되새김질하게 된다. 아주 부주의하게 아이가 놓은 카트를 손에서 놓친 부모, 세 살 때 유괴된 성민의 부모가 겪는 일들은 익숙하게 흘러가지만 다시 성민을 찾은 이후의 삶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의 모습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유전자가 같다는 이유로 마음이 합일되는 것은 기막힌 환상일 것이라고. 더구나 아이는 어딘가에 나의 친부모가 살아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만큼 학대받는 삶이 아니었으니까. 윤석은 마트에서 카트를 놓친 때부터 “행복 그 비슷한 무엇을 잠깐이라도 누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 없다. 하지만 성민을 다시 찾은 이후의 삶 역시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저는 생각했어요. 아무와도 대화할 수 없는 언어가 모국어인 사람의 고독에 대해서요. 이제 그만 화해하지 그래, 라고 참견할 사람도 없는 외로움.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말다툼. 만약 제가 사용하는 언어의 사용자가 오직 두 사람만 남았다면 말을 조심해야겠어요. 수십 년 동안 언어의 독방에 갇힐 수도 있을 테니까. 그치만 사소한 언쟁조차 할 수 없는 모국어라니, 그게 웬 사치품이에요? ―「오직 두 사람」


  작가는 아빠와 딸의 관계를 오직 두 사람만 남은 희귀언어사용자로 풀어낸다. 어린 현주에게 아빠는 우상이었고 그런 만큼 보이지 않는 편애가 존재했기에 다른 가족들은 소외감을 느낀다. 아버지에게 조종된 삶을 살던 딸이 점차 그 관계의 불편을 느끼며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혼자 남은, 병든 아버지에게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는 감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범죄자와 작가는 비슷한 구석이 있다. 은밀히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계획이 뻔하면 덜미를 잡힌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때로는 자기 꾀에 자기가 속는다는 점도 그렇지. 이 아파트에서 내가 쓰고 있던 소설은 정해진 플롯이라고는 없는 중구난방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었다. 반면 사장의 음모는 아주 짜임새 있는,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저급한 추리소설의 냄새를 풍긴다. 그런데도 승자는 사장이라니. 이것은 혹시 잘 짜인 플롯이 결국에는 중구난방 요령부득의 서사를 이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 「옥수수와 나」


  이상문학상 수상작 「옥수수와 나」는 소설가인 주인공을 통해 작가와 글쓰기에 대한 생각들을 풀어내고 있다. 김영하 스타일에 맞춤한 작품이란 느낌이다. 위트와 아이러니가 절절하게 넘치는. 「인생의 원점」또한 그것이 가득한 작품이다. 인생의 원점 또는 변곡점에 대한 관념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매우 ‘실질적’인 경험을 제공하게 해준다. 서진이 마침내 느낀 것처럼, 

“인생의 원점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 그런 정신적 사치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 그게 진짜 중요한 거야.”

  「오직 두 사람」의 현주는 말한다. 이제 유일한 희귀언어사용자가 되었기에 허전하고 쓸쓸할 것 같다고 말이다. 책을 읽은 후에 희귀언어사용자가 마지막 남긴 글을 읽은 듯이 허전하고 쓸쓸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김영하 작가가 곳곳에 위트와 아이러니를 남기는 스타일임에도 이런 감정이 드는 것, 기억은 스타일이 아니라 메시지를 붙잡고 있나 보다 싶다.

  김영하 작가는 그만의 독특한 세계, 설정을 더한 글과 더불어 방송을 통해 더욱 더 작가의 ‘브랜드’를 높여가고 있다. 출간하는 책마다, 한마디 말에도 그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책을 읽은 후 이 공허함을 견디는 일은 내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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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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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의 설계자들

설계자들, 김언수, 문학동네, 2019-01-29.


책을 읽으면 부끄럽고 두려운 삶을 살 것이다. 그래도 책을 읽을 생각이냐?


  이게 무슨 소린가 했는데 책을 읽으면 부끄럽고 두려운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말이라 생각했다. 남을 죽이는 것을 직업으로 하고 살아가는 이라면 두려움이란 일을 방해하는 것일 테니. 삶의 자세에 대해 방향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하게 되는 일이란 무언가를 정진하게 하는 힘이기도 아니기도 할 테니까.

  책을 읽는 암살자,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 적어도 모든 것을 경험과 타인에 의해 배우지 않고도 책을 통해 배울 수는 있는 것이니까. 기술적인 방법이 책으로 전수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어쨌든 이 책에서 ‘책을 읽는’ 암살자는 그 행위 자체로 다르다는 것을 전제한다. 암살자는 야만이 가득한 세계의 난폭한 인물로 그려지거나 무조건 심각한 고뇌에 잠긴 사람으로 묘사되기 일쑤다. 이 사이에서 래생은 어디쯤일까.

  이 책은 암살자의 삶을 이야기한다. 남을 죽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독립운동가와 조폭의 암살이 다름은 명확하다. 그 행위도 받아들이는 관점도 그렇다. 래생은 직업적 암살자, 그를 움직이는 힘은 돈이다. 돈을 주는 이들에 의한 어떤 지시에 의해서 그 방법을 실현하는 인물이다. 래생이 이 암살자의 세계에서 살게 된 것은 어릴 적 쓰레기통에 버려져 너구리 영감의 세계로 안착했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 때부터 너구리 영감이 맡아 온 ‘개들의 도서관’은 죽음을 설계하는 장소다. 암살 청부 집단은 시대에 맞게 변화해 간다. ‘한자’가 내서운 기업형 보안 회사가 등장하는 것처럼 사라지지는 않은 채 말이다. 자신의 동료이자 친구의 죽음 이후 설계자의 세계에 대해 래생이 궁금해 하고 설계자 ‘미토’를 추적한다. 

  암살자는 누구를 죽일까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죽일까 고민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설계자들에 의해 정확하게 설계되어 있다. 총인지 칼인지 목을 부러뜨릴 것인지 방법을 명시한다. 이렇게 방법까지도 설계된 지침을 따르는 것과 어떻게 죽일까를 계획하는 일, 두 방법 중에서 암살자는 어떤 방법을 선호할까. 그런 궁금증이 인다. 그러니까 설계자가 힘들까 암살자가 힘들까. 그래서 이 책은 암살자와 더불어 설계자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누군가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이들의 역할, 그 시나리오를 담당하는 이들에 대해서. 결국 배후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한다고 봐야 할까. 딱히 그건 아니다. 설계자들 또한 따지고 보면 암살자처럼  그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설계자들도 우리 같은 하수인들일 뿐이야. 의뢰가 들어오면 설계를 하지. 그 위에는 설계자를 설계하는 놈이 있겠지. 그 위에는 그놈을 설계하는 또다른 설계자가 있을 걱. 그렇게 끝까지 올라가면 결국 뭐가 남을까? 아무것도 없어. 맨 위에 있는 것은 그냥 텅 빈 의자뿐이야.‘ 래생이 말했다.

“그 의자에도 분명 누군가가 앉아 있겠지.”

“아무도 없어. 다르게 말하면 그건 그저 의자일 뿐이야. 누구나 앉을 수 있는 의자. 그리고 아무나 앉을 수 있는 그 의자가 모든 걸 결정하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

“일종의 시스템 같은 거지. 자넨 칼을 들고 올라가서 맨 꼭대기에 있는 놈을 찌르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어. 그곳에 있는 것은 텅 빈 의자뿐이니까.”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 철저한 역할 분담이라고나 할까. 설계자들 뒤의 의뢰인은 따로 있다. 그 의뢰인들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듯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들은 정해져 있다.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 설계자들이 하는 말, ‘선거가 있어서, 선거 때문에, 선거가 끝나면’……설계자들이나 암살자들이나 그렇게 놀라운 인물들로 보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고보면 최근의 5.18에 대한 새로운 증언은 눈여겨 볼만하다. 그렇게 시민들을 죽이기 위해 계획된 시나리오, 설계자들이 있고 암살자들이 있고 의뢰인이 있다. 그 의뢰인이 지금까지 공고히 존재하는 것은 제 이익을 위해 분명하게 형성한 카르텔, 그 시스템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이어가려 조직을 총동원하고 있는.

  이 책이 초판 2010년이고 난 분명 이 책을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내용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언젠가 이 소설이 여러 나라에 번역되었다는 기사를 읽었고 그때에도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가득했는데 다시, 읽어보고 그리고 책에 붙은 많은 외국인들의 찬사를 읽어보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 책을 읽고 열광하게 하는가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의 이유는 명확했는데 역시 이 책은 영화화가 확정되어 제작진행 중이라고 한다. 읽자마자 영화관계자들이 매우 좋아하리라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이 책은 잘 읽힌다. 범죄스릴러라는 장르지만 많은 추리를 요하지도 않아서인지 꽤 속도감있다. 쉽고 편안하게 읽힌다. 눈을 자근자근 밟는 느낌이다. 암살의 세계인데도 유혈이 낭자하고 욕설이 난무하는 형태가 아니다. 하지만 역시 암살자의 삶을 다루고 있기에 그 세계의 인물들이 가지는 전형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않았다. 가령 래생은 암살자의 세계에서 가장 멋져 보이는 전형적인 캐릭터를 그대로 따른다. 외모, 어릴 적 결핍, 독서하는 암살자, 그리고 무엇보다 고뇌하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여지없이 암살자들은 그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지더라도 한번은 누군가에게, 그것은 늘 젊은 여자로 나타난다는 점, 흔들려야 한다. 뛰어난 암살자 추가 그러하고 또한 래생도. 어쨌든 이 세상에서 뛰어난 암살자라 불리는 이들의 죽고 죽임이 이어진다. 그 죽음, 모든 암살자의 죽음이 허무하다. 기껏해야 암살자들일 뿐인데, 그들은 그들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한다. 그것이 암살과정에서 만난 인연에 대한 복수이자 정의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결국 의자가 그대로 있다면 암살자들도 설계자들도 다시 고용될 것인데 그들의 죽음을 통해서만 인생의 깨달음을 삶의 새로움을 얻을 수 있는 듯이 그렇게 허무하게 그들 서로만을 죽이기 위해 온갖 에너지를 다 쓴다. 그렇게 이 책은 허무하게, 아쉽게 여겨지는 결말과 눈을 뽀드득뽀드득 밟고 있다는 느낌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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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5-16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과작하시는 작가신가 봐요.

9년 만에 새로 재개정판이 나왔는데
신판 표지가 훨씬 더 마음에 드네요.

<뜨거운 피>도 3년 전에 나온 책이네요
흠 흠 흠

모시빛 2019-05-17 13:09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개정판 표지가 훨 마음에 들어요.
개정판에선 내용-결말도 부분 수정했다고 하는군요. 어떻게 바뀌었는지 몰겠지만...
문학동네 소설상 <캐비닛>외엔 읽지 않아서 몰랐는데 김영하 작가처럼 해외에서 좋아하는 작가라고 하더라구요. <뜨거운 피>도 그런 작품일까, 궁금해지네요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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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습관일까 성격일까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김금희, 창비, 2014.


  그런 날이 있다. 한없이 센티멘털해지는. 때론 습관같고 때론 성격같은 그런. 센티멘털이란 한없이 축축 처지는 느낌이 들게도 하지만 무아지경으로 밝은 감정이 들게도 한다. 절대로 주위의 상황과는 상관없는.

 『너무 한낮의 연애』김금희 작가의 등단작이 수록된 첫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은 이런 인물들의 등장한다. 화자는 항상 나이며 2~30대로 주위의 상황을 관찰하며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기본적인 정서는 ‘센티멘털’. 급기야 등장인물이 말하고 만다.

 “제 나이 때마다 할 일이 있는데 감상적으로 굴지 마라.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이지.”

  이 단어에 ‘하루 이틀’이 붙음으로써 ‘나’는 ‘뺨을 한 대 올려붙이듯’ ‘가시 같은’ 느낌을 받지만 그 말은 ‘센티멘털’한 삶을 청산할 정도의 움직임을 줄 수 있는 말이었을까. 어느 때에 그 말은 쑥, 훅, 들어오는 비수같지만 센티멘털에 푸욱 푹 담겨진 어떤 삶들이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감도는 아닌 듯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만큼 이들은 무력한 삶에 최적화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정말 습관일까, 성격일까.

  이십대의 삶은 취업과 연애가 최대 목표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것이 이십대 그리고 삼십대의 삶에서 중요하다고 일찍이 누가 정해놓았기에 그것에 도달치 못한 삶들은 쉬이 센티멘털해 질 수밖에 없는 건지. 소설 속 배경은 딱히 지금이 아니다. 과거에서부터 이어져 축적된 환경이 목표를 성취하는데 장애가 되곤 한다. IMF와 정년보다 이른 퇴직한 부모님은 그의 자녀 세대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부모들 세대에 만든 빚이 자녀에게 전이되고 막막한 가정환경 속에서 이상적인 목표를 생각하기엔 막연해지기도 한다. 어떤 아버지는 루팽처럼 집을 나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어떤 아버지는 과하게 사업을 벌이며 어떤 아버지는 오래도록 병원에 누워 있다. 그래서 그들의 아이들도 방황하고 안정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이 도시는 참 묘해서 어느날은 영원히 서울 시민으로 살 수 있을 듯하다가도 월급이 밀리거나 생활비가 떨어져가면 완강히 내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파도의 반대 방향으로 헤엄치는 것처럼, 물살을 세차게 가르면 가를수록 무언가가 나를 저만치 내보냈다. 혹은 인파를 헤치며 무언가에 쫓겨 달아나는 느낌이기도 했다. 그렇게 개미굴처럼 이어진 서울의 골목을 내달리다보면 용케 내 이름으로 된 주소를 갖기도 하고, 나만큼이나 우왕좌왕하는 남자들과 연애도 하는 거였다. - 「릴리」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속 ‘나’는 어쩌면 지나친 낙관론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스물한살 재수생인데다가 임신을 한 상황에서 ‘나’는 현재의 내 삶에 대한 인식보다 함께 임대주택에 살고 있는 인물들의 삶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나’뿐만 아니라 소설속 등장인물들은 항상 ‘나’의 상황과 병렬적으로 가족이든 타인이든 누군가의 삶을 겹쳐 놓는다. 그들의 삶은 형태는 다를 지라도 공통의 분모로 이야기하자면 상처와 난제에 몰린 삶이다. ‘나’의 상황은 타인의 상황에 빗대어 그 경중이 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타인의 삶을 통해서 내 삶도 보편적인 일상이라는 듯이 무심한,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이 어조. 그럼에도 센티멘털은 잔뜩 묻혀져 있는.


신호가 다시 들어왔지만 발을 떼지는 않았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고,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혹시 그것은 자신감일까. 시간이 남아 있음을 아는 2~30대의 여유. 중년이라면 노년이라면 다르게 읽혀질 세상에 대한 시각. 그것은 곧 극복할 의지를 가질 시간을 만들어 내리라는 말과 같은 것일까. 그들만의 나침반은 따로 있다는, 길을 헤쳐나갈 도구가 있다는 그런 자신감. 그렇다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솟아나는 그러한 문제해결방식은 습관일까, 성격일까.


사실이기야 하겠지만 뭐랄까, 아버지 말은 철 지난 유행어처럼 핀트가 안맞는 느낌이었다. 아버지가 항로에서 자꾸 벗어나는 건 좌표를 읽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 낡은 나침반을 쥔 탓이 아닐까. -「장글숲을 헤쳐서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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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E. W.
김사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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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스


N. E. W. 김사과, 문학과지성사, 2018-08-08.


  새로운 세상이 디스토피아적으로 그려지는 소설은 낯설지 않다. 동화도 미래세계를 그림에 있어 그 기괴함이야 만만찮지만 대체로 긍정적 환상으로 가득하다. 기대하지 않기 때문인지 기대가 너무도 크기 때문인지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은 기괴한 세상을 창조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 계보에 이 소설도 놓일까. N.E.W. 새로운 것일지 새것일지를 가늠하기엔 애매하다. 소설이 그리고 있는 공간은 꽤나 익숙하기에. 낯설지 않다는 말은 새롭지 않다는 것, 새것 같지 않다는 것이므로 N.E.W.라는 단어에 일치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한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발견한 사람 같은 표정으로, ‘엔, 이, 더블유, 뉴N. E. W.가 현대 세상을 결정했다.’ 그게 무슨 약자인지 아세요? 신경학neurology, 전기electricity, 제2차 세계대전World War 2. 믿어지세요? 제 아버지가 이렇게 황당할 정도로 유치한 사람이라는 것이? 그런데 사람들은 아버지를 두려워하죠. 그게 다 아버지의 연기에 속고 있는 거야.


  내가 속고 있는 건 무엇일까. 아무리 보아도 소설이 구축하고 있는 세계는 막장드라마 일컬어지는 배경을 지닌 인물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그런 인간군상에게서 보던 삶을 살아가는 패턴은 새로움과는 거리가 멀어, 새롭게 읽어나가기엔 무리이다. 적당히 환상이라 생각하며 넘어가줘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이 익숙한 그림 속에서 제목 때문에 N.E.W.를 되뇌며 연관성을 억지로 주입하다 눈길을 사로잡는 문장에 생각은 다른 방향, 그리스신화 속으로 흘러간다.


새로운 시대엔 새로운 시대에 맞는 거짓말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새로운 세계에 걸맞은 환상이요. 죄송한데요, 아버지의 시대는 끝났어요. 아버지의 거짓말은, 아버지의 사기는, 그 조잡한 마술은 이제 통하지 않아요.


정말로 죽어주시면 안 되나요? 저와 제 아내를 위해서. 아버지에게 드리는 제 유일한 부탁이에요.


  제우스의 할아버지 우라노스는 아들 크로노스에 의해 거세당한다. 자식에 의해 같은 꼴을 당하지 않으려는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크로노스 또한 제 아비와 같은 운명이 될 뿐. 이것은 과거가 물러나고 현재가 도래하는 것이니 아버지 세대가 사라지고 아들 세대가 오는 것이다. 오손그룹의 정대철 회장이 구축하고 있는 권력이 그의 세계에 속한 아들 정지용과 며느리 최영주에게로 옮겨가는 과정이야말로 완벽하게 과거와 현재의 교체이며 ‘N.E.W.’가 아닌‘N.E.W.’의 모습이다. 그런데…신화와 소설이 이토록 다르게 느껴지는 까닭은 뭘까. 아니다, 결국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권력이란 그렇게 신들이 벌이는 전쟁처럼 그들만의 리그라는 것을. ‘신’으로 나타났을 때는 범접하지 못하는 존재인마냥 세뇌당한 그 세계가 현실에도 얼마나 강요되고 있는지를.


정 회장이 굳이 복잡하게 5평짜리 서민용 원룸과 2백 평짜리 최고급 펜트하우스까지 한 건물 안에 섞어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거기에도 그만의 독특한 신념이 숨어 있다. 가난한 자들은 부유한 자들과 완전히 섞여서도 안 되지만 완전히 격리되어서도 안 된다. 그들은 멀리서, 보이지 않는 벽 너머에서 끊임없이 서로의 존재를 느껴야 했다. 그래야 쌍방간의 두려움이 유지되며, 살얼음 같은 평화가 지속될 수 있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수준의 두려움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 그것은 통제의 가장 기본적인 기술이가 가장 까다로운 예술이다.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느껴질 때, 두려움의 대상이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개달았을 때 사람들은 용감해진다.


  국숫집 성공자도 BJ 이하나도 욕망을 갖는다. 어쩌면 성공이라 이름할 수도 있겠다. 그들이 벌이는 처절한 ‘노력’과 대비되게도 모자란 한량같은 정지용은 쉬이 권력을 가진다. 5평짜리 서민용 원룸에서 사는 이들이 몸과 마음으로 발버둥칠 때 정지용은 그저 아버지 하나만 제거하면 늘 하듯 재밌는 게임에 몰두하다가도 오손그룹이란 세계를 거머쥘 수 있다. 아, 그조차 제 힘으로 거두지도 못한 것이지만. 심오할 듯 보이는 정회장의 독특한 신념이란 결국 권력을 더욱 드높이게 보이는 수단일 뿐이다. 2백평 펜트하우스만 늘어선 곳에서 권력을 명확히 휘두를 수 있을까. 2백평 펜트하우스가 더욱 빛날 수 있는 건 그 옆에 놓인 5평짜리 원룸의 존재다. 그들이 어떤 신념으로 그들 자신을 이미지화시키든 5평의 인생이란 그들에게 개를 키우는 공간일 뿐. 정지용이든 최영주든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여 제 왕국을 세우든 변하지 않는 것, 여전히 5평짜리 원룸을 만들어 낼 것이고 그 안에서 그들을 위한 개를 사육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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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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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복과 인복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문학동네, 2018.


  소설속 인물을 현실로 끌어들여와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고 생각하는 일은 아주 오래전에 끝난 것 같다. 언제부턴가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이름은 K이거나 M이거나 또는 L이거나 그랬다. ‘J 스치는 바람에 노래 가사처럼 나만의 J를 불러낼 수는 있었겠지만 그런 K, M, J는 익명과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뚜렷하게 이름이 기억되는 작품이 있었던가.

  그 이름들을 수식하는 말에 의해 정체성이 확보된 각각의 주인공들은 고유명사였지만 결국 보통명사가 되어 주위를 맴돈다. 강민호도 권순찬도 최미진도 한정희도 나정만도 박창수도 김숙희도 반경 1km 안에 분명 살고 있을 것 같다. 가까이에 그들이 살고 있기에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삶이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 그들 때문에 잘 살아가려는 내 삶이 방해를 받는다. 타인을 배려하고 약자를 이해하며 더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누구에게나 친절하려 ’애쓰는’ 나의 노력이 끝날 것 같은 기분.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알게 해준 것은 권순찬과 한정희다. 


우리는 왜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지에 대해서.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정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죄와 사람은 어떻게 분리될 수 있는가, 우리의 내면은 늘 불안과 절망과 갈등 같은 것들이 함께 모여 있는 법인데, 자기 자신조차 낯설게 다가올 때가 많은데, 어떻게 그 상태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나는 그게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 자신이 다 거짓말 같은데……  [한정희와 나]


  친절, 윤리,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 말이 주는 무게와 권위에 눌려, 경직된 채로 기계적으로 행하고 있음을. 감정이라는 것이 진심이 녹여든 마음은 어떻게 다를지, 어떤 형태로 이뤄지는지를 말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느끼는 당혹감 또한 강박적인 윤리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해와 친절의 한계를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 기계적 친절은 나를 더 옥죌지도 모른다. 또한 그 형식적·기계적 배려를 느끼는 이가 결국은 나를 멀리할 지도 모르겠다.


    왜 어떤 사람은 살인자가 되고, 또 어떤 사람은 정상이 되는 것인지.

    왜 어떤 사람은 수치를 느끼고, 또 어떤 사람은 염치를 생각하는지.

    나는 지금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나를 혐오하게 될 박창수에게]


  소설 속 이름들은 윤리적이려 하는 나를 방해하는, 시련을 주는 인물이기도 하면서 윤리적이라고 자부하는 나에 의해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들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이해가 힘들었던 김숙희에 대해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마음과 마음이 오고가지 않은 과장된 친절이 배려가 불편함을 줄 수 있는지 나아가 모욕으로 다가올 수 있음에 대해서도.

  감당할 수 없음에도 거절하지 못하는 탓에 일을 쌓아놓고 살았던 때가 있었다. 한때 내가 가장 많이 듣던 말은 일복은 많고 인복은 없다였다. 강민호, 권순찬, 김숙희 등등이 하루 걸러 내게 뭔가를 부탁했고 많은 일거리가 내게로 왔다. 완전히 물러가지 않은 성향으로 인해 힘겨워 턱턱거리면서 나를 탓하다가도 상대방을 탓한다. ‘미안한데’, ‘정말 미안한데’, ‘이러면 안되는 걸 알지만’으로 시작하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거절의 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거절의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과한 부탁을 하지 않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론 과하고 때론 습관적인 부탁의 말을 하는 자의 윤리를 생각했다. 거절이라는 불친절한 말 한마디를 하는 것을 그토록 꺼리며, 어떤 불편함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은 친절의 과장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에도 불편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배려였을까, 이기였을까. 결국 내게는 힘겨움이란 결과만을 주었던. 그래도 여전히 내가 해야 할 거절보다 그들이 하지 말아야 부탁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내가 있다.


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모욕을 당할까봐 모욕을 먼저 느끼며 모욕을 되돌려주는 삶에 대해서.

나는 그게 좀 서글프고, 부끄럽다. [최미진은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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