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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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항구의 사랑, 김세희, 민음사, 2019.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책을 읽으면서 이 노래가 생각났다. 바닷가 마을이 배경이라 항구의 사랑인 줄 알았다. 항구마을을 배경으로 한 또는 항구와 연관된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인가 했는데… 예상을 빗나간, 항구. 조금 당혹스러웠다.  이 소설을 읽게 된 건 젊은작가상 수상작이자 단편집인 『가만한 나날』을 먼저 보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내용도 스타일도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간단히 말해서 소설은 10대, 여고생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지금도 그렇지만 학교는 오래전부터 남녀공학보다는 남녀를 분리했고 여학교에선 이른바 보이시한 선배와 동기들에게 호감을 갖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직간접적으로 목격한 바 없이 그저 이곳저곳 썰로 전해 들었기에 그렇다, 그랬다, 라고는 못하겠다. 무딘 것이었는지 모르겠다만.

  10대들의 세상은 쉬이 변하니 시간이 흘러 문화적인 변화가 많이도 달라졌겠지만 소설에 나오는 소녀들의 감성은 아직 여물지 않은 느낌이 드러난다. 그래서인지 소설조차도 여물지 않은 느낌이 든다.

  어쩌면 동질의 감정을 지나왔을 지도 모르겠지만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건 무엇에 기인하는 걸까. 어느 10대들에게나 세계에 추앙받는 존재들은 있었고 그들에 대한 모방은 있었다. 그 대상이 다름에 대한 것은 아니다. 본질은 같은 거니까. 그런데, 그런데 소설의 서사와 감정이 생각보다 깊게 와 닿지 않았다. 내가 머물지 않았던 시대라서일까.

  팬픽이란 은연중 오래된 문화였을 거라 보지만 우리나라의 아이돌 산업이 중점적으로 육성되고 활성화되는 것과 맞물려 팬픽이 확산된 것이 2000년대 초반의 집중적인 문화현상이었던 모양이다. 영화 트와일라잇 또한 팬픽이 원작이라고 들었다. 팬픽에 대해 관심이 있던 것도 아니기도 했지만 소설속에 나오는 ‘이반’이란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내가 아는 이반이란 그저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뿐인 것을. 내겐 레즈가 훨씬 익숙하다. 이것이 이 소설에 대한 생각의 차이를 만드는 걸까. 이래저래 찾아보니 이반이란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표현이라 한다. 이반의 어원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는데 동성애자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의미에서 부르는 말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타인에 의해서 불린 것인지 스스로를 부르는 말인지가 더 궁금해졌다.


저런 애들 때문에 진짜 동성애자인 아이들이 피해를 입는다고 규인은 말했다. 동성애자들에 대해 편견을 만들고 이미지를 흐려 놓는다고. 중학교 때 친한 친구가 ‘진짜 동성애자’였다고 했다. 규인은 인희 같은 애들이 진짜 동성애자가 아니라 유행에 따라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뭔가 남과 다른 걸 하고 싶고, 관심을 끌고 싶고, 우쭐해하려고 그러는 거라고 말이다. 칼머리, 힙합 바지, 그런 게 그 표시였다.


  이성적인 사귐이 제한된 한국 사회에서 같은 공간에 오래 머무르는 대상에게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토록 이성애에 대해 격렬한 반대를 하던 어른들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이성애만을 받아들인다. 그 경계에서 사람의 감정이란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인지 만들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소설속 문장처럼 유행일지도, 우정의 강도에 대한 인식의 차이일지도, 그리고 사랑을 정의하는 방식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내가 너무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기, 그녀들의 사랑을 다루는 방식은 너무 가볍다. 그렇게 느껴진다. 정말로 ‘인희 같은 아이들’이 가득했던 것일까. 그리하여 ‘진짜 동성애자’들의 모습은 볼 수 없는 것이었나. 그 시간이 지나면 이성애로 가득찬 이야기를 하는 그들. 십대의 사랑은 그런 형태였나. ‘나’의 주위엔 그런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오간다. 이 이야기가 그 시절 ‘나’의 사랑 이야기라 한대도 ‘나’의 주위엔 동성애적 사랑에 몰입한 대상들이 많다는 건, 정말로 ‘진짜 동성애자’들이었을까. 유행이었을까.

  심리적인 안정감이 확고하지 않은 십대의 시기에 동성애는 정체성을 뒤흔들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을 텐데 그런 고민이란 보이지 않는 가짜의 동성애 놀음처럼 보인다. 누군가에겐 엄청난 충격이고 상처였을지 모르는데 많은 이들에게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감정이었다면 그토록 심각한 고민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소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 시기를 벗어나면 잊어버리고 감추고 해야만 하는 그때의 감정과 행동들. 그런 시절을 그런 상황을 통과하여 비로소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게 되는 걸까. 소설 속에서 ‘나’는 민선 선배에게 사랑을 느꼈고 먼훗날에도 다시금 그 시절을 생각하며 이렇게 말한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누군가를 그렇게 원했던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를 원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선택했을까? 오랫동안 나는 내가 그녀를 사랑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더 이상 그 감정을 내가 선택한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내가 감정을 소유했던 게 아니라 감정이 나를 소유했던 것만 같다. 강물의 표면에 붙들려 이리저리 떠다니는 나무토막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파악할 수도 없는 심오한 물살에 고통스럽게 휩쓸려 다녔던 것만 같다. 그 물살의 방향이 바뀌기 전까지는 계속 그렇게 붙들려 실려 가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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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정신 오늘의 젊은 작가 18
김솔 지음 / 민음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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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의 추출

보편적 정신, 김솔, 민음사, 2018.


  소설보다 작품해설이 흥미로웠다. 소설이 하나의 이미지덩어리로 흘러갔다면 작품해설은 그 이미지를 깨뜨리고 구체적이었다. 보통 평론, 작품해설은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여 소설을 더욱 어렵게 느끼게 하거나 소설을 이해하는데 실패(?)했다고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번엔 오히려 머릿속 제멋대로 흘러가는 생각들을 잘 모아주어 좋았다.

  회사의 비밀스런 페인트 제조의 비밀을 알고 있는 다섯 원로 중 창업주의 유일한 손녀가 죽었다. 이로써 회사는 사업의 미래를 걱정하고 비상 경영 체제를 선언한다. 전작의 영향으로 회사 내의 암투, 조직이 개인을 억압하는 그런 이야기가 전개될 것인가 했던 싶었으나 소설은 지금 현재의 상황 이전으로 거슬러 창업주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방대하게 뻗어가는 이야기를 등장인물의 연대기를 중심으로 읽어 가면―작품해설이 안내해준 대로― 시작은 창업주가 태어난 1889년부터다. 결혼하고 출산하고 그리고 연금술에 빠지는 창업주와 결혼한 아내들과 자녀들의 서사가 펼쳐진다. 붉은 염료를 찾아 헤매던 창업주가 스승을 만나 연금술을 익히는 과정, 실패하고 신비한 붉은 페인트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는 이야기 또한 서사의 한 축이다. 창업주가 신비한 붉은 페인트를 만드는 일에 열심이었다면 첫 번째 아내는 그 페인트를 판매하는 일에 주력한다. 처음엔 집시들에게 생계를 위해 창업주가 실패한 페인트를 판매했는데 점차 ‘신비한 주술적 힘’을 가진 것으로 알려지며 잘 팔리게 되자 첫 번째 아내는 대량생산공장을 갖추어 판매를 본격화한다. 판매를 하려면 생산이 있어야 하고 이 붉은 페인트의 생산비밀이 자손들에게 이어져 온 것이다.

  이 소설은 뭔가 길게 이어지고 복잡하다. 공간적배경도 한국이 아니라 브라질과 남미를 넘나들며 시간적배경도 100년 이상이다. 현실적인 회사의 이야기를 보여주나 싶었건만 창업신화를 넘어서는 방대함을 갖는다. 연금술, 비밀, 신비로운 붉은 페인트와 같은 단어들이 등장하면서 무엇에 중점을 두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에 이야기는 설화적이고 비현실적인 형태로 흘러간다. 조지 오웰의 『1984』와 히틀러도 언급된다. 이의 등장은 폭압·강압적 전체주의를 연상케 한다. 스승이 창업주에게 한 많은 이야기들, 창업주의 비극적 가계도, 그리고 연금술이 어떻게 이 전체주의와 히틀러와 연계되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내내 제목처럼 <보편적 정신>을 언급하고, 그런 질문을 답을 하게 한다.


운명을 믿는 자는 결코 위대한 연금술사가 될 수 없다고, 스승은 제자에게 여러 번 강조했다. 연금술이란, 모든 물질 속에 내포되어 있는 보편적 정신을 찾아내고 추출하여 모든 재료들의 쓸모를 재조정하는 학문이자 실천 방법이라고. 그러니까 납과 황금의 차이는 쓸모의 차이일 뿐이며 각각에 내재되어 있는 보편적 정신을 조정함으로써 얼마든지 그 쓸모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금술사의 주된 역할은 물질과 물질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보편적 정신이 자유롭게 건너다닐 수 있도록 입구와 다리를 만드는 것이라고 스승은 말했다.


  생각해보면 ‘보편’이란 단어는 자주 쓰는 단어다. 그럼에도 ‘보편이 뭐지?’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려면 어렵다. 그러다보니 이것이 소설의 멈춤 지점이 된다. 아, 보편이란 게 보편적 정신이 뭐더라, 뭘까, 뭐여야만 하는 걸까.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건에 대해, 인간에 대해 인류에 대해 세상 모든 것에서 ‘보편이 뭘까’를 끊임없이 묻도록 하는 책. 


가역 변화에 중요한 요소는 보편적 정신이지만 그것은 혼자서 존재할 수 없고 반드시 사물이나 현상, 사건, 사건과 사건 사이, 침묵, 어둠, 망각 등에 깃들인 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신이 창조했든 스스로 진화했든 상관없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 목적과 쓸모를 존중받아야 한다. 한 가지 존재의 소멸은, 그것을 반영하고 있는 존재 모두의 즉각적인 소멸을 야기하며, 소멸이 진행되는 순간은 찰나에 불과해서 거의 동시에 모든 것이 소멸된다고 말하는 편이 진리에 가깝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 환경에 대한 최소한의 채무 의식,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경외감이야말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보편적 정신이 아닐까. 인생이란 불완전한 인간이 조물주의 선한 창조물로 환원되는 과정이다.


  스승은 연금술을, 붉은 페인트의 비밀을 알려주는 듯 알려주지 않고 비밀을 지운다. 굳이 비밀을 지운다는 건 그 비밀스런 방법을 아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앎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대한 우려일 것이다. 오랜 역사에서 붉은 페인트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 페인트를 인간이 어떻게 활용하려 했는지, 그때 붉은 페인트를 활용하기 위한 인간의 정신은 ‘보편적 정신’이었는지 아닌지. 폭력과 배신을 기본으로 한 인간의 잔혹함이 보편적인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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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로 하여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
편혜영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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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에 충성하지 않는다

죽은 자로 하여금, 편혜영, 현대문학, 2015.


  의학드라마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 이런 광고인지 모를 연예기사가 새 의학드라마 방영을 앞두고 쏟아진다. 대체로 한국드라마는 병원에서 연애하고 법정에서 연애하고 직장에서 연애하고…그런 기승전‘연애물’이라는 비판이 있다. ‘병원’과 ‘의사’라는 장소와 직업이면 의학드라마로 분류되는 것인지 뜬금없는 의문을 가지면 그렇다면 ‘병원’과 ‘의사’가 나오는 소설은 의학소설이 되는 건가, 절대 망하지 않을 소설이 되는 걸까 쓸데없는 자문을 한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이인시의 선도병원이다. 의학드라마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드라마 <하얀거탑>이 다루는 이야기쪽에 가깝다. 스릴러, 미스터리쪽으로 강한 편혜영 작가의 소설이라고 덧붙이게 되면 상상가능한 분위기가 떠올려진다. 하지만 소설은 내게 전혀 다른 부분에서 추리를 가하게 만드는데 『마태복음』 8장 구절이라는 소설의 제목,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석’처럼 곱씹고 곱씹는다.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서 계속 곱씹었어. 예수는 인자하고 자비롭다면서 죽은 사람한테 왜 이러나, 사람이 죽었는데 이렇게 야박해도 되나…… 이해할 수 없었지. 한참 새기니까 조금 알 것도 같더라고.”

“무슨 뜻인데요?”

“영혼이 죽은 자는 내게 필요 없다, 불신자는 불신자에게 가고 믿는 자들은 나를 따르라. 그러니까 나를 따르는 건 믿는 자로 충분하다는 뜻이려나.”

  

  소설은 수술방의 이야기보다 원무과가 중심이 된다. 병원이라는 공간이 필히 갖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사람들이 아니라 돈이 흘러오고 나가는 그 구조에, 병원이 지탱해 나가는 힘인 돈, 그것을 다루는 원무과, 병원 경영과 행정에 더 집중한다. 그 상황을 둘러싼 인간의 행동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구체적으로는 선도병원으로 이직한 ‘무주’의 선택이 불러온 파장을 보여준다. 무주는 새로운 조직에서 가장, 아니 유일하게 인간적으로 대해준 ‘이석’의 자잘한 비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폭로할까 고민한다. 그 자신이 실제 행하지 않은 병원 비리에 연루되어 책임을 지고 사직한 경험을 생각하며 무주는 ‘공명’함을 선택하기로 한다. 이제 태어날 자신의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런 무주는 곧 병원비를 내지 못한 장기환자를 침상에서 내쫓는 일에 앞장선다. 그것에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공명심’을 선택한 자의 이 변화된 행동의 이유는 무엇인가.


무주는 완벽하게 좌우대칭이 맞는 세계, 균형이 잡힌 세계란 없다고 생각해왔다. 모든 것은 비뚤어져 있고 기울어져 있기 마련이라고. 그런 점에서 세계는 애초 구(球)나 정육면체처럼 정확하고 완벽한 형상이 아니라 오히려 트램펄린 같은 것이었다. 똑바로 서면 균형을 잃는 곳, 균형을 유지하려면 비틀거리거나 한쪽 발을 구부리고 팔을 뻗어야 하는 곳, 뒤뚱거려야만 가까스로 설 수 있는 곳 말이다. 그런 세계이므로 균형을 잃은 태도를 오히려 균형 잡힌 태도로 여겼다.


  소설이 그리는 세계가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분명하다. 무주의 상황과 변화하는 심리 또한 생생하게 이해가 되며 그래서 무서워진다. 무주의 선택이 가져온 결과는 감당할 수 없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무주의 확고함이 부족했던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든 확실하게. 확고함, 그것을 또한 믿음이라 말해도 좋을 듯하다. 그때그때 따라서 행동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무주와 달리 이석은 그 유연해보이는 얼굴 이면에 확고한 행동방향을 설정하고 있다. 이석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무주에게 ‘충고’하는데 두 사람의 대화를 보다보면 무주가 얼마나 유약한지 느껴진다. 

  병원의 구매품목을 조작하는 비리자를 고발하는 것은 병원을 위해 옳은 선택이고 정의로운 선택일텐데 무주는 조직 내에서 왕따당하고 한직으로 밀려난다. 아이는 유산되고 아내와는 멀어지는 상황, 오래도록 병상에 누워있던 이석의 아들 죽음에 대한 죄책감까지 겹친 무주의 일상. 그 속에서 무주는 쉽게 자신을 바로세우지 못한다. 거기에 이석의 복직까지 이어지면 마침내 무주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의심하게 된다.

  ‘조직’이란 언제나 개인을 죽인다. ‘조직’이라는 생물이 굴러가는 방식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그 방법에 파괴되고 무너지는 개인은 언제나 무력하다. 정의와 윤리는 이상이과 관념일 뿐 실제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지 모른다. 그래서 항상 조직에게 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니다. 무주가 그랬던 것처럼 ‘솔직하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실은 원하는 것이 정의와 윤리가 아니었는지도. 정확하게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한다면 무주처럼 되고 만다는 생각을 한다.  

  문득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고 조직에 충성한다는 검찰총장 후보자의 말이 떠오른다. 어찌 생각하면 이 말도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무주의 결정과 방식이 후보자의 방식과 같은 면이 있으면서 매우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쩌면 무주가 ‘지금 처한’ 상황은 무엇을 해야 할 어떤 과정 중에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무주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쉬이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흔들리는,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생각없음은 아니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 신념 하나가 조직의 생존방식을 누르고 세상 모든 공존방식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죽은 자로 하여금… 이 말, 아주 아주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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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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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관한 문제


레몬, 권여선, 창비, 2019.


   오늘도 과자가 탔다.

   되는 노릇이 하나도 없군요 우리 베티 번 씨


  「레몬과자를 파는 베티 번 씨」를 찾아봤다. 자작시라고 했으니 실제하지 않을 텐데도 인터넷상에 저 시가 있을 것만 같아서. 첫 연의 다음은 어떤 시구로 채워져 있을까. 시큼한 레몬을 쳐다보며 마무리되지 않은 시의 나머지를 생각했다. 어째서 소설의 나머지가 아니었는지는 모르겠다. 더웠고 되는 일 하나 없는 또하루였다.

  소설은 날마다 보는 살인사건 기사가 담지 않을 것을 이야기한다. 고교생 A양과 B군 혹은 김양과 한군에 관한 기사가 아니다. A양과 B군 혹은 김양과 한군을 알고 있는 “생생한 삶의 내용이 파괴된” 이들의 삶의 이야기다. 다언, 상희, 태림 세 화자가 장마다 연도를 바꿔 이야기를 전개하고 2002년의 어느날 경찰서 취조 장면을 상상하는 다언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어떤 삶은 이유 없이 가혹한데, 그 속에서 우리는 가련한 벌레처럼 가혹한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우리 삶에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걸까.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걸까. 그저 한만 남기는 세상인가. 혹시라도 살아 있다는 것, 희열과 공포가 교차하고 평온과 위험이 뒤섞이는 생명 속에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일 수는 없을까.


  뭐라 형용할 수 없을만큼 아름다운 언니의 죽음. 그후로 다언은 ‘되는 노릇 하나 없다’ 말하지도 못하는 삶을 산다. 나머지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사라진 삶. 거기다 사실은 언니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에 죄책감과 부채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삶. 용의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명확히 특정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해언의 죽음에 가해자는 없는 셈이다. 소설은 가해자를 정확히 밝히지는 않고 있다. 화자의 독백을 통해 유추하도록 했다. 특별히 미스터리함이 강조되진 않는다. 다언이 해언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에서 벗어나 어떻게 애도에 이르는가에 더 중점을 둔다.

  세 화자를 중심으로 했는데 다언 외에 두 사람은 용의자가 아니다. 작가는 이들을 비켜두고 사건의 목격자 태림과 특별한 등장인물을 등장시킨다. 다언의 동아리 선배 상희다. 언니가 죽은 동아리 후배와 잘 아는 자의 삶은 그 ‘죽음’에 얼마만큼 영향을 받을까. 다언에서 상희의 시점으로 바뀌는 지점에서 이 소설이 다른 소설과 다르게 느껴졌다. 왜 상희가 등장할까, 상희의 역할은 무엇일까. 상희의 목소리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제법 한다. 상희가 본 다언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다언만이 뭔가를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나 또한 뭔가를 잃어버렸다. 오히려 더 치명적인 쪽은 나일 수 있었다. 다언은 자신이 뭘 잃어버렸는지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는 데 반해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다언을 관찰하고 다언의 말을 들으며, 이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저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관대한 척 고개나 끄덕이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다언에게 내 속을 들키자 발끈하여 그녀를 공격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상희는 다언을 관찰하는 위치에만 머물지 않는다. 다언의 지적처럼, 상희의 자각처럼 상희는 사건의 피해자, 유가족을 바라보는 자들이다. 어설프게, 섣불리 위로하려 들며 내밀한 이야기들을 들으려는, 들을 자격을 부여받은 듯이 행동하는 그런. 어쩐지 나도 뜨끔해진다.

  소설은 한편으로는 그 구조가 엉성하게 느껴지면서도 뭔가 단단하게 느껴진다. 이 아이러니를 모르겠지만 그렇다. 먹먹함이 사로잡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용의자로 다언의 증오를 한껏 받은 한만우의 삶이 그의 동생 선우가 그의 어머니가 겪은 삶이 있으니까. 원래 부르려던 이름 대신 바꾸게 된 이름이 죽음을 부르게 된 것은 아닐까 싶어 죽은 딸의 이름을 개명하려는 다언 어머니의 행동이,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할 줄도 모르고, 당한 줄도 모르고 여전히 사모하던 여학생의 기억에 수줍은 웃음을 웃어대는 한만우의 미소가, 계란 후라이를 부쳐먹는 만우와 선우 남매의 모습이 계속 맴돈다. 이건 누가 누구를 죽였는가에 관한 질문과 답이 아니니까, 그래서일 것이다. 삶에 관한 문제니까. 


이제 그들은 죽고 없다. 한만우의 죽음을 경유함으로써 나는 비로소 언니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삶과 마찬가지로 언니의 삶 또한 고통스럽게 파괴되었다는 것을, 완벽한 미의 형식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내용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있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면 그밖의 것은 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살아 있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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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 - 2019년 제4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윤이형 지음 / 문학사상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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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제도와 인간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 문학사상사, 2019-01-18.


  제법의 고양이들이 거리를 배회했다. 울음소리가 격렬한 밤이 지나면 길 어딘가에 죽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 적 있다. 아직까지 죽은 고양이를 본 일은 없었기에 고양이에 대한 혐오를 실천하는 사람은 동네에 없구나 생각했다. 반려묘를 키우는 이들이 많은가 하면 고양이를 싫어하는 특히 길고양이를 혐오하는 사람들도 많다. 길고양이에 대한 혐오는 길고양이를 돌봐주는 사람을 향한 혐오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때면 고양이보다도 그 사람에 집중하게 된다. 반려묘의 두 번째 죽음에서 시작하는 이 소설 역시도 고양이로 시작하며 고양이에 관해 이야기할 것 같지만 결국 사람의 이야기다.

  윤이형의〈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는 이혼한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결혼제도 속에서의 인간의 삶을 이야기한다. 각자 살아온 가정과 사회에서 삶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달리 형성해 온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움켜쥐려는 것과 벗어나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일견 결혼이라는 제도 하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가치와 ‘나’를 재정립하는 과정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어쩐지 이 과정은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결혼이란 사람을 늘 같은 형태로 몰아넣는다는 생각이 든다.

  <대니>는 아이돌봄 로봇에 관한 이야기다. 대니는 아이를 돌봄에 있어 결코 지치지 않는 에너자이저로서 설계된 감정도 인지하는 완전한 인공지능로봇이다. 자신처럼 아이돌봄을 수행하는 할머니와의 공감과 연민, 유대와 애정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멀리서 할머니를 처음 보았을 때 자신처럼 로봇인줄 알았다가 다른 모습을 찾아내고 그래서 ‘아름답다’ 느끼는 대니는 이십대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할머니는 곧 칠십이다. 대니는 할머니가 아이들 돌보는 모습을 보며 자신과의 차이점을 이렇게 말한다.


할머니는, 견디고 있었어요. 저는 견디지 않아도 되거든요.


그런데 할머니는 그렇지 않았어요. 할머니의 어떤 어려움은 없어지지 않는 것 같았어요. 견디는 거죠, 그런 건?


  살아가는 일이 견딤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하루하루를 견딘다는 말이 주는 씁쓸함은 크다. 프로그램화되어 있는 대니가 느낄 수밖에 없는 인간의 견딤이, 고통이 아이돌봄에 관한 것이든 늙어감에 관한 것이든 영원히 그것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 관한 것이든 할머니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며 인지하는 대니에게서도 느끼게 된다.


저에게는 매 순간이, 말하자면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과 같아요. 농구공을 돌대에 넣는 것과 같죠. 나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있고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요. 그게 저의 기쁨이에요. 그다음은 없어요. 기쁘지만, 없어요. 그래서 저는 움직여요. 만약 한 사람을 돕지 못해 어려워지면 다른 곳으로 가서 다른 사람을 도와요. 그럼 어려움은 없어져요.


  각각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자전작의 작가는 윤이형이다. 두 이야기의 바탕은 결혼과 육아가 크게 자리한다. 생각하면 제도는 그 모든 것을 ‘대니’화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제도 그 자체는 어디에도 흔들림없이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 그러나 제도란 항상 완벽한 것이 아니기에 보완이 필요하고 냉정과 감성이 함께 필요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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