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 - 제2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화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그저‘나’

다른 사람, 강화길, 한겨레출판, 2017-08-29.


  왜, ‘다른’ 사람이어야 할까. 그저 ‘나’이기만 하면 안되는 걸까.

  다른 사람이기를 강렬하게 열망하는 『다른 사람』은 읽지 말까 싶을 정도로 짜증스러웠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 오를 대로 오른 짜증이라는 감정이 불편함임을 알았다. 소설속 상황은 마냥 현실같아서 지겨우리만치 그 상황에 ‘또’, 어김없이 ‘또’ 있다는 현실이 불편하고 감정적으로 피폐함을 느끼게 했다. 그러니 책을 덮고 싶을 수밖에.『82년생 김지영』과 마찬가지로 익숙한 상황을 글로 보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소설『다른 사람』. 문득 이 소설을 보면서 환상소설로 빠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나는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걸까.

  단편집『괜찮은 사람』이 확장된 이 소설은 반복적 폭력에 놓인 ‘여성’의 상황과 내면의 목소리를 들춘다. 내면의 목소리는 절대 들리지 않는다. 그들 내면에서만 맴돌기에 절대 타인은 알 수 없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내 감정에 우선하여 의미를 부여하기에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각자 가지는 내면의 목소리는 항상 한사람의 것처럼 같기만 하다.

  소설을 읽다 보면 으레 특정한 누군가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되고 그의 시선을 따라 상황을 보게 된다. 대체로 주인공, 화자의 시선을 따라 상황을 보게 되고 그렇기에 주인공은, 화자는 절대적으로 ‘선’이기를, 되도록 막말을 하지도 않고 타인을 이해하는 언행을 하기를 바라게 된다. 당연한 응원을 주기 위해서. 그러나 진아를 피해자로만 바라보던 시선은 한순간 무너진다. 그것은 진아와 수진이 피해자인 동시에 같은 상처를 받는 이에게는 가해자였기에 그렇다. 진아와 수진 그리고 유리가 겪는 고통은 분노할 수 없을 만큼의 무력함이 흘러 참으로 비참하고 애절하다. 이들은 현재의 고통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는데 어김없이 어머니로부터 전해진 무력화되고 일상화된 폭력에 놓였던 것을 보여준다.


할머니가 옆에 있는 한 수진은 영원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그렇게 열망하고 노력했던 ‘다른 사람’.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우습게 볼 수 없는 사람. 절대 강간당하지 않는 사람. 수진은 단 한 번도 할머니를 원망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수진은 사실 늘 원망했다. 사람들이 그녀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밖에 대접받지 못하는 이유를 원망했다. 어쩌면 바로 그것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니, 바로 그것 때문이다. 사실 수진은 누가 어떻게 해도 상관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술 먹고 한 번쯤 건드려도 상관없다고. 왜냐하면 어차피 쟤는 춘자 딸이니까. 바로 세상의 빚을 모두 짊어지고 있는 애니까!


  피해자들에게 사회가 ‘어떻게’ 했는지를 목격한 이들이 현재의 폭력에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은 오로지 감추고, 감추고, 감추는 것이다. 진아도 수진도 그들 상황에서 오로지 서로에 대한 견제와 미움으로 삶을 버티어내는 모습은 아프게 다가온다. 같은 고통과 상처를 받는 피해자들이 가해자가 아니라 서로를 고통의 근원, 원인으로 돌리며 스스로의 피해를 지우려는, 감추려는 모습은 왜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렀나를 깨닫게 한다.


나도 유리를 그렇게 험담했었지. 그때는 몰랐어.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누군가 나를 학대하도록 내버려두는 마음과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걸 말이야.


  그래서 이 소설은 미투 운동을 생각나게 한다. 마침내 진아가 각성한 것처럼 같은 일을 겪는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야 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해야 함을. ‘다른’ 사람일 필요없이 그저 ‘나’이기만 하면 되는 세상, 그러한 인식들이 사회에 머물기를.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우습게 볼 수 없는, 절대 강간당하지 않는 그런 “다른 사람”일 필요가 없는 그저 “나”이기만 하면 되는 그런 세상이 되기 위해선 필요한 일들을 한창 사회가 시작하고 있다. 『다른 사람』이 보여준 불편한 현실이 피해자들의 각성을 계기로 달라질 현실을 기대하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의 신
김숨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리 뮌하우젠증후군을 앓는 당신


당신의 신, 김숨, 문학동네, 2017.


  『당신의 신』에는 「이혼」「읍산요금소」「새의 장례식」세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각각의 단편을 관통하는 공통의 주제는 이혼과 폭력이다. 소설 속 여자들은 모두 이혼을 겪었다. 이혼이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 여자의 남편들도 이혼을 겪었다. 이혼이란 부부가 겪는 일이지만 남자보다 더 힘겨운 이혼 전후의 여자의 트라우마가 세밀하게 담겨 있다. 그것은 이혼의 원인이 남자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혼한 남녀를 대할 때 사람들이 가치중립적이지 않고 ‘이혼녀’에게 더 큰 시선을 두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의 딸들이 이혼을 생각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행동으로 결과로 만들었다면 그들의 어머니는 끊임없이 이혼을 생각만 할 뿐 실행하지 못한다. 모두에게 이혼의 이유는 어김없이 ‘남편의 폭력’이고 도망치지도, 이혼하지도 못하는 이유는 ‘자식’이다. 한사람에 의해 폭력은 자행되고 그 폭력은 반복되어 되물림된다. 자식을 위해서 이혼하지 못하지만 자식들은 그 상황 자체가 지옥일 뿐이다. 한 사람이 참는 것으로 가정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정폭력에 노출된 아이는 자신의 가정을 꾸려서도 그 폭력성을 보인다.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의 도식화는 우스울 정도로 여자는 폭력적인 남편을 만나는 것으로 남자는 그 스스로 폭력적인 남편이 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객관적 통계로도 드러난 ‘어머니’들의 모습이자 ‘여성’의 모습이기도 하다. 조금 달라진 세상이라고, 묘사가 있다고 한다면 여성들이 이혼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이제는 이혼함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전자의 상황에서 참고 감당해야 하는 여성의 삶은 이제 이혼 후 감당해야 삶에 대해 세세하게 끄집어내고 있다.

  『당신의 신』속 남편들은 그들이 자식일 때 당한 폭력을 아내들에게 행함으로써 피해자에서 가해자의 위치로 이동한다. 남편의 폭력 때문에 이혼하고 그후에도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여성들의 모습을 보다 보면 정녕 여성에게 결혼이란 ‘맞아 죽기 위한 계약서’를 작성하는 일만 같다. 결혼은 ‘아내’라 불리며 남편에게 폭력당하는 여성의 존재를 만든다. 이혼한 후에는  이혼녀라는 명명으로 남성들에게 폭력당하는 여성을 만든다. 이혼녀에겐 성희롱과 추행이 당연하다는 듯 성폭력이 뒤따르고 이혼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늘 따갑다.

  최초의 폭력은 어디서 기원한 걸까. 아버지의 폭력을 두려워하고 혐오하던 아들들은 왜 같은 아버지가 되고 마는 것일까. 아버지의 폭력에 무기력하게 대응하는 어머니를 연민하고 혐오하던 딸들은 왜 폭력당한 채 살아가는 것일까. 왜 이혼을 하고서도 삶을 온전히 버티어내는 것에 힘겨워할까. 제 폭력에 힘겨워 하는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자 「이혼」속 남편은 시를 쓰는 아내를 향해 말한다.


“네가 날 버리는 건 한 인간의 영혼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 가지야. 그러므로 앞으로 네가 쓰는 시는 거짓이고, 쓰레기야.”


  새장 속 십자매를 향해 ‘죽어’라고 말하는 폭력당한 소년의 한마디 말은 십자매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 폭력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음을 곁에 두고 영혼이 파괴된 채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게 한 인간의 영혼을 파괴한 자들이 하는 저런 말에 어떤 대꾸를 해야 할지 좋을 런지…. 여성을 ‘모성’이라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신처럼 받드는 그들의 이율배반적인 행태들은 환멸스럽다. 그들이 정의하는 ‘모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모성(母性)이 어머니의 것이라면 남편들은 왜 아내에게 어머니의 것을 보이기를 강요하는가.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고 받아내는 제 어머니의 모습을 아내에게 요구하는 그들, 나약함을 가장하며 더할 수 없는 영혼 파괴자의 신인 그들이 제 영혼의 안전을 염려한다. 제 영혼의 안전을 그들이 파괴한 것에 대고 찾는다. 이에 대해 아내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만 남편의 말 속에 갇히고 만다.


“나는 당신의 신이 아니야.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찾아온 신이 아니야. 당신의 신이 되기 위해 당신과 결혼한 게 아니야.”


  결혼은 누군가를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이루기 위한 선택이다. 그래서 작가는 행복하지 않은 결혼에 맞서 “이혼이 불행이 아니기를 바라”고 바란다. ‘이혼’이 불행인 것이 아니라 이혼을 하게 된 원인 속에 이미 불행이 있다. 가정폭력이라는 이름, 그 떨치지 못한 폭력과 불행의 트라우마가 ‘결혼’을 통해 재생산되는 현실이다. 그런데 명쾌하게 ‘이혼’이 결혼으로 인한 불행을 단절시키는 것을 끝나지 못함이 얼마나 크나큰 비극인가. 아내는 남편들을 위한 신이 아니다. 아내는 남편들의 ‘어머니’도 아니다. 그들의 ‘폭력’은 아내가 ‘신’이 되어 어루만져주고 ‘신’이 되어 참아줘야 하는 것이 아니다.

 

  루게릭병으로 인한 신체장애를 가지고 살았던 스티븐 호킹이 사망했다. 천재 물리학자로 칭송받은 스티븐 호킹의 사망 소식에 문득 소설 속의 저 말이 떠올랐다. 25년간의 결혼생활이 이혼으로 끝난 후 스티븐 호킹이 재혼한 사람은 그를 돌봐주던 간호사 일레인이였다. 신체적 고통과 함께 이혼으로 정신적 고통을 겪었을 호킹 박사를 간호하고 돌봐주며 호킹 박사의 영혼을 구원하는 존재처럼 행동하던 일레인. 그러나 일레인은 호킹 박사에게 지속적으로 폭력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리 뮌하우젠 증후군을 앓는 일레인은 호킹 박사에게 ‘신’이 되기 위해 결혼한 것일까. 그 자신은 그렇다고 생각했을까. 일레인처럼 『당신의 신』속 남편들이 대리 뮌하우젠 증후군을 앓는 환자들 마냥 느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해하지 않겠다


이해 없이 당분간, 김금희 외, 걷는사람, 2017-08-06.


  어느 순간부터 한국문학에서 소설의 길이가 짧아지고 있다. 일정한 분량을 요구하는 문학상에서도 장편 아닌 중편 정도의 소설로 바뀌고 있다. 여전히 일정한 분량의 단편 소설을 신인의 등단 심사로 하고 있지만, 출판계에서는 적어도 지속적으로 ‘짧은’ 이야기를 펴내고 권장하고 있다. 그러면 이런 짧은 이야기는 이미, 등단한 이들에게만 해당하는 ‘장르’인 건가?!

  다양한 문학상에서 이름을 봐온 많은 작가들이 아주 ‘짧게’ 말하고 있는 책, 『이해없이 당분간』. 22명의 작가들의 이름을 보면서 나름 어느 작가의 작품이 좋은가를 가늠부터 하면서 책장을 넘기면 그 짧은 이야기에 뭔가 아직 남은 건 아닌가 하며 책장을 뒤적이게 된다. 소설이라기보다 수필같은 느낌을 받는다.

  짧다는 건, 22명의 작가가 글을 썼다는 건 22번의 휴지를 둘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휴식을 두고도 이 책은 터무니없이 속독하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책을 덮고 난 후 책의 제목만 남았다. 이해없이 당분간. 뭐라고 해야 하나, 그냥 이해없이 당분간 살자, 뭐 그런 말을 혼자 되뇌였다. ‘이해해라’ ‘이해해줘’ ‘이해해야지’라는 말을 너무 자주 듣고 다짐하며 살아왔기 때문일까. 때론 누군가를 무언가를 ‘이해하지 않겠다’라는 생각을 그대로 유지할 때 어떤 해방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도대체 메워지지 않는 간극에 힘겨워하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탓이리라. 그리고 늘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책임을 나 자신에게 두었던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이해하지 않으려는 나를 배려없음과 이기심가득한 인간이 되려는가, 채찍질하며 어떡하든 ‘이해’하려 몸부림치려던 때, 그것 자체가 스트레스였음을 이제 알아간다. 그것은 보다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까, ‘착한’에 대한 강박이었을까.

  어떤 사건에 대해 사람에 대해 ‘이해하고 싶지 않아’를 고수하며 편한 마음을 느꼈던 이후로 억지로 이해하려던 작위적인 형태를 버렸다. 살면서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일도 있는데 이런 이해에 대한 강요가 마음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제목이 남은 책을 보며 다시금 다짐한다. ‘이해없이 당분간’ 살겠다라고.

  마침 인터넷엔 전직 상사가 실검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행태를 알고 있기에 호탕할 수밖에 없는 웃음이 나왔고 “역시 이해가 안되는 Ⅹ”이라 외치며 하루종일 피식거렸다. 실검을 장식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더욱 더 실소가 늘어갔다. 이해되는 건 그 개인의 욕망, 역시 이해가 안되는 것은 ‘나를 뽑아줍쇼’로 자리를 유지하는 자의 결코 변하지 않는 그 행태. 욕망이 있다면 그 욕망에 맞춰 성실하게 일하는 자세를, 진심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함에도 그런 것은 역시 안중에 없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선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여전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마냥 찍어버리는 유권자들에 또한번 이해하지 않겠다가 반복된다.

  하긴,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누군가를 얼마나 알겠는가. 가까이서 본다 한들 알기 쉽지 않은 이들도 있다. 그렇기에 ‘그럴 사람이 아닌데’라는 말은 허무하게 들린다. 누군가를 ‘그럴 사람이다’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고 단정짓는 것도 개인적인 관계와 관찰에 따른 나의 ‘느낌과 판단일 뿐, 그것이 진정 맞다, 아니다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게 “그럴 사람 아니다”가 누군가에게는 “그럴 사람이다”를 완전히 반박하는 말이 아니다. 그건 별개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과 이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연이어 인터넷에 오르내리고 있다. 비록 가까이서 보지 못하여 ‘그럴 사람’에 대해 판단하기란 어렵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저지른 ‘죄’에 대한 이해력은 지니고 있기에 개인에 대해 ‘이해하지 않겠다’는 유효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홉번째 파도
최은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지막 파도가 남았다

아홉 번째 파도, 최은미, 문학동네, 2017-10-31.


  작가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했다. 『아홉 번째 파도』는 사랑의 이야기인가, 난 고개를 갸우뚱하며 책을 덮었다. 작가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줄곧 사랑따윈 어디 있나 하며 ‘사회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말에 다소 당황했고, 난감했고, 허무했다.

  사랑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응원하는 일도 거기에 빠져들지도 않았다. 내 머릿속에 감성은 어디로 보내버린 건가, 사랑에 대한 정형화된 틀을 가지고 있는 건가. 어떤 상황을 보는 시각이 한정적인 건가.

  소설은 가상의 도시 ‘척주’를 배경으로 살인사건 용의자 추적과 핵발전소 건설을 둘러싼 주민들간 갈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폐광지대인 이곳엔 과거에도 자살로 판명된 의문의 사망사건이 있었고 핵발전소 유치를 둘러싼 갈등이 첨예한 가운데 약왕성도회라는 사이비집단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곳이다. 어린 시절 척주에서 살다가 다시 돌아온 보건소 약사직 송인화가 사건의 중심에 얽혀 있다.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누구인지, 왜 죽였는지를 추적해 가며 과거와 현재의 사건이 이어지고 그 상황에서 충격적인 비밀들이 드러난다. 충격이라고 했지만, 사실 충격이랄 것도 없이 이야기의 전개를 가늠할 수 있다. 핵발전소 유치와 같은 갈등 상황에서 이권을 얻기 위한 이가 결국 승리하리라는 것을. 답정너처럼 그들이 바로 모든 열쇠를 쥐고 있음을. 그러니까 결국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이의 끝없는 욕망과 광기로 치달을 이야기가 되리라는 것을.

  그래서 소도시 느낌의 척주시는 늘 언제나 팽팽한 긴장감이 쌓여 있다. 업무만이 아니라 사람들간의 개인적인 관계도 긴장과 대립으로 팽팽하다. 누군가와 마음을 터놓고 나눌 새없이 편가르기가 자연스레 형성되는 곳에서 송인화와 사회복무요원 서상화와 과거의 연인 국회의원 보좌관 윤태진과 송인화의 이야기가 있다. 척주 출신으로 고교시절 콜타르에 빠지고 난 뒤 후유증에 시달리는 윤태진의 좌절과 분노가 송인화와 대비되어 생생했다. 

 『아홉 번째 파도』라는 제목에 대한 이미지를 생각하다가 러시아 화가 이반 아이바좁스키의 그림명이라는 것에서 이해가 되었다. 그림 「아홉 번째 파도」에는 산처럼 우뚝 솟아 폭풍우치는 바다에 난파된 배와 이제 해가 떠오르는 듯 붉은 빛과 구름들이 어우러져 있다. 폭풍우가 이제 끝나려는 듯 해가 떠오를 모양이지만 러시아 선원들에게 ‘아홉번째 파도’란 폭풍이 몰고 오는 가장 치명적인 마지막 파도라고 한다. 난파된 배에서 지쳐 쓰러진 선원들이 러시아인들이라면 ‘아홉 번째 파도’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인데, 그들은 쓰러지지 않고 마지막 아홉 번째 파도에 맞서기 위한 대비를 할까. 그대로 쓰러져 버릴까.

  소설 『아홉 번째 파도』에서 본 것은 끝없이 덮치는 파도였다. 휘몰아치는 파도에 송인화도 서상화도 윤태진도 난파된 배를 겨우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모두, 척주시라는 바다에서 욕망과 광기에 가득한 이들이 벌이는 파장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한 개인의 욕망이 동일한 욕망으로 뭉쳐져서 만들어내는 거대한 포말. 쉬이 사그라들지 않고 끊임없이 덮쳐오는 거대한 파도. 그들이 만다는 비리가 악이 덩어리지는 척주시의 모습은 이제까지 쉬이 만나는 모습이었고, 앞으로도 여전히 볼 모습들이다. 한 개인이 소소하게 희망하던 삶의 꿈들이 무참히 일그러지는 모습들 또한 쉬이 보는 모습이다.

  개개인들의 삶을 더 이상 비참하게 하지 않고 행복한 세상에 살기 위해 이런 사회문제들을 파헤치고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거대한 구조만을 바라보다가 언뜻 언뜻 개인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누구든 다르고 개인적이긴 하지만 크고 중요한 것 역시도 개개인에게 다른데 문득 대를 위해 소는 희생됨이 마땅하다는 사고, 우선되어야 하는 가치에 대한 차이, 무엇이 대이고 소인가에 대한 생각들이 아홉 번째처럼 밀려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빛의 호위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 멀리 핀 연기

빛의 호위, 조해진 저, 창비, 2017.2.20.


  오랜만에 햇빛을 본다. 지난 겨울은 추웠고 그래서 봄은 더욱 더 멀리에서 멈춰진 것처럼 느껴졌다. 봄비의 가벼움이 아니라 겨울의 무거운 비가 완전히 걷어진 건지는 모르겠다. 창문을 열면 아직 추위는 머물러 있다. 창문 밖으로 바라보는 빛은 어제보다도 따스하다. 햇빛이 비치지 않은 곳곳엔 아직 찬기운이 머물러 있다. 햇빛쪽으로 나아가야 휘감은 온기가 느껴진다. 그녀, 권은이 느꼈던 빛이 창문으로 넘어온 빛과 같은 느낌이었을까.

  빛이 호위하는 순간의 그 황홀함이 따스함과 함께 가득한 「빛의 호위」다. 분쟁지역에서 보도사진을 찍는 권은. 홀로 외롭게 방안에 앉은 아이가 반장에게 건네받은 카메라 속에서 빛을 발견하는 순간, 그 순간에 대해 ‘의미’를 만들고 그 ‘의미’를 간직하며 살아간다. 이 이야기는 또다른 이야기, 나치의 유대인 박해로 지하창고에 숨어 지내야 했던 알마 마이어의 이야기와 함께 진행된다. 알마 마이어 역시 그 갇힌 공간에서 연인이 넣어준 악보 한 장에서 ‘빛’을 발견한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뭔지 알아? 편지 밖에서 나는 고개를 젓는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어.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이라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반장, 네가 준 카메라가 날 이미 살린 적이 있다는 걸 너는 기억할 필요가 있어.


  실제로 카메라에서 빛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휙 지나가는 빛’을. 하지만 이미 반장이 무심히 건넨 카메라에서, 급박하고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숨을 곳과 먹을 것을 내어준 연인에게서 이미 권은은, 알마 마이어는 마음을 열어 빛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들의 존재와 행위로 ‘빛’을 온전히 환하게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 잠깐의 빛에서 희망을, 마음을 온전히 담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집의 몇 개의 단편소설들은 대표적인 문학상을 받은 작품들이라 반가운 친구들을 다시 만나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과 같은 또다른 느낌으로 조해진의 단편들이 지니는 일관된 느낌을 느껴본다. 대부분이 상처와 고통의 상황 속에 놓여 있고 그 기억으로 인해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각자의 삶에서 겪은 상처에 힘들어 하지만 어떻게든 숨을 쉬기 위해 애쓰고 있다.

  등장인물들도 공간적 배경도 시간적 배경도 한국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과 인물이 교차되며 등장한다. 빛의 호위 속의 권은과 알마 마이어가 교차되어 보여주듯이 개인적인 이유로든 사회적인 이유로든 받게 되는 상처란 시간도 장소도 인물도 뛰어넘는다. 왜인지 상처란 개별적인 것 같으면서도 보편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또한 그 반대로 보편적인 것이지만 개별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누가, 어떤 이유로 상처를 받았더라도 또는 누구에 의해 상처를 받았더라도 그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누군가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상처를 주는 것도 상처를 극복하게 하는 것도 사람. 누군가의 호의. 그로 인해 어떤 위험하고 쓸쓸한 상황에서라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됨을 느낀다. 전반적으로 쓸쓸한 저녁 풍경같은 느낌의 단편들이었지만 「빛의 호위」 하나로 저 멀리 밥짓는 연기를 생각하게 한다. 인간에 대해 실망과 절망하다가도 다시 희망과 기쁨을 얻게 한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휙 지나가는 빛처럼 창문을 열면 그 빛이 타고 들어온다. 문을 열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