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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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문학동네, 2018.


  정미경 작가의 소설은 대체로 도회적인 느낌이 그윽했기에 『당신의 아주 먼 섬』의 다른 느낌에 사뭇 서글펐다. 작가의 마지막 소설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유작이니까. 남편이 아내가 떠난 빈방에서 찾아 책으로 펴냈다. 어쩌면 더 수정되었을지도 모를 원고는 발견된 순간의 글로 출판되었고 이전과는 너무 다른 느낌이라서 이것이 병마의 작가에게 생긴 시선의 변화인가 싶기도 했다. 먼 섬의 풍경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이 세상에 없는 작가의 이미지는 작가가 마지막 남긴 글로 채워진다.

  섬은 계절을 품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곳으로 그려졌다가 점점 뉴스에 등장하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좀처럼 아름다움이 되살아나지 않기도 했다. 특히나 염전이 가득한 섬이라면 노예와 성폭력 사건이 먼저 자리잡아 버려서, ‘섬’을 잃어버린 기분이다. 당신의 아주 먼 섬이 아니라면 다시 섬의 이미지를 되돌릴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그 섬에서 떠나고 싶어하지만 늘 상처를 받거나 삶의 실패를 경험하고 나면 다시금 섬을 찾는다. 그때 그들이 섬을 찾는 것은 위로와 치유를 위한 걸음이었을까, 도피를 위한 것일까. 떠난 사람들이 되돌아오지 않았다면 여기, 이 섬은 어떤 이야기를 품으며 섬의 이미지를 만들어 갔을까. 영도. 영도로 기록하고 영도가 기록하는 세계로 그려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섬은 영도를 걷어내고서야 다른 이미지를 갖는다.

  시력을 잃어가는 정모, 청각을 잃은 판도, 친구를 잃은 이우. 아들 셋을 모두 바다에 잃은 이삐 할미. 이들은 ‘잃어’버렸기에 상실의 감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해도 그 감정을 서로에게 토로하면서 위로를 받는다. 정모는 세상을 볼 수 없는 감각을, 죽음을, 그 불가해한 세계를 잊기 위해서 섬의 소금 창고에 도서관을 꾸미는데 열심이다. 이우와 판도는 정모가 만든 그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풍경을 읽고 마음을 읽는다.  


판도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우의 손바닥에 썼다.

알, 았, 는, 데, 묻, 는, 순, 간, 잃, 어, 버, 렸, 어.

이번엔 이우가 판도 손바닥을 펼쳤다.

잊. 어.

판도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다시 썼다.

잃, 어.


  이 소설에선 ‘슬픔이라는 그릇에 담긴 따뜻함’이 느껴진다. 마음에 두었던 연수의 딸 이우를 돌보게 된 정모가 제 시력 상실에 대해 얘기하게 되는 사람이 이우이게 되는 것도 그 둘 사이의 유대가 있었기에 이뤄질 수 있다. 누군가에게 간절히 말하고 싶었을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하면서 어른 정모가 느끼는 이 감정이 소설속 전반에 깊게 깔려 있다. 서러운 가운데 슬픈 가운데 아픈 가운데 타인으로부터 받는 따뜻함이 ‘태양과 바람, 밀물과 썰물의 틈새에서 고운 결을 만든다.’ 아니 애당초 이들 자체가 고운결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결이 상처를 걷어내고 다시, 생과 마주할 힘을 얻어가는 것. 그것은 그들이 서로에게 내미는 슬픔에 깃든 따스한 말들과 표정과 진심어린 애정에 힘입어서다.

  그런 결을 잃어버린 이우의 엄마 연수는 섬을 떠나 성공적인 일에 집착하고 힘겨운 딸을 고향의 정모에게 보내지만 이우가 가진 슬픔과 아픔보다 ‘보여지는 것’에 집착한다. 결국 열아홉살 임신한 이우를 보기 위해 섬으로 오지만 딸과의 갈등만 확인하며 쫓기듯 떠나가게 되는 연수다. 정모에게 소금창고를 빌려준 태원의 아버지 영도 역시 그러한 존재다. 단지 영도는 섬을 떠나지 않고 섬에 머무르며 섬을 장악한다. 오로지 수익에 집착하는 영도는 다 꾸려진 도서관을 못마땅해하며 도서관 사업을 저지하려 한다. 부를 쌓기 위해 타고난 교활함과 타고난 사악함을 가진 영도라는 인물이 사람들과의 관계나 섬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섬을 일구어가는 방식이 섬의 모습이 된다. 그가 가진 섬에서의 영향력이 섬을 좌지우지한다. 연수와 영도가 섬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마다 섬은 따스한 온기를 잃고 비극적이고 불쾌한 기운들이 솟아오른다. 그들이 가진 결이 섬을 장악하지 않으려면 그들은, 사라져야 한다.

   

“아저씨, 내가 올게. 당장은 아니어도, 돌아와서 책을 읽어줄게.”


  그리고 고운결을 가진 이들이 남아, 고운결을 갖고픈 이들이 찾아와 섬을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한다. 그렇게 섬의 풍경이 가슴에 남는다.


누군가 거대한 입을 벌리고 검은 구름을 토해내는 것 같다. 그 틈 사이로 붉은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어디선가 커다란 나무이파리가 휙휙 날아왔다. 창고 지붕들이 들썩거렸다. 갯벌의 풀들이 바닥을 쓸 듯 엎드렸다가 가볍게 일어나곤 했다. 바람의 머리카락이 보이는 것 같았다. 갯둑에 서 있는데 몸이 주춤주춤 뒤로 밀려났다. 입고 있는 옷이 파닥파닥 소리를 내며 나부꼈다. 바다가 하얗게 일어섰다. 내가, 마지막으로 담아두고 싶은 풍경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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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의 유령들 - 제2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황여정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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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기억

알제리의 유령들, 황여정, 문학동네.


  마르크스가 독일 화폐 모델이 되었다. 통용되기 위해선 가격이 있어야 하지만 0유로. 자본과 적대적이었던 마르크스를 충실히 대변하는 기념 지폐다. 이 세상에서 참 불편한 이름의 대표격이기도 한 마르크스의 얼굴이 10만원권 지폐에 그려진다면 마르크스에게 가지는 불편한 시선들이 거두어질까 궁금해진다. 안타깝게도 마르크스가 한국 지폐 모델이 될 리가 없다. 특정 정당이 거품 무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쨌든 마르크스는 수많은 이들의 경외의 대상이기도 하면서 삶을 힘겹게 만든 탁월한 존재였다. 히틀러와는 차원이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현재진행형이면서 히틀러급으로 반응하기도 하다. 그리고 소설『알제리의 유령들』에서도 사람들을 힘겨운 삶으로 이끄는 존재감을 보여준다. 연애소설처럼 그려진 징과 율의 이야기가 어떻게 마르크스에게 가 닿는가. 가볍게 단문으로 쳐내는 글들은 마르크스가 지닌 존재감처럼 묵직한 이야기를 전한다. 과연 이 이야기를 믿어도 좋은가,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연극이 끝난다. 마르크스가 쓴 유일한 희곡의 막이 오른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이야기는 유령을 마주한 듯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린다. 몇 번이나 반복재생된 희곡 <알제리의 유령들>이 마르크스 저작이란 이름을 달고서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아니, 마르크스란 이름만 보면 부르르 떠는 권력이 존재하는 건가. 시절의 음률을 함께 나눈 관계들이 고통받고 상처받으며 서로에게 파괴된 음들을 던진다.


시대는 운명을 다한 것들을 돌아보지 않는다. 흔적을 추슬러 그것들을 잊지 않게 만드는 건 언제나 몇몇의 개인들이며, 그들조차도 기력이 다할 때가 온다. 비단 연극판의 일만은 아닐 것이었다. 그것이 현실이라고, 현실은 나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적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기적을 만드는 건 언제나 사람이며, 그래서 결국엔 헷갈리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는, 사회주의는 운명을 다했나. 다해가는가. 세계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더욱 민감하게 이 단어들에 반응하는 나라로 대한민국만한 데가 있을까. 대학생들의 연극적 상상력이 만든 연극을 놓고 진실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권력이 원하는 이념의 잣대로 존엄을 말살하고 생명을 파괴하던 시대는 소멸되었나. 새로운 흐름들이 분명 이어지고 있으니 달뜨는 마음이야 당연하지만 좀처럼 편하게 받아들이기엔 여전한 이념용 말들이 곳곳에서 난동을 부리는 것도 듣고 있어야 한다. 종북과 좌파라는 단어만 붙이면 진실은 상관없는 이들이 있으니 세상은 얼마나 살기 좋은가. 진실에 눈감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사는 이들의 세상은 얼마나 좋으려나.


모든 이야기에는 사실과 거짓이 섞여 있네. 같은 장소에서 같은 걸 보고 들어도 각자에게 들어보면 다들 다른 이야기를 하지. 내가 보고 듣고 겪은 일도 어떤 땐 사실이 아닐 때도 있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른 채 겪었거나 잘못 기억하고 있거나. 거짓이 사실이 되는 경우도 있지. 누군가 그걸 사실로 믿을 때. 속았을 수도 있고 그냥 믿었을 수도 있고 속아준 것일 수도 있고 속고 싶었을 수도 있고. 한마디로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애초에 자네가 판단할 수 없는 문제라는 거야. 그렇다면 애초에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이니 판단을 안 할 건가?


  실제인지 허구인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헤아리는 동안 거짓이 진실을 파괴하고 진실이 필요치 않은 형태를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소설은 보여준다.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것도 사람 진실에 상관없이 구는 것도 사람. 그리하여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은 사람. 그 잔인하고 처절한 유린에 유령처럼 생을 배회하는 일들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음 세대에게도 이어져 생에 긴 파국을 남기고 쓸쓸함을 남긴다.


기억으로 인해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이 변해도 계속해서 자기를 일관된 자기로 느낄 수 있고, 따라서 인간의 가장 큰 피로감은 바로 그 자기감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는 데서 오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들은 알제리에 갇힌 것이 아니라 자기라는 폐쇄된 시간 속에서 빠져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유는 아니었다. 자유는 역설적이게도 다시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야 얻어질 수 있는 것, 자기가 이전의 자기와는 전혀 무관한 자기로 존재했던 기억을 가지고 다시 이전의 자기로 합류할 때 비로소 자기와 비자기에 폐쇄되었던 자기가 자기이기도 하고 자기가 아니기도 한 자기가 될 수 있고, 그때 경험되는 것이 자유였다.


  부모들이 겪은 일들로 어릴 적부터 잘 지내온 징과 율이 오랜 시간을 서로 그리움을 간직한 채 서로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이 회복되지 않은 상처의 지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해도 그토록 세상을 서로를 배회하고만 있는 것은 물음을 갖게 했지만 생이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니까. 부모들처럼 징과 율은 자기라는 폐쇄된 시간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인지도. 시대가 겪은 기억이 세대에게 전해질 때에 그것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무한한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도. 종북과 좌파라는 두 단어로 진실과 거짓에 공간에 빠지는 이들이 다음 세대들의 자유를 왜곡시키고 말살시킬 때마다 청춘의 세대들의 정신이 회복되는데 무한한 시간이 필요로 된다는 아는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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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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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방은 없다

서른의 반격, 손원평, 은행나무, 2017-10-23.


  1988년은 88올림픽으로 규정되는 해이다. 다른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은 채 올림픽이 그 해를 잡아먹었다. 언제부턴가 특정 해에 태어난 이들이 그들만의 하소연, 푸념, 체념, 분노들을 쏟고 있다. 그 해에 일어난 어떤 특정한 사건들로 인해 삶이 더욱 어려워졌다고. 그들에게 따라다니는 재난들이 있다고. 그래, 그래, 그 해에는 그런 일이 있었구나, 힘들었겠구나 싶지만 어떤 사건들이 일어난 해 특정 세대만이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기에 사건만이 다를 뿐 그들의 외침은 같다. 한줄로 줄여, 살기 힘들다는 외침이니까.

  4.3평화문학상 수상작인 이 책 서른의 반격에선 88년에 태어난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들 88년생이 서른인 2017년의 현재에 그들의 삶은 힘겹고 그렇기에 그들의 연대는 싹튼다. 서른의 그들은 가벼운 한탄에서 진중한 분노로 현재를 말한다.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현실, 이상은 높지만 현실의 벽은 높다. 엄마의 힘겨운 투쟁으로 ‘추봉’이 아니라 김지혜라는 이름을 호적에 올린 김지혜의 현재 직업은 아카데미의 인턴이다. 인턴 역할이란 복사와 강의용 의자를 정리하는 일과 같은 잡무다. 엄마의 한방같은 강렬한 투쟁없이 김지혜는 언제나 속으로만 들끓는다. 업무를 지시하는 상관의 부당함에 대해. 작고 작은 일들 하나하나에서도 설움과 불편함, 부당함을 느끼는 일상을 견디고 있을 때 자신과는 다르게 항변하는 이의 목소리를 듣고, 보는 것은 충격을 준다.


그렇게 생각하는 한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질걸요? 억울함에 대해 뒷얘기만 하지 말고 뭐라도 해야죠. 내가 말하는 전복은 그런 겁니다. 내가 세상 전체는 못 바꾸더라도, 작은 부당함 하나에 일침을 놓을 수는 있다고 믿는 것. 그런 가치의 전복이요.


  한사람의 시작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아카데미에서 만난 네명은 '을‘의 삶을 분개하며 점차 굴복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부당한 권위를 이용해 세상을 뻣뻣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곤란하게 하고 면박을 주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그들은 움직인다. 서른살 동갑 규옥의 힘찬 의지에 힘입은 네명의 행동은,   퍼포먼스 같이 보이기도 하는 그들의 반격은

반기일까 반항일까. 놀이인가?


세상은 경직돼 있고 모두가 무기력증에 빠져 있죠. 난 반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치기 어리다고 욕 들어도 좋으니 적어도 반항을 해보고 싶다고요. 역사가 말해줬듯 급진적인 혁명은 실패할 겁니다. 세상은 점점 팍팍하고 딱딱해지고 있어서 겉으로 보이는 움직임은 통제되거나 검열되니까요. 난 통제나 검열이 불가능한 일들을 해보고 싶은 겁니다. 재미있게, 놀이처럼 말이죠.


  이런 행동을 통해 그들은 재미와 통쾌함을 느낀다. 부당함에 속만 끓이며 무력하게 대꾸한번 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함께 하기에 힘을 낼 수 있었고 반란을 행하는 하나하나에서 활력을 얻는다. 다만, 이런 그들을 지켜보는 난 활력을 얻지도 재미를 느끼지도 못했다. 이런 행동들로 구치소에서 밤을 지세우고 난 후 “하찮아서 다행”이라 말하는 지혜의 목소리가, 처음부터 반란을 꿈꾸며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세웠던 규옥의 목소리가, 그 목소리에 이끌려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동했던 지혜의 목소리가 헛웃음 짓게 했다. 반란의 방식이, 이렇게도 허무해져도 되는가 싶은 기분이었다. 그들이 재미처럼 반항을 하는 것과 부당함에 항의하는 것이 별개의 일인 것처럼 되는 것이 안타까이 느껴졌다. 또한 일상에서 겪는 작은 부당함에 정녕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현실에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서, ‘젊은’ 세대의 합리성이, 규율에 대한 거부가 젊은 세대를 규정하던 것이었음을 생각하면서 씁쓸했다.

  부당함과 불합리함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갑’과 ‘을’의 문제라고 하기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고 하기엔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내는 자의 위치를 규옥으로 정했을 때 지혜가 느끼는 것처럼 일종의 배신감과 허탈함이 들 수밖에 없다. 마치 다른 존재인양 지혜와의 동일선상에 있던 규옥의 위치는 달라지게 되고 부당함에 대한 반격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규옥의 의견은 ‘합리성’ ‘올바름’의 승리가 아니라 태생적 갑의 위치가 있음을, 그것이 개인의 주장을 더욱 힘있게 낼 수 있는 위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거기에다가 규옥의 의견을 동조했던 것에 ‘이성적 끌림’을 더할 때 사실상 그것이 가져올 결말에 대해 예상이 가능하게끔 여겨지게도 된다. 결국 지혜의 스스로의 통렬한 자아반성과 의식을 촉구하는 결말로 나아가는 이야기의 결론도 충분히 예측가능하다. 지혜가 또다른 지혜에게 뒤늦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던 것은 규옥에게서 얻은 용기의 힘일까, 인턴에서 ‘정규직’이 된 힘일까.

  반전과 반란이 있던가. 현실을 생각할 때 서른의 반격에 박수를 보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너무나 큰일들을 겪기에 소설속에 나온 이 정도를 너무 무심하게 별일 아닌 것처럼 여기는 것이 통쾌함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고, 이러한 구조를 그대로 흘러가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다는 걸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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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 2018년 제4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손홍규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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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문학사상사, 2018-01-18.


  나이가 들어가면서 발랄한 문장보다 무심히 파고드는 묵직한 문장에 마음이 오래 머문다. 패스트푸드를 맛깔나게 먹다가도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를 기어이 찾아서 먹는 날 같은. 단편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 수상작은 저녁쯤이면 찾게 되는 찌개 같다. 이야기나 배경의 색다름이 아니라 익숙함이 주는 묵직함에 빠지게 된다.

  각각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수록되었는데 동일한 주제로 글을 쓴 것만 같았다. 각 작품마다 특정한 기억에 사로잡힌 존재들을 보는 듯했다. 기억에 잡히어 갇힌. 그 기억은 마냥 행복하고 좋은 감정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고달픈 현실의 회피로서 자리하는 기억쯤으로 여겨진다. 기억이란 언제나 현재의 일도 미래의 일도 아니니 지난 시간을 돌아볼 땐 언제나 해결치 못한 마음을 건들일 것이다.

  대상 수상작 손홍규의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는 “청년의 어깨에 내려앉았던 늦은 오후의 설핏한 햇살 한 줌”이라거나 “저녁이 기지개를 켰다”는 문자이 주는 해질 무렵의 나른함과 쓸쓸함이 한껏 어리어져 있다. 한껏 지난 시절을 생각하는 불한당 무리들의 현재는 그 과거가 차곡차곡 쌓이어 만든 현실이다. 지금 그들은 기억 어딘가를 돌며 되돌릴 수 없는 그순간의 기억에 빠진다. 되돌아보는 삶은 어찌 후회가 붙지 않는 것이 없는지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울부짖는 마음과 같다.


누군가를 상실한 사람들이 가장 비참하게 돌이켜보는 건, 그이를 상실할 줄 몰랐기 때문에 무심코 떠나보내던 순간의 자신이었다. 갔다 올게 하는 목소리에 응 하고 무심히 대답했던 자신에게 왜 그때 직접 배웅을 해주지 않았는지, 손 한 번 잡아보지 않았는지, 미소를 지어보이지 않았는지,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주지 않았는지, 그토록 사소하기 짝이 없는 행위를 도대체 무슨 이유로 하지 않았는지를 무섭게 따져보기 마련이었다. 청년의 마음속에서는 이런 후회가 잡초처럼 자라나 무성했을 테고 마음에 드리워진 빽빽한 그늘이 빠져나와 주위에 그림자로 드리워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한때는 꿈이 없다라는 말이 그렇게나 쓸쓸하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꿈을 꾸었다는 말이 더 쓸쓸하게 느껴진다. 꿈이 없음은 달라질 수 있음을 내포하지만 꿈을 꾸었다는 그렇지 않음을 이미 종결된 느낌을 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던 시절을 지나니 어느 순간 꿈을 포기하기 위해 애쓰게 되어버렸다.”


  정지아의 <존재의 증명>은 기억상실증인 남자가 등장한다. 기억을 상실한 사람이라면 당연하듯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하기 마련이다. 도대체 낯설기만 한 자신이기에 행동 하나도 자연스러울 수 없다. 나에 대한 타인의 기억과 그들의 말 한마디에 나의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그들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그럼에도 무엇이든 의심스럽기만한 그때에 취향이 자신의 본질을 알려주리라 믿는 남자를 보며 이상하게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정찬의 <새의 시선>과 조해진의 <파종하는 밤>은 각각 용산 참사 사건과 산업화의 폐해인 수은중독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사건의 진실을 새로이 기억하는데 카메라가 사용된다. 각각 사진과 다큐멘터리로 그날을 구성하고 기억한다.


정주는 문득 러시아워에 어깨를 부딪치거나 서로 발을 밟고 밟히는 사이였던, 다시 스쳐 갈 일 없으며 형상이 떠오르지 않는 수천수만의 얼굴들이 그리워졌다. 누구도 정주를 알지 못하며 정주 또한 그들을 모르는 세계에서의 불안과,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나 실상은 아는 것이 없는 세계에서의 안식 가운데 선택을 요하는 문제에 불과했다. 환멸과 친밀은 언제라도 뒤집을 수 있는 값싼 동전의 앙면이었고, 이쪽의 패를 까거나 내장을 꺼내 보이지 않은 채 타인에게서 절대적 믿음과 존경과 호감을 얻어 낼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구병모의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의 문장을 생각하면서 기억이란 마냥 편치 않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했다. 기억이란 기억하고픈 대로 기억하려 해도 명백한 사실을 떠올리게 하기에, 기억 속에서 나의 존재를, 내 삶을 절대적으로 호감으로 구성하려 해도 절대로 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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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의 모든 것 - 2017년 제62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김금희 외 지음 / 현대문학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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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메팅


체스의 모든 것, 현대문학, 2016-12-07.


  한때 체스두기를 좋아했다. 체크메팅! 외쳐대며 즐기던 때가 있었는데 세월 오래 흘렀다고 규칙이 가물가물하다. 장기와 비슷한 룰을 가지고 있는 체스 규칙을 놓고 제법 옥신각신 했는데 누구와 두었는지 어디에서 두었는지 정말 내가 체스를 두기나 했던 건지 그런 체스 장난감을 어떻게 가지고 있었던 건지… 오래되고 묵직한 장기판이 여전히 집에 있는 것을 보면, 장기에 대해서는 생각나는 것이 많은 것을 보면, 장기를 두지 않은지 꽤나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장기룰은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체스는 한순간 잠시 머물다가 사라진 신기루 같기만 하다. 오로지 체크메팅이란 단어만을 남긴. 체크메팅은 나의 말이었을까. 상대방의 말이었을까.

  ‘이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설 속 금화처럼 나는 체스를 두는 순간 오로지 이기기에 몰두했던가. 기껏해야 초등학생이었을 그때 놀이를 즐기지 않고 승리에 집착하고 있었을까. 이십대 국화가 되고픈 이기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이기는 사람’ ‘부끄러운 상태로 그걸 넘어서는 사람’이다. 금화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듯이 행동한다고 여겨지기도 하는 것을 보면 금화는 진정 이기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금화를 바라보는 영지는 “정말 대단히 무심한 애라고 저 무심함은 어딘가 공격적인 데가 있다”고 생각한다. 동아리 선후배 사이인 세 남녀의 관계를 영지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 소설에서 이 셋의 관계는 참 미묘하다.

  

선배는 정말 이해가 안 가요. 아니, 감자는 같이 먹으려고 그렇게 해놓은 것인데 어떻게 감자를 혼자 다 먹을 수가 있나고요. 감자는 그런 게 아니고요, 선배 혼자 맛있게 먹고 말라는 것이 아니고 감자는 우리가 다 먹어야 하고 그렇게 같이 먹으면 좋은 건데 왜 감자를, 그러니까 왜 감자를 그렇게 많이 먹느냐고요!


  감자를 두고 울분을 터뜨리는 금화를 볼 때 분명 무심함이 아닌 ‘공격성’이 느껴진다. 묘하게도 이러한 금화의 모습은 ‘노아 선배’를 향할 때가 많다. 자칫 이성적인 호감에 대한 반어적인 행동인 듯이 여겨질 수도 있을 만큼 금화는 노아 선배와 ‘함께’ 하면서 선배에게만  무심하지 않다. 어쩌면 노아 선배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영지의 시선에서는 금화의 ‘무심하지 않음’을 ‘이성적인 관심’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영지는 둘 사이에서 조정자인 듯 보이지만 없어도 무방한 위치다. 영지는 한번도 체스 게임에 등판하지 못하고 체스를 두는 둘을 지켜보는 존재다.


둘은 여전히 체스에 대해 얘기했지만 체스가 중요한 것 같지는 않았고 체스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의지 같은 것만 남아 있는 듯했다. 나는 그 대화를 들으면서 무슨 대화가 저렇듯 열띠면서도 무시무시하게 공허한가 생각했다. 대체 체스가 뭐라고, 저렇게 싸우는가. 우리 사는 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영지의 공허함은 둘의 대화내용이 아니라, 영지가 체스룰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둘 사이에 ‘함께’하지 못함에서 오는 것 같다. 체스가 중요하지 않아 보여도 체스 규칙을 아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체스가 아닌 대화에도 영지는 끼어들 자리가 없다. 이들에게서 과연 ‘규칙’이란 건 중요한 문제였을까. 금화는 체스협회 표준 규칙처럼 “퍼블릭한 게 아니라 프라이빗한” 저만의 규칙을 내세운다. 표준적인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노아 선배는 늘 ‘특정한 힘’에 굴복한다.

  영지의 생각처럼 체스는 우리 사는 거랑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체스가 뭐라고 이토록 상관있나 싶었다. 아닌듯해도 피할 수 없는 규율이 삶을 붙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어떤 형태로도 체스판을 벗어나지 못하는 삶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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